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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2월 22일 (금) 10:06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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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사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1. 말씀읽기: 요한4,1-42

2. 말씀연구

갈증이 날 때, 한 잔의 시원한 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물을 청하게 됩니다. 그 물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나 또한 그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찾고 있는지,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물을 찾고 있는지...,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갔을 때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족속들아...”하며 저주를 퍼 부으면서 “너희가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랐기에 그들의 눈에는 세례자 요한이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권위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예수님을 만났으니 그들은 모종의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2 ─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대로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께서 더 크신 분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의 제자들이 시기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시고 선교 장소를 옮기십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갈릴래아에서 퍼져 나갈 것입니다.



4 그때에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가는 가장 가까운 거리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북 왕국에 아시리아 이곳저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남아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혼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가리짐 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요한4,9). 이 두 집단간에는 적대감에 찬 싸움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적대감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예배소인 가리짐 산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자기네의 예배소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하지 않은 것입니다.


5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시카르는 에발 산 기슭에 자리한 곳으로서 오늘날 아스카르라고 불립니다. 이곳에서 1.5km 쯤 떨어진 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먼 여행길에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지점(야곱의 우물)에 쉬시려고 가던 길을 멈추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이렇게 지치셨으니 얼마나 어려우셨을까요?



 이 우물은 가리짐 산 아래 위치하고 있고,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깊이가 32m정도가 되는 우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깊은 곳에서 퍼 올리므로 아무리 뜨거운 날씨라도 물이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은 유다이즘 안에서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물물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조명해주고 참다운 앎을 제공해 주는 하느님 지혜가 발산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구약에서는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훗날에 와서는 그것이 하나의 멍에가 되어서 오히려 삶의 무게를 더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율법이라는 것은 해방을 체험한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으로서 실존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바로 이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자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그 신앙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은총에 걸맞은 그런 삶을 사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있을 수가 없는 실존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은 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고, 대율법가는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후기 유다인 문헌들을 보면 후손들에게까지 전달된 율법을 준수해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성조들로부터 전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열 두 지파의 선조였던 야곱. 그런데 이 야곱의 우물이라는 것은 유다인 전승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우물이란 것이 사람들이 만나는 좋은 장소였고, 동물들도 그리고 모여들고, 때로는 적어도 사람들 사이의 의미 깊은 만남들이 이루어지는 자리였습니다. 우리 유행가의 가사에도 "앵두나무 우물가에..."  당시 여인들은 집 안에서 사용할 물을 길어 나르는 습관이 있었는데 우물은 특히 부인들이 서로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성서에서 보면 우물가는 중요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요셉이 레아와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한잔 청하십니다.

텔레비젼 버젼으로 농담 한마디.➙ "낭자 길가는 나그네인데 시원한 물 한잔 떠 주시겠소?"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먼 거리를 여행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을 것입니다. 같은 처지였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음식을 사려고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힘든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4절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유다인들과 사마리아 인들은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배시기 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피가 섞인 민족이라 하여 상종하지 않았습니다(2열왕17,24-41; 집회50,20-26 참조). 또한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개축할 때 사마리아인이 협력을 거부하면서부터 더욱 격심해졌습니다(에즈라4,1-5).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마낫세라는 사제가 예루살렘의 성전과 사제에 대립되는 사제직과 성전을 가리짐 산에 세운다는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렀을 때 적대감정은 최고조로 달했습니다(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다고사). 기원전 128년경 요한 히르카노스(기원전 135-104)의 명령에 따라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의 수도 스켐을 점령하고 가리짐 산 성전(느헤미야 시대에 세워진 성전)을 파괴하고부터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어 마찰이나 불화가 잦았고(루카9,51-56참조) 혈투까지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계가 좋지 않다 하더라도 먼 거리를 여행한 여행자에게 그렇게 대한 다는 것은 너무도 매정한 처사가 아닐까요? 혹시 나도 신자가 아니라고 하여, 혹은 다른 본당 신자라고 하여, 다른 본당 사제라고 하여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더 나아가 나와 생각이 같지 않다 하여 배척하거나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당신의 깊은 내면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단순한 유다인으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만일 그녀가 하느님의 선물을 이해하고, 자기에게 마실 물을 청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물을 드리면서 더 큰 것을 청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샘솟는 물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 샘솟는 물, 즉 생수는 하느님의 천상적 선물입니다. 따라서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여인이며, 그녀의 내적 갈증을 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눈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이 생수는 예수님을 표현하는 생명의 빵, 세상의 빛, 양들의 문, 길, 포도나무 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우물은 깊이가 32미터 정도였다고 하니 긴 밧줄이 달린 두레박이 있어야 만이 물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야곱이 이 우물 앞에 당도했을 때, 이 우물물이 흘러 넘쳐서 야곱이 그 우물물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국인 앞에서 그 물이 흘러넘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여인의 응답은 전설에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여인은 예수님의 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봐도 너무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눈높이를 좀 낮추셔야 하지 않으셨을까요?(예수님 봐주세요!)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영적인 갈증을 해소시켜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그걸 알아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까?



