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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1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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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7주일

        23. 조순창 신부(다)/33                24. 김정원 신부(다)/34

        25. 함세웅 신부(다)/36                26. 함세웅 신부(다)/37

        27. 함세웅 신부(다)/39                28. 강길웅 신부(다)/41

        29. 강영구 신부(다)/43                30. 이기정 신부(다)/47

        31. 안상인 신부(다)/49                32. 박병해 신부(다)/53

        33. 박재만 신부(다)/54                34. 전달수 신부(다)/56

        35. 전달수 신부(다)/58                36. 전주원 신부(다)/60

        37. 김신호 신부(다)/60                38. 이 시대에 필요한(다)/62

        39. 기도하는 습관이(다)/63      





23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믿고 회개하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조순창 신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성조 아브라함이 어느 날 지나가는 웬 나그네 세 사람을 맞아들여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을 배웅하느라고 ‘소돔’이라는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때에 야훼 하느님께서 아브리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너무나도 엄청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고장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노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어른으로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죄인을 벌하시려는 뜻을 이해하며, 또 막을 수도 없습니다만. 죄인 때문에 저 도시 안의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반문하면서,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보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용서해 주시기로 하자, 체면을 무릅쓰고 45명만 있다면, 또 40명 밖에 없더라도, 또 30명밖에 안 되더라도, 또 줄여서 20명 밖에 안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죄 없는 사람이 열 사람밖에 안 되더라도, “그 열 사람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자비로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돔과 고모라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를 나그네로 보내시어서, 그곳에 사는 착한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재앙에서 구해 내시고,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퍼부어 잿더미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열 사람의 의로운 생활과 한 의인의 기도로 한 도시가 멸망하는 것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는 크다고 하는 교훈으로서, ‘구세주 예수님, 한 의인의 희생적인 장한 죽음으로 온 인류는 구원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교훈과 같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써 모든 잘못을 용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믿음의 가족입니다. 믿는 이의 표시는 기도하는 것, 참회하는 것,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으로써 구원받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요, 믿지 않으면 죄인으로 판단받을 것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며, 사랑하고 봉사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된다면,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탓이요, 급할 때 한 번만 기도하고 만 탓이요, ‘나 스스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모두 운명에 맡겨 버리는 탓이요, 쓸데없거나 해로운 것을 원하는 탓일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이 진심으로 대화하고, 서로 믿어 주며, 조그마한 잘못도 진정 용서를 빌고 참회하며, 서로와 공익을 위해서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우리 뜻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4장의 ‘세상 종말의 예고’ 같이,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가짜가 많고, 부정의 뿌리가 깊고, 난리와 전쟁의 위기와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며, 의인이 수난을 겪으며, 질서가 문란한 속에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보기 어려운 세태입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고 의롭게 살아가는 열 사람의 의인과, 우리 모두의 불행을 뼈 아프게 생각하며, 굳은 신덕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신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어, 모두 참회하여 새사람되게 하여 주시고, 굳은 믿음과 사랑과 봉사로 모두 바르게 삶으로써 복되고 평화롭게 하옵소서!”











24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청하면 너희에게 주시리라!

                                                            김정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기도를 드렸는지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몇 년 전에 한강 상류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편으로 건너가던 청년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을 거의 다 건너고 있을 때 배에 구멍이 나면서 많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답니다.

  

그 때 두 청년들은 즉시 가라앉기 시작하는 배를 박차고 헤엄쳐 나왔으나, 한 청년은 배에 그대로 앉은 채로 호소하는 두 청년의 손을 뿌리치며 하는 말이 “하느님께서 나를 구해 주시도록 나는 지금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으니 염려없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청년은 조금 후에 배와 함께 물속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 얘기를 듣고 웃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 청년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평생을 기도했어도 기도의 보람을 얻지 못하고 맛을 들이지 못했다면 기도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는 올바른 지향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누가 만일 부당한 수단으로 달라고 요구한다든지, 인간적인 노력에는 게으르면서 기도만으로 얻으려고 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손해는 아랑곳없이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요구하는 등의 기도는 올바른 지향이 없는 기도입니다.

  

둘째로, 기도는 열심히 겸손되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절에서 불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만일 불공을 드리는 그들의 정성이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벌서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기도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잠언에 말씀하시기를 “겸손한 기도는 구름을 뚫고 하느님께 올라간다”(잠언 35,21)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예를 들어 확증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기도는 굳은 신뢰심을 갖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은 아버지입니다. 가장 가깝다는 얘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여러분은 비록 악하지만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마태 7,11)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절대로 의심하지 맙시다.

  

넷째로, 기도는 항구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하기를 중지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보람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할 때 들어주시기 때문에 가끔 오랜 후에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녀 모니카는 당신 아들 아우구스띠누스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렇다 할 보람도 없이 기도하기를 십오년 동안이나 했습니다. 그 때 성녀 모니카가 항구하게 기도하지 않았던들 오늘의 성 아우구스띠누스란 아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잘 들으시오. 우정에 호소해 가지고는 일어나서 빵을 내주지 않을 사람도 친구가 와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 줄 것입니다.”(루가 11,8).

