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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12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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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30주일

        7. 방윤석 신부(나)/15                    8. 강길웅 신부(나)/17

        9. 김영남 신부(나)/19                    10. 이재만 신부(나)/21

        11. 조광호 신부(나)/22                   12. 박명준 신부(나)/24

        13. 장춘호 신부(나)/26                   14. 김창석 신부(나)/28

        15. 신은근 신부(나)/30                           16. 교구주보(나)/32

        17. 전옥주 작가(나)/33           



7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눈 뜬 장님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방윤석 신부



오늘 복음은 바르티매오라는 시각 장애자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내용이다. 시각장애자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1. 앞을 보지 못한다. 눈뜬 자라도 앞과 뒤를 못 보는 것은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눈을 떴어도 장님과 같다는 얘기다.



  2. 항상 깜깜한 상태에 있다. 여러분들도 눈을 감아 보시라. 깜깜할 것이다. 영혼의 장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빛이 될 만한 어떤 가치관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으며, 기준도, 원칙도 없다.



  3. 만져 봐야 안다. 혹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을 못 보는 장님들도 얼마든지 있다. 누구일까? 소위 과학주의자, 실증주의자, 특히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실험을 통해서 눈에 보여야, 또는 어떤 기계를 통해서 화면에 그래프로 나타나야만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영혼의 장님인 것이다.  도마 사도가 「나는 주님의 못 박힌 자국을 눈으로 확인해야 밑겠소」 라고 했다가, 예수님에게 호되게 혼났다. 지금도 제2, 제3의 도마사도들이 많다.



  4. 소경의 또 다른 특징은 빛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태생 장님은 처음부터 빛을 모르며, 중간에 장님이 된 사람들도 빛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참 빛」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도 영혼의 장님들이다. 한국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이하여 주제를 「이 땅에 빛을」이라 정했었다. 왜냐하면 빛이신 그리스도를 다수의 우리 민족이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눈먼 분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줬다. 지금도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안구를 기증 받고 있다. 「참 빛」을 알려주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5. 소경은 앞을 구별 못하기 떼문에 가끔 헷갈리고, 한 번 헷갈리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우리 주번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면 자기의 목숨이 귀중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자가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그렇다. 「나도 자가용이 있다, 면허도 땄겠다, 신나게 달리고 놀러 다니자, 마음껏 즐기자, 교통법규가 뭐 말라비틀어진 것이냐?」



그래서 운전대만 잡으면 착한 사람도 난폭해진다. 대다수가 운전에 관한 한 아직 형편없는 소경들이다. 세발 자전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들과 같다. 교통사고가 많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어야 될까? 몇 년 전 제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 우리 고3신자학생 하나가 오토바이 충돌사고로 선종했다. 유가족과 중고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울음바다 속에서 장례미사를 치렀다. 더구나 부모도 신자가 아니며 학생회장까지 했던 모범 학생이어서 너무도 안타까웠다. 우리 교우분들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 가진 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오토바이 타는 분들은 조금만 어두워도 라이트 켜시고, 자전거 타는 사람도 야광 옷 입고 뒤에 야광 테잎을 붙이고, 경운기도 조금만 안개 껴도, 앞에서 연기만 피워도 시야가 가린다면 라이트를 켜라. 밧데리와 목숨을 바꿔선 안된다. 야광판을 붙여 따라 오는 운전자가 확실히 볼 수 있도록 하라. 「내가 가고 있으니 네가 알아서 비켜 가라」고 말이다.



얘기가 빗나갔지만 제발 정신들 차리라. 눈을 좀 뜨라. 그 밖에도 정신차려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특히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만 눈이 먼 고위급 정치인들부터 눈을 떠야 한다. 눈 뜬 장님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오늘 복음 중 소경의 태도를 보자. 그는 나자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가 병을 고쳐주시는 용한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주위에서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수님이 부르시니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서서 다가왔다. 거지에게 있어서 옷은 재산에 속한다. 더군다나 소경 거지에게는 재산목록 1호다. 자기를 감싸고 있는 옷, 그 옷은 남루하고 형편없는 옷이었을 것이다. 2천년 전의 거지 소경인데 오죽했겠는가? 그런데도 재산목록 1호인 겉옷까지도 던지고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고 한다.



우리 신자들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따라나셨다고 했다.

그의 행동은 구도자(求道者)의 자세이기도 하다. 부자 청년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부자 청년은 재산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바르티메오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가진 재산목록 1호인 겉옷까지 벗어 던져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고 예수님께로 달려갔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다. 동방박사가 예수님 태어난 곳을 찾아갈 때 별의 인도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밭아야만 영생의 길을 갈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내 멋대로 조절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하야 한다. 빛이 너무 세다 하여 색안경을 쓰지나 않았는지, 빛을 싫어해서 일부러 눈을 감지나 않았는지, 또는 요리조리 프리즘으로 걸러서 대했는지 반성해 보자.









8         연중 제 30 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31,7~9 (소경과 절름발이가 위로받으며 돌아오리라) 

제2독서 Ⅰ데살 1,5c~10 (하느님을 섬기며 성자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복 음 마르 10,46~52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옛날에 앞을 못 보는 소경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소경의 원인이 아무리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하느님의 벌로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병환자나 귀머거리, 소경 등은 신체적인 어려움과 함께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는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세상이 더 참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바로 그 비참한 상태에서 빛나게 됩니다.



