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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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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7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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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18주일

 22. 김창석 신부(다)/37

        23. 김정진 신부(다)/38                24. 함세웅 신부(다)/39

        25. 이기정 신부(다)/41                26. 함세웅 신부(다)/44

        27. 강길웅 신부(다)/45                28. 강영구 신부(다)/47

        29. 수탉과 보석(다)/50                30. 내 재산은(다)/51







22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장독대 

                                                  김창석 신부



장독대는 우리나라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소이다. 농촌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식 아파트에도 꼭 있는 것이 장독대이다. 이 장독대에 대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1백년도 넘는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나온 프랑스 선교 신부 한 분이 벽촌 시골 교회를 찾아갔다. 그는 저녁 식사 대접을 융숭하게 받고 나서 변소를 찾아 나섰다. 당시 우리나라 시골 변소에 대한 예비 지식이 없는 벽안의 외국인에게, 뒷간이 뒷간처럼 보였을 리 없었다.

  그 프랑스 신부는 뒤뜰로 갔다. 거기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크고 작은 옹기 그릇들이 가득했다. 독도 있고 항아리도 있고 뚝배기도 있고 옹배기도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그것이 된장 냄새인 줄 알 리가 없었다. 장독대를 변소로 오인한 그 프랑스 신부는 감탄했다. 한국 사람들은 식구마다 변기 크기가 다르구나, 각자 알맞게 따로 따로 쓸 만큼 정결한 사람들이구나 생각하고, 그는 그 중에 자기에게 맞는 그릇을 골라 일을 마쳤다.

  

다음날 아침 그것을 발견한 주인집 아주머니가 크게 당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장독대의 그릇들처럼 우리의 마음도 각자 크기가 다르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크기만큼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크면 많이 받고 작으면 조금 밖에 못 받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의 그릇을 크게 할 수 있을까? 우리 마음을 비우면 된다. 우리 마음의 그릇이 이미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올 틈이 없다. 물욕, 정욕, 이기심, 증오, 질투심 등을 우리 마음으로부터 몰아내어야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좁고 편협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넓어질 수 없다.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인 사람의 마음이 넓을 리 없다.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까지 미워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죄보다도 사람을 더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이 넓을 수 없다.남을 이해하고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넓을 수 없다.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넓을 수 없다. 육체도 먹기만 하면 뚱뚱해지고 병이 생긴다. 같은 이치로 우리 마음도 비어 있어야 병도 없고 평안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물욕을 버리지 못하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죽을 때 당황하게 된다.

  

스티븐 빈센트 베네는 이런 말을 했다. “생명은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 의식이 없을 때 없어진다.” 사람의 마음이 비어 있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있고 또한 죽음을 넘어서 영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사람은 마음을 비우는 자세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살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해서 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나누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23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

                                                  김정진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이 세상 재물을 알맞게 잘 쓰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온갖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어떤 부자가 많은 재물을 어디에다 쌓을 까 걱정하면서, 이제 몇 해 동안은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면서,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미련한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네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맺으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을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나도 이 세상일에만 골몰하고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가장으로서는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고 가족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불편을 주지 않도록 열심히 일할 정신과 결심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겠습니까. 오히려 칭찬할 점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께 인색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탄생하시고 또 가난하게 한평생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자의 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예수님이 미사 때마다 천상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도 우리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당신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또한 독생자로 하여금 죽게까지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것, 우리의 생명마저도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잘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밤 네 영혼이 네게서 떠나가리라.>(루가 12,20) 이렇게 되면 그 많은 재산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느 곳에 구두쇠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많이 모은 돈을 금화로 바꾸어서는 항아리에 담아 방바닥 밑을 파고 감추어 두고는 매일 밤 덧문을 꼭꼭 잠근 후에 슬그머니 꺼내 보고는 싱글벙글하면서 세어 보곤 하였습니다.



그 노인장도 죽음이 임박하였음에는 어쩔 수가 없었음인지 생각다 못해 떡장수네 집에서 말랑말랑한 떡을 잔뜩 사와서는 덧문을 꼭꼭 잠가 버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덧문이 닫힌 채로 있었기에 이웃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노인은 금화를 한 푼씩 한 푼씩 말랑말랑한 그 많은 떡에 모조리 묻어 놓고는 그것을 그대로 꿀떡 삼켜 버리려 했던지, 일곱 개째의 떡이 그 금화와 함께 목구멍에 걸려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욕심쟁이 노인은 죽은 후에도 금화를 이 세상에 남겨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까와서 뱃속에 넣어 가지고 저 세상에까지 가지고 가려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 - 육신 일에만 골몰하고 하느님의 공경을 소홀히 하는 자나, 자기 재산이라고 해서 자신을 위해서만 몽땅 써 버리는 자는 앞서 말한 구두쇠 노인장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4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우상을 섬기는 종

                                                       함세웅 신부



  오늘을 사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 현상 속의 교회는 육적 인간으로서의 우리 모습이 하느님과의 만남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의 모습은 하느님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를 원한다기 보다는 단절로 치닫는 느낌이 있습니다.

  더욱더 우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단절로 인정하기보다는 합일로 주장함이며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을 사람에게 편리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사실에서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변화될 수 없으나 지혜로운 듯하면서도 우매한 인간들은 자신을 사탄과의 야합에 내팽개쳐 버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말해온 이들은 한국인의 사고의 불투명성이 언어로부터 왔다고 말하는가 하면, 복종과 굴종 내지는 무조건 참으면 된다는 인(仁)의 사상 지배에 의해 군주의 지배 형태를 벗어나면 불안해하는 민족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민주니 자유, 정의, 평화란 단어는 우리 민족에겐 생소한 단어임이 사실이라고 볼 때에 혹자는 한국의 역사는 쟁취한 역사라기보다는 주어진 역사라고까지 혹평하면서 8․15해방의 의미를 간파한 바 있습니다. 더구나 언어조차도 너무도 짧은 민정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다스리는 자로서의 말들이 범람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봉사자며 국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의 언어의 의미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 민족 사상의 굴종 의식이 싹텃는지는 모르나 이는 육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점철하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연연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우리는 자유의 고귀함을 느낄 때까지 당해야 한다” 그리고 또 “민주주의는 정치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각인한 것이며 정치는 국민을 정신적 타락으로부터 막는 도덕성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나치스에 저항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 만연된 폭력은 중간 계층 즉 그 시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책임을 진 종교인, 문학인, 또는 그 밖에 지식인들이 태만했기 때문이며, 폭력이 행사됨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뼈저리게 당해 봐야만 무엇이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써 고통을 통한 기쁨의 삶인 예수를 표현합니다. 즉 저항의 단절과 미온적 저항은 공동체 의식을 저하시키고 공동체 자체를 침묵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교회 자체가 도전받는 시대로 부상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며, 영신적 아버지들의 고통은 교회 자체가 당하는 고난이므로 초기 교회가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하느님 대전에 박해를 감수하며 공동체 전체가 목숨을 내맡긴 순교자들의 참모습을 본받도록 해야겠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무심한 시간과 발걸음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썩은 죽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의 허무한 발걸음은 많은 억울한 인간들의 고난을 딛고 선 무서운 발걸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다양성 속에 일치를 말하면서 각자 나름의 길을 주장하지만, 반드시 각자 자신의 포기가 선행되어야 함에도 쉽게 자기 포기를 안하는 인간 심성은 다양성의 그늘 뒤에 숨은 자기 합리화란 그늘에 있음을 절실히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길에 배치되며 이를 외치는 이들은 위장된 이론으로 하느님을 자신에게 편리한 하느님으로 꾸며 놓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각자이나 성체는 하나이듯이 하나로 모인 공동체 속의 우리의 다양성은 교회를 이룹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교회 또는 사회에서 지식인일지 모르나 알아도 모른 척하는 관제 대중 집단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 용서를 청하고 새 사람이 됩시다.

  “주인의 뜻을 모른 종은 매맞을 짓을 했어도 덜 맞을 것이나,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면 많은 매를 면치 못하리라”(루가 19,47) -80.8.10























25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무식하면 지옥, 유식하면 천당

                                                       이기정 신부



참 실감나는 예화입니다. 예수님은 창작력과 화술이 뛰어나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젊은 날에,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실감과 감명이 새삼 절실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홍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는 결론으로, 세상살이의 결과를 간단히, 드라마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돈을 모으느라고 악착같이 살 때에는 병도 없고, 근심도 없고, 지치지도 않지만, 다 모으고 나면 병도 생기고, 근심도 많아지고, 인생의 의문도 커진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징후를 보는 듯합니다.



천당 들어가기 위한 어학시험



예수님은 현세의 인생과 후세의 생활을, 재산을 소재로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소재를 어학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75년에 저는 갑자기 이탈리아로 공부하러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탈리아 말을 전혀 모르는 저는 생지옥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교리에서 말하는 지옥은, 장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신학적 표현을 실감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놀랐습니다.

외국 영화 배우들은 죄다 여기 있구나! 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생겼습니다. 특히 여자들이 어쩌면 그렇게 매력 있는 미인들이 많은지, 이탈리아에 살면서 이탈리아 말을 잘하는 남자들은 모두 천당 같은 생활이고, 저처럼 말을 못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생지옥같은 생활이라고 절감했습니다.



 만일 내가 이탈리아로 갈 것을 떠나기 1년 전에만 미리 알았어도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속을 태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심경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심판하시기에 힘드실 텐데 어떻게 도와 드릴까 생각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저는 천당문을 지키는 베드로 사도가 휴가 가시고, 예수님마저 휴가 가시면서 저에게 대신 일을 맡기시면 능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심판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심판 전에 간단한 것만 조사하고 이리 가시오, 저리 가시오 하면 됩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공상을 하면서, 혼자 미소지은 적도 있습니다. 출신국 성명 생년월일 정도는 기본이니까! 그렇다 치고 “어학 실력은 어떠하신지요?"라고 묻는 것이 저의 질문의 요점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홍길동은 “저는 한국인으로서 우리말, 현대 지성인이면 알아야 할 영어, 과거를 알기 위해 일어, 미래 교역을 위해 중국어, 불란서에서 공부했으니 불어, 그리고 학교 때 제 부전공이 동시통역이었으므로 독어, 스페인어 합해서 7개 국어는 자신 있습니다"고 대답하겠지요.



그러면 저는 무감동한 표정으로 “그 정도 말밖에 몰라요?" 하고 되묻습니다. “아니, 나말고 또 말에 자신 있으면 나오라고 해요!" 하며 우쭐대겠지요. 그러나 저는 싱겁다는 듯이 “그 말들은 세상 사는 동안만 써먹고 버릴 말이고, 죽은 다음에 지금 와서 쓸 말은 어느 정도 배웠냐 이겁니다"라고 합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 세상 말 배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무슨 말을 또 배워요? 아니 정말 천당 말이 뭐 있기나 합니까?" 하며 따질 겁니다.



그러면 저는 “그럼요! 하느님이 직접 인간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말씀을 아예 인간으로 탄생시키셨는데도 그걸 몰랐다구요? 원 쯧쯧‥‥ 예수님 있잖아요. 예수님!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 못 들었나요?"라고 야단친 후 “하느님은 당신이 어학 실력을 우쭐대던 날 '이 어리석은 자야, 눈 깜짝할 순간을 살기 위해 말공부에 전력을 다 쏟고, 영원히 살기 위한 말공부는 생각지도 않으니 너 조금 후에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면 어찌 하겠느냐?'고 하셨지요"라고 말해주고 나서, 저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당신은 저쪽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겁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영영 다시 못나올 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문 앞에 서면, 신나게 달려들어갑니다. 그 문 앞에 서서 망설이고 걱정하면서 들여다보다가, 너무나 황홀해서 자기도 모르게 뛰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세상의 예쁜 사람 모두를 모아도 못 당할 예쁜 미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순간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들은 너무나 예쁜 여성들을 보고, 여성들 은 너무나 근사한 남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옥생활이 시작됩니다.



하늘 나라 생활에서 의사 전달이 전혀 통하지 않아 미치기 시작합니다. 웃어도 왜 웃는지 몰라 신경질이 나겠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못 알아들어 환장하겠고, 우루루 모여 가도 왜 가는지 몰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렇게 영원히 살아야 하니, 얼마나 속이 터지겠습니까.

이제 일단 끝냈던 이탈리아 미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저는 열심히 말을 배우게 되었고, 그들과 의사소통이 잘되기 시작하여 생활은 점점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과 말해 보니, 결국 겉보기와는 다른 부족한 인간임을 알게 되면서, 이탈리아도 천당이 아니고, 세상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언어 중의 언어이신 예수



다시 천당 말을 하는 세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저에게 재판을 받은 그 사람은 한탄을 합니다. “세상에서 기억력이 뛰어나 천재라는 말까지 들은 내 뇌를 그냥 두고 왔으니, 무엇으로 더 공부하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고!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 이 곳에는 종이도 연필도 없으니, 어찌 기록인들 하겠는가! 기록 자체가 필요 없는 하늘 나라이니, 애고애고‥‥ 환장해 죽을 지경이로고!"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 변한다는 것이 믿는 이들에게는 무한한 세계를 준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육신의 모든 것, 우리가 지닌 모든 것,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이롭게, 혹은 해롭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변하고 있고, 또한 변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모든 것을 소재로 세속 동네의 사람들은 배우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학위를 주고 상을 주며 살고 있는데, 이런 것은 모두 세상이라는 구역에서만, 물질이라는 조건을 위해서만 쓰는 것들입니다.



즉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만 통하는 지식에 정열을 기울이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교회 동네의 사람들은 배우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하면서도 세속 동네의 사람들이 이해 못할 활동도 합니다.

세상이 주는 상을 안 받으려 한다든가, 일하고도 대가를 외면한다든가 하는 행동들입니다. 봉사하고, 희생하고, 용서하고, 도와주고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그런 태도입니다. 그러면서 천당 말(성서의 예수님)을 열심히 배웁니다. 교회 동네 사람들은 세상을 살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배우는 것을 배우면서, 동시에 천당 말을 배우며 사는 사람들로 두 세계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해하는 두뇌를 갖고 있는가 하면, 믿는다는 고귀한 결단도 갖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은 이상의 두 면을 완벽하게 겸비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시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언어 중의 언어이시며, 모든 인간들이 진화되어 가야 할 목표에 계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늘 나라에서 무식하면 지옥이고, 유식하면 천당입니다. 변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유식을 배워 자신을 변하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영원히 유식하게 되실 교우 여러분, 미리 앞당겨 축하드립니다. 























26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기도하는 생활

                                                               함세웅 신부



“이제 많이 벌었으니 큰집을 짓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나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바로 십자가의 역설적 진리(루가 9,23-25)를 예화를 통해 설명한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 예화를 갑작스런 인간의 죽음이나 또는 그러한 위협, 공포를 주는 의미로만 단순히 알아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본 주제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내가 자리잡은 현재와 현실 속에서 순간 순간 이루어지는 또는 나타나는 뚜렷한 하느님의 목소리와 심판을 감지할 수 있는 눈과 귀와 머리를 지녀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두들 바쁩니다. 유치원생, 초등 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재수생, 대학생, 직장인, 어린이, 엄마, 할머니, 회장, 전무, 상무, 직원, 근로자, 공무원, 그리고 병들어 누워있는 환자도 모두들 바쁩니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 바쁜 생활권 속에서 우리는 그래도 매일 꼭 해야 하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다, 잠을 잔다, 학교, 과외, 출퇴근, 모임 등등. 그런데 여기에서 꼭 뒤로 밀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 신앙 생활입니다. 그것은 없어도 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심판은 순간 순간 내려집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너의 내일이 꼭 보장되었는가?” 기도를 생활화하기 위하여 나는 아침에 깨자마자 다음과 같은 지향을 갖고 첫 성호를 긋습니다.

  

“주여,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당신의 뜻에 부합하게 하시며, 또 이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서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끝 성호를 긋는다.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제 잘못과 허물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 품에 잠들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그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그는 때로는 국지전(局地戰)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언제나 전쟁에서 꼭 이기는 결정적 승리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그는 자신의 시간과 건강과 재산과 미래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며 사는 신앙인입니다.









27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헛되지 않은 세상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전도 1,2; 2,21~23 (이 세상 노고에서 인간이 무슨 이익을 얻으리오?) 

제2독서 골로 3,1~5.9~11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위엣 것을 찾으라) 

복 음 루가 12,13~21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오늘 1독서에서 전도서의 저자가 크게 한탄한 말을 지난번에 붕괴된 삼풍백화점의 주인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자는 또 말합니다. “온갖 재간을 다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성실치 못한 자세로 돈을 벌려고 한 그 자세부터 모순이었으며 설계부터 시작해서 시공 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건실하고 정직한 게 없었습니다. 모래도 철근도 다 엉터리요 가짜였으며 그저 '돈', '돈', 돈만이 전부였습니다. 국가 공무원도 다 거짓이었습니다. 돈 앞에 사람이 무력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어떻게 되느냐?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백화점 주인의 재산이 약 3천억원인데 피해 보상에 드는 비용이 약 3천억 원이랍니다. 그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었지만 스스로 다 털리게 됩니다. 그것도 악명을 세상에 떨치며. 성서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전도서의 저자가 “헛되다"고 한탄한 것은 인생을 무시하고 세상을 경멸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을 잊을 때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거기 계셔야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테면 헛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아무리 악해도 살 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세상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악한 욕심과 하느님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지만 하느님을 거기 모시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또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일면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돈과 재물 앞에는 신앙도 가족도 없으며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많이 갖고 많은 것을 누리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세상을 뒤집어서 살려고 합니다. 지난 삼풍백화점 붕괴시에 자원 봉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간도 금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직장도 가정도 희생을 했습니다. 오직 단 한 사람의 생명이 라도 건져 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에너지도 많이 소비됐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아깝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꾸 차지하려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잃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헛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베풀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베푼 그것을 몇 배로 얻습니다. 사실, 남에게 베푼 작은 사랑의 기운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베품은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말하기를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미에 가서는 “그리스도만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땀흘려서 벌어야 합니다. 재물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느님을 재물 밑에 모셔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선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하느님 위로 올라가면 재물은 악이 됩니다. 말하기조차 송구스런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재물 밑에 모십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선'이라도 그것에서 하느님을 외면하면 그것은 헛된 것이 됩니다.



