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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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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다해 연중 제 16주일

        20. 함세웅 신부(다)/36

        21. 김신호 신부(다)/37                22. 강길웅 신부(다)/39

        23. 강영구 신부(다)/41                24. 이기정 신부(다)/44

        25. 마르타와 마리아(다)/47            26. 김정진 신부(다)/50

        27. 한의수 신부(다)/51                28.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다)/53



20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한(恨)

                                                      함세웅 신부



무슨 사연이 한이 되었길래 저다지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으이, 으-이․.․"하는 소리에 맞추어 흐느적거리듯이 춤을 추어야 하는가.

한(恨)의 표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탈춤의 현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도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솟아오름을 느끼게 합니다. 저 춤의 내력은 보이지 않는 민중의 한을, 사회 심충부의 응어리진 넋을 대변한 것이리라.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은 한의 내력을 갖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 옛날에는 군주의 말 한 마디에 굽신거려야 하는 힘없는 백성으로서의 한을, 가까이로는 일제 36년 압재 아래에서 항거한 학생, 농민의 한이, 또한 해방 후에는 계속된 독재 정권과 6․25를 통한 민족적 비극 때문에 민중의 한은 응어리져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민중의식 속에 자리 잡은 한 때문에 항거한 많은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부당한 힘에 의해 처형되었거나, 수많은 밤을 외로이 감옥에서 보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항변으로 득을 본 것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가담치 않고 눈치만 보면서 연명해 온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미칠 때, 웬지 처량하고도 슬픈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과거는 때로 많은 회한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이기도 한, 배반과 회개의 역사의 되풀이에서 오는 서글픔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발돋움이라고 자위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말씀은, 세상사의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고 걱정하는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강조하십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간의 도움을 이웃에게 베푼 것으로 크리스천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몸까지 다 바쳐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심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이웃의 아픔을 내 것으로 알고 이웃을 위해 목숨 바쳐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굳게 지켜야 할 길임을 간곡히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현실은 항상 소외되고 외면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한을 갖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나 듣지 않는 백성들 때문에, 한 맺힌 눈물을 흘린 구약의 예언자와 같이 슬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후회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천은 장식품이 아니기에 말씀의 소중함을 찾는 마리아의 삶을 체험하면서, 사회에서 버려져 소외된 이들 사이에서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토록 해야겠습니다.



혹시 불행하게도 우리 자신이 거짓에 오염되었을지라도, 억압받고 슬퍼하는 이웃에 헌신적인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되며, 더구나 있는 것, 가진 것 다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줌이 부끄러움이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크리스천이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함에 있어 거의 무관심해 한다면, 오늘의 한 맺힌 대열은 ‘교회는 있는 자와 가진 자의 집단'일 뿐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임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걸하는 짐승이 아닐 것이며, 따뜻한 사랑, 좀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한이 발붙일 땅'을 원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의 원천이신 구세주는 한 맺힌 이들에게 참 진리를,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학생은 진리를 탐구하고, 군인은 오로지 국토 방위에 전념하며, 정치인은 도덕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공복의 자세를 갖고,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목숨을 다하여 선포하고 실천할 때 ,한의 민중들은 기쁨과 부활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 시대에 누가 사마리아 사람이냐"고 묻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가 ‘사랑의 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1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김신호 신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야말로 십인십색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완성에 삶의 목표를 두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가치를 두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가치기준은 시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많은 경우에 가치기준이  변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삶의 형태가 변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이 변하고, 삶의 조건이 변함으로써 인간의 가치기준도 변한다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에 속하는 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현실적인 사회현상에서 볼 때,무조건 틀렸다고 부정하기도 힘들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지만 인간이 한번 구성한 그 사회는, 질서와 공동체라는 목적을 실현하고 사회의 유지라는 명제 아래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에게 질서유지의 행동 규범을 강요하는 것이 또한 현실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현실문제에 얽매인 삶



  우리 사회도 산업화를 거치면서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불어 많은 면에서 물질이 우선하는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학을 지원하는 경향을 보아도, 자연계계열의 학과가 인문계 계열의학과보다 지망자의 점수가 높은 사실에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삶의 가치 있는 부문으로 여기는 사회적인 기본 흐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회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자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언니 마르타를 나무라지는 않지만, 마르타가 마음을 쓰며 걱정하는 것은, 실상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는 별로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무런 보탬이 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계신다.