오늘 거지 소경은 나자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온 힘을 다해 외칩니다.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죽자사자 식으로 외칩니다. 제발 좀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오직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못난 거지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고 하느님으로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눈먼 거지라고 무시했지만 그러나 소경은 믿음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때 물으셨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경은 바로 그 기회를 만나 애원합니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눈먼 거지는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눈먼 소경이요 또 어찌 보면 구제불능의 비참한 처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닫혀진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의 눈이 닫혀져 있고 사랑과 용서의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삭막한 세상을 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새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수도원에 갔더니 현관 입구에 “사랑하면 보게 될 것이고, 보게 되면 더 사랑할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올바른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하면 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랑을 하지 못하면 닫혀진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혼자 답답해서 짜증을 부립니다.



며느리를 몹시 미워하는 시어머니가 있었는데 며느리가 뭘 잘못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연히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주눅이 들어서 자꾸만 실수를 합니다. “못한다", “못한다"하고 뒤따라 다니며 나무라니까 더 못하게 됩니다.



한번은 이 할머니가 성사를 볼 때 그 사정을 잘 알고 계시던 신부님이 보속을 엉뚱하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루에 열 번씩 일주일 동안 며느리를 칭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로서는 큰 일이었습니다. 보속을 안 하자니 영성체를 할 수가 없고 매일 미사에 나오자니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며느리를 칭찬해야만 했습니다. 속이 터질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며느리를 만난 시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피곤할 텐데 일찍도 일어났구나." 목에서 억지로 그 말이 나왔는데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는 그만 감복하게 됩니다. 새벽 아침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식사 때의 일입니다. 시어머니가 밥 한 수저를 입에 넣더니만 또 한마디했습니다. “오늘 아침밥이 참 잘 됐다. 며느리는 밥을 맛있게 하는구나." 그러자 며느리 가슴에는 작은 꽃이 피게 되었습니다. 청소를 하면 청소를 칭찬해 주고 빨래를 하면 빨래를 칭찬해 줍니다. 그렇게 칭찬해 주다 보니 하루에 칭찬을 열 번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의 일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잠을 자려고 누우니까 갑자기 며느리 이쁜 생각이 났습니다. 며느리나 자기나 이 집에 고생하러 왔는데 당신이 너무했구나 하는 반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더 칭찬을 해 주고 더 사랑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며느리도 그날 밤은 잠이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를 그 동안 오해했던 것이 죄송했으며 더 잘 해 드려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사소한 고생에 대해 너무 쉽게 불평을 가졌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따뜻한 사랑을 갖자 아주 다정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닫혀진 세상에서 소경처럼 캄캄한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주 예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이 생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오늘 소경의 외침은 바로 우리 자신의 외침입니다.





9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예리고 거지소경의 치유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는 그 시작과 끝을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바르티매오」라는 「소경 거지」가 예리고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시력을 되찾고, 그분을 따라갔다. 중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소경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말해주는데, 그 강조점은 소경과 예수님의 태도에 있다. 구체적 치유방법에 관한 언급은「말」외에는 하나도 없다.



소경과 예수님의 태도는 각각에 해당되는 동사들을 연결시켜보면 매우 뚜렷해진다. 소경과 예수님의 적극적인 태도가 강조되어 있다.

먼저 소경의 태도를 보자.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는 소경의 적극적인 믿음의 외침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그가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용기있게 외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잠잠히 있으라고 말리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더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아마 그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는 전체였을「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간다」



여기에는 예수님께 대한 소경의 철석같은 믿음이 잘 드러난다. 이 소경의 태도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보다도, 그의「용기 있는 신앙태도」이다. 이 소경은 남을 탓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방해하더라도 거기에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한가?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데 있어서도 남에게 탓을 돌리기 쉽다. 예를 들자면, 자기 가족 중의 누군가(시어머니, 며느리, 아내, 남편, 자식들 등등)가, 또는 교우들 중의 어느 누군가가  자기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거나, 큰 실망을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생활을 계속 못하겠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향해 표현하고 있는 적극적인 태도에서 본받을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적극적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강조되어 있다. 소경의 경우에서처럼 여기서도 예수님과 관계된 동사만을 연결해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적극적인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분은「소경거지」의 외침을 들으시고「걸음을 멈추신다.」 그리고는 소경이 당신께 다가오는 것을 옆의 사람들이 막으려고 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까이 “불러오라”고 명하신다. 그리고는 당신에 다가온 그 소경에게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자상하게 「물으신다」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동사들이 보여주듯이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로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단면을 볼 수 있다.「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지 소경의 태도가 신앙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치유받은이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말에서 「따라나서다」라는 동사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러 경우에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길가에 앉아(첫 구절, 46절) 불쌍하게 구걸을 하던 어느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른다(끝 구절, 52절)는 뜻이 된다. 더구나 마르코 복음서의 문맥을 볼 때, 예수님은 지금 고난을 받으시기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이시다. 바르티매오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 셈이다.

  

예리고의 소경 치유이야기는 이 이야기가 나오는 문맥을 살펴볼 때, 거기에 담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예리고의 소경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예고가 있었고, 이 예고를 그분의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것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이 대목을 예리고의 소경이야기와 관련시켜보자.

사실, 제자들은 외적으로는 멀정한 눈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뜻을 알아보는데 있어서는「소경」이었다. 반면에 예리고의 소경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소경의 상태였지만,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있어서는「밝은 눈을」 가지고있었다. 거지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 예리고의 소경치유에 관한 복음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세가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첫째, 이 복음말씀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한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소경에게 가까이 가시어 그를 자비로이 만나주시고, 그를 치유해 주신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라고 초대한다.



둘째, 이 복음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리고 소경의 용기 있는 신앙태도를 본받으라고 초대한다. 특히 꾸준히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기도하라고 초대한다.