  

신자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기도의 조건을 잘 들으셨습니까? 다 듣고 난 지금에도 여러분은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청하면 다 들어 주신다고 했는데 왜 안들어주십니까?” 하고 인자하신 하느님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루가 11,11)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아버지 하느님께 열심히 항상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다시 한 번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신들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시오. 아버지, 온 누리가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25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뜻

                                                 함세웅 신부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은 신약성서 전체의 특징입니다. 이 귀절처럼 기도나, 설교나, 기독교 문학에서 많이 쓰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먼저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 첫 등장으로 갈릴리에 가셨을 때 제일 먼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르코 1,14)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자기에게 지워진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루가 4,43 ; 마르 1,38)

루가는 예수의 활동에 대하여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가 8,1)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느님의 나라'란 뜻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 귀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몇 가지 파악하기 힘든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과거의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마태 8,11:루가 13,28)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를 과거의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는 또 왕국을 현재의 것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루가 17,2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그는 또 하느님의 나라를 미래의 것으로,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동시에 현재, 과거, 미래의 것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주의 기도'에 나타난 두 가지 기원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히브리 문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전문적인 용어로 평행법이란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같은 것을 두 차례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음에는 같은 일을 다른 방법으로 반복하고 보충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어느 귀절이든 이 평행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시편'의 거의 대부분 귀절은 중간에서 둘로 나누어집니다. 고리고 뒷귀절의 반은 거의 처음 반 귀절을 반복하고, 보충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편 46,1)

“만군의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 (시 편 6,7)

“야훼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편23,1-2)

  

그러면 이 원리를 주의 기도의 두 기원에 적용시켜봅시다.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두 번째 기원이 첫 번째 기원을 설명 보충하고, 명백하게 했다고 한다면, 이때 우리는 천국의 완전한 뜻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완전히 행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히 행해지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해서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했던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있던 것이요, 지금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하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있는 자이며, 또한 장래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행할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오는 것은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밝혀진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국민 어떤 국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 개개인에 관한 것입니다.

  

실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제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나의 뜻, 나의 마음과 나의 생활을 하느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느님 앞에 개인적인 복종을 할 때에만 하느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다. 











26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살아 있는 교회

                                                   함세웅 신부



교회의 역사는 박해가 심할수록,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과정 속에서 부활의 믿음을 갖고 더욱 굳게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찾아라, 얻을 것이다"란 말씀은 우리가 강렬하게 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생명이 보호받지 못하고, 그 권리 또한 소멸될 위기에 처함이 너무도 만연해 있음에, 오늘의 현실 속에 우리의 모습이 서서히 비정함으로 물 들어감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신앙인인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살펴봄은 매우 유익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교회의 모습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은, 역행하는 현실 앞에 매우 중요한 일임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한 부활 후 초기 교회의 모습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뿔뿔이 흩어지기는커녕, 하나의 공동체로 더욱 굳게 모여, 진정 서로 나누고 서로 아껴 주는 사랑, 그 자체의 모습이었기에 이방인들조차 “보라,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탄복하였고, 말없는 생활 속에 하느님을 증거함은 많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탄생하게 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 고난의 길일지라도, 가야 할 길이며, 그 길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승리의 길이라면, 지금의 우리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이 길은 우리 모두의 소망의 길이긴 하나, 현대인이라는 우리의 모습 속에는 망설임과 비정함이 가득 찬, 좀처럼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생활의 연속 속에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벽은 더욱 두터워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버려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으나, 거리엔 수많은 외로운 생존이 있습니다. 과연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예수의 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는 거리에 방황하는 이들, 소외되어 버림받은 이들, 또한 드러난 죄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억울한 이들의 편에서 말씀하시며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또한 안주할 땅이 없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이들 곁에서 자신들의 안일무사만 추구하던 자칭 양심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왜 하느님의 정의를 그르치느냐고 책망하심으로써, 교회의 모습 속에 억압을 가하고 당하는 자들만이 주역이 아닌 정상인이라 할지라도, 이를 외면한 무언의 공모자가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솔제니친은 서방 세계로 망명한 후 “왜 우리는 그토록 저항을 별로 하지 않았는가?"라고 수없이 반복한 바 있습니다. 과연 예수의 행적과 이러한 체험 속의 물음은 지나침이 되어서는

안되며 세찬 조류를 역행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강함이 없이는, 신앙인의 위치를 사수함도 어려운 현실임을 자각하고, 안일 속의 합리를 가장한 탈출구 모색보다는 거짓된 조심성과 그냥 그대로가 좋다는 식의 유혹 앞에 투쟁하는 크리스천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가타리나 성녀의 교회에 대한 뜨거운 열매는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듯이,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고수하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열애가 모든 세상의 악마와 부당한 세력을 꺾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지금 이 순간에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 삶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며, 산 속에 홀로 버티고 선 교회이기보다는 이 시대의 민중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치욕의 역사 속의 교회보다는 생명의 교회를 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27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어떻게 기도할까(주님의 기도)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기도의 내용이며, 둘째 부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항구하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흔히 많은 교우들이 기도를 짐스럽게 생각하면서 외는 기도에 싫증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비슷했었습니다.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도를 우리는「주의 기도」(전에는 천주경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에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마태오의 기도와 루가의 기도를 종합한 것이 오늘 우리가 외고 있는 「주의 기도」입니다. 마태오와 루가의 기도 내용은 원칙적으로는 같으며, 다만 청원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약간 서로 다른 구전(口傳)에 의한 것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어 있고, 전편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 후편은 인간의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칭호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의미는 사랑의 친밀성을 나타내 주며, 그 권위는 전제되는 것,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인간의 언어 중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사랑과 신뢰를 나타내 주는 칭호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란 뜻은 순전히 인간적, 지상적인 의미만은 아니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며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 따라서 하느님과 관계되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은 모두 거룩한 것입니다. 그중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난다'는 찬미는, 결국 인간의 구원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감사송 뒤에 ‘거룩하시다'를 세 번 외는 것은, 이러한 뜻이며, 최상급과 최고의 찬미를 뜻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는 곧 인간의 구원이며 완성입니다.