    관상적 삶 살아가야



  교회의 신심(信心)사조 중에 관상이 우선되는 것이냐, 활동이 우선되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제기는 나름대로 서로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어떤 한쪽이 더 나은 것이라고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자신에게 합당한 길을 찾고, 그 길을 통하여 자신의 완성을 도모하고 하느님깨로 가는 삶의 길을 충실히 가기 위한 삶의 형태를 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단과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보는것이 아마도 옳은 생각이 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는 데 있어서, 과연 어느 길을 걸어가는 것이 확실하게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는가하는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옛날과는 달리 요즈음 우리사회에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선택에 있어서도 우위권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우선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수도원들이 활동을 삶의 지표로 상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인간은 사회의 지배를 받거나 적어도 삶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게 되어있다.

  사회의 흐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되는 것은, 관상적인 생을 삶으로써 사회의 흐름과 자신을 격리시키는 시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하는 자만이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2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복 받는 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8,1~10a (손님네들,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제2독서 골로 1,24~28 (감추어져 있던 심오한 진리가 이제 성도들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복 음 루가 10,38~42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힘들고 외로우며 고달플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동행자가 친절하면 그 가는 길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우리 민족도 길손들에 대해 상당히 친절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백성 자체가 나그네였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잘 보살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오늘 성서에 보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두 가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보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하느님을 영접한 것이 되어 두 가정에 큰 축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 접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최후심판에 대한 말씀(마태25,31~46)에서 그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우선 1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더운 대낮에 문득 낯선 사람 셋을 보고는 자기 집에 정중히 모시는 내용입니다. 그 나그네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자기 집이 아니고는 쉴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모십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길손들에게 송아지까지 잡아 주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막말로 먹다 남은 밥을 줘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자기들도 쉽게 못 먹는 귀한 음식으로 접대를 합니다. 재산상으로도 손해요 시간상으로도 바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친절 때문에 뜻하지 않은 상을 받게 됩니다.



그때 음식 대접을 받는 분들이 그랬습니다. 내년 봄 새싹이 돋을 무렵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집에 아들을 점지해 줍니다. 그런데 사라의 나이는 아흔이 다 된 할머니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망측해서 사라가 웃었지만 그러나 사라는 정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백 살 때의 일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고 안 얻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그는 결코 아들을 얻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피곤한 나그네에 대한 어떤 연민의 정 때문에 그랬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받을 사람은 꼭 복받을 일을 합니다.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내용입니다. 그들 자매가 살던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길목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음식도 드시고 또 쉬셨던 곳입니다. 주님은 그들 자매를 특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보나 안 보나 굉장히 가난했던 자매였습니다. 라자로가 거지로 비유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루가 16,19~31참조).



그런데, 오늘 두 자매가 주님을 모시는 태도가 아주 대조적입니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바빴고 마리아는 주님이 편하게 쉬실 수 있는 분위기에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피곤하셨지만 그러나 또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우선 먹는 것보 다는 마음의 편안함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신이 복잡하면 밥알이 모래일 수 있습니다.



아마 짐작컨대 이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떼지어 주님께로 몰려들었고 그들 중에는 병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파와 그리고 치유 안수에 주님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아주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이때 그 피곤한 말씀을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 해도 그 피로가 풀리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실을 자주 경험합니다.



여자들이 바가지를 자주 긁으면 남자들이 밖에서 돌게 됩니다. 집에 들어가 봤자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말 많은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사 준다 해도 입이 껄끄럽습니다. 그러나 내 분위기를 잘 이해하고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사 주면 보리밥이라도 꿀맛이 됩니다. 마음이 편하면 세상이 따뜻하고 음식도 맛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잘 영접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집에서 편히 쉬시고 내 가정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웃 나그네를 그렇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며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따뜻하고 편하게 모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복받는 길이요 또 잘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그네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23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예수를 영접하듯이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16 주일입니다.

