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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요한신부
작성일 2010년 7월 12일 (월)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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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7주간 평일미사 짧은 강론 ”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에 비길 수 있습니다(월요일, 마태13,31-35)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이신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요아킴은 하느님께 단식하며 기도드리기로 결심하고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 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습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안나와 아버지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습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아킴과 안나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며, 자녀들의 신앙과 예절교육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이 씨는 3-4미터의 나무로 자랍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힘으로 서서히 크게 자라나 새들도 쉬려고 그 나무를 찾아올 정도로 커집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시초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지만, 후에는 그렇게 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신앙인이지만 내가 노력하고 하느님께서 끌어 주심에 나를 온전히 맡기기만 한다면 나는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룩은 한 줌 정도의 적은 양으로도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부풀립니다. 미세하고 알아보기 힘든 시작이 마지막의 엄청나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교는 밀가루에 섞여져 있는 누룩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은근히 숨겨진, 그러나 생동감 있는 전파력을 가진 하느님의 힘인 것입니다. 이 힘은 점차로 퍼져 나가, 모든 것을 변화 시킵니다.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려 맛있고 향기 나는 빵을 만들듯이 세상에 뿌려지는 복음의 누룩들은 서서히 세상을 변화시켜 하느님 보시기에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굳게 믿고 있는 나는 누룩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성화 시키고,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요아킴과 안나가 성모님을 잘 키워 교회의 어머니가 되도록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가정, 내가 속한 단체, 직장 등을 하느님 보시기 좋은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나는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가 어떤 누룩이 되에 내 가족을, 내 직장을,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있었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누룩과 겨자씨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결심하고, 그 결심을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주님!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제가 말씀의 누룩이 되어 저 자신과 제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게 하시고, 제게 주신 놀라운 능력들을 개발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작은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 예수님(화요일, 마태13,36-43)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과 필요 없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구분합니다. 그런데 필요 없는 것들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움켜잡다 보면 결국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못 잡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 또한 필요 없는 것들 사이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나 자신을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 불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울며 통곡하며 후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기쁨 안에서 주님 앞에 서게 될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의미를 여쭈었습니다. 그 비유는 이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바로 예수님이시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며, 일꾼들은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좋은 씨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왜 가라지들이 세상에 나타날까요? 씨를 잘못 뿌리신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말씀해 주십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가운데에서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좋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있고, 하느님을 거슬러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죄의 길을 찾아 걷거나, 유혹자에 의해 죄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물론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추수 때입니다. 추수 때까지는 주님께서 기다려 주시지만, 추수 때에는 자신의 운명이 결정 나게 됩니다. 추수 때에는 명확하게 구별하여 알곡은 곳간으로, 쭉정이나 가라지는 불 속에 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귀가 있는 사람, 즉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루하루 주어지는 어려움들을 기쁘게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얻고, 작은 기쁨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나는 언젠가는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수확물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늘 생각하면서 매 순간을 살아가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 앞에서 어떤 열매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가라지가 아니라 밀이 될 수 있도록,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주님! 제가 성실한 생활로 주님을 찬미하게 하시며, 의로운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습니다(수요일, 마태13,44-46)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한 두 시간은 기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수고보다도 더 큰 기쁨을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도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투자의 대상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도 투자의 대상임을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물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치를 인정하고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기에 그 보물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결국 사기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남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그 보물의 소유권을 그 밭주인이 먼저 주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모르는 척 그 밭을 산다는 것도 양심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모든 것을 버린 이들에게 그 이상의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태양 앞의 반딧불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 놓았던 것입니다.



 신앙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신앙인으로 살려고 합니다. 매일 미사의 은총은 아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미사에 참례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참된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성당에 나와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은 땀의 의미를 알고, 봉사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작 힘든 일을 할 때나 필요할 때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또 이런 저런 말로 봉사자들을 어렵게 만듭니다. 보통 봉사하시는 분들은 정해져 있습니다. 또 말만 하는 사람들도 정해져 있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고 있느냐와 모르고 있느냐가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입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하십니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여기서 “진주”라는 단어는 고귀한 가치만이 아니라 흠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 나라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움직입니다. 모든 것을 처분하여 그것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진주 하나에 모든 것을 바꿔 버렸기 때문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주의 참된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선택을 했구나!”하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선택, 이 비유에서 말하는 진주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목자 잃은 양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참된 목자로 알아보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내일 일도 걱정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바로 예수님께서 값진 진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찾는 값진 진주, 즉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을 차지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차지할 것은 차지하는 현명한 신앙인, 슬기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값진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은 버려야 함을 명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알게 하소서.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며, 매일미사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며, 제 삶으로 제가 발견한 하느님 나라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목요일, 요한11,19-27)

 오늘은 성녀 마르타 축일입니다. 마리아와 라자로가 그녀의 가족이고,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주님은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신 듯 합니다. 성녀 마르타는 루가 10장 38-42절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굉장히 활동적인 여인입니다. 또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예수님께 연락했던 이가 바로 성녀 마르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성녀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마르타의 믿음입니다. 라자로를 살리는데 있어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큰 믿음을 보여 드립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라자로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는 라자로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을 때입니다. 마르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슬픔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와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서운했을 것입니다. 아니 오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원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가까운데 계시는데 오시지도 않고, 큰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오빠를 죽게 내 버려두셨으니 얼마나 슬픔과 원망이 크겠습니까?