 ‘그 나라가 임하시며'; 예수님은 간략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마디에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 있는 것, 하느님의 나라 거기에는 온 우주 만물 즉 하늘과 땅, 현재와 미래, 시간과 영원, 이 모든 것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중심 과제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이 세상에, 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과 땅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것, 천국과 세상이 만나며, 하느님과 내가 일치하는 의미의 기도, 하느님의 뜻은 곧 나의 완성이기에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여기에서부터 ‘주의 기도' 후편이 시작됩니다. 즉 인간사에 관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기원, 그중에 첫번째로 일용할 양식이 나옵니다. 하루 걱정은 하루에 족하다하신 주님의 말씀은, 현재에 충실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는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늘에 살라고 가르치시는 주님, 그 오늘은 바로 영원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양식은 육신을 위한 양식뿐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도 암시해 줍니다. 오늘의 양식이 영원한 양식이 되고, 오늘의 삶이 영원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장해 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음식에 대한 기원은 육체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필요했지만, 이제는 그에 못지 않게 윤리적인 요구 사항이 있습니다. 나의 잘못, 빛을 탕감해 달라는 기원, 그러나 거기에는 선행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내가 너그러이 용서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현실에 사는 인간, 그 인간은 불안과 초조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이 초조를 이겨내게 해 주십사  청하는 기도, 즉 하느님의 양식과 말씀으로 언제나 굳건해져서 흔들리지 말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다음



 ‘악에서 구하소서'도 같은 뜻입니다. 다만 악이란 이 뜻은 영원한 단죄, 즉 지옥의 벌에서 구해 달라는 최고의 염원이며, 구원과 완성을 바라는 인간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주의 기도' 그것은 미래를 지향한 신앙인의 현실적 기도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완전한 계명의 뜻이 포함된 기도입니다.

여러 번 욀 필요 없이, 단 한 번이라도 우리 모두 의미를 되새기며, 하느님께 나와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바칩시다.

  

복음의 둘째 부분은, 기도할 때 꼭 이루어지리라는 신뢰심과 항구심을 가질 것을 당부합니다. 신뢰심,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현실성을 띤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사는 신앙인, 그 신앙인에게는 기도 자체가 완성이며 구원입니다. 지치고, 맥이 빠지고, 앞이 캄캄하고, 절망적이며, 슬픔뿐이고, 낙심뿐일 때 한 번만, 우리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고 외워봅시다. 뜻을 생각하며 천천히 ‘주의 기도'를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구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실 것입니다" 











28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아름다운 중재자의 삶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8,20~32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2독서 골로 2,12~1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잘못을)

복 음 루가 11,1~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오늘 1독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 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애절한 노력이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본래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의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던 도시로서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던 악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 뿐이요 사람답게 사는 의인이라고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도시였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썩을 대로 썩어서 타락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을 수 있도록 체면 불구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며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소청을 기쁘게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의인이 단 열 명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서 푹 가라앉아서 지금은 사해 바닷 속에 묻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해가 그 이전의 사해보다 더 커졌다는 것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두 도시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하느님, 바로 이 중간에 서서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아름답고도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그처럼 살맛나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그건 추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재자의 길은 대단히 고달프고 험난합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람있는 길이요 멋지고 위대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화해와 용서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당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성부는 그래서 당신 아들의 희생을 보시고 인류를 죄에서 용서해 주셨으며 닫혔던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중재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죄 없이 얻어맞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이 맞아야 할 것을 내가 맞음으로써 그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방에서 마루로 나오다 넘어져서 울었습니다. 아기는 아픔보다도 걸려 넘어졌다는 그 자체 때문에 속이 상해서 웁니다. 이때 빨래를 하던 엄마가 갖가지 방법으로 아기를 달래 보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스크림 사 준다는 것도 싫으며 매맞는다는 것도 겁이 나지 않습니다. 속상하니까 웁니다.



이때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와서 문지방을 막 때립니다. 그러면 서 "이놈, 너 왜 우리 아기 넘어뜨렸니? 나쁜 놈, 매 좀 맞거라." 하면서 때립니다. 그러면 아기가 그 모습을 보고 속이 풀어져서 울음을 그칩니다. 여기서 문지방은 아무 죄 없이 얻어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아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입니다. 나라 곳곳에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건물만 썩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 썩은 오 물이 들어가니까 사회의 모든 부문이 썩어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대형 사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은 제쳐놓고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그래서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친구를 위한 중재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꾸어 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주인은 성가셔서 대답도 하기 싫은데 뻔뻔스럽게도 계속 조릅니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도 귀찮게 구니까 친구의 청을 들어줍니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도 자기가 먹으려고 빵을 꾸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체면불구하고 밤중에 어려운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운데에서 욕먹으며 요청하고 조정하는 자를 중재자라 하며 이들의 기도를 중재기도라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중보자,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세상은 중재자들에 의해서 구원받고 있습니다. 악인이 아무리 많아도 의인들이 많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용서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멋지게 살도록 합시다. 진정 사람답게, 양심 바르게,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살도록 합시다. 거기에 인생의 참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습니다.











29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의인 열 사람

                                                         강영구 신부



오늘은 7월의 마지막 주인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신앙인이란 누구이며 신앙 생활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주님이라 섬기는 신앙인은 이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에 사는 사람입니까? 신앙인은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자신들만의 동아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구원과 안전을 도모하는 집단 이기주의자들입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동아리를 만들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이 세상과 대립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신앙인들이란 천사들과 같아서 이 세상의 일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까?

 

신앙인은 결코 이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에 사는 별종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땅과 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소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신앙인들은 현실의 어둠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13-16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무관한 별천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현실의 어둠을 밝히고, 죽어 가는 생명들을 되살리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소돔의 패망을 막아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아브라함의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온갖 죄악으로 뒤덮인 소돔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느님의 분노를 막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무릎을 꿇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이 온갖 죄악으로 썩을 대로 썩었다 할지라도 거기 의인이 살고 있다면 그 의인 때문에라도 용서해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청합니다. 소돔 성을 살리려는 아브라함의 간구는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아무리 소돔 성이 타락하였기로서니 의인 50명쯤은 그곳에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소돔에 49명의 의인이 있다면 한사람이 모자라는 것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인 마흔다섯만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마흔 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에 삼십 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지막에는 열 명까지 에누리를 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소돔 성을 살려 보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소돔 성에는 의인이라고는 롯과 그의 가족밖에는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썩어도 보통 썩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썩어 버린 것입니다. 철저하게 썩어 버렸다기보다는 철저하게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 거기에는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어둠 속에 사는 암흑의 자식들만 머물렀던 소돔 성은 한마디로 죽음의 도시였습니다. 창세기는 소돔 성이 하늘에서 쏟아진 유황불로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타락과 부패 때문에 자멸하고 만 것입니다.

