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대림시기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47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4462      
IP: 218.xxx.231
http://missa.or.kr/cafe/?logos.902.21
“ 다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2주일



19. 홍금표 신부(다) / 33        20. 서경윤 신부(다) / 35

21. 최경환 신부(다) / 36        22. 남해근 신부(다) / 38

23. 김몽은 신부(다) / 39        24. 신은근 신부(다) / 41

25. 강영구 신부(다) / 42        26. 교구주보 (다) / 46

27. 장영희.마리아(다)/ 47       28. 강길웅 신부(다) / 48

29. 방윤석 신부(다) / 50        30. 유영봉 신부(다) / 53



19.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대림절의 사람과 세례자 요한

                                                        홍금표 신부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서울과 평양에서는 각각 100명씩의 이산 가족들이 반세기만의 감격적인 가족 상봉을 하였다. 이런 만남이 가능하게 된 것은, 지난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이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남북의 두 정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두 정상의 뒷면에 가려진 많은 이들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즉,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한 이들, 정상의 의지를 담아 남북 공동선언문을 기초한 이들, 그리고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음지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역할이 그것이리라!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회담자체도 민족의 50년 냉전의 장벽 붕괴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 맺힌 이산가족의 만남도,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남북관계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나 여겨진다.

  

어느 사회이든, 그 사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올바른 선택과 그 선택을 뒷받침 해줄 협력자들의 도움이 있을 때 가능하리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남 뿐만 아니라, 드러남 뒤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역할, 마치 드라마에 비유래 이야기한다면 주연을 빛내기 위한 조연들의 역할도 인간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루가 복음을 통해「대림절의 사람」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된다. 이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탄생하신 분으로 공적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당시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요한 11,11)라고 이야기 하셨을 정도고, 오늘날까지도 요한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보아서도, 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분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원래「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이사야서 40,3절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의 임무는 당시 바빌론 유배 생활 중에 있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 성서에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골짜기와 산과 언덕을 없애고 큰 길을 내는 것과,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고, 백성들이 하느님과 하느님이 선물로 주실 해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과 여건을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하기 위해 활동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이러한 호칭을 적용시키는 것도, 세레자 요한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고, 하느님의 구원을 백성에게 드러낼 준비자로 소개하기 위함일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6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구원은 바로 예수님을 뜻하기에(루가 2,30)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공적 활동을 준비하고, 백성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회개와 세례를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준비 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례자 요한에게 적용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표현은, 때로는 멋있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가 수행해야할 일들은 결코 멋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역할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철저히 음지에서 일한 이들의 역할 일 수 있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하 시켜야 하는 조연의 역할일 수도 있고, 요한의 표현대로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요한 3,30)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 -충분히 중심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던 분이고, 자신을 스승으로 따르는 일단의 제자들을 거느리셨던 분- 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철저히 무로 돌려야 하는 그 같은 역할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개인과 소집단의 이익보다는 민족과 전 인류의 선익에 시선을 줄 수 있는 대범함을 가지셨던 분이었기에, 그 역을 자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이야기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이 아닐까? 조연의 삶보다는 주연의 삶만을 탐내고, 전 공동체와 민족의 선익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관계된 소수의 집단 이익만을 고집하고, 하느님보다는 자신을 찾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대림절의 사람」 요한의 삶이 그리워지는 시기이다.





20.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라.

                                                          서경윤 신부



초인종을 누른 후에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마도 잠을 자고 있었던지 아니면 옷을 갈아 입느라고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려니 생각했습니다.

 내가 불쑥 찾아가면 까무러치게 반가와 할 줄  알았는데 어찌나 당황해 하고 난감해 하던지…. 혹시 다른 손님이 계신가 하고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어색하게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면서 ꡔ미리 연락하지 않고 와서 미안하다ꡕ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탁자 위에 커피 한잔 올려주고는 내게 잠깐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서운하고 화도 났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하, 그랬었구나! 남편은 출근했고 아이들은 다 학교에 가고 없는데 아무리 신부지만 남자가 부인 혼자 있는 아파트를 방문하다니, 경비원 아저씨 보기도 그렇겠고 혹시 이웃 아낙네들의 시선도 의식해야되고 그래서 그랬었구나!


