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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8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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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4주일

20. 홍금표 신부 (다) / 36

21. 김영식 신부 (다) / 38       22. 김정진 신부 (다) / 40

23. 서경윤 신부 (다) / 42       24. 강영구 신부 (다) / 44

25. 비싼 것을 (다) / 47         26. 강길웅 신부 (다) / 49

27. 교구주보 (다) / 51           28. 장영희 교수 (다) / 53





20.        대림 제4주일   <루가 1,39-45> (다) 신앙에 대한 지지와 격려

                                                    홍금표 신부




학습 이론 가운데 조작적 조건 형성이란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지렛대를 밟으면 문이 열리고, 먹이를 먹을 수 있게 장치를 한 상자 안에 고양이를 넣으면 처음에는 고양이가 지렛대를 잘 누르지 않지만, 우연히 지렛대를 밟을 때, 문이 열리고 먹이고 제공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점차 지렛대를 누르는 횟수가 짧아지게 되고, 필요에 따라 지렛대를 누르게 된다는 것으로, 학습자가 환경을 조작한다는 의미에서 조작적 조건 형성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도 그 행동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따를 때, 그 행동이 강화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교육현장이나 치료 현장에서 이 이론을 원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보상에는 칭찬이나 격려 인정 등의 긍정적 강화물과 처벌이나 회피와 같은 부정적 강화물이 주어질 수 있는데, 교육적 측면에서는 긍정적 강화물이 더 효과적이고, 부정적 강화물은 거의 효과가 번다고 한다는 점이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다. 성모님이 왜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었을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흔들리는 신앙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이유는,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자, 마리아는 내가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때 천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증거로써 보여준 것이, 바로 친척 엘리사벳의 수태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랗니다」란 신앙의 가장 위대한 응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모님은 위대한 신앙인 이기에 앞서 연약한 한 인간이었기에, 의심과 불안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잘한 일일까? 그리고 천사의 말, 처녀가 아이를 낳고, 내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약혼자 요셉이 믿어줄 것인가? 등등을 반문하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아마도 이때 성모님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천사의 말은, 바로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를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는 천사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모님이 나자렛에서 유다 산골의 한 동네, 에인카림이라고 알려진 곳, 오늘날 버스로도 세시간이나 걸리는 머나먼 거리를, 가련한 여인의 몸으로 혼자 힘겹게 여행하게 된 것도, 여행의 어려움보다는 천사의 말을 확인하고픈 강렬한 욕망과 흔들리는 신앙에 대한 증거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성모님은 이 엘리사벳 방문 사건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란 성모님의 신앙에 대한 엘리사벳의 찬사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듣고 마리아는 자신의 순명이 옳았음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진정 복된 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순명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 복음에 이어 유명한 감사시, 마리아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도 엘리사벳의 이 말씀 때문이라고 증언(루가 1,46)하고 있는 점만 보더라도, 엘리사벳의 이 말씀이 성모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모님의 흔들리는 신앙, 증거를 찾고자 하는 신앙을 보면서, 부족하고 나약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에 대한 위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에 찬양을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같이 묵상해 보고 싶은 점은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 엘리사벳 성녀의 모습이다.

  

구세주의 탄생 과정의 중심점은 성모님임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첫 출발점에서 성모님과 함께 엘리사벳의 오늘의 모습도 분명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진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아무런 격려와 위로를 받지 못했다면, 성모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주고 격려해 줄 때만이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와 확신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결론은 분명 해진다. 우리가 비록 성모님처럼 위대한 신앙의 응답을 할 수 없다면, 우리 주위에서 하느님의 뜻을 위해 또 다른 모습의 성모님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진정한 칭찬이나 격려를 아끼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한 삶도 엘리사벳의 삶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 우리 삶의 현장에 예수님의 탄생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격려와 박수를 보내면서 성탄 전야를 맞이하자 !

 21.           대림 제4주일(다) 루가 1,39-45 확신과 희망으로

                                             김영식 신부



경애하올 교우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신앙생활에 매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네메셰기 신부님이 쓰신 “눈꽃”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눈 속에 하얗게 피어난 눈꽃을 본 감상을 적은 신부님의 소박한 글을 읽고 저는 대단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네메셰기 신부님의 고향인 항가리는 3월이 되어도 눈이 수북하게 쌓이는 매우 추운 지방이랍니다. 온 대지가 하얗게 눈에 쌓이고 푸른 싹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벌판에서 오직 이 눈꽃만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몇 개의 파란 잎과 함께 흰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죽은 듯한 대자연 속에 이 꽃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꽃은 4, 5월이 와서 눈이 녹아버리고 온갖 식물들이 싹을 틔우고 푸르러지기 시작할 때면 슬며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땅 속에 뿌리만 남겨둔 채 다음 봄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꽃은 죽은 듯한 대지에도 살아남은 온갖 생명들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는 슬며시 땅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결혼을 하지 않고도 천주 성령의 힘으로 구세주 예수를 낳으실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서 즉시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옵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친척 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비추심으로써 마리아가 아기 구세주를 잉태하신 것을 알고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인사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 바로 나도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사람, 주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실 날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대림절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분주하고 왁자지껄하게 성탄 축일을 준비하지 말고 조용히,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가오는 내년 한해 동안 뿐 아니라 우리들의 일생 전체가 주님의 뜻대로 착실한 신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결심합시다. 즉 주님을 마음에 모신 신자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착실한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세상이 너무 각박해서 도대체 안된다고들 합니다. 양심적으로 살기가 무척 괴로운 일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는 신앙인으로 생활하긴 틀렸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너무 양심이 무디어지고 마비되어서 그렇다고들 합니다. 사실 세상은 너무 비양심적인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어느 시장에 불이 났을 때의 일입니다. 점포 주인들이 타다 남은 물건들을 끄집어내느라고 수라장을 이루고 있을 때 여기 저기서 “도둑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한푼이라도 더 건지려고 불 속에 뛰어드는 판국에 도와주기는커녕 도둑질까지 하려는 세상이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또 서울의 어떤 고층 캬바레에서 불이 났을 때 종업원들이 손님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려는 생각은 않고 돈부터 먼저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다른 통로는 막고 한 통로만 지키고 서서 기다리다 결국은 돈도 못 받고 많은 인명피해만 내었다고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너무도 기막힌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분들도 “양심적으로 살아봐야 나만 고생이지 무슨 소용이 있겠나”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자들까지 실망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남의 눈에 꼬추가루를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더욱더 황폐하고 문란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가공한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되지 내 아들의 세대하고는 별 볼일 없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사악하고 죄 많은 세상, 그야말로 재물과 일신의 영달에만 눈이 어두운 이 세상에 희망을 알려주는 눈꽃이 됩시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눈꽃이 됩시다. 얼어붙은 눈까지 뚫고 나올 수 있는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이 어려운 세상살이를 주님의 사랑의 계명으로 살아나가는 눈꽃들인 우리 신자들의 최후에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삶이 선물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남은 며칠 동안의 대림기간을 이 어려운 시대를 더욱 굳세게, 신앙으로, 남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나가도록 다짐합시다.

매해, 매달, 매일 이와 같은 결심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나가도록 합시다.

22.         대림 제4주일(다) 루가 1,39-45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과 성탄

                                                    김정진 신부



신자여러분! 오늘은 벌써 대림제4주일로서 성탄절을 한 주일 안에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신 날이 문 앞에 당도하였으니 우리는 그 동안의 생활과 자신을 반성하여 내 마음에 구세주를 모실 채비가 다 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 행사도 좋고 선물과 카드교환도 좋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참회와 속죄의 정신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불우이웃돕기 운동에 참여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였습니까. 이와 같은 생활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성탄절은 무의미한 것이요, 천만번 예수님이 내려오신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등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의 흐뭇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신의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적에 엘리사벳의 태중의 세례자 성 요한은 하도 기뻐서 뛰놀았다고 합니다. 예수탄생의 임박은 엘리사벳 한가족의 기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만 백성이 즐거워할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합당한 마음으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한다면 태중의 성요한의 기쁨에 못지 않게 우리 마음은 축복과 희망, 평화와 행복감에 잔뜩 젖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절을 며칠 앞둔 오늘, 우리는 성실과 열성을 다하여 주님을 맞이할 준비와 차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방문이 이처럼 커다란 기쁨의 충격을 안겨주었다면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찾아주시고 우리를 방문하시는 날이야 얼마나 경탄스럽고 축하해야 할 축제일이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뭇남녀들이 날뛰며 밤새는 것도 아랑곳없이 흥청대며 광란하고 있습니다. 성탄날 밤은 그저 축하연이나 외적으로 떠들썩하며 지내는 그런 축제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탄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한 밤에 고요히 내려오십니다. 그처럼 시끄럽고 야단법석하는 가운데는 오실 리가 만무입니다. 성모마리아와 같이 한적한 마을에서 조용히 기도에 전념하는 데 예수님은 잉태되고 고요한 한밤중에 적막한 말구유에 예수 아기는 탄생하십니다.

예수님은 왕궁도 아닌 외양간에서 외로이 가난하게 탄생하셨다가 외로이 쓸쓸하게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외롭게도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생애에는 가난이 철철 흘렀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걸음을 재촉하여> 엘리사벳을 찾아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마리아의 행동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하느님의 음성을 따르는 것을 게으르게 해서는 안될 것이고 억지로 마지못해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오롯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이는 어려운 일도 가쁜 마음으로 또한 관대한 심정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방문의 길은 보통 여행이 아니었으나 하느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즈가리야의 집에 도착하여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자 이에 엘리사벳은 깊이 감동하여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곧 탄생되실 분은 세상에서 가장 복되신 아기이십니다. 이러한 분을 잉태한 마리아는 모든 여인들 중에서 복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즉 마리아의 모성은 곧 마리아의 위대한 점이며 우리 신자들이 마리아를 공경해 드리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았지만 자기가 마리아께 비해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가를 알며 겸허하게도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며 정중히 인사를 차렸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이 어린 소녀를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소녀의 복중에 어떤 아기가 계신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성모 마리아께 공경을 드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과 능력을 굳게 믿으셨다는 이유로 마리아는 개인적으로도 위대하다는 점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불신에 비해 마리아의 믿음은 뚜렷이 빛을 발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에 답하기를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신 것은 마리아의 위대한 신앙의 표시인 것입니다. 이는 명백하게 알려진 하느님의 뜻에 순수하고 솔직한 동의를 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자신의 뜻이란 추호도 개입치 않은 오직 주님의 뜻만을 추구한 비상한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성모 마리아께 대한 공경의 까닭을 명백히 깨달은 이상, 앞으로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더 두텁게 함으로써 그에게서 탄생하실 예수님을 더욱 기꺼이 반기며 우리 마음과 가정과 사회에 빨리 오시도록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아멘.



23.         대림 제4주일(다) 루가 1,39-45 정녕 복된 자는 과연 누구인가

                                                          서경윤 신부



청첩장을 든 채 착잡한 심정이 되어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자녀가 결혼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유난히 의식하게 되는 것은 역시 계절도 계절이려니와 나이에 대해 보다 민감해진 탓인가 합니다. 어차피 나는 사위 볼 팔자는 못되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텐데, 그 친구의 사윗감이 어떤 인물인지 또 그 친구가 어떤 장인이 될지도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어떤 장인이 될지도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 사람을 사윗감으로 결정하고 결혼식을 치르게 된 과정을 내 기준에 준해서 짐작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그 사람의 됨됨이를 봐야겠지요. 어떻게 생겼으며 체격이나 건강상태는 어떤지, 경제적 능력은 어느 정도이며 성격은 어떠하고 무엇보다 자기 딸을 얼마나 사랑할지 가늠해가며 확신이 생기면 사윗감으로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윗감으로 결정되고 나면 혼인날짜를 정하고 결혼식 준비에 착수하게 될 것입니다.



딸을 혼인시킴에는, 혼수를 비롯한 기본 돈 드는 일도 있고 본당신부를 만나 사무적인 처리도 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딸을 보내기 전 마지막 마무리 준비로 새가정의 한 아내로서 한 며느리로서 또 장래 어머니로서의 마음가짐과 삶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 그리고 그 외 부모로서의 훈계 등으로 인격적 준비를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준비과정에서도 자주 사윗감에 대한 뿌듯한 느낌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면에 만족스럽진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사윗감이란 생각도 들고 장차 만족스런 사위를 생각하며 흐뭇한 기쁨에 잠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위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장래 사위에 대한 믿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울러 그를 믿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혼인이 성사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 사윗감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첩장을 친지들에게 보내는 마음은 그 날에 이 흐뭇하고 자랑스런 맘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대림절 첫주일에는 오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분은 성탄절에 어린 아기로 탄생할 분이며 또한 먼 훗날 영광에 싸여오실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둘째주일에는 그분을 맞이하는 내 자신의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바로잡고 회개하여 그분을 맞이할 채비를 하게 했습니다.



또 셋째 주일에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분과 그분이 가지고 올 구원을 생각할 때 오시는 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삶의 위로와 맘 속에 간직한 기쁨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림시기의 이 마지막 주일에는 그 기쁨이 믿음으로부터 오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1,44-45)

마리아가 구원자를 품에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전달말씀을 듣고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정녕 복된 자」 되었습니다.



이제 이 땅에 그리고 성탄절을 준비해온 우리의 가슴마다에 구원자 그리스도가 오실 날이 임박했습니다. 이 땅에 오시는 구원자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은 나의 믿음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만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지막 점검은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어떤 종교를 믿느냐고 물으면 천주교를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럼 과연 천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라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 구원을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으며, 탄생하신 아드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고 마지막 날에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라」 잘 대답합니다만 그 믿음으로 내가 「정녕 복된 자」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이 믿음을 가졌기에 하루의 삶이 기쁩니까? 나의 신앙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까?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은 적어도 잔치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마음이라야 하겠습니다.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 내 자신의 준비에 미비한 부분은 없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무엇인지 또 그분이 우리에게 오심이 자랑스럽고 모든 이에게 자랑하고 싶은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은 기쁘고 흐뭇하며 잔치가 임박했을 때처럼 흥분과 설레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 분은 우리 마음에 와 계시고 또 환영과 축복 가운데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성탄을 축하합니다」하는 인사를 할 자격이 있고 따라서 크리스마스 카드도 잔치에 초대하는 청첩장을 보내는 마음으로 띄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크리스마스 카드는 모두 부도수표 같은 수표요 고지서 같은 청첩장일 뿐입니다.









    

24.       대림 제4주일 <루가 1,39-45> (다) 가장 복된 여인

                                                               강영구 신부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성탄 대축일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동안 대림절을 지내면서 성탄 대축일 맞을 준비를 충실히 해 왔습니다. 그 준비는 또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연말이어서 그런지 사회의 모습이 어쩐지 어수선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모습도 어딘가 들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성탄 대축일과 연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은혜로이 받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큰 기쁨과 희망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워야 하리라 믿습니다. 외적인 화려함과 떠들썩함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지난 한 해에 대한 반성과 새해를 맞기 위한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이미 마리아가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었는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이름 없는 처녀였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세주 메시아의 내림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신심 깊은 처녀였습니다. 마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줍니다.

