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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2월 14일 (목) 22:47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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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사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사순 제 2주일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였다

제 1독서: 창세 12, 1-4a 



제 2독서: 2디모 1,8b-10



복음: 마태 17,1-9

오늘, 사순 제 2주일에는 세 개의 전례주기(A해.  B해. C해)가 다같이 각기 다른 세 개의 공관복음의 내용에 따라 예수의 변모에 관한 장면을 전해 준다. 어째서 그 당시 베드로가 느꼈던 것과 같은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들뜬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 뉘우침과 회개의 분위기로 이끌어가고 있는 이 엄숙하고도 깊은 사념의 시기에 들어서자마자 이렇듯 메시아적인 찬란한 빛과 환희로 가득 찬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지극히 아름다운 오늘의 감사송이 해주고 있다고 생각 된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으니,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됨을 증명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데는 ‘교육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즉 우리가 사순절의 의미를 부활축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게 될 부활의 ‘영광’이라는 마지막 종착역의 관점에서 알아듣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분명, 엄숙하고도 절제 있는 생활을 회피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영광’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러한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의한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록 마르코복음(9,2-10)에 근거를 두고 있긴 하지만 그 전통적인 사료들을 아주 자유로운 형태로 재편집하면서 그 가운데서 특히 ‘묵시문학적’ 특징들을 강조하며 또한 다니엘에서 적지 않은 대목을 이끌어 들이고 있다(다니 10,1-11 등 참조) : 예를 들어, 예수의 얼굴이 해오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눈부시다든가, 제자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린다든가, 예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두려워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등등의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와 ‘초월성’의 의미를 자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 체험과는 다른 세계, 다른 실체에 속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를 통하여 그 나라를 이루고 있으며 그 나라의 특징을 말해주는 모든 ‘표징’들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충만하게 드러나고 있다.

 모세, 엘리야와 같은 과거의 뛰어난 인물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느님의 나라는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성을 발견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참여와 현존을 통해 이루어지며 풍요해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의 실체임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그리스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 자체적 설명만으로는 넉넉지가 못하다. 그리하여 이 묵시문학적인 장면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과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밝히 알려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온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 17,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즉시 세 제자들 즉 예수께서 이 특별한 체험을 하도록 선택하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여전히 일상적인 예수를 대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그 신비의 의미는 중단되고 만다 :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땅에 엎으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을 때는 예수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6-8절).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마술이나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더구나 예수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당신의 부활 전에는 퍼뜨리지 말라고 하신다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9절).


부활의 영광의‘예표’로서의 예수의 변모

 어째서 일까? 만약 그 금령이 적어도 성서 본문의 내용 그대로, 남아 있는 사도들까지도 겨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그 금령의 동기는 전혀 분명치가 않다. 아마도 그 동기를 우리는 한편으로는 예수의 변모가 ‘장차 올’ 세상의 결정적 영광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부활의 신비의 예표와 같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영광스럽고 환희에 찬 짧은 순간의 신비 -베드로가 무한정 연장시키고자 했던 :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4절) - 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장차 하게 될 예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 신비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또한 ‘지상의’ 예수와 ‘영광의 주님’ 사이의 ‘영속성’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부활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분명 예수의 변모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그 두 가지 체험을 강하게 연결시켜주는 고리역할을 한다. 즉 변모하신 예수는 제자들의 열정적인 상상력이나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어떤 환상적인 가공 인물이 아니라 이미 앞서 소유하고 있던 신적 ‘영광’을 신비스러운 변모의 사건이 보여주고 있듯이 지금 이 순간 찬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한 ‘구체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까닭에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변모를 ‘선행적’ 빠스카 체험이라고 한다.

 이 모든 내용은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성서 대목이 놓여 있는 정확한 위치를 생각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와 그 즉시 이어지는 베드로의 항변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통해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마태 16,21-28) 뒤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께서는 수난 뒤에 찾아올 영광된 미래가 있고 또 그분 안에서는 야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명과 이미 다니엘이 예언한(다니 7, 13-14) ‘사람의 아들’ 로서 갖게 될 영광스러운 종말의 심판자로서의 사명이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직 빠스카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의 단일한 인격과 단일적 체험이 지니고 있는 그 대립적 양면성을 함께 결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사실상 적어도 존재론적 차원에서 2 천년 뒤의 그리스도교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성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사 42, 1 ; 마태 3, 17참조)이라고 온 세상에 장엄하게 선포한 그 소리에 덧붙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고 한다.