그래도 그렇지, 그럼 그렇다고 말로하면 될 것이지 사람을 여기 이렇게 앉혀 놓고 나와보지도 않다니 이건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아마도 「빨리 돌아가라는 신호인가보다」 생각하며 「그래, 빨리 돌아가자, 그래야 이 집도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오해도 피하고 나도 오랜만에 서울 와서 찾아볼 곳도 많은데 이렇게 바쁜 내가 어디 갈 데가 없어서 여기에 왔나? 그리고 다시 여기 오나 봐라, 평소에 가끔 만날 때마다 나더러 서울에는 자주 올라오는 모양인데 왜 자기 집만 한번도 들리지 않느냐고 불평 비슷하게 말하던 것도 다 빈말이었구나!」 생각하니 배신감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이제 당신네 말은 안 믿어, 찹쌀떡은 찹쌀로 만든대도 믿지 않을테니…」 커피 맛이 유난히 쓰게 느껴졌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갑자기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오시면 오신다고 미리 말씀하셔야 이쁘게 하고 기다리지요. 이렇게 갑자기 오니까 집안 청소도 안돼 있고 화장도 못했는데, 이런 실례가 어디 있어요? 바쁘게 하느라고 화장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그제사 나는 왜 그가 그렇게 당황하고 난감해 했는지 그리고 나를 여기에 오랫동안 혼자 앉혀 두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아직 집안 아침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내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청소되어 있지 않은 집안과 정리되지 않은 살림살이 때문에 나한테 칠칠맞은 여자로 보일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나한테 보이기 위하여 그랬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흐뭇하고 나이를 먹어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기까지 했지만 또 한편으로 내 심기가 불편했던 점도 있고 해서 약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날짜를 정해 놓고 해마다 12월 25일에 오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대림시기 동안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가 봅니다. 신자들은 오시는 그분을 환영하려 몸과 마음을 청소하고 정리정돈하며 그 분에게 잘 보이고 좋은 평가를 받으려 합니다. 적어도 사람인 내게 잘 보이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신경을 써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편히 오실 수 있도록 그분이 오실 길을 미리 다듬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굽은 길을 바르게 만들라.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추어라. 굽은 데는 바르게 하고 험한 데는 평탄한 길이 되게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가 3,4-6)

방문 날짜를 미리 정해 놓고 또 준비할 기간도 길게 잡혀 있으니 준비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면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리 자신 안에 오실 그분을 위하여 준비합시다. 그리고 자주 그분을 모실 준비를 점검해야겠습니다. 나아가 문밖 오시는 길까지, 환영할 채비를 차려야겠습니다.


대림 둘째 주간에는, 집안을 청소할 때마다 가재도구를 정돈할 때마다 하다못해 옷가지 하나를 집어걸고 책상의 책을 책꽂이에 꽂을 때에, 화장을 하거나 비단 머리를 빗고 손질할 때에는 꼭 우리 마음도 함께 손질하고 다듬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 곧 그분이 오실 길을 「평탄한 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1.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회개하시오!

                                                           최경환 신부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루가복음 3장 1절부터 6절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잘 들으셨을 것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세상을 멸망에서 구해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림을 준비하는 이때에 죄 많은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적절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첫째 :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박아주신 양심 - 이를 어기고 배반했을 때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내려주신 영생에 이르는 법을 어겼을 때 이를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죄란 양심법에 토대를 둔 국법이나 사회법을 어기고 배반했을 때 이를 또한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둘째 : 그러면 죄와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는 정 반대인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죄요, 또 하느님이 스스로 세상에 오시어 죽으신 이유도 죄 때문인 것입니다. 죄는 우리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예수님도 죄 때문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란 인류와 예수님께 죽음을 가져다 준 악 중의 악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죄를 그대로 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영혼의 영원한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요, 멸망에 따르는 끝없는 혹독한 벌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주고, 멸망을 가져다 주었으며, 전 인류에게 가장 쓰라린 고통을 안겨다 준 죄,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인도한 죄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죄의 용서를 받는 방법과 또한 용서받은 우리들에게 내려 주시는 풍부한 상급에 대하여 똑똑히 말씀해 주십니다. “회개하시오” 이 회개라는 말은 보통 냉담자나 믿지 않음에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만 쓰는 말로 알아듣지만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직접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인 성녀들도 말씀하시기를 하루에 일곱 번 이상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짓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원죄로 인해 나약해진 우리 본성은 죄를 짓게 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반성해 봅시다. 과연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하루를 살았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개란 말은 매일매일 몇 번씩이고 회개가 필요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이사야 예언자는 회개하는 방법을 더욱 더 자세히 풀이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뫼는 깎아 내려라” - 이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대죄를 없이하라는 말씀이요, “작은 뫼는 깎아내려 굽은 길이 곧아지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힘과 기력을 약하게 하는 소죄를 없이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 우리 마음이 죄의 때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깨끗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의 행복인 하느님을 보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

 -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 앞에 겸손 되이 꿇어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매를 주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 그릇을 깨고 어머니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매를 드는 비정의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 부모를 배반하고 집을 나갔던 자식이 다시 돌아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부모 앞에 다소곳이 꿇어 눈물로써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발길질을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사랑보다 몇 백배, 몇 천배 강한 사랑의 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주님의 사랑과 인자의 성사인 고백의 성사를 타당히 보고, 회개하고 회심하여 주님의 구원을 보도록 해야하겠습니다.









