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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2월 22일 (금) 10:02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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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사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사순 제 3주일



        1. 김몽은 신부(가)/2                     2. 김영배 신부(가)/3

        3. 김정진 신부(가)/5                     4. 표창준 신부(가)/6

        5. 함세웅신부(가)/8                       6. 이철희 신부(가)/10

        7. 이철 신부(가)/12                       8. 강길웅 신부(가)/14

        9. 함세웅 신부(가)/16                    10. 김현준 신부(가)/18

        11. 하느님과의 진정한 친교/19  12. 예수께서는 구원의 샘/22

        13. 생명의 물/     23                     14. 최인호 작가/25



1.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생명의 물

김몽은 신부



중동지역에서는 물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할 정도로 귀하다고 합니다. 물은 실상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 직접 간접으로 단 하루도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40년 동안 광야에서 물 때문에 죽게 되었을 때, 백성들은 모세에게 먹을 물을 달라고 들이대었습니다. 모세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느냐? 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하고 말했지만 백성들은 당장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야훼의 말씀대로 ‘호렙’의 바위를 막대기로 치는 순간 물이 샘물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 또는 일차원적 욕구 충동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으며 ‘말쿠제’나 ‘콕스’가 말하는 소위 수평적 인간의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사마리아의 야곱의 우물곁에 앉아서 물을 길러온 여인과 말씀을 나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구원에 대한 목마름을 여기서 봅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 특히 비난을 받아야 할 입장에 처한 이 여인에게까지 은총을 베푸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분은 만사를 선으로 유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연적인 사물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인 은총의 세계를 알려 주십니다. 육신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를 영혼의 양식으로 변화시키듯이 바로 이 물은 성령의 은혜 또는 당신의 계시로서 이룩되는 구원을 뜻하시며 물 없이 살 수 없듯이 은총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재미있는 대조를 느낍니다. 유서 깊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낮에 먼길에 지친 예수님이 앉아 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사마리아 여인이며 죄인임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한 모금 마실 물, 갈증을 해소시킬 물을 청합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육신의 목마름만이 아니라 바로 또 하나의 목마름, 절실한 영혼의 갈증이 있으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죄인들의 회개요 구원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즉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려 할 것입니다. 이 생명의 물을 길을 수 있는 힘은 바로 생명의 물을 주실 주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따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응할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 순결과 순응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이 샘물을 남겨준 조상 야곱보다 더욱 위대한 분이십니다. 구약의 모세가 바위를 열어 나오게 한 물이 아니라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물입니다. 이 거룩한 생명의 물에 대해서와 같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이 아닌 또 하나의 음식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매일매일 성부의 뜻을 따르고 실제로 생활에 옮기는 일입니다.











2.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생명을 주는 물

김영배 신부



오늘 복음에 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저는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와 씨름을 하고 왼쪽다리에 복합골절상을 입어 뼈가 부러졌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후 2시에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수술대 위에 뉘어 놓고는 의사 두 분과 간호원들이 저를 꽉 붙들고는 부러진 다리를 비틀더군요. 참 무자비하리만큼 사정없이 하더군요. 사실 환자 측의 생각이지 의사 측에서 보면 얼마나 조심성 있게 다루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네 사람이 달려들어 다리를 비틀어 빼고 다시 맞추고 다시 비틀고 하기를 몇 차례 했습니다. 성한 다리를 그렇게 해도 죽겠을 텐데 더구나 부서진 다리 뼈를 비트는 데는 참기 어려웠습니다. 잠깐이면 끝난다고 하더니 네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2시부터 5시까지 했으니 환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취를 시켜놓고 했다면 환자는 고생이 없었겠지만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이를 악물고 양손으로 수술대를 꽉 잡고 악을 쓰기를 세 시간이나 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입에는 침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소 입에서 단 냄새가 나는데도 의사와 간호원들은 다리에 정신들을 쓰느라고 환자의 상태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세 시간을 고생한 끝에 모두 끝이 나서 의사와 간호원들은 땀을 닦으며 나갔지만 환자는 혼자 누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병원 경험이 있는 저의 누님이 들어오셔서 보시고는 뛰어나가 물을 한 잔 갖다주시더군요. 물을 입에 대고 단숨에 벌떡벌떡 다 마시고 나니 살 것 같았습니다.



그 물 한 잔이야말로 나에게는 생명수였습니다. 물이 이렇게 필요한 것이란 사실을 실감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인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시어 우물가에 앉으셔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물 이야기는 홍수로 범람하는 물 이야기가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수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리 전체에서 빼면 껍데기만 남으리만큼 필요한 교리가 바로 물의 교리입니다(창세 1,1). 물이란 무엇입니까? 아마 지난 번 호남지방 홍수 때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놓고 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물은 죽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 한 방울의 물로 혀를 축인 사람에게 묻는다면 생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이란 죽음이면서 생명입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물을 제거해 놓고나면 껍데기만 남으리만큼 주요한 사상이 바로 물의 사상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바로 물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땅 위에 온 심연은 어두움에 덮여 있더니 하느님의 힘이 물위에 빙빙 돌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빛이 생기어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세 1,1)라고 구약성서 첫 권 첫 구절에 나옵니다.