 이 말은 하느님의 마지막 결정적인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러 올 제 2의 모세로서 기대되는 미래의 예언자의 모습을 상기 시킨다 :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명 18, 15 참조).

 여기서 ‘듣는다’는 그 말은 문맥 전체상으로 볼 때 보다 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즉 그것은 신앙의 빛에 의거하여 그리스도를 겸손과 영광 그리고 죽기까지 당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외적으로 분명 모순되지만 생명적인 가치와 체험들이 깊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듣는다’라는 말은 ‘다시 체험하다’, ‘다시 살라’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긴장과 찬란한 조화의 요소를 도시에 갖추고 있는 사순절의 전체적 의미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고향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오늘의 제 1독서 내용도 결국은 똑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12,1-3).

 여기서도 야훼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처음으로 받고 있는 아브라함이 무한히 뛰어 넘어야 할 긴장과 고통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감쌀 수 있는 영광과 ‘축복’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고향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셀 수 없는 하늘의 별들보다도 무수히 많은(창세 15, 5참조)무리의 선조가 되기 위해 ‘자신’의 고향과 땅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처럼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모든 것을 - 자기의 혈육까지도 - ‘근본적인 끊어버림’은 번창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에 대한 끊어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나약한 인간적 지성과 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에 의해 마련된 새로운 삶의 설계를 용감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간의 활력을 마비시키거나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력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무한한 빛과 무한한 힘에 개방시켜 강화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줄’알았다. 그래서 그는 배수진을 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다. 그리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기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있고 또한 마지막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 그 새로운 역사의 주기는 참된 구원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이 세상을 악행과 증오가 가득한 편협한 ‘흙덩이’(Dante, 「신곡」; 천국편 ⅩⅩⅡ, 151)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찬란한 ‘서막’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뜻에 순응하는 도구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역사적 주기이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정의가 깃들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 (2베드 3,13). 신앙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의 계획에  보다 더 적합한 현실과 상황을 이루어 나가는 놀라운 일을 그분과 더불어 시작한다. 이런 까닭에 오직 신앙만이 미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 지상 위에 보다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먼저 자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통하여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쇄신과 변화의 힘을 충실히 또한 용기있게 선포되는 복음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그 복음 속에는 ‘우리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루어주실 수 있는 ‘구원’에 대한 선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아마도 전교사명을 수행하던 중에 만난 수 많은 어려움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있었던 제자 디모테오에게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 버리시고 복음을 통해서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2디모 1,8-10)

 그 옛날 타볼산에서 “그리스도의 얼굴”(2고린 4,6참조)위에서 찬란히 빛나던 그 빛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복음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크리스찬은 항상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끊임없이 ‘변모’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순 제 3주일



제 1독서 : 출애 17,3-7

제 2독서 : 로마 5, 1-2. 5-8

복 음 : 요한4, 5-42

 이 주일의 전례를 지배하고 있는 물에 관한 주제는 여러 가지 뜻 과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의 의도는 사순절의 ‘신비’가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을 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에제키엘서의 유명한 한 대목을 노래하고 있는 오늘의 입당송에서는 물이 성령과 더불어서 인간들을 그들의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는 ‘메시아적’ 산물로서 나타나고 있다 : “내 너희 가운데서 섬김을 받게 될 때… 내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리리니, 너희는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하여 지고 나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리라”(에제 36,23. 25-26).

 제 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모세에게 ‘불평을 했을 때’ 바위에서 솟아난 물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출애 17,3-7).

 여기서 물은 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간주되고 있다. : 광야는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 고갈되어버린 장소로서 물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물이 없이는 죽고 만다! “어째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출애 17,3). 절망 속에 있었지만 그 백성들은 죽음의 운명에 항거하며 하느님께 기적을 요구한다. : 마실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남기를 바란다는 표지이다! 이 점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엮어내는 무수한 불충실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적극적 관점이다.