22.         대림 제 2주일 루가 3,1-6 (다)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

                                                        남해근 신부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부인은 급히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였습니다. 외항선을 타는 남편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부인은 온통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하던 생각과 일을 그만두고, 온전히 남편 생각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성껏 단장을 하였습니다.



그뿐더러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는가 하면, 남편을 위해 빠진 것이 없나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온 집을 돌보고 손질을 합니다. 이렇게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의 마음과 행동은 온전히 남편을 향해 있습니다. 이 부인에게는 남편을 믿는 마음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주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 자세”입니다. 이것 또한 기다리는 사람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자는 우리 마음의 초인종을 울리면서 주님의 오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의 길을 닦으시오. 높은 언덕을 깎아내려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길을 바로 하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여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루가 3,3-5). 요한은 주님의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들에게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바로 위에서 남편의 소식을 들은 부인의 자세와 행동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부인은 소식을 듣고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주인에게로 생각을 완전히 돌렸듯이, 세상의 일과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골몰하지 말고 우리 마음의 눈을 주님께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부인은 온전히 남편을 향하여 마음이 부풀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집안을 청소했습니다. 세자 요한은 그와 같이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돌보고 오만과 자만의 언덕을 겸손으로 깎아 내리고, 무지의 골짜기를 하느님에 대한 지혜로 채우기 위해 성서를 읽고 교리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마음을 정직한 마음으로 고쳐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과 같이 그분을 믿고 만나게 될 기쁨과 희망에 부풀어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우리는 그분이 벌써 2천년 전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지금 우리들 사이에 계십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아무도 모르는 결정적인 날, 종말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대림절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의 중요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대림절은 구세주께서 오신 성탄과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온(와 있는) 과거에 대한 기쁨을 되씹는 시기인 동시에, 부활하여 우리들 사이에 계시는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과, 그분이 오실 결정적인 날을 기다리며 생활을 개선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바로 대림절은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안에(우리 각자 안에) 그분에 오시도록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방해되는 것이 없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흔히 우리에게 깊이 뿌리박고 주님의 오심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대림절에 특히 끊어버리기 힘든 나쁜 습관 하나씩 고치기로 합시다. 이 악습은 깊이 뿌리박고 있기에 보통 각오로써는 실패합니다. 특별한 각오로 희생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세자의 말씀을 항상 생각합시다.

“회개하고 주의 길을 닦으시오. 높은 언덕을 깎아내려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길을 바로 하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여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루가 3, 3-5).









 23.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김몽은 신부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 오 년째 되던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이두래아의 드라코니디스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였으며 아빌레네 지방의 영주는 리사니아였다. 그런데 안나스와 가야파가 당시의 대제관이었다. 바로 그때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요르단강 주위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에 있는 말씀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뫼는 깎아내려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온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을 때’는 왔다. 오늘은 C해 대림 2주일로서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가에서 전도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우리들이 오늘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 세자(洗者)의 말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최초의 말씀도 역시 <회개하라>(마르 1,15)는 것이었다. 메시아를 맞이할 인간은 우선 그 인생관과 우주관,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회개’란 좁은 의미에서의 죄를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진정한 방향 전환, 180도로 완전히 전향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확실히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의 내림에 대한 선구자로서 이사야 예언서에서 말한 <엘리야>인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뫼는 깎아 내려,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온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야 4,3-5). 물론 이 말은 이사야가 그 당시 바빌론의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백성들에게 한 말이지만, 이 예언은 좀 더 높은 영신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들의 마음에는 눈에 보이는 얄팍한 현실적인 면에만 집착하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다 존귀하고 보람 있는 영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둔감하다. 그러기에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교만과 독선으로 스스로 높은 체하고 있으며, 시기와 불목으로 분열되어 있다. 반항과 불만으로 그 마음들은 몹시도 굽어져 있으며, 인색함과 탐욕으로 마음은 더럽혀져 있다. 그리하여 물질적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 현대인은 영신적으로 자기 마음의 고향을 지니지 못한 채, 영원히 정착도리 길 없는 욕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신적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통회와 함께 제 자리를 찾고, 영신적인 노예 상태와 유배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 완전한 자유와 안정된 기쁨의 생활로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목자이며, 스승이시고 최고의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외치는 선구자가 곧 요한이다. 선구자 요한은 오늘날에도 다시 회개하지 않고 탐욕과 교만과 허영과 쾌락의 생활에서 그 메꿀 길 없는 한없는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향해 외치고 있다. 그의 소리를 듣고 마음의 길을 닦는 자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들 믿는 자들도 역시 세속적인 것에 더 마음을 쓰고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고 있을 때, 그 결과는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언제 주님이 내림 하시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해나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선구자는 외친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생활로 마음의 준비를 갖추라고!