  

자정능력(自凈能力)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자정 능력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오염된 더러운 물이, 흐르는 동안에 깨끗해지는 것을 자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물이 깨끗해지는 것은, 그 물 속에 깨끗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자정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요소가 전혀 없고 완전히 썩어 버린 물은 아무리 해도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소돔이라는 도시는 철저히 썩었기 때문에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으로는 그 타락한 도시를 정화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소돔 성에 의인 열 사람만이라도 있었더라면,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자정 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고, 죽음의 그림자는 조금씩 조금씩 물러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과 그의 가족만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 성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타락과 부패의 결과로 자멸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런 사실을 유황불이 쏟아져서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신앙인인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며 소금입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이 세상의 썩음을 방지하는 소금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막는 방패막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창세기의 소돔 성 못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지위와 향락이라는 우상에 매료되어서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즉시 그 능력을 발휘하는 돈과 권력과 지위가 하느님보다 훨씬 힘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평화보다는 돈과 재물과 권력이 가져다 주는 향락이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섬기면서,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 속에서 자행되는 온갖 부정과 부패, 그리고 타락은 바로 이런 우상들을 섬기려다가 생기는 결과입니다. 폭력, 인신 매매, 사기, 횡령, 성범죄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 이 소돔 성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을 섬기면서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 안에 열 명의 의인이 아쉬웠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열 명의 의인이 아쉽습니다. 만일에 우리마저도 이 땅에서 빛의 구실, 소금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함께 썩어 버린다면, 이 땅의 현실은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기 전에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 인구는 4천만이 넘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는 아직 3백만이 안 됩니다. 전체 인구의 겨우7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 명중에 7명 정도가 천주교 신자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수적으로는 적더라도 바르게 살기만 한다면 충분히 이 소돔 성 같은 어두운 현실을 밝게 비출 수 있고,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자정 능력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천사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이나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듯이, 우리 역시 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날개가 없듯이, 우리에게도 날개는 없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비슷하다 해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자기에게 없는 무엇을 달라고 하느님께 보채고 떼를 쓰는 일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기도하는 우리는 누구란 말입니까? 기도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기도란 결코 부족한 것 혹은 없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것은 성령 곧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령을 받게 되고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기도하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서가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기에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밝게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소돔성과 같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이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썩어 가는 우리의 현실이 자정 능력을 완전히 잃고 스스로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겠습니까? 이 어두운 현실을 구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어쩌면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처럼 섬기고 그토록 좋아하는 돈과 재물과 권세가 죽음의 세력을 몰아낼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소돔 성에 의인 열 사람이 아쉬웠듯이 오늘 우리의 현실도 열 사람의 의인을 아쉬워합니다. 우리는 결코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 안주하면서 자신들의 안전이나 도모하는 집단 이기주의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도, 수수 방관하는 무관심주의자들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유황불을 뒤집어쓴다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도 똑같이 그 유황불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열 사람의 의인이 소돔 성을 구할 수 있듯이 오늘 우리도 어두운 이 현실을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성실히 기도하면서,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가 하는 점이 그 열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 되어야 하고 마지막 남은 열 사람의 의인

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되어도 되겠습니까?”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30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생활의 비법인 주의 기도

                                           이기정 신부



저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고개를 혼자 끄덕이며 감탄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기막히게 멋진 찬사를 한 이유는, ‘주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이 ‘주의 기도' 덕분에, 저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의 기도라는 비법이 저를 크게 도와주었던 겁니다. 저는 천주교를 알고 믿게 된 후, 제일 덕 본 것이 있다면, 이 주의 기도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상대를 향한 내적 대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인간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이주의 기도는 주요기도문의 첫째 자리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암송할 기도 중에서, 최고의 모델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이 주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면 구원됩니다. 주의 기도를 잘 바치면, 세상도 살기 좋아지고, 자신도 참으로 영원히 구원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가정에는 문제가 없고, 죽은 후에는 천당에 갈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주의 기도를 많이 바치면 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사실 이 비법을 공짜로 알려드리기엔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시고, '주의 기도'의 비법으로 효과를 보신 분이 계시다면, 후에 갚음이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저는 학생 때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신학교에 등록금을 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생을 위한 성소후원회도 없었고,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어느 교우에게 하소연하기도 싫었습니다. 해서 68년도부터 71년까지, 매년 방학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성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어느 방학 때였습니다. 저는 비싼 물건을 파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익금의 30%를 받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은 자세한 내용을 쓸 수 없습니다. 그 점은, 이야기도 빗나가겠지만, 구체적 인물이나 장소로 인해 곤란한 일이 생길지 몰라서 말입니다.

  

저는 상점 문 앞에 서서 저편에 몇 명의 손님들이 나타나면, 그 손님들 중 한두 분을 눈여겨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손님을 향한 내적대화'(일명 손님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 드는 손님, 손님은 유명한 분이시며, 손님은 이 곳에서 대접을 받으시며, 손님이 집에서 계획한 뜻이 이 가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당한 약간의 이익을 주시고, 우리가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손님도 우리를 잘 봐주시고, 재물의 유혹에서 권면해 주시고, 악한 상혼에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손님." 



이 ‘마음속 대화'를 당시에는 하루 종일 외우면서 손님을 대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 2대만 팔면 유지가 되는데, 일주일에 평균 3대 정도를 팔았습니다. 주인은 감탄했습니다. 저의 태도는 신학생다웠고, 아르바이트생다웠고,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등록금을 낼 수 있었고, 용돈도 그런대로 남부럽지 않게 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당시의 저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뿐 아니라 저는 어떤 사람이든, 저 사람과는 이런 관계가 맺어져야되겠다고 생각하면 대개 주의 기도 형식의 비법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법은 장사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생활에서 다양하게, 모든 대인관계를 효과 있게 성공시킨다고 봅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대하듯, 주님을 대하듯, 그렇게 하면 그 상대는 바로 주님처럼 되어갈 것입니다.