여기서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 이라고 부른 칭호는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일종의 존칭으로서 “선생님”이란 의미에 가깝습니다.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피조물보다 못하게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야곱의 우물물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시고자 하는 물로 대체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나타나며, 위대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성조들의 유산을 성취시키시는 분이시며, 오직 예수님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제 그분이 주실 물이 어떤 것인지를 곧 보여 주실 것입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자연적인 생수는 결국 육신의 갈증밖에는 달래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혼의 목마름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 영혼의 목마름도.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생수는 내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풀어주고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증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으로서 그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내 안에서 솟아올라 나를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내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끄십니다. 즉 영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활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동문서답< 쪽에 십리가 있다나...>. 이 여인은 그리 조신한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12시쯤에 우물가에 오는 이유도 사람들 안 만나려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시간에 나올 여인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가 생각하는 물을 주신다면 그녀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우물가에 나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도 정확한 동문서답니다.



 우물은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물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준다는 것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시면서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가서 거저 베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자체도 사실상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이기에 조건 없이 우리는 거저 베풀어야 하고, 복음 선포 사명이라는 것은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당연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를 선물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노력에 대한 어떤 대가라는 의미로 이해하려는 부족한 신앙인들에게는 설명하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것은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 안에서 보여 지는 일관된 사상입니다. 준다라는 것,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처럼 조건 없이 우리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을 알고 계시기에 여인을 이끌어 주려고 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기 위해 남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나 깊은 내면의 삶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굳이 예수님께 감출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감추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예수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녀의 가면을 벗겨 주십니다. 사실 무척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이었을 것이고, 부정한 관계였기에 부끄러웠던 부분이었을 것이고, 또한 괴로웠던 부분일 것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여자가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하지만, 남성 중심의 사회 안에서 남자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런 힘도, 대책도 없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남자가 다섯이라는 말은 그녀의 삶이 행복한 삶은 아니요, 조숙한 삶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이 여인이 말하는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활동하는 자란 뜻으로서의 예언자를 가리킵니다. 메시아적 의미로서의 예언자는 아닙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짐 산과 예루살렘 성전.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 장소를 두고서 사마리아인과 유다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예수님께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짐 산에서 야훼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제단을 세운 곳은 에발 산(신명27,4-8)이 아니라 그리짐 산이었습니다. 이곳에 느헤미야 시대 성전이 세워졌고(느헤13,28), 그 성전은 기원전 128년경 요한 히르카노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곳을 참된 예배장소로 확고하게 굳혔고,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우리 조상 ”이라는 표현으로 유다인과 대립시키면서 자기네 사마리아인만이 참된 조상의 전통을 잇는 대표자로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이 세겜에 세운 제단(창세12,7;33,20)은 아직 성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유다인들이 세운 예루살렘의 성전은 공적 예배를 위한 단 하나의 장소이며, 다윗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계시와 기적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리짐 산과 예루살렘이 예배장소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때가 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데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새로운 예배 방법이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하게 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적 계시 말씀에는 유다인들로부터 경시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믿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이미 어떤 좁은 장소에 갇혀 있을 수 없는 때가 오게 된다는 이 말씀은 벌써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디서나 자유롭게 하느님 아버지를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가 민족적, 정치적 명예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합법적인 하느님 예배를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메시아가 유다인 가운데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당신의 구원 활동을 세상에 전달하는 도구로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시와 약속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 모든 이들에게 알려야 하며, 하느님을 충실히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그 특권적 지위와 권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참된 예배가 지금 당신과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려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진실한 예배는 영적으로 참된 예배입니다. 