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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14일 (금) 10:01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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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모음 ”
 

주님 수난 성지주일





        1. 두봉 주교(가)/2                 2. 장덕호 신부(가)/3

        3. 김몽은 신부(가)/4                     4. 조순창 신부(가)/5

        5. 권혁시 신부(가)/7                     6. 김정진 신부(가)/8

        7. 김현준 신부(가)/10                    8. 박규식 신부(가)/12

        9. 강길웅 신부(가)/13                    10. 변희선 신부(가)/15

        11. 예수 수난기/17                 12. 예수 수난기/17

        13. 최인호/21                               14. 헌혈을 자청/22



1.     사순 제6주일(성지주일) 예수의 수난과 신앙인의 삶

두봉 주교



◎ 남의 잘못, 온유한 마음으로 고쳐줘야



사순절 때 많이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다. 요즘에는 14처로 되어 있는 ꡐ십자가의 길ꡑ이 아닌 15처로 되어있는 ꡐ십자가의 길ꡑ도 자주 바친다고 한다. 15처는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한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의 부활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수난이 부활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은총의 해, 대희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묵상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수난을 스스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면서도 고통을 꺼려하며 피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다. 밤이 없으면 낮도 없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고통은 생명의 새싹이 움트는 밑거름 같은 것이다. 시련을 단지 저항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성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ꡒ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ꡓ(1고린 10, 13)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그 누구도 탓하지 않으셨다. 오직 용서뿐이셨다. 용서는 악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방법이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면 악이 많아질 수밖에 없지만 악을 선으로 포용할 때 악은 녹아버린다. 용서가 악을 이기는 것은 마치 핏속에 들어있는 백혈구가 병균을 막을 때 싸우거나 무력을 쓰지 않고 푹 껴안아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먼저 용서를 청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라도 용서하고 베풀면서 상대방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용서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은 예수님처럼 행동으로 용서할 수 있고 침묵으로도 용서할 수 있다. 또 상대방을 좋게 타일러 주는 것도 용서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ꡒ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ꡓ(갈라 6, 1) ꡒ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ꡓ(골로 3, 16)

용서는 남의 잘못을 눈감는다든지 봐준다든지 하는,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안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이기는 것이다. 수난하시는 주님, 고맙습니다. 저희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대희년의 부활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사순 제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장덕호 신부



“민심은 천심이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양심을 통하여 말하여 주는 것이고 선한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엄위하신 지위를 감추시고 비천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어 우리와 함께 고통의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상 제물이 되실 때까지 수난과 희생과 봉사와 고통의 일생이었습니다.



공생활이 시작된 이후 예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자주 자주 드러내셨으니 이는 권세와 부귀와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허약하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불쌍한 서민들을 위하여, 병을 고쳐 주시고 죽은 이를 다시 살려 주시고 억울한 이들을 풀어주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천대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그분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고, 그분의 말씀을 한 번이라도 듣고 싶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다니는 군중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지방을 순회하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병자들에게 생기를, 불목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죽은 이들에게 부활을,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을 전하시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게 되니 착한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길거리에 마중 나와 자기의 겉옷을 땅에 깔고 승리의 표상인 빨마 가지를 손에 손에 들고 “예수님 만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큰 자비를 베푸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온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리라, 진리로써 백성을 다스리리라, 우리는 살았다. 예수님 만세!”하고 환호하였습니다.



길은 메워지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합니다. 착한 백성들이 참으로 기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권력과 부귀와 값싼 명성을 지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제관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뒷짐을 지고 멀리서 이 같은 광경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큰일났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르고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위대한 왕으로 추대하며 경외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장차 어떻게 될까?”하며 공연한 걱정을 하면서 도리어 마음이 간악하여 갖은 수단과 술책을 사용하여서라도 예수를 없애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또한 선량한 백성들을 트집잡아 위협하고 세금으로 억누르고 감언이설로 매수하여 빌라도에게 고발하기에 이르렀으니, 법정에 나타난 예수를 보고 “우리는 이 사람이 백성들에게 소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여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못 바치게 하고 자칭 그리스도다, 왕이다 하며 돌아다니기에 붙잡아 왔습니다”(루가 23,2)하고 고발하여 빌라도는 예수가 잘못이 없는 줄 잘 알면서도 체면과 자리가 혹 위태로울까 두려워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이같이 세속의 권세와 부귀와 시기와 부정부패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수님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태 27,22)하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의와 진리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권세와 부귀에 아부하고 감언이설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자신을 반성하고 현실을 직시합시다. 정의는 사라지고 진리는 배척 당하고 부귀영화는 우리를 유혹하고 권세는 온갖 방법으로 위협하고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는 현실에서 나의 발길을 어디로 향하고있습니까?



“나는 그이를 알지도 못합니다.”(마태 26,74)하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의 태도와 우리 자신의 현재를 비교해 봅시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뒤따르는 그분의 참 제자들입니까? 굳은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며, 정의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승리할 것입니다.