술을 먹고 취해서 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부인이 “내 남편인 여보, 당신은 유명한 분이며, 당신은 기를 펴고 사셔야 하며, 당신의 뜻이 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에게 자그마한 관심을 주시고, 당신을 이해하듯 나를 이해해주시고, 혹시 내 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해요. 당신을" 이렇게 마음속으로 자꾸 외우면 부부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리라 봅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외박을 하고 들어와도 말입니다. 좋은 마음을 끈기 있게 보여주면, 어떤 남자라도 변하지 않고는 못배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인이 아무리 미워지고 바가지를 긁는다 해도, “내 아내인 여보, 당신은 유명한 분이며․․"라고 한다면, 어떤 부인인들 변화되지 않을 여자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부부나 남남간에 다툼을 보면, 자기 주장을 상대방에게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서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별 것도 아닌 것이 큰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 대형화재가 되어 버리고 나면, 그 누구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제 나름으로 캐고, 따지고 하다가, 되려 문제해결은 커녕 더욱 큰 문제로 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주의 기도를 평소에 잘 바치지 않았거나, 바쳐도 헛바쳤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잘 사는 방법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주의 기도와 앞뒤 면인 하나의 의미입니다. 즉 주의 기도를 제대로 음미하며 바치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사랑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주의 기도를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사랑의 계명을 포괄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의 정신처럼 지켜온 것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흘러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신약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잘 살아가려면, 모두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면 됩니다. 이 사랑은 주님이 내려주신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계명인 사랑의 진상은, 바로 이 주의기도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방법 역시, 이 주의 기도 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고, 감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하셨습니다. 물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과 부활하심을 이 주의 기도에 결부시킨다면, 이는 바로 주의 기도를 최고조의 경지까지 실현하신 것이라 풀이됩니다. 즉 오로지 아버지만을 위하신 길, 이웃인 인류만을 위해 살다 가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개념을 사랑이라는 정신으로 완성하셨고, 십계명이라는 계율을 주의 기도라는 기도형식으로 완성해주셨습니다. 사실 그 구조를 보면, 십계명에서 처음의 세가지 계명은 주의 기도에서 앞부분과 마찬가지고, 후반부의 4계명은 부모와 관련된 일용할 양식으로 현실적으로 정리하셨고, 5계명인 대인관계를 서로 용서하는 뜻으로 바꾸셨고, 6계명 이하의 모든 것은 유흑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해설로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육적 가치로 보면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나아가 아름다운 사랑에 흠뻑 잠긴 시와도 같이, 완벽한 기도형태로, 그야말로 종교 교육적으로 너무나 잘 정리하신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천만 다행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법을 암송하고 사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인생의 길을 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신비하고 덕스러운 이 삶의 비법을 생활에 충분히 활용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31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에 대하여

                                                     안상인 신부



● 기도의 정의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이다. 비록 원시인이라 하더라도, 초자연적인 분께 공포 중에, 또는 위험 중에 본능적으로 기도를 바쳤다. 기도는 또한 인간의 심층에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기도 없이 인간에게 은총과 구원을 주시 지 않는다.

  인간은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하며, 필요한 은총을 받고, 하느님과 계속적인 유대와 상통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우리는, 하느님과의 부자(父子)관계를 지속시키는 기도를 생활화하여 야 한다.



○ 기도해야 할 때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에페 6,18) 또한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항상 기도를 바쳐야 한다. 인간이 매 순간마다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다. 특별히 다음의 경우에 기도를 해야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개어 기도하라" (마태 26,41)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죄로 유인하는 유혹 중에, 죄 중에 있을 때, 타인에게 사랑의 실천을 필요로 할 때, 또한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할 때 기도를 해야 한다.



○ 기도의 형식과 목적

  기도의 형식은 정신적인 기도와, 기도서나 또는 꾸며서 입술로 바치는 기도가 있다. 정신적인 기도에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있으며, 특히 관상기도는 기도 가운데 가장 탁월한 형식의 기도이다. 기도의 목적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흠숭이다. 이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분들이기에 찬미를 드린다. 그러나 흠숭을 드리지는 못한다.

둘째, 감사를 드려야한다. 나의 존재와 여러가지 은혜를 풍부히 베푸심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셋째,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또는 궐함으로 잘못한 죄에 대하여, 뉘우치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넷째, 우리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또는 현세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기도라고 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을 우선 생각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전체 목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그 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하기 위해서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청원의 기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고치고, 따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더욱 상세히 뒤에서 다루겠다.



● 기도는 누가 하는가?

  기도는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기에, 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기도하실 수 있지만, 하느님으로서는 기도를 바칠 수 없다. 성모 마리아, 천사들과 하늘나라의 성인들은 기도할 수 있으나 악신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기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특히 죄인들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은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산이와 죽은이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 특히 가족과 친척을 위하여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지옥에 있는 영혼은 아무런 기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기도해 야 한다.



● 청원기도의 적합한 대상

 사도 야고보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하셨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청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더라도, 타당하고 선한 것을 구해야 한다. 비록 타당하고 선한 것이,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라도 상관없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갈구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라면, 청하기에도 타당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어떤 이익이나 편리도,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영신적인 면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면,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 건강한 몸, 상처의 치료, 사고로부터의 안전을, 좋은 직업이나, 안락한 가정 등,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도의 지향일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신 사정이나 구원에 도움이 될 때, 그러한 청을 들어주신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는 청하는 것이 영신적인 면에 도움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것이 우선적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덕이 향상되고, 악습을 고치고,, 유혹을 이기고, 은총을 받고, 항구하게 성사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인 여건이다.

  청원의 기도를 바칠 때 바치는 첫째 대상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다음으로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 그리고 복자들께는 전구를 요청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생각이나, 원의까지 알고 계시지만,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이나 원하는 것을 모른다.



