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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강론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32
분 류 설,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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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명절 ”
 

9-01.     설





1. 정달용 신부 / 2   

2. 김현종 신부 / 3

3. 배문환 신부 / 4

4. 김경식 신부 / 5

5. 성민호 신부 / 6   

6. 강영구 신부 / 9

7. 최인호 작가 / 11

  1.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정달용 신부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속에 하나의 ‘나라’ 하나의 ‘왕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내가 세웠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됩니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내 말을 잘 듣습니다. 내 뜻을 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내가 임금이요, 바로 나 자신이 이 ‘왕국’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의 나라’ 그리고 이러한 ‘나의 왕국’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귀한 것입니다. 더할 수 없이 값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 땀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나라’를 무척 아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왕국’을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나의 나라’를 보다 더 훌륭하고 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바쁘게 뛰어 다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나의 왕국’을 보다 더 강대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눈코 뜰새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 하나의 다른 ‘왕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의 나라’가 나에 의해서 세워진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나의 왕국’이 나의 손에 의해서 건설된 것처럼, ‘하느님의 왕국’은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라’에서는 내가 임금이며, ‘나의 왕국’에서는 내가 왕인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하느님이 임금이며,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하느님이 왕이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라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왕국’을 추구하라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나라’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왕국’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왕국’을 값진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하느님의 나라’를 보다 더 훌륭하고 큰 나라로, 그리고 이 ‘하느님의 왕국’을 보다 더 강대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을 떠나서 우리는 ‘나의 나라’ 그리고 ‘나의 왕국’을 유지하고 보존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 김현종 신부-



새해의 첫날이 밝아 왔습니다. 대지 저 끝에서부터 불게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새 맑은 새 아침의 목소리를 더 높이어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뛰어도 고단치 않는(이사 40, 31)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서로의 사랑을 나누어 가지도록 합시다.



풍속은 의식주에 바탕을 두고 시대의 흐름과 문화의 발달에 따라 변해오고 있으며 여러 천년 전부터 우리에게 있어온 우리의 풍습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속은 대개 신앙의 요소나 오락의 요소, 노동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의 요소는 축원과 감사와 주술적인 성격을 지니며, 오락의 요소는 계몽과 사회나 처첩제도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순수한 향응을 위주로 한 여가 놀이의 성격을 지니며, 노동의 요소는 두레행사, 공익사업을 위한 계절적인 행사 따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설날은 원단, 원일, 원근, 정조라고도 하는데 이는 새해의 첫날, 또 으뜸의 날이라는 뜻이며 해, 달, 날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삼원이라고도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제사 지내는 것을 차례, 새옷을 입는 것을 세장, 친척과 연장자를 찾아다니는 것을 세배, 이때에 오르는 음식을 세찬, 마시는 음식을 세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믐날 밤에는 묵은 세배를 하며, 마을과 가족 단위로 사당을 찾아 참배를 합니다. 이러한 설날에는 아무리 구차한 집이라도 총떡 또는 가래떡을 해 먹는데 그래서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니?”라고도 합니다. 이날에는 함부로 거동하지 않는 습속이 있는데 일년을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날을 근신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설날의 풍속 가운데서 우리는 몇 가지 좋은 것을 찾아내고 지켜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수신의 의미입니다. 이는 일년을 주님의 축복 속에서 무사하게 지낼 수 있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와 기도 드리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 웃어른께 대한 효도와 예의입니다.



우리 자신이 오늘 여기에 있기까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과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지켜봐 주신 웃어른을 이 날만이라도 깨끗이 마련한 옷을 입고 찾아뵙는다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만남의 시간이고,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부모, 형제들을 위해 바쳤던 음식물 대신에 이제 우리는 최고의 제물인 그리스도를 성부께 봉헌하는 미사성제는 더없이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설날을 맞이하여 올 일 년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언제나 사랑과 자비로서 우리를 키워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부모님, 웃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드림으로써 참된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하루가 될 뿐 아니라, 나아가 언제나 예의를 지키고 효도를 다 하겠다는 결심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의 원대한 꿈을 가득 담은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출발의 아침, 사랑으로 출발합시다. 싱싱한 기쁨을 노래합시다.













