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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7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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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18주일

 22. 김창석 신부(다)/37

        23. 김정진 신부(다)/38                24. 함세웅 신부(다)/39

        25. 이기정 신부(다)/41                26. 함세웅 신부(다)/44

        27. 강길웅 신부(다)/45                28. 강영구 신부(다)/47

        29. 수탉과 보석(다)/50                30. 내 재산은(다)/51







22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장독대 

                                                  김창석 신부



장독대는 우리나라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소이다. 농촌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식 아파트에도 꼭 있는 것이 장독대이다. 이 장독대에 대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1백년도 넘는 옛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나온 프랑스 선교 신부 한 분이 벽촌 시골 교회를 찾아갔다. 그는 저녁 식사 대접을 융숭하게 받고 나서 변소를 찾아 나섰다. 당시 우리나라 시골 변소에 대한 예비 지식이 없는 벽안의 외국인에게, 뒷간이 뒷간처럼 보였을 리 없었다.

  그 프랑스 신부는 뒤뜰로 갔다. 거기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크고 작은 옹기 그릇들이 가득했다. 독도 있고 항아리도 있고 뚝배기도 있고 옹배기도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그것이 된장 냄새인 줄 알 리가 없었다. 장독대를 변소로 오인한 그 프랑스 신부는 감탄했다. 한국 사람들은 식구마다 변기 크기가 다르구나, 각자 알맞게 따로 따로 쓸 만큼 정결한 사람들이구나 생각하고, 그는 그 중에 자기에게 맞는 그릇을 골라 일을 마쳤다.

  

다음날 아침 그것을 발견한 주인집 아주머니가 크게 당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장독대의 그릇들처럼 우리의 마음도 각자 크기가 다르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크기만큼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크면 많이 받고 작으면 조금 밖에 못 받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의 그릇을 크게 할 수 있을까? 우리 마음을 비우면 된다. 우리 마음의 그릇이 이미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올 틈이 없다. 물욕, 정욕, 이기심, 증오, 질투심 등을 우리 마음으로부터 몰아내어야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좁고 편협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넓어질 수 없다.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인 사람의 마음이 넓을 리 없다.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까지 미워하지는 말아야 하는데, 죄보다도 사람을 더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이 넓을 수 없다.남을 이해하고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넓을 수 없다.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넓을 수 없다. 육체도 먹기만 하면 뚱뚱해지고 병이 생긴다. 같은 이치로 우리 마음도 비어 있어야 병도 없고 평안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물욕을 버리지 못하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죽을 때 당황하게 된다.

  

스티븐 빈센트 베네는 이런 말을 했다. “생명은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 의식이 없을 때 없어진다.” 사람의 마음이 비어 있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을 수 있고 또한 죽음을 넘어서 영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사람은 마음을 비우는 자세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살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해서 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나누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23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

                                                  김정진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이 세상 재물을 알맞게 잘 쓰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온갖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어떤 부자가 많은 재물을 어디에다 쌓을 까 걱정하면서, 이제 몇 해 동안은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면서,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미련한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네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맺으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을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나도 이 세상일에만 골몰하고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가장으로서는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고 가족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불편을 주지 않도록 열심히 일할 정신과 결심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겠습니까. 오히려 칭찬할 점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께 인색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탄생하시고 또 가난하게 한평생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가난한 자의 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예수님이 미사 때마다 천상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도 우리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당신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또한 독생자로 하여금 죽게까지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것, 우리의 생명마저도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잘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밤 네 영혼이 네게서 떠나가리라.>(루가 12,20) 이렇게 되면 그 많은 재산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느 곳에 구두쇠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많이 모은 돈을 금화로 바꾸어서는 항아리에 담아 방바닥 밑을 파고 감추어 두고는 매일 밤 덧문을 꼭꼭 잠근 후에 슬그머니 꺼내 보고는 싱글벙글하면서 세어 보곤 하였습니다.