  저는 얼마 전 주일 밤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밤 열시 반쯤 되었을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는 언제나 성당을 한 바퀴 돌며 문은 다 닫혔는지, 혹시 전등은 켜진 것이 없는지 확인을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 날 밤도 습관처럼 대문 앞으로 왔

더니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걸려 있는 대문을 열려고 철창사이로 손을 넣어 고리를 벗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리면서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꾀죄죄했고 잔뜩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횡설수설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에게 밤이 깊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지만, 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묻자, 상남동 어디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으니, 성당에서 자고 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무조건 돌려보낼 수도 없었고, 도대체 어떤 분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성당 안에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기도 곤란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일 교우들 앞에서 사랑하라고 말하는 저 자신이, 저렇게 술 취한 노인을 성당 밖으로 내쫓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서는 저분이 혹시 예수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가장 좋기는 할아버지가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떠나 주셨으면 했습니다만, 할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서 제1회합실로 모시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회합실에 모포 한 장을 깔아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날만 밝으면 떠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눕는 것을 보고 방에 들어와서 자리에 누웠지만 좀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미사를 지내려고 일어나서 가 보니 담요만 깔려 있고,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당에 있으면 참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만, 이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젊고 건장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용건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 청년은 집 나간 아내를 찾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돌아갈 여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묻자 강원도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서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청년이 혹시 예수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멀쩡한 차림을 하고 어디 가서 구걸을 하겠는가? 겉모습만 보면 그 누구도 도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신부를 찾아왔겠지.” 솔직히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가슴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와서 마지못해 여비를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돌려보낸 후에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 속았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입니다.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보니 사기도 참 많이 당했습니다. 한번은 시골 어느 본당에 있을 때에 찾아왔던 사람이 또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수법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그 사람은 성당이 다르니까 다른 신부려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상습적으로 신부들의 약점을 노리면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하고 얼마의 돈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밑에서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어줍니다. 사실 그 나그네들은 야훼 하느님이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를 융숭히 대접했던 아브라함은 그 보상을 받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임신하게 되어서 이사악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단순히 나그네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을 보는 바로 이런 눈이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깊게 따지고 보면, 눈의 차이가 아니라 가슴의 차이입니다. 가슴이 열려 있는 사람은 눈도 열려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열려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을 보듯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축복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가끔 스님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염불을 하고 곡식이나 돈을 얻어가곤 하였습니다. 이런 스님들을 일컬어서 탁발승이라고 말합니다. 수도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기에 생계 수단이란 다른 것이 없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어서, 때로는 밥도 못 먹고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때도 흔했습니다. 그런 시절인지라 탁발하시는 스님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마땅히 드릴 만한 것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으면 그냥 “죄송합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돌려보내면 되는데,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을 돌려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불교의 스님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스님을 그렇게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 스님이든 거지든, 주님을 대하듯이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도 그렇고 성서의 가르침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런 분들을 더욱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고 대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핑계로 탁발승들을 빈손으로 내쫓는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든, 창녀든, 나병 환자든, 쫓겨난 사람들이든, 모든 사람들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셨고, 그분의 받아들임 때문에 죄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새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따뜻한 영접 자체가 바로 새 삶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다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당시 제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만, 이는 예수께서 그들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가슴을 닫고 사는 그들이 예수의 받아들임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틀에 자신들을 끼워 맞추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율법이라는 틀로 모든 것을 저울질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틀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했던 것입니다. 마치 신자들이 예수 믿는다는 핑계로 탁발승들을 내쫓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만일에 이런저런 조건을 달아서 그 조건에 맞을 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실 때, 이런저런 조건을 다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를 사랑하셨고,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열고 예수의 그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분의 제자가 되어서 새 생명을 얻게됩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조건을 답니다.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느니, 내가 지금하고 있는 사업이 끝나면 성당에 가겠다느니, 지금 죄를 참 많이 짓고 있는데 어느 정도 그런 생활이 청산되면 성당에 가겠다느니 등등입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다 채운 후에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면, 아마도 죽을 때까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조건이 없듯이, 우리도 예수의 사랑을 조건 없이 지금 즉각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 삶은 시작될 것입니다. 성서에는 예수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예리고의 난쟁이 세관장 자캐오가 그렇고, 간음하다가 잡혀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죄녀가 그렇고,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그분의 발을 눈물로 씻었던 일곱 마귀 들렸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도덕하고 불경건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서 새 생명을 얻었던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받아서 새 생명을 누리듯이, 이제는 우리 자신이 따뜻한 가슴으로 조건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영접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가 예수를 영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자매는 모두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예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습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예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는 데 마음을 쓰고 있었지만,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대접하는 두 자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영접해야 할 예수는 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바로 내 남편, 내 아내, 자식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이웃과 형제들의 가슴속에, 그분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탁발 스님의 모습으로, 거지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옹졸한 가슴으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하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들의 가슴속에 살아 계시는 주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늘 닫힌 가슴으로 살아가기에 그에게는 이웃도 없고 하느님도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열린 가슴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시다. 여기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잘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4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세상 사건을 스테레오로 감상하기

                                                        이기정 신부



오늘 성서를 읽으면서 문득 연상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문 앞에 무릎 꿇고 밤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어떤 가정의 엄마의 모습입니다.