셋째, 이 복음은 우리도 마음의 눈이 멀어있는 소경이 되어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전혀 볼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우리가 가족의 사랑도, 이웃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씀도 볼 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내 노력 덕분이다”라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도 마음의 눈이 멀어있는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고도 못 본다면 이 어찌 소경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만약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 모두도 주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이다: 「주님, 저희도 소경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10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생명의 주님을 믿어라

                                                       이재만 마르코 신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하며 가르치신다. 바르티메오라는 앞 못보는 거지는 여느 때처럼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문득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예수님에게 ꡒ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ꡓ라고 외친다. 그가 예수님에게 붙인 호칭인 ꡐ다윗의 자손ꡑ은 신약성서에 이따금 나타나는 것으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므로 다윗 가문에서 구세주가 나올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과 군중들은 이 거지를 예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들은 그 거지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심을 깊이 깨닫고서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 즉 자신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청한다. 결국 예수님은 소경의 소리를 듣고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예수님은 오늘 앞 못보는 거지를 고쳐준 것이 바로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인정해 주셨다.



즉 예수님은 스스로 한 사람의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믿는 소경과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군중이 서로 비교가 된다. 오늘 복음과 비슷한 대목이 요한 복음 9장, ꡐ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ꡑ이란 대목이다. 여기서는 거지인 맹인이 눈을 뜨게 해달라는 부탁이 없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주신다.



그러나 이 맹인은 눈을 뜨고서는 예수님을 안식일 법을 어긴 죄인으로 옭아매려는 유대인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ꡒ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합니다.ꡓ라고 고백을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안식일날 일을 한 죄를 끈질기게 물고늘어진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과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세상과 이웃에 어떻게 생명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은 용서와 자비를 베풀고 사랑과 평화를 행동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우리 자신의 나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을 일 삼는 일, 잘못된 주장을 하는 일, 원수를 복수하는 일, 폭력을 일삼는 일 등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의 길을 따르는 모습으로 의사들의 파업, 각종 병원들 부정, 정치인들이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 북한을 용서 못하고 통일의 물길을 막으려는 각종 세력들, 죽음의 재인 방사능을 만들어 내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서 밀어붙이는 정부와 여러 세력들… 등을 보면서 살고 있다.











22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조광호 신부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 온다. 중국 당대의 시인, 두보(杜甫)는 “봄은, 보는데 또 지나가나니”라고 노래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물과 같아 그 경계를 가늠할 틈도 없이 그 누구도 막아 낼 수 없는 무상한 변화 속에 우리를 서게 하는가 보다.



며칠 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울 근교 어느 산을 올랐다. 성미 급한 단풍나무들은 이미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지만, 여름날 그 무성했던 나뭇잎들은 청정한 가을바람결에 더욱 더 푸른빛으로 마지막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빛 보다 더 밝은 그늘’ 아래를 걷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 거대한 괴물처럼 누워있는 그 도시의 잿빛 하늘 위에서 이름 모를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던 길을 멍추고 명멸해 가는 그 별빛에 시선을 모았다. 태양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떠돌이 별, 지구 위에서 지금 나는 그 어느 은하계의 혹성으로부터 수십억 광년을 달려온 저 별빛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아 있음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에게 달려온 저 빛과 만남, 나의 이 순간적인 만남은 저 별빛이 전달된 시간과 공간에 비교한다면 차라리 무(無)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한한 빛이신 그분 앞에서 인간정신은 ‘어둠’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토마스 머튼의 고백은 하느님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의 자기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무’로써 표현할 수 있는 ‘어둠’이라는 낱말보다 더 적절하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을 것이다. 살아 계시고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야훼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을 고백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에 대한 어둠의 체험 즉 무의 체험을 통해서 신앙의 극치에 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 그들도 예외 없이 자기 실존에 대한 이 깨달음을 통하여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들의 이 어둠의 체험은 빛으로 충만 되었고, 깊고 깊은 밤은 낮이 되었고 믿음은 더 큰 깨달음으로 이어져 예수와 함께 「예수의 길」을 걷는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그렇고,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고 예리고의 맹인거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그렇지 아니한가.



우주의 신비를 벗겨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육안으로 직접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과 같은 반사매체를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본다. 인간의 외적 조건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인간의 내면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 ‘만남’을 통해서만 자기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한 눈으로서 ‘거리’를 측정할 수 없듯이 우리의 내면 세계의 눈도 결국 ‘마음의 눈’과 또 다른 ‘믿음의 눈’을 지닐 때만이 자기의 실존의 위치를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영혼의 눈’으로 ‘나자렛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그 대표적 믿음의 세계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예리고 소경의 치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권세 있는 자들과 많이 배운 사람들, 소위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붐비던 고도 예리고의 거리를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처럼 그들의 발치에서 구걸하던 맹인거지, 바르티매오. 그에게도 예외 없이 ‘나자렛 예수의 소문’은 들려 왔을 것이다. “너희들 모두가 한 형제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의 멸시와 학대를 통하여 오는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를 거쳐오면서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끝없는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며 살아 왔을 것이다. 이제 그의 내면의 불씨에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여 뜨거운 불길이 솟아나게 된 것이다. 살아 생전에 그를 만나 그의 따뜻한 목소리와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싶은, 그 만남의 원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는 온갖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나자렛 예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를 막지 말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합니까?”(49절)하고 마침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하고 그가 말하자 예수께서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51-52절)고 마르코 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나자렛 예수를 향해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라고 한 그의 외침은 위험 천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자렛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 그들을 의식하던 모든 군중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리치며 달려갔고, 자기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지켜 주는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예수를 향해 벌떡 일어나 갔다’(50절)고 한다.