3.   사순 제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케 한다. 우리는 이 복음의 대목을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과 함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금할 길 없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 옛날 불신의 죄가일 뿐 아니라, 현대의 불신도 역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의 무책임하고도 비겁한 행위가 얼마나 크고도 엄청난 과오를 빚어냈는가를 생각할 때 오늘날의 이 현실 하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채찍질하는 새로운 음성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하느님을 모독한 것이라 하여 잡아죽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것은 표면상에 나타난 종교적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좀 더 비겁한 생각, 즉 자신들의 권위와 위신이 예수님으로 하여 추락된 데 대한 개인적인 보복행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에게는 예수님을 잡아죽일 권한이 없었으므로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유다의 왕’이라 자칭한다고 하여, 로마의 황제에 대해 반역을 꾀했다는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그 당시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예수의 처형을 요청하도록 고발했던 것이다. 지극히 비열하고도 파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빌라도 역시 소심하고도 비열한 정치가로서, 자신의 위치도 인기가 떨어질까봐, 유다인들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죄없는 예수님을 유다인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로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물론 손을 씻었다 해서, 그 더러운 범죄적 행위가 씻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는 무서운 역사적 사실로 오래도록 인류사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오늘의 복음에서는 배신자 유다의 자살,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처형케 한 군중들의 정견 없는 부화뇌동, 골고타 산상에서의 왼쪽 도둑의 저주 등을 루가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4.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조순창 신부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빠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성지 주일입니다.



죄를 지어서 하느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류는 불신과 미움, 탐욕과 이기심, 어둠과 절망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불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저버릴 수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구세주를 보내셔서 행복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극진한 사랑 때문에, 고통과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기에 이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는 길에 겉옷을 벗어 깔아 놓고, 손에는 빨마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 소리도 우렁차게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수일 후에 몇몇 선동자들의 음모에 휘말려 죄 없는 의인,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는 불의한 재판에 가담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침으로서 변절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메시아를 배척한 그들은 아직도 구세주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배은망덕과 거짓과 미움의 결과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축성한 나무 가지를 손에 받아 들고서 예수님의 입성을 기념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려는 각오를 새롭게 하시는 교우 여러분!

간사한 변절로 잠시의 이복을 믿기보다는, 마지막 불변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의 외길을 꾸준히 달려가는 자세로,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어느 경우라도 변치 않기로 다짐하고, 신자로서의 신앙의 외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 약속드립시다.



철부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얼굴과 손을 불에 데어서 화상의 흉터가 심하여 누구에게나 부끄러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고, 그래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어머니의 흉한 모습은 자기가 갓 낫을 때 집에 불이 났었는데, 목숨을 걸고 불 속에 뛰어들어, 말짱하게 자기를 구해낼 때에 얻은 흉터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지난 일을 반성하고 오히려 그 흉터가 자랑스러웠고, 어머니의 사랑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은 우리에게 어리석음이나 부끄러움이나 무능한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장한 상처요, 우리의 행복과 평화와 구원을 위한 지혜가 십자가 안에 있고, 우리를 사랑하신 자랑스러운 모습이요, 십자가가 구원의 열쇠입니다.



하나인 것은 언제나 하나인 것이어야 하며, 좋은 것이 모두 내 것일 수 없는 것이라면, 부모님이 마음에 안 맞거나, 자녀가 불효하거나, 부부가 불화하거나, 친구가 의리가 없어도, 서로의 관계를 끊을 수 없기에, 이해와 사랑과 희생으로 좋게 변화시켜 가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장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면, 우리 모두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하느님 믿는 길에 평탄할 때에 잊어버리고, 괴로울 때 조건부를 찾고, 내 뜻에 어긋나면 내던지는 신앙이 아니라, 햇빛이 온 누리를 비추듯,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순리 가운데 생명과 같은 산 신앙으로 하느님 사랑 안에 숨쉬고 일하고 살아갑시다.



그래서 어떤 역경이나 불행이나 죽음 앞에서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일편 단심 하느님 뜻만 따라 삶으로써 오늘의 보람과 내일의 희망과 영원한 부활을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5.     사순 제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권혁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관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유대인은 일편단심 팔레스티나에서 로마의 세력을 축출하고 독립 국가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래서 국수주의자들은 반국가 주의자들에 대해 암살을 꾀하여 늘 비수를 품고 다녔으므로 ‘자객’이라 불렸습니다. 유다도 그런 유의 애국자 중 한 명으로서 예수께서 반란의 지도자가 되길 원했으나 예수님의 바보스런 십자가의 실패로 그를 미워했고 실망을 했습니다. 또한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늘 예수와 동행했으며 따라서 그의 초인적인 모든 이적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초인적인 능력을 본 유다는 예수님이 원수들 손에 잡히거나 더더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유대 민족의 독립을 제촉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으리라고 말씀 하셨으니 열혈당원인 유다는 오죽이나 실망하였으며 한탄했겠습니까!