진정한 재물은 무엇입니까? 친절한 말 한마디가 세상의 재물이 됩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이 세상의 꽃이 되며 의를 위해 수고하고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영원한 불빛이 됩니다. 그리고 돈과 재물 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고 베풀 때 그때 진정한 나의 재물이 됩니다. 영원히 잃지 않는 재물이 됩니다.



재물을 땅에 쌓지 맙시다. 그것은 좀먹고 녹슬어 못쓰게 되며 또 도둑이 항상 노리고 있어서 불안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읍시다. 그 재물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이 바로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하늘에 쌓을 때 세상을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지혜가 됩니다.













28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돈에 눈먼 사람들

                                                            강영구 신부



오늘은 8월 들어서 처음 맞는 연중 제18 주일입니다. 날씨가 정말 덥고 불쾌 지수도 참으로 높습니다. 이런 여름날을 시원하게 지내는 비결은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면 이 여름 날씨도 그렇게 덥지는 않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이번 여름을 보내도록 합시다.

  

그리스 신화에는 미다스(마이다스) 왕의 전설이 나옵니다. 프리기아 지방에 미다스라는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디오니소스라는 신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실레노스라는 스승이자 양부가 있었습니다. 실레노스는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었습니다. 하루는 실레노스가 술에 만취되어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농부들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들은 술 취한 실레노스를 미다스 왕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미다스 왕은 실레노스를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주연을 베풀어 실레노스를 환대했습니다. 열하루가 되는 날 미다스는 실레노스를 그의 제자이자 양아들인 디오니소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다 들어 주겠노라 했습니다. 미다스는 그렇다면 자신이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이 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당신은 틀림없이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미다스는 황금의 손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청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미다스는 굉장한 능력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참나무 가지를 꺾으니, 바로 그것이 손안에서 황금의 가지로 변했습니다. 미다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돌을 주워 들었습니다. 그 돌덩이는 즉시 황금 덩이로 변했습니다.

다음에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땄습니다. 그것도 즉시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미다스의 기쁨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나 황금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전대 미문의 재앙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하인들에게 훌륭한 음식을 장만하도록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빵을 먹기 위해서 빵을 집어 들었을 때, 그 빵은 금방 황금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음식을 집어 들었을 때도 그것은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금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려고 잔을 들자 포도주는 출렁이는 황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다스 왕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이면서도, 그 풍성한 음식상 앞에서 굶어 죽을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전대 미문의 재앙 앞에서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황금 덩이 속에 묻혀서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미다스는 얼마 전까지 그토록 원했던 선물을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굶어 죽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미다스는 황금으로 빛나는 두 팔을 들고,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디오니소스에게 애원하였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현대판 미다스 왕들이 매일같이 신문과 텔레비전의 뉴스 시간을 장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보사 땅 사기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검찰의 수사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다 합시다. 660억 원이라는 돈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난 돈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돈인지 한번 계산해 보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봉급 생활자의 경우 1년이면 얼마를 받을 수 있습니까? 1년이면 2천4백만 원입니다. 10년이면 2억 4천만 원,100년이면 24억 원, 천 년이면 240억 원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봉급 생활자가 족히 2천5백 년을 벌어야 660억 원의 돈이 됩니다. 200만 원을 받는 봉급 생활자가 신라 시대 때부터 죽지 않고 줄곧 벌어야 겨우 쥘 수 있는 돈이 660억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돈으로 사기꾼들은 한 2천5백 년 동안은 아무 염려 없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고, 사기꾼들에게 놀아나서 엄청난 돈을 날린 제일 생명도 엄청난 횡재를 하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돈더미에 깔려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황금의 팔을 가지고 굶어 죽게된 미다스 왕의 꼴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탐욕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탐욕은 덫이니까요 탐욕은 사람을 눈멀게 하는 마약과 같은 것이니까요 거미줄에 걸린 곤충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거미줄에 더욱 휘감기게 됩니다. 나중에는 꼼짝도 못하고 거미에게 먹히게 됩니다. 탐욕의 덫에 걸린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습니다. 탐욕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늪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탐욕이 제공하는 향락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만, 많은 소출을 얻게 된 부자는 혼자서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탐욕은 이렇게 쾌락과 향락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죽음을 가져다 줍니다. 썩기 때문이지요.

  

탐욕이 제공하는 향락을 맛본 사람은 눈이 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는 자신이 내일 죽게 될 운명인 것도 알지 못한 채, 실컷 쉬고 먹고 마실 생각만 합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지 못하는 눈먼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한심하고 불쌍한 노릇이지요. 그가 창고에 쌓아 둔 재산과 곡식은 누구의 차지가 됩니까?

  

탐욕에 빠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보지 못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임을 망각하고, 돈과 재물로 감싸여 있는 자신이 본래의 자기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급 승용차 타는 자기, 값비싼 외국 상표 붙은 옷만 입는 자기, 외제품과 사치스러운 물건을 쓰는 자기,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자기, 이런 모습이 자기본래의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중에 돈과 재물만 있다면 아무런 걱정도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기는 허섭스레기로 뒤덮여 있으니,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눈먼 자는 이웃과 형제도 보지 못하고, 하느님도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눌 줄도 모르고 베풀 줄도 모릅니다. 다만 탐욕이 제공하는 향락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인색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복음의 말미에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에 있는 “사해”라는 호수를 아시지요. 글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 짜디짠 소금물로 가득한 호수입니다. 그 호수가 그렇게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인 이유를 아십니까?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강을 타고 흘러 온 물이 사해로 들어갑니다. 사해로 들어간 물은 더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에 고입니다. 강물이 흘러 들어가기만 했지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호수는 죽음의 바다사해입니다.

  

탐욕과 인색이 죽음을 가져오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차지할 줄만 알았지 나누거나 베풀 줄을 모르는 탐욕과 인색은 죽음을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썩게 마련입니다. 탐욕과 인색에 빠진 사람은 향락을 즐기면서도 서서히 죽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되고 이웃과 형제들을 실망과 좌절에 몰아넣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많이 차지하고 많이 누리고 많이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고 함께 누리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자는 많이 차지하고 가진 사람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는 사람입니다.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지니고 있어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언제나 풍요롭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나눌 수 있을 만큼 여유롭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부자는 나누고 베푸는 사람입니다.

  

샘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아납니다. 그러나 샘물은 퍼내지 않으면 곧 썩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풍요로움으로 채워 주시지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썩는 샘물처럼 그렇게 죽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라고 한탄하는 전도서 저자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정보사 땅 사기 사건으로 쇠고랑을 찬 친구들이 감방에서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하면서 한탄하고 있을 것입니다. 탐욕과 인색에 빠져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이웃과 형제를 외면하고, 혼자 독차지하려 하면, 모든 것은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받아들이기만 했지 내보낼 줄 모르는 사해가 죽음의 바다로 변하듯 혼자 독차지하면, 모든 것이 썩고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돈과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입니다. 탐욕과 인색에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 그래서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베풀고 나눔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부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29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수탉과 보석



  어느 따뜻한 봄날에 수탉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아마 암탉과 병아리들을 위해 먹이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에 눈앞에 반짝거리는 유리조각 같은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그러나 수탉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석이 값지다는 것은 알지만 나에게는 쌀이나 보리 한 톨보다도 가치가 없는 것이야.”

  

이 이야기는 모두가 가치기준이 다르며 필요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수탉과 보석의 이야기처럼 각자의 가치기준이 다르겠지만 나환자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보석의 가치보다는 쌀이나 보리의 생산을 위한 경제적 지원과 자녀들의 교육비 지원이며 나아가서는 정신적 사랑을 베풀어주길 그들은 바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에게 특히 보잘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을 때, 비로소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30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내 재산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묵상 : 돈의 가치를 모르고 낭비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부지다. 그런가 하면 ‘돈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인생의 깊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내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안에 남의 몫이 있음을 깨닫자.



    고해소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일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나면, 보속을 명하기 전에 간단한 영적충고와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경험으로는 친지나 형제들과 재산 문제로 마음 상하고 원수가 되다시피 해서 증오와 원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설득력 있는 훈시를 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시비를 가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재산 문제로 속을 끓이고 증오하다보면, ‘돈 잃고, 사람 잃고, 건강까지 잃는’ 수가 허다하다.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였다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형제간의 재산 시비에 대한 판결을 요청받으시고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하시며 이를 거절하신다.



   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



  돈 귀한 줄 모르고 낭비를 일삼는 사람을 보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총각들은 부양가족이 없고, 삶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기에 돈을 모으지 못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만큼 산 후에도 돈을 위해 체면도, 인간다운 도리도, 의리도 내팽개치는 사람이 많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적게 남은 연륜에 있으면서도 오로지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인생에 있어 참으로 값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돈 귀한 줄 모르거나',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은 덜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돈이 삶을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깨달을 때,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며,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이,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다고 자만한다. 그 순간에 하느님은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리라"하신다. 죽음 앞에서 돈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돈 1억원을 갖다 바치면 생명을 1년 더 연장시켜주는 곳'이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험악해질까? 이렇게 볼 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은 참으로 고마운 손님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 복음의 부자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접한다. 성전 건립이나 교회사업, 남을 돕는 공익을 위한 일에는 최소한의 체면치레로 일관하며, 형제와 친척간에도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을 자주 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그 사람, 그 돈 아까워서 어떻게 죽었을고!"하며 비웃는다. 돈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 하느님께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 안에는 '남의 몫'이 있음을 알아야


 철저한 반공교육 덕분에 우리는 공산주의가 왜 나쁜지, 어떤 점이 나쁜지를 모르면서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하느님과 영적세계를 부정하고 물질이 전부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지, 재산 분배에 관한 한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면이 많다. 일찍이 성 암브로시오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도울 의무를 말하면서, “네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함께 쓰도록 주어진 것을 네가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재화는 모든 사람의 것이지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돕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세계 사목헌장'에서도, “누구나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모든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 여겨야 한다" (69항)고 하였다.

즉 ‘사유재산의 사회적 성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합법적으로 취득한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타인을 위한 몫'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재화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이가 먹고, 쓰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실업과 불황으로 갈수록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증폭되는 느낌이다. 이런 때일수록 가진 자의 올바른 의식이 요구된다. 내가 가진 것 안에는 ’남의 몫'이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능력과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만을 위해 쌓아 놓지 말고, 나눔으로 죽음 앞에서도 힘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천상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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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1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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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7주일

        23. 조순창 신부(다)/33                24. 김정원 신부(다)/34

        25. 함세웅 신부(다)/36                26. 함세웅 신부(다)/37

        27. 함세웅 신부(다)/39                28. 강길웅 신부(다)/41

        29. 강영구 신부(다)/43                30. 이기정 신부(다)/47

        31. 안상인 신부(다)/49                32. 박병해 신부(다)/53

        33. 박재만 신부(다)/54                34. 전달수 신부(다)/56

        35. 전달수 신부(다)/58                36. 전주원 신부(다)/60

        37. 김신호 신부(다)/60                38. 이 시대에 필요한(다)/62

        39. 기도하는 습관이(다)/63      





23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믿고 회개하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조순창 신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성조 아브라함이 어느 날 지나가는 웬 나그네 세 사람을 맞아들여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을 배웅하느라고 ‘소돔’이라는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때에 야훼 하느님께서 아브리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너무나도 엄청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고장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노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어른으로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죄인을 벌하시려는 뜻을 이해하며, 또 막을 수도 없습니다만. 죄인 때문에 저 도시 안의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반문하면서,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보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용서해 주시기로 하자, 체면을 무릅쓰고 45명만 있다면, 또 40명 밖에 없더라도, 또 30명밖에 안 되더라도, 또 줄여서 20명 밖에 안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죄 없는 사람이 열 사람밖에 안 되더라도, “그 열 사람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자비로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돔과 고모라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를 나그네로 보내시어서, 그곳에 사는 착한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재앙에서 구해 내시고,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퍼부어 잿더미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열 사람의 의로운 생활과 한 의인의 기도로 한 도시가 멸망하는 것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는 크다고 하는 교훈으로서, ‘구세주 예수님, 한 의인의 희생적인 장한 죽음으로 온 인류는 구원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교훈과 같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써 모든 잘못을 용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믿음의 가족입니다. 믿는 이의 표시는 기도하는 것, 참회하는 것,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으로써 구원받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요, 믿지 않으면 죄인으로 판단받을 것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며, 사랑하고 봉사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된다면,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탓이요, 급할 때 한 번만 기도하고 만 탓이요, ‘나 스스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모두 운명에 맡겨 버리는 탓이요, 쓸데없거나 해로운 것을 원하는 탓일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이 진심으로 대화하고, 서로 믿어 주며, 조그마한 잘못도 진정 용서를 빌고 참회하며, 서로와 공익을 위해서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우리 뜻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4장의 ‘세상 종말의 예고’ 같이,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가짜가 많고, 부정의 뿌리가 깊고, 난리와 전쟁의 위기와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며, 의인이 수난을 겪으며, 질서가 문란한 속에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보기 어려운 세태입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고 의롭게 살아가는 열 사람의 의인과, 우리 모두의 불행을 뼈 아프게 생각하며, 굳은 신덕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신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어, 모두 참회하여 새사람되게 하여 주시고, 굳은 믿음과 사랑과 봉사로 모두 바르게 삶으로써 복되고 평화롭게 하옵소서!”











24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청하면 너희에게 주시리라!

                                                            김정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기도를 드렸는지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몇 년 전에 한강 상류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편으로 건너가던 청년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을 거의 다 건너고 있을 때 배에 구멍이 나면서 많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답니다.

  

그 때 두 청년들은 즉시 가라앉기 시작하는 배를 박차고 헤엄쳐 나왔으나, 한 청년은 배에 그대로 앉은 채로 호소하는 두 청년의 손을 뿌리치며 하는 말이 “하느님께서 나를 구해 주시도록 나는 지금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으니 염려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청년은 조금 후에 배와 함께 물속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 얘기를 듣고 웃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 청년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평생을 기도했어도 기도의 보람을 얻지 못하고 맛을 들이지 못했다면 기도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는 올바른 지향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누가 만일 부당한 수단으로 달라고 요구한다든지, 인간적인 노력에는 게으르면서 기도만으로 얻으려고 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손해는 아랑곳없이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요구하는 등의 기도는 올바른 지향이 없는 기도입니다.

  

둘째로, 기도는 열심히 겸손되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절에서 불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만일 불공을 드리는 그들의 정성이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벌서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기도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잠언에 말씀하시기를 “겸손한 기도는 구름을 뚫고 하느님께 올라간다”(잠언 35,21)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예를 들어 확증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기도는 굳은 신뢰심을 갖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은 아버지입니다. 가장 가깝다는 얘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여러분은 비록 악하지만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마태 7,11)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절대로 의심하지 맙시다.

  

넷째로, 기도는 항구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하기를 중지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보람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할 때 들어주시기 때문에 가끔 오랜 후에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녀 모니카는 당신 아들 아우구스띠누스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렇다 할 보람도 없이 기도하기를 십오년 동안이나 했습니다. 그 때 성녀 모니카가 항구하게 기도하지 않았던들 오늘의 성 아우구스띠누스란 아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잘 들으시오. 우정에 호소해 가지고는 일어나서 빵을 내주지 않을 사람도 친구가 와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 줄 것입니다.”(루가 11,8).

  

신자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기도의 조건을 잘 들으셨습니까? 다 듣고 난 지금에도 여러분은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청하면 다 들어 주신다고 했는데 왜 안들어주십니까?” 하고 인자하신 하느님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루가 11,11)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아버지 하느님께 열심히 항상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다시 한 번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신들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시오. 아버지, 온 누리가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25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

                                                 함세웅 신부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은 신약성서 전체의 특징입니다. 이 귀절처럼 기도나, 설교나, 기독교 문학에서 많이 쓰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먼저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 첫 등장으로 갈릴리에 가셨을 때 제일 먼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르코 1,14)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자기에게 지워진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가 4,43 ; 마르 1,38)

루가는 예수의 활동에 대하여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가 8,1)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느님의 나라'란 뜻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 귀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몇 가지 파악하기 힘든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과거의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마태 8,11:루가 13,28)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를 과거의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는 또 왕국을 현재의 것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루가 17,2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그는 또 하느님의 나라를 미래의 것으로,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동시에 현재, 과거, 미래의 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주의 기도'에 나타난 두 가지 기원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히브리 문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전문적인 용어로 평행법이란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같은 것을 두 차례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음에는 같은 일을 다른 방법으로 반복하고 보충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어느 귀절이든 이 평행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시편'의 거의 대부분 귀절은 중간에서 둘로 나누어집니다. 고리고 뒷귀절의 반은 거의 처음 반 귀절을 반복하고, 보충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편 46,1)

“만군의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 (시 편 6,7)

“야훼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편23,1-2)

  

그러면 이 원리를 주의 기도의 두 기원에 적용시켜봅시다.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두 번째 기원이 첫 번째 기원을 설명 보충하고, 명백하게 했다고 한다면, 이때 우리는 천국의 완전한 뜻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완전히 행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행해지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해서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했던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있던 것이요, 지금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하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있는 자이며, 또한 장래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할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오는 것은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밝혀진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국민 어떤 국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 개개인에 관한 것입니다.