그 노인장도 죽음이 임박하였음에는 어쩔 수가 없었음인지 생각다 못해 떡장수네 집에서 말랑말랑한 떡을 잔뜩 사와서는 덧문을 꼭꼭 잠가 버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덧문이 닫힌 채로 있었기에 이웃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노인은 금화를 한 푼씩 한 푼씩 말랑말랑한 그 많은 떡에 모조리 묻어 놓고는 그것을 그대로 꿀떡 삼켜 버리려 했던지, 일곱 개째의 떡이 그 금화와 함께 목구멍에 걸려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욕심쟁이 노인은 죽은 후에도 금화를 이 세상에 남겨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까와서 뱃속에 넣어 가지고 저 세상에까지 가지고 가려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 - 육신 일에만 골몰하고 하느님의 공경을 소홀히 하는 자나, 자기 재산이라고 해서 자신을 위해서만 몽땅 써 버리는 자는 앞서 말한 구두쇠 노인장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4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우상을 섬기는 종

                                                       함세웅 신부



  오늘을 사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 현상 속의 교회는 육적 인간으로서의 우리 모습이 하느님과의 만남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의 모습은 하느님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를 원한다기 보다는 단절로 치닫는 느낌이 있습니다.

  더욱더 우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단절로 인정하기보다는 합일로 주장함이며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을 사람에게 편리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사실에서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변화될 수 없으나 지혜로운 듯하면서도 우매한 인간들은 자신을 사탄과의 야합에 내팽개쳐 버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말해온 이들은 한국인의 사고의 불투명성이 언어로부터 왔다고 말하는가 하면, 복종과 굴종 내지는 무조건 참으면 된다는 인(仁)의 사상 지배에 의해 군주의 지배 형태를 벗어나면 불안해하는 민족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민주니 자유, 정의, 평화란 단어는 우리 민족에겐 생소한 단어임이 사실이라고 볼 때에 혹자는 한국의 역사는 쟁취한 역사라기보다는 주어진 역사라고까지 혹평하면서 8․15해방의 의미를 간파한 바 있습니다. 더구나 언어조차도 너무도 짧은 민정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다스리는 자로서의 말들이 범람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봉사자며 국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의 언어의 의미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 민족 사상의 굴종 의식이 싹텃는지는 모르나 이는 육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점철하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연연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우리는 자유의 고귀함을 느낄 때까지 당해야 한다” 그리고 또 “민주주의는 정치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각인한 것이며 정치는 국민을 정신적 타락으로부터 막는 도덕성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나치스에 저항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 만연된 폭력은 중간 계층 즉 그 시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책임을 진 종교인, 문학인, 또는 그 밖에 지식인들이 태만했기 때문이며, 폭력이 행사됨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뼈저리게 당해 봐야만 무엇이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써 고통을 통한 기쁨의 삶인 예수를 표현합니다. 즉 저항의 단절과 미온적 저항은 공동체 의식을 저하시키고 공동체 자체를 침묵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교회 자체가 도전받는 시대로 부상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며, 영신적 아버지들의 고통은 교회 자체가 당하는 고난이므로 초기 교회가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하느님 대전에 박해를 감수하며 공동체 전체가 목숨을 내맡긴 순교자들의 참모습을 본받도록 해야겠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무심한 시간과 발걸음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썩은 죽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의 허무한 발걸음은 많은 억울한 인간들의 고난을 딛고 선 무서운 발걸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다양성 속에 일치를 말하면서 각자 나름의 길을 주장하지만, 반드시 각자 자신의 포기가 선행되어야 함에도 쉽게 자기 포기를 안하는 인간 심성은 다양성의 그늘 뒤에 숨은 자기 합리화란 그늘에 있음을 절실히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길에 배치되며 이를 외치는 이들은 위장된 이론으로 하느님을 자신에게 편리한 하느님으로 꾸며 놓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각자이나 성체는 하나이듯이 하나로 모인 공동체 속의 우리의 다양성은 교회를 이룹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교회 또는 사회에서 지식인일지 모르나 알아도 모른 척하는 관제 대중 집단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 용서를 청하고 새 사람이 됩시다.

  “주인의 뜻을 모른 종은 매맞을 짓을 했어도 덜 맞을 것이나,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면 많은 매를 면치 못하리라”(루가 19,47) -80.8.10























25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무식하면 지옥, 유식하면 천당

                                                       이기정 신부



참 실감나는 예화입니다. 예수님은 창작력과 화술이 뛰어나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젊은 날에,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실감과 감명이 새삼 절실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홍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는 결론으로, 세상살이의 결과를 간단히, 드라마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돈을 모으느라고 악착같이 살 때에는 병도 없고, 근심도 없고, 지치지도 않지만, 다 모으고 나면 병도 생기고, 근심도 많아지고, 인생의 의문도 커진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징후를 보는 듯합니다.