  루가복음 1장7절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사의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던 구세주 메시아가 시골의 한낱 이름 없는 처녀를 통하여 태어난다는 신비를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한 아기의 출생이라는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인간의 역사와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될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나자렛의 이름 없는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마리아 자신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남다르게 뛰어난 가문의 출신도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 여성들이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고등 교육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는 돈 많은 부잣집 딸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시골의 처녀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면서, 그 엄청난 일을 떠맡기로 작정했습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교만하거나 혹은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참으로 겸손하였고 또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온전히 비워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 모두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상봉하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의 이 인사말을 오늘 우리도 성모송을 외울 때마다 바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여자들 중에서 가장 복된 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복됨은 세속적인 의미의 복됨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아쉬운 것 없이 호강하고 자라서 대학 졸업한 여자, 돈 잘 벌고 지위 높은 신랑을 만나서 똑똑한 아들을 두고 여유 있게 사는 여자들을 복된 여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여자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마리아의 일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십자가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으로부터 그리고 오늘 우리로부터 복된 여인으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복됨은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믿었기에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장하거나 내세우려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에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것은 예쁜 얼굴과 단정한 용모, 남다른 재능과 재주 흑은 상당한 재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마리아가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겸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마리아의 이 겸손과 믿음이,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게 하여 이 땅에 구세주 그리스도의 내림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 땅에 성령의 시대를 열게 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곧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면서 주님의 재림과 성탄 대축일을 준비해 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주님의 재림과 성탄 대축일을 기쁘게 맞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복되다고 칭송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가슴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습니까?

  

마리아와 같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손길에 자기 자신을 모두 내맡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을 통해서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듯이, 이 땅에 광명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믿음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믿음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될 수 있었고,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소년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을 쳐 이겼습니다. 마리아 역시 믿음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 이 땅에 새 역.사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 무한히 강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귀의함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께 귀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믿음과 겸손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어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믿응과 겸손으로 자신을 가꿀 때 하느님의 사랑받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겸손은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현대인들은 믿음도 없고 겸손함도 없습니다. 신(神)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 대신에 돈과 권력을 섬기는 사람들도 많고, 자기들 스스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아는 양 1992년 10월 종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첨단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도 없고 겸손함도 없는 인간들 가운데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기고만장한 인간들의 오만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오만과 불신앙이 초래한 불행한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하느님과 같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가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났고, 오만함으로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소돔과 고모라는 불신앙으로 유황불을 뒤집어쓰고 멸망했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기보다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면서 돈과 재물의 위력을 믿고 과학 문명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믿는 오만한 현대인들 가운데서 이러한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리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곧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이유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마리아가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작고 약한 어린 아기로 탄생하셨는지 그 신비를 묵상해 봅시다. 지금은 믿음과 겸손으로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자리를 마련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













 25.        대림 제4주일 <루가 1,39-4> (다) 비싼 것을 꽤나 좋아더니!





 요즈음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TV뉴스도 두렵다. 신문을 쌓아 놓기만 하고 아예 안보다가 오늘 강론을 쓰려고 용기를 내어 며칠 동안의 신문을 뒤적거렸다. 외화가 바닥났다. 정부에서는 위기감을 느끼고 우선 급한대로 IMF에서 돈을 꾸었다. 그 결과 엄청난 빛을 지게 되였고 빛쟁이들이 이래라저래라 하고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서글프게도 남의 손에 우리나라 살림을 맡긴 꼴이 되었다.



  그 결과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게 되었고, 백 수십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으며, 환율도 1천6백원을 넘어섰다. 주가는 3백80선으로 폭락하고, 종금사와 부실 금융기관도 정리될 전망이다. 대기업들이 펑펑쓰러지고 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모두 우리 탓이다. 정신차리지 못해 화를 자초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조금 윤택해졌다 해서 과소비, 무분별한 해외여행, 도피성 유학, 사치성 소비, 값비싼 외제 선호 등 흥청망청 쓰다보니 외화가 바닥나 버렸다. 비싼 거 꽤 좋아하더니 진짜로 모든 물건값이 엄청나게 비싸게 되었다. 우리 같은 서민만 죽어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정신 못차린 사람들이 많다. 외제 수입품 가게에서 여자 속옷이 2백만원인데 더 비싼 거 없냐고 묻는 사람이 많단다. 잠옷까지 치면 5백만원이라는데, 찢어질까 걱정되어 잠이 잘 올까?



 이렇게 외화를 날린 것이다. 돈 값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꿔줘도 되는지 조사하러 왔던 LMF의 한 관계자가 「정부나 국민이나 똑 같이 나사가 풀렸다」고 따끔한 충고를 했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북행하다. 너희가 슬퍼서 울 날이 올 것이다. (루가 6,29)」라는 말씀대로다.

정신적 재화의 성장보다는 물질적 재화의 성장이 우선하다 보니 만족감과 자만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사가 풀리다 보니, 나라 경제를 망치고 말았다. 정작 필요한 것은 정의와 진리의 토대 위에 성실하고 근검 절약하는 것일진대, 이를 무시해 버렸다. 확고한 하느님의 정의 위에 정치 지도자들이 경제 정책을펴고 국민들이 실천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 (요한 3,19)는 말씀 그대로다.



  교회는 죄를 일곱 가지로 분류하여 애써 피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를 칠죄종(七罪宗)이라 하는데 교오., 간린, 미색, 분노, 탐도, 질투, 해태 등이다. 칠죄종과 그가 낳은 자식들을 열거해 보자.



 오늘 복음의 내용은 「낳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교오는 교만인데 자만과 허영을 낳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간린은 세상 사물에의 무질서한 애착이다. 낭비, 빈궁자에 대한 무감각, 거짓말, 도량 형기의 기만 등을 낳는다.

 미색은 성적 쾌락의 무질서한 탐욕이다. 영혼의 소경됨, 현세에의 애착, 하느님과 내세를 싫

어함 등의 죄를 낳는다.

 분노는 복수하려는 무질서한 욕망이다. 불만, 모욕, 악담, 소리지름, 욕설, 다툼, 싸움, 구타, 치상 등의 죄를 낳는다.

탐도는 탐식과 과음을 말한다.

질투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자기 탁월성의 손실로 여기고 싫어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해태는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빈둥거림, 놀고 먹고 지냄, 부당한 태업, 시간낭비 등의 죄를 낳는다. 그밖에도 호천(呼天)하는 죄와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있다. 호천의 죄는 살인, 남색(男色), 빈자와 과부의 업신여김, 품값 사기 등이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회개를 권유하시는 성령을 거슬러 진리와 은총에 끝까지 일부러 저항하는 죄다. 이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죄의 중대성에 있지 않고, 하느님 자비의부족에 있지 않으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마음 자세」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무서운 죄는 무엇인가? 모든 면에서 명분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불법과 비리를 자행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명분 뒤에는 반드시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자기 희생 없이 온갖 거짓과 속임수를 이용하여 재물을 획득하려는 사악한 마음이다.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는 수태고지 내용이다. 그래서 세상에 구원이 왔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 우리는「회심(回心)」을 낳고‥‥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구원을 가져와야 한다. 회심이란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모두가 회심을 낳아야 한다. 그것도 「총체적 회심」을! 신자건 비신자건, 정치인이건 한낱 촌부이건 모두다 회심해야 한다. 그래서 칠죄종의 근원을 없애야 한다.



  회심만 하면 무엇하랴? 마리아의 용기가 필요하다. 당시 처녀가 임신하면 돌로 때려죽이는 사형법이 있었다. 마리아는 17세의 처녀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아기 예수를 품안에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말로만의 회심이 아니라 희생을 각오하고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외국에서 외채 빌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며 급선무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한다」,「백의 종군하는 마음으로」,「뼈를 따는 아픔으로」다시 태어나야한다. 언젠가 많이 들어본 소리로 흘려 들어선 안된다.













26.             대림 제4주일 (다해)   믿어서 복되신 분     

                                       강길웅 신부





성서는 하나의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들려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말씀을 믿는 것은 그분 의 약속이 믿음직스럽고 또한 그 약속이 우리의 생애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실현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하느님의 약 속이라면 신앙은 그 약속을 믿겠다는 다른 하나의 약속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약속이 펼쳐집니다.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ꡓ보잘것없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수백 년 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께서 나실 것이라는 내용이 오늘 야훼의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고 기다리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복된 자가 되지만 약속을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자는 축복에서 제외가 됩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항상 일방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와 협의해서 맺어진 약속이 아니고 그분 스스로 정해서 그분 뜻대로 하시는 약속이기 때문에 인간편에서는 항상 주저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첫번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 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2,16.17).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열매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거짓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났으며 인류 불행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약속이 인간을 불행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약속은 축복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러나 믿지 않으면 그 대가로 불행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약속을 믿고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그 약속의 내용이 애매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는 믿을 수도 없고 지킬 수 도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또 거짓이 판을 칩니다. 그리고 믿었기에 손해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믿으면 믿음의 대가와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천왕이 곰과 호랑이에게 한 약속이 나옵니다. 옛날에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살기를 원하여 천 부인 세 개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봉우리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습니다. 그때 한 마리의 곰과 또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굴에 살면서 환웅천왕께 빌어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이에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되리라." 고 했는데 곰은 그 약속을 믿고 지켰기에 사람이 되어 단군 임금의 어머니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믿지 않고 지키지 않았기에,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용이 우리의 성서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마리아는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믿은 하느님의 약속이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선 처녀로서 아이를 임신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대중 앞에서 돌로 쳐맞아 죽어야 하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는 약혼자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자기 생애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 온다해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일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믿는 이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시며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당신을 감추시는 것이 약속이 지니는 양면성입니다. 보잘것없는 고을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께서 나셨듯이 보잘것없는 인생에게서 오늘도 구세주는 탄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기다리는 목적은 주님이 먼저 우리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어 머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 상관치 않고 그냥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형편이 고달플수록 주님은 더 간절하게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은총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생애를 참으로 빛나게 해 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립시다. 그러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복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7.              대림 제4주일  (루가 1,39-45)(다) 복되다 믿으신 분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마을에서 예수를 잉태한 다음(루가 1,34-35) 서둘러 유다 산골 동네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 인사를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살았던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엔 케렘으로 전해지는데 이곳에 세례자 요한 탄생 성당과 엘리사벳 방문 성당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한 지 여섯 달된 몸이었는데(루가 1,26) 마리아의 인사를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서 “여자들 가운데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 또한 복되시도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보십시오, 인사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자 태중에서 아기가 신명이 나서 뛰놀았습니다. 복되도다 믿으신 분, 주님이 해 주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니!”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감격에 차서 하느님의 구원을 기리는 노래, 곧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를 읊었던 것입니다(루가 1,46-55).



            2. 우리의 이해



  마리아가 동정으로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오직 루가복음 1장 34-35절과 마태오복음 1장 18-25절에만 나옵니다. 동정녀 잉태 이야기는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악의 어머니 사래와, 야곱과 에사오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석녀인데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의 위인들을 잉태 출산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의 특별 섭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복음사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마리아의 품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루가에 의하면 마리아는 뜻밖의 일을 겪을 때마다 함부로 속단하지 않고 그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사려깊은 분이었습니다(1,29;2,19.51). 아울러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조차 그대로 믿고 순종하신 분이었습니다(1,38.45).



처녀인 그녀가 아기의 잉태를 고지(告知) 받았을 때 이는 마리아에게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었기에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1,38) 하면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쳐올 수치스럽고 무서운 일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오롯이 하느님의 뜻에 맡긴 실로 신앙인의 귀감이 된 성모님이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예루살렘 모교회가 탄생하는 현장에서 교회 탄생을 기도하며 기다리던 분이셨습니다(사도 1,14).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곳이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이 마리아에게 내리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마리아의 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마리아야말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분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신앙인의 귀감이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분이십니다. 대림 제4주일을 맞아 이 땅에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성모님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천주님께 빌어주시기를 청하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립시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28.               대림 제4주일  (루가 1,39-45)(다)   크리스마스가 뭐야?



다섯 살짜리 우리 조카 건우는 “너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으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건우가 갑자기 “이모, 근데 훌륭한 사람이 뭐야?”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뭐, 이제껏 뜻도 모르면서 계속 말했단 말야?” 말하면서 좋은 대답을 찾았으나 ‘훌륭한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건우를 데리고 장난감을 사 주겠다고 백화점에 가는데 사방에 요란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건우가 또 물어 왔습니다. “근데 이모, 크리스마스가 뭐야?” 아, 이건 좀 쉬운 질문이군, 생각하면서 저는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몰라?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생일이잖아.” 그랬더니 대뜸 “예수님 생일 전번에 했잖아? 근데 또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과 ‘예수님’을 혼동하는 건우는 지난번 저희 본당의 신부님 영명축일 축하해 드린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이 아니라 예수님 생일이라니까.” 내가 대답하자 건우는 “예수님 생일이면 왜 예수님이 선물을 받지 않고 우리가 받아?”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살짜리의 질문에 저는 또다시 답이 궁해졌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단지 그냥 누군가의 생일인가요?  건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맘때면 항상 ‘성탄 축하합니다!’를 외쳐댔지만, 한 번도 진정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무언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무조건 ‘훌륭한 사람’ 되겠다고 말하듯이 그냥 기계적으로 말해온 것 뿐입니다.



  백화점 입구는 선물 보따리를 잔뜩 든 사람들로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초라한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 할아버지 손에 올려 놓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어느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청년은 “할아버지 죄송해요, 버스 값밖에 없어요”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돌아서는 할아버지의 등에 대고, “아, 할아버지, 담배 태우실래요?” 하며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할아버지께 드리고 불까지 붙여드렸습니다. 천원을 받고는 무표정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며 “고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아, 건우에게 이걸 가르쳐 줘야겠다 - 없지만 나누는 마음, 어려운 이웃에게 위안을 주는 배려, 그리고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크리스마스라고. 바로 그것이 사람되어 오시는 주님께 드리는 진정한 생일 선물이라고. 그래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며 말씀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성탄 축하합니다!”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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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0:06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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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 4 주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제 1 독서 : 미가 5,1-4a

재 2 독서 : 히브 10,5-10

복 음 : 루가 1,39-45



해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가1,43)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친절한 문안을 받고 놀라움에 가득차서 하는 이 말은 곧 다가올 성탄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의 느낌을 종합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 이상으로 그녀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은 우리를 놀라움의 경악과 기쁨으로 들뜨게 한다. 그러나 또한 다음과 같은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 과연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세례자 요한일까? 하지만, 그는 맨 처음에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마태 3,11)라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교회는 영성체 후 기도를 통해 주님께 다음과 같이 청원한다 :“전능하신 천주여…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열심한 마음으로 신비로운 예수 성탄을 타당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확실히 이런 까닭에 오늘 전례는 기도문을 통해서든 독서의 내용을 통해서든 한결같이 우리에게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루가 1,38)라고 우리는 복음 전 노래에서 기도한다. 이와 같은 마음자세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육화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자세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태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은 만일 그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루가복음사가가 마리아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장면을 연출하는 점에 있어서뿐 아니라 또한 그 기다림에 동반되는 감정을 묘사하는 점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각기 자기 자녀의 출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어머니의 만남이지만 좀더 관심있게 보면 모든 내용이 마리아의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즉 비록 그는 나중에 태어나지만 엘리사벳의 모자관계와 방문 그리고 요한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갑작스레 뛰노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다.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역사는 이미 그를 향해 가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오늘 복음 참조).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마을’(29절)은 보다 믿을 만한 전승에 의하면 나자렛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예루살렘 서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임에 틀림없다. 그 오랫동안의 여행은 마리아가 그 당시의 방법대로 여행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희생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사랑과 봉상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주고자 한다. 사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핵서이거나 또는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딸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S. Ambrogio, In Lucam 2,19).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마리아가 한 그 먼 여행-아마도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은 그리스도께서 육화의 신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더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읍니다”(필립 2,6-7)라고 바울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마리아가 유다의 ‘산’위로 올라갔다고 하면, 반대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기 위해 ‘심연’으로 내려가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참조)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친척 마리아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할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엘리사벳을 당황케 한 것은 마리아가 친절하게 관심을 드러내 보여준 그 행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 그녀의 집에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졌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 ‘현존’은 히브리 사람들이 궤에서 느꼈던 현존이다.