한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우스로 가는 두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큰 실망을 안겨준 십자가의 사건을 얘기하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있어서 큰 능력을 나타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관들과 우리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실로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우리가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라는 말에서와 같이 그들의 바람은 모두 로마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줄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지만 보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예수님 시대에만 몽매한 자들이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는 누구이며 대제관들은 누구입니까? 현대를 보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철저하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명대로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예수 그리스도, 이 모든 이들은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사랑을 위해 투쟁했으며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기에만 몰두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눈앞에 보이는 달콤하고 쾌락적이고 현세적인 가치만을 추구했기에 여기서 충돌이 나오며 급기야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살인을 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철저하게 위하신 주님은 이교도들로부터 버림과 조소를 받는 십자가상의 바보이십니다.

확실히 주님은 십자가의 정도를 따라 살았으니 불의 부정과 야합하며 적당주의로 쉽게 살아가려는 자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작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우리 인생은 바야흐로 즐기는 찰라주의 뿐이니 진리니, 인간성이 어떠니, 양심이니 하며 생활하다가 험하고 가파른 저 골고타의 정상에 고독하게 매어 달려 사는 것보다는 돈과 쾌락이면 인생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즉 생활에서 오는 십자가 대신 돈과 쾌락에 자신을 묶어 버리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서울의 중심가 미도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다면 지나가는 행인들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라. 남을 살리면서 자기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구나.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하지는 않겠습니까? 끊임없이 당하기만 하고 어쩌면 그다지도 패하기만 하시니 과연 십자가는 무엇을 해결하여 줍니까? 어떤 이는 조롱하는 말투로, 어떤 자는 현세적인 복을 얻고자 하는 등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십자가 밑에서 떠들어댈 것입니다.



아니 진정 하실 말씀이 없는 것 같은 주님! 침묵의 섭리를 사랑의 심연이란 말입니까? 십자가상에 계신 그리스도는 철없는 아이처럼 소란을 피우는 인간들을 보고 얼마나 애통하셨고 근심하셨으며 홀로 군중 속에서 떨어져 고독감을 맛보셔야만 했습니까. 이렇다할 까닭도 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우선 자기가 하느님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편안할 때는 하느님을 잊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몽땅 쏟으셨습니까? 우리는 근심이 있을 때도 십자가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때도 십자가의 예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일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맞는 예수 그리스로 변하게 하려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고통에서 변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바보스런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과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목적을 위해 불리워질 수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목적에 쓰여지게 우리 자신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간화를 원하지 말고 인간의 그리스도화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이요 구원이 될 것입니다.











6.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김정진 신부



우리 신자들은 사순절 시초부터 속죄의 행위와 고행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마음을 준비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빠스카 신비인 주님의 수난과 그 부활을 미리 준비해 온 셈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보음에는 예수님은 많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흐뭇한 말씀이 나옵니다. 백성들이 왕으로 모시려고 할 적에도 극력 사양하시던 예수님이 오늘만큼은 군중들의 영접을 받으시는 까닭은, 얼마 안 있으면 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돌아가시는 것이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 전체의 구원이란 대사업을 이룩하심을 보여 주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 이 고마우신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축하드리며 아울러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은총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갈이 걸으며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한 몫을 차지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생각하고 그 수난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수고 수난에 관해서 자상하게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에 있어서 고통을 참아 견딘다는 것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순교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으로 기쁨 속에 미소를 띠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만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태도를 지극히 솔직하게 묘사합니다. 가령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수난과 죽음을 보시고 심통의 땀을 흘리시고 몹시 공포에 떠시며 땅에 부복하여 성부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이 때의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영웅적인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공포에 떨었습니다만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전율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점이야말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있어 매우 가까이할 수 있는 친밀성을 안겨 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성 마태오 복음사가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모습을 솔직하게 묘사해 줍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최고 절정인 임종의 세 시간에 일어난 일들을 자상하게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였다는 십자가의 깊은 뜻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구해 주었고 심지어는 죽는 사람들까지 세 번이나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그러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 만일 원하신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원수들을 전멸시킬 수 있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당신의 목숨을 구하셨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을 계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의 길을 걷게 하려는 당신의 사명을 포기한 것이 되겠습니다. 사랑의 길을 최후 순간까지 걸음으로써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거기에 바로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억누르고 포기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어 우리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을 똑똑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흘러내리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 똑똑히 나타났습니다. 즉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죽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나서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마태 27,53).



그뿐이겠습니까? 로마 군인의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지진과 그밖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태 27,54)하며 절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의 백부장이 이방 세계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상에서 목숨을 다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모습과 순수한 사랑의 계시와 인간에게 사랑의 길을 걷게 함으로써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과 사랑의 승리를 만천하에 공포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야말로 정녕 우리의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결정적인 승리라 하겠습니다.











7.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1,1-11/26,14-27,66 (가)

김현준 신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모든 때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태어날 때, 결혼할 때, 죽을 때가 가장 중요하고 기념되는 날이라고 한다.

이 순간들이 중요하고 기념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출생의 순간에 사람은 생명체로서의 삶을 시작하며 결혼의 순간에 사람은 둘이 하나되어 가정을 이루고, 죽음의 순간에 사람은 새로운 형태의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성주간(聖週間)이 시작된다. 일년중 가장 크게 기념할 축일이 부활 대축일이라면, 1년 54주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한 주간이 성주간이다. 성주간은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마지막 한 주간으로서, 인류의 구원 사업을 이룩하신 때이며, 그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교회 전례의 정점을 이루는 때이다. 