천당 들어가기 위한 어학시험



예수님은 현세의 인생과 후세의 생활을, 재산을 소재로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소재를 어학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75년에 저는 갑자기 이탈리아로 공부하러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탈리아 말을 전혀 모르는 저는 생지옥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교리에서 말하는 지옥은, 장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신학적 표현을 실감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놀랐습니다.

외국 영화 배우들은 죄다 여기 있구나! 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생겼습니다. 특히 여자들이 어쩌면 그렇게 매력 있는 미인들이 많은지, 이탈리아에 살면서 이탈리아 말을 잘하는 남자들은 모두 천당 같은 생활이고, 저처럼 말을 못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생지옥같은 생활이라고 절감했습니다.



 만일 내가 이탈리아로 갈 것을 떠나기 1년 전에만 미리 알았어도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속을 태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심경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심판하시기에 힘드실 텐데 어떻게 도와 드릴까 생각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저는 천당문을 지키는 베드로 사도가 휴가 가시고, 예수님마저 휴가 가시면서 저에게 대신 일을 맡기시면 능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심판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심판 전에 간단한 것만 조사하고 이리 가시오, 저리 가시오 하면 됩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공상을 하면서, 혼자 미소지은 적도 있습니다. 출신국 성명 생년월일 정도는 기본이니까! 그렇다 치고 “어학 실력은 어떠하신지요?"라고 묻는 것이 저의 질문의 요점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홍길동은 “저는 한국인으로서 우리말, 현대 지성인이면 알아야 할 영어, 과거를 알기 위해 일어, 미래 교역을 위해 중국어, 불란서에서 공부했으니 불어, 그리고 학교 때 제 부전공이 동시통역이었으므로 독어, 스페인어 합해서 7개 국어는 자신 있습니다"고 대답하겠지요.



그러면 저는 무감동한 표정으로 “그 정도 말밖에 몰라요?" 하고 되묻습니다. “아니, 나말고 또 말에 자신 있으면 나오라고 해요!" 하며 우쭐대겠지요. 그러나 저는 싱겁다는 듯이 “그 말들은 세상 사는 동안만 써먹고 버릴 말이고, 죽은 다음에 지금 와서 쓸 말은 어느 정도 배웠냐 이겁니다"라고 합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 세상 말 배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무슨 말을 또 배워요? 아니 정말 천당 말이 뭐 있기나 합니까?" 하며 따질 겁니다.



그러면 저는 “그럼요! 하느님이 직접 인간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말씀을 아예 인간으로 탄생시키셨는데도 그걸 몰랐다구요? 원 쯧쯧‥‥ 예수님 있잖아요. 예수님!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 못 들었나요?"라고 야단친 후 “하느님은 당신이 어학 실력을 우쭐대던 날 '이 어리석은 자야, 눈 깜짝할 순간을 살기 위해 말공부에 전력을 다 쏟고, 영원히 살기 위한 말공부는 생각지도 않으니 너 조금 후에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면 어찌 하겠느냐?'고 하셨지요"라고 말해주고 나서, 저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당신은 저쪽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겁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영영 다시 못나올 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문 앞에 서면, 신나게 달려들어갑니다. 그 문 앞에 서서 망설이고 걱정하면서 들여다보다가, 너무나 황홀해서 자기도 모르게 뛰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세상의 예쁜 사람 모두를 모아도 못 당할 예쁜 미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순간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들은 너무나 예쁜 여성들을 보고, 여성들 은 너무나 근사한 남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옥생활이 시작됩니다.



하늘 나라 생활에서 의사 전달이 전혀 통하지 않아 미치기 시작합니다. 웃어도 왜 웃는지 몰라 신경질이 나겠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못 알아들어 환장하겠고, 우루루 모여 가도 왜 가는지 몰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렇게 영원히 살아야 하니, 얼마나 속이 터지겠습니까.