이는 물을 생명과 연결시킨 첫 예입니다. 또한 노아 시대에 하느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만은 물에서 구출하여 생명을 주신 이야기가 나오고(창세 8,1),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 해방을 맞은 이야기가 나옵니다(출애 14,21). 오늘 첫째 독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 바위틈에서 물이 나와 생명을 준 이야기가 나옵니다(출애 17,6).



이렇게 구세사 전체에서 물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구원사업을 위해 세상에 오셨을 때 30년간의 사생활을 마치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바로 요르단 강에 나가시어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태 3,13). 이것은 우리 구원이 물과 직접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물에 성령을 부과시켜서 “아무라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3)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상을 가진 물 이야기를 하시되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 앞에서 하십니다. 사마리아라는 개념은 보통의 개념이 아닙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9)라든지 사마리아사람 나환자가 치료를 받고 감사드리는 이야기(루가 17,11)라든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받으신 냉대(루가 9,52)를 볼 때 사마리아는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 즉 “하느님 백성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사람”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사람 앞에서 구원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물을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나오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제 사순 제 3주일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를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그 위대한 사랑을 생각하고 복음에 나오는 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요한 4,42), “우리가 주님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님이야말로 영원히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며 또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하고 신앙을 고백합시다. 











3.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핏  보아서 이 대화 중에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에는 비상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입니다〉(요한 4,34)고 말씀하시며 오로지 성부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 즉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는 일만이 그 생애 전부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과 같이 사마리아의 어떤 동네에 이르렀을 적에 때마침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나눈 것은 바로 사도적 대화의 참된 모델을 사도들과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영구히 남겨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미신자들의 영혼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뭇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관한 요령이 예수님의 대화 속에 명백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물 좀 주시오〉하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조그마한 봉사의 요구에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즉 한 잔의 물을 여인에게 청하십니다. 얄미울 정도로 심리적 기법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감정을 기묘하게 포착하여 당신을 자발적으로 상대방보다 낮은 신분에서 또한 걸식하는 사람의 신분에서 몹시 예의 바르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만드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여인에게 청하신 것은 어떤 종류의 친절이라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잔의 물을 당신에게 마실 수 있게 해 주는  조그마한 친절입니다. 마시는 이는 누구라도 다시 갈증이 날 이 물에 관한 것을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아 예수님은 여인에게 서서히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물의 샘에 의해 상징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설명하십니다.



신자 여러분!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몇 번이건 되풀이하여 읽어봐야만 되겠습니다. 이 내용에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이 또 하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은 또한 기억에 길이 남겨 두어야만 되겠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 만나서 받은 큰 기쁨을 자신의 가슴 안에 몰래 숨겨둘 수가 없습니다.

물동이를 그대로 거기에 두고 마을에 가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급히 달려오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자의 자발적인 행동입니다. 참된 신앙을 찾은 자는 자기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발견하자마자 자기 친구나 동료에게 달려갑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발견한 기쁨을 그들에게도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신자 여러분!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나서도 일체를 자기만이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알고 나서도 그 기쁨과 영생의 길을 이웃에게 알리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에 대하여 권고하는 말 한 마디, 앓는 이들, 직장에서 진리와 신앙의 등대 역할을 외면하는 이들, 자기 종교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들은 오늘 복음 말씀을 명심하여 깊이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언제인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지만, 그가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습니다〉(마태 10,32)라고. 그 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열 한 사도들을 산등성이에 집합시키고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복음 전도의 결정적인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오〉(마르 16,15)라고.



온 세계는 요즈음 정신 부재의 현상인데 우리나라도 그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황금 만능주의와 물질 위주의 생활양식은 우리의 복음 전도를 암담하게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28,2)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시며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는 담소하거나 연약해서는 안됩니다. 연약함은 신앙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Ⅱ디모 2,9)하고 말하며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디어 내며 복음 전파의 선두가 되어서 모범을 주신 성 바오로 사도를 본받고 닮기로 합시다. 아멘.











4.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표창준 신부



방금 우리가 들은 오늘 복음에서 여행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주시오”하고 청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 여자가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좀 주십시오”하고 예수께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청하신 물은 무슨 물이니까?



여행에 지치신 예수께서 목마름을 풀기 위해 마실 필요가 있었던 물은 우리도 매일같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물입니다. 이 물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우리 생명에 꼭 필요한 더없이 귀중한 이 물은 우리가 수도만 틀면 줄줄 나오니까 평소에는 귀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막이나 전쟁터에서 또는 수술 끝난 환자에게는 제일 먼저 찾는 정말 귀중한 것이요, 이런 때에는 물이 곧 우리의 생명이로구나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렇게 물은 우리 생명과 뗄 수 없는 것으로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기에 반드시 우리가 입으로 마셔야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어떤 물을 청했습니까? 예수님 말씀에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게 되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실 물은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게 하지 않는 물이요 영원히 우리를 살게 하는 물인 것입니다.