새 삶을 찾은 기도하는 가족



처녀 때 혼자 성세를 받고, 결혼할 때만 해도 종교가 서로 다른 것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 자신이 있었던 그녀였습니다. 그거나 시집의 비난과 남편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성당을 도저히 다닐 수 없게 되자, 우선 가정을 살리자는 마음으로 성당 다니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성당 근처를 지나거나 하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 둘이 생겼고, 시어른들이 한달 사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집안에는 무심하고, 밖에서는 자만 속에 지내다가, 직원들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아 회사를 넘기고, 집도 단칸 전세방으로 가는 처지가 됐습니다. 매일 술로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이, 어느 날밤 술에 만취해 들어와, 옷도 벗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그런 남편을 측은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는 잊었던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무릎 꿇고 앉아 창 밖 환하게 달무리 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한밤중 갈증으로 잠이 갠 남편의 몽롱한 눈에 부인의 모습이 띄었습니다. 심혈을 다해 바치는 그녀의 기도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해진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생전 꿇어보지 않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맏아들이 절로 눈을 떴을 때, 아빠와 엄마의 신기한 모습을 보고, 자신도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느새 동생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잠시 후 모두는 말없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홀렸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아무 말이 필요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힘찬 열기가 한 몸이 된 이들의 뼈 속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인생의 진가는 세상의 물질적 역학이 돌려내는 흥망성쇠에, 개인의 능력을 맞물려 돌리는 것이라고 인생철학을 늘 논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밤 남편은 초자연의 신비를 호흡하며, 세상과 맞물릴 줄 아는 삶이, 참된 인생이라고 깨달은 순간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 후 인간 내면의 신비스런 점들을 수없이 깨달았습니다. 눈감고 잠을 푹 자는 시간이 있어야, 다음날 눈을 뜨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세계로부터 눈을 감고 영혼 깊숙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있어야 눈을 뜨고 사물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인생이 고작 세상의 사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님을 다각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말은, 분도수도회의 생활 모토입니다. 이 말은 짧지만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일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되며, 수도자라 해서 기도만 하며 살고, 사회인이라 해서 일만 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일하며 사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생활도 기도하는 정신 속에서 이루어져야 참된 인생의 의미를 피워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노동이 합일되는 올바른 삶



오늘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는 대조적인 인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방법에서 마르타는 분주하게 일하고, 마리아는 차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두 자매의 태도가 일심동체라면 좋았을 겁니다. 만일 언니가, 내가 이렇게 일하니까, 동생은 예수님의 이야기만 재미있게 들으면 돼" 했으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하십시오"라고 불평을 했으므로 예수님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다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꾸짖으십니다.



일하는 것도 주님을 모시는 한 몫이며, 말씀을 듣는 것도 한 몫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타의 집에 들리신 것도 일만을 시키러 가신 것이 아니고, 말씀만을 하시러 간 것도 아닙니다. 둘 다입니다. 이 둘은, 언니와 동생이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모실 각기의 몫이었습니다. 둘 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거나, 둘 다 일만하고 있으면 주님을 제대로 모시는 게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주님 모시듯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위해서 일만 할 것인가, 인생을 위해서 기도만 할 것인가 생각할 때, 둘은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곳이 곧 가톨릭 종교입니다. 흑자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기도만 하고 사는 사람들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한 인간으로서 복음적 삶을 실천하려고 상활의 규칙을 정하고, 공동체로 사는 것입니다.



일반신자들의 가정이라는 범위가, 곧 수도자들의 공동체와 같은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병원에서, 학교에서, 성당에서, 사회복지 기관에서, 농장에서, 교회기구의 사무실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도원 내부에서만도 빨래, 부엌일, 청소, 교회의 물품제작 등으로 다양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도 사람이니 만큼 일을 해서 먹을 것을 마련하며 삽니다. 성직자나 수도자 중에도 음악가, 교수, 박사, 시인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일을 해서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받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기도가 첫째입니다.