● 필요한 조건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기 주실 수 있고,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만이 약속하신 행복을 보장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셋째,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는, 보다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의 정신을 갖고 청하면서도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한다. 즉 자기 구원에 해가 되는 것을 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드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 주신다"(잠언 3, 34). 또한 항구하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 과부의 번거로운 청을 들어준 판관의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한다(루가 18,1-5).



●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기도

  “우리의 찬미가 주께 필요하지 않은 줄 아오나,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감사 드리오니, 우리의 찬미가 주게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유익이 되나이다" (감사송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자체로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찬미와 감사가 영광을 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알고 계신다. 즉 우리가 무엇을 청해서, 우리의 요구를 일깨워 드릴 어떠한 기도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나, 지향을 바꾸는 효과를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한 부분이다." 이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이다. 가령 하느님께서 어떤 농부에게 곡식을 수확하도록 계획을 세우셨다고 하자, 그 수확은 농부의 경작과 적당한 햇볕과 비와 좋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하여 기도를 바친 결과로써 계획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요소만 제거되어도 수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수확을 하기 위하여, 필수요소인 기도를 그의 계획안에 넣으셨기에, 기도가 없었다면 좋은 곡식을 수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세우시거나 지향하실 때, 인간의 기도를 그 섭리 안에 내포시키신다.



● 전례와 기도

  전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교회의 모든 공적 경신 경배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로 창조하시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신비체를 이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면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공동체를 이룬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전례란 바로,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며, 이 기도를 통하여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 전례는 반드시 교회의 권위로부터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교직자가 교황청으로부터 인준한 전례서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성부께 십자가상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리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 제사의 힘으로 구원되기를 원하셨다. 고로 예수께서는 그 거룩한 제사를 기념하여 그 예를 계속하기를 원하셔서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전례행위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제사와 성사 그리고 성무일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전례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미사 성제이다.



그 외의 모든 기도는 신심행사에 속하는 것들이다. 로사리오 기도, 구일기도, 십자가의 길, 성모나 성인을 공경하는 기도, 또한 성인 열품도문 등 비 전례적인 개인적 및 공적인 기도들도 있다. (여럿이 바치는 경우라고 해서 전체 교회의 기도는 아니다. ) 하느님께서는 전례 중에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간은 그 전례를 통하여 응답으로 말씀과 은혜를 받아들이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전례에 참여하여야하며, 내적 준비를 합당하게 하여야 한다.



● 결론

  신자들을 화초에 비한다면, 기도는 물이나 공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화분의 화초라도 물과 공기가 없으면 시드는 것과 같이, 기도 없는 신자생활이란 불가능하다. 기도는 모든 신자들 생활의 중심이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고, 신자 생활을 원치 않는 증거이고,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32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 :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따라서 본 기도  

                                                  박병해 신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다. 기도는 이처럼 늘 찾아오는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있을 때 가능하다.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도 내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참여'의 개념이다. 기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은혜로운 삶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숨결을 가진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순간은 나그네인 우리의 순례가 위안을 받는 때다. 이것은 살아있는 선물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그 느낌을 알아듣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으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하나의 신비다. 따라서 기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신비 안에 어느 정도 미리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도하는 것은 짐이 아니다. 기도는 선물이다. 기도는 억압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따라서 기도는 기쁨이다. 그러나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신 안에 마땅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먼저 깊은 내적 침묵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을 찾는다면 기도는 참된 것이다. 우리는 적나라한 마음으로 자기를 온전히 봉헌할 준비를 하고 하느님의 뜻과 우리를 동일화해야 한다.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주님의 정원을 통해서 표현한다. 여기서 주님의 정원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즉 천주교회를 상징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영적체험인 '성'(城), '영혼의 성'은 패랭이꽃들이 향기를 내기 시작하는 꽃들과 나무들이 성장하는 '정원'없이는 완성 될 수 없다.



이 성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성녀 데레사는 그 찬란함을 서술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고 말한다.(영혼의 성 1궁 1장 1).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 안에 하느님의 상(像)의 폐색(閉塞)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정원, 그 깊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가린다. 원죄와 그리고 본죄는 우리의 자아를 좀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세상이 하느님의 정원을 완벽하게 직관하기에는 이미 그 투명성을 잃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좋은 정원사가 되어 주님이 정원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주님이 자주 이 정원에 즐기려 오시고 이 꽃들 사이에 쉬시도록 해야 한다.(자서전 11,6) 마음의 정원에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꽃들을 피우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ꡒ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도 높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 안에 사랑을 증거 하신 것을 상기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 크신 사랑의 담보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과격한 사랑을 상기합시다.ꡓ(자서전 22,14)











33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 : 사도 바오로의 선교 영성의 기초, 사도적 기도  

                                            박재만 신부



교회는 대희년과 더불어 21세기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복음화'를 시대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실현을 모색하고 시도해왔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해야 할 제3천년기 한국교회의 영적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한 근본적인 활력의 원천, 즉 핵심적 영성을 바오로 사도의 선교 영성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도 바오로가 숱한 역경과 시련 그리고 혹독한 박해 중에도 복음선포 사명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에서 엿볼 수 있다.

ꡒ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ꡓ(1고린 9,16).



이처럼 바오로에게 있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과제는 혼신을 다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했다. 그는 '꾸준히' 기도하였으며(2디모 4,2; 에페 5,20; 6,18; 1데살 5,17) '언제나' 기도하였고(골로 1,3; 4,12; 필레 1,4; 2데살 1,11) '끊임없이' 기도하였다(1데살 2,13).

그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비추심과 영감을 받아 나아가야 할 길을 분별하게 결정할 수 있는 식별과 지혜의 은총을 얻었다. 실로 기도는 그의 사도적 소명의 확신과 사명 수행을 위한 용기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공동체 내부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선교 영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실천한 선교의 삶, 즉 기도와 활동의 조화이다. 기도와 복음화 활동은 단 하나의 실재, 하나의 체험이 되면서 두 행위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고 조화가 이루어져 그리스도인의 인격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의 참된 복음화 활동은 기도 없이 불가능하다. 복음화 활동은 주역으로 활동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주님의 성령과 일치하며 도구로서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해 주고 용기를 주어 실천하도록 해준다.