24.        대림 제2주일   (루가 3, 1-6) (다)     회개  

                                          신은근 신부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친다.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엎드려 뉘우치는 모습, 슬픈 얼굴로 앉아있는 모습이 아닌지. 너무 쉽게 우리는 회개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뉘우치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회개의 본질에 가깝다. 뉘우침은 새 출발을 돕기 위한 행동이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지난날을 뉘우치며 아파하는 것이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뉘우침이 클라이맥스가 되어 회개를 온통 그쪽으로만 맞추어서는 곤란하다. 새 출발을 위한 뉘우침이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반성인 것이다. 이를 소홀히 하였기에 열심히 뉘우치면서도 새 출발은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내가 잘못 되었구나' 에서 '다시 시작해야지'의 자세로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성숙한 모습이다.



올해는 대희년이었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해였다. 한 해를 마감하며 감사와 희망으로 연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사회는 불안해지고 있다. 들리는 소식도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사회 전체를 개인인 우리가 어떻게 할 순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자신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는 있다. 우리 역시 어둡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면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잘못된 것은 고치고 올바른 길로 새 출발을 시도해야 한다. 이것이 대림 제2주일의 교훈이다. 세상이 불안하기에 사람들은 돈과 물질에 집착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물질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물질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보다 돈의 위력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회개해야 한다. 돈의 위력은 짧지만 사랑의 힘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뢰는 언제나 내 쪽에서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힘과 사랑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내가 먼저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불안과 어둠은 극복될 수 있다. 먼저 가족 안에서 이것을 실천하자. 이것이 회개를 실천하는 길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ꡒ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골짜기는 메우고 언덕은 깎고 굽은 길은 곧게 하여라. 복음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불신의 골짜기와 미움의 언덕, 불만의 굽은 길을 깎고 메우라는 말씀이다. 올 한해 우리는 정말 골짜기와 산이 교차되는 삶을 살아왔다.

이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것을 평탄케 해야 한다. 그 첫 행위가 회개인 셈이다. 회개의 본질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 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2월의 끝에 성탄절이 있다는 것은 섭리다.



아기 예수님처럼 다시 태어나 새해를 맞이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새롭게 시작하면 희망할 수 있고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을. 인생은 결국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기억하며 대림절을 보내자.











25.        대림 제2주일 <루가 3,1-6>(다) 골짜기를 메우고 봉우리를 깎고 ---

                                                          강영구 신부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 대림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의 시간입니다. 동시에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모든 기다림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는 누구를 기다리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스스럼없는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은 특별한 준비가 없어도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답게 맞이하기만 하면 될 터이니까 말입니다.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일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정성이 담긴 따뜻하고 정갈한 저녁상을 준비하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는 갈아 입힐 옷과 따뜻한 잠자리를 준비할 것입니다.

  

혹시 이 고장에 대통령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대단한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도로를 정비하고 길가의 집들은 페인트칠을 해서 새롭게 단장하고 거리에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 것입니다. 그리고 경찰들이 나와서 길거리를 경비하고 공무원들은 대통령이 다녀갈 때까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준비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기다리는 분,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대통령도 아니고 고관도 아닙니다. 우리의 친척이나 친구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설레는 가슴으로 기다리는 분은 이 세상을 완성하실 분,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실 주님, 이 세상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은 당시 메시아를 대망하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회개하는 생활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은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예언자 이사야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고 고르게 하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깎아서 평탄하게 하고 굽은 길은 곧게 만들고 돌멩이 자갈 등으로 험한 길은 고르게 하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무슨 도로 공사 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을 잘 마련하기 위해서 도로 공사를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로 공사를 하듯이 우리 삶의 길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마음 길을 바르게 잡는 것이 회개입니다.