보통 마시는 물이 아니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물입니다. 이 물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요 가르침이며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풍부한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명으로도 우리는 목마르게 되고 꼭 물을 마셔야 하듯이 영원한 생명에 있어서도 우리는 목마르기 때문에 생명의 물, 곧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을 꼭 우리 안에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물을 청하면서도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예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아직 못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남편이 없는 자신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부정함을 돌이켜 보고 자신의 참 모습인 죄스런 모습을 돌아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죄 많은 상태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죄의 상태를 벗어나 참된 평화를 누리고 싶어하는 갈망을 느끼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하느님께 예배드릴 곳에 대해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이 “내 마음이 주의 품안에 쉬기까지는 평안치 않나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세상의 어두움과 죄에 물든 사마리아 여자는 죄의 암흑을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 참 평화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갈증은 영원히 물을 찾게 되고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씀과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고 알려주시자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더 마음깊이 알아보게 되고 믿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자에게 참 생명에 눈뜨게 해 주는 생명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참 생명에 눈뜨기 시작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놀라움은 마을로 달려가 여러 사람에게 이 놀라움과 기쁨을 알리지 않을 수 없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 여자의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묵으시도록 간청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어했고 그것이 이루어짐으로써 예수님을 참으로 구세주로 알고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그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어 그들을 참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세성사를 받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도 사마리아 여자와 그 동네 사람들 이상으로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있고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생명력이 우리 안에 자라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해 준 이 신앙과 성세성사의 큰 은혜를 우리는 오늘 하느님께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사막에서 물의 귀중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정도 이상으로 깊은 고마움을 느껴야 마땅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하는 사람들로서 모두가 하느님 앞에 평등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유다인이 천시하던 사마리아 여자에게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거침없이 대하시고 그 여자를 구원으로 이끄셨듯이 신앙의 은혜를 받아 구원의 길을 이미 걷고 있는 우리도 인간 차별이나 멸시, 미움이나 분쟁이 있다면 이런 장벽을 없애고 영원한 생명, 참된 평화 즉 구원에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서로 도와야겠습니다. 참다운 인간 관계가 없는 곳에는 참 평화와 구원도 없을 것입니다.      











5.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바위와 물 

함세웅 신부



오늘의 전례 말씀은 풍부한 상징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 1독서(출애 17,3-7)에서는 바위에서 나온 물, 제 2독서(로마 5,1-8)에서는 신앙, 희망, 사랑, 복음(요한 4,5-42)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 즉 그리스도 자신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희망의 대지,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사막의 길이었고, 투쟁의 길이었고, 어찌나 험난했던지 40년이나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40년 ! 완성과 충만을 의미하는 40이란 숫자, 10계명을 받기 위하여 모세가 재계한 40일, 하느님의 사명을 받기 전에 엘리야가 기도바친 40일, 예수님도 40일간 단식하였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 40은, 결국 한정된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사명은 끝이 없고, 우리가 가야 하는 목적은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 40은 곧 무한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매일 새롭게 자기의 전 생애를 걸고서, 구체적 현실을 통해 내려야 하는 결단인 것입니다. 무한을 향하여 무한히 내려야 하는 결단! 그러니까 그 결단은 어찌 보면 불가능일지도 모릅니다. 불가능, 그렇습니다. 분명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이 있고, 불가능을 깨쳐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의 신앙이 바로 그 힘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바로 교육적인 의미와 함께,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불평 불만을 하는 이스라엘, 불신하고 고집 피우는 이스라엘, 하느님을 배반하고 모독하는 이스라엘, 그것은 성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꼭 눈앞의 결과와 열매만을 움켜잡으려는 나, 그 '나'의 이야기입니다. 문득 두려워지고 섬찟해짐은 웬일일까요? 깨진 바위, 그것은 또 무엇일까요?



바위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I고린 10,4) 그 예수 그리스도가 깨졌기에, 한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기에(요한 19,34) 물과 피가 흘러 나왔고, 그 물이 곧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약성서에는 초대 신자들이 성찬례 때 행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 행위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깨진 바위, 창에 찔린 예수, 쪼개진 빵(성체), 이 모두 생명을 주는 행위입니다. 깨졌고 찔리고 쪼개졌을 때에만 생명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어두운 이 시대에서 스스로 깨지고, 찔리고 쪼개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갈증에 목이 타고 굶주린 우리에게 생명의 빵과 물을 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홀로는 무능하십니다. 꼭 누구이든지 우리 인간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어부, 죄 지은 여자, 세리, 여인, 어린이 등 보잘것없는 무리였으나, 마음 착한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셨듯이, 아마 지금도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어부, 근로자, 하급 공무원, 약한 여인, 학생, 특히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들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구원의 사업을 펼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깨지고, 찔리고, 쪼개졌기에 내가 갈증을 풀고 굶주림을 해소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위, 또 다른 형태의 바위, 곧 장벽의 바위가 있습니다. 암담하고 굳은 현실, 어렵고 힘든 현실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내뱉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계란으로 바위 깨기야!" 이 말을 신앙인이 할 수 있을까요? 사도신경을 외우고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성서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는 신앙인이 정녕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위가 깨져 물이 나왔다는 오늘의 독서 말씀을, 나는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가요? 믿는다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신앙인은 깨져야 할 바위이며, 동시에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비의 바위를 깨야 할 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이 콸콸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제 2독서는 이러한 믿음만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룩해 주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평화와 희망을 안겨 줍니다. 결단을 내렸을 패의 평화, 그리고 좌절되지 아니하는 투지력, 신앙인의 희망은 환상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발을 디디고 서 있으면서도 그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이 무한인 것처럼 그가 바라는 것도 무한합니다.