다윗은 야훼께서 너무나 가까이 계심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그 결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했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래서야 어찌 야훼의 궤를 모실 것인가?”(2사무 6,9)

학자들은 이 두가지 사실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한다. 즉 마리아는 주님(야훼)의 구원적 현존을 당신 백성 가운데 이루게 하는 ‘궤’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큰소리로’ 마리아께 인사하며-마치 그 다싱 백성들이 계약의 궤를 환호하며 받아 모셨던 것처럼(1역대 15,28 ; 2역대 5,13참조)-“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12절)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를 그처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의 신적 모성이다:“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42-43절)하지만 이와 같은 큰 영광과 영예가 마리아께 주어진 근본적 요인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심이다. 그러한 신앙심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새로우 ‘계약의 궤’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더우기 모든 이의 ‘주님의 어머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보다 깊은 심리적 직관을 통해서 마리아께 최초로 복음적 축복의 인사를 드린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5절).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대림’을 지속시키면서 무르익게  할수 있었던 것은 아브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언자들을 거쳐 마침내 마리아의 크나큰 신앙심에 이르기까지 결코 깨뜨려지지 않는 신앙적 열망이 연연히 흘러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마리아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장엄한 전례적 신비에 보다 더 적합한 정신적 자세의 표본을 윌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복음 내용은 마니피깟의 첫째 시절로 결론지어진다. 그것이 우리와 관계가 있는 이유는 마리아의 생활과 또한 마리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그 기적적인 일 앞에서 마리아가 느끼는 감정을 보다 밝게 알아볼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읍니다’ ” (46-47절).

그 첫번째 감정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지금은 신비스럽게 마리아의 아들도 된다-을 보내심으로써 마침내 행하신 구원활동에 대해 기뻐하고 환호하는 감정이다. 그 다음 이러한 감정에 덧붙여 나타나는 또 다른 감정은 겸손의 정이다. 겸손은 우리가 조금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읍니다.”  하느님 앞에서 유일한 위대성은 완전한 신뢰와 자유로운 의탁에서 나온다. 즉 마리아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대로’(루가 1,38 참조)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의 손에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믿고 하느님의 인도에 자신들을 내맡기지 않는 한 역사-교회역사도 포함해서-의 올바른 건설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자신을 성부께 의탁하심으로써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모든 인간적 체험을 받아들이셨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인 사도 바울로는 이에 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구약의 질서에 대한 신약의 질서의 우위성을 명백히 제시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성부께 자신을 봉헌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면서 취하신 ‘육신’은 당신 생활의 매순간에 그리고 특히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에 표현된 당신의 철저한 순종을 드러내는 도구이며 또한 가견적 표시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읍니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읍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읍니다”(히브10,5-7,10).

여기서 희랍어 번역에 따라 인용된 시편 40,7-9은 이미 단순한 외적 예재 행위와 봉헌의 내적 의식이 결여된 희생제물을 반대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 이상적인 희생을 완전히 실현시키셨는가를 알려준다. 그것은 하느님께 자신의 ‘뜻’을 항구히 봉헌함에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육화의 첫 순간부터 항상 이와 같이 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을 때 ’(5절) 시편의 내용을 그대로 이루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특히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통해 성부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심으로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실현시키셨다고 한다면 정말로, 보다 큰 고통이 있는 곳에 보다 큰 사랑도 있다는 말인가? 이런 까닭에 바울로 사도는 즉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읍니다”(14절).

이 대목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곧 다가올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육화의 신비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빠스카 신비에 지향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리아로부터 받는 육신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또한 부활날 다시금 그분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제 1 독서도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오신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다윗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분의 왕권과 힘에 대해 강조한다. 그 내용은 유다의 베들레헴 지방에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미가 예언자-이사야와 엇비슷한 동시대(B.C. 8세기)인물로써 이사야 예언의 내용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는 것 같다-의 예언 내용이다.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예언에 따라 동방 박사들에게 그들이 별을 따라 찾아갔던 ‘유다인의 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를 가르쳐준다(마태 2,6 참조).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 보잘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미가 5,1.3-4).

미가 예언자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이 유다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너무나 보잘것 없는데도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1절) 즉 메시아가 나게 됨으로써 큰 영광을 입게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메시아는 전통적 사고에 따른 모습 즉 당신 백성을 ‘힘’으로 인도하며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4절)‘왕이며 동시에 목자’로서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이 새 왕국의 범세계적인 숨결의 근원이 까마득한 옛날(1절) 즉 나단이 다윗왕에게 야훼께서 그의 왕위를 영원히 계속되게 해주시리라고 약속한 사실을 전한 그때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1사무 7,16 ; 역대 17,14 참조).

그 예언 가운데는 메시아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2절). 아마도 미가 예언자는 삼십 여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7,14) ‘알마’(almah:동정녀)에 대한 그 유명한 예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바로 그녀에게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과 흥분에 들뜬 감정-그녀가 9개월 동안 마음 깊이 간직했던-을 나누어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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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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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3주일

22. 홍금표 신부 (다) / 45

23. 김몽은 신부 (다) / 47       24. 김수창 신부 (다) / 48

25. 김수창 신부 (다) / 49       26. 김정진 신부 (다) / 50

27. 김영국 신부 (다) / 52       28. 강영구 신부 (다) / 54

29. 신은근 신부 (다) / 58       30. 교구주보 (다) / 59

31. 장영희 교수 (다) / 61       32. 강길웅 신부(다) / 62

33. 방윤석 신부 (다) / 64       34. 유영봉 신부 (다) / 66

35. 박기흠 신부 / 68              36. 이석재 신부 / 69

37. 허중식 신부 / 71              

22.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 (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홍금표 신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 박사는 인간은 누구나 다 세상을 보는 방식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데, 이 패러다임이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 양식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러 한다면, 먼저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변화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데, 긍정적 변화를 위해서는 원칙중심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원칙이란 물리학에서처럼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법칙으로, 마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것은 무슨 특별한 비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사상이나 윤리체계의 일부인 것이다. 예를

든다면「공정성」「성실과 정직」「인간의 존엄성」「봉사」와 같은 평범하고,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인 진리들이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이 이런 기본적 원칙에 가까워질수록 성공적인 개인 및 대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무한한 성과를 가져 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게된다. 오늘 복음은 심판이 가까워 졌다는 설교를 듣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군중들에게 요한은, 여벌의 옷과 음식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고 요구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과 자선 이것이 회개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리에게는 「명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고 요구한다. 당시 세리는 관청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아 관세를 거두는 민간인이었는데, 문제는 각 세관별로 임차료를 받고, 일정한 기간동안 관세 징수권을 임대차 한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세관원은 임대 기간동안 본전을 뽑아야 했고, 또 다음 임차를 위해서 임대권을 가진 관리에게 건든 돈을 상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것 이상의 많은 관세를 매겨 부당하게 거두어 들였기에, 이들은 죄인의 대표적 집단으로 여겨져,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유대교를 믿기 위해서는 그 직업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요한은「직업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앓는다. 다만 정한대로만 받을 것을 요구한다. 이는 바로 회개의 삶에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의 실현 이것이 더 중요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군인에게는「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고 충고한다. 군인들은 이교인들과 자주 접촉함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힘으로 약한 이들을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 타인의 권리와 재물을 부당하게

치부하는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의 대답은 지극히 평범함.「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즉,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만족하라고. 그런데 요한의 이러한 평범하고 상식적인 대답 안에는 참으로 음미해야 할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나의 변화」와「타자 중심의 회개」라는 점이다. 즉,「나」로부터 시작한 회개의 결과가 타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가난한 이와 나누는 삶」그리고 「부당한 방법(세리)과 힘(군인)의 사용 거부」는 기본적으로「나의 변화」라는 요소와, 그 결과가 가난한 이들과 백성들에게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것이 회개의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에,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변화」에 강조점을 둘 뿐 아니라, 그 변화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의 공통점은, 요한의 대답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이라는 것이다.「자선과 치사의 중요성」「세리가 정한대로만 받는 것」 그리고「군인이 자기 봉급으로 만족하는」것 등은 초등학생 정도의 지식 수준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상식적인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보면 회개의 삶이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충실하는 삶」,「소위 상식을 살아가는 삶이 회개의 삶」이라는 소중한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두 번째 이 교훈은, 코비 박사의 이야기와 함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 찾고 있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데 대한 답은 무슨 특별한 비법이나 요술방망이와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장 상식적인 진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식을 일상 생활 속에서 사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의 처지에서 내가 살아야 할 「가장 평범한 상식」을 이번 대림절 기간동안 주님의 성탄 선물로 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23.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몽은 신부



 벌써 오늘이 대림 제 3주일이다. 이제 한 주일만 더 지나면 성탄절이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장차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참다운 회개를 해야 한다. 참된 회개란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기 위한 선행을 실천하기 시작해야 한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종교에 있어서의 중요한 것으로 ‘예절’이나 ‘규칙’보다도 정신적인 기풍(사랑과 동정, 상호부조, 봉사 등) 을 더 중요시했다. 그 열심한 경신행위(敬神行爲)도 내면적인 사랑이 없을 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역설해 왔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교량 역할을 담당한 세례자 요한도 이기심이 없는 참된 신심을 요구하면서, 그릇된 바리사이적인 신심에서 참된 신심으로 되돌아올 것을 소리 높이 외쳤다.


<회개하시오!> 하고 외치는 동시에, <당신들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시오!> 하고 거듭 외쳤다. 사랑은 바로 회개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의 열매이다. 그 열매는 행동으로써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으로써 일치를 수반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도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복음에서는 그 직업이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악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루가는 그 대표로서 세리들과 군인들을 들고 있다. 세리나 군인은 항상 이교도들과 접촉해야 하며, 그들의 힘을 남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그 직업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직분을 사리 사욕을 위해 사용하는 데 타락이 있다. 그래서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시오> 하고, 군인들에게는 <협박을 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라고 일러준다.


한편 요한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오인함을 보고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실터인데, 나는 그분의 들메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요한만큼 예수님(메시아)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도 겸손하고, 철저히 선구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불과 같이 내면의 온갖 죄악을 불태워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어 하느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해주신다.

 주님을 맞이할 우리도 진정 마음 속에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채워 성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 되도록 하자.












24.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수창 신부



        곳간의 알곡들

건강도 잃어봐야 고마움을 알게 되고 그 다행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물심양면으로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의 몫까지 더해야 하지 않을까? 없는 것은 대개 없는 사람 자신의 탓이 아니듯이, 있는 사람 역시 무슨 자격이나 권리나 공로가 있어서 그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가령 형제 사이에 신체장애나 정신박약아가 있다든가, 무슨 일이나 혼자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도 곧잘 남을 도와준다. 두 몫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도와가면서 살게 마련인 우리는 창세기 설화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되어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 하나하나는 반쪽에 불과하다. 부부와 같은 일체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서로 합쳐야, 즉 마음과 마음이, 너와 내가 하나되어야 <우리>를 이룩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를 따로따로 만드신 의도가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돕는 “서로 사랑”“이웃 사랑”이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를 진정한 천국으로 변형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사랑을 간곡히 부탁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때 불의와 부정이 생긴다. 이를 뉘우치고 회개한 표시로, 요한이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구한 대로 갚을 것은 갚고, 줄 것은 빨리 되돌려 주며, 끼친 손해는 완전하게 기워 갚아야 한다. 그래야, 자타간의 질서회복과 관계개선이 따르고, 메시아도 기꺼이 맞아,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곳간에 모아들인 알곡인 것이다.      







25.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수창 신부



        富者의 쓰레기가 貧者의 음식



 옛날 ‘로마’ 사람들은 돈을 ‘뻬꾸니아’(본래는 <가축>이라는 뜻)라 했다. 이 말은 물물교환시에 가축을 화폐로 통용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조개껍질(貝)을 화폐로 통용했다. 우리는 화폐를 ‘돈’이라 한다. 돈이란 돌고 돌아서 돈이라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돈’이 ‘돈다’ 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돌멩이’란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물물교환시대에 ‘값나가는 돌’ (보석) 이 화폐로 통용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의 돈은 잘 돌아가지 않고 묻어두고 감춰두는 습성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돈 내라면 싫어하고 귀찮아하는가 보다. 묻어두고 감춰두었으니 꺼내기가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돈이 필요하다. 돈, 돈 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금을 할 때 보면 돈이 좀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적게 내고도 생색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남과 같이 할까하고 고심한다.


어떤 때는 돈 이야기가 가난한 사람에게 부담을 주어 반발을 일으키는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돈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기천만원의 빚이 있는데 갚아 달라는 사람, 수 백만원의 병원비를 당장 내놓으라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많이 모금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잘 쓰여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가진 자는 멋있게 복음적으로 돈을 쓰고 헌금해서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던지, 아니면 제도적으로 재분배되게 해야할 것이다.


서울의 쓰레기는 거의 난지도에 버려진다. 매일 8톤 트럭으로 3천대분량의 쓰레기가 버려진다니 너무나 엄청난 양이다. 현장에 가보면 어두운 느낌마저 든다. 쓰레기 산, 쓰레기 바다, 쓰레기 황야, 온통 쓰레기와 먼지, 파리, 냄새, 연기로 자욱하다. 그런데 그 쓰레기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부자동네에서 나온 쓰레기는 서민이 보면 쓰레기가 아닌 것도 있다. 의류, 식품, 가구등 쓸만한 것이 있으며 때로는 실수로 내버린 금전이나 귀금속도 있다고 한다. 이 작은 나라에서 같은 동포끼리 누구는 내버리고 누구는 그것을 쓰레기에서 주워 써야하는 이 빈부의 격차를 보며 우리는 회개하고 속죄해야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믿음과 사랑의 나눔으로써 또는 정책적인 제도로써 이 격차를 줄여나가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 교회의 의미, 정부나 정책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지도 주민 1천 세대 3천 만 명은 이 쓰레기를 골라서 수집하여 공장으로 보내는 작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어린애들을 쓰레기 위에 놓아두고 부부가 함께 작업을 한다.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 즉 건강과 위생, 급식 문제, 쓰레기 위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의 성격 문제, 종일 혼자 있으니 말을 못 배우는 문제 등이  생긴다.