이제 일단 끝냈던 이탈리아 미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저는 열심히 말을 배우게 되었고, 그들과 의사소통이 잘되기 시작하여 생활은 점점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과 말해 보니, 결국 겉보기와는 다른 부족한 인간임을 알게 되면서, 이탈리아도 천당이 아니고, 세상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언어 중의 언어이신 예수



다시 천당 말을 하는 세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저에게 재판을 받은 그 사람은 한탄을 합니다. “세상에서 기억력이 뛰어나 천재라는 말까지 들은 내 뇌를 그냥 두고 왔으니, 무엇으로 더 공부하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고!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 이 곳에는 종이도 연필도 없으니, 어찌 기록인들 하겠는가! 기록 자체가 필요 없는 하늘 나라이니, 애고애고‥‥ 환장해 죽을 지경이로고!"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 변한다는 것이 믿는 이들에게는 무한한 세계를 준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육신의 모든 것, 우리가 지닌 모든 것,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이롭게, 혹은 해롭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변하고 있고, 또한 변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모든 것을 소재로 세속 동네의 사람들은 배우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학위를 주고 상을 주며 살고 있는데, 이런 것은 모두 세상이라는 구역에서만, 물질이라는 조건을 위해서만 쓰는 것들입니다.



즉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만 통하는 지식에 정열을 기울이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교회 동네의 사람들은 배우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하면서도 세속 동네의 사람들이 이해 못할 활동도 합니다.

세상이 주는 상을 안 받으려 한다든가, 일하고도 대가를 외면한다든가 하는 행동들입니다. 봉사하고, 희생하고, 용서하고, 도와주고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그런 태도입니다. 그러면서 천당 말(성서의 예수님)을 열심히 배웁니다. 교회 동네 사람들은 세상을 살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배우는 것을 배우면서, 동시에 천당 말을 배우며 사는 사람들로 두 세계를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해하는 두뇌를 갖고 있는가 하면, 믿는다는 고귀한 결단도 갖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은 이상의 두 면을 완벽하게 겸비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시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언어 중의 언어이시며, 모든 인간들이 진화되어 가야 할 목표에 계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늘 나라에서 무식하면 지옥이고, 유식하면 천당입니다. 변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유식을 배워 자신을 변하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영원히 유식하게 되실 교우 여러분, 미리 앞당겨 축하드립니다. 























26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기도하는 생활

                                                               함세웅 신부



“이제 많이 벌었으니 큰집을 짓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나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바로 십자가의 역설적 진리(루가 9,23-25)를 예화를 통해 설명한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 예화를 갑작스런 인간의 죽음이나 또는 그러한 위협, 공포를 주는 의미로만 단순히 알아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본 주제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내가 자리잡은 현재와 현실 속에서 순간 순간 이루어지는 또는 나타나는 뚜렷한 하느님의 목소리와 심판을 감지할 수 있는 눈과 귀와 머리를 지녀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두들 바쁩니다. 유치원생, 초등 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재수생, 대학생, 직장인, 어린이, 엄마, 할머니, 회장, 전무, 상무, 직원, 근로자, 공무원, 그리고 병들어 누워있는 환자도 모두들 바쁩니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 바쁜 생활권 속에서 우리는 그래도 매일 꼭 해야 하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다, 잠을 잔다, 학교, 과외, 출퇴근, 모임 등등. 그런데 여기에서 꼭 뒤로 밀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 신앙 생활입니다. 그것은 없어도 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심판은 순간 순간 내려집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너의 내일이 꼭 보장되었는가?” 기도를 생활화하기 위하여 나는 아침에 깨자마자 다음과 같은 지향을 갖고 첫 성호를 긋습니다.

  

“주여,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당신의 뜻에 부합하게 하시며, 또 이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서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끝 성호를 긋는다.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제 잘못과 허물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 품에 잠들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그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그는 때로는 국지전(局地戰)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언제나 전쟁에서 꼭 이기는 결정적 승리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그는 자신의 시간과 건강과 재산과 미래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며 사는 신앙인입니다.









27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헛되지 않은 세상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전도 1,2; 2,21~23 (이 세상 노고에서 인간이 무슨 이익을 얻으리오?) 