  

먼저 모든 골짜기는 메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슴속에는 무수한 골짜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작은 골짜기이지만 어떤 골짜기는 너무도 깊고 넓어서 메우지 않으면 도무지 건너지도 또 서로 만나지도 못할 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골짜기들이 우리의 가슴속에 있습니까? 불신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이 불신의 골짜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부부 사이를 갈라놓고 부모 자식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이웃과 형제들을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합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깊은 불신의 골짜기가 있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가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산다고 해도 서로 불신하면 천리 만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불신하면 가족이 한 집에 산다고 해도 남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불신의 골짜기 때문에 갈가리 찢겨져 있습니다. 모두가 도둑놈, 사기꾼, 거짓말쟁이 같아서 도무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신의 골짜기를 메우지 못한다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신의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무조건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믿어 주는 것입니다. 불신을 극복하는 길은 신뢰하고 믿어 주는 길말고는 없습니다. 백 번을 다짐하고 확인하고 그리고 보증서를 받는다 해도 속이고자 하는 사람을 당해 낼 재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믿어 주면 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 죄인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서로 형제가 되게 해주신 주님을 어찌 불신으로 깊이 패인 가슴으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믿어 줍시다. 서로 신뢰함으로써 불신으로 갈가리 찢어진 이 사회를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며 한 형제가 되는 그곳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주님께서 오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시 말합니다.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깎여져서 평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 가슴속에는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많은 언덕들도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 산봉우리들과 언덕들도 깎아서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산과 언덕들입니까? 교만하고 오만한 생각, 자기가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따라보지 못하는, 말하자면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생각들이 산봉우리고 언덕들입니다.


 돈과 재물을 좀 지니고 있다고 해서 오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권력을 지녔다고 뽐내는 사람들, 자신의 재능과 재주를 뽐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산봉우리가 있고 언덕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황금 만능과 권력 제일주의로 타락했기 때문인지 무엇을 좀 지녔다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오만 방자합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위에 아직도 가난한 형제들이 많고 방 한 칸이 없어서 전셋집을 이리저리 전전하는 형제들도 많은데, 호화사치 과소비를 걱정해야 한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도대체 누가 향락 퇴폐 업소를 찾아다니며 누가 과소비와 사치를 일삼습니까? 무엇인가 좀 가진 사람들이 이런 짓들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돈과 권력 따위를 과신하는 오만함의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어서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가난한 형제들의 한숨 소리도 듣지를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함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가진 자들의 이런 오만 방자함 때문에 계층간의 위화감은 더욱 깊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의 상대적인 빈곤감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교만과 오만함 그리고 허영심의 산봉우리들은 하느님을 만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뿐 아니라 형제들과의 만남도 가로막습니다. 이런 산과 언덕들이 높게 솟아 있는 곳에 사랑의 주님께서 오실 수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회개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솟아있는 이런 산들과 언덕들을 깎아 내려서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므로 늘 감사하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된 마음으로 모든 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므로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삶의 방법을 고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굽은 길은 곧게 그리고 험한 길은 고르게 해야 한다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시기, 질투하는 마음, 남이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남이 잘되면 배아파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는 마음, 이 모두가 우리 가슴속에 있는 굽은 길, 험한 길 아닙니까? 우리 가슴속에 나 있는 이런 굽은 길, 험한 길을 사랑과 용서 그리고 관용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잘못을 너그러움으로 용서할 때 여기 이 땅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되고 그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간이자 회개의 시간입니다. 회개란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며 입으로는 회개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이고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이렇게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크고 대단한 것을 하려 하기보다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갑시다. 그래서 이 땅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 갑시다. 그 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서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26.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1. 복음 이야기

 

루가 3장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대략 33세쯤 되어서 공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오년은 대략 서기 27년으로 예수께서는 이 무렵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네 복음서는 예수께서 서기 27년에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을 공생활의 첫 번째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 시기를 여섯 번에 걸쳐 로마 정치가들 및 유다 종교가들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뿐 아니라 곧이어 실현된 예수님의 출현이 세계사적인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오년은 서기 27~28년경입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서기 26~3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가이사리아에서 정무를 보았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서기전 4년~서기후 39년에 갈릴래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영주였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와 이복 동기간인 필립보는 서기전 4년~서기후 34년에 이두레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리사니아는 서기 36년까지 다마스커스 서북부에 있는 아빌레네 영주로 군림했습니다. 안나스는 서기 6~15년에 대제관으로 재직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 출현한 때에는 전직 대제관이었습니다. 가야파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서기 18~37년에 대제관으로 재직했습니다(루가 1,2a).