복음화 사명을 지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두 근본 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하나는 그 사명을 위탁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ꡒ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ꡓ(요한 15,5). 다른 하나는 사도 바오로의 체험 고백이다. ꡒ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ꡓ(필립 4,13)



기도 없는 복음화 활동을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복음화 되지 않는 공동체의 선교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통한 증거보다 더 호소력을 지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34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주님의 기도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전달수 신부



루가 복음서 11장 1절에 의하면, 늘 기도하시던 스승의 모습이 제자들의 호기심을 대단히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래서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백성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기도하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자기들이 따라나선 예수님만이 온갖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에 관한 강의를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기도를 주심으로써, 그들이 기도를 하고 체험하게 하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바로 저 유명한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주님의 기도 - 일곱가지 청원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6,9-13)와 루가(11,2-4) 복음에 나온다. 청원의 수는 서로 다르지만, 큰 차이가 없으며,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기도에 일곱가지 청원이 들어있다고 가르쳐 왔다.

처음 세가지 청원은 영적인 은혜를 위한 것이고, 나중 네가지 청원은 현세의 도움을 위한 것이다. 현세적인 것들도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준비이므로, 현세의 삶을 위하여 청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청원은 모두 영생을 위한 것이지,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현세적인 것은 모두 구원을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구원과 멀리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주님의 정신과 일치하여 드리는 이 기도는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기도이다. 인간은 그 약한 본성 때문에 자기가 영원한 세상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잠시 쉬어 가는 주막이 아니라, 본 고향처럼 여겨, 여기에 빠져버리거나 안주하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이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인생의 본 목적에서 이탈하려는 강한 경향들과 투쟁하는 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분을 이 세상의 주인과 생사의 대권을 지닌 분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려질 권리가 있거나, 그런 영예를 일을 수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오로지 그분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이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사실, 즉 하느님깨서 우리를 세례성사를 통하여 양자로 삼으사, 그리스도의 상속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하신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버지라는 칭호를 묵상할 때,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 그분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이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삶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관대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한없는 신뢰와 감사와 경외심으로 그분께 나아갈 수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어려운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양자 되어



이는 마치,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소년이, 저명한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어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우리 개개인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타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와 그들은 모두그분의 사랑 받는 양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상속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하며, 부정적인 측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인종차별이나 사회적인 신분 구별을 원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흑백 갈등이 얼마나 심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나라에서도 지역감정으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빈부의 차이나 지역감정, 민족과 피부색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35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주님의 기도 : 가장 을바른 기도방범은‥‥

                                                   전달수 신부



성서를 보면 주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선적으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부터 지적하신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유다인들의 기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결점이자 악습인 위선을 피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회당이나 길거리에 서서 남이 보라는 듯이 기도하기를 좋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겉꾸미는 행동을 말한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마태 6, 5)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



기도를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자들은 위선자들이다. 배우나 탤런트들은 다른 사람의 역을 잘도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연극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사운드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서 수녀들은 성가도 잘하고, 성당에서 무릎도 잘 꿇는다. 원장 수녀가 축복을 내리는 모습은 장엄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녀들의 역을 대신하는 영화배우들이다. 기도를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겉꾸미는 행동으로 신심 깊은 것처럼 보임으로써, 그것을 보고 칭찬하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들은 하느님을 이용하였다,



 빈말 되풀이도 금물



두번쩨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방인들의 전형적 잘못인 기도의 방법이다. 그들은 빈말을 되풀이하기를 좋아하였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태 6,7)

기도할 때에, 말을 너무 많이 한 이방인들은 기도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에, 그런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들에게 말을 많이 늘어놓아야만 신들을 굴복시켜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위선자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이방인들도 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신을 다른 용도로 이용해 보려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마치 법정에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대는 변호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변호사는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과 변론에 치중하기보다는, 어리석게도 근거 없는 변론을 펴면서도,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대는 자기의 달변만 믿고 검사와 판사률 굴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기도를 말의 힘에만 의존한 이방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기도의 모범보이신 예수님



그러면 참된 기도의 방법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방법이다. 그분은 당신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좌절과 고통이 극도에 달해 핏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장차 닥쳐올 그 엄청난 사건을 감수할 힘이 없으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박한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리셨고, 이제까지 가르쳐 온 자신의 올바른 기도방법에 머무르셨던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두 가지 오류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제자들의 도움을 겸손되이  청한 다음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그분은 장차 닥쳐 올 고통을 면하게 해주시도록 간절히 청하였다. 이 기도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래도 그분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우선적으로 앞세우심으로써,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기도는 분명히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달랐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정하여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복적인 기도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가, 최선의 기도임을 보여주셨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바라지말고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이기심을 버린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여러분의 기도가, 사랑하는 그분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가르쳤다. 우리 도 스승이신 주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기도의 방법을 익혀 나가야 할 것이다.























36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전주원 신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매일 기도 중 중요한 것은 아침9시 이전과 오후9시 되기 전에 하는 쉐마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조, 만과와 같은 것인데 기도 시간이 되면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경건한 태도로 쉐마를 꼭 바칩니다.

  

그 외에도 유대인들은 세세한 사건이나 사물을 접할 때마다 일정한 기도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도가 형식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뜻 있는 랍비들은 “의무를 빨리 끝내려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 겸손한 자가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행위이다”라는 비판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할 때 빈말만 잔뜩 늘어놓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듣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의 타이르심을 잠잠히 듣고 있는 자녀의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이라도 아버지가 시키시면 무엇이나 받아들이겠다는 순수한 마음과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요구만 앞세우고 관철시키려 하거나 내가 요구해도 하느님은 들어 주시지 않더라는 식의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결국은 제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37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구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

                                                         김신호 신부


  사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맺고 있는 관계성안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 자체를 관계성의 총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간에 좋은 관계일 수도 있고 서로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해로운 관계일 수도 있다.