제2독서 골로 3,1~5.9~11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위엣 것을 찾으라) 

복 음 루가 12,13~21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오늘 1독서에서 전도서의 저자가 크게 한탄한 말을 지난번에 붕괴된 삼풍백화점의 주인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자는 또 말합니다. “온갖 재간을 다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성실치 못한 자세로 돈을 벌려고 한 그 자세부터 모순이었으며 설계부터 시작해서 시공 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건실하고 정직한 게 없었습니다. 모래도 철근도 다 엉터리요 가짜였으며 그저 '돈', '돈', 돈만이 전부였습니다. 국가 공무원도 다 거짓이었습니다. 돈 앞에 사람이 무력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어떻게 되느냐?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백화점 주인의 재산이 약 3천억원인데 피해 보상에 드는 비용이 약 3천억 원이랍니다. 그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었지만 스스로 다 털리게 됩니다. 그것도 악명을 세상에 떨치며. 성서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전도서의 저자가 “헛되다"고 한탄한 것은 인생을 무시하고 세상을 경멸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을 잊을 때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거기 계셔야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테면 헛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아무리 악해도 살 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세상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악한 욕심과 하느님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지만 하느님을 거기 모시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또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일면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돈과 재물 앞에는 신앙도 가족도 없으며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많이 갖고 많은 것을 누리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세상을 뒤집어서 살려고 합니다. 지난 삼풍백화점 붕괴시에 자원 봉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간도 금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직장도 가정도 희생을 했습니다. 오직 단 한 사람의 생명이 라도 건져 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에너지도 많이 소비됐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아깝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꾸 차지하려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잃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헛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베풀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베푼 그것을 몇 배로 얻습니다. 사실, 남에게 베푼 작은 사랑의 기운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베품은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말하기를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미에 가서는 “그리스도만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땀흘려서 벌어야 합니다. 재물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느님을 재물 밑에 모셔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선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하느님 위로 올라가면 재물은 악이 됩니다. 말하기조차 송구스런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재물 밑에 모십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선'이라도 그것에서 하느님을 외면하면 그것은 헛된 것이 됩니다.



진정한 재물은 무엇입니까? 친절한 말 한마디가 세상의 재물이 됩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이 세상의 꽃이 되며 의를 위해 수고하고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영원한 불빛이 됩니다. 그리고 돈과 재물 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고 베풀 때 그때 진정한 나의 재물이 됩니다. 영원히 잃지 않는 재물이 됩니다.



재물을 땅에 쌓지 맙시다. 그것은 좀먹고 녹슬어 못쓰게 되며 또 도둑이 항상 노리고 있어서 불안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읍시다. 그 재물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이 바로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하늘에 쌓을 때 세상을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지혜가 됩니다.













28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돈에 눈먼 사람들

                                                            강영구 신부



오늘은 8월 들어서 처음 맞는 연중 제18 주일입니다. 날씨가 정말 덥고 불쾌 지수도 참으로 높습니다. 이런 여름날을 시원하게 지내는 비결은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면 이 여름 날씨도 그렇게 덥지는 않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이번 여름을 보내도록 합시다.

  

그리스 신화에는 미다스(마이다스) 왕의 전설이 나옵니다. 프리기아 지방에 미다스라는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디오니소스라는 신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실레노스라는 스승이자 양부가 있었습니다. 실레노스는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었습니다. 하루는 실레노스가 술에 만취되어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농부들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들은 술 취한 실레노스를 미다스 왕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미다스 왕은 실레노스를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주연을 베풀어 실레노스를 환대했습니다. 열하루가 되는 날 미다스는 실레노스를 그의 제자이자 양아들인 디오니소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다 들어 주겠노라 했습니다. 미다스는 그렇다면 자신이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이 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당신은 틀림없이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미다스는 황금의 손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청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미다스는 굉장한 능력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참나무 가지를 꺾으니, 바로 그것이 손안에서 황금의 가지로 변했습니다. 미다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돌을 주워 들었습니다. 그 돌덩이는 즉시 황금 덩이로 변했습니다.