  

이런 세계사적인 시기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2b절).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 주변을 두루 다니며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3절). 루가는 이사야 40,3-5를 인용하여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밝혔습니다(3-5절). 그리고 그는 온 인류에게 있을 “하느님의 구원”을 예고했습니다(6절). 여기 “하느님의 구원”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2. 우리의 이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세례운동을 펼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릴 종말이 임박했으니 서둘러 회개하라고 외친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는 종말의 날이 들이닥쳐 세상이 심판당하기 전에 반드시 예언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말라 3,23-24; 집회 48,10-11).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해 있다가 종말 직전에 내려와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재건하리라는 믿음이 유다인들 사이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야도 오지 않았는데 메시아가 왔다고 하면 당시 유다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가를 비롯한 공관복음서는 사람들이 몰라보았을 따름이지 엘리야는 이미 왔었고,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였다고 이야기합니다(마르 9,13; 마태 17, 12-13).

  

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으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오실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끈을 풀어 주는 법인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그런 일을 해 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비록 시기적으로는 예수님보다 먼저 출현했지만 그는 다만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루가는 이사야 40,3-5을 인용하여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밝혔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니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라. 골짜기는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추어라.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의 교회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높고 낮은 것은 평등하고 고르게 하며, 굽은 것은 곧게 펴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함으로써 교우들로 하여금 홀가분하게, 자유롭게, 신명나게 살아가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27.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마음의 푯말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저희 동네 어떤 영어학원 문 앞에는 ‘꿈도 영어로 꾸자!’라는 푯말이 붙어있습니다. 좀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어떤 비장함까지도 느껴지는 그 글귀를 볼 때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을 연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벌써 몇 달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다니 동네엄마들 사이에 인기도 대단한 모양입니다.



언젠가 그 학원 앞을 지나는데 예닐곱 살 먹은 아이 둘이 길다란 막대를 들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또 다른 아이를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슨 징그러운 물건을 건드리듯,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간혹 서로 마주보고 웃어가며 두 아이가 팔을 길게 뻗쳐 막대로 치고 있는 아이는 가만히 보니 옆집 용민이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로 말하거나 걷는 것을 힘들어하는 용민이는 마치 그런 일에 익숙해있는 듯, 아이들이 막대로 건드릴 때마다 가끔씩 올려다 볼 뿐, 그저 자기놀이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학원 선생님인 듯한 젊은 여자가 나오더니 용민이에게 “얘, 너 다른 데 가서 놀아라” 하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학원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데리고 들어가면서 여자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열심히 영어로 얘기했습니다.

  

영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비 외교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끔 많은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세계화 시대에는 무조건 유창하게 영어만 잘하면 만사해결이고,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다른 무엇보다 우선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는 단지 많은 의사소통 방법 중의 하나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 한다해도 마음이 없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어린아이에게 꼭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인내심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길다란 막대로 다른 아이를 건드리는 아이에게서 막대를 빼앗고 함께 손을 잡게 해주는 것이 영어단어 한 두개 더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서로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 하느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인간들이 각기 다른 말을 하게 하셨지만 대신 사랑하는 마음, 지구 어디에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어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가슴마다 ‘꿈도 영어로 꾸자’가 아니라 ‘꿈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자’라는 마음의 푯말을 미리 달아 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28.              대림 제2주일 (다해)   알고 뉘우쳐서 돌아가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바룩 5,1~9 (하느님께서는 너를 빛나게 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필립 1,4~6.8~11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복 음 루가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요한은 예언자 이사야와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대림절 전례에 등장되는 중요한 세 인물 중의 한 분입니다. 그의 역할은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데 있었으며 그는 또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종교도 창설할 수 있는 추종자들도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능가하는 백성의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는 야심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이웃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참으로 답답하고 암담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요한을 가리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으며 또한 요한이야말로 구약이 예언한(말라 4,5) 주님보다 먼저 오기로 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14).



오늘 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닦는 최고의 방법으로서 '회개'를 역설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길은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이 아니며 바로 우리 마음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회개에 대해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가 성서에 몇 가지 나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함'이라는 말과 '슈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함'은 '뉘우친다' '슬퍼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슈브'는 '돌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종합하면 회개란 자기 죄를 뉘우쳐 서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 참조)에 보면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몽땅 탕진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알거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아버지께 죄를 지은 줄 알고 뉘우치게 됩니다. 이것이 나함입니다. 그러나 나함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부족합니다.



작은 아들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아버지로부터 혼날 것이며 아마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내쫓을 것입니다. 그래도 작은 아들은 돌아갑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슴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께 사정하기 위해서 돌아갑니다. 이것이 슈브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주님께로 돌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대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 기차를 탔는데 한참 가다 보니 대구가 나왔습니다. 기차를 잘못 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얼른 역에서 내려서 기차를 바꿔 타야 합니다. 그래야 서울로 갑니다. 만일 기차를 바꿔 타지 않고 부산행 열차 안에서 아무리 선행을 베풀고 기도를 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줄을 알면 뉘우쳐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술에 중독된 젊은이가 있는데 마치 폐인처럼 몸이 아주 쇠약해 있었습니다. 술만 먹으면 밥을 먹지 못하니까 영양실조가 돼서 멀쩡한 사람이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술을 하루라도 참으면 밥맛이 나고 기운이 나는데 술이 나쁜 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나함은 되는데 슈브가 안됩니다.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알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또한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처량한 것도 없습니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돌아가면 아름답게 됩니다.