  

성주간의 시작인 오늘은, 이름도 두개, 복음도 두 번 듣는 주일이다. 성지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도 부르며, 이 둘을 합해 주의 수난 성지주일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미사 전 '주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에서 축복한 성지(聖枝)를 손에 들고 마태오 21, 1-11을 들으며, 미사 때에는 마태오의 수난기를 듣는다.

  

우리는 이 두번의 복음 안에서, 환영을 받으시고 배척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서로 다른 두 모습의 군중을 보게 된다. 군중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 깔고 겉옷까지도 벗어 길에 펴놓으며 예수님을

환영하여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마태 21, 9)를 외치나,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세우고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태 27,22)를 소리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군중들의 모습이, 그 장소와 외치는 소리는 다르지만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군중들의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또한 그 군중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들처럼 자신에게 유리하고 마음에 맞으면 두손들어 환영하고, 불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외면한다, 때론 저주까지도 한다.



군중들의 환영과 배척

그것이 사실이냐, 진리이냐에 관계없이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은 ‘나'라는 자신이 처한 처지에 따라, 이익이냐 손해냐에 따라, 유리하냐 불리하냐에 따라 환영과 배척을 마음대로 하는 우리 사람들에게 한마디하신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26, 34)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울어라."(루가 23,28. 제8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한 사람이 아쉽고, 한마디 위로가 너무도 고마운 처지인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어떤 감상에서 나오는 울음이 아닌 참답게 남을 이해하는 눈물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참답게 자신을 울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가난을 설명해주는 사람보다'그 가난을 함께 나누는 사람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의 환영과 배척이라는, 이 서로 다른 두 모습을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이 양면성은 우리 안에 늘상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양면성, 즉 사랑과 미움, 봉사와 이기심, 헌신과 질투를 굳이 부인할 필요 없이 오히려 겸허하게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울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수난의 길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참답게 자기 자신을 울어나가는 과정, 감루연습(感淚練習)을 할 때, 십자가 길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울어야 한다"



어느 시인은 이 눈물을 '기도'와 연결시켜 보게 한다.

하느님, 나를 이유 없이 울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눈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죽어서는

그들의 눈물로 지내게 하소서.(마종기 '기도')

  

사람은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을 때 눈물을 흘린다. 특히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비 오는 날의 한가닥 햇살처럼 눈물을 흘린다. 자기 자신을 참답게 울어나가는 감루를 흘리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주간,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마지막 한주간 동안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과 눈물로 대화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8.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66 (가)  골고타를 오르신 예수

박규식 신부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끌고온 나귀 등에 올라 예수님께서는 구원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분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 환성을 올리며 환영합니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배고픈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고통스러운 질병에서 치유되기를 기대하며 호기심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 환성이 얼마 뒤에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는 저주의 소리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수많은 병자들을 한 말씀으로 고쳐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주시기 싫으면 안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었더라면 그렇게 심한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예수님에게 무엇이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는지 더욱 궁금합니다. 그 해답은 우리들 각자가 찾아야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억울하게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풍요로워지고 육체적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시기에 예수님께서 몸소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신 건 바로 하느님의 기대에 응답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 고백하며 따르고 있는 우리들 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봅시다.

우리들도 그때 그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현세적인 행복을 기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는지 생각해봅시다. 이제 우리들도 인간적인 기대를 뒤로 하고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위해 골고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9.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고난이라는 병과 축복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0,4-7 (나는 욕설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는다.) 

제2독서 필립 2,6-11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

복 음 마태 26,14-27,6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맺힌 절규는 고통에 찌들린 우리 모든 인생들의 외침을 대변해 줍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언젠가 우리도 주님과 똑같은 기도를 바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언젠가 우리도 똑같은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쓰라린 외침은 바로 나의 목소리이며 또한 모든 이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백성들은 “호산나!"하면서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열렬하게 환영했으나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면서 예수의 처형을 지지했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어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주님을 버렸으나 아버지 하느님만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 해도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지상의 현실로는 불행과 비극으로 보이는 경우 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 안에서의 축복과 은총은 눈물과 슬픔으로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지 결코 하느님이 그를 버리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늙은 아브라함이 나이 백 살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을 때는 그 아들 하나에 아브라함의 미래와 생명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무서운 말씀이 전해졌을 때, 아브라함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 졌다가는 상인들에게 팔려갔고, 나중엔 에집트인의 종이 되어서는 악의 도전을 수없이 받다가 끝내는 감옥에 들어가서 기약없는 고생을 합니다. 억울한 삶을 외롭게 걸어갑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셉 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포기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다 잃었다고 여겼으나 하느님은 더 크게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판단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고난의 그 껍데기만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고난 그 속에 감추어진 축복의 소중한 알맹이를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부귀와 영화만이 축복이요 은혜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나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의 불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십자가를 내던지고 골고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에 올라서서 그 위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의 인생은 거기서 끝장이 났으며 삶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전도사업은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그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 밤이 길다고 여기고 있을 때 새벽은 어느덧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을 박차고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은 이처럼 자기를 포기하는 죽음과 고난 속에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자 농부들이 땅에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씨앗, 이것은 작년에 죽었던 식물의 열매입니다. 이제 그 씨앗 하나가 땅속에 묻혀 썩게 되면 바로 그 죽은 씨앗에서 새 생명이 터져 나옵니다. 이처럼 사람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죽음의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새벽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원리를 실생활에서도 적용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 양보와 희생은 자신을 죽이고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보답이 없다면 인간의 고통 과 슬픔의 의미는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파괴 뒤에 새로 운 건설이 없다면 자신을 포기한 그 고독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두 형제가 재산 문제로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이제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형이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모든 것을 동생에게 양보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동생도 그 재산을 포기하고 형에게 양보함으로써 동기간의 우의를 되찾았습니다. 그러자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신앙은 주님과의 만남이며 은혜와의 만남입니다. 축복과의 만남이며 진리와 생명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그 어느 것 하나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그 희생,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로 올라가는 그 고난에서만이 부활의 참된 승리는 주어집니다.