 그 다음,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놀라운 복음의 내용은 온통 물이라는 표지하에 전개 되며, 그 상징적 의미를 영적으로 무한히 발전시켜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신이 이 지상을 풍성히 먹여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에 이르고 있다 : 목마른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목말라’하시며 당신을 받아주기를 요구하신다. 마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것 처럼!



예수께서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사마리아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고유의 대목들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이야기를 통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론적’ 신비를 깊이 추구함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고유한 주제들 가운데 몇 가지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 이야기는 실제적으로 볼 때 몇 개의 이야기체 형식의 구절들로 짜여 있는 두 개의 중요한 대화 (앞의 것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이고 뒤의 것은 제자들과의 대화이다 : 4,7-26그리고 31-38)를 내포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대화는 잘 알려져 있는 요한의 문학체계에 따라 전개 된다 : 예수의 정체는 점진적으로 밝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진짜 정체를 서둘러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인간의 결단이 이루어진다 :그 결단은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며, 그의 생활 설계를 변경케 하고 그로 하여금 과거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게끔 한다. 그것은 ‘회개’의 선물이며, 그 회개 때문에 하느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은 믿는 이들을 인도하시는 새로운 ‘영적인 분’으로 나타나시게 된다.

 아주 길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는 오늘 복음을 철저히 다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중 가장 근본적인 몇 가지 내용 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목마름’의 신비를 보자 : 그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 길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그 우물가에 가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워 있었다. 마침 그때에 한 사마라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요한 4, 5-7).

 구약성서에서 보면 우물이나 샘터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조들과(창세 24, 10-25 ; 26, 14-22 참조) 모세와(출애 2, 15-21참조) 그리고 출애굽 기간 동안의 선민들 자신 등의 여러 생활(출애 15, 22-27; 17, 1-7등 참조) 속에서 적지 않이 전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물이 흔치 않았고 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우물가에’ 가 앉으신다는 것은 그 지나간 역사전체가 그분께로 흘러가 모아지고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곧 보게 될 것처럼 ‘참다운’ 물은 결국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정말로 갈증을 느끼셨다 ; 때는 ‘정오에 가까웠고’,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먼 길을 여행하시느라 지치셨다. 바로 그 순간 한 여인이 큰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왔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예를 갖춰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유다인이 자기에게 마실 물을 청하였기 때문에 깜짝 놀란(9절) 그 여인은 바로 그 순간에  정말로 신선한 물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두 사람의) 역할이 뒤바뀌고 있고 대화는 우의적 성격을 띄게 된다 :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10절). 그러나 그 여자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을 아주 통속적이고 공리적인 어떤 것으로 돌려버리려고 한다 :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15절) ; 인간의 욕망은 항상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무한한 것을 자기 자신의 편협한 마음의 늪 속에가 가두어 두려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때 예수께서는 이미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그 여자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우선 그녀에게 무한한 은총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다음에는 그녀에게 무한한 은총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다음에는 그녀의 비참한 도덕적 생활의 심연을 열어 보여 주신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14, 14. 17-18).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데는 항상 어떤 장애물 있다 :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해맑은 ‘진리’와 ‘사랑’의 현존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음을 느끼는 악의 교묘한 저항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영원히 살게 할’(14절)샘솟는 물이라는 상징적 개념이 어째서 이 모든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나!

 사실, 그 샘솟는 물은 한 편으로 볼 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 또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물은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는 순간에 우리 안에 풍성히 부어주실 성령 - 그리스도의 구원사업 자체를 완성시켜야 할 분으로서 - 의 ‘선물’도 암시한다 :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 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요한 7, 37-39).