  3.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 배문한 신부 -





먼저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내리어 새해엔 더욱 평화롭고 명랑한 가정을 이룩하시길 빕니다.

고서에서 설은 ‘신일’(愼日) 혹은 ‘담도’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월의 처음인 上子, 上辰, 上亥날에 모든 일은 忌愼(기신)하여 거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습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년동안에 아무 탈 없이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날은 특히 근신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이날은 조상 영전에 차례를 지내고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며 세화를 문짝에 붙이고 삼재(三災)를 쫒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자손들은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합니다.

그렇다면 조상들의 이 설날은 종교적인 요소를 굉장이 많이 가졌다고 보겠습니다. 좀 양식은 다르달까...... 발전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요 미사성제를 올리는 것은 조상 전래의 전통과 풍습의 근본정신에 부합된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일년을 하늘의 축복 속에 지내기 위하여 이렇게 근신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와 기도 속에 보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돌아가신 부모 형제를 위해서 제물 중의 최고 제물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봉헌하는 미사성제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세상을 떠난 영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술이나 밥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연령을 위로하고 가장 기뻐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방의 예의도덕을 지키며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물론 살아 계신 보모에게도 효도할 것을 결심함이 이날을 의의 깊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음식을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살아 생전의 한 술만 못하다 했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 보모에게 얼마나 효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늙을 때 얼마나 효성있는 아들딸을 갖는가 하는 것이 달려있다는 것도 잊지 맙시다.



옛날 얘기에 늙은 아버지를 고려장을 하려고 산에 묻으러 갔었는데, 조그만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지게는 왜 안 가지고 와요” 하고 묻더랍니다. “지게는 뭣하게” 하니 “아버지 늙으면 또 써야지요”하더라는 얘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풍성히 내릴 것을 빌면서, 구정에 살아 계신 어른이나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효성스런 자녀가 되어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4.          음력 설   마태 6, 19-21 ; 25-34          -김경식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엄동설한을 벗어나면서 설날(구정)을 맞았습니다.

해마다 지켜온 날이지만 이제는 온 겨레와 함께 맞는 새해의 첫날이라기 보다는 한 명절로서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을 맞고 보내던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마음은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집안 어른들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어른들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신 어른들께 차례를 드리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더구나 흩어졌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 자신의 뿌리를 되새기고, 부모 형제 친척들과 정을 다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젖어오신 어른들께서 얼마나 이 날을 기다리셨을까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어린이들이 설날을 기다림보다는 훨씬 더 하리라 여겨집니다.

현대는 고향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핵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기 때문에 어른들의 외로움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이 외로움을 달래드리고 지난날의 상처를 잊게 해드릴 좋은 기회가 바로 오늘과 같은 설날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을 기다리는 분들이 또 계십니다. 연옥에서 하느님의 지엄하신 정의를 채우고 계신 선조들의 기다림은 오직 하나, 우리의 기도와 희생입니다. 이것 외에 그들에게 위로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시든지 돌아 가셨든지 어른들의 바람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의 태도는 좀 더 진지해야 하겠습니다. 치루어야 할 행사로서 설날을 보내지 말고 따뜻한 마음과 겸손한 사랑의 자세를 보여드려야 하겠습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말아라.

 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 받고

 네가 젊고 힘있다고 해서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아비를 잘 섬긴 공은 잊혀지지 않으리니

 네 죄는 용서받고 새 삶을 이룰 것이다.

 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주님께서는 너의 효도를 기억하시겠고

 네 죄의 얼음이 햇볕에 녹듯이

 스러질 것이다” (집회 3, 12 - 15).













 5.              설날       뿌리    

                                                            성민호 신부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오늘은 옛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설날입니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돌아가신 조상들을 추모하고 웃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리며,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혈육의 정을 나누면서 큰 명절로 경축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민속이요 교훈적인 풍습이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은 이날을 명절 중의 명절로서 일년 중 가장 즐겁게 지내왔습니다.