  인간이 맺는 이러한 관계성에는 나에게 완전하게 득만 되는 관계성도 없고, 나에게 완전하게 해만 되는 관계성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물론 자기에게 득이 되고 삶의 보탬이 되는 관계성을 원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원의는 가끔 정반대의 결과를 갖게도 한다. 원하지 않는 관계성도 어느 때에는 외부적인 조건이나 사회의 관습상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우리는 사회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제 부모가 노인이 되어 우리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한다고 살아있는 부모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고, 자기의 형제가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형제관계를 단절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도 없다. 또한 이웃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저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실제적으로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서로가 만나지 않음으로써 관계성을 무시한 채로 살아갈 수는 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



  체면 생각말고 청하라



그렇다해도 사회의 통념상으로 인정되는 형식상의 관계성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사회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동일한 형태를 취하도록 강요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관계성이 좋게되거나 관계성이 나빠지는 것은 전적으로 어느 한쪽에만 책임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기도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다. 기도는 청하는 자의 입장에서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항구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나 이해하기에 그렇게 쉬운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친구가 어려운 가운데 청하는 간단한 청을 거절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 청을 하는 태도는 좀 이상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쌍방통행식 기도가 돼야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문이 열릴 것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항구성을 강조하신다. 이러한 항구성은 기도하는 자의 태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서, 기도를 할 때에는 한두 번 조심스럽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오늘 곤경 중에 있는 자가 친구에게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탁을 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계 중에 어느 한쪽에게만 일방적으로 득이 되는 관계가 없는 것같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경우에도,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청을 드리는 하느님도 생각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무조건적이고 예의에 어긋나게 보이는 기도도, 사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하신 하느님은 이미 우리가 청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끝에 나오는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최종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으므로, 인간이 청하는 것 중에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결정적인 사항은 하느님께서 다른 것으로 대체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노력에 속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청하면, 나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한다. 좋은 관계성은 쌍방 통행일 때에 최선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38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이 시대에 필요한 의인 10명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항구적 신뢰를 요구하며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징벌을 설명하는 도입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징벌의 유예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성서작가는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성과 연대성을 지니고 있지만 불의한 도시 전체가 멸망될 때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은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입니다. 하느님의 대답은 명백합니다.



그 도시에 착한 사람이 10명만 있더라도 그 10명을 위해서 나머지 사람들을 멸망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죄인들 때문에 의인이 억울하게 죽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성서는 역으로 소수의 의인 때문에 수많은 죄인들이 살아나며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보상의 의미와 중개사상을 우리에게 분명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는 바로 그러한 의인이며 중개자인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결코 원하시지 않고 그들이 살아남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거부할 때 멸망은 필연적이라는 경고입니다. 의인 10명,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이러한 의인 10명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이 의인의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교회는 억울한 속죄양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사회 전체가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보루가 될 것입니다.

39      연중 제17주일  루가 11,1-13 (다) 기도하는 습관이 가장 큰 유산

  

묵상 : 일반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는 기도의 전문가인양 생각한다, 그러나 참으로 기도에 맛들인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기도에서 멀어진 만큼 무(無) 신앙적이고, 이기적이며, 현세적임을 깨닫자.



 신자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



  어떤 본당에 새 본당신부가 부임했다. 신부님은 항상 미사하기 30분전에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도 줄 겸 신자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했다. 성모회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새로 온 본당신부 선본 소감을 한마디씩 늘어놓는다. “우리 신부님은 내가 성당에 일찍 가면, 항상 나보다 더 일찍 와서 기도를 하고 있더라. 뒤에서 보면 얼마나 멋있고 마음이 흐뭇한지 모르겠어. 그렇게 기도하는 신부님만 보고 있어도 갑자기 우리 본당이 부자가 된 것 같애! 그래서 나는 요즘 우리 신부님 기도하는 것 좀 많이 보려고 성당에 더 빨리 온다.”



  할머니들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신부님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본 듯 하다. 그리고 신부님이 무엇이든 시키면 최선을 다해 협조를 하겠다는 자세이다. 사제와 신자 사이에 신앙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신부님만 바라보아도 그저 마음이 흐뭇하고 부자가 된 것처럼 느끼는 신자들이다. 그 어떤 활동보다도 신자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월남전에서 매복 나갈 때의 일이다. 평소에는 신부 될 놈이라고 놀리던 소대장이 모두들 긴장하고 겁에 질려 말이 없으면 나를 보고 “유 수병, 기도 좀 열심히 해!"하면서 기도를 청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에서 절대자를 향해 기도하고 부르짖고자 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신(神)같은 것은 없다'는 철저한 무신론적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는 항구하게 기도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믿음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도록 당부하신다.



  설령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라도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위력을 믿지 못한다.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늘 듣던 말씀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항상 ‘기도를 하면 무쇠도 녹는다'고 하셨다. 무쇠란 바로 가마솥을 만드는 주물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을 때, 간절히 그리고 항구적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지나면서, 가족이 모여 가정기도를 바치는 신자 가정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교세통계를 보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교적신자의 28-33%이고, 매일 가정기도를 하는 가정은 5%도 안 된다. 첫 영성체 교리를 하고 기도를 잘 익힌 주일학교 학생이 5-6개월 지나면 기도문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 이유를 물어보면 집에서 함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녀의 기도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있다해도 부모들은 하지 않으면서 ‘너 혼자 기도하고 자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주일학교에만 내보내면 신앙생활은 다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학원 보내기에 바빠 아예 주일학교엔 보내지도 않는 부모들도 수두룩하다.



  미국의 경우 평균 부부 열 쌍 중에 대략 네 쌍이 이혼을 한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주일을 지키는) 사람은 50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고, 매일 가정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은 1011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한다. 같은 사회 환경에서 같은 어려움과 유혹을 겪고 살면서도, 기도를 하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돈을 몇 억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보다 언제나 기도하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비춰 볼 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자신이 어디 쫌 가고 있는지를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준다면 이보다 더 큰 유산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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