즉 하느님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듯이, 참된 예배도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내가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향할 때 하느님은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내가 하지만 그것을 열매 맺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식으로서 신뢰를 가져야 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데는 장소적인 제한이나 인간적인 조건이 필요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유다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와는 본질이 다른 지극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내가 영적으로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배 방식과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향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되게 하느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나는 하느님의 더큰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생수가 솟구쳐 흐를 것입니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아직도 예수님의 계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희망하고 있는 분은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가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계신 분이 바로 그분이신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는 점층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처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기적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과거를 맞추자 예언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낯선 이방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죄 많은 여인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 여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의 어두움을 비춰주고 그녀 또한 떳떳하게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자신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당신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야 비로소 물을 뜨러 올 수 밖에 없는 여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제자들은 양식을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시간에 여인들이 나올 시간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놀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돌아오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향합니다. 제자들은 좀 궁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물을 뜨러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물동이가 아닙니다. 자신의 과도사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체입니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여인은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한 것처럼. 히에론 왕이 세공인에게 순금을 주어 왕관을 만들게 했는데, 그 왕관에는 금 대신 은이 얼마간 섞여 있다는 고발이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의뢰받은 아르키메데스는 어느 날 더운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갔다가, 욕조에 들어간 자기 몸과 같은 부피의 물이 넘쳐 흐르고 몸무게도 가볍게 느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알았다, 알아냈어!(Heureka, Heureka!)>하고 외치며 기쁨에 겨워 알몸으로 거리를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예수님을 가리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도 멋진 여인입니다. 전에는 사람들을 피했던 그녀가 이제는 그들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이야기 합니다. “나 멋진 예언자 봤다! 그리고  그분이 메시아이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녀의 부끄러움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내 죄를 감추려고 예수님을 가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귀찮다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자신의 부끄러움도 잊은 체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곧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약장사의 원조가 예수님이 아닐까요? 물론 지금의 약장사야 엉터리이지만 확실한 약을 파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제자들은 시내에서 사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지니셨기에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영적인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드실 영적인 음식은 예수님 스스로 성부의 뜻을 따라 성부께 자신을 아낌없이 내맡김입니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장에 갔다 왔는데 음식을 구해오니 "니들은 알지 못하는 음식이 있지롱."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지탱해 주는 음식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하지만 사랑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게 만듭니다.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아들의 임무 수행이 바로 그 음식인 것입니다(그런데 배부를 것 같지 않네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실 때의 말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죄 많은 한 여인의 증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같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것을 물리에서는 공명이라고 합니다. 나도 내 행위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내 열심한 행위를 통해서 다른 이들이 예수님께로 향하고 참다운 경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예수님은 정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을 했습니다. 함께 해 달라고. 예수님은 그들과 이틀을 함께 하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 또한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함께 머물러 주시기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그분 안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믿음이니 나 또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머물고 변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으로 믿게 된 사람들은 이제 더욱 분명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충만한 믿음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말씀을 들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이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유다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에게도 구원의 희망을 주는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1. 한 잔의 물을 청하는 예수님께 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주 작은 청하고 있는 예수님께 어떻게 해 드리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참되게 아버지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고 있습니까?



3. 한 여인의 증언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나의 증언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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