신자도 아닌 어떤 형제가 하루는 저를 찾아와서 자기 인생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자기 인생과 가정까지도 다 파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고백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자신을 알고 뉘우쳐서 돌아선다는 것은 장미처럼 아름답고 백합처럼 깨끗한 일입니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또한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씻겨집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회개해서 돌아오는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모르면 돌아가지 못합니다. 주님 이 동쪽으로 오시는데 우리가 서쪽으로 가서 길을 닦는다면 그는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어떤 형제가 고해성사를 보는데 냉담한 지 3년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냐고 신부는 너무도 반가워서 그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성당만 안 나왔지 별 죄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3년이나 됐으니 죄를 다시 생각해 보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죄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흐려져 있으면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흙탕물이면 자기 죄가 안 보입니다. 죄를 모르면 고칠 수가 없고 자신을 알지 못하면 평생 불구자처럼 됩니다. 따라서 이 좋은 대림 시기에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닦도록 합시다.









29.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우리는 600만불의 사나이

                                                    방윤석 신부



  미국 예일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모르비츠 박사는 인간의 육체를 돈으로 환산해 본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인체내에 있는 화학물질인 효소, 단백질, 아미노산 등 생화학 물질들만 뽑아낸다고 하면 그 값이 6백만불이나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6백만불의  사나이」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살아있는 세포로 만드는 데는 6천만불을 들인다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값비싼 존재이고, 귀한 존재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주인이 노예를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었다. 로마의 황제가 어느 귀족 집에 초대받아 갔다. 황제를 대접하려고 저녁상을 차리던 노예 하나가 유리컵을 깨뜨렸다. 그 집에서는 노예가 유리컵을 깨뜨리면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다. 그 노예는 살려달라고 주인에게 애걸했지만 주인은 거절했다. 이를 지켜본 황제는 신하를 시켜 그 집에 있는 유리컵을 모두 가져오라 하여 한꺼번에 왕창 깨뜨려 버렸다. 안그러면 그 컵 수효대로 많은 노예가 죽음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리컵 하나와 한 사람의 생명을 맞바꾸던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가미가제라는 군대를 만들어 철부지소년들을 비행기에 태워 그 비행기와 함께 적진에서 자폭시키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망했다. 유태인을 6백만명이나 살해했던 아이히만과 히틀러가 망했다. 우리나라도 5.18 특별법을 만들어 광주학살 책임자를 처벌했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나 인권유린하는 정치, 문화 등은 모두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왔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주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광주사태와 대량구속사태 등 심각한 인권 탄압이 자행되던 1982년 대림 2주일을 「인권의 날」로 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권(人權)이란 무엇인가? 인권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뜻한다. 창세기 1,20-27을 보면 인간온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 로마서 2,15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양심에 새겨진 도덕적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는「하느님의 백성은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없이 동등하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므로 존귀하며,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될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한 모든 차별대우는 제거되어야 한다. 인간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모든 요소도 또한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사회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회가 인간의 기본권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정치체제나 법도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이나 정치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 정치체제나 정치가가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유린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1975년에 발표한 「교회와 인권」이라는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본적인 인권을 선언하였다.

1. 모든 사람은 그 고귀성과 품위와 본성에 있어 평등하다.

2. 사람은 누구나 같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3. 인간의 인격적 권리는 불가침이고, 불가양도이며, 보편적이다.

4. 사람은 누구나 생존권, 신체의 보존 및 건강을 누릴 권리, 인간 품위에 알맞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할 권리, 즉 의식주 생계수단, 그 밖의 사회보장에 불     가결한 것들을 보유할 권리.

5. 누구나 합당한 호칭과 존경을 받을 권리

6. 사생활을 수호할 권리                           7. 거짓없는 보도를 들을 권리

8. 양심에 따라 행동할 권리                        9. 진리를 탐구할 권리,

10. 신앙과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권리,             11. 종교의 자유,

12. 법 앞에서의 평등,                            13. 결사의 권리,

14. 결혼과 가정의 권리,                          15. 공적인 일에 참여할 권리,

16. 일할 권리,                                     17. 교육받을 권리,

18. 사유재산권,                                    19.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권리.