  

실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제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나의 뜻, 나의 마음과 나의 생활을 하느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느님 앞에 개인적인 복종을 할 때에만 하느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다. 











26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살아 있는 교회

                                                   함세웅 신부



교회의 역사는 박해가 심할수록,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과정 속에서 부활의 믿음을 갖고 더욱 굳게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찾아라, 얻을 것이다"란 말씀은 우리가 강렬하게 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생명이 보호받지 못하고, 그 권리 또한 소멸될 위기에 처함이 너무도 만연해 있음에, 오늘의 현실 속에 우리의 모습이 서서히 비정함으로 물 들어감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신앙인인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살펴봄은 매우 유익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교회의 모습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은, 역행하는 현실 앞에 매우 중요한 일임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한 부활 후 초기 교회의 모습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뿔뿔이 흩어지기는커녕, 하나의 공동체로 더욱 굳게 모여, 진정 서로 나누고 서로 아껴 주는 사랑, 그 자체의 모습이었기에 이방인들조차 “보라,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탄복하였고, 말없는 생활 속에 하느님을 증거함은 많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탄생하게 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고난의 길일지라도, 가야 할 길이며, 그 길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승리의 길이라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이 길은 우리 모두의 소망의 길이긴 하나, 현대인이라는 우리의 모습 속에는 망설임과 비정함이 가득 찬, 좀처럼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생활의 연속 속에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벽은 더욱 두터워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버려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으나, 거리엔 수많은 외로운 생존이 있습니다. 과연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예수의 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는 거리에 방황하는 이들, 소외되어 버림받은 이들, 또한 드러난 죄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억울한 이들의 편에서 말씀하시며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안주할 땅이 없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이들 곁에서 자신들의 안일무사만 추구하던 자칭 양심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왜 하느님의 정의를 그르치느냐고 책망하심으로써, 교회의 모습 속에 억압을 가하고 당하는 자들만이 주역이 아닌 정상인이라 할지라도, 이를 외면한 무언의 공모자가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솔제니친은 서방 세계로 망명한 후 “왜 우리는 그토록 저항을 별로 하지 않았는가?"라고 수없이 반복한 바 있습니다. 과연 예수의 행적과 이러한 체험 속의 물음은 지나침이 되어서는

안되며 세찬 조류를 역행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강함이 없이는, 신앙인의 위치를 사수함도 어려운 현실임을 자각하고, 안일 속의 합리를 가장한 탈출구 모색보다는 거짓된 조심성과 그냥 그대로가 좋다는 식의 유혹 앞에 투쟁하는 크리스천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가타리나 성녀의 교회에 대한 뜨거운 열매는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듯이,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고수하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열애가 모든 세상의 악마와 부당한 세력을 꺾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지금 이 순간에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 삶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며, 산 속에 홀로 버티고 선 교회이기보다는 이 시대의 민중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치욕의 역사 속의 교회보다는 생명의 교회를 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27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어떻게 기도할까(주님의 기도)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기도의 내용이며, 둘째 부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항구하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흔히 많은 교우들이 기도를 짐스럽게 생각하면서 외는 기도에 싫증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비슷했었습니다.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도를 우리는「주의 기도」(전에는 천주경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에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마태오의 기도와 루가의 기도를 종합한 것이 오늘 우리가 외고 있는 「주의 기도」입니다. 마태오와 루가의 기도 내용은 원칙적으로는 같으며, 다만 청원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약간 서로 다른 구전(口傳)에 의한 것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어 있고, 전편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 후편은 인간의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칭호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의미는 사랑의 친밀성을 나타내 주며, 그 권위는 전제되는 것,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인간의 언어 중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사랑과 신뢰를 나타내 주는 칭호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란 뜻은 순전히 인간적, 지상적인 의미만은 아니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며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 따라서 하느님과 관계되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은 모두 거룩한 것입니다. 그중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난다'는 찬미는, 결국 인간의 구원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감사송 뒤에 ‘거룩하시다'를 세 번 외는 것은, 이러한 뜻이며, 최상급과 최고의 찬미를 뜻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곧 인간의 구원이며 완성입니다.

 ‘그 나라가 임하시며'; 예수님은 간략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마디에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 있는 것, 하느님의 나라 거기에는 온 우주 만물 즉 하늘과 땅, 현재와 미래, 시간과 영원, 이 모든 것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중심 과제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이 세상에, 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과 땅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것, 천국과 세상이 만나며, 하느님과 내가 일치하는 의미의 기도, 하느님의 뜻은 곧 나의 완성이기에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여기에서부터 ‘주의 기도' 후편이 시작됩니다. 즉 인간사에 관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기원, 그중에 첫번째로 일용할 양식이 나옵니다. 하루 걱정은 하루에 족하다하신 주님의 말씀은, 현재에 충실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는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늘에 살라고 가르치시는 주님, 그 오늘은 바로 영원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양식은 육신을 위한 양식뿐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도 암시해 줍니다. 오늘의 양식이 영원한 양식이 되고, 오늘의 삶이 영원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장해 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음식에 대한 기원은 육체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필요했지만, 이제는 그에 못지 않게 윤리적인 요구 사항이 있습니다. 나의 잘못, 빛을 탕감해 달라는 기원, 그러나 거기에는 선행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내가 너그러이 용서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현실에 사는 인간, 그 인간은 불안과 초조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이 초조를 이겨내게 해 주십사  청하는 기도, 즉 하느님의 양식과 말씀으로 언제나 굳건해져서 흔들리지 말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다음



 ‘악에서 구하소서'도 같은 뜻입니다. 다만 악이란 이 뜻은 영원한 단죄, 즉 지옥의 벌에서 구해 달라는 최고의 염원이며, 구원과 완성을 바라는 인간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주의 기도' 그것은 미래를 지향한 신앙인의 현실적 기도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완전한 계명의 뜻이 포함된 기도입니다.

여러 번 욀 필요 없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모두 의미를 되새기며, 하느님께 나와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바칩시다.

  

복음의 둘째 부분은, 기도할 때 꼭 이루어지리라는 신뢰심과 항구심을 가질 것을 당부합니다. 신뢰심,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현실성을 띤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사는 신앙인, 그 신앙인에게는 기도 자체가 완성이며 구원입니다. 지치고, 맥이 빠지고, 앞이 캄캄하고, 절망적이며, 슬픔뿐이고, 낙심뿐일 때 한 번만, 우리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고 외워봅시다. 뜻을 생각하며 천천히 ‘주의 기도'를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구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실 것입니다" 











28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아름다운 중재자의 삶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8,20~32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2독서 골로 2,12~1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잘못을)

복 음 루가 11,1~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오늘 1독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 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애절한 노력이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본래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의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던 도시로서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던 악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 뿐이요 사람답게 사는 의인이라고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도시였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썩을 대로 썩어서 타락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을 수 있도록 체면 불구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며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소청을 기쁘게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의인이 단 열 명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서 푹 가라앉아서 지금은 사해 바닷 속에 묻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해가 그 이전의 사해보다 더 커졌다는 것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두 도시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하느님, 바로 이 중간에 서서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아름답고도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그처럼 살맛나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그건 추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재자의 길은 대단히 고달프고 험난합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람있는 길이요 멋지고 위대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화해와 용서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당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성부는 그래서 당신 아들의 희생을 보시고 인류를 죄에서 용서해 주셨으며 닫혔던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중재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죄 없이 얻어맞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이 맞아야 할 것을 내가 맞음으로써 그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방에서 마루로 나오다 넘어져서 울었습니다. 아기는 아픔보다도 걸려 넘어졌다는 그 자체 때문에 속이 상해서 웁니다. 이때 빨래를 하던 엄마가 갖가지 방법으로 아기를 달래 보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스크림 사 준다는 것도 싫으며 매맞는다는 것도 겁이 나지 않습니다. 속상하니까 웁니다.



이때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와서 문지방을 막 때립니다. 그러면 서 "이놈, 너 왜 우리 아기 넘어뜨렸니? 나쁜 놈, 매 좀 맞거라." 하면서 때립니다. 그러면 아기가 그 모습을 보고 속이 풀어져서 울음을 그칩니다. 여기서 문지방은 아무 죄 없이 얻어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아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입니다. 나라 곳곳에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건물만 썩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 썩은 오 물이 들어가니까 사회의 모든 부문이 썩어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대형 사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은 제쳐놓고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그래서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친구를 위한 중재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꾸어 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주인은 성가셔서 대답도 하기 싫은데 뻔뻔스럽게도 계속 조릅니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도 귀찮게 구니까 친구의 청을 들어줍니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도 자기가 먹으려고 빵을 꾸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체면불구하고 밤중에 어려운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운데에서 욕먹으며 요청하고 조정하는 자를 중재자라 하며 이들의 기도를 중재기도라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중보자,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세상은 중재자들에 의해서 구원받고 있습니다. 악인이 아무리 많아도 의인들이 많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용서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멋지게 살도록 합시다. 진정 사람답게, 양심 바르게,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살도록 합시다. 거기에 인생의 참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습니다.











29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의인 열 사람

                                                         강영구 신부



오늘은 7월의 마지막 주인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신앙인이란 누구이며 신앙 생활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주님이라 섬기는 신앙인은 이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에 사는 사람입니까? 신앙인은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자신들만의 동아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구원과 안전을 도모하는 집단 이기주의자들입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동아리를 만들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이 세상과 대립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신앙인들이란 천사들과 같아서 이 세상의 일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까?

 

신앙인은 결코 이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에 사는 별종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땅과 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소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신앙인들은 현실의 어둠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13-16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무관한 별천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현실의 어둠을 밝히고, 죽어 가는 생명들을 되살리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소돔의 패망을 막아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아브라함의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온갖 죄악으로 뒤덮인 소돔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느님의 분노를 막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무릎을 꿇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이 온갖 죄악으로 썩을 대로 썩었다 할지라도 거기 의인이 살고 있다면 그 의인 때문에라도 용서해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청합니다. 소돔 성을 살리려는 아브라함의 간구는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아무리 소돔 성이 타락하였기로서니 의인 50명쯤은 그곳에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소돔에 49명의 의인이 있다면 한사람이 모자라는 것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인 마흔다섯만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마흔 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에 삼십 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지막에는 열 명까지 에누리를 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소돔 성을 살려 보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소돔 성에는 의인이라고는 롯과 그의 가족밖에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썩어도 보통 썩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썩어 버린 것입니다. 철저하게 썩어 버렸다기보다는 철저하게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 거기에는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어둠 속에 사는 암흑의 자식들만 머물렀던 소돔 성은 한마디로 죽음의 도시였습니다. 창세기는 소돔 성이 하늘에서 쏟아진 유황불로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타락과 부패 때문에 자멸하고 만 것입니다.

  

자정능력(自凈能力)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자정 능력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오염된 더러운 물이, 흐르는 동안에 깨끗해지는 것을 자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물이 깨끗해지는 것은, 그 물 속에 깨끗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자정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요소가 전혀 없고 완전히 썩어 버린 물은 아무리 해도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소돔이라는 도시는 철저히 썩었기 때문에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으로는 그 타락한 도시를 정화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돔 성에 의인 열 사람만이라도 있었더라면,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자정 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고, 죽음의 그림자는 조금씩 조금씩 물러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과 그의 가족만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 성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타락과 부패의 결과로 자멸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런 사실을 유황불이 쏟아져서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신앙인인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며 소금입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이 세상의 썩음을 방지하는 소금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막는 방패막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창세기의 소돔 성 못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지위와 향락이라는 우상에 매료되어서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즉시 그 능력을 발휘하는 돈과 권력과 지위가 하느님보다 훨씬 힘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평화보다는 돈과 재물과 권력이 가져다 주는 향락이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섬기면서,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 속에서 자행되는 온갖 부정과 부패, 그리고 타락은 바로 이런 우상들을 섬기려다가 생기는 결과입니다. 폭력, 인신 매매, 사기, 횡령, 성범죄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 이 소돔 성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을 섬기면서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 안에 열 명의 의인이 아쉬웠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열 명의 의인이 아쉽습니다. 만일에 우리마저도 이 땅에서 빛의 구실, 소금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함께 썩어 버린다면, 이 땅의 현실은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기 전에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 인구는 4천만이 넘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는 아직 3백만이 안 됩니다. 전체 인구의 겨우7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 명중에 7명 정도가 천주교 신자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수적으로는 적더라도 바르게 살기만 한다면 충분히 이 소돔 성 같은 어두운 현실을 밝게 비출 수 있고,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자정 능력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천사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이나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듯이, 우리 역시 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날개가 없듯이, 우리에게도 날개는 없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비슷하다 해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자기에게 없는 무엇을 달라고 하느님께 보채고 떼를 쓰는 일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기도하는 우리는 누구란 말입니까? 기도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기도란 결코 부족한 것 혹은 없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것은 성령 곧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령을 받게 되고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기도하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서가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기에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밝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소돔성과 같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이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썩어 가는 우리의 현실이 자정 능력을 완전히 잃고 스스로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겠습니까? 이 어두운 현실을 구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어쩌면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처럼 섬기고 그토록 좋아하는 돈과 재물과 권세가 죽음의 세력을 몰아낼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소돔 성에 의인 열 사람이 아쉬웠듯이 오늘 우리의 현실도 열 사람의 의인을 아쉬워합니다. 우리는 결코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 안주하면서 자신들의 안전이나 도모하는 집단 이기주의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도, 수수 방관하는 무관심주의자들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유황불을 뒤집어쓴다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도 똑같이 그 유황불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열 사람의 의인이 소돔 성을 구할 수 있듯이 오늘 우리도 어두운 이 현실을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성실히 기도하면서,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가 하는 점이 그 열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 되어야 하고 마지막 남은 열 사람의 의인

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되어도 되겠습니까?”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30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생활의 비법인 주의 기도

                                           이기정 신부



저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고개를 혼자 끄덕이며 감탄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기막히게 멋진 찬사를 한 이유는, ‘주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이 ‘주의 기도' 덕분에, 저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의 기도라는 비법이 저를 크게 도와주었던 겁니다. 저는 천주교를 알고 믿게 된 후, 제일 덕 본 것이 있다면, 이 주의 기도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상대를 향한 내적 대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인간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이주의 기도는 주요기도문의 첫째 자리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암송할 기도 중에서, 최고의 모델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이 주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면 구원됩니다. 주의 기도를 잘 바치면, 세상도 살기 좋아지고, 자신도 참으로 영원히 구원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가정에는 문제가 없고,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갈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주의 기도를 많이 바치면 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사실 이 비법을 공짜로 알려드리기엔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시고, '주의 기도'의 비법으로 효과를 보신 분이 계시다면, 후에 갚음이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저는 학생 때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신학교에 등록금을 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생을 위한 성소후원회도 없었고,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어느 교우에게 하소연하기도 싫었습니다. 해서 68년도부터 71년까지, 매년 방학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성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어느 방학 때였습니다. 저는 비싼 물건을 파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익금의 30%를 받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은 자세한 내용을 쓸 수 없습니다. 그 점은, 이야기도 빗나가겠지만, 구체적 인물이나 장소로 인해 곤란한 일이 생길지 몰라서 말입니다.

  

저는 상점 문 앞에 서서 저편에 몇 명의 손님들이 나타나면, 그 손님들 중 한두 분을 눈여겨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손님을 향한 내적대화'(일명 손님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 드는 손님, 손님은 유명한 분이시며, 손님은 이 곳에서 대접을 받으시며, 손님이 집에서 계획한 뜻이 이 가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당한 약간의 이익을 주시고, 우리가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손님도 우리를 잘 봐주시고, 재물의 유혹에서 권면해 주시고, 악한 상혼에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손님." 



이 ‘마음속 대화'를 당시에는 하루 종일 외우면서 손님을 대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 2대만 팔면 유지가 되는데, 일주일에 평균 3대 정도를 팔았습니다. 주인은 감탄했습니다. 저의 태도는 신학생다웠고, 아르바이트생다웠고,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등록금을 낼 수 있었고, 용돈도 그런대로 남부럽지 않게 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당시의 저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뿐 아니라 저는 어떤 사람이든, 저 사람과는 이런 관계가 맺어져야되겠다고 생각하면 대개 주의 기도 형식의 비법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법은 장사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생활에서 다양하게, 모든 대인관계를 효과 있게 성공시킨다고 봅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대하듯, 주님을 대하듯, 그렇게 하면 그 상대는 바로 주님처럼 되어갈 것입니다.