물과 인간, 그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더러움을 씻어 주고 갈증을 풀어 주고 생명을 키워 주는 요소, 이렇게 물이 주는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우선 사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깨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접촉치 말고 그들의 그릇, 음식이 부정하다고 가르친 모든 전통과 율법을 예수님은 무시하시면서 그것을 깨셨습니다. 그 형식과 율법이 인간 상호 관계를 비인간화하였기 때문입니다. 목마를 때 물을 청하는 자연스러운 행위, 이것이 율법의 전통 때문에 제한받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목마르신 예수님, 물을 청하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을 제도와 전통 때문에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생명의 물을 지닌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목마르지 않는 물,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세 때에 우리를 씻어 준 물입니다. 또 사탄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준 자유와 구원의 물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 물은 곧 성령이십니다. 그 물은 무한합니다. 그 물은 바위에서 나온 물입니다. 그 물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입니다. 그 물은 우리 맘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물, 정의와 양심의 물이며, 성령께서 보장해 주시는 진리와 자유의 물입니다.

“주여,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요한 4,15)











6.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물에 대한 관찰

이철희 신부



한 주간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물은 사람의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 몸의 70% 이상이 물의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없으면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너무 많으면 그것을 막거나 피하지 못해서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물에 대한 기억은 지난 해 8월 초순을 기억하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엊그제(금요일) 이른 새벽에 무지막지하게 비가 퍼부었습니다. 혹시 그 빗소리를 들으면서 지난해의 악몽을 떠올리신 분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도 비슷했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 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제대로 사용해야 하는 물이 우리 생활과 신앙생활에 관련된 요소를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독서는 물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비옥했고 물이 풍부했던 이집트를 벗어나 광야에 접어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겪은 고통은 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그들은 노예 생활이 힘들어서 하느님을 향하여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기억은 까마득하게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부르짖기 얼마 전 그들은 홍해바다를 가로질러 건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홍해바다의 물은 그들에게 재앙의 근원이었다가 구원의 방패가 된 물이었습니다.



복음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역시 물을 소재로 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나에게 달라고 했을 텐데”.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에서 왜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서로 대하기를 꺼려했는지 물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더 궁금했을 제자들조차도 스승에게 그 질문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소재로 등장한 물에 대해서 공부할 것은 아니고, 성서에 우리 신앙에 등장하는 물의 역할을 한 번 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예절을 거행할 때, 물을 사용합니다. 물 자체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물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물은 세상을 덮어 온 세상의 죄악을 깨끗이 씻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널 때, 물은 죽음과 생명을 구별짓는 경계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려고 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바로 그 물의 덕택으로 비옥한 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물로 죄를 씻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물이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 힘을 갖게 하시는 하느님의 힘이 남다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물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실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구약성서 1455면, 에제키엘 예언서 47장을 보면, 바로 이 성전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샘이 솟아난다고 전합니다. 그 샘에서 솟아나는 물은 생명수가 되고, 그 생명수 때문에 주변은 무성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샘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차이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질문합니다.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성전에서 솟는 샘, 그것은 우리의 생활로 보여야 하는 삶의 역할입니다. 도둑질 맞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라면,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발하는 것이고, 그래야 좋은 삶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나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서 큰 소리로 자신에게 전해졌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어제, 토요일부터는 본당에서 예비자 교리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과 더불어서 한 배를 타고 하느님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와 다짐도 필요합니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갈대 바다를 건너 광야에 들어선 사람들 모두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얼마의 사람들은 하느님과 모세를 향한 반항의 대열에 참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불만을 제기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것을 올바로 구별할 수 있어야만 다시금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삶의 고난에서, 절망에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일어설 수도 있게 됩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느님을 향하여 다가서겠다는 욕심은 권장할 만한 좋은 것입니다. 그 욕심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 앞에 많은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선택하도록 맡겨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통해서 하느님이 준비하신 행복에 다가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욕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7.            사순 제3주일   요한 4,5-52 (가)  살아있는 생명의 물

이 철 신부


사람의 몸은 7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섭취해야 하고, 특히 땀을 많이 흘렸을 때는 갈증이 더욱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물이 없으면 우리들은 하루도 제대로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육신에 있어서 이렇게 물이 소중하듯이 우리 영신생활에서도 영적인 물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음식을 잘먹고 편안하게 생활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아닌 미움과 불신 등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참된 기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육신이 편안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마침내는 육신의 병까지 생기듯이, 영혼의 갈증을 소홀히 여기다가는 모든 삶이 조금씩 메말라가고 병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신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 더욱이 여자와 대화하기를 꺼려하던 당시의 관습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사마리아 여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늘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삶을 통해, 교회전 례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손길을 외면하거나 마음이 무디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라고 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겸손한 자세, 열린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항상 후하게 거저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갈증과 바람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은총을 날마다 내려주시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친히 마련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행복한 삶, 참된 삶을 동경하며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정의에 목말라하며, 진정한 일치와 나눔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우리의 애타는 갈증을 없애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의 모든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소해주실 수 있습니다.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은 바로 성서 안에 담겨있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세상의 헛된 물을 찾기보다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의 물을 찾아 마시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14).











8.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영적인 물을 마시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17,3-7 (우리가 먹을 물을 내라)

제2독서 로마 5,1-2.5-8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복 음 요한 4,5-42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지구상에 가장 넓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도 7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물은 지구와 인체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옛날 탈레스라는 철학자는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봤습니다. 물에서 모든 것이 나오며 물로써 자연을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물은 그처럼, 인간 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물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큰 고통을 겪습니다.