우리는 두 발이 있어서 걸을 때,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두 눈이 있어서 거리감각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귀가 둘이 있어서 소리의 방향과 음향을 스테레오로 듣습니다. 두 팔이 있어서 균형을 맞추며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있다는 양면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영만을 생각하거나, 육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사물을 사물 그대로만 봅니다. 시간을 시간으로만 보기 때문에 현세만 봅니다. 인간의 노동도 사랑도 생활도 한쪽 눈, 한쪽 귀로만 보고 배울 뿐입니다. 그리고 인생도 유한한 상태로 보며, 현상적 가치로만 봅니다. 그들은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노래도 모노로 듣고, 자연의 노래도 그렇게 듣습니다. 아직 탈바꿈을 못한 자연인 그대로라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 행복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매사를 2차원적으로 볼 줄 압니다. 즉 현세와 내세적으로 또는 영과 육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성장하는 자녀들 모습이나, 부부가 서로의 모습을 볼 때에 그렇게 볼 줄 압니다. 이런 시각이 신앙인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늘과 땅을 보며, 볼 줄도 알고 쓸 줄도 압니다. 이웃의 의미를 알기에 도움을 받을 줄 알고, 베풀 줄도 압니다. 자신의 의미를 영육의 조건과 현세와 내세의 뜻으로 파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인은 세상의 사건들을 스테레오로 감상할 줄 압니다. 사회생활을 입체감과 거리감을 느끼며 볼 수 있습니다. 양팔을 흔들며 인생을 균형있게 올 잡아 걸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줄 알고 일할 줄 아는 세상에서 빼어난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행복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우리 일단 오늘 성당에 모였으니, 함께 축배를 올리는 게 어떨지요! 











25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마르타와 마리아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에 임하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며,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장 큰 두 계명을 들었습니다. 루가 사가는 이 두 계명을 실제적으로 실행하여야 함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두 계명을 실행하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과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신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을 가르치고 있는 오늘 복음을 우리는 주의 깊게 묵상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들였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10장부터 19장까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 중에 있었던 일들을 전해주고 있는 내용이므로 성서 저자는 예수님의 일행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어떤 마을이란 곧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뱃사이다 지방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의 마리아와 마르타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 집에 초대되시었는데, 마르타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여성 명사로서 아마도 이 집은 마르타라는 여인의 집인 듯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나그네나 여행하는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는데, 이는 오늘 제 1 독서에서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여 축복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며 특히 그들 조상이 유목민이었고,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오랜 순례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복음에서 ‘모셔들이다’라는 말은 친교의 상징이며, 환영과 기쁨을 담고 있는 용어이므로, 두 여인이 예수님을 모셔들인 것은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적 차원에서 맞이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사랑으로 맞이한 두 자매는 서로 상이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즉 두 자매가 다 같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지만, 언니인 마르타는 접대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고,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서로 상이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발치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모습은 이스라엘 관습에 따르면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취하는 태도이며, 마르타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다는 마르타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접대하는 일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상식적인 시각에서 보면 마르타의 불편은 타당한 듯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만을 털어놓는 마르타에게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 마르타 하고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이중호격의 사용은 당시 이스라엘 어법에 따르면 강조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그 분주함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다른 관심을 갖지 못하는 마르타의 사정을 동정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걱정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갖는, 혹은 세상일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바른 관심을 갖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용어로서, 세상사의 분주함 때문에 신앙과 영성적인 기도에 소홀함을 지적하는 영성적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맡은 활동과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의 삶이 중요하며 활동과 분주함 때문에 기도생활 즉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복음과 함께 깨달음의 차원에서 실천의 차원으로 변화될 것을 말하고, 활동의 차원에서 명상의 차원으로 변화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와 활동이 항상 같이 되어져야 함을 깨우쳐주는 구체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에서 나타난 마르타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생활의 두드러진 특성 중에 하나는 매우 분주하며 바쁘다는 사실입니다. 해야할 일, 이행하고 실현해야 할 일이 머리속에 늘 남아 있고, 늘 바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도 다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한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생활 역시 우리들 이상으로 분주하셨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는 당신을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는 마르타와 세상사에 분주한 우리들을 책망하거나 마르타와 우리들의 일들을 무가치하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 분주함 때문에 하느님께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처지를 동정하시며 기도와 명상의 중요성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가족을 떠나거나, 작업을 폭리하고,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일상사에 분산된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는 일이며, 차라리 자기가 행하는 일들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것, 내 안에 하느님이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비우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는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신앙의 경지에서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할 때나 일할 때나, 한가할 때나 분주할 때나 자신가 타인에게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만남과 일들은 온통 마리아가 앉은 주님의 발치인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활동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명상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아멘