 성령의 선물로써 믿는 이들은 만약 우리의 마음이 편협하지만 않다면 이미 한없는 진리와 사랑의 완전한 ‘충만성’, ‘역동성’ 그리고 계속적인 성장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물의 상징적 의미에 의해 대화의 내용은 보다 더 깊어지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 그리스도는 갈증을 풀어주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물’이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도 기다리던 종말의 때의 예언자이신 - 과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 좀 더 궁국적인 사실을 보여 달라고 촉구하고 있는 그 여인은 자기 생활의 비밀스런 일들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참된 예배의 장소에 관한 토론을 시작 한다 :   “우리 조상은 저 산(Garizim)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 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다른 문제들 말고도 이 문제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이 대립되었던(9절 참조)여러 가지 이유들 중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와의 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지점에서 지극히 엄숙하게 단언하신다 :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21-24절).

 주께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중요한 사실에 있다 ; 이제부터는 예배 자체가 내용상으로 또 의미상으로 바뀐다. 더 이상 하느님은 인간들이 가까이 가려고 희생과 기도로써 비위를 맞춰드려야 하는 그런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 그분은 마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당신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주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가까이’다가와 계시고 직접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이시다. 사실, ‘영적으로 참되게’라는 표현은 흔히 구약의 예배에 있었던 순수 물질적이고 외적인 예배에 대립되는 내적이고 영신적인 예배를 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안에 거처사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의 빛에 비추어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예배를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예배가 바로 지금 즉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이 순간’에 시작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예배의 ‘새로운 의미’의 동기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 동기는 바로 예수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실, 오직 예수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곧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예배는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 아니 바로 그분 자신이 ‘새로운 예배’이시다.

 “이처럼 20절에서 그 여인에 의해 제시된 주제는 생략되지 않고 예수께서는 여전히 참된 예배의 자리, 참된 성전에 대해 대답해 주고 계시다 : 그러나 지금 우리의 성전은 예수이시며 이 순간부터는 이 성전이 그리짐(Garizim)산성과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대신한다”(I. De La Potterie, Gesu verita, Marietti, Torino 1973, p.47).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이시다”

여기서 계시는 완결된다. 낯선 유다인이 말한 사실들의 내용 또는 계시를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에 연관시키는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대답하신다 :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그러자 그녀는 기쁨과 놀라움에 차서 동네로 달려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린다 :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 모여 들었다”(29-30). 이 전체 문맥에서는 요한 복음사가의 보편주의적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 비록 예수께서 엄숙히 단언하시는 것처럼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는’(22절)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구원은 유다인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한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의 신앙 고백은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말해준다 :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42절).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과 스승을 위해 양식을 구하러 동네에 갔다 돌아온 제자들과 예수의 보다 짤막한 대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들도 거의 사마리아 여자처럼 예수의 신비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께서는 음식을 좀 드시라는 제자들의 권유를 거절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32절) 그래서 그들은 어떤 다른 사람이 예수께서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다고 생각한다(33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 말씀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이해시키시려고 애쓰신다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을 받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알곡을 모아들인다. 그래서 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과연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는 속담이 맞다. 남들이 수고하여 지은 곡식을 거두라고 나는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였지만 그 수고의 열매는 너희가 거두는 것이다”(24-38절).

 물이라는 상징적 개념으로부터 ‘양식’이라는 상징적 개념에 이르기 까지 두 가지가 다 생명적 요소들이다. 신앙의 세계는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체험 속에서 그 접붙일 자리를 발견한다 : 우리들의 체험들은 결코 그 자체 안에 충분한 설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내용은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성부의 ‘뜻’ 그리고 그에게 완성하도록 맡기신 성부의 ‘일’(34절)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일’이란 어떠한 것일까?

 문맥 전체로 볼 때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있고 또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진 그 결과가 상징적 예표처럼 나타나고 있는 ‘전교사명’을 말한다 :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35절).

 그러므로 때때로 분노나 절망같은 감정에 휩싸여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바로 거기에 구원에 대한 간절한 원의가 있을 수 있다. 좌절하거나 실망하고 있는 젊은이들,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 방치되거나 내팽개쳐진 병든이들, 자만심에 가득 차 무질서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생활을 하는 지식인들, 이미 자신들의 부와 포만감에 싫증이 나 있는 향락가들, 이 모든 불쌍한 군중의 ‘기다림’에 과연 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참으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과 진리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우리 크리스찬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것일까?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히 교회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원의와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나은 크리스찬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훌륭한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 그 둘은 결국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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