맹인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였으니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언젠가 눈먼 사람이 된 것을 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원의는 단순히 육체적인 눈이 열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와의 만남, 그 필사적인 결의는 마침내 그의 눈을 뜨게 했고 나자렛 예수 안에서 메시아를 볼 수 있는 제2의 눈인 영혼의 눈뜸으로 깨달음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불길 속에 녹아드는 흰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자신의 실존이 무로 돌아가듯,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그는 이루어 낸 것이다. 빛을 향한 열망, 그것은 ‘노력하는 한 인간은 괴로워한다.’는 파우스트적 절망을 뛰어넘어 ‘노력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불가적(佛家的) 태도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불을 발견 해 낸 최초의 인류가 그 캄캄한 밤에 최초의 불씨를 당겨 황홀하고 흥분된 설렘으로 언 몸을 녹였듯이 추위가 몰려오는 이 계절, 우리도 예리고의 맹인거지와 같은 ‘영혼의 불’을 당겨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황량한 겨울벌판 같은 이 세상살이에서 우리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길을 떠난 바르티매오와 같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로 자신을 소진시켜 이 캄캄한 밤을 밝히고,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앞당겨야 되지 않을까.











23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예리고)

                                                              박명준 신부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 유대나라의 조그만 도시 예리고의 길가에 앉아 있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놀랄만한 기적과 말씀으로 온 이스라엘을 떠들썩하게 하신 그분을 꼭 만나 뵙고 싶었던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선생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조용히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예수께서 그의 음성을 듣고 부르시자 겉옷을 챙길 생각도 없이 서둘러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그는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음성으로 자기의 소원을 예수께 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예수께 매달림으로써 은혜를 받는 바르티매오의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그의 끈덕진 부르짖음을 행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지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시는 스승 예수님을 노상에서 함부로 불러대니, 주위 사람들의 입닥치라는 꾸지람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의 불행을 예수께 호소하기로 오랫동안 마음먹고 벼르던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부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 편이라는 소문대로 자기를 모른 척하고 지나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 그의 즉각적인 응답을 들 수 있습니다. 겉옷이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낮에는 의복이지만 밤에는 그의 잠자기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순간에 그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시지만 자기가 부탁만 하면 틀림없이 들어주리라 믿었기에 서슴없이 예수께 말씀드립니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열심한 신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가만히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말로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세상의 영화나 재물에만 너무 눈이 어두워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구원이나 생명보다도 현세 사물에 더 열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영적 소경들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천상 사물에 대하여 소경들인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는 암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 얼마나 알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또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줄도 모르고 현세의 쾌락이나 행복에만 도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판단하지도 못하는 소경들입니다. 기껏해야 인생 70년을 잘 살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력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수 천년 수 만년 아니 영원한 그날을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노력을 하였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뜰 수 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 귓전에는 주님의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앞에 놓여있는 현세 생활의 안일함에만 파묻혀 지내지 날고 주님께로 달려갑시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실 분, 즉 우리를 부활시키어 천당 영광 속에 불러주실 분 주님께 목청껏 소리칩시다.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아멘.



24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예리고)

                                                   장춘호 신부



우리 신앙인들에게 늘 따라 다니는 질문이 있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믿음의 고백과 삶을 연결 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며, 결국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출발한 사람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과의 엄청난 차이를 낳게 하는 것이다.



상처를 고쳐주는 분에의 체험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며, 확고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의 길에 이르는 어느 소경의 치유 이야기이다. 이 기적 이야기는 예수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리고라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다.



예리고는 요르단 저지대의 오아시스에 있는 해면보다 250미터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신약성서 시대의 예리고는 구약성서 시대의 예리고 남서쪽에 있는데 이 도시는 이곳에 궁전을 짓고, 궁전을 중심으로 구획된 도시를 건설했던 헤로데의 건축사업의 결과로 생겨났다. 바로 이 도시에서 예수의 일행은 맹인 거지 바르티매오를 만났다.



맹인 바르티매오는 이 도시에 나자렛 사람 예수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더듬더듬 지팡이를 앞세우고 군중이 모인 곳을 찾아 왔다. 앞 못보는 맹인이 예민하게 발달한 귀로 군중들의 소란한 음성 사이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예수를 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한마디 외침 속에는 평범한 사람이 느낄 수 없는 피맺힌 한이 서려 있다. 한 생애를 빛을 못보고 살아 왔으며, 그렇게 살아갈 그의 외침은 전존재를 열어 보이고 군중의 따가운 꾸짖음을 개의치 않을 만큼 한마디 생존의 절규였다.



이분이 나의 삶을 바꾸어줄 분임을 믿고 고백할 때, 얼굴을 알 수 없는 군중의 무리는 그에게 침묵하라는 명령을 하며 그를 나무란다. 병신이고 죄인인 주제에 어딜 끼어들어! 라는 냉혹한 거부를 가슴에 받으면서 더욱 큰소리로 예수를 부른다. 군중의 숲을 뚫고 예수의 시선은 이 가난하고 연약한 맹인 거지에게 머물며, 그를 가까이 부른다.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그의 애환과 마음을 함께 하려는 예수의 자비로운 모습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씀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한마디 선언으로 소경은 눈을 뜨고, 그 동안 상처로 뒤얽힌 마음의 치유와 함께 새로운 삶, 생명의 삶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그다지 뜨거운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잔잔한 파도의 속삭임처럼 우리의 무딘 마음속을 파고든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해 성서의 소경은 두 가지 상징적 특성을 드러낸다. 하나는 거짓된 삶이요, 다른 하나는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진리 자체인 예수에 대한 무지로 나타난다. 결국 신앙인에게 진리를 향한 깨달음의 길은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주님 앞에 겸손되이 자신을 고백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자신을 감추기에 급급한 나에게 정직한 나를 드러내고 우리의 친구인 예수께 도움을 청할 때, 그분은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분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소외당한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택을