10.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호산나 다윗의후손,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변희선 신부


오늘 우리는 예수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과 모의하여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 넘기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무덤을 경비병들이 지키는 이야기까지를 담고 있는 주의 수난기를 묵상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감동적이며,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예수님님의 수난 이야기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 :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전형이다.



사제들과 원로들 : 이들은 당시에 누리던 기득권과 권위를 지키려고 의로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베드로와 제자들 : 베드로는 예수님님의 수제자로서 나름대로 스승을 따르려고 애쓰지만 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제야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몹시 운다.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도망 가버린다



총독 빌라도 : 그는 전형적인 관료이자 정치꾼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름대로 양심은 살아있지만, 의인을 살리기 위하여 정치적인 불이익을 감수할 마음은 없다. 단지 자신의 손을 씻고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빌라도의 아내는 꿈자리 이야기를 하며 남편에게 충고한다.



군중들 : 예수님의 기적을 믿고 따랐으며, 자기들의 왕으로까지 모시려했던 사람들이건만, 권력과 무력 앞에서 순응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분노와 좌절한 나머지, 강도 바라빠 대신 예수를 죽이라고 외친다. 이들은 자기 기만에 빠진 군중의 우매함을 잘 들어내고 있다.



병사들 : 이들은 권력의 충복이면서도 예수님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 비참한 죽음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잡수입(예수님의 옷)을 챙긴다.



여인들 :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 장면까지 따라와서 지켜본다. 많은 남성 제자들보다 더 의리 있고 용기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 아니던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 간교한 이들은 예수님의 명패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예수님이 사흘 후에 부활한다는 소문에 두려운 나머지 무덤을 단단히 지키도록 조처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음모를 끝까지 정당화하려 한다.



주 예수님 :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치신다 결국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신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려는 주의 수난기는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명백히 보여준다.

배신자 유다의 모습, 베드로의 모습, 대사제들과 바리사이과 사람들의 모습, 총독 빌라도와 그의 아내의 모습, 군중들의 모습, 로마 병사들의 모습,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의 모습 등을 통하여 인간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과연 나는 어느 부류의 모습을 하고 있나? 내가 만일 예수님의 수난을 직접 목격했더라면 어떠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가졌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제기해보자.

  

더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참 모습에 관한 질문들이다. 예수님인 겪어야만 했던 인간의 처절하고, 비겁하고, 잔인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외롭고, 차갑고, 냉정하고, 비열하고, 몸서리치고, 악독한 모습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악들을 철저하게 만나고, 체험하신다.

그 죄악들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과 절망의 심연을 처절하게 겪어야만했다. 그분은 이렇게 절규하신다.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제 죽음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느님의 구원은 더 더욱 목마르고 애타게 기다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희망과 절망의 모순을 넘어선 신앙적 희망의 기도를 드려야할 것이다. 「주 하느님!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저희들이 부활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11.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선택받은 유다인들은 약속된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막상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영접하지 않은 채 나자렛에서 30년 동안 묻혀 계시게 하였다. 그리고 공생활을 시작한 지 근 3년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답게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온 유다인들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타신 나귀의 발목가지도 흙이 묻지 않게 그들이 입었던 옷까지 벗어 깔아 드렸다. 이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며칠 후에 그토록 환영했던 메시아를 까닭 없이 매도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외쳐댔다. 삽시간에 그들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만 것이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먹이고 기르며 영생의 길을 가르치고 모든 병을 고쳐 주셨다. 자신의 살과 피도 남김없이 주시고 정말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사랑, 그것 하나로 일생을 보내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쩌자고 천하의 대죄인 같이 극형으로 죽였는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 백성아,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으로 너를 근심케 하였더냐? 대답해 다오”(성 금요일 전례). 또 이런 말도 하셨다.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3) 내게 무슨 변명의 말이 남아 있을까?



주님은 우리에게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마음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 더구나 일시적이지만 베드로 같이 배반하지 않는 마음을 갈망하신다. 당신 자신이 변함 없고 배반하지 않고 도리어 놀랄 정도로 충실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때나 어디서나 어떤 조건에라도 꾸준한 충성을 바쳐 계속 환영하는 유다인이 되도록 하자. 그러면 그분도 우리를 천국의 문전에서 환영해 주실 것이다.