술을 먹고 취해서 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부인이 “내 남편인 여보, 당신은 유명한 분이며, 당신은 기를 펴고 사셔야 하며, 당신의 뜻이 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에게 자그마한 관심을 주시고, 당신을 이해하듯 나를 이해해주시고, 혹시 내 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해요. 당신을" 이렇게 마음속으로 자꾸 외우면 부부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리라 봅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외박을 하고 들어와도 말입니다. 좋은 마음을 끈기 있게 보여주면, 어떤 남자라도 변하지 않고는 못배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인이 아무리 미워지고 바가지를 긁는다 해도, “내 아내인 여보, 당신은 유명한 분이며․․"라고 한다면, 어떤 부인인들 변화되지 않을 여자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부부나 남남간에 다툼을 보면, 자기 주장을 상대방에게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서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별 것도 아닌 것이 큰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 대형화재가 되어 버리고 나면, 그 누구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제 나름으로 캐고, 따지고 하다가, 되려 문제해결은 커녕 더욱 큰 문제로 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주의 기도를 평소에 잘 바치지 않았거나, 바쳐도 헛바쳤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잘 사는 방법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의 기도와 앞뒤 면인 하나의 의미입니다. 즉 주의 기도를 제대로 음미하며 바치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사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주의 기도를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사랑의 계명을 포괄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의 정신처럼 지켜온 것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흘러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신약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잘 살아가려면, 모두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면 됩니다. 이 사랑은 주님이 내려주신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계명인 사랑의 진상은, 바로 이 주의기도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방법 역시, 이 주의 기도 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고, 감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하셨습니다. 물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과 부활하심을 이 주의 기도에 결부시킨다면, 이는 바로 주의 기도를 최고조의 경지까지 실현하신 것이라 풀이됩니다. 즉 오로지 아버지만을 위하신 길, 이웃인 인류만을 위해 살다 가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개념을 사랑이라는 정신으로 완성하셨고, 십계명이라는 계율을 주의 기도라는 기도형식으로 완성해주셨습니다. 사실 그 구조를 보면, 십계명에서 처음의 세가지 계명은 주의 기도에서 앞부분과 마찬가지고, 후반부의 4계명은 부모와 관련된 일용할 양식으로 현실적으로 정리하셨고, 5계명인 대인관계를 서로 용서하는 뜻으로 바꾸셨고, 6계명 이하의 모든 것은 유흑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해설로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육적 가치로 보면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나아가 아름다운 사랑에 흠뻑 잠긴 시와도 같이, 완벽한 기도형태로, 그야말로 종교 교육적으로 너무나 잘 정리하신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천만 다행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법을 암송하고 사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인생의 길을 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신비하고 덕스러운 이 삶의 비법을 생활에 충분히 활용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31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에 대하여

                                                     안상인 신부



● 기도의 정의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이다. 비록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초자연적인 분께 공포 중에, 또는 위험 중에 본능적으로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또한 인간의 심층에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기도 없이 인간에게 은총과 구원을 주시 지 않는다.

  인간은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하며, 필요한 은총을 받고, 하느님과 계속적인 유대와 상통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우리는, 하느님과의 부자(父子)관계를 지속시키는 기도를 생활화하여 야 한다.



○ 기도해야 할 때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에페 6,18) 또한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항상 기도를 바쳐야 한다. 인간이 매 순간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다. 특별히 다음의 경우에 기도를 해야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개어 기도하라" (마태 26,41)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죄로 유인하는 유혹 중에, 죄 중에 있을 때, 타인에게 사랑의 실천을 필요로 할 때, 또한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할 때 기도를 해야 한다.



○ 기도의 형식과 목적

  기도의 형식은 정신적인 기도와, 기도서나 또는 꾸며서 입술로 바치는 기도가 있다. 정신적인 기도에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있으며, 특히 관상기도는 기도 가운데 가장 탁월한 형식의 기도이다. 기도의 목적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흠숭이다. 이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분들이기에 찬미를 드린다. 그러나 흠숭을 드리지는 못한다.

둘째, 감사를 드려야한다. 나의 존재와 여러가지 은혜를 풍부히 베푸심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셋째,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또는 궐함으로 잘못한 죄에 대하여,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넷째, 우리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또는 현세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기도라고 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을 우선 생각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전체 목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그 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하기 위해서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청원의 기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고치고, 따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더욱 상세히 뒤에서 다루겠다.



● 기도는 누가 하는가?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기에, 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기도하실 수 있지만, 하느님으로서는 기도를 바칠 수 없다. 성모 마리아, 천사들과 하늘나라의 성인들은 기도할 수 있으나 악신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기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특히 죄인들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은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산이와 죽은이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 특히 가족과 친척을 위하여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지옥에 있는 영혼은 아무런 기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기도해 야 한다.



● 청원기도의 적합한 대상

 사도 야고보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하셨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청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더라도, 타당하고 선한 것을 구해야 한다. 비록 타당하고 선한 것이,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라도 상관없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갈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라면, 청하기에도 타당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어떤 이익이나 편리도,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영신적인 면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 건강한 몸, 상처의 치료, 사고로부터의 안전을, 좋은 직업이나, 안락한 가정 등,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도의 지향일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신 사정이나 구원에 도움이 될 때, 그러한 청을 들어주신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는 청하는 것이 영신적인 면에 도움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것이 우선적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덕이 향상되고, 악습을 고치고,, 유혹을 이기고, 은총을 받고, 항구하게 성사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인 여건이다.

  청원의 기도를 바칠 때 바치는 첫째 대상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다음으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 그리고 복자들께는 전구를 요청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생각이나, 원의까지 알고 계시지만,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이나 원하는 것을 모른다.



● 필요한 조건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기 주실 수 있고,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만이 약속하신 행복을 보장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셋째,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는, 보다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의 정신을 갖고 청하면서도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한다. 즉 자기 구원에 해가 되는 것을 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드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 주신다"(잠언 3, 34). 또한 항구하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 과부의 번거로운 청을 들어준 판관의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한다(루가 18,1-5).



●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기도

  “우리의 찬미가 주께 필요하지 않은 줄 아오나,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감사 드리오니, 우리의 찬미가 주게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유익이 되나이다" (감사송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자체로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찬미와 감사가 영광을 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알고 계신다. 즉 우리가 무엇을 청해서, 우리의 요구를 일깨워 드릴 어떠한 기도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나, 지향을 바꾸는 효과를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한 부분이다." 이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이다. 가령 하느님께서 어떤 농부에게 곡식을 수확하도록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자, 그 수확은 농부의 경작과 적당한 햇볕과 비와 좋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하여 기도를 바친 결과로써 계획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요소만 제거되어도 수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수확을 하기 위하여, 필수요소인 기도를 그의 계획안에 넣으셨기에, 기도가 없었다면 좋은 곡식을 수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세우시거나 지향하실 때, 인간의 기도를 그 섭리 안에 내포시키신다.



● 전례와 기도

  전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교회의 모든 공적 경신 경배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로 창조하시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신비체를 이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면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공동체를 이룬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전례란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며, 이 기도를 통하여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 전례는 반드시 교회의 권위로부터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교직자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준한 전례서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성부께 십자가상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 제사의 힘으로 구원되기를 원하셨다. 고로 예수께서는 그 거룩한 제사를 기념하여 그 예를 계속하기를 원하셔서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전례행위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제사와 성사 그리고 성무일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전례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미사 성제이다.



그 외의 모든 기도는 신심행사에 속하는 것들이다. 로사리오 기도, 구일기도, 십자가의 길, 성모나 성인을 공경하는 기도, 또한 성인 열품도문 등 비 전례적인 개인적 및 공적인 기도들도 있다. (여럿이 바치는 경우라고 해서 전체 교회의 기도는 아니다. ) 하느님께서는 전례 중에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간은 그 전례를 통하여 응답으로 말씀과 은혜를 받아들이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전례에 참여하여야하며, 내적 준비를 합당하게 하여야 한다.



● 결론

  신자들을 화초에 비한다면, 기도는 물이나 공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화분의 화초라도 물과 공기가 없으면 시드는 것과 같이, 기도 없는 신자생활이란 불가능하다. 기도는 모든 신자들 생활의 중심이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고, 신자 생활을 원치 않는 증거이고,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32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 :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따라서 본 기도  

                                                  박병해 신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다. 기도는 이처럼 늘 찾아오는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있을 때 가능하다.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도 내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참여'의 개념이다. 기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은혜로운 삶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숨결을 가진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순간은 나그네인 우리의 순례가 위안을 받는 때다. 이것은 살아있는 선물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그 느낌을 알아듣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으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하나의 신비다. 따라서 기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신비 안에 어느 정도 미리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도하는 것은 짐이 아니다. 기도는 선물이다. 기도는 억압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따라서 기도는 기쁨이다. 그러나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신 안에 마땅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먼저 깊은 내적 침묵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을 찾는다면 기도는 참된 것이다. 우리는 적나라한 마음으로 자기를 온전히 봉헌할 준비를 하고 하느님의 뜻과 우리를 동일화해야 한다.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주님의 정원을 통해서 표현한다. 여기서 주님의 정원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즉 천주교회를 상징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영적체험인 '성'(城), '영혼의 성'은 패랭이꽃들이 향기를 내기 시작하는 꽃들과 나무들이 성장하는 '정원'없이는 완성 될 수 없다.



이 성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녀 데레사는 그 찬란함을 서술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고 말한다.(영혼의 성 1궁 1장 1).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 안에 하느님의 상(像)의 폐색(閉塞)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정원, 그 깊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가린다. 원죄와 그리고 본죄는 우리의 자아를 좀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세상이 하느님의 정원을 완벽하게 직관하기에는 이미 그 투명성을 잃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좋은 정원사가 되어 주님이 정원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주님이 자주 이 정원에 즐기려 오시고 이 꽃들 사이에 쉬시도록 해야 한다.(자서전 11,6) 마음의 정원에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꽃들을 피우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ꡒ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도 높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 안에 사랑을 증거 하신 것을 상기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 크신 사랑의 담보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과격한 사랑을 상기합시다.ꡓ(자서전 22,14)











33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 : 사도 바오로의 선교 영성의 기초, 사도적 기도  

                                            박재만 신부



교회는 대희년과 더불어 21세기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복음화'를 시대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실현을 모색하고 시도해왔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해야 할 제3천년기 한국교회의 영적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한 근본적인 활력의 원천, 즉 핵심적 영성을 바오로 사도의 선교 영성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도 바오로가 숱한 역경과 시련 그리고 혹독한 박해 중에도 복음선포 사명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에서 엿볼 수 있다.

ꡒ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ꡓ(1고린 9,16).



이처럼 바오로에게 있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과제는 혼신을 다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했다. 그는 '꾸준히' 기도하였으며(2디모 4,2; 에페 5,20; 6,18; 1데살 5,17) '언제나' 기도하였고(골로 1,3; 4,12; 필레 1,4; 2데살 1,11) '끊임없이' 기도하였다(1데살 2,13).

그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비추심과 영감을 받아 나아가야 할 길을 분별하게 결정할 수 있는 식별과 지혜의 은총을 얻었다. 실로 기도는 그의 사도적 소명의 확신과 사명 수행을 위한 용기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공동체 내부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선교 영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실천한 선교의 삶, 즉 기도와 활동의 조화이다. 기도와 복음화 활동은 단 하나의 실재, 하나의 체험이 되면서 두 행위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고 조화가 이루어져 그리스도인의 인격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의 참된 복음화 활동은 기도 없이 불가능하다. 복음화 활동은 주역으로 활동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주님의 성령과 일치하며 도구로서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해 주고 용기를 주어 실천하도록 해준다.



복음화 사명을 지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두 근본 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하나는 그 사명을 위탁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ꡒ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ꡓ(요한 15,5). 다른 하나는 사도 바오로의 체험 고백이다. ꡒ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ꡓ(필립 4,13)



기도 없는 복음화 활동을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복음화 되지 않는 공동체의 선교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통한 증거보다 더 호소력을 지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34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주님의 기도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전달수 신부



루가 복음서 11장 1절에 의하면, 늘 기도하시던 스승의 모습이 제자들의 호기심을 대단히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래서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백성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기도하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자기들이 따라나선 예수님만이 온갖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에 관한 강의를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기도를 주심으로써, 그들이 기도를 하고 체험하게 하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바로 저 유명한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주님의 기도 - 일곱가지 청원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6,9-13)와 루가(11,2-4) 복음에 나온다. 청원의 수는 서로 다르지만, 큰 차이가 없으며,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기도에 일곱가지 청원이 들어있다고 가르쳐 왔다.

처음 세가지 청원은 영적인 은혜를 위한 것이고, 나중 네가지 청원은 현세의 도움을 위한 것이다. 현세적인 것들도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준비이므로, 현세의 삶을 위하여 청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청원은 모두 영생을 위한 것이지,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현세적인 것은 모두 구원을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구원과 멀리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주님의 정신과 일치하여 드리는 이 기도는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기도이다. 인간은 그 약한 본성 때문에 자기가 영원한 세상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잠시 쉬어 가는 주막이 아니라, 본 고향처럼 여겨, 여기에 빠져버리거나 안주하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이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인생의 본 목적에서 이탈하려는 강한 경향들과 투쟁하는 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분을 이 세상의 주인과 생사의 대권을 지닌 분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려질 권리가 있거나, 그런 영예를 일을 수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이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사실, 즉 하느님깨서 우리를 세례성사를 통하여 양자로 삼으사, 그리스도의 상속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하신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버지라는 칭호를 묵상할 때,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 그분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이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삶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관대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한없는 신뢰와 감사와 경외심으로 그분께 나아갈 수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어려운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양자 되어



이는 마치,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소년이, 저명한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어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우리 개개인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타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와 그들은 모두그분의 사랑 받는 양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상속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하며, 부정적인 측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인종차별이나 사회적인 신분 구별을 원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흑백 갈등이 얼마나 심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나라에서도 지역감정으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빈부의 차이나 지역감정, 민족과 피부색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35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주님의 기도 : 가장 을바른 기도방범은‥‥

                                                   전달수 신부



성서를 보면 주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선적으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부터 지적하신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유다인들의 기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결점이자 악습인 위선을 피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회당이나 길거리에 서서 남이 보라는 듯이 기도하기를 좋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겉꾸미는 행동을 말한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마태 6, 5)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



기도를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자들은 위선자들이다. 배우나 탤런트들은 다른 사람의 역을 잘도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연극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사운드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서 수녀들은 성가도 잘하고, 성당에서 무릎도 잘 꿇는다. 원장 수녀가 축복을 내리는 모습은 장엄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녀들의 역을 대신하는 영화배우들이다. 기도를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겉꾸미는 행동으로 신심 깊은 것처럼 보임으로써, 그것을 보고 칭찬하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들은 하느님을 이용하였다,



 빈말 되풀이도 금물



두번쩨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방인들의 전형적 잘못인 기도의 방법이다. 그들은 빈말을 되풀이하기를 좋아하였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태 6,7)

기도할 때에, 말을 너무 많이 한 이방인들은 기도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에, 그런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들에게 말을 많이 늘어놓아야만 신들을 굴복시켜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위선자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이방인들도 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신을 다른 용도로 이용해 보려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마치 법정에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대는 변호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변호사는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과 변론에 치중하기보다는, 어리석게도 근거 없는 변론을 펴면서도,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대는 자기의 달변만 믿고 검사와 판사률 굴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기도를 말의 힘에만 의존한 이방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기도의 모범보이신 예수님



그러면 참된 기도의 방법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방법이다. 그분은 당신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좌절과 고통이 극도에 달해 핏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장차 닥쳐올 그 엄청난 사건을 감수할 힘이 없으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박한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리셨고, 이제까지 가르쳐 온 자신의 올바른 기도방법에 머무르셨던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두 가지 오류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제자들의 도움을 겸손되이  청한 다음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그분은 장차 닥쳐 올 고통을 면하게 해주시도록 간절히 청하였다. 이 기도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래도 그분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우선적으로 앞세우심으로써,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기도는 분명히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달랐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정하여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복적인 기도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가, 최선의 기도임을 보여주셨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바라지말고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이기심을 버린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여러분의 기도가, 사랑하는 그분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가르쳤다. 우리 도 스승이신 주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기도의 방법을 익혀 나가야 할 것이다.























36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전주원 신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매일 기도 중 중요한 것은 아침9시 이전과 오후9시 되기 전에 하는 쉐마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조, 만과와 같은 것인데 기도 시간이 되면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경건한 태도로 쉐마를 꼭 바칩니다.

  

그 외에도 유대인들은 세세한 사건이나 사물을 접할 때마다 일정한 기도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도가 형식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뜻 있는 랍비들은 “의무를 빨리 끝내려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 겸손한 자가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행위이다”라는 비판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할 때 빈말만 잔뜩 늘어놓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듣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의 타이르심을 잠잠히 듣고 있는 자녀의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이라도 아버지가 시키시면 무엇이나 받아들이겠다는 순수한 마음과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요구만 앞세우고 관철시키려 하거나 내가 요구해도 하느님은 들어 주시지 않더라는 식의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결국은 제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37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구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

                                                         김신호 신부


  사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맺고 있는 관계성안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 자체를 관계성의 총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간에 좋은 관계일 수도 있고 서로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해로운 관계일 수도 있다.

  인간이 맺는 이러한 관계성에는 나에게 완전하게 득만 되는 관계성도 없고, 나에게 완전하게 해만 되는 관계성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물론 자기에게 득이 되고 삶의 보탬이 되는 관계성을 원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원의는 가끔 정반대의 결과를 갖게도 한다. 원하지 않는 관계성도 어느 때에는 외부적인 조건이나 사회의 관습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우리는 사회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제 부모가 노인이 되어 우리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한다고 살아있는 부모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고, 자기의 형제가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형제관계를 단절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도 없다. 또한 이웃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저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실제적으로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가 만나지 않음으로써 관계성을 무시한 채로 살아갈 수는 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



  체면 생각말고 청하라



그렇다해도 사회의 통념상으로 인정되는 형식상의 관계성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사회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동일한 형태를 취하도록 강요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관계성이 좋게되거나 관계성이 나빠지는 것은 전적으로 어느 한쪽에만 책임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기도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다. 기도는 청하는 자의 입장에서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항구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나 이해하기에 그렇게 쉬운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친구가 어려운 가운데 청하는 간단한 청을 거절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 청을 하는 태도는 좀 이상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쌍방통행식 기도가 돼야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문이 열릴 것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항구성을 강조하신다. 이러한 항구성은 기도하는 자의 태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서, 기도를 할 때에는 한두 번 조심스럽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오늘 곤경 중에 있는 자가 친구에게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탁을 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계 중에 어느 한쪽에게만 일방적으로 득이 되는 관계가 없는 것같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경우에도,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청을 드리는 하느님도 생각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무조건적이고 예의에 어긋나게 보이는 기도도, 사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하신 하느님은 이미 우리가 청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끝에 나오는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최종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으므로, 인간이 청하는 것 중에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결정적인 사항은 하느님께서 다른 것으로 대체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노력에 속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청하면, 나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한다. 좋은 관계성은 쌍방 통행일 때에 최선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38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이 시대에 필요한 의인 10명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항구적 신뢰를 요구하며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징벌을 설명하는 도입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징벌의 유예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성서작가는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성과 연대성을 지니고 있지만 불의한 도시 전체가 멸망될 때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은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입니다. 하느님의 대답은 명백합니다.