이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 명동본당에서는 83년 초에 탁아소 ‘애기들의 집’을 차렸다. 처음에는 7명이었으나 지금은 70명이나 된다. 제때에 먹이고 재우고 목욕시키고 가르치고, 병들면 정운표 박사님이 치료해 주셨다. 애들이 예뻐지고, 말 잘하고 그 얼굴이 밝다.


그러나 84년 대홍수로 인해 난지도 주민들의 판자집이 모두 쓰러져 버렸다. 서울시에서는 임시건물을 지어주었는데 우리는 30평의 배당 받았다. 처음 시작할 때의 판자집 서너평에 비하면 지금은 궁궐같이 크고 깨끗하다.

 그런데 지저분한 판자집에서 탁아소를 할 때는 어린이를 위해서 쓰라고 희사금을 내는 방문객이 더러 있었는데, 이제는 집이 좀 깨끗해지니까 부자같이 보이는지 희사하는 사람이 적다.


도봉산 아래 개천가에도 (방학동 뚝방 마을) 판자촌이 있다. 우리 명동본당은 거기에도 탁아소 ‘뚝방 아이네’를 차려 20명 가까운 어린이를 돌보고 있다. 어린이가 늘어날수록 예산도 늘고, 일손이 더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서로 관심을 갖고 나눌 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얻을 것이다. 나눔이 있는 곳에 사랑도 평화도 정의도 풍요도 있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 창가에 싱싱한 나무 잎을 물고 가서 희망의 징표를 보여 준 그 비둘기처럼, 가진 바를 나눌 때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6.           대림 제 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정진 신부



        회개의 생활과 구원의 길

우리는 벌써 대림 제 3주일을 지냅니다. 이제 기쁜 성탄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나 거리에서는 성탄 노래가 흘려 나오고 성탄 나무도 서서히 마련되어 눈의 띄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남일 가까웠으니 정녕 기쁨과 행복의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암흑과 절망과 죽음에서 해방되어 평화와 행복, 희망과 은총의 세계를 맞이하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대림 제 3주일을 장미의 주일이라고 하여 기쁜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대림절 절반을 지내면서 그 동안 자아 반성과 회개의 정신으로 열심히 지내온 신자들에게 잠시 휴식과 기쁨을 주는 것이 하나요, 둘째는 구세주를 만나 뵐 수 있는 날이다가 왔다는 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도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절의 중심 인물은 세례자 요한이므로 오늘 복음에는 전적으로 성 요한의 가르침과 그의 인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교훈과 정신을 대림절에 사는 우리의 정신이며 생활 양식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한은 구원의 길을 명백히 제시하였으며 구세주의 사랑의 길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질문해 온 군중에게 답한 성 요한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요, 정녕 사랑과 봉사적 실천 사항이라 하겠습니다.


성 요한의 가르침은, 구원을 얻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란 어디까지나 정직하고 성실한 생활을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 분은 회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즉 성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 온 군중과 세관원들과 군인들에게 불우한 이웃을 돕고 불의한 수입을 노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 분은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같은 훈계를 하십니다.


첫째 성 요한은 군중을 향하여,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자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가난한 자와 나누오 먹으라는 것입니다. 성 요한은 당시 빈곤한 사회에서 목숨조차 부지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합니다. 현재 풍요한 사회에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사회복지 기관이나 구제 사업 단체도 필요하지만 개별적 온정으로 우리 각 개인이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회개의 징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점을 강력히 주장하셨고 (마태 25 : 35 ~ 43) 또한 초대 교회에서도 한결같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돌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기를,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에 먹을 양식이 떨어졌을 적에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 : 15 ~ 17) 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성 요한은 세례를 받으며 회두하는 세리들에게는, 부정 수입을 노리지 않고 각자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 당시에는 세리라 하면 부정 축재를 하는 비 애국자라는 정평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군인들에게 요구하기를, 괴롭히거나 협박하지 말고 자기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군인들은 곧잘 협박과 속임수를 써서 백성들의 물건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성 요한은 이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외에도 각층 각계의 사람들을 가르친 것으로 믿어집니다.


고관 대작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라고 외쳤을 것이고 관리나 공무원들에게는 정직한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정의감에 입각하여 공복으로 희생과 봉사적 정신으로 백성들을 대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교육자들이나 직장인들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자기 본분에 충실하라고 하였을 것이고 학생들에게는 학업에 충실하여 지덕연마에 힘쓰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는 가족들의 편안과 행복을 도모하며 외도나 낭비를 삼가라고 하였을 것이고 주부들에게는 가정 생활에 성실하여 자녀들의 교육에 만전을 기하여 살림살이에 알뜰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는 성서의 말씀과 같이 회개하는 생활 안에 우리의 구원의 길은 열리는 것입니다. 구세주의 내림은 인류를 심판하고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용서하고 오로지 용서하고 구원하러 오신다는 생각만 해도 즐겁고 고맙게 여겨집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과 고생과 번민을 말끔히 씻고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빌며 언제나 평온하고 명랑한 심정으로 성 바오로 사도와 같이 주님과 한께 기뻐하며 용기와 희망을 갖고 거센 세파를 무난히 헤쳐나가기로 굳게 다짐합시다. 아멘.  











27.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다)불우이웃의 대희년           김영국 신부

                   스바니아 3, 14-17; 필립 4, 4-7; 루가 3,10-18





오늘의 독서들은 전반적으로는 다가오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기쁨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복음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잘 다듬어진 미사여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요점만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청중에 대한 배려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청중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러 해 동안 사막에 살면서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던 사람은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는 오랜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얻게된 확신으로 무장한 인물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어진 확신은 군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청중들 역시 그가 에둘러서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는 말만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투박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청중들을 향하여 ‘독사의 족속들’이란 말을 서슴치 않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도끼’에 찍혀 넘어질 것이며 쭉정이 같은 인간들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루가 3, 7-17참조).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군중에게 말합니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세리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응답합니다.



요한의 이 말씀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마디 한마디가 현실적이고 실천가능한 말씀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엄격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영웅적인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유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과 나누고, 이웃을 부당하게 착취하거나 이용하지 말고, 부당이득을 취하지 말고 정한대로만 돈을 받고, 직권남용을 하지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월급으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지하도에는 노숙자들로 가득한데, 가진 사람들은 돈을 말 그대로 상자로 들고 다니며 쇼핑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주가조작을 해서 떼돈을 버는 사람들 얘기가 끊이질 않고, 그런 허황된 이야기에 현혹되어 머리를 굴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쥐꼬리만한 권력만 있어도 그것을 이용하여 남을 등쳐먹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다릅니까? 우리에겐 세례자 요한의 설교가 필요없어졌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해동안 많은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는 시간과 돈,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며 지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해 쓰여졌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나만을 위해 사용하였습니까, 아니면 어떤 형태로는 이웃과 나누기 위해 노력하였습니까?



우리는 오시는 손님의 품위와 분위기 그리고 취향에 맞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대림절을 통해서 기다리는 귀하신 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기 예수로 탄생하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나누는 일을 본질로 삼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친교요 나눔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것을 고집하고 이웃을 외면하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내적참회를 위해서는, 즉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기도와 단식뿐만 아니라 자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기도가 하느님께 대한 회심을 드러내고, 단식이 자신에 대한 회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자선은 다른 사람에 대한 회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절과 함께 세상 안에서의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 그것이 시간이던 돈이던 아니면 내게 주어진 지위던 간에 이 모든 것들을 어떤 형태로는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써 이웃들과 정의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을 배려하는 행위는 자신을 나누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축제를 준비하는 가장 종은 방법인 것입니다.













28.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삶

                                                              강영구 신부



오늘은 대림 제3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가난한 형제들이 많습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나름대로 우리 주위의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 주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도움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작은 도움의 손길이 세모(歲暮)에 가난한 형제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이런 모습의 트럭을 본 적이 있습니다. 트럭의 적재함에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 천막에는 이런 글자들이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휴거! 1992년 10월."그리고 그 트럭은 커다란 확성기를 달고 거리를 다니면서 1992년 10월이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휴거(携擧),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시어 뽑힌 사람들을 하늘 나라로 들어 높이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고 방송을 하고 다녔습니다.

  

마르코 복음 13장32절에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성경에 분명히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 지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1992년 10월 종말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도 수상쩍어서 누군가가 지어낸 사실일 것입니다. '인륜 도덕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이 세상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인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이고,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여 언제 내가 저런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모든 일이 불확실하고, 자연은 공해로 찌들려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없고, 마실 수 있는 물도 없고, 숨마저 마음놓고 쉴 수 없을 정도로 공기는 오염되어 있고, 거기다가 하느님 대신에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사는 꼴들이란 향락과 퇴폐, 사치와 과소비를 일삼고 있으니, 이 세상 되어 가는 꼴이 희망적이기보다는 절망적이고, 그러니 에라 모르겠다 세상 끝장나는 꼴이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1992년 10월 종말설을 퍼뜨린 것이 아닌가‥‥‥ 제나름대로 이런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1992년 10월 종말설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종말설이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에 편승해서 일부 종교가들이 1992년 10월 종말설을 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더 큰 불안감과 위기 의식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그리고 그 때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 바도 아닙니다. 예수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는 일을 우리가 무슨 재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려 하지는 않고 엉뚱하게 언제 세상이 끝장 날 것인가, 그 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합니다.

  

아니할 말로 지금 당장 이 세상의 종말이 온들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면, 지금 당장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또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 내지 말라.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데 그분은 마치 타작 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농부처럼, 알곡은 가려 곳간에 쌓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집어 던질 것이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가려서 뽑고 심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이런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은 은근한 협박조로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니 두려워 떨어야 한다거나, 혹은 하던 일을 모두 팽개치고 광야로 나와서 단식하며 기도만 하라거나 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에게 결코 위기감과 불안감을 조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침으로써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각자의 직책과 신분에 맞게 구체적인 생활의 개선책을 알려 주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나누어 가지고 나누어먹는 사랑의 실천을 요구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세금을 받는 정직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려 하는 생활을 하지말고, 정의롭고 공정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무슨 대단한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쉽게 생활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는 생활, 정직한 생활, 정의롭고 자신이 맡은 일에 성실한 생활, 이런 구체적인 작은 것들의 실천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유난스럽고 대단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정의롭게 살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도둑이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니까,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사니까, 그리고 정직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하늘이 두렵고, 그래서 이 세상 종말이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불안한 중에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를 통해서 들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들어 보시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기쁜 소식이지 불안과 두려움의 소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심판과 징벌의 시간, 또는 이 세상 파멸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이 세상 완성의 시간입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의 살과 피로 양육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은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재림의 시간은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과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서 기쁘게 재림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지나가고야 말 이 세상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 없어져 버릴 재물과 돈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 한순간에 사라질 향락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고,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저지른 잘못들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고, 위기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태에 편승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기적인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있다고 해서 우리마저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매사가 불안하고 불확실하기에 돈이나 재물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으려 하고 찰나적인 향락을 누림으로써 그 불안함을 망각하려 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오로와 세례자 요한이 그 답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성탄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것처럼, 주님의 재림도 기쁜 소식입니다. 다만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는 생활,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하는 가운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29.              대림 제3주일  (루가 3, 10-18) (다) 자선

                                                              신 은근 신부





지난 주일의 가르침은 회개였고 이번 주일은 자선이다. 자선은 무엇인가. 나누는 생활이다. 남 모르게 나눌 때 자선이라 한다. 주님 표현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자선이 된다. 온 동네 떠벌리며 나눴다면 그것은 자랑이지 자선은 아니다. 군중은 요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단순했다. 두벌 옷 가진 사람은 나누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고 속이거나 협박하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이야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씀이다. 자선 역시 그렇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이다. 너무 어렵게 자선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반성해야 한다.



나눔의 대상은 물질만이 아니다. 많이 있다고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마음이다. 두벌 옷이 무엇이겠는가. 글자 그대로 추위를 막는 옷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추위는 옷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보호하여 주겠는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누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신뢰와 희망으로 사는 모습이다. 이것이 두벌 옷의 정체다. 이 모습을 나눌 때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가족과 이웃 앞에 나서야 한다. 특별히 신뢰하며 희망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두벌 옷과 먹을 것을 나누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모두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이웃에게 베푸는 가장 힘있는 자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희망하며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쁨에 넘쳐있고 즐겁게 사는 모습이다. 더구나 그 원인이 돈과 물질이 아니기를 그들은 바라고 있다. 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신앙인 밖에 없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자선을 물질과 결부시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돈과 물질이 자선의 전부인양 착각한다. 물론 재물을 나누는 것도 훌륭한 자선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자선행위를 진정한 자선으로 만드는 것은 겉에 드러나는 재물이 아니라 그 재물을 나누는 마음일 것이다. 재물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믿음과 은총, 신뢰와 희망이 자선의 핵심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을 현대인들은 보고 싶어한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무 걱정마시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말씀이다. 자선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가르침이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느님 때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희망할 수 없는 상황, 인간적 계산으로는 방법이 없었는데도 주님은 길을 열어주셨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제 대림절도 한 주간 남았다. 자선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며 성탄절을 준비하자.












30.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신분에 따른 회개 생활(10-14절)과 요한이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내용(15-18절)으로 짜여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온 군중, 세관원들, 군인들에게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군중에게는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시오”라고 요구합니다. 세관원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라고 일러 줍니다.

세관원은 관청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아 관세를 거두어들이는 민간인이었는데 그들은 수입을 늘리려고 정해진 액수보다 더 요구했던 것입니다.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여기 군인들은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온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예고하십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백성들 가운데는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요한은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 주는 법인데 자신은 그런 일을 해 드릴 자격조차 없으며, 또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를 거부하면 미구에 불세례, 곧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에는 성령이 작용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5-18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비록 세례자 요한보다 시기적으로 늦게 출현하셨지만 요한과는 비교가 안 될만큼 위대한 분이며 요한은 단지 이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요한은 군중들에게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오”(루가 3,9)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경고를 들은 군중들이 요한에게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는 “어떻게 해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요한은 군중들에게 구체적으로 대답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속옷 두 벌 가진 사람과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자를 뜻합니다.



