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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6월 29일 (일)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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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4주일



   12. 강길웅 신부(다)/26

        13. 이순성 신부(다)/28                14. 김정진 신부(다)/30              



12        연중 제14주일   루가 10,1-12.17-20 (다) 평화를 빌어 주자

                                                           강길웅 신부



평화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아니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평화가 깨졌으며 깨진 평화는 이후로 세상은 다시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성현들이 있었고 또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평화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더 요원해졌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야훼께서는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셨을 때 그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인류에게 평화를 젖먹여 주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이 장차 찾아가실 여러 마을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그러면서 당부하시기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선물 중의 하나는 바로 평화입니다. 그것도 썩지 않는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얻어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도박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는 일종의 도박환자였습니다. 화투짝을 손에서 놓으면 늘 불안했고 곧 돈을 딸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아무 것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딸 것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습니다. 이제는 건강도, 가정도, 그리고 사업마저도 병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화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뜻대로 안되었습니다.



부인은 돈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눈물로 호소를 해 보기도 했고 이혼을 하자고 협박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박 자체가 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제불능의 친구가 어느 성령 세미나에 참석해서는 자기 병을 고쳤습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손에서 화투짝을 떼면 생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손에 화투가 있어야 살맛을 느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헛된 평화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찾았던 것입니다. 건강도 찾았고 일이 의욕도 찾았으며 또 가정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평화를 가져왔고 예수님이 평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정말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아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하늘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엔 예수님이 오심으로 해서 평화가 비로소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에 예수님이 들어오심으로 해서 세상은 평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분의 평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하고 또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 자신이 새로운 예루살렘의 시민이기 때문에 평화의 물결이 우리를 통해 이웃으로 넘쳐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순(?)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신데 과연 그분의 생애는 평화로우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극심한 불안을 체험하셨습니다. 태어나셨을 때도 그랬고 전도생활 3년은 그야말로 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 이게 뭐냐?



평화 자체이셨던 분이었지만 예수님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니에서는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는 표현까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당신이 세상의 불안을 혼자서 다 뒤집어쓰셨습니다. 세상의 공포와 불안을 그분이 걷어 가셨기 때문에 세상은 이제 그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참 평화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고통받고 눈물 흘리며 가슴 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라고 하셨습니다. 묘하게도 평화는 평화를 위해 땀을 흘릴 때 그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들은 돈이나 식량이나 옷 등 물건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거짓 평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13       연중 제14주일   루가 10,1-12.17-20 (다) 댁에 평화를 빕니다

                                                          이순성 신부



사람이면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잘 나거나 못난 사람들, 철부지 어린아이들까지도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평화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또 어떤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진정 지금까지 우리가 원했던 평화와 예수께서 오늘 말씀하신 평화의 관념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시기에 도달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평화의 뜻을 간단히 살펴본 후 우리가 원하는 펴와,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구약성서의 전통적인 평화관념은 첫째조건으로 하느님의 선물로서 완전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상태란 곧 우리가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실존의 유복(裕福)을 의미하며, 자연, 자기자신, 하느님의 三者가 공동으로 화합하여 삶을 사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조건으로 구약성서의 평화관념은 인간의 구원과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영원한 삶을 말하며 정의의 실현이란 온갖 악이 제거되고 오직 선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서의 평화관념 즉 평화의 원칙적인 관념을 염두에 두고서 지금까지 우리가 원했던 평화와 예수의 평화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화하면 전쟁이 없는 안락하고 온화한 생활 상태로 알고 있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가 없게 된지 어언 25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의 평화관념은 사실상 많이도 변질되었습니다.