26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

                                                             김정진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육신과 영혼의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언니 마르타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일했습니다만 그것은 세속 일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세속 일이나 육신일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영혼의 일은 더 중요합니다. 동생 마리아는 영혼의 일에 대해서 마음을 쓰며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웠습니다. <마르타 당신은 너무나 많은 일로 걱정을 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데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오. 마리아는 참으로 좋은 몫을 택했소>(루가 10,42)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가정을 가진 여러분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여러 가지 육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해야 되겠지요. 할 수만 있으면 가정을 부유케 하여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데 조금도 불안이나 지장을 초래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딴데 있습니다. 육신 일로 인해서 또는 재물에만 정신을 씀으로 말미암아 더 중요한 영신생활을, 하느님의 공경을 게으르게 하는데 맹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재물도 모으고 해서 하느님과 교회에도 바치고 가난한 자에게 애긍 희사도 하고 적선도 하여 좋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서 한편 더욱 주일날도 잘 지키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얼마나 흐뭇하며 좋은 일이겠습니까.



이렇게들 하지 않으니 탈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육신 일에만 골몰한다는 것은 너무나 잘못되는 일입니다. 어머니나 자녀들은 교회에 나오는데 유독 아버지만이 결석하는 집안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딱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당신은 세상 일에만 정신을 쓰고 있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오. 당신의 집안 사람은 참 좋은 몫을 택했으므로 훗날 하느님께 후한 상을 받을 것이오. 그 때에 당신은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서적의 28면에 한 소년이 첫영성체를 할 때부터 아버지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한지 8년 후 비로소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뿐이오>라는 예수님의 명언을 잊지 맙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마태 16,26)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악한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으로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침과 저녁에 간단한 기도라도 드릴 줄 알고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실천하고 주일에 미사에 참여하는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이 사람은 참 좋은 몫을 택하였소>라는 예수님의 칭찬의 말씀을 듣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동생 마리아를 본받아 우리는 기도에 더 열중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개인기도나 가족 전체가 바치는 기도나 그리고 공적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저 세상에 가서 온전히 하느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는 습성을 버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고 또 그보다 더 치명적인 손해도 없습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습성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길거나 복잡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간단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마리아 요셉,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주여 나의 잘못을 다 용서하소서. 저는 당신께만 의탁하나이다. 이같은 간단한 기도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같은 자세를 항상 취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세속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회사, 상점이나 공장, 혹은 기타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또 주부들은 집안을 돌보고 식구들이 적절히 살아가고 먹기 위하여 시장을 보고 식탁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면서도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마르타는 마리아가 행하는 일보다 덜 중요한 것에 대하여 조바심을 갖고 야단스럽게 떠들어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의 생활과 생산적 활동을 완전히 겸비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 이상적이고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로 굳게 다짐합시다. 아멘.











27         연중 제16주일   루가 10,38-42 (다) 가장 요긴한 것은 하나

                                                         한의수 신부



“눈은 위보다 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초대를 받아서 가 볼 경우 입으로 먹어서라기보다는 눈으로 만족을 취하고, 잘 차렸다고 보이기 위하여 애썼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음식이란 아무리 맛이 좋더라도 자기 양 이상은 더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도 저녁에 텔레비젼을 구경을 합니다. 그리고 별로 만족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는 아무리 좋은 경치나 구경도 귀찮고 괴롭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지만 마음이 동의하지 않으면 가치를 잃어버리고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조차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라고 하는 두 처녀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존귀하신 분을 모처럼 초대하는 것이기에 두 처녀는 성심 성의껏 예수님을 뫼시고자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잘 뫼시겠다는 마음은 둘 다 동일하나 예수님을 뫼시는 방법, 태도는 서로 상이하게 나타납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을 뫼시고자 집안을 치우며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혼자서 허둥지둥 준비하던 마르타는 참다못해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마리아더러 저를 도와주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께서는 “마르타야! 너는 너무나도 많은 일에 걱정을 하고 마음을 쓰는데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은 하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아를 나무라지 말라고 타이르십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어느 학생이 서울에 이는 일류 대학을 지망합니다. 그에게는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습니다. 부모님도 다 계시고 가정 환경이 좋아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튼튼합니다. 크나큰 걱정은 어떻게 해서 입학시험을 통과하느냐? 주야로 그 준비 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입학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력뿐입니다.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밤을 새웠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학교에서 배운 실력을 평소에 착실히 준비해 왔느냐 뿐입니다.

