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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0:06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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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 4 주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제 1 독서 : 미가 5,1-4a

재 2 독서 : 히브 10,5-10

복 음 : 루가 1,39-45



해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가1,43)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친절한 문안을 받고 놀라움에 가득차서 하는 이 말은 곧 다가올 성탄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의 느낌을 종합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모두 마리아 이상으로 그녀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은 우리를 놀라움의 경악과 기쁨으로 들뜨게 한다. 그러나 또한 다음과 같은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 과연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세례자 요한일까? 하지만, 그는 맨 처음에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마태 3,11)라고 선언하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교회는 영성체 후 기도를 통해 주님께 다음과 같이 청원한다 :“전능하신 천주여…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열심한 마음으로 신비로운 예수 성탄을 타당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확실히 이런 까닭에 오늘 전례는 기도문을 통해서든 독서의 내용을 통해서든 한결같이 우리에게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루가 1,38)라고 우리는 복음 전 노래에서 기도한다. 이와 같은 마음자세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육화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자세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태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은 만일 그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루가복음사가가 마리아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장면을 연출하는 점에 있어서뿐 아니라 또한 그 기다림에 동반되는 감정을 묘사하는 점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각기 자기 자녀의 출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어머니의 만남이지만 좀더 관심있게 보면 모든 내용이 마리아의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즉 비록 그는 나중에 태어나지만 엘리사벳의 모자관계와 방문 그리고 요한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갑작스레 뛰노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다.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역사는 이미 그를 향해 가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오늘 복음 참조).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마을’(29절)은 보다 믿을 만한 전승에 의하면 나자렛에서 15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예루살렘 서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임에 틀림없다. 그 오랫동안의 여행은 마리아가 그 당시의 방법대로 여행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희생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사랑과 봉상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주고자 한다. 사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핵서이거나 또는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딸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S. Ambrogio, In Lucam 2,19).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마리아가 한 그 먼 여행-아마도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은 그리스도께서 육화의 신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더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읍니다”(필립 2,6-7)라고 바울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마리아가 유다의 ‘산’위로 올라갔다고 하면, 반대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기 위해 ‘심연’으로 내려가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참조)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친척 마리아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할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엘리사벳을 당황케 한 것은 마리아가 친절하게 관심을 드러내 보여준 그 행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 그녀의 집에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졌느냐 하는 사실이다. 그 ‘현존’은 히브리 사람들이 궤에서 느꼈던 현존이다.

다윗은 야훼께서 너무나 가까이 계심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그 결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했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래서야 어찌 야훼의 궤를 모실 것인가?”(2사무 6,9)

학자들은 이 두가지 사실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한다. 즉 마리아는 주님(야훼)의 구원적 현존을 당신 백성 가운데 이루게 하는 ‘궤’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큰소리로’ 마리아께 인사하며-마치 그 다싱 백성들이 계약의 궤를 환호하며 받아 모셨던 것처럼(1역대 15,28 ; 2역대 5,13참조)-“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12절)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를 그처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의 신적 모성이다:“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42-43절)하지만 이와 같은 큰 영광과 영예가 마리아께 주어진 근본적 요인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심이다. 그러한 신앙심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새로우 ‘계약의 궤’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더우기 모든 이의 ‘주님의 어머니’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보다 깊은 심리적 직관을 통해서 마리아께 최초로 복음적 축복의 인사를 드린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5절).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대림’을 지속시키면서 무르익게  할수 있었던 것은 아브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언자들을 거쳐 마침내 마리아의 크나큰 신앙심에 이르기까지 결코 깨뜨려지지 않는 신앙적 열망이 연연히 흘러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마리아는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장엄한 전례적 신비에 보다 더 적합한 정신적 자세의 표본을 윌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복음 내용은 마니피깟의 첫째 시절로 결론지어진다. 그것이 우리와 관계가 있는 이유는 마리아의 생활과 또한 마리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그 기적적인 일 앞에서 마리아가 느끼는 감정을 보다 밝게 알아볼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읍니다’ ” (46-47절).

그 첫번째 감정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지금은 신비스럽게 마리아의 아들도 된다-을 보내심으로써 마침내 행하신 구원활동에 대해 기뻐하고 환호하는 감정이다. 그 다음 이러한 감정에 덧붙여 나타나는 또 다른 감정은 겸손의 정이다. 겸손은 우리가 조금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읍니다.”  하느님 앞에서 유일한 위대성은 완전한 신뢰와 자유로운 의탁에서 나온다. 즉 마리아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대로’(루가 1,38 참조)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의 손에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믿고 하느님의 인도에 자신들을 내맡기지 않는 한 역사-교회역사도 포함해서-의 올바른 건설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자신을 성부께 의탁하심으로써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모든 인간적 체험을 받아들이셨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인 사도 바울로는 이에 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구약의 질서에 대한 신약의 질서의 우위성을 명백히 제시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성부께 자신을 봉헌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면서 취하신 ‘육신’은 당신 생활의 매순간에 그리고 특히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에 표현된 당신의 철저한 순종을 드러내는 도구이며 또한 가견적 표시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당신은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읍니다. 당신은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읍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읍니다”(히브10,5-7,10).

여기서 희랍어 번역에 따라 인용된 시편 40,7-9은 이미 단순한 외적 예재 행위와 봉헌의 내적 의식이 결여된 희생제물을 반대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 이상적인 희생을 완전히 실현시키셨는가를 알려준다. 그것은 하느님께 자신의 ‘뜻’을 항구히 봉헌함에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육화의 첫 순간부터 항상 이와 같이 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을 때 ’(5절) 시편의 내용을 그대로 이루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특히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통해 성부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심으로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실현시키셨다고 한다면 정말로, 보다 큰 고통이 있는 곳에 보다 큰 사랑도 있다는 말인가? 이런 까닭에 바울로 사도는 즉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읍니다”(14절).

이 대목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곧 다가올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육화의 신비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빠스카 신비에 지향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리아로부터 받는 육신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또한 부활날 다시금 그분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제 1 독서도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오신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다윗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분의 왕권과 힘에 대해 강조한다. 그 내용은 유다의 베들레헴 지방에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미가 예언자-이사야와 엇비슷한 동시대(B.C. 8세기)인물로써 이사야 예언의 내용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는 것 같다-의 예언 내용이다.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예언에 따라 동방 박사들에게 그들이 별을 따라 찾아갔던 ‘유다인의 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를 가르쳐준다(마태 2,6 참조).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 보잘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미가 5,1.3-4).

미가 예언자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이 유다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너무나 보잘것 없는데도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1절) 즉 메시아가 나게 됨으로써 큰 영광을 입게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메시아는 전통적 사고에 따른 모습 즉 당신 백성을 ‘힘’으로 인도하며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4절)‘왕이며 동시에 목자’로서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이 새 왕국의 범세계적인 숨결의 근원이 까마득한 옛날(1절) 즉 나단이 다윗왕에게 야훼께서 그의 왕위를 영원히 계속되게 해주시리라고 약속한 사실을 전한 그때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1사무 7,16 ; 역대 17,14 참조).

그 예언 가운데는 메시아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2절). 아마도 미가 예언자는 삼십 여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7,14) ‘알마’(almah:동정녀)에 대한 그 유명한 예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바로 그녀에게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과 흥분에 들뜬 감정-그녀가 9개월 동안 마음 깊이 간직했던-을 나누어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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