12.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66 (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재판소에서 총독관저 마당으로 나온 예수에게 네 명의 옥졸이 터진 살에 늘러 붙은 붉은 누더기를 벗기고 갖은 모욕을 퍼부으면서 천한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관도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이는 민중의 욕설과 조롱거리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옥사장들은 예수를 더욱 흉악한 죄인으로 보이기 위하여 십자가형의 선고를 받은 다른 두 도적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예수와 함께 처형하기로 하였습니다. 수형자는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형장까지 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로 십자형을 만든 것으로 세로는 약 10척이오, 가로는 세로의 3분의 2가 되는 길이였습니다. 많은 피를 흘렸고 피로와 고통으로 기진맥진한 예수, 특히 지독한 태형을 받은 예수로서는 이 십자가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모욕의 상징으로서 노예, 죄의 낙인을 찍힌 자, 도적, 살인, 화폐위조 등 중죄인의 처형에 사용하는 형구인데, 이것을 예수의 어깨에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한마디의 원망도 없이, 다만 사랑으로써 이 치욕의 십자가를 받아 지셨습니다. 예수의 어깨에 짊어진 이 십자가는 모든 나무 중에 가장 귀중한 나무였습니다. 세상을 구속한 나무요, 가장 찬란한 승리의 트로피요, 왕중왕의 지팡이인 것입니다.



행렬의 출발을 재촉하는 나팔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수형자는 옥졸에게 끌려 무수한 민중의 틈을 헤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수한 민중은 미친 사람 같이 그 행렬을 맞이하였습니다. 특히 자관을 쓴 왕 메시아를 가리키면서 들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선두에 선 앞잡이가 연도에서 구경하는 관중에게 수형자의 이름과 죄상을 주지시키면서 걸어갑니다. 다음에는 질서를 유지하고 행렬의 통로를 열어주기 위하여 로마병이 들어섰습니다.



그 뒤에는 대인과 아이들까지 밧줄, 사다리, 못, 장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일 명패 등을 가지고 따라갑니다. 그들의 뒤에도 도적이 서로 예수님께서 맨발로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넘어질 때 같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땀과 피에 젖은 몸이,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참으면서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긴 외투자락을 걷어올리면서 너무도 힘겨워하시며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워진 머리털은 흩어져 얼굴을 덮고 펄럭거렸으며, 피가 말라붙은 얼굴과 수염은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졸들은 예수의 허리띠에 매어놓은 오랏줄을 잡아당기어 빨리 가기를 재촉하며 걸음을 빨리 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무고한 어린 양 같이 아무 말도 없이 저들의 극악무도한 학대를 참아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에는 사랑과 인내의 숭고한 표현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주위에는 그 맹수 같은 적, 즉 백부장, 백성의 장로, 또 여러 번 예수께 논박과 꾸지람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 갚을 때가 왔다고 싱글벙글 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랐습니다. 저들은 서로 바꾸어 가면서 예수께 가까이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예수의 예언과 기적을 조소하였습니다. 맨 뒤에는 말을 탄 백부장이 지휘하는 병졸 일대가 아침부터 유혈 구경을 하려고 형장으로 몰려가는 무수한 노예, 노동자, 무뢰한들을 단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노상에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발을 멈추고 예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옥졸들은 예수께 폭행을 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중풍환자를 걸어다니게 한 자가 자기는 일어서지도 못하는구나 하면서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병졸들의 부축을 받아 다시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에프라임의 이 큰길을 진행하였을 때 가슴이 저린 정경이 전개되었습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한 부인 예수의 모친이 두어 명의 친구와 함께 예수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만나 최후의 작별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으리라. 병졸들과 못, 장도리 같은 것을 가진 자의 뒤에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두 도적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요? 검푸른 얼굴에 핏줄이 보이는 두 분, 파랗게 일그러진 입, 이 모양을 보는 순간 성모는 두 손을 벌리고 예수께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졸들은 억센 손으로 성모를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자주 걸음을 멈추며 마리아께 눈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애정에 넘치는 그 눈은 모친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모친 마리아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자 동반한 부인들이 부축하여 떠메고 가는 정도이었으니 이 모자 두 분의 애끓는 장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행렬은 에프라임 거리를 지나 골고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는 이 험한 길로 들어서자 얼굴은 죽은 듯 검푸르고, 기진맥진하여 아무리 힘을 써도 십자가를 메고 갈 수가 없이 되어 그만 엎드려졌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중로에서 죽으면 십자가에서의 죽는 꼴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백부장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사람을 찾던 중 그 때 마침 농장에서 돌아오는 시몬을 붙들어 강제로 예수와 협력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 때 시몬은 문득 기진맥진하여 거의 죽게 된 예수가 자기의 협조를 애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그는 십자가의 중간을 들고 그 무게가 아무쪼록 예수께 적게 눌리도록 노력하였으니 예수는 이 애덕의 행위를 결코 잊지 않았으리라...