입학시험을 보러갈 때 아무리 엿이나 찰떡을 잔뜩 먹고 가봐야 실력 없으면 실패의 쓴맛을 거듭할 뿐입니다.



영세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가운데 냉담을 하거나 또는 신자로서의 수계 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교리지식이 부족하든가, 생활난에 허덕인다든가, 게으름과 태만이든가, 본당 신부가 보기 싫다든가,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믿음이 약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신앙을 튼튼하고 성실하게 키워나가는 방법 중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 하나,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생활! 그것이 참다운 신앙생활이요 건전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그분과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나 미사에 참여할 땐 잘 들리고, 복잡한 가정생활을 할 땐 잘 안들리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농번기라 바쁘고 분주할 땐 말씀을 안해 주시고, 한가로운 휴일에만 골라서 해주시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길을 가든지 일을 하든지 즐겁게 놀든지, 어느 때든지 듣고자 하는 마음, 듣고자 하는 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입을 가졌을 때는 항상 들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줄 아는 귀와 말을 할 줄 아는 입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세를 받은 다음부터 꾸준한 노력과 훈련을 쌓아서 자신이 스스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귀를 가졌으되 듣지 못하고 입을 가졌으되 말을 못하는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하느님 대전에 가치없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생활이 아무리 바쁘고 어렵더라도, 하느님과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28         연중 제16주일   루가 10, 38-42 (다)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


 묵상 : 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오로지 기도생활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엔 반대로 오로지 활동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것 갈다. 기도 없는 활동, 그것은 자기 과시로 흐르기 마련이고,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이다.



  귀나 좀 빌립시다



  본당신부님들이 가정방문을 하다보면, 함께 기도를 하고는 교적을 정리해야 한다. “큰아들은 지금 군에 가 있고, 둘째 아들은 지금 객지에서 대학 다니고, 막내는 지금 재수하고 있습니다." 말씨가 이곳 사람 같지는 않은데 고향은 어디며, 집안은 언제부터 교회에 나왔는지 등등...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주인 아줌마는 차(茶)나 음식준비에 온통 정신이 팔려, 물어보는 말에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거나, 번번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짜증이날 때가 있다. 제발 귀나 좀 빌려주었으면 하는 때가 많다.



  오늘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대조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 듣기에 전념하였다. 혼자 음식준비에 정신 없이 동동거리던 언니 마르타는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주기를 예수님께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에게 필요한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오셔서 반갑고 위하는 마음이야, 마르타나 마리아나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을 더욱 기쁘게 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였음을 알 수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바쁘다, 바빠 병'을 치료해야한다

  

  우리들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만연된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 바로 ‘알차게 사는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리고 ‘요즘 바빠서 죽을 지경이다'는 푸념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다, 바쁘게 정신 없이 사는 사람 치고 자신이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며, 음미된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듣는다. 머리가 나빠서라기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만 진행하다보면 항상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바쁘게 해치우는 일은 항상 마무리가 깔끔하게 제대로 되지 않고, 불량품이 많게 마련이다.  국제 기능올림픽을 제패하면서도 불량품을 많이 내는 기업풍토는, 바로 바쁘게 대충 해치우는 행동관습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경부고속도로를 닦으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빠른 완공을 했다. 그러나 그 고속도로를 보수하기 위해 처음 시공비의 몇 배가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사는 길은 없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너무 단순히 기도와 활동의 양자택일로 대비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 침묵 중에 묵상하는 시간이 없이, 그 말씀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가끔 신자들이 와서 “신부님 다시는 그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을 겁니다. 무조건 명령만 하고, 얼마나 기분 나쁘게 무시하는 지 모릅니다"하며, 함께 일한 간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때가 종종 있다. 함께 본당 활동을 하면서 그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명령만 하는 신심단체 간부들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이 없는 ‘잘난' 사람들일 때가 많다.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성령의 은총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성령의 은총은 그 마음을 부서지고 낮춰진 마음이 되게 해주신다. 은총으로 부서지고 낮춰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명령하는 자세를 취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 없다는데 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그 마음에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세속적으로 스스로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봉사를 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는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세속적인 정신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군림하는 자세로 활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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