  

그러기에 나라에서도 이날을 공휴일로 설정하여 자꾸만 흐려져 가는 효도사상과 경로사상, 그리고 형제애를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도 빛나는 조상들의 얼을 물려받은 후예답게 이날만은 짬을 내어 고향을 찾게 되고, 돌아가신 조상들과 살아계신 일가 어른들에게 맞갖은 예의를 바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얽매인 현대생활 속에서도 만사를 제쳐놓고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 조상들이 물려준 고귀한 정신이 우리들 핏속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세상살이에 몰두하다가 그만 본의 아니게 잠시 잊었던 부모를 찾아뵙는 효심이나, 어쩔 수 없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조반이라는 나누는 기쁨이나,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언제나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조상들을 추모하는 일이나 모두 다 흐뭇한 삶의 보람이며 생활의 미덕입니다.

  

이처럼 설날은 평소에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우리에게 여간 고마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특별히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면서 우애를 돈독히 하는 날이며, 우리의 뿌리인 조상들의 고마움을 추모하는 날인 동시에 살아있는 웃어른들에게 효도와 존경을 다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조상들에게는 차례와 성묘를 바치고 어른들에게는 세배와 큰상을 차려드림으로써 최대의 예우를 바쳐야 합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조상께 대한 존경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이 대단하였습니다.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궁색한 생활을 할망정, 때 맞추어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비록 생업에 바빠 다른 때에는 별로 조상을 생각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설날이 오면 조상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이날만은 그들의 은덕을 추모하고 감사와 존경을 바쳤으며 저 세상에서나마 이 세상에 있는 자손들과 함께 있어주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조상 이야기를 한다거나, 삼강오륜을 들먹이면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라고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기야 핵가족으로 번져가는 세상에 살아있는 부모도 잊어버리는 판국인데, 죽은 조상까지 기억한다는 것이 번거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잘되면 자기에게 돌리고 잘못되면 조상을 탓하면서 그들이 물려준 것이 무어냐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삶을 이어준 조상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같은 혈통을 이어준 우리의 뿌리와 어찌 무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나무 뿌리와 가지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땅속에 묻혀있는 조상과 세상에 사는 우리도 사실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다고 뿌리를 무시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대를 이어준 조상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유업을 기리고 그들의 유산을 발전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조상을 위한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 자기의 조상을 추적하여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뿌리」라는 소설과 영화가 세계적으로 대단한 관심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공감을 샀습니다. 그것은 조상께 대한 뿌리의식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재발견하여 후대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생명을 이어준 조상들을 차례로 찾다보면, 마침내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원 뿌리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조상공경과 더불어 뿌리의식을 강조하는 설날의 관습이야말로 분명히 신앙과도 일맥상통하며 교회의 정신과도 부합합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야훼를 찾아라. 옆에 와 계신다."는 이사야의 말을 전해주고 있으며,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살아있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면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입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라 하더라도 이날만은 고향을 찾아가 부모에게 효도를 바치고 일가 어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며 형제들과 우애를 다짐하면서 모두가 한 혈육임을 체험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미풍양속이며 길이길이 보존하고 후대에 넘겨주어야 할 전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우리는 이웃 모두가 다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가장 관심있게 대해주신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 약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과 형제애를 굳건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은 명절 때마다 강조되고 있는 불우이웃 돕기를 앞장서서 실천해야 할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찾아서 인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일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세상 걱정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설날의 정신을 생활화하는 것, 다시 말해서 조상들을 기억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들과 우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최상의 아버지로 섬기는 일이 곧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설날이면 누구나 다 한다고 해서 그저 형식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부모에게 세배를 드리고 어려운 이웃에게 약간의 온정을 베푼다고 우리의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무를 1년 동안 계속해서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즐거운 설날을 맞이하여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시거나, 웃어른들에게 맞갖은 예의와 존경을 드리면서, 우리의 모든 혈육이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항상 평안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훗날 하늘고향에서 우리 모두가 다시 만나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한 잔치를 벌일 날을 기약합시다.













6.          설 대축일  민수 <루가 12, 35-40>  벽사 초복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인 설날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올 한 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또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대축일로 정하고 우리 겨레 모두와 함께 설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합니다. 설 혹은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 씁니다.