세관원들은 행정관리로서 지위를 가진 자를 뜻합니다. 군인들은 힘있는 자들의 대명사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지배계층의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에게 가난한 자, 지위 없는 자, 힘없는 자들을 각별히 돌보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직자는 성직자 신분에 걸맞게, 평신도는 평신도 신분에 걸맞게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활약할 당시에는 그를 메시아로 받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고 “나보다 더 굳센 분이 오시는데, 나는 그분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라222고 말하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도 “제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면서 극구 사양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유다인들에게 말하면서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는 법이오”(요한 3,30) 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처신이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처신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31.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다)  사랑의 물리학



영국의 한 광고회사에서 큰상을 내걸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올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응모하였습니다. 비행기가 제일 빠르다. 아니 그보다 더 빠른 것은 기차를 타고 오다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방법이다. 아니 새벽에 승용차를 이런저런 지름길로 몰고 오면 더 빠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실제로 시간을 재어보고, 서로 자기네 방법이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상을 탄 사람의 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길이라도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미국의 오마하라는 도시에는 ‘보이스타운’이라는 유명한 고아원이 있습니다. 그 입구에는 커다란 동상이 있는데, 한 소년이 조금 작은 다른 소년을 업고 있는 모습의 동상입니다. 꽤 오래 전의 일화입니다. 한 소년이 자기 동생을 업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이 소년을 보고 “얘야, 무겁지 않니? 내려놓으려무나”라고 하자, 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무겁지 않아요. 얘는 내 동생이니까요.” 물리적으로 계산한다면, 동생이라고 해서 무게가 달라질 리 없고 무겁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소년으로 하여금 동생이 무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신부가 이 말을 ‘보이스 타운’의 정신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무거워도 메고 다녀도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무게 계산법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부피 계산법은 무엇일까요? 욕심이 너무 많은 우리들은 항상 크고 큰 사랑을 원합니다. 왜 나는 요렇게 작은 사랑 주시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사랑 주시느냐고 하느님께 투정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차지하는 사랑을 크게 만들까 궁리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그 답을 말씀해 주십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랑은 행(行), 행(行)은 나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누면 나눌수록 오히려 더 커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부피 계산법입니다. 그것이 쭉정이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알곡이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힘을 아드님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천리길을 눈깜짝할 새 오고 억만근을 깃털처럼 들고, 아무리 작은 것도 나누어서 크게 만들 수 있는 힘­ 사랑의 물리학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32.                 대림 제3주일 (다해)    기쁨과 회개의 표시로 나누자   

                                                            강길웅 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며 구원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우리가 용기있게 짊어지는 것도 부활이라는 엄청난 기쁨을 미리 맛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통회와 보속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큰 기쁨의 시기입니다.



1독서에서는 구원의 은혜에 기뻐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리고 인간을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기쁨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여기서 기뻐하는 것은 원수를 쫓아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며 또한 그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 안에 계시어 구원해 주시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바로 우리 각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굽니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원수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번번이 원수 앞에서 무릎 꿇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주님께서 꺾어 주십니다. 오실 그분께서 쫓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탄생하시고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그분께서 우리를 새롭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2독서에서도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바오로 사도가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쁘니까 너그러운 마음을 모두에게 보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쁘다면 기쁘다는 표시가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기쁘면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대림 3주일은 우리의 너그러움이 요청되는 주일입니다.



복음에서는 회개의 표시로서 가진 것을 서로 나누라고 요한이 외치고 있습니다. 기쁘면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나누는 것이 바로 회개의 표시이며 또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최상의 준비입니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 누구도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자선주일입니다. 기쁜 날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교회가 정한 날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자선을 받는 날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푼다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모두 되돌려 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선은 여러 사람을 풍요롭게 합니다. 주는 사람도 풍요롭고 받는 사람도 풍요롭습니다. 주님이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들 곁에 평생을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분의 이웃은 밑바닥 인생들이었으며 밑바닥 인생들의 이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잘나고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았던 자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업신여겼습니다. 예수님 이 밑바닥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잘나고 똑똑하고 있는 사람들하고만 사귀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은 그쪽으로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오십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도대체 누굽니까. 그것은 붙잡을 것이란 오직 주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천국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을 차지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불우한 이웃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주님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본당에서 불우 이웃을 위해서 2차 헌금을 할 때 한 사목회 임원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본당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막말로 기가 찼습니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본당은 없습니다.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만일에 그 교회가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망치로 부숴야 합니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그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겠습니까. 최후심판에서 우리가 갈라지는 기준도 어떻게 나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마태 25,31~46참조).



예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마태 6,7~21참 조). 땅에 쌓으면 좀먹거나 녹슬어서 못쓰게 되며 또 도둑이 훔쳐간 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에 쌓는 것입니까. 그것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됩니다. 땅에 쌓은 것은 아무리 쌓아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은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기쁘기 때문에 나누고 또한 지난 1년 동안 잘못 산 것이 많기 때문에 회개의 표시로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눌 때 자기 것으로 채워지는 풍요로움을 얻게 되며 또한 바로 그 나눔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십니다.



 33.      대림 제3주일 <루가 3, 10-18>(다)  백만량짜리 고양이와 동전 한닢짜리 집

                                                        방윤석 신부



  옛날에 왕보다도 더욱 돈이 많은 부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왕국 바로 앞에서 왕보다 더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찌나 구두쇠였는지 거지에게 동전 하나 공짜로 던져주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그는 배에 금은 보석을 가득 싣고 장사를 하기 위해 이웃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렇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것처럼 출렁거렸다. 배가 물 속에 가라앉을 것 같자, 이 구두쇠는 갑자기 갑판 위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제발 풍랑을 거두어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저의 집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겠습니다.」

구두쇠 영감의 기도가 통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바다는 풍랑이 멎고 잔잔해졌다. 그리하여 배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구두쇠 영감은 속으로,「내가 미쳤냐? 집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잠시 후 또 풍랑이 심하게 일어났다. 구두쇠는 재빨리 하느님께 잘못을 용서빌고 조금 전의 약속을 지키겠노라 기도드렸다. 어쨌든 풍랑은 가라앉고, 그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집을 팔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가 왼손에 고양이 한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를 백만냥에 파는 대신에, 그 좋은 집을 동전 한 닢만 받겠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고양이를 사야지만 집을 팔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어찌 되었거나 고양이와 집이 팔렸다.

 그 후 그가 거지 앞을 지나가면서 동전 한 닢을 거지의 모자 속에 던지며 하늘을 쳐다보고 말했다.「하느님, 저는 약속을 지켰나이다」



  하느님과 사기꾼 이야기 하나 더 하자. 이 세상에서 가장 사기를 잘치는 사기꾼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하느님. 인간에겐 10억년이 하느님에겐 1초라면서요?」

「그럼 그럼」 「그럼 인간의 10억원이 하느님에겐 1원이겠네요?」 「그럼 그럼」

「하느님, 그럼 저에게 1원만 적선해 주십시요」「오냐, 알았다. 1초만 기다려 다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불우이웃을 돕자는 구호가 나돌게 되고, 많은 단체들이 「자선」이란 이름으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정부에서도 불우이웃 위한 오금 창구를 관청에 개설하여 성금 기탁을 받고 있으며, 거리에는 구세군의 자선남비도 출현했다. 돈 낸 사람들의 의향대로 제대로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선행위를 강력히 권고하는 때이다.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는 1984년 이 나라의 가난한 자, 병든자, 소외된 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했으며, 금년이 14회 자선주일이다.



  자선이란 무엇인가? 자선이란 궁핍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에 입각해서 베푸는 물질적, 경제적인 도움을 말한다. 왜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자선은 이웃에 대한 사랑 구체적 표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2)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숨은 것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4)라고 말씀하신다.

또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계명은 사람 사랑이다(마태     22,37)라고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나의 계명이니라」(요한         15,12)고 강조하신다. 바오로 사도께서는「아무리 다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는데, 그     것은 사랑의 의무」(로마 13,8)고 말씀하십니다.

집회서 17,22에 보면 「주님은 인간의 자선행위를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인간의 선행을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신다.」고 나와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는 애덕의 구체적인 실천행위인 자선에 대해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그 모두가 자선행위였다. 병자를 고쳐 주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귀들린 이를 구해 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문둥병을 고쳐 주고, 죽은 이를 살리고‥‥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구체적인 자선행위는 무엇인가? 자선에는 물적 자비의 실천 7가지와 정신적 자비의 실천 7가지가 있다.



물질적 자비 7가지는, 1.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2.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 3.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  4. 집 없는 이에게 잠자리를 주는 일/

5. 병든 이들을 방문하는 일/ 6.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는 일/ 7.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일 등이다.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마음, 「주는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부싯돌처럼 주는 마음이다. 부싯돌은 잘 후려쳐야 주는데, 그것도 겨우 불똥 몇 방을 뿐이다. 둘째로, 스폰지처럼 주는 마음이다. 스폰지는 쥐어짜야만 주는데 바짝 마를 때까지 짜야 비로소 준다. 셋째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마음이다.

 나무는 거저 주는데 가지도, 열매도, 뿌리도, 나뭇잎도 거저 준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기 바 랍니다.

34.           대림 제3주일<루가 3, 10-18> (다)    자선으로 참된 회개를 입증하자

                                                                유영봉 신부



  묵상 : 경제파탄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서로의 책임공방이 한창이다. 우리들의 삶이 자제와 자기 분수를 모르고 흥청댄 결과가 아니겠는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좋은 은총의 계기라 할 수 있다. 참된 회개는 자선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1. 경보시스템이 고장난 사회



  환율폭등․증시폭락․금리폭등․물가앙등․기업도산․대량해고․실업률 급증․주식회사 한국 파산,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말들이 온통 신문과 방송의 머리말을 장식하고 있는 요즘이다. 게다가 대선주자들은 국가부도사태를 두고 서로 네탓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책임 떠넘기기가 한창이다.



  이를 보는 국민들은 위기가 아닐까? 책임의 소재와 몰을 따져야겠지만, 우선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모두가 그동안의 삶의 자세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위기가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2. 정신의 황폐화가 화 불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다. 요한은 세리와 군인, 그리고 모여든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각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파하고 있다. 로마의 식민통치, 국론분열, 민생도탄 등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면서 회개를 설파한 세례자 요한의 외

침이 오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아닌지‥‥ 오늘의 위기엔 정경유착, 기업의 고비용 구조, 노사갈등, 정책부재 등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분수를 못 지킨 우리의 과소비가 주범이라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과소비는 단순히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엔 비싼 외제만 찾는 졸부들의 못난 자기과

시, ‘내 것을 내가 쓰는데 왜?‘ 라는 식의 극단적 이기주의, ‘위화감 따윈 내가 알바 아니다'는 삐뚤어진 특권의식이 도사려 마음이 착잡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어떤 큰 사건이 터질 때는 항상 전조(前兆)가 있게 마련인데,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아시아 금융위기의 파고가 높아가는데도 어떤 책임자나 지도자도 다가올이 위기를 큰 목소리로 예고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위기를 예고하는 몇 가지 미미한 경고가 있었다면, ‘경제는 휘청, 소비는 흥청', '경제 수준은 1만불, 소비 수준은 2만불'이라는 TV의 공익광고 정도였다, 심지어 물러난 경제팀은 물러나기 전날까지 큰 걱정 없다는 자세였다, 우리 사회의 경보시스템이 고장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홍청망청이 이 땅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청바지가 가장 비싼 나라로 만들고 성실한 소시민들에게서 살맛을 앗아가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정신적 파산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 위기는 바로 정신의 황패화에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3. 내 자신에게 돌을 던지자



  대림(待臨)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회개의 시기다. 자기 빛이 얼마인지를 모르면 갚을 수 없듯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면 회개도 불가능하다. 국가경제 파산이라는 위기를 통해 우리는 모처럼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좋은 기회를 맞았다. 나아가 나는 신앙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학생으로서, 좀더 새로워지기 위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를 반성해봐야 한다.



 가장 완전한 거울인 하느님 앞에 조용히 자신을 비추어보자. 대개의 경우 내가 새로워지기 위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다만 그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할, 자신에게 돌을 던질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회개는 은총이다. 나의 문제와 맛설 수 있는 은총을 겸손되이, 그리고 간절히 청하자. 그리하여 알찬 판공성사가 되게 하자.



        4. 회개는 자선으로



오늘은 자선주일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와 단식(고행)과 자선을 회개의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교회가 대림시기에 이 자선주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그동안 못 다한 이웃사랑을 메우어 마음 편하게 연말을 맞자는 의도만은 아닐 것이다. 회개와 보속은 사랑의 자세로 할 때, 그 참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와 보속은 자연스레 자선에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이 담긴 자선은 회개와 보속의 증거인 셈이다. 사랑이 없는 자선은 거짓 자선이다. 그래서 자기 과시로 하는 자선은 회개와 보속이 되기보다는, 받는 이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때가 되면 나도 큰 자선을 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는 점이다. ‘지금, 여가서’자선을 하지 못하면,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심은 항상 우리의 형편보다 앞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푼다는 것은 평소의 연습 없이는 못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35.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박기흠 신부



형제 여러분!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거리감을 두고 자신을 한번 돌아다본다는 뜻으로 흔히 '마음을 비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세에만 집착하고 재물을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동안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인 시야에서 풀려 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시야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자기집착에서 출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불안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족의 삶이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주 욕심이 많은 티모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많은 돈과 재물을 손에 넣어도 한 번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이웃 사람들과 돈 문제로 싸움을 벌이곤 했습니다. 어느 날, 티모시의 이런 모습에 한 사람이 그를 파멸시키려는 흑심을 품고, 유리 항아리에 담긴 조그만 '금붕어'한 마리를 선물로 주며 말했습니다. "티모시, 만일 이 금붕어가 자라다가 나이가 들어 늙어 죽으면, 저절로 순금 덩어리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엄청난 부자가 될 겁니다." 돈에 대한 욕심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던 티모시는 거의 이성을 잃고, 그 '금붕어'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티모시는 이 '금붕어'를 조그만 물통 속에 넣어 주고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고기는 기쁘게도 아주 빠른 속도로 자랐기 때문에 티모시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순금 덩어리를 만져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붕어'는 조그만 물통에 담아 두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습니다. 그래서 티모시는 많은 돈을 들여서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조그만 호수를 파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티모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라나기만 하는 이 '금붕어'를 먹이고 보살피느라 전 재산을 다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티모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어서 그 물고기가 자라기를 멈추고 죽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물고기보다도 티모시가 먼저 늙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수중에는 이제 재산이라고는 단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티모시는 그 물고기가 '금붕어'가 아니라 새끼고래였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향락주의로 인해 우리들이 이 '티모시'와 같은 이런 위협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군중, 세관원들, 군인들에게 각자 신분에 걸맞은 회개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시오. 세관원들에게 여러분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 군인들에게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여러분의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루가 11,11-13)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재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회개의 삶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동물적인 단계를 벗어나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눔의 행위란 자신의 모든 부정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사리 사욕에 물들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는 이타적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진실한 행위, 곧 자선이란 내가 쓰고 남은 것을 남에게 적선하듯 주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갇혀 있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나의 삶을 전향시키는 전인적인 행위이지 않을까요? 결국 자선이란 근본적으로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대면하여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진실한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들은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그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줄 줄 알았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권력이나 기득권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만을 신뢰하면서 자유롭게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인간다운 사람만이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우리 주변이 특히 어려울 때 자선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가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에만 도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들 나눔의 행위야말로 가장 살아있는 믿음이, 행복한 삶을 창조하는 비결입니다.