맹인 거지 바르티매오는 자신만이 싸매고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그가 군중 앞에서 “나를 고쳐주소서”라고 청한 것은 하나의 자기 고백인 것이다. 즉, 죄인인 나에게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솔직하고 겸손한 자기 인정을 대중 앞에서 드러낸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앞을 못 보는 맹인임을 고백한 것은, 거짓된 삶의 모습과 진리에 대한 무지를 시인한 것이다.



이 같은 고백의 자세는 거짓과 껍데기가 큰 소리를 내를 오늘의 우리 실정에 절실히 요구되는 모습이 아닐까?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의 무지와 거짓됨을 예수 앞에 고백할 때 그분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안심하라! 너의 진실된 고백이 너의 무지를 깨우치고 너를 둘러싼 껍데기를 벗겼느니라.”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우리가 믿는 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참된 신앙이 시작된다고 할 때, 수많은 무리 사이에서 들려온 약하고 왜소한 맹인에게 향한 예수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한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던 예수는 약자와 소외당한 어린양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자세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한국 사회 안에는 절대다수의 종교인이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 사회가 타락하고, 불목하는 까닭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 작은 반도 땅에 상채기나고 칼로 난도질당하고 버려져 가는 무수한 생명을 볼 때,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의심케 된다. 그리스도를 삶의 가치와 의미로 선택한 그리스도인이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다면 이 같은 현실이 초래되었을까 싶다.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도로 의식무장을 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어는 작은 독방에 앉아 통일의 그 날을 몸과 마음으로 염원하고 계신 가난한 선배 신부와 이 땅의 부정과 불의에 대항하다가 옥에 갇힌 많은 의인들을 기억하며, 나의 의식을 정비해야 한다.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독가스가 스며 나오는 쓰레기더미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거기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하나임을 삶으로 증거하는 작은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나의 몸가짐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너는 누구를 선택하는가? 가난한 바르티매오인가? 다수의 힘깨나 있는 군중인가?를 되묻는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나선 소경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따라나섬은 내 믿음의 형태가 바뀌어져야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계신 곳 - 내가 싫어하는 곳, 역경 속에 계신 예수께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예수님이 빛이신 것을 믿어야 하는 데도 내가 거부하고, 믿지 않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하며, 온전한 신뢰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뜰 수 있도록 그분의 자비를 구하기 전에, “하느님은 너 없이 만드셨지만, 너의 원의가 없이는 네 죄를 사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선 나는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또한 나를 고치고자 하는 뜻과, 원의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분만이 나를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폭적인 신뢰감을 가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내 힘, 내 능력만 믿고 살아왔던 가리운 삶으로부터 빛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크게 뜨게 될 것이다. 크게 떠진 빛의 눈으로 예수님만을 믿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갈 것이며, 그분의 모습을 재생하도록 살아야 하는 몫을 그분에게서 배우며 살게 될 것이다.









25       연중 제 30주일 마르 10,46-52 (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예리고)

                                                         김창석 신부





며칠 전에 한 소경을 만났는데, 그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 잘못이나 부모의 잘못도 없이 선천적인 장애를 입는 경우를 운명 또는 팔자라고 부른다.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와 혼담이 있었을 때 시집 안 간다고 도망을 갔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집 굴뚝 모퉁이에 가서 숨었다. 때문에 속으로는 시집가고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숭 떤다고 흉을 잡혔다고 한다. 그 때 만일 나의 어머니가 멀리 도망갔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게 아닌가?



나는 내가 원해서 김가가 된 것이 아니다. 나는 대머리가 된 것이 고민거리이다. 몇 개 안 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면 작은 거울과 빛을 꺼내어 빗는데, 사람들은 빗을 게 뭐 있느냐고 비웃는다. 이것이 매우 싫은데, 내가 원해서 대머리가 된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원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원해서 참혹한 전쟁 시대에 태어나 고생을 한 것도 아니다.



일전에 성당에 십자가를 기증한 어느 여 신자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급사했는데, 슬퍼하는 미망인에게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환자들의 미감아들을 보면 운명의 장난이 기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천진난만하고 예쁜 천사처럼 생긴 그들이 나환자 부모들 때문에 사회로부터 천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운명의 장난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는데, 누가 그런 운명의 장난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흔히는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한편, 인간에게 그 운명을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 능력은 무엇이냐? 바로 자유이다. 자유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창조주의 선물이요 특권이다. 독사에게 물리면 죽지만, 독사를 잡아먹으면 약이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하면 행복이 되고, 극복을 못하면 불행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이사악의 쌍둥이 아들 에사오와 야곱의 경우를 보자. 똑같은 처지에서 에사오는 저주받은 민족이 되고 야곱은 축복 받은 민족이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모두 자유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바다 면보다 땅이 낮아서 풍차를 이용하여 부강한 농업국을 이룩했고, 스위스는 산악투성이의 땅을 개발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국 또는 정밀 시계 산업국을 이룩했다. 이것도 역시 자유의지로 운명을 극복한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강산, 특히 맑은 물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헬렌 켈러 여사는 강한 자유 의지로 자기의 운명을 극복한 가장 훌륭한 예이다. 그녀는 소경이었고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피눈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선 사업가가 되지 않았는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 교향악》에 나오는 소녀가 눈을 뜬 후에 본 것은 질투와 시기와 증오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반면에 <요한 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이 예수의 능력으로 눈을 뜬 후에 본 것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와 증오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경은 나중에 주님을 발견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차이점은 신앙이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 성당의 신자 한 사람이 자동차 사고를 내서 어린이를 다치게 했다. 나도 근처 병원에 입원한 그 어린이를 찾아가서 문병도 하고 기도도 해주었는데, 개신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이것이 다 주님의 뜻이고 그 동안 자기들이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한 데 대한 하느님의 경고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바로 운명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태도인 것이다.