20. 이주의 권리,                                   21. 남녀평등권,

22. 부모의 자녀교육권,

23. 노인과 어린이, 병자와 버림받은 사람이 신체의 보호를 받을 권리,

24. 투표권,                                  25. 합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26. 노동자의 파업권,                27.공동선을 위하여 사유재산을 제약할 수 있는 권리,

28.문화의 혜택을 받을 권리,                    29.소수 민족의 권리,

30.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31.반체제 인사의 권리 등이다.



  이런 인간의 기본권이 과연 얼마나 보장되었는가? 정치적 보복으로 인한 인권 유린, 태아 살해, 여자와 어린이 학대, 학교 폭력 등 아직도 인권 유린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즉 배우자나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인권 옹호의 첫 걸음임을

강조하고 싶다.





30.             대림 제2주일 <루가 3,1-6> (다)  여기가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인가?

                                                 유영봉 신부



묵상 :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것은 아직도 이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질서지워진 세상이 아님을 말해준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때,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오만의 산을 깎아 낮추고 아집과 편견의 골짜기를 메우길 요구한다.



             1. 아직도 인권주일이 필요한가?



  오늘은 인권주일이다. 어떤 이는 "군사독재 시대도 아닌데 아직도 인권주일이 필요한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얼마 전에 한 대통령 후보가 “모든 양심수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부는 “한국엔 한명의 양심수도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구체적인 앙심수의 숫자를 대면서 한차례 공방이 있었다. 굳이 양심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사례들이 많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온존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우리는 인권주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비인간적이고 처참한 실상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2. 갖가지 인권부재의 현상들



-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 남쪽에서는 다이어트 기구, 식품, 약품이 날개돋친듯 팔리며, 비만과의 전쟁이 한창이고, 북한에서는 굶어죽다 못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소문이 날만큼 기아사태가 심각하다. 하느님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세계적으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이 1년에 1천8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눔이 없기 때문이다.


- 버려지는 노인들과 아이들 : 몇 달 전 대구에서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변에 텐트를 치고 노모를 그 안에 모셔두고는 며칠 째 소식이 없어, 누구의 소행인지를 수소문하는 소동이 있었다. 효도관광을 한답시고 제주도엘 가서는 부모를 그곳에 버리고 오는 자식들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꽃동네'나 ’평화의 마을'같은 복지시설엔 문 앞에 버리고 가는 아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병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태아에 관한 TV추적프로는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남아선호사상, 태아 성감별, 여아의 낙태, 그래서 이 나라는 낙태천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1년에 1백50만이 넘는 태아들이 부모들에 의해 죽어간다고 한다. 생명이 쓰레기통에서 뒹구는 무서운 일이다.



 - 인신매매와 외국인 근로자 : 어디 그뿐이랴. 어린 여학생들을 윤락가로 팔아 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가출한 여고생이 집나온 여중생과 그 또래들을 수십명이나 모아 매춘을 알선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 조선족교포 취업사기사건, 20만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처우문제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인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 복제인간의 장기이식? : 우리는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복제인간의 등장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인간을 양산해 내고, 필요한 장기를 자동차 부속처럼 쓰고는 나머지를 폐기시키는 그런 무서운 일이 현실로 다가올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것이 어찌 사람 사는 세상인가? 인권이란 말을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처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3.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한 기자가 데레사 수녀를 찾아가서 “당신이 아무리 거리에 버려진 이들을 데려다 돌보고 간호해도, 인도 사회가 계속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데 무슨 해결이 되겠느냐?”고 질문을 했다. 데레사 수녀는 “그래도 인간인데 어떻게 짐승처럼 길에서 죽게하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따뜻한 보호를 받으며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고 주장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그 생명은 유일한, 하늘처럼 귀중한 것임을 명심하자,



                4. 생명경시는 곧 하느님 모독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생명을 짓밟는 것은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회개의 과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전해준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오만의 산을 깎아 낮추고, 아집과 편견의 골짜기를 메우길 요

청한다.



  “1만원이면 ‘르완다'에서 굶주리는 다섯 식구의 1주일분 식량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호텔 사우나에 갈 수 없었다는 친구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조금만 진솔해지면 생활을 바꾸어야할 이유가 곳곳에 보인다. 이런 구체적인 회개로 준비를 하면서 주님을 기다리자.

         









  0
3500
   
 N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8     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5669
  7        Re..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7-11-25 3530
  6     다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4848
  5        Re..다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7-11-25 3113
  4     다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4462
  3        Re..다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7-11-25 2380
  2     다해 대림 제 1주일 강론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7-11-13 3143
  1        Re..다해 대림 제 1주일 강론모음 주일강론 2007-11-25 280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