다음에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땄습니다. 그것도 즉시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미다스의 기쁨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나 황금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전대 미문의 재앙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하인들에게 훌륭한 음식을 장만하도록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빵을 먹기 위해서 빵을 집어 들었을 때, 그 빵은 금방 황금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음식을 집어 들었을 때도 그것은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금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려고 잔을 들자 포도주는 출렁이는 황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다스 왕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이면서도, 그 풍성한 음식상 앞에서 굶어 죽을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전대 미문의 재앙 앞에서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황금 덩이 속에 묻혀서 굶어 죽게 된 것입니다. 미다스는 얼마 전까지 그토록 원했던 선물을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굶어 죽는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미다스는 황금으로 빛나는 두 팔을 들고,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디오니소스에게 애원하였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현대판 미다스 왕들이 매일같이 신문과 텔레비전의 뉴스 시간을 장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보사 땅 사기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검찰의 수사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다 합시다. 660억 원이라는 돈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난 돈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돈인지 한번 계산해 보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봉급 생활자의 경우 1년이면 얼마를 받을 수 있습니까? 1년이면 2천4백만 원입니다. 10년이면 2억 4천만 원,100년이면 24억 원, 천 년이면 240억 원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봉급 생활자가 족히 2천5백 년을 벌어야 660억 원의 돈이 됩니다. 200만 원을 받는 봉급 생활자가 신라 시대 때부터 죽지 않고 줄곧 벌어야 겨우 쥘 수 있는 돈이 660억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돈으로 사기꾼들은 한 2천5백 년 동안은 아무 염려 없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고, 사기꾼들에게 놀아나서 엄청난 돈을 날린 제일 생명도 엄청난 횡재를 하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돈더미에 깔려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황금의 팔을 가지고 굶어 죽게된 미다스 왕의 꼴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탐욕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탐욕은 덫이니까요 탐욕은 사람을 눈멀게 하는 마약과 같은 것이니까요 거미줄에 걸린 곤충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거미줄에 더욱 휘감기게 됩니다. 나중에는 꼼짝도 못하고 거미에게 먹히게 됩니다. 탐욕의 덫에 걸린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습니다. 탐욕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늪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탐욕이 제공하는 향락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만, 많은 소출을 얻게 된 부자는 혼자서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탐욕은 이렇게 쾌락과 향락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죽음을 가져다 줍니다. 썩기 때문이지요.

  

탐욕이 제공하는 향락을 맛본 사람은 눈이 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내일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는 자신이 내일 죽게 될 운명인 것도 알지 못한 채, 실컷 쉬고 먹고 마실 생각만 합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지 못하는 눈먼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한심하고 불쌍한 노릇이지요. 그가 창고에 쌓아 둔 재산과 곡식은 누구의 차지가 됩니까?

  

탐욕에 빠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보지 못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임을 망각하고, 돈과 재물로 감싸여 있는 자신이 본래의 자기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급 승용차 타는 자기, 값비싼 외국 상표 붙은 옷만 입는 자기, 외제품과 사치스러운 물건을 쓰는 자기,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자기, 이런 모습이 자기본래의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중에 돈과 재물만 있다면 아무런 걱정도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기는 허섭스레기로 뒤덮여 있으니, 자기가 누구인지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눈먼 자는 이웃과 형제도 보지 못하고, 하느님도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눌 줄도 모르고 베풀 줄도 모릅니다. 다만 탐욕이 제공하는 향락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인색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복음의 말미에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에 있는 “사해”라는 호수를 아시지요. 글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 짜디짠 소금물로 가득한 호수입니다. 그 호수가 그렇게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인 이유를 아십니까?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강을 타고 흘러 온 물이 사해로 들어갑니다. 사해로 들어간 물은 더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에 고입니다. 강물이 흘러 들어가기만 했지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호수는 죽음의 바다사해입니다.

  

탐욕과 인색이 죽음을 가져오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차지할 줄만 알았지 나누거나 베풀 줄을 모르는 탐욕과 인색은 죽음을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썩게 마련입니다. 탐욕과 인색에 빠진 사람은 향락을 즐기면서도 서서히 죽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되고 이웃과 형제들을 실망과 좌절에 몰아넣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많이 차지하고 많이 누리고 많이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고 함께 누리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자는 많이 차지하고 가진 사람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는 사람입니다.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지니고 있어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러나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언제나 풍요롭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나눌 수 있을 만큼 여유롭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부자는 나누고 베푸는 사람입니다.

