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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10:04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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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대림 제 1주일 강론모음 ”
 

대림 제 1 주

내가 정통 왕손을 일으켜줄 그날이 올것이다.

제 1독서 :예레 33,14-16

제 2독서 : 1데살 3,12-4,2

복음 : 루가 21,25-28.34-36



해설

오늘은 대림시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대림이란 인류가 수세기에 걸쳐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면서 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망에 싸여 ‘그분’께서 승리자로서 또한 정의와 평화를 일으켜주시는 분의 모습으로서 이 세상에. 선택된 백성의 역사적 구조 안에 그리고 온 인류의 보편적 계획 안에 오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에 찬 미래를 바라보며 그 특별한 인물-가장 이상적인 왕 다윗의 형상을 자신의 초월적, 해방적, 구원적, 신비적인 인격 안에서 변형시킨 분-을 향한 이러한 영성은 구약성서를 통해 연연히 흘러내려왔으며 인류의 불행스럽고 암담한 역사적 현실과 함께 더욱더 뚜렷하게 발전해 내려왔다. 그리고 인류는 이 영성을 점점더 적대적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신심을 통해 보존해 왔다”(교황 바오로 6세의 담화, 1974. 12. 4).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대림’은 미래를 향해 뻗어가는 기다림의 ‘정신’으로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인류가 수천년을 기다린 그 신비스러운 인물 즉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도 끝나지 않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역사느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1,14참조) 그 유한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의 인간들이 그분께 대해 갖게 되는 항상 새로운 체험을 통해 마침내 그분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결코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더 먼 미래를 내닺보며, 우리 안에서 그리고 역사와 세상과 교회 안에서 성숙되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순간 오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는 항상 ‘대림’을 살며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제 곧 우리가 보게 될 오늘의 독서들은 바로 이오하 같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



예레미아 예언서에 의한 오늘의 제 1족서의 내용은 비판적인 눈으로 볼때 다소 불 투명하다. 사실 이 부분은 소위 70인역이라고 하는 희랍어 역본에는 없다. 어쨌든 그 내용은 243,5-6에 나오는 내용과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예레미아 예언자 자신으로부터 ㄴ자온다고 하느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이야기가 여기에 삽입된 실제적인 배경은 바빌론 근위대의 장기간의 포위공격에 의해 폐허가 돼버린(예레 33,1-13) 유다 국가의 물질적 정신적 쇄신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단의 입을 통해 다윗에게 왕좌를 영원히 이을 후손을 주시라고(1사무 1,1-16 참조)하신 약속을 결코 어기시지 않으실 것이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장차 내가 약속한 복을 이스라엘 국민과 유다 국민ㄹ에게 그대로 내릴 날이 온다.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줄 그날, 그때가 온다. 그는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 그날 유다는 살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들 마음놓고 살게 되리라. 그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가리켜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셨음’이라고 부를 것이다”(예레 33,14-16).

예레 23,6에서는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셨음’이라느 명칭이 예루살렘게게가 아니라 ‘메시아’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이명칭은 그 당시의 비겁한 왕 시드키야(B.C. 597-586)의 이름)시드키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정확히 ‘야훼 나를 되살려 주셨음’이라는 뜻이다)과 풍자적으로 대립되고 있다. 이렇게 볼때, 그 명칭은 시드키야가 실현시킺디 못한 ‘;정의’를 ‘메시아’가 실현시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야훼의 선언이 다윗의 후소네 대한 약속에 집중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그의 백성의 운명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 먼 훗날 유다가 구원되고 그 수도 예루살렘이 평화를 되찾게 되면(16절)그 모든 것은 ‘메시아’의 공로에 의한 것이리라.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이스라엘 국민’과 ‘유다 국민’이 야훼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실현을 보게 됨으로써(14절)통일을 이루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고하고 잇다고 생각된다(에제 37,15-28 참조).

그러므로 메시아는 그의 백성의 정신적 물질적 복을 증지시켜줄 것이다 :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응ㄹ 하나로 일치시키는 정신적 통일은 이처럼 윤리적 시실인 동시에 정치적 사실이기도하디..

이 모든 내용이 “그는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다”(15절)라는 표현을 통해 명백히 시인되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도 이에 관해 지극히 시적이 표현으로 예언하였다. :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ㄹ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 2,4).