 하지만 마르타는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죽은 오빠를 예수님께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겠노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타는 그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난 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를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마르타가 이것을 믿는다면 라자로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는 늘 믿음이 따릅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예수님께 청하는 모든 이들이, 그들의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르타는 즉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믿는다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고”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라자로는 살아나게 됩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나 또한 믿음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 또한 또 한명의 마르타가 되어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믿음을 통해서 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의 은총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녀 마르타 축일을 맞이하여 마르타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마르타의 믿음을 본받게 하시어 저의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제 주변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보잘 것 없는 제가 주님의 은총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소서. 아멘.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예수님(금요일, 마태오13,54-58)

내가 잘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은 인정하면서도 말하는 친구의 권위는 존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를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할 것입니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는 교만과 착각”이 값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나자렛에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나자렛을 찾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하느님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치시는 권위, 지혜와 기적의 힘 등에 대해서는 모두 놀랐지만,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들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동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구세주는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자기가 아는 만큼 보입니다. 자신의 그릇 만큼 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 틀 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은 산 전체를 볼 수 있지만,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주변만을 볼 뿐입니다.



 또한 자존감이 떨어지면 상대방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깎아 내리게 됩니다. 한 형제가 영세를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또 봉사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의 열심한 모습을 보면서 험담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저 사람,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더 나아가 “저 사람이 이 일을 한다면 저는 이 일에서 빠지겠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모습을 인정해 주면 되는데, 이런 저런 자신의 생각으로 그 사람을 깎아 내리려고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니 이번에는 무리를 지어서 말을 만들어 갔습니다.



 어느날 그 형제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몫이고, 그들이 뭐라고 한다 해서 제가 제 신앙생활을 꺾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왜 제가 제 기쁨을 버리겠습니까? 물론 마음이 안 상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앙생활은 그것을 이겨내고도 남을만한 기쁨과 힘을 줍니다.”



내가 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존중할 때,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13,46).



 그리고 오늘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려 하지 말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굴러온 복을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나자렛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옹졸하셔서 적게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들이 옹졸해서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청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제가 나자렛 사람들처럼 옹졸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하소서. 제가 넓은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게 하시고, 형제자매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알아 뵐 수 있도록 은총 베풀어 주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의 순교(토요일, 마태 14,1-12)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큰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시며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메시지를 삶으로 실천하신 분이셨고, 엘리야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질책하였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헤로데에게 강력하게 말하였으니, 헤로데 뿐만 아니라 헤로디아도 세례자 요한은 못 죽여서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죄를 덮어야 했고, 자신들의 죄를 들추는 요한의 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멋진 춤을 추어 그를 기쁘게 해 주자 그에게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헤로데에게 아주 무서운 청을 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죄를 떠들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없애려고 자신의 딸을 이용했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바라보면서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 봅시다.

 먼저 헤로데를 봅시다.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달라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요한이 예언자임을 알고 있었지만 요한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엇이든 청하는대로 주겠다고 맹세를 했기에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그것을 핑계로 요한을 없애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헤로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헤로데가 욕망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타협하는 사람이었고, 교활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헤로데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헤로데 안에서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누가 나에게 충고를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 죄를 감추기 위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희망사항이고, 현실은 헤로디아와 살로메를 철저하게 이용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헤로데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모습을 바라 봅시다. 자신의 허영을 체우기 위해서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인 헤로데와 결혼한 여인. 자신의 죄를 꼬집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딸까지 이용하는 여인. 참으로 무섭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모습은 내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형제자매들보다는 세상적으로,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모습,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신앙까지도 접어두고 이익을 쫒아 살아가는 모습, 또 필요하다면 내 옆에 있는 이들을 이용하여 내 편리와 욕구를 채우려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바로 헤로디아의 모습이고, 그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 편에 서 계신 분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모습을 봅니다. 과연 나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제가 저를 돌아보면 제 모습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아니라 헤로데나 헤로디아의 모습이고, 살로메의 모습입니다. 방관자의 모습이고, 두려워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 제가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를 위해 몸 바치게 하소서. 당당하게 신앙생활 하며 옳은 일을 하는 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이익을 위해 다른 이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제 것을 내 놓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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