36.             대림 제3주일        마태 11,2- 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이석재 신부



“당신은 메시아이십니까?"

메시아의 선구자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십니까?"하고 여쭙는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메시아이다'라는 직답을 피하신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들(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을 전하게 하신다. 이로써 당신이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해방과 기쁨'을 선사하는 메시아임을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치유하시어 병마로부터 해방시키심으로써 기쁨을 선사하셨다. '해방과 기쁨' 을 선사하는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이 시작하신 사업을 세상 끝날까지 이어가도록 명령하셨다.(마태 28,12-20).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어떻게 '해방과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기적(=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제대로 걷게 하며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는 일)'을 일으켜 '해방과 기쁨'을 선사할 수는 없다. 그렇다 어떤 방법으로?



요즘 우리나라는 IMF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하루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빵 한 조각이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웃에게 내가 가진 빵을 나누어줄 때 그들을 배고픔의 고통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방의 기쁨'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어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37.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허중식 신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제대 앞에 대림초 3개 빛을 밝히어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제 3주일이며, 아울러 자선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 볼 때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가 치유되고 죽은 사람은 되살리는 기적들과 나의 행적들을 보고들은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8-10장을 볼 때 예수께서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과 중풍환자, 벙어리, 소경, 나병환자, 귀머거리를 고쳐주시고,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등 여러 가지 기적들을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 11장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치유 기적을 베푸시는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행복하다.’는 경고와 동시에 축복이 담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제2독서인 야고보서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으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다리라고 전하고 있으며,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지 바빌론에서 당하는 억압과 고통 속에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어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실 것을 전하며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고 선포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 제2독서, 복음은 모두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리라는 희망과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이며, 우리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에 찬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과 기다림 속에서 살고있으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성당에 모여 하느님께 비를 청하는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성당에 모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신부님께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비가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산을 들고 오시는 분이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말뿐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이며,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확신의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우리 안에 모셔들려는 마음은 아내와 자녀들이 늦게 들어오시는 가장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부모님들이 늦게 들어오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혼자 집을 지키는 자녀들이 부모님이 빨리 들어오시기를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입니다.



또한 농부가 심한 가뭄으로 갈라져 가는 논바닥을 바라보면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며, 부모와 학생들이 합격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마음이며, 첫눈이 내리면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을 생각하며 첫 눈을 기다리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찾아오시리라는 희망과 기다림은 우리 자신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생동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욕정 등 인간적인 욕망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하느님 없이 살수 있다는 삶 속에서는 주님을 기다릴 수 없으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우리를 차장오시는 주님은 오시면 좋고  오시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던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시어 그들을 사회로 돌려보내시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순교성인들이 자신의 목숨가지 내어 바치면서까지 믿었던 분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불의에 의해 우리가 겪는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키시며, 인간의 온갖 욕망으로 인하여 상실해 가는 인간성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 인간성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얼마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모셔들이기 위하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체 잎에서 내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범한 모든 잘못들에 대해 진심으로 통회하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고백성서를 받아야 합니다. 나아가 때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마음과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며 희생과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대림 3주일을 자선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자선은 금전이나 물질을 희사하는 것만으로서는 부족합니다.



자선 속에서 회개와 속죄의 뜻이 담겨져 있어야 하며, 가난한 나그네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는 내적인 준비가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주님을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예언자적인 사명을 성실히 수해하고 주님의 길을 미리 닦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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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0:05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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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8.xxx.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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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 3 주일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

제 1 독서 : 스바 3,14-18

제 2 독서 : 필립 4,4-7

복 음 : 루가 3,10-18



해설

대림 제 3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는 기원과 기도의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는 입당송의 어조가 제 2 독서에서 더 폭넓게 강조되고 있고, 본기도에서는 주님께서 다가오는 성탄절에 당신 백성들이 “구원의 신비를 즐거운 마음으로 거행하게”해달라고 기도함으로써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쁨의 파동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읍니까?”(루가 3,10)하고 요르단 강변에서 물어오는 사람들에 답변하는 세례자 요한의 엄한 권고에 의해서조차도 그치지를 않는다. 사실 요한도 메시아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17절)에 태우러 오실 것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간에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구원해주신다고 선포함으로써 오늘 복음 내용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복음을 선포하였다”(18절).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특히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인 스바니야의 조그만 예언집 끝 부분에서 취한 오늘의 제 1 독서는 이와 같은 기쁨의 분위기로 들떠있다. 여기서 유다의 온 나라들을 대표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찬미하고 있는 그 짤막한 노래는 귀향살이가 끝남과 포로가 되엇던 자들이 돌아외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기쁨의 동기는 구체적으로 볼 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 첫째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시고’ ‘원수들을 쫓아 내시어’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점이고, 둘째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더 이상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실 것을 약속하는 점이다 :“너를 구해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17-18절).

‘명절’이라는 말을 유의해 보자.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항상 새로운 만남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만남에는 히브리 사람들의 모든 종교적 축제가 갖는 기쁨과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축제적 차원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괴로움과 슬픔으로 죽어가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다시 찾아내야 할 차원이다.

그런데 그 기쁨의 두번째 동기는 바로 그 ‘영속적’특성 때문에 스바니야 예언자의 기쁨에 찬 찬미가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초월한다 : 자기 백성들 가운데 용맹한 구원자(15.17절)로서 서 있는 신은 그리스찬 문학에 있어서 확실히 메시아로 이해된다. 마태오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한다(마태1,21 참조).

이사야 예언서(12,2-6)에서 취한 층계송도 야훼에 의해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야훼님 날 구하시니 신뢰하며 겁내지 않으리라. 야훼님 나의 힘, 내 굳셈, 내 구원이시로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2-3).

그 결론은 이 세상 모든 백성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야훼님 찬미하며 그의 이름 외쳐 부르고 그의 큰일들을 백성에게 알리며 높으신 그 이름 마음에 새겨두어라. 야훼님  찬미하며 야훼님 위업을 온 세상에 알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위대하시니 시온에 사는 이 모두 기뻐하며 찬미하여라”(이사 12,4-6).

이 내용은 분명히 앞서 본 스바니야 예언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바니야 예언서의 내용이 이사야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여기서도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해 이미 행하신 것 외에 특히 중요한 것은 장차 하실 일이다:“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위대하시니 시온에 사는 이 모두 기뻐하며 찬미하여라…”(6절)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하느님이 항구히 당신 백성들 가운데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또한 매순간 그들을 구원해주시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그 육화의 신비에 서 명백히 입증된다. 보다시피 여기서도 깊이 숙독해 보면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대림시기에 전례는 상징적 의미가 풍부히 들어 있는 이사야서의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3절). 성예로니모는 이미 이러한 일반적 구원 외에 더 나아가 구원자 즉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 자체가 성서 속에 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찬미가는 더욱 큰 기쁨에 잠겨 있는 것이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임 말했듯이 기쁨이라는 주제는 제 2 독서에서도 장엄하게 계속 되고 있다. 우리는 제 2 독서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이미 입당송을 통해 들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필립 4,4-5)

우리는 지금 인간적 성실성과 책임에 대한 내용으로 충만해 있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결론 부분을 대하고 있다. 그 편지에서는 처음부터 (필립 1,4.18.25 ; 2,2.17.18.28.29 ; 3,1 ; 4,1.4.10참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전파에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특히 믿음의 기쁨 등 ‘기쁨’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기쁨의 동기에 또 다른 동기가 하나 첨가되고 있다. 즉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우리는 생활의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에ㅣ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도래’는 고통 ‘뒤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 ‘안에’ 들어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윤리적이든 육체적이든 영신적이든 고통중에 있는 바로 그때 ‘가까이 와’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는 즉시 이어서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라고 한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6-7절).

그러므로 바올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때문에 우리의 모든 요구와 청원을 들어 도와주러 오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6절). 이렇게 해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7절)-정상적인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 스며들어 때때로 격해지는 우리의 정신적 긴장과 고통과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육체의 본능적 거부반응을 진정시켜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은 극적 사건과 고통을 통해 또한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을 통해 생겨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입니다. 기쁨으로 당신들은 생기를 얻을 수 있읍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잡지 못하게 하십시오“(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시오”



오늘 복음인 루가복음에서는 다른 독서들과는 달리 기쁨의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역시 같은 주제가 담겨 있다. 사실 주인공은 여전히 같은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도래에 대비하여 준비시키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세례자 요한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깁므의 동기가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루가 3,15-17).

요한이 자기 자신과 메시아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이와 같은 성실하고도 솔직한 비교를 통해 메시아의 우위성이 드러나고 있다:그분은 ‘더 훌륭한 분’(16절)이시다 ;그분은 성신강림절에 보게 될 것처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 그분은 ‘키’라는 상징을 통해 나타나고 있듯이(17절) 인간들의 마음을 가려내는 ‘심판자“의 권능을 갖고 계시다. 그런데, 메시아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베푸시는 그 풍요한 선물들을 왜 즐기지 않는가?

심판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두려움을 야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오늘 복음 첫부분에 나오는 요한의 설교도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고 물으며 그에게 몰려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주는 엄한 윤리적 경고를 포함시키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평온과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다. 사실 그는 구원이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한다 : 즉 구원은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들 속에 그리고 가진 것이 많든 적든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하고 대답하였다. 세리들이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읍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정한대로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하였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하고 일러 주었다”(루가3,12-14).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칼을 드는 군인이든, 세금을 거두는 세금징수원이든-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12절)

보다시피 요한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이미 복음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가르쳐줌으로써 우리 마음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매순간순간에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즉 군인이 되었든 세금징수원이 되었든, 법률가가 되었든 교황이 되었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머물며 활동하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분의 ‘대림’은 바로 그곳에 있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본질적이고도 깊이있는 기쁨을 주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이며, 오늘 전례는 바로 그러한 기쁨에 들떠 있으며 또한 확신에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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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47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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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2주일



19. 홍금표 신부(다) / 33        20. 서경윤 신부(다) / 35

21. 최경환 신부(다) / 36        22. 남해근 신부(다) / 38

23. 김몽은 신부(다) / 39        24. 신은근 신부(다) / 41

25. 강영구 신부(다) / 42        26. 교구주보 (다) / 46

27. 장영희.마리아(다)/ 47       28. 강길웅 신부(다) / 48

29. 방윤석 신부(다) / 50        30. 유영봉 신부(다) / 53



19.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대림절의 사람과 세례자 요한

                                                        홍금표 신부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서울과 평양에서는 각각 100명씩의 이산 가족들이 반세기만의 감격적인 가족 상봉을 하였다. 이런 만남이 가능하게 된 것은, 지난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이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남북의 두 정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두 정상의 뒷면에 가려진 많은 이들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즉,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한 이들, 정상의 의지를 담아 남북 공동선언문을 기초한 이들, 그리고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음지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역할이 그것이리라!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회담자체도 민족의 50년 냉전의 장벽 붕괴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 맺힌 이산가족의 만남도,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남북관계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나 여겨진다.

  

어느 사회이든, 그 사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올바른 선택과 그 선택을 뒷받침 해줄 협력자들의 도움이 있을 때 가능하리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남 뿐만 아니라, 드러남 뒤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역할, 마치 드라마에 비유래 이야기한다면 주연을 빛내기 위한 조연들의 역할도 인간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루가 복음을 통해「대림절의 사람」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된다. 이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탄생하신 분으로 공적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당시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요한 11,11)라고 이야기 하셨을 정도고, 오늘날까지도 요한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보아서도, 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분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원래「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이사야서 40,3절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의 임무는 당시 바빌론 유배 생활 중에 있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 성서에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골짜기와 산과 언덕을 없애고 큰 길을 내는 것과,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고, 백성들이 하느님과 하느님이 선물로 주실 해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과 여건을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하기 위해 활동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이러한 호칭을 적용시키는 것도, 세레자 요한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고, 하느님의 구원을 백성에게 드러낼 준비자로 소개하기 위함일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6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구원은 바로 예수님을 뜻하기에(루가 2,30)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공적 활동을 준비하고, 백성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회개와 세례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준비 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례자 요한에게 적용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표현은, 때로는 멋있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가 수행해야할 일들은 결코 멋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역할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철저히 음지에서 일한 이들의 역할 일 수 있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하 시켜야 하는 조연의 역할일 수도 있고, 요한의 표현대로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요한 3,30)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 -충분히 중심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던 분이고, 자신을 스승으로 따르는 일단의 제자들을 거느리셨던 분- 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철저히 무로 돌려야 하는 그 같은 역할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개인과 소집단의 이익보다는 민족과 전 인류의 선익에 시선을 줄 수 있는 대범함을 가지셨던 분이었기에, 그 역을 자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이야기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이 아닐까? 조연의 삶보다는 주연의 삶만을 탐내고, 전 공동체와 민족의 선익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관계된 소수의 집단 이익만을 고집하고, 하느님보다는 자신을 찾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대림절의 사람」 요한의 삶이 그리워지는 시기이다.





20.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라.

                                                          서경윤 신부



초인종을 누른 후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마도 잠을 자고 있었던지 아니면 옷을 갈아 입느라고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려니 생각했습니다.

 내가 불쑥 찾아가면 까무러치게 반가와 할 줄  알았는데 어찌나 당황해 하고 난감해 하던지…. 혹시 다른 손님이 계신가 하고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어색하게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면서 ꡔ미리 연락하지 않고 와서 미안하다ꡕ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탁자 위에 커피 한잔 올려주고는 내게 잠깐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서운하고 화도 났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하, 그랬었구나! 남편은 출근했고 아이들은 다 학교에 가고 없는데 아무리 신부지만 남자가 부인 혼자 있는 아파트를 방문하다니, 경비원 아저씨 보기도 그렇겠고 혹시 이웃 아낙네들의 시선도 의식해야되고 그래서 그랬었구나!


그래도 그렇지, 그럼 그렇다고 말로하면 될 것이지 사람을 여기 이렇게 앉혀 놓고 나와보지도 않다니 이건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아마도 「빨리 돌아가라는 신호인가보다」 생각하며 「그래, 빨리 돌아가자, 그래야 이 집도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오해도 피하고 나도 오랜만에 서울 와서 찾아볼 곳도 많은데 이렇게 바쁜 내가 어디 갈 데가 없어서 여기에 왔나? 그리고 다시 여기 오나 봐라, 평소에 가끔 만날 때마다 나더러 서울에는 자주 올라오는 모양인데 왜 자기 집만 한번도 들리지 않느냐고 불평 비슷하게 말하던 것도 다 빈말이었구나!」 생각하니 배신감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이제 당신네 말은 안 믿어, 찹쌀떡은 찹쌀로 만든대도 믿지 않을테니…」 커피 맛이 유난히 쓰게 느껴졌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갑자기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오시면 오신다고 미리 말씀하셔야 이쁘게 하고 기다리지요. 이렇게 갑자기 오니까 집안 청소도 안돼 있고 화장도 못했는데, 이런 실례가 어디 있어요? 바쁘게 하느라고 화장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그제사 나는 왜 그가 그렇게 당황하고 난감해 했는지 그리고 나를 여기에 오랫동안 혼자 앉혀 두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아직 집안 아침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내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청소되어 있지 않은 집안과 정리되지 않은 살림살이 때문에 나한테 칠칠맞은 여자로 보일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나한테 보이기 위하여 그랬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흐뭇하고 나이를 먹어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기까지 했지만 또 한편으로 내 심기가 불편했던 점도 있고 해서 약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날짜를 정해 놓고 해마다 12월 25일에 오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대림시기 동안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가 봅니다. 신자들은 오시는 그분을 환영하려 몸과 마음을 청소하고 정리정돈하며 그 분에게 잘 보이고 좋은 평가를 받으려 합니다. 적어도 사람인 내게 잘 보이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신경을 써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편히 오실 수 있도록 그분이 오실 길을 미리 다듬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굽은 길을 바르게 만들라.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추어라. 굽은 데는 바르게 하고 험한 데는 평탄한 길이 되게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가 3,4-6)

방문 날짜를 미리 정해 놓고 또 준비할 기간도 길게 잡혀 있으니 준비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면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리 자신 안에 오실 그분을 위하여 준비합시다. 그리고 자주 그분을 모실 준비를 점검해야겠습니다. 나아가 문밖 오시는 길까지, 환영할 채비를 차려야겠습니다.