로마의 시인 세네카는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 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짊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처리해 버리기도 한다. 어떤 역경이라도 이성으로 과감하게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하였다.











26           연중 제30주일   마르 10, 46-52 (나) 소경 바르티매오

                                                           신은근 신부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소경 바르티매오는 이렇게 외친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의 외침이 얼마나 애절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장님의 심정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순간은 답답하다. 그것을 영원히 지속하며 살아야 하는 그의 운명은 분명 십자가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프고 무거운 십자가였다.



바로 그 사람,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의 능력에 희망을 가진다. 혹시 그분이라면 눈을 뜨게 해주실지도 몰라, 그는 희망을 믿음으로 바꾸며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리곤 마침내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지난 세월 자신을 가두었던 어둠이 이 한 말씀으로 걷히다니, 눈을 뜬 그는 평생 이 말씀을 심장에 새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바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바르티매오의 이 감동에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 그의 놀람과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에게 내려졌던 은총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뜻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애절한 무엇이 없는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없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없는지. 있다면 우리도 바르티매오의 심정이 되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우리는 소경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경일 수 있다.

왜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모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르티매오처럼 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복받는 행위라고 너무 쉽게 판단한다. 기도하는 것도 복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잘 믿으면 고통도 재앙도 없어질 것이라 여긴다. 물론 우리가 청하는 것에는 이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있지 복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어떤 길로 걷기를 원하시는지 그 뜻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매일이 비슷한 생활이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축복이 오고 기쁨이 넘치더라도 그것 역시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주님 보게 하여 주십시오. 무엇을 보게 해달라는 것인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바르티매오처럼 변신할 수 있다.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이 단순한 기도를 수없이 반복했다.

삶이 무미건조하고 신앙생활이 권태롭다면 우리도 이 기도를 반복해야 한다.

단순한 기도가 힘있는 기도다. 그분 앞에서 복잡해질 이유는 없다. 소경 바르티매오는 기도의 단순함과 믿음의 끈기로써 눈을 뜬 사람이다. 우리도 그 은총을 청하며 이 계절을 보내자.











27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교구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리고의 소경을 눈뜨게 한 치유이적사화입니다. 어느 날 예리고에 사는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경은 나자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크게 “다윗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르시자 그 소경은 겉옷은 내동댕이치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랍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소경이 “랍부니,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은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2. 우리의 이해

  네 복음서에 수록된 치유이적사화는 흔히 그리스 치유이적사화의 양식을 따라 상황묘사, 기적적 치유, 치유 실증,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리고의 소경을 눈뜨게 하는 치유 이적사화에서는 예수께서 말씀이나 행동으로 고쳐주시지 않고 그 대신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하시며 믿음의 힘을 강조합니다(52절). 또한 목격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치유이적사화에는 믿음의 힘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특히 바르티매오는 여러 면에서 신앙인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비참한 걸인 소경이었습니다.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그분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소경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소경 바르티매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고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소경 바르티매오를 구원한 것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한 다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경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 자비하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겉모양만 교인이 아니라 진실로 바르티매오와 같은 참 신앙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빛이 날 것입니다. 



28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52 (나)            성서 공부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새로운 천년이 되면 새 세상이 펼쳐지기라도 하는 듯, 지난 연말연시 한 동안은 어떤 흥분과 기대로 많은 사람들이 가슴 벅차했습니다.

  저 역시도 그 분위기에 휩싸여 이천 년부터는 무언가 달라져야 하며 새로운 도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확실한 대안은 없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소식은 우리 본당에서 성서대학을 개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못했음을 늘 부끄럽게 생각해 왔고, 영세도 태중교우인 남편의 도움으로 겨우 통신교리로 받았으니 성서나 교리에 대해서 누군가로부터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당황하기가 일쑤였고, 더러는 대답이 궁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었기에 새 천년의 첫 실행으로 성서공부를 한다는 것은 가슴 뿌듯한 시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월 마지막 목요일, 그날을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성당에 조금 일찍 도착한 저는, 입구에서부터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는 잔치집 분위기가 감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성당 안에는 촛불을 든 교우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있었고, 미처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교우들이 마당에도 수십 명이나 보였습니다. 내 편협한 생각에는 지금 성당 안에서 미사가 진행중이니, 성서 공부할 사람은 아마 마당에서 담소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성당 안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성서 공부를 하러 온 교우들이었던 것입니다.

  ‘많아야 100명 정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뒤엎고 600명이 훨씬 넘었으며, 추가 희망자가 많았지만 더 이상 장소와 교재 사정으로 수강 신청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우들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며, 모두 그렇게 일찍 왔다는 사실도 놀라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성서 공부하라고 불러주신 그 많은 형제자매들의 얼굴에는 모두 기쁨이 흘러 넘쳐 보였습니다. 저도 덩달아 기뻤습니다.