그 도시에 착한 사람이 10명만 있더라도 그 10명을 위해서 나머지 사람들을 멸망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죄인들 때문에 의인이 억울하게 죽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성서는 역으로 소수의 의인 때문에 수많은 죄인들이 살아나며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보상의 의미와 중개사상을 우리에게 분명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는 바로 그러한 의인이며 중개자인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결코 원하시지 않고 그들이 살아남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거부할 때 멸망은 필연적이라는 경고입니다. 의인 10명,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이러한 의인 10명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이 의인의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교회는 억울한 속죄양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사회 전체가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보루가 될 것입니다.

39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하는 습관이 가장 큰 유산

  

묵상 : 일반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는 기도의 전문가인양 생각한다, 그러나 참으로 기도에 맛들인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기도에서 멀어진 만큼 무(無) 신앙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세적임을 깨닫자.



 신자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



  어떤 본당에 새 본당신부가 부임했다. 신부님은 항상 미사하기 30분전에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도 줄 겸 신자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했다. 성모회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새로 온 본당신부 선본 소감을 한마디씩 늘어놓는다. “우리 신부님은 내가 성당에 일찍 가면, 항상 나보다 더 일찍 와서 기도를 하고 있더라. 뒤에서 보면 얼마나 멋있고 마음이 흐뭇한지 모르겠어. 그렇게 기도하는 신부님만 보고 있어도 갑자기 우리 본당이 부자가 된 것 같애! 그래서 나는 요즘 우리 신부님 기도하는 것 좀 많이 보려고 성당에 더 빨리 온다.”



  할머니들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신부님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 듯 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무엇이든 시키면 최선을 다해 협조를 하겠다는 자세이다. 사제와 신자 사이에 신앙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신부님만 바라보아도 그저 마음이 흐뭇하고 부자가 된 것처럼 느끼는 신자들이다. 그 어떤 활동보다도 신자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월남전에서 매복 나갈 때의 일이다. 평소에는 신부 될 놈이라고 놀리던 소대장이 모두들 긴장하고 겁에 질려 말이 없으면 나를 보고 “유 수병, 기도 좀 열심히 해!"하면서 기도를 청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에서 절대자를 향해 기도하고 부르짖고자 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신(神)같은 것은 없다'는 철저한 무신론적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는 항구하게 기도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믿음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도록 당부하신다.



  설령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도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위력을 믿지 못한다.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늘 듣던 말씀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항상 ‘기도를 하면 무쇠도 녹는다'고 하셨다. 무쇠란 바로 가마솥을 만드는 주물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간절히 그리고 항구적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지나면서, 가족이 모여 가정기도를 바치는 신자 가정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교세통계를 보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교적신자의 28-33%이고, 매일 가정기도를 하는 가정은 5%도 안 된다. 첫 영성체 교리를 하고 기도를 잘 익힌 주일학교 학생이 5-6개월 지나면 기도문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 이유를 물어보면 집에서 함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녀의 기도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있다해도 부모들은 하지 않으면서 ‘너 혼자 기도하고 자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주일학교에만 내보내면 신앙생활은 다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학원 보내기에 바빠 아예 주일학교엔 보내지도 않는 부모들도 수두룩하다.



  미국의 경우 평균 부부 열 쌍 중에 대략 네 쌍이 이혼을 한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주일을 지키는) 사람은 50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고, 매일 가정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은 1011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한다. 같은 사회 환경에서 같은 어려움과 유혹을 겪고 살면서도, 기도를 하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돈을 몇 억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보다 언제나 기도하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비춰 볼 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자신이 어디 쫌 가고 있는지를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준다면 이보다 더 큰 유산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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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요한신부
작성일 2010년 7월 12일 (월)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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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7주간 평일미사 짧은 강론 ”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에 비길 수 있습니다(월요일, 마태13,31-35)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이신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요아킴은 하느님께 단식하며 기도드리기로 결심하고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 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습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안나와 아버지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습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아킴과 안나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며, 자녀들의 신앙과 예절교육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이 씨는 3-4미터의 나무로 자랍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힘으로 서서히 크게 자라나 새들도 쉬려고 그 나무를 찾아올 정도로 커집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시초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지만, 후에는 그렇게 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신앙인이지만 내가 노력하고 하느님께서 끌어 주심에 나를 온전히 맡기기만 한다면 나는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룩은 한 줌 정도의 적은 양으로도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부풀립니다. 미세하고 알아보기 힘든 시작이 마지막의 엄청나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교는 밀가루에 섞여져 있는 누룩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은근히 숨겨진, 그러나 생동감 있는 전파력을 가진 하느님의 힘인 것입니다. 이 힘은 점차로 퍼져 나가, 모든 것을 변화 시킵니다.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려 맛있고 향기 나는 빵을 만들듯이 세상에 뿌려지는 복음의 누룩들은 서서히 세상을 변화시켜 하느님 보시기에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굳게 믿고 있는 나는 누룩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성화 시키고,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요아킴과 안나가 성모님을 잘 키워 교회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가정, 내가 속한 단체, 직장 등을 하느님 보시기 좋은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나는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가 어떤 누룩이 되에 내 가족을, 내 직장을,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있었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누룩과 겨자씨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결심하고, 그 결심을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주님!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제가 말씀의 누룩이 되어 저 자신과 제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게 하시고, 제게 주신 놀라운 능력들을 개발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작은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화요일, 마태13,36-43)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과 필요 없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구분합니다. 그런데 필요 없는 것들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움켜잡다 보면 결국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못 잡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 또한 필요 없는 것들 사이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나 자신을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 불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울며 통곡하며 후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기쁨 안에서 주님 앞에 서게 될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의미를 여쭈었습니다. 그 비유는 이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바로 예수님이시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며, 일꾼들은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좋은 씨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왜 가라지들이 세상에 나타날까요? 씨를 잘못 뿌리신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말씀해 주십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가운데에서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좋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있고, 하느님을 거슬러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죄의 길을 찾아 걷거나, 유혹자에 의해 죄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물론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추수 때입니다. 추수 때까지는 주님께서 기다려 주시지만, 추수 때에는 자신의 운명이 결정 나게 됩니다. 추수 때에는 명확하게 구별하여 알곡은 곳간으로, 쭉정이나 가라지는 불 속에 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귀가 있는 사람, 즉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루하루 주어지는 어려움들을 기쁘게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얻고, 작은 기쁨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나는 언젠가는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수확물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늘 생각하면서 매 순간을 살아가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 앞에서 어떤 열매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가라지가 아니라 밀이 될 수 있도록,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주님! 제가 성실한 생활로 주님을 찬미하게 하시며, 의로운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습니다(수요일, 마태13,44-46)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한 두 시간은 기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수고보다도 더 큰 기쁨을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도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투자의 대상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도 투자의 대상임을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물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치를 인정하고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기에 그 보물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결국 사기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남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그 보물의 소유권을 그 밭주인이 먼저 주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모르는 척 그 밭을 산다는 것도 양심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모든 것을 버린 이들에게 그 이상의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태양 앞의 반딧불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 놓았던 것입니다.



 신앙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신앙인으로 살려고 합니다. 매일 미사의 은총은 아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미사에 참례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참된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성당에 나와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은 땀의 의미를 알고, 봉사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작 힘든 일을 할 때나 필요할 때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또 이런 저런 말로 봉사자들을 어렵게 만듭니다. 보통 봉사하시는 분들은 정해져 있습니다. 또 말만 하는 사람들도 정해져 있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고 있느냐와 모르고 있느냐가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입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하십니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여기서 “진주”라는 단어는 고귀한 가치만이 아니라 흠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 나라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움직입니다. 모든 것을 처분하여 그것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진주 하나에 모든 것을 바꿔 버렸기 때문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주의 참된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선택을 했구나!”하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선택, 이 비유에서 말하는 진주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목자 잃은 양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참된 목자로 알아보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내일 일도 걱정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바로 예수님께서 값진 진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찾는 값진 진주, 즉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을 차지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차지할 것은 차지하는 현명한 신앙인, 슬기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값진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은 버려야 함을 명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알게 하소서.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며, 매일미사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며, 제 삶으로 제가 발견한 하느님 나라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목요일, 요한11,19-27)

 오늘은 성녀 마르타 축일입니다. 마리아와 라자로가 그녀의 가족이고,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주님은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신 듯 합니다. 성녀 마르타는 루가 10장 38-42절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굉장히 활동적인 여인입니다. 또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예수님께 연락했던 이가 바로 성녀 마르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성녀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마르타의 믿음입니다. 라자로를 살리는데 있어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큰 믿음을 보여 드립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라자로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는 라자로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을 때입니다. 마르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슬픔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와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서운했을 것입니다. 아니 오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원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가까운데 계시는데 오시지도 않고, 큰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오빠를 죽게 내 버려두셨으니 얼마나 슬픔과 원망이 크겠습니까?



 하지만 마르타는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죽은 오빠를 예수님께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겠노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타는 그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난 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를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마르타가 이것을 믿는다면 라자로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는 늘 믿음이 따릅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예수님께 청하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르타는 즉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믿는다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고”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라자로는 살아나게 됩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나 또한 믿음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 또한 또 한명의 마르타가 되어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믿음을 통해서 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의 은총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녀 마르타 축일을 맞이하여 마르타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마르타의 믿음을 본받게 하시어 저의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제 주변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보잘 것 없는 제가 주님의 은총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소서. 아멘.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예수님(금요일, 마태오13,54-58)

내가 잘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은 인정하면서도 말하는 친구의 권위는 존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를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할 것입니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는 교만과 착각”이 값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나자렛에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나자렛을 찾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하느님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치시는 권위, 지혜와 기적의 힘 등에 대해서는 모두 놀랐지만,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들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동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구세주는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자기가 아는 만큼 보입니다. 자신의 그릇 만큼 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 틀 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은 산 전체를 볼 수 있지만,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주변만을 볼 뿐입니다.



 또한 자존감이 떨어지면 상대방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깎아 내리게 됩니다. 한 형제가 영세를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또 봉사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의 열심한 모습을 보면서 험담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저 사람,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더 나아가 “저 사람이 이 일을 한다면 저는 이 일에서 빠지겠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모습을 인정해 주면 되는데, 이런 저런 자신의 생각으로 그 사람을 깎아 내리려고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니 이번에는 무리를 지어서 말을 만들어 갔습니다.



 어느날 그 형제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몫이고, 그들이 뭐라고 한다 해서 제가 제 신앙생활을 꺾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왜 제가 제 기쁨을 버리겠습니까? 물론 마음이 안 상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앙생활은 그것을 이겨내고도 남을만한 기쁨과 힘을 줍니다.”



내가 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존중할 때,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13,46).



 그리고 오늘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려 하지 말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굴러온 복을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나자렛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옹졸하셔서 적게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들이 옹졸해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청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제가 나자렛 사람들처럼 옹졸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하소서. 제가 넓은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게 하시고, 형제자매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알아 뵐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의 순교(토요일, 마태 14,1-12)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큰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시며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메시지를 삶으로 실천하신 분이셨고, 엘리야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질책하였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헤로데에게 강력하게 말하였으니, 헤로데 뿐만 아니라 헤로디아도 세례자 요한은 못 죽여서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죄를 덮어야 했고, 자신들의 죄를 들추는 요한의 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멋진 춤을 추어 그를 기쁘게 해 주자 그에게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헤로데에게 아주 무서운 청을 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죄를 떠들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없애려고 자신의 딸을 이용했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바라보면서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 봅시다.

 먼저 헤로데를 봅시다.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달라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요한이 예언자임을 알고 있었지만 요한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엇이든 청하는대로 주겠다고 맹세를 했기에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그것을 핑계로 요한을 없애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헤로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헤로데가 욕망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타협하는 사람이었고, 교활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헤로데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헤로데 안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누가 나에게 충고를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 죄를 감추기 위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희망사항이고, 현실은 헤로디아와 살로메를 철저하게 이용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모습을 바라 봅시다. 자신의 허영을 체우기 위해서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인 헤로데와 결혼한 여인. 자신의 죄를 꼬집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딸까지 이용하는 여인. 참으로 무섭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모습은 내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형제자매들보다는 세상적으로,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모습,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신앙까지도 접어두고 이익을 쫒아 살아가는 모습, 또 필요하다면 내 옆에 있는 이들을 이용하여 내 편리와 욕구를 채우려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바로 헤로디아의 모습이고, 그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 편에 서 계신 분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모습을 봅니다. 과연 나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제가 저를 돌아보면 제 모습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아니라 헤로데나 헤로디아의 모습이고, 살로메의 모습입니다. 방관자의 모습이고, 두려워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 제가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를 위해 몸 바치게 하소서. 당당하게 신앙생활 하며 옳은 일을 하는 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이익을 위해 다른 이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제 것을 내 놓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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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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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다해 연중 제 16주일

        20. 함세웅 신부(다)/36

        21. 김신호 신부(다)/37                22. 강길웅 신부(다)/39

        23. 강영구 신부(다)/41                24. 이기정 신부(다)/44

        25. 마르타와 마리아(다)/47            26. 김정진 신부(다)/50

        27. 한의수 신부(다)/51                28.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다)/53



20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한(恨)

                                                      함세웅 신부



무슨 사연이 한이 되었길래 저다지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으이, 으-이․.․"하는 소리에 맞추어 흐느적거리듯이 춤을 추어야 하는가.

한(恨)의 표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탈춤의 현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도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솟아오름을 느끼게 합니다. 저 춤의 내력은 보이지 않는 민중의 한을, 사회 심충부의 응어리진 넋을 대변한 것이리라.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은 한의 내력을 갖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 옛날에는 군주의 말 한 마디에 굽신거려야 하는 힘없는 백성으로서의 한을, 가까이로는 일제 36년 압재 아래에서 항거한 학생, 농민의 한이, 또한 해방 후에는 계속된 독재 정권과 6․25를 통한 민족적 비극 때문에 민중의 한은 응어리져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민중의식 속에 자리 잡은 한 때문에 항거한 많은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부당한 힘에 의해 처형되었거나, 수많은 밤을 외로이 감옥에서 보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항변으로 득을 본 것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가담치 않고 눈치만 보면서 연명해 온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미칠 때, 웬지 처량하고도 슬픈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과거는 때로 많은 회한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이기도 한, 배반과 회개의 역사의 되풀이에서 오는 서글픔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발돋움이라고 자위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말씀은, 세상사의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고 걱정하는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강조하십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간의 도움을 이웃에게 베푼 것으로 크리스천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몸까지 다 바쳐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심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이웃의 아픔을 내 것으로 알고 이웃을 위해 목숨 바쳐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굳게 지켜야 할 길임을 간곡히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항상 소외되고 외면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한을 갖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나 듣지 않는 백성들 때문에, 한 맺힌 눈물을 흘린 구약의 예언자와 같이 슬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후회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천은 장식품이 아니기에 말씀의 소중함을 찾는 마리아의 삶을 체험하면서, 사회에서 버려져 소외된 이들 사이에서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토록 해야겠습니다.



혹시 불행하게도 우리 자신이 거짓에 오염되었을지라도, 억압받고 슬퍼하는 이웃에 헌신적인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되며, 더구나 있는 것, 가진 것 다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줌이 부끄러움이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크리스천이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함에 있어 거의 무관심해 한다면, 오늘의 한 맺힌 대열은 ‘교회는 있는 자와 가진 자의 집단'일 뿐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임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걸하는 짐승이 아닐 것이며, 따뜻한 사랑, 좀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한이 발붙일 땅'을 원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의 원천이신 구세주는 한 맺힌 이들에게 참 진리를,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학생은 진리를 탐구하고, 군인은 오로지 국토 방위에 전념하며, 정치인은 도덕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공복의 자세를 갖고,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목숨을 다하여 선포하고 실천할 때 ,한의 민중들은 기쁨과 부활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 시대에 누가 사마리아 사람이냐"고 묻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가 ‘사랑의 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1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김신호 신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야말로 십인십색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완성에 삶의 목표를 두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가치를 두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가치기준은 시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많은 경우에 가치기준이  변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삶의 형태가 변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이 변하고, 삶의 조건이 변함으로써 인간의 가치기준도 변한다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에 속하는 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현실적인 사회현상에서 볼 때,무조건 틀렸다고 부정하기도 힘들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지만 인간이 한번 구성한 그 사회는, 질서와 공동체라는 목적을 실현하고 사회의 유지라는 명제 아래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에게 질서유지의 행동 규범을 강요하는 것이 또한 현실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현실문제에 얽매인 삶



  우리 사회도 산업화를 거치면서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불어 많은 면에서 물질이 우선하는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학을 지원하는 경향을 보아도, 자연계계열의 학과가 인문계 계열의학과보다 지망자의 점수가 높은 사실에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삶의 가치 있는 부문으로 여기는 사회적인 기본 흐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자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언니 마르타를 나무라지는 않지만, 마르타가 마음을 쓰며 걱정하는 것은, 실상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는 별로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무런 보탬이 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계신다.