제가 과거에 술을 많이 마셨을 때는 물에 대한 꿈을 자주 꿨습니다. 과음한 상태에서 잤기 때문에 자면서도 갈증이 생깁니다. 그러면 꿈속에서 아무리 물을 마시려 해도 마실 수가 없습니다. 달려가서 먹으려 하면 샘물은 어느새 흙탕물이 되어 있고 수도는 또 꼭지가 고장이 나서 틀어지지도 않습니다. 물을 찾아 사방을 헤매지만 고생만 실컷 합니다.



그러다가 꿈을 깨면, “아, 꿈이었구나!"하면서 부엌으로 달려가 물통 안에 있는 물을 양껏 퍼 마십니다. 그때 그 벌컥벌컥 마시는 시원한 맛이란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마치 세상을 마시는 듯한 기분입니다. 천지가 개운합니다.



육신 생활에 물이 없으면 고통스럽듯이 영신생활에서도 영적인 물이 없으면 불안하게 됩니다. 온갖 곳을 헤매며 갈증을 풀려고 하지만 마치 사마리아 여인처럼(요한 4,1-42참조)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어도 계속 목마른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사순 시기에 참된 물을 마시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모세가 바위를 쳐서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사막의 대지 위에서 바위를 쳤더니 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시나이 반도에서 목마르게 떠돌아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이 우물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또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그러면 그 물이 무엇입니까.



삶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특히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더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살기가 굉장히 편해졌지만 상대적으로 인간의 내면은 더욱 공허하여 불안과 초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의 번화가, 댄스홀, 비밀 요정, 비밀 클럽 등의 경우를 봐도 그들이 삶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적인 물을 찾지 않고 세상이 주는 물을 찾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마실수록 더 괴로워합니다. 춤바람이 난 여자들, 옆에서 못 말린다고 합니다.



어떤 나환자 부인의 얘기를 들었는데, 밤마다 남편 몰래 산넘어 읍내에 가서 춤을 추고 온답니다. 무서운 여잡니다. 한번 악의 물을 마시면 그 물을 마구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로 갈증을 풀어 보려 하지만, 결국 그 여인이 얻는 것은 더 큰 공허와 괴로움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행하게 됩니다.



남자들의 외도도 말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부인에게 별의별 거짓말로 꾸며서는 밖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집니다. 삶의 희망보다는 절망을,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얻을 뿐입니다. 생명의 물을 마시지 못하면, 꿈속에서 잡히지 않는 물을 찾으려 고생하듯, 헛된 삶 속에서 방황하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사람이 빵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수없이 많이 들어 왔으면서도 인생의 목마름 을 성서에서 찾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그 물을 성서에서 찾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일찍이 인간의 행복은 오로지 쾌락에 있다 하여 온갖 방탕한 생활로 흥청거렸지만 그가 결국 얻은 것은 공허와 더 큰 목마름뿐이었습니다. 그는 그처럼 뼈아픈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말, "주여,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 이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주님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참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찾아야 할 샘물입니다. 또 성서만이 우리가 물을 마실 수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사순절은 특히, 헛된 물을 찾고자 했던 우리 자신들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시기입니다. 모세는 바위를 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했는데, 바오로 사도는 바위는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고린 10,4참조).



우리도 그리스도를 칩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9.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함세웅 신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사랑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한 4,18)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합니다.

부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소 폭탄에 몸을 덮쳐 귀중한 생명을 희생한 사건이라든가 이 밖에도 남을 구하려다 생명을 잃은 사건 등등.... 감탄할만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 생명에 애착하고 죽음을 무서워하였던들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요한 1서3,16).  이보다 더 강한 주장은 아무 데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벗들을 위하여 제 생명을 내놓는 것보다 큰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 말씀은 진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 앞에는 아무것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냐, 창검이냐, 주림이냐, 헐벗음이냐, 어떠한 피조물도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절규하는, 그 크고 강한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요, 생활 목적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한 서두의 말대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심판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으로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완전한 사랑, 무사무욕의 사랑으로 사는 것뿐입니다. “작은 무리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에게 나라를 주시는 것이 천주성부의 뜻이다"하시고, 곧 이어 “그러므로 너희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도둑도 파가지 않고, 썩지 않는 재화를 하늘에 쌓아라. 너희들의 보배가 있는 것에 너희 마음도 있다"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심판을 면하는 길은 모두 팔아서 애긍시사하는 일입니다.

  무자비한 자에게는 심판이 엄하지만,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최후심판 선언에도 “이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거듭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엄한 심판을 면하고, 심판대에 떳떳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 받은 것, 우리의 기도, 우리의 희생, 우리의 활동, 우리의 몸과 영혼 기타 일체 모든 것을 형제를 위하여 소모하고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제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잃어버리고 형제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잃어버리는 사람은 산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이는 제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천주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하셨고, “이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한 것이, 즉 내게 한 것이고,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보면, “천주의 사랑은 형제의 사랑에서 증명하여라"라는 계명이라고 결론짓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우리 자신의 고유 재산이란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죄와 기타 모든 종류의 결점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것이라 아끼고 자랑하는 공로 안에도, 순수한 사랑을 가져 본 적이 없고 불순한 자애심이 섞여 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들 안에서도 불순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칠죄종(七罪宗) 노예가 된 우리에게서는 얼마나 많은 불순한 것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남용한 모든 은총, 혹은 은총에 응하였음에도 반(半)만 응하고, 하느님의 원의를 반만 채워드린 불충 무례한 종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 나타나고 싶으면, 마음으로부터의 사랑, 관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도 바울로께서는 “내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다 하여서, 나는 천주 대전에 의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하시고,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당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감히 나는 이만하면 자신만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며, 힘있는 말씀으로 항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사랑과 자비심은 두려움을 이긴다"라고!