이와 같이 넓은 관점에서 볼때 ‘메시아’는 온 인류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볼때 이미 2천년 전에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즉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야 할 사명,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야 할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 할 사명등, 이 모든 사명은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듯이 성취도어야 할 것들이다. 이렇게 볼때, 어떻게 해서 메시아적 기다림, 즉 정확히 말해 ‘대림’이 우리 그ㅅ리스도인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 되는 동시에 단순히 인간 존재의 본질적 차원도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메시아적 기다림이 아닌 그런 기다림은 방향을 잃거나 아니면 지상적 수준에 머물고 말므로써 실제로 희망을 말살시켜버리는 특히 오늘날 유행하는 그런 이념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의 기다림은 육신을 말살시키는 죽음으로부터조차 인간들을 완전히 해방시킬 것을 약속하신 나자렛렛 예수를 통해 입증되듯이 그 목적이 아주 분명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더 그들의 물질적 뭊ㄴ제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최고 표현인 그리스도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메시아를 제시하고 있는 그 상징적 표현은 상당히 시적이다.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싹)을 일으켜줄 그날”(15절).‘싹’(여기서는 ‘왕손’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이라는 개념은 번영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보통으로 메시아를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예레 23,5 ;이사4,2; 즈가3,8; 6,12등 참조).

이 장면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능으로써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새싹’이 피어나게 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오직 하느님만이 새 생명력과 희망의 표지인 풀 한포기종라 자랄 수 없으 ㄹ만큼 땅이 황폐해져 보이느 ㄴ바로 그 순간에 메시아를 일으켜 드러내 보여주실 수 잇다. 사람들이 맍들어내는 수없이 많은 메시아 사상들은 하루살이식이다. 왜냐하면 불행히도 우리들의 ‘땅’은 스스로는 희망을 창출해낼수가 없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복음의 내용도 온통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다림’의 자세를 심어 주고자 한다. 그 ‘기다림’은 이미 성탄을 넘어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잇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실한 종들에게 상급을 주러 오시며, 인간의 내적 외적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당신 승리의 축제를 거행하러 오실 것이다다.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소위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을 전해주고 잇다.(마태 24,1-44 ; 마르 13,1-37).

이야기 자체는 예루살렘 종말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21,3-24), 루가복음사가는 거기서 나타나고 있는 징조들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매일매일 준비해야 할 세말의 상징으로서 생각한다 : “그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21,25-28).

복음사가는 그 당시의 묵시문학적 표현으로써 온 세상 만물이 새로와질 것을 예고한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올 때”(27절), 낡은 세상은 무너져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며 어두운 악의 세력은 결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협하지 못 할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러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바란다:“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28절).

그런데 이 새로운 세상은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즉 인간이 거룩한 생활과 깨어 기다림으로써 준비하고 예기한다는 점에서 볼때는 인간 협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 예수께서는 담화의 끝부분에 가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날이 온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

만일 우리가 ‘세상 걱정’에 휩싸여 온통 마음을 다 빼앗겨버린다면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이 지상 것에 우리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저편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랑과 원의로 충만한 마음과 정신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야 ㅎ나다.

그날이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갑자기 들이닥칠 것은 분명하지만. 위험은 오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36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따른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보다 다운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즉 그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무수히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모든 ‘도래’가 영광스러이 결정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여기서 루가복음사가는 “늘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6절).

특히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깨어 있음’에 있어서나 ‘기도함’에 있어서나 바로 그 ‘계속성’에 있다고 생각된다.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밤중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간계나 갑작스러운 공격의 모든 징조를 탐색하는 경계와 감시적 태도를 의미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갖게 되는 요구와 신뢰의 감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생활 전반에 걸쳐 ‘계속적’인 대림이 되게 하여야 한다.



주님을 기다리며 살라



이 모든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도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윤리적 행위도 변모케 한다.

이에 관해 바올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도래-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어서 현재 이 시간에 그 의미를 충실히 채워야 하는 도래, 또는 앞으로 다가올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특히 사람의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오시고 계시다는 징표를 드러내 보여주시는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해 흠없이 준비해야 하는 도래등-를 훌륭한 조화로 결합시키면서 데살로니카의 그리스도교 세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키워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교우 여러분, 마지막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잇는지 우리에게서 배웠고 또 배운대로 살고 있읍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데살 3,12-4,1). “주님께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기를”(13절) 기다림은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며, 과거의 구원적 충만성을 회복시켜준다.

진정, 그리스도교 신자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시간을 넘어서 사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무한한 도래 즉 어제와 오늘의 도래 그리고 내일의 보다 아름다운 도래를 놓치지 않으려 하며 또한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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