  공부할 사람은 100명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보겠다는 저를 주님께서 어여쁘게 보아주셔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들이 모두 저의 기우(杞憂)였고, 오만(傲慢)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슴깊이 느꼈습니다.

  열심히 살려는 젊은 교우들이 많은 우리 본당에서,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어 생각하신 끝에 성서대학을 운영하기로 결심하셨다는 신부님. 저희들은 열정적이신 두 분 신부님의 성서강의를 들으면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성서 공부를 시작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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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08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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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9주일

        11. 김영남 신부(나)/21                   12. 김정진 신부(나)/22

        13. 조순창 신부(나)/24                   14. 조광호 신부(나)/26

        15. 표준관 신부(나)/28                   16. 강길웅 신부(나)/30

        17. 김의철 신부(나)/32                   18.변희선 신부(나)/33

        19. 박기준 신부(나)/35                   19. 박제원 신부(나)/36

        20.작자미상(나)/37                 21. 작자미상(나)-참전교의 길/39

        22. 작자미상(나)-준신자를 붙잡자/41

        23. 작자미상(나)-땅 끝까지..../43



11       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   마태 28, 16~20(삼위일체 복음) (나)

ꡒ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ꡓ

                                                             김영남 신부



(전교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 때 들었던 복음과 같다. 그래서 이번 주의 '복음생각' 은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 의 것을 기초로 삼되, '선교' 에 초점을 두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만민에 대한 선교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마태 28, 16~20의 말씀을 복음 으로 듣는다. 이 대목은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놓여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집약적이다. '선교사명' 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선교'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파견되기 전의 상태' 이다. 그 때 그들은 심한 패배감, 절망감 에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수치심과,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성 금요일의 충격과 절망 속에 아직도 깊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 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통해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을 보내 주셨다. 그들은 먼저 이 '기쁜 소식' 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했다.



제자들이 '파견되는 장소'가 '갈릴래아의 어느 산' 이라는 점은 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소명을 받은 곳' 이었고, '제자로 양성 된 곳' 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 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그들 사이의 '첫 사랑' 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 16).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것과 비슷 하게,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 에서 '산상설교' 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 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 으로 다시 부르셨다는 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 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선교의 목표' 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 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 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 으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 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이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 제자 들의 공동체를 형성' 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 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 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고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는" (마태 4, 19)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진복선언' 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 심판 말씀' 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줄곧 가르치셨다. 이제 부활 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출발되는 제자공동체는 예수님이 하셨던 '가르침' 의 임무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제자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의하면 넓게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삶' 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 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이 말씀은 부활 하신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나야 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 5, 13~16)의 역할을 하려면, 제자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들의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 을 뜻하는 '임마누엘' (참조: 마태 1, 23)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 고 약속해 주신 공동체이다. 생각할수록 깊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다.



모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기 전에, 그들을 당신께 대한 그들의 '첫 열정' 이 타오르던 갈릴래아로 부르신 것을 들었다. 우리들도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의 첫 시기' , '소명의 첫 시기' 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세할 때의 '첫 마음' , 사제서품식 때나 서원 때의 '첫 마음' 등,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순간을 잊지 말고 때때로 회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 이야말로 선교활동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12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 오늘 복음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제자들의 순 인간적인 면이 묘사되어 있고 제자들도 역시 우리 인간의 약점의 테두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다분히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한 것도 이상하려니와 다른 제자들이 이를 지켜보다가 화를 내며 울분을 터뜨린 꼴은 가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야고보와 요한은 제베데오의 아들들로서 일찍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상 천국을 세우실 줄로 생각하고 그렇게 되거든 자기들에게 우의정과 좌의정 감투를 주십사하고 청한 셈입니다. 이들은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요한 18,36)라는 예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동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나 오늘이나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곡해하고 그릇되이 선전하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메시아 예수님이 내림하시면 뭇 제왕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관장하여 지상에 일대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고 커다란 꿈에 가슴이 부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건설하시는 나라는 지상 왕국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란 점을 잘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무지몽매한 일부층에는 종교를 하나의 부귀공명의 수단으로 착각하는가 하면 질병 치료의 온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치부하고 하느님을 공경한답시고 자기 육신의 안락과 무사태평을 추구한다면 그런 경천지례는 있으나 마나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 크게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 봅시다. 야고보와 요한이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청하였을 적에 예수님은 두 제자가 장차 겪을 고난에 관하여 예언적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것입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두 제자들이 장차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서 고난을 당하고 순교가지 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실상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왕 때에 참수형으로 치명하였고(사도 12:1) 요한 사도는 불가마에 몇 번이고 던져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차원을 높여 한층 더 깊은 뜻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을 보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세속의 권력가나 세도가들은 흔히 백성을 억압하기 일쑤이지만 여러분 가운데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정반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려면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모범을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하신 예수님은 당신 생애를 통하여 봉사하고 수난하신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봉사를 받기보다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권의식(全權意識)(마태 28:18)을 지닌 스승이었지만 당신 제자들을 막 부려먹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무척 아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시에 봉사자로서 또는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 주시며 스승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십자가, 거기에 달린 몸, 거기에 흐린 피 자체가 값진 제사 - 제물이 아니라 -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이 값진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에 있어 값진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철저한 겸허와 사랑과 세계 만민에게 봉사하고 아량을 베푸신 그 폭넓은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들은 예수님의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본받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참되고 성실한 제자라고 일컫는 이들은 모두가 봉사와 사랑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웃을 도와주고 타인의 행복을 도모해 준 이들입니다. 그들은 남의 사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마음의 문을 열어 따뜻한 정을 베풀었고 타인이 행복되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수고와 노동력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기 재산마저 희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실천한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된 사람들임을 우리는 명시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13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조순창신부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짧은 한 토막을 단 한 번만 살고 갑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미련한 듯해도 지혜롭고 뜻 있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한편 꾀가 많은 듯해도 미련하고 보람없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의 조그마한 일을 가장 소중한 책임으로 알고, 어떤 희생도 무릅쓰며 헌신하는 각계 각층의 인물들이 말없이 연구하고 지키기 때문에 이 사회는 지탱되고 발전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자, 맡은 일을 다하다가 숨져 간 순직자,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다가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과 남기신 유업은 길이 현양 될 것이며 그 은공은 큽니다.