우리가 걱정 없이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모두 팔아서 애긍함으로써 ,천국의 벗들을 사는 길뿐입니다. 서로 비난하거나 헐뜯고 싸우지 말고, 관대한 사랑으로 이웃 형제를 사랑하고, 위로하고, 돕는 길뿐입니다. 비슷한 예로,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쓰라린 숨

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상처를 발견하여 어루만져 주게 될 때 ‘나'가 ‘너'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에게 숨어 있는 선을 발견하게 되고, 선이 없던 것이라도 선을 만들어낼 만큼 위대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주께서 말씀하신 정의에 입각하여 사랑의 완성으로 이끌어 가야 되고, 성실한 인내와 노력으로써 가까이 있는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창조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위대한 사랑! 그것은 정말 멋진 것이며 기쁨을 낳게되고 그리스도와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내 마음을 지배한 때, 비로소 그리스도는 완전히 나를 차지할 것이요, 그리스도와 ‘너와 나'가 사랑으로써 결합되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가 한 가지 목적, 누구나가 사랑으로써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얼마만큼의 항구성을 가지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10.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타는 목마름으로

김현준 신부



  한때,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하는 '만남'이란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음치인 나도 따라 흥얼거릴 정도였으니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졌던 것 같다.

  성서에는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군중들과 병자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섰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을 집에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온 막달라 마리아 등 여인들과의 만남의 이야기도 나온다.

  

한낮, 긴 전도여행으로 지칠 대로 지친 예수님이 오늘사마리아의 우물가에 앉으셨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은 서로 상종을 안하던 사이였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물을 길으러 야곱의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 우연이 아닌 '타는 목마름으로' 만나고 대화하신다,

  “물 좀 주시오." “당신은 유대인 남자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십니까?"  “목이 마르면 누구든지 물을 달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나보다 더 목마른 당신이 오히려 나에게 물을 청했을 것이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샘솟는 물을 줄 수 있는데‥‥‥ ." 보다시피 우물은 이렇게 깊은데 당신은 두레박도 없는데 무슨 재주로 어디서 어떻게 그 샘솟는 물을 길어 줄 수 있다는 건가요?



이 우물은 우리 야곱 성조가 대대로 물려주신 우물입니다. 우리도 가축들도 다 마실 정도로 좋은 우물인데 당신은 이러한 우물을 주신 야곱 성조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오"


 “그렇다면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먼저 당신 남편을 불러 데리고 오시오."“남편은 없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맞는 말이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사실은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는 말도 맞지요. 당신은 오히려 나보다 더 목마른 여자군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목이 마르셨다. 목말라 갈증을 느끼셨을 뿐 아니라, 인간 구원에 대한 갈증을 느끼셨다, 죄 많은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스스로 청해 마시는 회개에 목말라 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다"며 인간의 회개와 구원에 목말라 하셨다.



만남, 그 이틀 후

그분은 단 이틀 동안 우리 동네에서 바람처럼 머물다 바람처럼 떠나셨다. 나에게는 한 20년의 세월이었다. 땅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제 젖을 빨아먹을 뿌리를 주지 않지만, 그분을 구세주로 믿는 나의 가슴에는 그분이 남겨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그래서 이런 '물빛'의 노래로 나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물빛1 , 마종기 시)











11.         사순절 제 3주일   요한 4,5-42 (가)   “하느님과의 진정한 친교"



오늘은 사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일 새로운 삶의 길을 걷기로 하고 그러한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뇌와 고난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오늘은 이 길을 감에 있어서, 하느님과 어떻게 함께 걸어가야 할 것인지를 묵상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러한 묵상주제에 대하여 풍부한 빛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 제 1독서를 봅시다. 야훼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에서 온갖 억압과 착취를 당하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그들은 고역을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아우성을 쳤다‥‥‥ 이렇게 고역에 짓눌려 하느님께 울부짖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 살펴주셨다"(출애 2,23-2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이집트를 탈출하는 해방의 대 역사를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급는 잊지 못할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나 갈라진 홍해를 건넌 이들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안내로 약속된 땅을 향하여 자유와 기쁨과 희망에 차 행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불평과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새로운 자유의 삶보다는 고생스러운 옛날 노예시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췌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먹이시고, 오늘 독서 말씀대로 광야에서 갈증에 싸인 이들에게 샘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조금의 불평불만으로도 야훼께서 자신들 가운데 계신지 아니 계신지를 의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같은 맥락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시겠지만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고, 상종치 못할 사람들로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지역에서 죄녀인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친교를 이루십니다. “물 좀 달라"는 말로 시작된 이 야곱 우물가에서의 대화는, 사마리아 지역에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공동체는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 여인을 택하셨을까요? 상종 못할 사마리아인이며, 남편을 몇이나 바꾼 죄녀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서와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깊으시고 자상한 의미를 우리 삶에 연결시켜 봅시다.