대림 둘째 주간에는, 집안을 청소할 때마다 가재도구를 정돈할 때마다 하다못해 옷가지 하나를 집어걸고 책상의 책을 책꽂이에 꽂을 때에, 화장을 하거나 비단 머리를 빗고 손질할 때에는 꼭 우리 마음도 함께 손질하고 다듬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 곧 그분이 오실 길을 「평탄한 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1.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회개하시오!

                                                           최경환 신부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루가복음 3장 1절부터 6절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잘 들으셨을 것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세상을 멸망에서 구해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림을 준비하는 이때에 죄 많은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적절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첫째 :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박아주신 양심 - 이를 어기고 배반했을 때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내려주신 영생에 이르는 법을 어겼을 때 이를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죄란 양심법에 토대를 둔 국법이나 사회법을 어기고 배반했을 때 이를 또한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둘째 : 그러면 죄와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는 정 반대인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죄요, 또 하느님이 스스로 세상에 오시어 죽으신 이유도 죄 때문인 것입니다. 죄는 우리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예수님도 죄 때문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란 인류와 예수님께 죽음을 가져다 준 악 중의 악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죄를 그대로 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영혼의 영원한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요, 멸망에 따르는 끝없는 혹독한 벌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주고, 멸망을 가져다 주었으며, 전 인류에게 가장 쓰라린 고통을 안겨다 준 죄,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인도한 죄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죄의 용서를 받는 방법과 또한 용서받은 우리들에게 내려 주시는 풍부한 상급에 대하여 똑똑히 말씀해 주십니다. “회개하시오” 이 회개라는 말은 보통 냉담자나 믿지 않음에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만 쓰는 말로 알아듣지만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직접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인 성녀들도 말씀하시기를 하루에 일곱 번 이상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짓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원죄로 인해 나약해진 우리 본성은 죄를 짓게 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반성해 봅시다. 과연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하루를 살았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개란 말은 매일매일 몇 번씩이고 회개가 필요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이사야 예언자는 회개하는 방법을 더욱 더 자세히 풀이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뫼는 깎아 내려라” - 이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대죄를 없이하라는 말씀이요, “작은 뫼는 깎아내려 굽은 길이 곧아지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힘과 기력을 약하게 하는 소죄를 없이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 우리 마음이 죄의 때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깨끗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의 행복인 하느님을 보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 앞에 겸손 되이 꿇어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매를 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 그릇을 깨고 어머니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매를 드는 비정의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 부모를 배반하고 집을 나갔던 자식이 다시 돌아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부모 앞에 다소곳이 꿇어 눈물로써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발길질을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사랑보다 몇 백배, 몇 천배 강한 사랑의 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주님의 사랑과 인자의 성사인 고백의 성사를 타당히 보고, 회개하고 회심하여 주님의 구원을 보도록 해야하겠습니다.









22.         대림 제 2주일 루가 3,1-6 (다)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

                                                        남해근 신부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부인은 급히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였습니다. 외항선을 타는 남편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부인은 온통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하던 생각과 일을 그만두고, 온전히 남편 생각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성껏 단장을 하였습니다.



그뿐더러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는가 하면, 남편을 위해 빠진 것이 없나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온 집을 돌보고 손질을 합니다. 이렇게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의 마음과 행동은 온전히 남편을 향해 있습니다. 이 부인에게는 남편을 믿는 마음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주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 자세”입니다. 이것 또한 기다리는 사람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자는 우리 마음의 초인종을 울리면서 주님의 오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의 길을 닦으시오. 높은 언덕을 깎아내려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길을 바로 하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여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루가 3,3-5). 요한은 주님의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들에게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바로 위에서 남편의 소식을 들은 부인의 자세와 행동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부인은 소식을 듣고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주인에게로 생각을 완전히 돌렸듯이, 세상의 일과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골몰하지 말고 우리 마음의 눈을 주님께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부인은 온전히 남편을 향하여 마음이 부풀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집안을 청소했습니다. 세자 요한은 그와 같이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돌보고 오만과 자만의 언덕을 겸손으로 깎아 내리고, 무지의 골짜기를 하느님에 대한 지혜로 채우기 위해 성서를 읽고 교리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마음을 정직한 마음으로 고쳐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과 같이 그분을 믿고 만나게 될 기쁨과 희망에 부풀어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우리는 그분이 벌써 2천년 전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지금 우리들 사이에 계십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아무도 모르는 결정적인 날, 종말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대림절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의 중요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대림절은 구세주께서 오신 성탄과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온(와 있는) 과거에 대한 기쁨을 되씹는 시기인 동시에, 부활하여 우리들 사이에 계시는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과, 그분이 오실 결정적인 날을 기다리며 생활을 개선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바로 대림절은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안에(우리 각자 안에) 그분에 오시도록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방해되는 것이 없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흔히 우리에게 깊이 뿌리박고 주님의 오심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대림절에 특히 끊어버리기 힘든 나쁜 습관 하나씩 고치기로 합시다. 이 악습은 깊이 뿌리박고 있기에 보통 각오로써는 실패합니다. 특별한 각오로 희생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세자의 말씀을 항상 생각합시다.

“회개하고 주의 길을 닦으시오. 높은 언덕을 깎아내려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길을 바로 하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여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루가 3, 3-5).









 23.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김몽은 신부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 오 년째 되던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이두래아의 드라코니디스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였으며 아빌레네 지방의 영주는 리사니아였다. 그런데 안나스와 가야파가 당시의 대제관이었다. 바로 그때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요르단강 주위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에 있는 말씀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뫼는 깎아내려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온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을 때’는 왔다. 오늘은 C해 대림 2주일로서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가에서 전도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우리들이 오늘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 세자(洗者)의 말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최초의 말씀도 역시 <회개하라>(마르 1,15)는 것이었다. 메시아를 맞이할 인간은 우선 그 인생관과 우주관,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회개’란 좁은 의미에서의 죄를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진정한 방향 전환, 180도로 완전히 전향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확실히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의 내림에 대한 선구자로서 이사야 예언서에서 말한 <엘리야>인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뫼는 깎아 내려,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온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야 4,3-5). 물론 이 말은 이사야가 그 당시 바빌론의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백성들에게 한 말이지만, 이 예언은 좀 더 높은 영신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들의 마음에는 눈에 보이는 얄팍한 현실적인 면에만 집착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다 존귀하고 보람 있는 영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둔감하다. 그러기에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교만과 독선으로 스스로 높은 체하고 있으며, 시기와 불목으로 분열되어 있다. 반항과 불만으로 그 마음들은 몹시도 굽어져 있으며, 인색함과 탐욕으로 마음은 더럽혀져 있다. 그리하여 물질적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 현대인은 영신적으로 자기 마음의 고향을 지니지 못한 채, 영원히 정착도리 길 없는 욕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신적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통회와 함께 제 자리를 찾고, 영신적인 노예 상태와 유배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 완전한 자유와 안정된 기쁨의 생활로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목자이며, 스승이시고 최고의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외치는 선구자가 곧 요한이다. 선구자 요한은 오늘날에도 다시 회개하지 않고 탐욕과 교만과 허영과 쾌락의 생활에서 그 메꿀 길 없는 한없는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향해 외치고 있다. 그의 소리를 듣고 마음의 길을 닦는 자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들 믿는 자들도 역시 세속적인 것에 더 마음을 쓰고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고 있을 때, 그 결과는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언제 주님이 내림 하시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해나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선구자는 외친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생활로 마음의 준비를 갖추라고!



24.        대림 제2주일   (루가 3, 1-6) (다)     회개  

                                          신은근 신부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친다.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엎드려 뉘우치는 모습, 슬픈 얼굴로 앉아있는 모습이 아닌지. 너무 쉽게 우리는 회개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뉘우치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회개의 본질에 가깝다. 뉘우침은 새 출발을 돕기 위한 행동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지난날을 뉘우치며 아파하는 것이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뉘우침이 클라이맥스가 되어 회개를 온통 그쪽으로만 맞추어서는 곤란하다. 새 출발을 위한 뉘우침이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반성인 것이다. 이를 소홀히 하였기에 열심히 뉘우치면서도 새 출발은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내가 잘못 되었구나' 에서 '다시 시작해야지'의 자세로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성숙한 모습이다.



올해는 대희년이었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해였다. 한 해를 마감하며 감사와 희망으로 연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사회는 불안해지고 있다. 들리는 소식도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사회 전체를 개인인 우리가 어떻게 할 순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는 있다. 우리 역시 어둡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면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잘못된 것은 고치고 올바른 길로 새 출발을 시도해야 한다. 이것이 대림 제2주일의 교훈이다. 세상이 불안하기에 사람들은 돈과 물질에 집착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물질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물질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보다 돈의 위력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회개해야 한다. 돈의 위력은 짧지만 사랑의 힘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뢰는 언제나 내 쪽에서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힘과 사랑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내가 먼저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불안과 어둠은 극복될 수 있다. 먼저 가족 안에서 이것을 실천하자. 이것이 회개를 실천하는 길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ꡒ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깎고 굽은 길은 곧게 하여라. 복음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불신의 골짜기와 미움의 언덕, 불만의 굽은 길을 깎고 메우라는 말씀이다. 올 한해 우리는 정말 골짜기와 산이 교차되는 삶을 살아왔다.

이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것을 평탄케 해야 한다. 그 첫 행위가 회개인 셈이다. 회개의 본질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 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2월의 끝에 성탄절이 있다는 것은 섭리다.



아기 예수님처럼 다시 태어나 새해를 맞이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새롭게 시작하면 희망할 수 있고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을. 인생은 결국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기억하며 대림절을 보내자.











25.        대림 제2주일 <루가 3,1-6>(다) 골짜기를 메우고 봉우리를 깎고 ---

                                                          강영구 신부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 대림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의 시간입니다. 동시에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모든 기다림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는 누구를 기다리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스스럼없는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은 특별한 준비가 없어도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답게 맞이하기만 하면 될 터이니까 말입니다.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일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정성이 담긴 따뜻하고 정갈한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는 갈아 입힐 옷과 따뜻한 잠자리를 준비할 것입니다.

  

혹시 이 고장에 대통령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대단한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도로를 정비하고 길가의 집들은 페인트칠을 해서 새롭게 단장하고 거리에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 것입니다. 그리고 경찰들이 나와서 길거리를 경비하고 공무원들은 대통령이 다녀갈 때까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준비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기다리는 분,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대통령도 아니고 고관도 아닙니다. 우리의 친척이나 친구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설레는 가슴으로 기다리는 분은 이 세상을 완성하실 분,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실 주님, 이 세상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은 당시 메시아를 대망하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회개하는 생활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은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예언자 이사야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고 고르게 하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깎아서 평탄하게 하고 굽은 길은 곧게 만들고 돌멩이 자갈 등으로 험한 길은 고르게 하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무슨 도로 공사 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을 잘 마련하기 위해서 도로 공사를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로 공사를 하듯이 우리 삶의 길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마음 길을 바르게 잡는 것이 회개입니다.

  

먼저 모든 골짜기는 메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슴속에는 무수한 골짜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작은 골짜기이지만 어떤 골짜기는 너무도 깊고 넓어서 메우지 않으면 도무지 건너지도 또 서로 만나지도 못할 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골짜기들이 우리의 가슴속에 있습니까? 불신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이 불신의 골짜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부부 사이를 갈라놓고 부모 자식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이웃과 형제들을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합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깊은 불신의 골짜기가 있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가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산다고 해도 서로 불신하면 천리 만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불신하면 가족이 한 집에 산다고 해도 남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불신의 골짜기 때문에 갈가리 찢겨져 있습니다. 모두가 도둑놈, 사기꾼, 거짓말쟁이 같아서 도무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신의 골짜기를 메우지 못한다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신의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무조건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믿어 주는 것입니다. 불신을 극복하는 길은 신뢰하고 믿어 주는 길말고는 없습니다. 백 번을 다짐하고 확인하고 그리고 보증서를 받는다 해도 속이고자 하는 사람을 당해 낼 재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믿어 주면 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 죄인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서로 형제가 되게 해주신 주님을 어찌 불신으로 깊이 패인 가슴으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믿어 줍시다. 서로 신뢰함으로써 불신으로 갈가리 찢어진 이 사회를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며 한 형제가 되는 그곳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주님께서 오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시 말합니다.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깎여져서 평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 가슴속에는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많은 언덕들도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 산봉우리들과 언덕들도 깎아서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산과 언덕들입니까? 교만하고 오만한 생각, 자기가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따라보지 못하는, 말하자면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생각들이 산봉우리고 언덕들입니다.