양쪽에 큰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넓은 길을 지날 때 주민들은 냉담한 얼굴로 혹은 경멸하는 태도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돌연 훌륭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길에 뛰어나와 길을 막는 병졸을 밀치고 예수 앞에 다가가 그 변형된 얼굴을, 피와 침과 먼지와 땀으로 덮인 그 얼굴을 보다 못해 자기의 손수건으로 씻었습니다.

예수는 눈으로 그 부인의 호의를 감사하고 걸음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 그 수건을 보니 구세주의 창백하고도 슬픈 얼굴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 애덕의 여걸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이의 이름을 베로니카라 불렀습니다.



소위 ‘처형의 문’, 이 문은 골고타형장으로 통과하는 문이라 하여 이름지어 ‘처형의 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길에는 암석이 많아서 더욱 올라가기가 어려운 길입니다. 시몬의 조력이 있었지만 예수는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또다시 엎디어졌습니다. 간신히 일어나 문 가까이 왔을 때 그 문 위에는 예수의 사형선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구세주가 그 문을 지날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보기 싫은 것을 읽어보라고 강박하였습니다.



골고타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두어 명의 부인이 예수를 보고 주위환경을 꺼리지 않고 목을 놓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의 어떤 부인은 아기를 안고 있었으며 그 아기도 어머니를 따라 같이 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배은망덕한 예루살렘 위에 내려질 재난을 생각하고 불쌍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애통하는 부인들을 동정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의 부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위하여 울라”고... 이미 기력이 핍진한 예수는 골고타 산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또 한번 노상 암석 위에 엎디어졌습니다. 악당들은 거의 기절한 예수를 일으켜 끌고 잡아당기고 해서 드디어 형장에 도착했습니다.



골고타는 ‘해골의 땅’이란 뜻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 명칭은 한 중대한 기념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 즉 예수보다 수 천년 전에 한 남자(아담)가 고통을 참다못해 이 쓸쓸한 산꼭대기에서 숨졌습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나 9세기 동안 고생과 눈물의 날을 보냈습니다.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매일 먹을 것을 장만하여야만 했고, 병고를 참아 견디고, 고행을 하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귀향살이 하는 아담은 한번도 실망하지 않고 낙원에서 추방당할 때도 신이 그와 그 자손을 구원하리라고 예언하신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언제든지 자손들에게 장래에 오실 구세주를 희망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박두한 아담은 신의 정의를 흠숭한 후 자기의 자손들을 사탄의 포학에서 구하고 죄로 인하여 닫힌 하늘의 문을 자기와 자손들을 위하여 다시 열어줄 것을 구세주께 간구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아담의 아들들은 그 시체를 산 중턱에, 그리고 그 꼭대기에 있는 바위동굴에는 그의 머리를 묻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이 바위를 골고타, 즉 인조의 ‘해골이 쉬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옥졸들이 새 아담인 예수를 끌고 올라간 곳은 역시 같은 바위(골고타)였습니다. 이 바위 위에서 속죄주의 피는 인류가 부패시킨 원조의 재와 섞여지기 위해, 교만과 쾌락의 나무 지선악수가 인류를 멸망시켰으므로 능욕과 고통의 나무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골고타 산꼭대기에 올라간 것입니다. 전 인류의 죄를 구속할 신의 아들 어린양은 자원하여 이 산에 오른 것입니다.



이때 사방에서 몰려온 군중은 사형수의 최후의 고통을 보고자 하여 산꼭대기를 둘러쌌습니다. 그 날 6시가 가까웠습니다. 이 시각이야말로 모든 시각 중에 가장 적막한 시각입니다. 성모와 천사와 인간들이 함께 오열하는 위대한 비극입니다. 신이요, 인간인 그리스도의 비극은 바야흐로 종말을 고하려 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다 함께 통회 보속하여 예수님께 가까이 가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도 골고타의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생행로를 힘차게 올라갑시다. 그 마지막 끝에는 하느님이 서 계실 것입니다.











13.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66 (가)  어리석은 군중

최인호



르봉(1841-1931)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입니다. 그는 원래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로 출발하였지만 차츰 사회심리학으로 기울어져갔습니다. 1895년에 쓴 「군중심리」란 책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명저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들여놓고 있는 시대는 군중의 시대다”라는 인식을 통해 르봉은 새로운 20세기가 ‘군중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군중은 자기 이상의 행동을 하게 되며 이것은 사회적으로 위험하고 억제할 수 없는 집단 난동 파멸을 일으키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군중 속에 일체화되므로 자기의식을 잃는 무명성(無名性), 개개인의 행동이 불분명하므로 책임의 소재까지 불분명하게 되는 무책임성, 정보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과 소문으로 판단하는 무비판성의 군중심리로 인해 20세기에는 어리석은 군중에 의해서 세기말적인 현상이 일어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위기상태에 처했을 때 ‘좋은 리더’가 있으면 파멸적 상황을 피할 수 있으나 ‘선동자’가 나타나면 군중은 폭도로 변해 파괴적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 르봉의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히틀러와 같은 나치즘의 선동자와 스탈린, 모택동 등과 같은 공산주의 선동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입증되었으며 이들 선동자들에 의해서 인류는 전무후무한 참혹한 비극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가서 주님을 맞으며 찬양하였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요한 12,13).