우리는 신자가 됨으로서 하느님들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으며 ,하느님께 믿음과 신뢰를 드리고 있으며, 하느님에게 안전하게 구원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예컨대 그렇게 기도했건만 우리 자녀가 대학입시에 떨어졌다던가, 재산에 손실을 가져 왔다던가, 사업에 실패를 했다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사랑하던 식구를 잃었거나 하면, 우리는 즉시 하느님께 원망을 하게되고,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 이것이 가장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하 바로 네가 나를 믿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복 받고, 돈 벌고, 사업 잘되고, 건강하고, 대학합격이라는 네 이기심이었구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은, 아주 평범한 일을 통해서 입니다. “물 한 모금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런 준비가 없을 때, 우리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을 때에는 더욱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은 진정 우리와의 친교에 목말라 하십니다. 평범한 일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것이고, 단지 대화가 아니라 깊은 사귐과 친교를 나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분이 오실 때 마음을 열고 대화를 통하여 응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친교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친교와 관계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안에서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 평화는 은총이며,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이며, 기쁨이고, 사랑의 친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 의탁하고 믿고 그분께서 다가오실 때,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먼 하늘에, 높은 곳에 위엄과 권위만 내세우면서, 무뚝뚝하게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드러우시고, 자상하시고, 마음이 여리시고,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못 견디시며,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함께 지내시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와 같고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시지 못하시는 분이시며, 허물이 있으면 있을 수록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갈증을 일으키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시기에, 그분 안에 쉴 때까지 우리는 불안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교를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2000년전 유데아 땅에 일어나고 끓나버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물 한 모금 주시겠습니까?"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녕하세요, 요즈음 어떠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와주시겠어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친교를 이루시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믿으십시요.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 이들을 통하여 틀림없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너무도 명백히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하 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복음의 말씀입니다.



돌아오는 한 주일 동안의 묵상주제는 “어떻게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우리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 아멘.











12.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가)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샘



1887년 미국의 남부 지방 앨라배마에 7살 된 헬렌 켈러 (Helen Heller)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생후 6개월 무렵 심한 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하자 말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마치 야생 동물처럼 사람들과 의사 소통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죽기 전에 이미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정규 대학을 우수생으로 졸업했고, 많은 책들을 출판했으며, 미국 백악관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손님이 되었으며, 전세계의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헬렌이 중복장애인이면서도 이렇게 놀라운 업적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살 된 애니 설리번이라는 개인교사의 숨은 공로와 노력이 있었다. 헬렌이 저술한「내 생애 이야기」라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중복장애를 뛰어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 묘사된 그녀의 체험을 필자가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1887년 어느 화창한 봄날 헬렌은 그녀의 선생님과 함께 봄나들이를 나갔다.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선생님이 가져온 모자룰 쓴 헬렌은 지붕이 있는 우물가에 도달했다.

선생님은 헬렌의 한쪽 손을 흐르는 물속으로 놓고는 다른 쪽의 손바닥에다 천천히「물」 W - A - T - E - R 라고 손가락으로 그려 주었다.



헬렌은 갑자기 선생님이 한쪽 손바닥에 그려준「WATER(물)」 라는 글자가 또 다른 손에 느껴지는 시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흘러내리는 어떤 물체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헬렌의 몸과 마음은 황홀해지고 뭔가 번쩍하는 듯한 섬광을 느꼈다. 그녀는 빛과 희망과 기쁨 속에서 살아있는 말(언어)을 깨우친 것이다.



헬렌은 선생님의 손을 잡고 그동안 너무나도 궁금했던 모든 물체들의 이름을 묻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물체를 만지면 한쪽 손바닥에는 어김없이 그 이름이 선생님의 손가락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무, 바-위, 신-발, 모-자 등등.

그녀가 끊임없이 만지는 물체들은 이제 그녀의 영혼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고(이름 지워지고) 있었다.



이 우물가의 체험은 헬렌의 삶을 영원히 그리고 새롭게 바꾸어 주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비슷하다.

장소가 우물가라는 점,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물을 매개로 하여 대화와 깨달음이 일어났다는 점, 그리고 스승의 메시지가 제자의 삶을 영원히 바꾸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초대 그리스도교회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시켜서 이해했다. 그들은 물가에 모여서 세례를 받았고, 여기서 물은 옛 죄를 씻어버리는 도구이며 영원한 새로운 삶(부활)을 상징했다



우리 예비신자들도 부활 전야 미사 때에 성수대에 모여서 세례를 받는다. 여기서 예비신자들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초대받는다.

헬렌 켈러와 사마리아 여인이 체험한 것처럼 세례자들도 스승의 초대를 받아 그분의 말씀(진리)을 깨달아 새롭고 영원한 삶(사랑의 나라)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어두움과 무지와 악습들에서 해방되도록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물로 씻어내는 때이며, 부활절은 이 생명의 물로 새로 태어나는 때이다.

세례를 받은 우리 신자들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나의 지난 일들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한 4,29)라고 이웃에게 달려가서 복음을 선포해보자.