 돈과 재물을 좀 지니고 있다고 해서 오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권력을 지녔다고 뽐내는 사람들, 자신의 재능과 재주를 뽐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산봉우리가 있고 언덕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황금 만능과 권력 제일주의로 타락했기 때문인지 무엇을 좀 지녔다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오만 방자합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위에 아직도 가난한 형제들이 많고 방 한 칸이 없어서 전셋집을 이리저리 전전하는 형제들도 많은데, 호화사치 과소비를 걱정해야 한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도대체 누가 향락 퇴폐 업소를 찾아다니며 누가 과소비와 사치를 일삼습니까? 무엇인가 좀 가진 사람들이 이런 짓들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돈과 권력 따위를 과신하는 오만함의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어서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가난한 형제들의 한숨 소리도 듣지를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함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가진 자들의 이런 오만 방자함 때문에 계층간의 위화감은 더욱 깊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의 상대적인 빈곤감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교만과 오만함 그리고 허영심의 산봉우리들은 하느님을 만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뿐 아니라 형제들과의 만남도 가로막습니다. 이런 산과 언덕들이 높게 솟아 있는 곳에 사랑의 주님께서 오실 수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회개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솟아있는 이런 산들과 언덕들을 깎아 내려서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므로 늘 감사하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된 마음으로 모든 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므로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삶의 방법을 고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굽은 길은 곧게 그리고 험한 길은 고르게 해야 한다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시기, 질투하는 마음, 남이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남이 잘되면 배아파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는 마음, 이 모두가 우리 가슴속에 있는 굽은 길, 험한 길 아닙니까? 우리 가슴속에 나 있는 이런 굽은 길, 험한 길을 사랑과 용서 그리고 관용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잘못을 너그러움으로 용서할 때 여기 이 땅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되고 그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간이자 회개의 시간입니다. 회개란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며 입으로는 회개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이고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이렇게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크고 대단한 것을 하려 하기보다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갑시다. 그래서 이 땅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 갑시다. 그 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서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26.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1. 복음 이야기

 

루가 3장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대략 33세쯤 되어서 공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오년은 대략 서기 27년으로 예수께서는 이 무렵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네 복음서는 예수께서 서기 27년에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을 공생활의 첫 번째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 시기를 여섯 번에 걸쳐 로마 정치가들 및 유다 종교가들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뿐 아니라 곧이어 실현된 예수님의 출현이 세계사적인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오년은 서기 27~28년경입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서기 26~3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가이사리아에서 정무를 보았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서기전 4년~서기후 39년에 갈릴래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영주였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와 이복 동기간인 필립보는 서기전 4년~서기후 34년에 이두레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리사니아는 서기 36년까지 다마스커스 서북부에 있는 아빌레네 영주로 군림했습니다. 안나스는 서기 6~15년에 대제관으로 재직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 출현한 때에는 전직 대제관이었습니다. 가야파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서기 18~37년에 대제관으로 재직했습니다(루가 1,2a).

  

이런 세계사적인 시기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2b절).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 주변을 두루 다니며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3절). 루가는 이사야 40,3-5를 인용하여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밝혔습니다(3-5절). 그리고 그는 온 인류에게 있을 “하느님의 구원”을 예고했습니다(6절). 여기 “하느님의 구원”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2. 우리의 이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세례운동을 펼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릴 종말이 임박했으니 서둘러 회개하라고 외친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는 종말의 날이 들이닥쳐 세상이 심판당하기 전에 반드시 예언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말라 3,23-24; 집회 48,10-11).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해 있다가 종말 직전에 내려와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재건하리라는 믿음이 유다인들 사이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야도 오지 않았는데 메시아가 왔다고 하면 당시 유다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가를 비롯한 공관복음서는 사람들이 몰라보았을 따름이지 엘리야는 이미 왔었고,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였다고 이야기합니다(마르 9,13; 마태 17, 12-13).

  

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으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오실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끈을 풀어 주는 법인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그런 일을 해 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비록 시기적으로는 예수님보다 먼저 출현했지만 그는 다만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루가는 이사야 40,3-5을 인용하여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밝혔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니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라. 골짜기는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추어라.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의 교회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높고 낮은 것은 평등하고 고르게 하며, 굽은 것은 곧게 펴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함으로써 교우들로 하여금 홀가분하게, 자유롭게, 신명나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27.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마음의 푯말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저희 동네 어떤 영어학원 문 앞에는 ‘꿈도 영어로 꾸자!’라는 푯말이 붙어있습니다. 좀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어떤 비장함까지도 느껴지는 그 글귀를 볼 때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을 연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벌써 몇 달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다니 동네엄마들 사이에 인기도 대단한 모양입니다.



언젠가 그 학원 앞을 지나는데 예닐곱 살 먹은 아이 둘이 길다란 막대를 들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또 다른 아이를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슨 징그러운 물건을 건드리듯,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간혹 서로 마주보고 웃어가며 두 아이가 팔을 길게 뻗쳐 막대로 치고 있는 아이는 가만히 보니 옆집 용민이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로 말하거나 걷는 것을 힘들어하는 용민이는 마치 그런 일에 익숙해있는 듯, 아이들이 막대로 건드릴 때마다 가끔씩 올려다 볼 뿐, 그저 자기놀이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학원 선생님인 듯한 젊은 여자가 나오더니 용민이에게 “얘, 너 다른 데 가서 놀아라” 하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학원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데리고 들어가면서 여자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열심히 영어로 얘기했습니다.

  

영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비 외교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끔 많은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세계화 시대에는 무조건 유창하게 영어만 잘하면 만사해결이고,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다른 무엇보다 우선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는 단지 많은 의사소통 방법 중의 하나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 한다해도 마음이 없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어린아이에게 꼭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인내심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길다란 막대로 다른 아이를 건드리는 아이에게서 막대를 빼앗고 함께 손을 잡게 해주는 것이 영어단어 한 두개 더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서로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 하느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인간들이 각기 다른 말을 하게 하셨지만 대신 사랑하는 마음, 지구 어디에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어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가슴마다 ‘꿈도 영어로 꾸자’가 아니라 ‘꿈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자’라는 마음의 푯말을 미리 달아 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28.              대림 제2주일 (다해)   알고 뉘우쳐서 돌아가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바룩 5,1~9 (하느님께서는 너를 빛나게 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필립 1,4~6.8~11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복 음 루가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요한은 예언자 이사야와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대림절 전례에 등장되는 중요한 세 인물 중의 한 분입니다. 그의 역할은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데 있었으며 그는 또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종교도 창설할 수 있는 추종자들도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능가하는 백성의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는 야심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이웃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참으로 답답하고 암담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요한을 가리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으며 또한 요한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한(말라 4,5) 주님보다 먼저 오기로 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14).



오늘 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닦는 최고의 방법으로서 '회개'를 역설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길은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이 아니며 바로 우리 마음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회개에 대해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가 성서에 몇 가지 나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함'이라는 말과 '슈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함'은 '뉘우친다' '슬퍼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슈브'는 '돌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종합하면 회개란 자기 죄를 뉘우쳐 서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 참조)에 보면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몽땅 탕진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알거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아버지께 죄를 지은 줄 알고 뉘우치게 됩니다. 이것이 나함입니다. 그러나 나함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부족합니다.



작은 아들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아버지로부터 혼날 것이며 아마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내쫓을 것입니다. 그래도 작은 아들은 돌아갑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슴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께 사정하기 위해서 돌아갑니다. 이것이 슈브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주님께로 돌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대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 기차를 탔는데 한참 가다 보니 대구가 나왔습니다. 기차를 잘못 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얼른 역에서 내려서 기차를 바꿔 타야 합니다. 그래야 서울로 갑니다. 만일 기차를 바꿔 타지 않고 부산행 열차 안에서 아무리 선행을 베풀고 기도를 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줄을 알면 뉘우쳐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술에 중독된 젊은이가 있는데 마치 폐인처럼 몸이 아주 쇠약해 있었습니다. 술만 먹으면 밥을 먹지 못하니까 영양실조가 돼서 멀쩡한 사람이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술을 하루라도 참으면 밥맛이 나고 기운이 나는데 술이 나쁜 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나함은 되는데 슈브가 안됩니다.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알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또한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처량한 것도 없습니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돌아가면 아름답게 됩니다.



신자도 아닌 어떤 형제가 하루는 저를 찾아와서 자기 인생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자기 인생과 가정까지도 다 파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고백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자신을 알고 뉘우쳐서 돌아선다는 것은 장미처럼 아름답고 백합처럼 깨끗한 일입니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또한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씻겨집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회개해서 돌아오는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모르면 돌아가지 못합니다. 주님 이 동쪽으로 오시는데 우리가 서쪽으로 가서 길을 닦는다면 그는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어떤 형제가 고해성사를 보는데 냉담한 지 3년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냐고 신부는 너무도 반가워서 그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성당만 안 나왔지 별 죄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3년이나 됐으니 죄를 다시 생각해 보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죄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흐려져 있으면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흙탕물이면 자기 죄가 안 보입니다. 죄를 모르면 고칠 수가 없고 자신을 알지 못하면 평생 불구자처럼 됩니다. 따라서 이 좋은 대림 시기에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닦도록 합시다.









29.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우리는 600만불의 사나이

                                                    방윤석 신부



  미국 예일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모르비츠 박사는 인간의 육체를 돈으로 환산해 본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인체내에 있는 화학물질인 효소, 단백질, 아미노산 등 생화학 물질들만 뽑아낸다고 하면 그 값이 6백만불이나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6백만불의  사나이」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살아있는 세포로 만드는 데는 6천만불을 들인다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값비싼 존재이고, 귀한 존재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주인이 노예를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었다. 로마의 황제가 어느 귀족 집에 초대받아 갔다. 황제를 대접하려고 저녁상을 차리던 노예 하나가 유리컵을 깨뜨렸다. 그 집에서는 노예가 유리컵을 깨뜨리면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다. 그 노예는 살려달라고 주인에게 애걸했지만 주인은 거절했다. 이를 지켜본 황제는 신하를 시켜 그 집에 있는 유리컵을 모두 가져오라 하여 한꺼번에 왕창 깨뜨려 버렸다. 안그러면 그 컵 수효대로 많은 노예가 죽음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리컵 하나와 한 사람의 생명을 맞바꾸던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가미가제라는 군대를 만들어 철부지소년들을 비행기에 태워 그 비행기와 함께 적진에서 자폭시키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망했다. 유태인을 6백만명이나 살해했던 아이히만과 히틀러가 망했다. 우리나라도 5.18 특별법을 만들어 광주학살 책임자를 처벌했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나 인권유린하는 정치, 문화 등은 모두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왔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주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광주사태와 대량구속사태 등 심각한 인권 탄압이 자행되던 1982년 대림 2주일을 「인권의 날」로 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권(人權)이란 무엇인가? 인권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뜻한다. 창세기 1,20-27을 보면 인간온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 로마서 2,15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양심에 새겨진 도덕적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는「하느님의 백성은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없이 동등하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므로 존귀하며,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될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한 모든 차별대우는 제거되어야 한다. 인간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모든 요소도 또한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사회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회가 인간의 기본권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정치체제나 법도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이나 정치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 정치체제나 정치가가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유린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1975년에 발표한 「교회와 인권」이라는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본적인 인권을 선언하였다.

1. 모든 사람은 그 고귀성과 품위와 본성에 있어 평등하다.

2. 사람은 누구나 같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3. 인간의 인격적 권리는 불가침이고, 불가양도이며, 보편적이다.

4. 사람은 누구나 생존권, 신체의 보존 및 건강을 누릴 권리, 인간 품위에 알맞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할 권리, 즉 의식주 생계수단, 그 밖의 사회보장에 불     가결한 것들을 보유할 권리.

5. 누구나 합당한 호칭과 존경을 받을 권리

6. 사생활을 수호할 권리                           7. 거짓없는 보도를 들을 권리

8. 양심에 따라 행동할 권리                        9. 진리를 탐구할 권리,

10. 신앙과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권리,             11. 종교의 자유,

12. 법 앞에서의 평등,                            13. 결사의 권리,

14. 결혼과 가정의 권리,                          15. 공적인 일에 참여할 권리,

16. 일할 권리,                                     17. 교육받을 권리,

18. 사유재산권,                                    19.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권리.

20. 이주의 권리,                                   21. 남녀평등권,

22. 부모의 자녀교육권,

23. 노인과 어린이, 병자와 버림받은 사람이 신체의 보호를 받을 권리,

24. 투표권,                                  25. 합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26. 노동자의 파업권,                27.공동선을 위하여 사유재산을 제약할 수 있는 권리,

28.문화의 혜택을 받을 권리,                    29.소수 민족의 권리,

30.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31.반체제 인사의 권리 등이다.



  이런 인간의 기본권이 과연 얼마나 보장되었는가? 정치적 보복으로 인한 인권 유린, 태아 살해, 여자와 어린이 학대, 학교 폭력 등 아직도 인권 유린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즉 배우자나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인권 옹호의 첫 걸음임을

강조하고 싶다.





30.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여기가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인가?

                                                 유영봉 신부



묵상 :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것은 아직도 이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질서지워진 세상이 아님을 말해준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때,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오만의 산을 깎아 낮추고 아집과 편견의 골짜기를 메우길 요구한다.



             1. 아직도 인권주일이 필요한가?



  오늘은 인권주일이다. 어떤 이는 "군사독재 시대도 아닌데 아직도 인권주일이 필요한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얼마 전에 한 대통령 후보가 “모든 양심수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부는 “한국엔 한명의 양심수도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구체적인 앙심수의 숫자를 대면서 한차례 공방이 있었다. 굳이 양심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사례들이 많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온존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우리는 인권주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비인간적이고 처참한 실상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2. 갖가지 인권부재의 현상들



-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 남쪽에서는 다이어트 기구, 식품, 약품이 날개돋친듯 팔리며, 비만과의 전쟁이 한창이고, 북한에서는 굶어죽다 못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소문이 날만큼 기아사태가 심각하다. 하느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세계적으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이 1년에 1천8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눔이 없기 때문이다.


- 버려지는 노인들과 아이들 : 몇 달 전 대구에서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변에 텐트를 치고 노모를 그 안에 모셔두고는 며칠 째 소식이 없어, 누구의 소행인지를 수소문하는 소동이 있었다. 효도관광을 한답시고 제주도엘 가서는 부모를 그곳에 버리고 오는 자식들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꽃동네'나 ’평화의 마을'같은 복지시설엔 문 앞에 버리고 가는 아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병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태아에 관한 TV추적프로는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남아선호사상, 태아 성감별, 여아의 낙태, 그래서 이 나라는 낙태천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1년에 1백50만이 넘는 태아들이 부모들에 의해 죽어간다고 한다. 생명이 쓰레기통에서 뒹구는 무서운 일이다.



 - 인신매매와 외국인 근로자 : 어디 그뿐이랴. 어린 여학생들을 윤락가로 팔아 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가출한 여고생이 집나온 여중생과 그 또래들을 수십명이나 모아 매춘을 알선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교포 취업사기사건, 20만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처우문제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인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 복제인간의 장기이식? : 우리는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복제인간의 등장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인간을 양산해 내고, 필요한 장기를 자동차 부속처럼 쓰고는 나머지를 폐기시키는 그런 무서운 일이 현실로 다가올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것이 어찌 사람 사는 세상인가? 인권이란 말을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처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3.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한 기자가 데레사 수녀를 찾아가서 “당신이 아무리 거리에 버려진 이들을 데려다 돌보고 간호해도, 인도 사회가 계속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데 무슨 해결이 되겠느냐?”고 질문을 했다. 데레사 수녀는 “그래도 인간인데 어떻게 짐승처럼 길에서 죽게하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따뜻한 보호를 받으며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고 주장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그 생명은 유일한, 하늘처럼 귀중한 것임을 명심하자,



                4. 생명경시는 곧 하느님 모독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생명을 짓밟는 것은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회개의 과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전해준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오만의 산을 깎아 낮추고, 아집과 편견의 골짜기를 메우길 요

청한다.



  “1만원이면 ‘르완다'에서 굶주리는 다섯 식구의 1주일분 식량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호텔 사우나에 갈 수 없었다는 친구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조금만 진솔해지면 생활을 바꾸어야할 이유가 곳곳에 보인다. 이런 구체적인 회개로 준비를 하면서 주님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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