  

샘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아납니다. 그러나 샘물은 퍼내지 않으면 곧 썩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풍요로움으로 채워 주시지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썩는 샘물처럼 그렇게 죽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라고 한탄하는 전도서 저자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정보사 땅 사기 사건으로 쇠고랑을 찬 친구들이 감방에서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하면서 한탄하고 있을 것입니다. 탐욕과 인색에 빠져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이웃과 형제를 외면하고, 혼자 독차지하려 하면, 모든 것은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받아들이기만 했지 내보낼 줄 모르는 사해가 죽음의 바다로 변하듯 혼자 독차지하면, 모든 것이 썩고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돈과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입니다. 탐욕과 인색에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 그래서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베풀고 나눔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부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29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수탉과 보석



  어느 따뜻한 봄날에 수탉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아마 암탉과 병아리들을 위해 먹이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에 눈앞에 반짝거리는 유리조각 같은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그러나 수탉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석이 값지다는 것은 알지만 나에게는 쌀이나 보리 한 톨보다도 가치가 없는 것이야.”

  

이 이야기는 모두가 가치기준이 다르며 필요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수탉과 보석의 이야기처럼 각자의 가치기준이 다르겠지만 나환자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보석의 가치보다는 쌀이나 보리의 생산을 위한 경제적 지원과 자녀들의 교육비 지원이며 나아가서는 정신적 사랑을 베풀어주길 그들은 바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에게 특히 보잘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을 때, 비로소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30      연중 제18주일   루가 12,13-21 (다) 내 재산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묵상 : 돈의 가치를 모르고 낭비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부지다. 그런가 하면 ‘돈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인생의 깊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내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안에 남의 몫이 있음을 깨닫자.



    고해소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일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나면, 보속을 명하기 전에 간단한 영적충고와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경험으로는 친지나 형제들과 재산 문제로 마음 상하고 원수가 되다시피 해서 증오와 원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설득력 있는 훈시를 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시비를 가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재산 문제로 속을 끓이고 증오하다보면, ‘돈 잃고, 사람 잃고, 건강까지 잃는’ 수가 허다하다.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였다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형제간의 재산 시비에 대한 판결을 요청받으시고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하시며 이를 거절하신다.



   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



  돈 귀한 줄 모르고 낭비를 일삼는 사람을 보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총각들은 부양가족이 없고, 삶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기에 돈을 모으지 못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만큼 산 후에도 돈을 위해 체면도, 인간다운 도리도, 의리도 내팽개치는 사람이 많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적게 남은 연륜에 있으면서도 오로지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인생에 있어 참으로 값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돈 귀한 줄 모르거나',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은 덜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돈이 삶을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깨달을 때,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며,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이,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다고 자만한다. 그 순간에 하느님은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리라"하신다. 죽음 앞에서 돈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돈 1억원을 갖다 바치면 생명을 1년 더 연장시켜주는 곳'이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험악해질까? 이렇게 볼 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은 참으로 고마운 손님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 복음의 부자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접한다. 성전 건립이나 교회사업, 남을 돕는 공익을 위한 일에는 최소한의 체면치레로 일관하며, 형제와 친척간에도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을 자주 본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그 사람, 그 돈 아까워서 어떻게 죽었을고!"하며 비웃는다. 돈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 하느님께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 안에는 '남의 몫'이 있음을 알아야


 철저한 반공교육 덕분에 우리는 공산주의가 왜 나쁜지, 어떤 점이 나쁜지를 모르면서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하느님과 영적세계를 부정하고 물질이 전부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지, 재산 분배에 관한 한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하는 면이 많다. 일찍이 성 암브로시오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도울 의무를 말하면서, “네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함께 쓰도록 주어진 것을 네가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재화는 모든 사람의 것이지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돕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세계 사목헌장'에서도, “누구나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모든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 여겨야 한다" (69항)고 하였다.

즉 ‘사유재산의 사회적 성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합법적으로 취득한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타인을 위한 몫'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재화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이가 먹고, 쓰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실업과 불황으로 갈수록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증폭되는 느낌이다. 이런 때일수록 가진 자의 올바른 의식이 요구된다. 내가 가진 것 안에는 ’남의 몫'이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능력과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만을 위해 쌓아 놓지 말고, 나눔으로 죽음 앞에서도 힘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천상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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