    관상적 삶 살아가야



  교회의 신심(信心)사조 중에 관상이 우선되는 것이냐, 활동이 우선되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제기는 나름대로 서로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어떤 한쪽이 더 나은 것이라고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자신에게 합당한 길을 찾고, 그 길을 통하여 자신의 완성을 도모하고 하느님깨로 가는 삶의 길을 충실히 가기 위한 삶의 형태를 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단과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보는것이 아마도 옳은 생각이 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는 데 있어서, 과연 어느 길을 걸어가는 것이 확실하게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는가하는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옛날과는 달리 요즈음 우리사회에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선택에 있어서도 우위권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우선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수도원들이 활동을 삶의 지표로 상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인간은 사회의 지배를 받거나 적어도 삶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게 되어있다.

  사회의 흐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되는 것은, 관상적인 생을 삶으로써 사회의 흐름과 자신을 격리시키는 시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하는 자만이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2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복 받는 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8,1~10a (손님네들,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제2독서 골로 1,24~28 (감추어져 있던 심오한 진리가 이제 성도들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복 음 루가 10,38~42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힘들고 외로우며 고달플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동행자가 친절하면 그 가는 길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우리 민족도 길손들에 대해 상당히 친절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백성 자체가 나그네였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잘 보살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 성서에 보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두 가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보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하느님을 영접한 것이 되어 두 가정에 큰 축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 접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최후심판에 대한 말씀(마태25,31~46)에서 그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우선 1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더운 대낮에 문득 낯선 사람 셋을 보고는 자기 집에 정중히 모시는 내용입니다. 그 나그네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자기 집이 아니고는 쉴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모십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길손들에게 송아지까지 잡아 주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막말로 먹다 남은 밥을 줘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자기들도 쉽게 못 먹는 귀한 음식으로 접대를 합니다. 재산상으로도 손해요 시간상으로도 바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친절 때문에 뜻하지 않은 상을 받게 됩니다.



그때 음식 대접을 받는 분들이 그랬습니다. 내년 봄 새싹이 돋을 무렵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집에 아들을 점지해 줍니다. 그런데 사라의 나이는 아흔이 다 된 할머니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망측해서 사라가 웃었지만 그러나 사라는 정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 살 때의 일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고 안 얻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는 결코 아들을 얻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피곤한 나그네에 대한 어떤 연민의 정 때문에 그랬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받을 사람은 꼭 복받을 일을 합니다.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내용입니다. 그들 자매가 살던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길목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음식도 드시고 또 쉬셨던 곳입니다. 주님은 그들 자매를 특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보나 안 보나 굉장히 가난했던 자매였습니다. 라자로가 거지로 비유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루가 16,19~31참조).



그런데, 오늘 두 자매가 주님을 모시는 태도가 아주 대조적입니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고 마리아는 주님이 편하게 쉬실 수 있는 분위기에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피곤하셨지만 그러나 또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선 먹는 것보 다는 마음의 편안함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신이 복잡하면 밥알이 모래일 수 있습니다.



아마 짐작컨대 이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떼지어 주님께로 몰려들었고 그들 중에는 병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파와 그리고 치유 안수에 주님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아주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이때 그 피곤한 말씀을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 해도 그 피로가 풀리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실을 자주 경험합니다.



여자들이 바가지를 자주 긁으면 남자들이 밖에서 돌게 됩니다. 집에 들어가 봤자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말 많은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사 준다 해도 입이 껄끄럽습니다. 그러나 내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사 주면 보리밥이라도 꿀맛이 됩니다. 마음이 편하면 세상이 따뜻하고 음식도 맛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잘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집에서 편히 쉬시고 내 가정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웃 나그네를 그렇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며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따뜻하고 편하게 모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복받는 길이요 또 잘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그네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23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예수를 영접하듯이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16 주일입니다.

  저는 얼마 전 주일 밤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밤 열시 반쯤 되었을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는 언제나 성당을 한 바퀴 돌며 문은 다 닫혔는지, 혹시 전등은 켜진 것이 없는지 확인을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 날 밤도 습관처럼 대문 앞으로 왔

더니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걸려 있는 대문을 열려고 철창사이로 손을 넣어 고리를 벗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리면서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꾀죄죄했고 잔뜩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횡설수설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에게 밤이 깊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지만, 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묻자, 상남동 어디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으니, 성당에서 자고 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무조건 돌려보낼 수도 없었고, 도대체 어떤 분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성당 안에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기도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일 교우들 앞에서 사랑하라고 말하는 저 자신이, 저렇게 술 취한 노인을 성당 밖으로 내쫓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서는 저분이 혹시 예수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가장 좋기는 할아버지가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떠나 주셨으면 했습니다만, 할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서 제1회합실로 모시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회합실에 모포 한 장을 깔아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날만 밝으면 떠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눕는 것을 보고 방에 들어와서 자리에 누웠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미사를 지내려고 일어나서 가 보니 담요만 깔려 있고,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당에 있으면 참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만, 이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젊고 건장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용건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 청년은 집 나간 아내를 찾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돌아갈 여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묻자 강원도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서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청년이 혹시 예수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멀쩡한 차림을 하고 어디 가서 구걸을 하겠는가? 겉모습만 보면 그 누구도 도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신부를 찾아왔겠지.” 솔직히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가슴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와서 마지못해 여비를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돌려보낸 후에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 속았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입니다.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보니 사기도 참 많이 당했습니다. 한번은 시골 어느 본당에 있을 때에 찾아왔던 사람이 또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수법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그 사람은 성당이 다르니까 다른 신부려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상습적으로 신부들의 약점을 노리면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하고 얼마의 돈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밑에서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어줍니다. 사실 그 나그네들은 야훼 하느님이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를 융숭히 대접했던 아브라함은 그 보상을 받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임신하게 되어서 이사악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단순히 나그네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을 보는 바로 이런 눈이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깊게 따지고 보면, 눈의 차이가 아니라 가슴의 차이입니다. 가슴이 열려 있는 사람은 눈도 열려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열려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을 보듯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축복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가끔 스님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염불을 하고 곡식이나 돈을 얻어가곤 하였습니다. 이런 스님들을 일컬어서 탁발승이라고 말합니다. 수도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기에 생계 수단이란 다른 것이 없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어서, 때로는 밥도 못 먹고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때도 흔했습니다. 그런 시절인지라 탁발하시는 스님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마땅히 드릴 만한 것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으면 그냥 “죄송합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돌려보내면 되는데,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을 돌려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불교의 스님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스님을 그렇게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 스님이든 거지든, 주님을 대하듯이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도 그렇고 성서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런 분들을 더욱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고 대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핑계로 탁발승들을 빈손으로 내쫓는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든, 창녀든, 나병 환자든, 쫓겨난 사람들이든, 모든 사람들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셨고, 그분의 받아들임 때문에 죄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새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따뜻한 영접 자체가 바로 새 삶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다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당시 제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만, 이는 예수께서 그들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가슴을 닫고 사는 그들이 예수의 받아들임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틀에 자신들을 끼워 맞추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율법이라는 틀로 모든 것을 저울질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틀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했던 것입니다. 마치 신자들이 예수 믿는다는 핑계로 탁발승들을 내쫓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만일에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서 그 조건에 맞을 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실 때, 이런저런 조건을 다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를 사랑하셨고,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열고 예수의 그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분의 제자가 되어서 새 생명을 얻게됩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조건을 답니다.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느니, 내가 지금하고 있는 사업이 끝나면 성당에 가겠다느니, 지금 죄를 참 많이 짓고 있는데 어느 정도 그런 생활이 청산되면 성당에 가겠다느니 등등입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다 채운 후에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면, 아마도 죽을 때까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조건이 없듯이, 우리도 예수의 사랑을 조건 없이 지금 즉각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 삶은 시작될 것입니다. 성서에는 예수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예리고의 난쟁이 세관장 자캐오가 그렇고, 간음하다가 잡혀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죄녀가 그렇고,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그분의 발을 눈물로 씻었던 일곱 마귀 들렸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도덕하고 불경건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서 새 생명을 얻었던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받아서 새 생명을 누리듯이, 이제는 우리 자신이 따뜻한 가슴으로 조건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영접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가 예수를 영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자매는 모두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예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습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예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는 데 마음을 쓰고 있었지만,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대접하는 두 자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영접해야 할 예수는 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바로 내 남편, 내 아내, 자식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이웃과 형제들의 가슴속에, 그분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탁발 스님의 모습으로, 거지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옹졸한 가슴으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하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들의 가슴속에 살아 계시는 주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늘 닫힌 가슴으로 살아가기에 그에게는 이웃도 없고 하느님도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열린 가슴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시다. 여기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잘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4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세상 사건을 스테레오로 감상하기

                                                        이기정 신부



오늘 성서를 읽으면서 문득 연상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문 앞에 무릎 꿇고 밤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어떤 가정의 엄마의 모습입니다.



새 삶을 찾은 기도하는 가족



처녀 때 혼자 성세를 받고, 결혼할 때만 해도 종교가 서로 다른 것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 자신이 있었던 그녀였습니다. 그거나 시집의 비난과 남편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성당을 도저히 다닐 수 없게 되자, 우선 가정을 살리자는 마음으로 성당 다니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성당 근처를 지나거나 하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 둘이 생겼고, 시어른들이 한달 사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집안에는 무심하고, 밖에서는 자만 속에 지내다가, 직원들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아 회사를 넘기고, 집도 단칸 전세방으로 가는 처지가 됐습니다. 매일 술로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이, 어느 날밤 술에 만취해 들어와, 옷도 벗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그런 남편을 측은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는 잊었던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무릎 꿇고 앉아 창 밖 환하게 달무리 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한밤중 갈증으로 잠이 갠 남편의 몽롱한 눈에 부인의 모습이 띄었습니다. 심혈을 다해 바치는 그녀의 기도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해진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생전 꿇어보지 않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맏아들이 절로 눈을 떴을 때, 아빠와 엄마의 신기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느새 동생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잠시 후 모두는 말없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홀렸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아무 말이 필요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힘찬 열기가 한 몸이 된 이들의 뼈 속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인생의 진가는 세상의 물질적 역학이 돌려내는 흥망성쇠에, 개인의 능력을 맞물려 돌리는 것이라고 인생철학을 늘 논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밤 남편은 초자연의 신비를 호흡하며, 세상과 맞물릴 줄 아는 삶이, 참된 인생이라고 깨달은 순간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 후 인간 내면의 신비스런 점들을 수없이 깨달았습니다. 눈감고 잠을 푹 자는 시간이 있어야, 다음날 눈을 뜨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세계로부터 눈을 감고 영혼 깊숙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있어야 눈을 뜨고 사물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인생이 고작 세상의 사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님을 다각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말은, 분도수도회의 생활 모토입니다. 이 말은 짧지만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일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되며, 수도자라 해서 기도만 하며 살고, 사회인이라 해서 일만 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일하며 사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생활도 기도하는 정신 속에서 이루어져야 참된 인생의 의미를 피워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노동이 합일되는 올바른 삶



오늘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는 대조적인 인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방법에서 마르타는 분주하게 일하고, 마리아는 차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두 자매의 태도가 일심동체라면 좋았을 겁니다. 만일 언니가, 내가 이렇게 일하니까, 동생은 예수님의 이야기만 재미있게 들으면 돼" 했으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하십시오"라고 불평을 했으므로 예수님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다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꾸짖으십니다.



일하는 것도 주님을 모시는 한 몫이며, 말씀을 듣는 것도 한 몫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타의 집에 들리신 것도 일만을 시키러 가신 것이 아니고, 말씀만을 하시러 간 것도 아닙니다. 둘 다입니다. 이 둘은, 언니와 동생이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모실 각기의 몫이었습니다. 둘 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거나, 둘 다 일만하고 있으면 주님을 제대로 모시는 게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주님 모시듯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위해서 일만 할 것인가, 인생을 위해서 기도만 할 것인가 생각할 때, 둘은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곳이 곧 가톨릭 종교입니다. 흑자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기도만 하고 사는 사람들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한 인간으로서 복음적 삶을 실천하려고 상활의 규칙을 정하고, 공동체로 사는 것입니다.



일반신자들의 가정이라는 범위가, 곧 수도자들의 공동체와 같은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병원에서, 학교에서, 성당에서, 사회복지 기관에서, 농장에서, 교회기구의 사무실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도원 내부에서만도 빨래, 부엌일, 청소, 교회의 물품제작 등으로 다양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도 사람이니 만큼 일을 해서 먹을 것을 마련하며 삽니다. 성직자나 수도자 중에도 음악가, 교수, 박사, 시인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일을 해서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받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기도가 첫째입니다.



우리는 두 발이 있어서 걸을 때,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두 눈이 있어서 거리감각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귀가 둘이 있어서 소리의 방향과 음향을 스테레오로 듣습니다. 두 팔이 있어서 균형을 맞추며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있다는 양면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영만을 생각하거나, 육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사물을 사물 그대로만 봅니다. 시간을 시간으로만 보기 때문에 현세만 봅니다. 인간의 노동도 사랑도 생활도 한쪽 눈, 한쪽 귀로만 보고 배울 뿐입니다. 그리고 인생도 유한한 상태로 보며, 현상적 가치로만 봅니다. 그들은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노래도 모노로 듣고, 자연의 노래도 그렇게 듣습니다. 아직 탈바꿈을 못한 자연인 그대로라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 행복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매사를 2차원적으로 볼 줄 압니다. 즉 현세와 내세적으로 또는 영과 육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성장하는 자녀들 모습이나, 부부가 서로의 모습을 볼 때에 그렇게 볼 줄 압니다. 이런 시각이 신앙인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늘과 땅을 보며, 볼 줄도 알고 쓸 줄도 압니다. 이웃의 의미를 알기에 도움을 받을 줄 알고, 베풀 줄도 압니다. 자신의 의미를 영육의 조건과 현세와 내세의 뜻으로 파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인은 세상의 사건들을 스테레오로 감상할 줄 압니다. 사회생활을 입체감과 거리감을 느끼며 볼 수 있습니다. 양팔을 흔들며 인생을 균형있게 올 잡아 걸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줄 알고 일할 줄 아는 세상에서 빼어난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행복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우리 일단 오늘 성당에 모였으니, 함께 축배를 올리는 게 어떨지요! 











25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마르타와 마리아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에 임하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며,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장 큰 두 계명을 들었습니다. 루가 사가는 이 두 계명을 실제적으로 실행하여야 함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두 계명을 실행하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과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신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을 가르치고 있는 오늘 복음을 우리는 주의 깊게 묵상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들였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10장부터 19장까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 중에 있었던 일들을 전해주고 있는 내용이므로 성서 저자는 예수님의 일행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어떤 마을이란 곧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뱃사이다 지방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의 마리아와 마르타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 집에 초대되시었는데, 마르타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여성 명사로서 아마도 이 집은 마르타라는 여인의 집인 듯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나그네나 여행하는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는데, 이는 오늘 제 1 독서에서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여 축복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며 특히 그들 조상이 유목민이었고,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오랜 순례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복음에서 ‘모셔들이다’라는 말은 친교의 상징이며, 환영과 기쁨을 담고 있는 용어이므로, 두 여인이 예수님을 모셔들인 것은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적 차원에서 맞이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사랑으로 맞이한 두 자매는 서로 상이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즉 두 자매가 다 같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지만, 언니인 마르타는 접대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고,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서로 상이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발치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모습은 이스라엘 관습에 따르면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취하는 태도이며, 마르타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다는 마르타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접대하는 일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상식적인 시각에서 보면 마르타의 불편은 타당한 듯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만을 털어놓는 마르타에게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 마르타 하고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이중호격의 사용은 당시 이스라엘 어법에 따르면 강조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그 분주함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다른 관심을 갖지 못하는 마르타의 사정을 동정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걱정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갖는, 혹은 세상일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바른 관심을 갖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용어로서, 세상사의 분주함 때문에 신앙과 영성적인 기도에 소홀함을 지적하는 영성적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맡은 활동과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의 삶이 중요하며 활동과 분주함 때문에 기도생활 즉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복음과 함께 깨달음의 차원에서 실천의 차원으로 변화될 것을 말하고, 활동의 차원에서 명상의 차원으로 변화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와 활동이 항상 같이 되어져야 함을 깨우쳐주는 구체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에서 나타난 마르타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생활의 두드러진 특성 중에 하나는 매우 분주하며 바쁘다는 사실입니다. 해야할 일, 이행하고 실현해야 할 일이 머리속에 늘 남아 있고, 늘 바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도 다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한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생활 역시 우리들 이상으로 분주하셨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는 당신을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는 마르타와 세상사에 분주한 우리들을 책망하거나 마르타와 우리들의 일들을 무가치하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분주함 때문에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처지를 동정하시며 기도와 명상의 중요성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가족을 떠나거나, 작업을 폭리하고,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일상사에 분산된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는 일이며, 차라리 자기가 행하는 일들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것, 내 안에 하느님이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비우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는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신앙의 경지에서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할 때나 일할 때나, 한가할 때나 분주할 때나 자신가 타인에게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만남과 일들은 온통 마리아가 앉은 주님의 발치인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활동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명상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아멘





26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

                                                             김정진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육신과 영혼의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언니 마르타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일했습니다만 그것은 세속 일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세속 일이나 육신일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영혼의 일은 더 중요합니다. 동생 마리아는 영혼의 일에 대해서 마음을 쓰며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웠습니다. <마르타 당신은 너무나 많은 일로 걱정을 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데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오. 마리아는 참으로 좋은 몫을 택했소>(루가 10,42)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가정을 가진 여러분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여러 가지 육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해야 되겠지요. 할 수만 있으면 가정을 부유케 하여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데 조금도 불안이나 지장을 초래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딴데 있습니다. 육신 일로 인해서 또는 재물에만 정신을 씀으로 말미암아 더 중요한 영신생활을, 하느님의 공경을 게으르게 하는데 맹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재물도 모으고 해서 하느님과 교회에도 바치고 가난한 자에게 애긍 희사도 하고 적선도 하여 좋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서 한편 더욱 주일날도 잘 지키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얼마나 흐뭇하며 좋은 일이겠습니까.