설날 곧 신일이란 근신하여 경거 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우리의 조상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그 해의 운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입니다. 그래

서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한 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이름을 짓고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하고 바르게 가짐으로써, 벽사초복(辟邪招福), 즉 사악함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설날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경거 망동하여 화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리길이 멀다 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조상들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찾음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텃밭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고향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고, 친척과 가족들, 그리고 정답던 이웃들이 살던 곳입니다. 고향, 바로 그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합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 하지만, 그러나 타향은 남남이 모여서 사는 곳입니다. 타향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끈끈한 인정으로 서로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았던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 안에서 나는 조상들의 후손이며, 한 가족의 대를 이어 온 사람이며, 아버지이며, 아저씨이며, 그리고 자식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며 아늑할 뿐 아니라 나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것은, 그곳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명절이면 조상들을 위한 차례를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상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그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로부터 충효(忠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제사를 통해서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과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법을 터득하게 했던 것입니다.

  정조 차례(正朝茶禮), 즉 설날 아침에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웃어른들에게 새해의 첫 인사를 큰절로써 올렸는데, 이것을 세배라고 합니다. 이 세배 역시 우리 자신들이 누구이며, 또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랫사람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절 값과 더불어서 덕담(德談)으로 아랫사람들에게 한 해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그리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풍습을 잘 지키고 따를 때,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거 망동으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륜 도덕의 타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이 땅의 인륜 도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좋은 풍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분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주인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은 참으로 축복받을 종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동한다면 주인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종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그 위치에서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종다운 생활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人間이라는 글자가 잘 말해 주듯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여기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이런 관계를 바르게 해주는 축복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절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우리 조상들은 오늘 우리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물론이지만 살아 계신 부모님들을 잘 모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의를 나누는 데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만큼 철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명절을 잘 지냄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온갖 사조와 풍물들이 밀려와도 우리가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본받아서, 우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종다운 삶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일입니다.

  

오늘 설날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려서 올 한 해는 모두 건강하시고 또 소망하시는 일들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7.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새로운 천년대가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시 증가할 것 같아 우려됩니다. 특히 여러 가지 사회불안 요소와 이상 기후 및 자연재해,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등에 편승해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습니다.



일부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이란 예수님의 재림 연대를 정해놓고 세상의 역사를 그때까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 날짜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종말이 언제 오는지 알 수 있다는 근거로 다음의 성서구절을 인용하지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1데살 5,4).



아울러 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6일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답니다. 1일은 천년을 의미하는데, 6일 즉 6000년이 지난 다음 쉬게 되는 것,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지창조부터 매 천년마다 중요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즉 1000년에는 노아가 탄생했고, 2000년에는 아브라함이, 3000년에는 모세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000년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데, 그 후 2000년이 되는 시기, 즉 창조 후 6000년에 종말이 오며, 이후 1000년 동안은 천년왕국이 지속된다는 주장이지요.



특히 그들은 종말 전에 대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1992년에도 휴거(携擧)소동이 있지 않았습니까? 종말에 믿음이 있는 자들은 휴거, 즉 하늘로 ‘들려 올려지고’ 그 외의 모든 피조물들은 7년 대 환란을 거쳐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는 그들의 주장입니다.



당시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계시에 의하면 1999년에 최후의 심판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 전에 먼저 7년 동안의 환란이 있을 것이며, 그 시작은 1999년의 7년 전, 즉 1992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1데살 4,17)라는 구절을 임의로 해석하여 휴거가 있을 거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이 끝이 아니요 결국은 하느님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니, 그날을 위해 깨어 있으라는 격려이자 위로였습니다(1데살 5,1-10 참조).



우리가 알다시피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계속하여 주장해왔던 종말의 날짜는 하나도 맞지 않았지요. 이에 그들은 ‘성서 해석을 잘못하여 날짜 계산이 잘못되었는데, 사실은 언제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또는 ‘원래 날짜는 맞는데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했기에 하느님께서 얼마간 연장해주신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날이 올 테니까 준비하라’라고 변명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4,36). 그럼에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특은을 받아 그 날을 안다고 주장한답니다.



종말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종말신앙은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고 완전함에 이르게 되리라는 하느님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우리들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재림은 파멸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완성을 가져다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더욱 성실한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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