13.              사순 제3주일   요한 4, 5-42 (가)  생명의 물



물이 없으면 죽는다. 사람도 죽고 동물도, 식물도 죽는다. 그래서 물은 생명과 같다.

보송보송한 모래밭도 물을 계속 뿌리면 생명이 움트고 머지않아 옥토가 된다.

나는 월남전에서 54일간 세수를 못한 적이 있다. 물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먹을 물도 부족한데 감히 얼굴에 찍어바를 엄두를 못냈다. 일선 병사들은 총에 맞은 적군이

개울로 넘어져서 그 피가 물에 낭자하게 흐르는데도, 그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예수님과 우물가의 여인

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는 아프리카 어느 지방의 물 상황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바 있다. 여인네들은 물을 길으려고 수십리를 걸어간다. 가서 길어오는 물은 흙탕물이다.

그 물을 마시고 눈이 머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물을 안마실 수 없는 딱한 형편이었다.



건조기 사막의 기후는 살인적이다. 먼길에 지치고 목마르신 예수께서 시카르라는 동네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계셨다. 제자들은 시내로 먹을 것을 사러가고 홀로 계셨다, 시원한 물 한 사발을 마시면 더위가 가실 것 같았으나 우물의 깊이가 32m나 되니, 누군가가 물을 길으러 오는 사람이 있어야만 마실 수 있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으니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날씨가 더우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석으로 물을 길으러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인지, 낮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사 여인은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예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셨다. 그 여인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엔 남녀가 유별하여, 우리의 남녀칠세부동석보다도 더 엄격한 윤리관이 지배하던 때에 건장한 청년이 물을 청하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유다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처럼 천시하였다.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천시한 이유는 이러하였다. 앗시리아인들이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을 쳐부수고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으며, 나머지 사람들과는 피를 섞어 혼혈을 만들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인들과 이스라엘인들 사이의 혼혈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순종 유다인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멸시하였다. 심지어 사마리아지방을 지날 때는 경계지역에서 그곳에서 묻었던 먼지를 다 털어 버리고 갈 정도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인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예수님은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먼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청했을 것이다"라고 생명의 물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또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라고 텃붙이셨다, 여인은 그 물을 청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물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드러내시려고 그 여인의 과거를 다 알아맞히신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을 맞춘다는 것은 예사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서는 그분은 우리의 희망,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계속 강조해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실 수있는 분이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더구나 그 물은 돈을 내고 마시는 것도 아니고 거저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는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37다"(21,6), “목마른 사

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22,17)라는 말씀이 있다.



요즘 물 값이 얼마나 비싼가! 수돗물 값도 만만치 않은데 하물며 생수야‥‥ 서민들에게

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영원히 목마로지 않는 생명의 기적수를 공짜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생명의 물)

성서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주시겠다는 영적인 물․생명의 물을 성령으로 성령의 은혜로 설명하기도 하고 구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사랑과 소망의 두레박으로 길을 수 있다.



신학자들은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우리 자신과 비교한다. 보잘것없고 죄 많은 우리였으나, 예수께서는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 뵙고 동네로 가서 소문을 퍼뜨린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왔으며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고 믿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웃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해야 한다.











14.                사순 제3주일   요한 4,5-52 (가)  제2의 성

최인호 베드로/작가



시몬느 보봐르는 프랑스의 여류소설가이자 사상가입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사르트르와 우정을 맺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우정은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하는 특이한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상과 행동의 일치에 노력하던 보봐르는 「제2의 성」이란 저술을 통해 여성이 왜 제2의 성으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밝히려 했습니다. 이 책 속에는 여성에 관한 중요한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봐르의 이 말처럼 인류의 반은 남성으로 태어나고 나머지 반은 여성으로 태어나지만 여성은 역사적으로 동등한 성별로 취급받지 못하고 항상 제2의 성으로 차별되며 그런 편견을 통해 여성은 태어나자마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장난감과 다른 놀이 속에서 후천적으로 키워지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인류사상 여성을 여성으로 보지 않고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본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성서 그 어디에도 주님께서 여성을 차별하신 곳이 없습니다. 그런 주님의 마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는 우물가의 장면입니다.

그 당시 유다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성서에도 나와있듯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인인데 어떻게 저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상대방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있는 남자 역시 남편이 아닌, 기구한 팔자의 창녀와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남들에게 소외되어 정오에 가까운 뜨거운 한낮에야 홀로 물을 길러 나올 수밖에 없는 처지였겠습니까. 이런 여인에게 주님은 다가가서 먼저 물을 달라고 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이 ‘사마리아인’이며 ‘창녀와 같은 여인’이란 껍질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 여인 속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여인에게 인간의 본질을 밝혀주시자 사마리아 여인 또한 주님의 존재를 처음에는 ‘유다인’에서 ‘선생님’, 그 ‘선생님’에서 ‘예언자’,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로 발전하여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여성관이 으뜸제자라 할 수 있는 바오로에게서 왜곡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오로는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만을 지니고 있다”(1고린 11,7)는 성차별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남자도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된다”(마태 22,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의 본질은 성별을 초월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신”(창세 1,27)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남자이고 그대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이며 하느님께서 똑같이 창조하신 거룩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대가 여자이기에 앞서 부활하여 하늘의 천사로 다시 태어날 거룩한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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