이렇게들 하지 않으니 탈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육신 일에만 골몰한다는 것은 너무나 잘못되는 일입니다. 어머니나 자녀들은 교회에 나오는데 유독 아버지만이 결석하는 집안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딱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당신은 세상 일에만 정신을 쓰고 있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오. 당신의 집안 사람은 참 좋은 몫을 택했으므로 훗날 하느님께 후한 상을 받을 것이오. 그 때에 당신은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서적의 28면에 한 소년이 첫영성체를 할 때부터 아버지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한지 8년 후 비로소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뿐이오>라는 예수님의 명언을 잊지 맙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마태 16,26)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악한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으로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과 저녁에 간단한 기도라도 드릴 줄 알고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실천하고 주일에 미사에 참여하는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이 사람은 참 좋은 몫을 택하였소>라는 예수님의 칭찬의 말씀을 듣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동생 마리아를 본받아 우리는 기도에 더 열중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개인기도나 가족 전체가 바치는 기도나 그리고 공적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저 세상에 가서 온전히 하느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는 습성을 버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고 또 그보다 더 치명적인 손해도 없습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습성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길거나 복잡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간단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마리아 요셉,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주여 나의 잘못을 다 용서하소서. 저는 당신께만 의탁하나이다. 이같은 간단한 기도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같은 자세를 항상 취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세속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회사, 상점이나 공장, 혹은 기타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또 주부들은 집안을 돌보고 식구들이 적절히 살아가고 먹기 위하여 시장을 보고 식탁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면서도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마르타는 마리아가 행하는 일보다 덜 중요한 것에 대하여 조바심을 갖고 야단스럽게 떠들어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의 생활과 생산적 활동을 완전히 겸비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 이상적이고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로 굳게 다짐합시다. 아멘.











27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가장 요긴한 것은 하나

                                                         한의수 신부



“눈은 위보다 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초대를 받아서 가 볼 경우 입으로 먹어서라기보다는 눈으로 만족을 취하고, 잘 차렸다고 보이기 위하여 애썼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음식이란 아무리 맛이 좋더라도 자기 양 이상은 더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도 저녁에 텔레비젼을 구경을 합니다. 그리고 별로 만족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는 아무리 좋은 경치나 구경도 귀찮고 괴롭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지만 마음이 동의하지 않으면 가치를 잃어버리고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조차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라고 하는 두 처녀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존귀하신 분을 모처럼 초대하는 것이기에 두 처녀는 성심 성의껏 예수님을 뫼시고자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잘 뫼시겠다는 마음은 둘 다 동일하나 예수님을 뫼시는 방법, 태도는 서로 상이하게 나타납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을 뫼시고자 집안을 치우며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혼자서 허둥지둥 준비하던 마르타는 참다못해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마리아더러 저를 도와주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께서는 “마르타야! 너는 너무나도 많은 일에 걱정을 하고 마음을 쓰는데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은 하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아를 나무라지 말라고 타이르십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어느 학생이 서울에 이는 일류 대학을 지망합니다. 그에게는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습니다. 부모님도 다 계시고 가정 환경이 좋아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튼튼합니다. 크나큰 걱정은 어떻게 해서 입학시험을 통과하느냐? 주야로 그 준비 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입학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력뿐입니다.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밤을 새웠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학교에서 배운 실력을 평소에 착실히 준비해 왔느냐 뿐입니다.

입학시험을 보러갈 때 아무리 엿이나 찰떡을 잔뜩 먹고 가봐야 실력 없으면 실패의 쓴맛을 거듭할 뿐입니다.



영세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가운데 냉담을 하거나 또는 신자로서의 수계 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교리지식이 부족하든가, 생활난에 허덕인다든가, 게으름과 태만이든가, 본당 신부가 보기 싫다든가,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믿음이 약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신앙을 튼튼하고 성실하게 키워나가는 방법 중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 하나,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생활! 그것이 참다운 신앙생활이요 건전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그분과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나 미사에 참여할 땐 잘 들리고, 복잡한 가정생활을 할 땐 잘 안들리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농번기라 바쁘고 분주할 땐 말씀을 안해 주시고, 한가로운 휴일에만 골라서 해주시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길을 가든지 일을 하든지 즐겁게 놀든지, 어느 때든지 듣고자 하는 마음, 듣고자 하는 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입을 가졌을 때는 항상 들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줄 아는 귀와 말을 할 줄 아는 입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세를 받은 다음부터 꾸준한 노력과 훈련을 쌓아서 자신이 스스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귀를 가졌으되 듣지 못하고 입을 가졌으되 말을 못하는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하느님 대전에 가치없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생활이 아무리 바쁘고 어렵더라도, 하느님과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28         연중 제16주일   루가 10, 38-42 (다)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


 묵상 :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오로지 기도생활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엔 반대로 오로지 활동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것 갈다. 기도 없는 활동, 그것은 자기 과시로 흐르기 마련이고,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이다.



  귀나 좀 빌립시다



  본당신부님들이 가정방문을 하다보면, 함께 기도를 하고는 교적을 정리해야 한다. “큰아들은 지금 군에 가 있고, 둘째 아들은 지금 객지에서 대학 다니고, 막내는 지금 재수하고 있습니다." 말씨가 이곳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고향은 어디며, 집안은 언제부터 교회에 나왔는지 등등...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주인 아줌마는 차(茶)나 음식준비에 온통 정신이 팔려, 물어보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거나, 번번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짜증이날 때가 있다. 제발 귀나 좀 빌려주었으면 하는 때가 많다.



  오늘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대조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 듣기에 전념하였다. 혼자 음식준비에 정신 없이 동동거리던 언니 마르타는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주기를 예수님께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에게 필요한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오셔서 반갑고 위하는 마음이야, 마르타나 마리아나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을 더욱 기쁘게 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였음을 알 수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바쁘다, 바빠 병'을 치료해야한다

  

  우리들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만연된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 바로 ‘알차게 사는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리고 ‘요즘 바빠서 죽을 지경이다'는 푸념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다, 바쁘게 정신 없이 사는 사람 치고 자신이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며, 음미된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듣는다. 머리가 나빠서라기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만 진행하다보면 항상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바쁘게 해치우는 일은 항상 마무리가 깔끔하게 제대로 되지 않고, 불량품이 많게 마련이다.  국제 기능올림픽을 제패하면서도 불량품을 많이 내는 기업풍토는, 바로 바쁘게 대충 해치우는 행동관습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를 닦으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빠른 완공을 했다. 그러나 그 고속도로를 보수하기 위해 처음 시공비의 몇 배가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사는 길은 없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너무 단순히 기도와 활동의 양자택일로 대비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 침묵 중에 묵상하는 시간이 없이, 그 말씀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가끔 신자들이 와서 “신부님 다시는 그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을 겁니다. 무조건 명령만 하고, 얼마나 기분 나쁘게 무시하는 지 모릅니다"하며, 함께 일한 간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때가 종종 있다. 함께 본당 활동을 하면서 그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명령만 하는 신심단체 간부들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이 없는 ‘잘난' 사람들일 때가 많다.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성령의 은총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성령의 은총은 그 마음을 부서지고 낮춰진 마음이 되게 해주신다. 은총으로 부서지고 낮춰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명령하는 자세를 취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 없다는데 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그 마음에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세속적으로 스스로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봉사를 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는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군림하는 자세로 활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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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4일 (금)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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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5주일

        

        22. 이기정 신부(다)/37

        23. 김몽은 신부(다)/40                24. 김병열 신부(다)/42

        25. 구요비 신부(다)/44                26. 함세웅 신부(다)/46

        27. 강길웅 신부(다)/48                28. 강영구 신부(다)/50

        29. 사랑은 사심없는 관심이다(다)/54







22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착한 신기료 아저씨

                                                        이기정 신부



저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1․4후퇴 당시에「부산일보」라는 신문을 한동안 팔았습니다. 그때 저는 신문을 배달하는 형들이 몹시 부러웠습니다. 형들은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이집 저집 대문 밑으로 “신문이오!" 외치고 넣기만 하면 됐는데, 저는 저녁 때 분배소에서 받은 신문을 어두워지기 전에 다 팔아야 일이 끝났습니다. 그때 일들이 지금 주마등처럼 줄줄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유난히 떠오르는 기분 좋은 일은 오늘의 성경과 어울리는 사건입니다.



신문팔이 소련 시절의 추억


그날따라 영 신문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다녀야 하는데, 그 전날 시장에서 너무 속상한 일을 당해서, 오늘은 마음도 달랠 겸 대청동 하꼬방(피난민들의 임시 집) 동네를 골목골목 누비며 오르내렸습니다. 창문마다 등불이 켜지는 사이로 골목은 점점 어두움이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내일 아침 부산일보!" 하며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웅답이 없었습니다. 팔기는 몇 부 팔았지만, 아직 20부 정도나 남았습니다. 이대로 들어가면 본전도 못하는데 하면서, 열심히 외쳐 보아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이젠 기운도 빠지고, 기분도 안나서 외치는 대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신문! 이리 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려갔더니 어수선한 하꼬방 속에 신기료 아저씨가, 가빠 쪼가리를 무릎에 얹고, 구두를 잡은 채 저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몇 살이니?" “여섯살입니다." “고향이 어디니?" “저, 이북 강계입니다." 등등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습니다. 왕사탕 한 알도 주셔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는 “몇 부 남았니?" “이만큼 남았습니다."



그때 아저씨가 저를 보던 그 미소진 얼굴은 지금도 그려내라면 그릴 수 있을 만큼, 제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여기다 놔, 내가 다 살께."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손해잖아요." 그러나 저는 그 아저씨가 나무라는 눈치를 채고 그대로 했습니다. 인사를 굽신하고 나온 저는, 기쁨의 눈물을 홀렸습니다. “참, 고마운 아저씨다. 세상에 저런 아저씨들만 있으면 전쟁같은 건 없었을 텐데"



어두운 골목길까지 갑자기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그 집 앞에 가서는 신문을 문 앞에 살짝 놓고 얼른 도망쳐 오곤 했습니다. 혹시 저를 보면, 하루종일 구두 지어 번 돈을 몽땅 주실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신문 파는 것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커다란 그림을 펴들고, 소나무 가지에 걸었을 때,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얼굴이 바로 그 아저씨의 얼굴과 똑 같았습니다.

둥실한 얼굴, 이마를 수건으로 맨 모습, 턱에 난 뭉실한 수염 등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또 한번 마음속으로 빙그레 웃었던 것은, 저로선 너무나 이해가 잘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에게 확실히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오늘 생각해 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참 필요한 소중한 말씀입니다.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사람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사람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무서운 눈초리로 둘레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이 사회를 생각케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위층일수록 밀집농도가 짙은 것 같습니다. 권력이 없는 평민들, 경제적으로 힘을 이미 잃은 충에도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부터 성숙과정 전채를 통해서 고된 시험경쟁을 치러온 오늘의 인물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권력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 동네를 볼 때에는, 특히나 이마가 찌푸려집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생각 속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자리하고 있나 봅니다. 오늘의 아파트 벽은 실제 30센치 내외이지만, 그 두께의 심적 거리는 백리, 천리 인듯 한 느낌도 사실입니다.

  

다시 신문 팔 때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 전날 받은 상처는, 한동안 어금니를 깨물게 했다고 기억합니다. 부산 국제시장에 막 접어드는 길가의 전봇대 앞이었습니다. 방금 지나간 소나기에 시장바닥은 온통 흙탕물로 질퍽했습니다.

한 젊은 신사 아저씨가 신문을 달라기에 드렸습니다. 아저씨는 돈 줄 생각은 않고 신문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돈 주세요." 그래도 아무 반응 없이 한 다리를 꺾고 전봇대에 기댄 채 신문만 봅니다. “아저씨, 돈을 주세요" 했더니 "쪼꼬만게 왜 시끄럽게 말이 많아!” 하면서 저의 가슴을 흙발로 걷어찼습니다. 저는 신문을 끌어안은 채 흙탕에 넘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쓰러진 채 한참 숨을 가누며 노려보았더니, 신문을 몽땅 빼앗아 던져 버렸습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나같은 자식을 둔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들도 있었는데, 누구하나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아 남을 이웃 사랑의 힘

  

그런 다음날 착한 신기료 아저씨를 만난 것입니다. 시장의 아저씨는 저에게 절망을 주었고, 신기료 아저씨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시장의 주변 사람들은 저의 가련한 처지를 외면한 채 각박한 세상 인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신기료 아저씨는 참으로 저의 이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저씨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그대로 살았다면 지금쯤 시장의 아저씨는 어떤 모습의 인생 말로를 걷고 있을까요? 하지만, 신기료 아저씨는 행복하고, 편안한 노년을 지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어떤 조물에게나 신기료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신기료 아저씨는 저에게 베푼 그 인정 많은 버릇 때문에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겠지만, 좋은 이웃들과의 평화로운 주변을 구축했을 겁니다. 저도 제가 속한 주변을, 바로 저의 일부처럼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이웃에게 준 사랑으로 모아진 사람들의 정과 주변의 정리는, 죽은 다음에도 쓸 수 있는 참된 재산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죽음이 장애가 될 수 없는 고차원의 힘이라고 이해됩니다. 그 힘은 나만이 누리는 게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신비한 힘이 될 줄 압니다.

  

그리고 저는 어릴 때에, 제 이웃을 신기료 아저씨라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신부가 되면서 이웃의 의미가 넓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이 이웃이기도 하고, 한 단체가 이웃이기도한 것으로, 교회가 저의 이웃이고, 사회가 저의 이웃이며 자연이 이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연보호가 이웃이고, 쓰레기 재활용이 이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청의 직원들 역시, 청계천 포장 밑 하수도가 공직인으로서의 이웃이고 서울의 공해방지도 이웃입니다. 인간을 위한 근본적 문제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찾을 줄 알아야, 공직을 맡은 인간이 랄 수 있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이나, 고통받는 인간 개인의 존재만이 이웃일 뿐이라면, 성서는 너무나 국한된 세계의 예화일 뿐입니다.

  

한 사람인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그렇게 산다면, 우리의 직분상 당면하는 이웃적 존재를 찾을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찾은 모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새 하늘 새 땅으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새 하늘, 새 땅 건설의 일꾼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23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하찮은 것 하나에도 손길을

                                                              김몽은 신부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사랑과 미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마치 선과 악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철학에서 보는 악의 개념은 선의 결핍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움도 사랑의 결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움이란 사랑의 변질이지 결코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최대의 관심을 상대방에게 기울이고, 사랑하는 대상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미움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반대는 오히려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는 데 쏟고, 미움은 나의 관심을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 쏟습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전혀 관심 밖에 두고 남남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주어진 제목인 ‘사랑과 미움’을 말하자면 ‘사랑’만을 이야기하면 될 줄로 생각합니다. 미움은 그 관심의 초점이 사랑과 상반되는 것이므로, 그 관심의 초점을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즉시 남녀간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도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그것이 자연질서와 사회질서 안에서 정당하게 이러우진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결코 그것만은 아닙니다. 에로스적 사랑도 다른 많은 사랑 중의 하나이지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이 있겠지만,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나 참 진리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것입니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에 죽고 상대방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살아하는 사람은 자기에 죽고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그 행위에 있어서 그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소중히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소유 전부를 바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누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떠한 것이든 그 사랑하는 대상을 괴롭히거나 또 자신의 사랑을 방해할 때는 생명을 걸고 그것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모습이 제일 잘 나타나는 것은 어버이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있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하늘이 주신 본능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새끼를 품은 짐승은 포수의 총뿌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끼들을 지킵니다.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님들의 사랑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또 부모들은 자녀들의 순수한 사랑을 잘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사랑은 역시 연애감정에서 볼 수 있겠으며, 그것은 마침내 서로생명을 교환하는 부부애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류가 모두 한 아버지(하느님)의 자녀들이므로 한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기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또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비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 진정한 자기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올바른 가치판단을 가지는데 있다고 봅니다. 고상한 것과 지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보다 높은 선에 이르기 위해, 보다 낮은 차원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참다운 자기애가 아닐까 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안락을 포기할 줄 아는 것, 즉 행복하고 건전하며 품위있는 미래를 위해 젊은 혈기를 억제하고 인격을 높이는 교양을 쌓는 일 등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으로 바꾸겠느냐?”(마태 16,26). 자유를 방종과 혼동하고, 동물과 다를 바 없이 관능적 쾌락에 몰두한다는 것은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얼마나 이런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벗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의 미담도 수없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인도의 마더 데레사의 경우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는 이 말씀은 인류의 정신사에 결정적인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실천될 때 인류사회에서는 미움이라는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미움보다 강합니다. 지금 세계는 평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무기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일입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전세계를 차지하셨습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내주고, 그 사랑하는 대상을 모두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조국을 사랑한다면 조국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조국은 비로소 그때 나의 것이 됩니다. 원수에 대해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원수는 마침내 우리와 한 형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미워한다면, 사랑의 경우와는 반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무엇인가 조금  얻어진 것 같이 여겨지거나 속이 좀 후련해진 것처럼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까지도 잃고 말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사랑은 미움을 몰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24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

                                                          김병열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루가 복음사가를 통하여 우리 모든 이에게 가장 좋고도 가치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잠시 생각해 봐야만 하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 여기서 주님은 네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우리 모든 인간들의 의무를 집약시키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루가 10,27)

모든 사람이 자기 어버이를 마땅히 존경하고 효도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 모든 인간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을 존경하고 그분께 사랑을 드리며 그분을 흠숭하는 것은 더욱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한 분의 하느님을 서로의 주인으로 모시는 우리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흔히들 얘기를 합니다. “사랑이 어떻더냐? 달더냐, 쓰더냐? 모가 나더냐, 둥글더냐? 주는 것이냐, 아니면 받는 것이냐?”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젊은 청춘들이 얘기하듯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은 모가 나지도 않고 보름달처럼 둥근 사랑입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하는 둥근 사랑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을 사랑하사 외아들까지도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당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 뿐 만 아니라 죄인까지도 사랑하셨고, 더욱이 원수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참된 신자생활을 해나갑시다!