전쟁 당시만 해도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어서 평화가 왔으면 하던 시절의 평화관념은 어느덧 우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돈만 있으면 평화스럽지 한다던가, 그저 높은 자리에만 앉으면 평화라는 것은 바랄 필요 없지 하는가 하면 뭐니뭐니해도 학력이 있어야지, 학력이 없으면 돈도, 권력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법이야 하는 사람들로 이 사회는 넘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뿐입니까? 좀더 극단에 가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별 것 아니야 정력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평소에 원했건 일 성취시키면 그것이 곧 평화야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무튼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재력 혹은 권력은 평화, 또는 학력 혹은 정력은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관념이 이와 같이 변질된 데는 물론 그만한 원인들이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즉시 손꼽을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은 사람들이 생의 목적을 물질에 두고 물질로부터 행복과 삶의 보람을 얻으려 하는 소치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세기의 물질문명은 과거 지구상에서 그 어느 시대에 이룩했던 물질문명보다 수백배, 수천배 월등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발명되었던 온갖 물질적인 것들은 이제 와서 사람들의 전신상태 마저 지배하는 괴물, 악마로 둔갑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의 다수 획득을 위해 재력이 어떻고, 권력이 어떻고, 학력이 어떻고, 정력이 어떻다고 왈가왈부하게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 평화의 최종 목표가 물질인 양 그 물질을 얻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을 확보했을 땐 평화를 얻은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과연 물질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약속해 주고 있습니까? 물질을 풍성하게 소유한 사람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산더미 같은 물질을 획득한 부자가 평화스럽게 살아보자고 다짐했을 때 세상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극적인 예화를 루가복음 12장 16-21절에서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를 마치 물질의 선물과 같이 생각하게 되는 데서, 즉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이 나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물질을 얻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예로 들면 옛 속담에 “금관자 서슬에 큰기침한다”는 말이 있듯이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남용한 물질의 확보에 현안이 되고 그러다가 물질에 눈이 어두어진 권력자는 정의를 무시한 폭력을 휘두르다가 스스로의 구원을 포기하고 영원한 삶을 저버리게 되기 때문에 역시 권력 자체보다도 권력자의 어두운 마음을 우리는 질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학력이나 정력의 경우에도 같이 해당되고 있습니다. 결국 평화관념에 대한 변질 여부는 결코 여타의 원인이라기 보다도 오직 한가지 바로 사람들의 간사한 마음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왔던 우리들의 평화관념과 비교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잘못된 평화관념을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평화관념을 갖고 그 평화관념에 의한 진정한 평화를 얻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평화에 대하여 루가 복음사가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고 2장 29절에서 기록하고 있으며 정력에 의해 평화를 얻고자 했던 행실 나쁜 여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때 구원과 함께 주시는 선물이라고(7,50) 기록했고 저녁으로 평화를 얻고자 했던 가련한 병자 부인이 재산을 다 버린 후 마지막으로 예수께로부터 평화를 기대했을 때 틀림없이 생명과 함께 역시 평화를 선물로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8,48)



아무튼 루가 복음사가는 평화란 곧 예수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24,36), 또한 그 평화는 오직 좋은 일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기는 평화는 구약성서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평화관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우리 생활에 있어서 가져야 할 평화관념과 그 평화의 실현을 위해 취해야 할 태도가 명백해 짐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즉 평화는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서 얻을 수 있으며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물질을 목적으로 한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의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을 포기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도 얼마든지 예수의 평화를 얻는 데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복음으로 간직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서 다같이 평화를 얻도록 한다면,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그러한 것들을 합당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하트마 간디가 말하는 평화의 조건, “한분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정녕 예수의 평화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14         연중 제14주일  루가 10,1-12.17-20 (다) 그리스도의 평화

                                                  김정진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 신자 가정에 깃들어 길이길이 머물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진실한 평화는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며 값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류를 심판하고 책벌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용서와 자비와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찾고 신봉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멀리하며 양심의 생활을 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며 언제나 불안과 초조와 혼미 속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여,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내셨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평안할 수 없사옵나이다”(「고백록」 1장)하고 독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 바오로가 사도가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라고 말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평화이시며 평화를 주시려 오셨고 또한 평화를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 두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사 중 영성체 전 기도문 중에서 “주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누십시오” “진심으로 축복합니다”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화목과 평화는 신앙생활의 특징이며 신자들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주여 우리 죄를 보지 마시고 오직 성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성교회로 하여금 화목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72인의 제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시면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 말하자면 희소식을 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라고까지 하십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시며 평화는 누구에게나 쉽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십니다.



참다운 평화는 악이 없는 곳에, 죄의 용서를 받은 곳에 깃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류가 화해하고 가까워지고 친밀할 적에 진실한 평화는 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서로 화목하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할 적에 평화의 천사는 찾아오는 것이고 기도하는 가정, 나을 동정하며 도울 줄 아는 가정, 양심을 따라 사는 가정에 진정한 평화는 머물게 마련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 역시 오늘 제2독서에서 당시의 신자들에게 참다운 평화를 빌어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대로 살며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이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성 바오로 사도의 여러 편지의 모두(冒頭)를 유심히 보십시오. 어느 편지에든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빌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화와 은총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소망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오늘도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세계 방방곡곡에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평화와 은총의 선물을 받은 이는 모름지기 이것을 또한 이웃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줌으로써, 죄악을 피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내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듯이 우리 이웃에게 대해서 관심을 갖고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이 세상의 궁핍을 모르고 노래부르며 즐거워하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평화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싹트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거절과 능욕과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는 가치가 있는 그런 평화입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은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축일의 외부행사의 주일입니다.



김 신부님은 하느님의 진리와 신앙을 이 땅에 심으려고 얼마나 많은 고통과 학대와 박해를 받았습니까. 그는 짧은 인생을 통하여 또한 얼마나 많은 업적과 공적을 남겨 주었는지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의 생애를 눈물 없이 읽어나갈 수 없으며 그의 하느님께 향한 일편단심은 우리의 심중에 깊이 사무치는 바가 있고 그의 영웅적인 순교정신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참다운 평화와 기쁨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되리니 당신들도 영복을 얻고자 하거든 천주를 공경하시오” 하는 마지막 설교를 남기고 안드레아 김 신부님은 태연한 모습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실한 평화를 몸소 느꼈고 이웃과 동포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은총을 푸짐하게 베풀어준 사실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고 그분의 후손답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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