‘호산나’는 ‘구원하소서’의 뜻으로 기쁨과 승리를 노래하듯 유다인 전통의 환호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던 군중들이 불과 며칠 만에 주님을 향해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을 찬양하던 군중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 폭도들로 변했던 것은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대사제와 원로들의 ‘선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군중들은 어째서 살인과 폭동을 일으킨 바라빠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면서”(루가 23,34) 주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자손들까지 지겠다는 엄청난 광기까지 부리는 것입니다(마태 27,15-25 참조). 이 모든 비극은 르봉이 말했던 것처럼 몇몇의 파괴적인 선동자들에 의해서 어리석은 군중이 폭도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님에 대한 사형판결이 이천 년 전에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중앙법정에 넘겨져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악의 선동자들은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한순간에 수천만 명이 한꺼번에 보고 읽을 수 있는 매스컴의 엄청난 위력을 통해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우리를 원격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어리석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처신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악합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군중이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에페 5,14-17 참조).











14.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태 26,14-27 (가)  헌혈을 자청하신 예수님



역전에 가면 가끔씩 헌혈차가 서있다. 헌혈차에서 나온 사람들은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을 붙잡고 헌혈을 호소한다. 피의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 다른 나라에선 문제가 별로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헌혈을잘 안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도 헌혈을 하면, 양기가 혹은 정력이 약해진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람만큼 정력을 키우는데 온힘을 기울이는 민족이 또 있을까? 그야말로 사생결단처럼 보인다. 얼마 전에는 야생마의 피를 먹는다는 섬뜩한 보도도 있었다. 금수가 따로 있나?

이러다간 사람의 피가 좋다고 사람에게 달려들까 봐 걱정이다. 이렇게 동물의 피를 벌컥벌컥 마셔대는데, 자신의 피를 남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 팩의 피를 헌혈하여 남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실천 중에 큰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서 헌혈하셨다. 한 팩 정도로는 인간의 병을 치유할 수 없음을 아시고, 자신의 피를 전부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당신은 서서히 죽어 가셨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산 사랑의 증거였다.



헌혈을 자청하신 예수님

피 흘려 돌아가실 때가 다가온 것을 아신 예수님은 3년간의 전도사업을 끝내셨다. 이제 이 세상에서 떠나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몰려나와 꿇어 엎드렸다. 자신의 옷을 벗어 깔아놓고 그 위로 지나가시기를 바랐다. 어떤 이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꺽어 들고 외쳤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이었기에 (묵시 7,9) 승리자이신 왕께 경배한다는 표시로 종려나무를 흔들었다. 그들은 외쳤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마르 11,10)



당시 정치가나 군 고위급은 말을 타고 다녔다. 말은 힘도 세고 속력도 낼 수 있어서 전쟁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나귀는 짐이나 싣고 다니는 동물로서, 말보다 빠르지도 못하고, 힘도 없기에 겸손의 상징적 동물이었다.



예수님은 말을 타고 정치적인 인물이 되고자 원치 않으셨다. 그런 메시아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기대는 달랐다.

예수님께 거는 유다인들의 기대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였다. 로마에 억압받고 살아가는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뒤엎어버릴 수 있는 인물, 그런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런 인물이기를 바라면서 환영하였다.



피흘리신 예수님

예수님께 거는 유다인들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정치지도자들의 시기, 견제, 율벌학자들의 고집, 편견들이 혼합되면서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넘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민중의 함성은 바뀌었다.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율법학자나 정치 지도자들의 감언이설 몇 마디에 넘어가고 말았다. 민중은 시키는 대로 소리질렀다.



“죽여라, 죽여라!" 악을 써가며 소리질렀다. 민중의 힘은 크다. 그러나 민중을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소수 그룹이다. 그들의 지도 혹은 농간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그래서 정치꾼들은 민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을 계속 펼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고 부산한 것 같다,



 예수님은 골고타의 언덕길을 무거운 십자가와 함께 걸으셨다. 온갖 수모와 채찍세례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눌 수 없어서 세번이나 넘어지셨다. 헌혈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십자가 위에서 무딘 쇠못이 손발을 뚫고 말았다. 거기서 헌혈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은 중병에 걸려있었다. 그래서 피가 많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나머지 피까지 다 내놓으셔야 했다. 한사람이 나오더니 뾰족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거기서 남은 피까지 다 흘러나왔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찾아오신다. 나귀를 타고 오시지는 않지만 살며시 우리 가정에, 나의 마음에 오신다. 부모 형제의 모습으로 친구나 스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도 오신다. 환영해야 한다. 우리가 세례 때에 그분을 얼마나 환영했던가!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거칠어지고, 민중이 되어 소리지른 적도 많았다.



사순절의 막바지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피를 다 내놓으시고 돌아가신 우리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호산나를 부르면서 다시 주님을 마중 나가는 한 주간이어야 한다. 이 주간 헌혈을 하면서 주님을 마중나간다면 어떨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호산나! 호산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성주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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