둘째로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고, 셋째로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명백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은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 ···· 그 사람에게 동정을 베푼 사람입니다”(루가 10,36-37) 이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웃은 바로 작으나마 내게 도움을 원하는 사람 모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이웃이란 또한 내게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줄 아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서로가 다 이웃인 것입니다.



어느 누가 타인의 도움을 하나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환자는 의사를, 다친 사람은 치료해 줄 사람을, 궁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그 도움을 요구합니다. 더구나 현대와 같이 분업화된 사회에 있어서는 누구나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비록 나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오늘과 같이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사람의 간접적인 도움을 입고 사는 일이 허다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내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의 모든 이웃에게 도움과 동정을 베풀 줄 아는 참된 이웃이 됩시다! 나의 도움을 원하는 이웃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넷째로 주님이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것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주님은 “당신도 가서 그렇게 행하시오”(루가 10,37)하셨습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인정이 있다면 강도에 맞아 다친 사람을 못 본 채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사람들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천사의 말까지 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사랑을 실천 할 줄 모른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도 바오로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는 신자 생활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신자로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못지 않는 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바로 신앙생활의 연속임을 잊지 맙시다.

성당에서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나의 도움을 원하는 모든 이웃에게 도움을 줄 줄 아는 사랑의 실천도 중요함을 명심합시다.











25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구요비 신부



안녕하십니까? 거룩한 주님의 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주님 앞에 가까이 나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께서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또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웃도 여러분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율법 교사가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께 질문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대답이며, 공식적인 대답일 뿐입니다.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영생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우리가 누려야 할 구원이고 완전한 행복에로의 길입니다. 이러한 영생은 하느님의 초대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가야할 길입니다. 그 자비로운 초대를 우리 마음에 심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행복을 찾기 마련이고, 지금은 숱한 걱정과 고민이 있지만, 그래도 보다 나은 삶이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문제와 갈등이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거짓과 타협해야 하는 우리들, 재물이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면서도 돈의 위력에 매여 살아야 하는 우리들, 경건한 종교생활을 동경하면서도 타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 안전과 건강을 원하면서도 사고와 질병의 위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은 끊이지 않고 갈수록 태산이고 바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갖가지 갈등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기본적이면서도 분명한 영생의 길을 주님은 들려주십니다.

먼저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신명이 30장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법은 아주 우리와 가까이 있고 그래서 우리의 입에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법이 있다하시는 말씀과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할 때, 주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면서, 주님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영생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또 골로사이 1장의 말씀으로서, 하느님께 회개하고 형제들과 불우한 일이 있으면 화해해서 평화를 이룩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단 앞에 가까이 나오신 여러분, 주님께 향하여 계시면서 형제들의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용서 받으면서 오늘 화해하십시오.



오늘 또한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면서 있다 하는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서 예수님은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빼앗기고, 인륜이 파괴된 강도 맞은 사람의 깊은 상처로 죽어가는 모습, 그것은 바로 인류의 어제의 모습, 오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병들어 있는 상태, 헐벗고 굶주린 상태, 싸우고 상처 투성이의 상태, 이런 모습에서 우리를 살려 낼 길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아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와서 그를 살려주신 것처럼 바로 인류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내는 길은 사랑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주어진 숙제는 억울한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여러분의 사랑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면, 우리 교우들 중에서 도움을 받을 불우한 이웃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여러분의 따뜻한 손길을 보내 주십시오. 그들의 삶에 새로운 길을 얻을 때 그도 살고 여러분도 살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앞에 참된 행복의 길이 열릴 것이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26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함세웅 신부



구약성서를 통하여 볼 때,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태인들과는 적대 관계에 있는 도시로서, 이교도들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고 설명 드린바 있습니다.

복음에는 율법 전문가 제관, 레위 사람 그리고 사마리아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율법 전문가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율법의 근본 사상이며, 그리스도의 핵심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재삼 강조, 확인하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또다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이웃이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비유와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여행하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여행자는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기고, 복음 말씀대로 반쯤 죽은 상태였습니다. 형편없게 된 이 여행자의 모습은 시체와도 같았습니다.

  

첫번째로 제관 한 사람이 지나갔지만, 그는 피투성이의 여행자를 못 본 체 하고 지나쳤습니다. 공연히 아는 척, 또는 도와줬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르고 또 뒷처리가 귀찮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습니다.(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죽은 이를 보았을 경우, 불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결 예식 등, 종교 예식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레위 사람으로, 레위 사람이란 구약에서 제관과 사제 가문의 계보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부제직 정도의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레위 사람도 역시 못 본 체 하고 지나쳤습니다. “불쌍한 사람, 다친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다니!" 우리 모두 언짢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세 생활의 우리와 비교하여 적용시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 약다는 사람,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사람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야외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버스 속에서 누가 들치기, 날치기, 소매치기 등의 억울한 경우를 당했을 때, 과연 선뜻 나서게 되는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관여했다가 봉변이나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못 본 체 외면하는 사람을, 우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러한 처사를 잘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상식화된 부조리의 현실을 보고도 묵인하는 우리, 그 우리들이 바로 강도를 당한 여행자를 보고도 외면하며 지나친 제관과 레위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는 사람,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 뜻을 알아듣지 못한 무의미한 신앙인입니다.

버스를 탔다가 또는 물건을 사고 팔면서 어떻게 하다가 거스름돈을 더 받고도 “야, 오늘

은 약간 재수가 좋구나!" 하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 그는 잔돈 몇 푼 때문에 양심에 먹칠을 하는 치사한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그냥 갖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현명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제 세번째로 유태인과는 원수, 종교적으로 볼 때에는 이교도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 당한 여행자를 보자, 곧장 달려가서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해 주고 여관에까지 데리고 가서, 자기 돈으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시간도 빼앗기면서까지 봉사를 하였습니다. 버림받고 외면당한 여행자의 참된 이웃은 사랑의 주인공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사랑은 종교, 이념, 종족을 초월하여 제한 없이 누구나를 사랑하고 봉사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나도 진정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지난 7월 5일에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목교서가 발표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 공경하고 올바른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이웃의 권리를 보장해 주며, 억울하게 빼앗긴 인권을 되찾아 줌이,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의 임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진리와 정의, 자유를 위해서 외쳐야 할, 그리고 가르쳐야 할 예언자적 사명을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년 기도의 실천으로 성직자, 수도자들의 철야 기도 끝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셨습니다. “성당, 기도드리는 성당 하나가 제 3자 그 누구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또는 기도드리기에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종교 박해입니다. 그리고 교우들은 누구나 분노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당 건물 하나가 침해되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분노스러운 것은, 바로 나의 이웃, 가난하고 권력 없는 내 이웃의 인권이 유린당하는 그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마땅한 권리가 침해당하는 그것이, 성당 하나가 침해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신앙인은 의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의 참된 성전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권리가 침해되고 유린당하는 그것은 하느님의 성전이 침해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이 침해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버림받고 고통 당하는 사람을 구해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오늘의 사회가, 오늘의 교회가 그리고 바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이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람, 그는 그의 눈길을 자기 양심에 비추어 하느님께로 돌리면서, 이기적인 자아에서 탈피하여 이웃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이웃은 곧 또 다른 나이며, 그 이웃은 곧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27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30,10~14 (그 법이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하려고만 하면 )

제2독서 골로 1,15~20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복 음 루가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좋은 이웃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흐뭇하고 자랑스런 일 입니다. 인생은 결코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함께 걸어가며 같이 걸어갑니다. 따라서 이웃이 따뜻할 때 그는 인생이라는 세상의 길을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이웃'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외롭고 힘든 자들,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자들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복음의 내용을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는 것은 이웃을 잘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재산만 털린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제와 레위가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겐 하느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본 체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본래는 강도를 만난 자의 원수였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유야 복잡하지만 유배시기에 사마리아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방인과 혼인을 하여 아브라함의 순수한 피를 오염시켰다 하여 유대인들이 그들을 무시하고 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무시했던 자를 살리기 위해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손수 간호를 하며 봉사도 했습니다. 피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데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 있다면 그분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사실 자기 죄로 인해서 버려진 존재요 '강도를 만난 자'이며 또한 병들고 죽어가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직접 '사마리아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당신의 철천지  원수였는데 그분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이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밉고 속상하다 해도 우리가 받은 은총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누고 우리 자신이 직접 좋은 이웃이 되어 줄 때 하느님은 더 정다운 이웃으로 우리 안에 머물게 되십니다.



'위너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그랬습니다. 젊었을 때 철인 경기에서 우승을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가 이제는 자신의 큰아들을 통해서 그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데 그런 과정에서 편애를 합니다. 작은 아들도 있지만 그 아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작은 아들이 바라보면서 아버지에게 어떤 앙심(?)을 품게 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러나 기대했던 우승은 하지 못합니다. 실망은 대단히 컸지만 그러나 다시 또 재도전을 하는데 이때 작은 아들이 남몰래 도전을 합니다. 아버지가 봤을 때 작은 아들은 '싹수가 노란' 아들이었습니다. 별볼일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그러한 수모를 오히려 강인한 훈련으로 대신합니다.



드디어 경기 날이었습니다. 많은 도전자가 있었고 수많은 관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마지막 모래판 달리기 경주에서 작은 아들이 일등으로 달리고 있었고 형이 이등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언덕만 올라가면 승리는 작은 아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아주 '따논 당상'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멋진 복수(?)를 하는 찰나였습니다.



작은 아들이 그때 슬쩍 아버지를 보고 또 봅니다. 아버지는 너무도 실망하여 다 틀렸다는 체념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작은 아들이 일부러 넘어집니다. 형이 앞서가게 살짝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넘어진 상태에서 아버지를 다시 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결국 작은 아들은 이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는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작은 아들은 먼 이웃이었지만 작은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가까운 이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멋진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사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이웃이 되어 주길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깁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모두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합시다.











28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사랑으로 가꾼 마음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15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구약 성서 신명기 6장5절과 레위기 19장18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시면서,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모두 착한 사마리아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예수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만 우리가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모상(模像)을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고, 가장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가장 가깝게 닮았다는 것입니까?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은 가장 하느님을 가깝게 닳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고 또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처음 하느님께서 남자를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동물들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후에 아담 앞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아담이 어떻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다 지었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아주 시큰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동물들을 지배할 수는 있지만, 동물들과 어울려 살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동물들이란 인간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와라는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이 하와와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더불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냥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지, 머리를 굴려서 모사와 계략을 꾸미고 배불리 먹고 마시고, 집어먹고 집어삼키고 싸우고 죽이고 지배하는 능력을 받았다 해서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짐승들도 이런 짓은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들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7-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압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의 비유 말씀을 보면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은 사람을 두고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는데, 첫번째 사람은 사제이고 두번째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동족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정말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고, 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제와 레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왜 강도 만난 동족을 보고도 피해 가 버렸습니까? 사제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성직자 혹은 신부쯤 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 사제도 저처럼 입으로는 사랑하라고 지껄이면서도 정작 행동으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랑이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입으로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제는 성전에서 설교를 할 때는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정작 죽어 가는 동족을 못 본 체하고 지나쳤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 사제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참으로 역설적입니다만, 그 사제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처지인데 피 흘리는 사람을 만짐으로써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사제의 핑계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사랑이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핑계로 사랑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깨끗한 손을 지닌 그 사제의 제사를 즐겨 받으시겠습니까? 문제는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손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슴입니다. 아무리 손이 깨끗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은 그 사제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제의 가슴 한구석에서는 강도 만나서 사경을 헤매는 동족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 소리를 묵살하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만 것이지요. 아마 그 사제가 성전에서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바친다해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성전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웃 안에 계시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최후 심판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유다인들 중에서 레위인들은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역시 사제와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 성전에서 봉사하고 성전에서 녹을 받아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레위 사람 역시 강도 만난 동족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도 역시 사제처럼 하느님을 핑계삼아 죽어 가는 동족을 외면했습니다. 부정한 손으로 성전에서 봉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그 레위인이 성경을 모를 리 없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생각, 괜한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이 발동하여 죽어 가는 동족을 도와 주라는 사랑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레위인이 아무리 깨끗한 손으로 성전에서 봉사한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사랑을 외면한 핑계들이 묘하게도 하느님을 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모두가 사랑을 외면했기에 하느님마저도 외면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유다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죽어가는 유다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자신의 돈을 들여 그를 치료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유다인들로부터 경멸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마리아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마리아 사람도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가슴속에는 하느님의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고 가꾸는 사람, 즉 예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느님을 닮게 되고 하느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온갖 군더더기와 쓰레기로 덮어 빛나지 못하도록 더럽히는 사람은 차츰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잃고 짐승으로 변하게 됩니다. “내가사제인데 부정을 탈수는 없지. 내가 레위인인데 성전에서 봉사할 손으로 저 피 흘리는 자를 만질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신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사장인데 체통이 있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 내가 전문가인데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내가 이 사회에서는 명사인데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돈깨나 있는 부자인데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나?” 이런 식으로 온갖 구실을 대면서 사랑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합니다.

  

지위와 명예, 재물과 권력, 안일과 향락이 인간을 인간답게 곧 하느님의 모상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빛을 발하면서 밖으로 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답게 되는 것입니다.

  지모(智謀)와 계략(計略)에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머리 회전이 빨라서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없어서 축재(蓄財)와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그가 따뜻한 가슴을 지니지 못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탐욕에 빠져서 안일과 향락을 누린다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도 인간이 아닙니다.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 그리고 향락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이 차지하고 많이 누리는 것이 자기를 성취시키고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과 재물로, 권세와 명예로, 전문 지식과 학식으로, 안일과 향락으로 자신을 가꾸고 꾸미려고 애를 씁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꾸미는 동안 사랑의 마음은 더욱더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게 되고 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자신을 잃게 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사회에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하는 인간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지위와 명예를 내세우고 돈과 재물로 자신을 치장하고, 전문 지식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차디찬 가슴의 짐승들만 우글거리면서, 서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 앞에 내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이며,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얼마나 사랑이신 하느님을 닳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 스스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죽어 가는 이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꾸고 키웁시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29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0 (다) 사랑은 사심 없는 관심이다.





 묵상 : 구원을 얻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하는 77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심 없는 관심으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는 것이다.



   과잉인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빚에 쪼들려 집을 나가고, 동생하고 사는 소년가장(중3)은 사람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세상. ‘혼자 사는 노파, 죽은 지 2주만에 시신발견', 이러한 신문기사들은 하나같이 철저히 외롭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들이다.

  시내버스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시선은 밝고 반가운 표정보다는 “야!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는 또 뭐 한다고 세상에 나왔냐?"하는 눈초리들이다. 그뿐이랴? 입학시험장이나 취직시험장에 가보면,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밀어내고 내가 들어간담?"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만,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내 행복의 방해꾼'이 되어버린다. 경쟁사회인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따뜻한 관심으로 서로를 바랄 볼 수 없게 내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길거리에 쌓여있는 싸구려상품 같은 이른바 ‘과잉인간'이다. 이렇게 사람을 귀하게 느끼기 힘든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이러한 각박함은 한층 더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진정한 관심이 아쉬운 실정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반대 되는 것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잘 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래도 나에게 어떤 관심이 있지만,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미워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벽 하나가 천리(千里)'라는 말이 실감난다. 벽 하나를 두고 바로 옆집에 살지만 누가 죽는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이사온 이웃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다 보면 잘못하다가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출퇴근길에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실려 가는 시내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익명성(匿名性)'에서 때로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를 알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까지 다 알고 있던 고향에서는 행동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자유스러웠던가? 그러나 ‘익명성에서 오는 해방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도록 괴로워도 누구하나 찾아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모두가 철저하게 외롭고, 뭔가에 쫏기며, 두려움에 떨고 있음이 사실이다.

  모두가 마음 깊은 데서부터 기쁨과 어려움, 걱정과 희망을 나눌 진정한 관심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다, 그 사랑은 곧 관심임을 알아야한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묻는 율법교사에게,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혹시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 때문이었을까?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이단자로 취급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에게 갖은 정성을 다 기울이며 관심을 쏟는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셨다. 지상 생애 동안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나병환자도 태생소경도 앉은뱅이도 중풍병자도 하혈하던 부인도 치유를 받았고, 율벌학자도 백인대장도 혁명당원도 어부도 강도도 세리도 창녀도 배척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겐 하나같이 큰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끝내는 당신을 십자가 위에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놓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성사로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마음 속 깊이 갈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주길, 밥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웃으로 다가갈 때, 모든 이는 내게 이웃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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