좀더 평안히 고생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길보다는 ‘희생과 봉사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더 뜻 있는 길’이라는 신념 속에 살아간 분들이 많습니다.

인류가 구원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아무 죄 없이 좋은 일을 한다고 미움을 받아, 사람들에게서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어리석은 듯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죽음에서 당신 전능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으며,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깊은 뜻을 주시고, 이로써 삶의 보람과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내 목숨을 내주러 온 것입니다.” 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신분과 처지, 능력과 환경에 따라서 서로 봉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봉사란 남의 뜻을 받들어 섬기되, 희생이 따라도 자기를 돌보지 않고 노력함을 뜻하며, 개인뿐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제직은 참된 봉사직으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해 파견된 이들입니다. 그 재능이나 신심보다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구원의 성사를 집행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며,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봉사자입니다.

또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따를 것을 서약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의 부르심에 응하여, 전 생애를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바치며, 사도적 사랑을 가지고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에 헌신합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와 함께 하느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며, 사회에 살면서 교회의 목적인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고,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으로 봉사하도록 불리었습니다. 자기만을 아는 이기심과, 잡스런 일에 빠지는 미련함과, 구원의 길을 떠나는 안일을 버리고,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며, 모두 연관된 속에서 사는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내일을 봉사적 정신으로 하고, 더 나아가서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참고 견디며,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 나를 제물로 바칠 각오로 봉사합시다.



그 희생과 고난은 우리 구원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고용자, 위정자와 국민, 지도층과 대중, 사제와 신자, 각기 서로 사이에 소중히 받들어 모심으로써, 사회는 발전하고 복음화됩니다. 모든 직업은 사회 봉사직으로 알고 헌신합시다.



교회 안의 사도직도 봉사직이요, 각 단체에서의 활동은 바로 봉사 직분입니다. 평신도는 모두 교사직․성가대직․청년직․연구직․활동직․신자직에 충실합시다. 교회는 봉사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웃 본당, 공소 신자, 지역 사회, 불우한 이웃돕기, 복음 전파, 성사, 미상 집행 등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합시다.









14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조광호신부



불과 2-30년전 만 하여도 시골 동네 아낙네들이 모이면 누구 누구네 집 아무개는 얼굴이 「달판」같다고 하는 애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달처럼 희고 둥근 얼굴이 그 당시 여인들의 이상적 미(美)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만약에 오늘날 서양 처녀들에게 똑같은 말로 「당신 얼굴은 보름달 같습니다」하고 말한다면 즉시 뺨을 맞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름달」이란 말은 그들 문화권에서는 오늘날 우리말의 「호박」 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의 17세기, 바로크시대의 그림을 보면 한결같이 여인들의 얼굴은 둥글고 복스럽게 생겼다. 미적 감정은 시대를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문화의 선호성」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배경이 있다고 본다.

다산(多産)이 무엇보다도 큰 축복이었던 여인상은 오로지 많은 출산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튼튼함」에 그 기준이 있었다. 오지리 빌렌도르프에서 발굴된 2만년 전의 여신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산업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는 「안락함과 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날씬한 서구적 여인의 모습이 모든 여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유행 가운데서도가장 민감한 것이 여인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이 아닐까. 고대 중국은 물론 3천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불변의 양식으로 전승되어 온 이집트 미술에서도 여인들의 머리모양은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의 어느 작가는 모든 유행이 「변덕스러움」이라는 「여성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규정했지만 유행은 여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유행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 한 예로써 미트라(Mitra;교황․주교의 관)의 모양은 시대에 따라 끈임없이 변천해 왔다. 한 시대에 유행하던 미트라의 형태는 전 세계교회 안에 유행되었다.



이러한 미트라의 역사 속에 한가지 특이한 점은 교회의 권위가 막강한 시대 일수록 미트라의 높이가 낮아지고 교회의 권위가 실추될수록 미트라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얼마 전 어느 교구 성체대회에서 주교님이 미트라를 쓰고 금빛 지팡이를 짚고, 행렬하는 장면이 잠시 TV 화면에 비친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성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과 금칩 미트라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거동하는 주교님.... 화려한 저 「권위의 상징」 뒤에 있는 「실재」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전통과 관례」라는 막연한 의미가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원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교황님과 주교님이 삼복더위에 그 무거운 제의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미트라 쓰기를 원하겠는가.



그것은 다만 신도들이 그들의 대표자로서 또 제관으로서 화려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주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서양의 중세기적 상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권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 볼 때 우리 교회 안에서 성직자의 권위를 어디에 근거해서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본다.



마르코 복음 10장 35절에서 45절에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해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제자들과 함께 걷고 있는 참으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아 듣기는 커녕 온 천하를 호령하게 될 메시아의 나라를 기대하고 잔뜩이나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급기야 그들 중에 두 젊은이가 나서서 예수께 말씀을 건넨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요”(35-37절) 자기들의 원의를 말하기도 전에 예수께 다짐부터 받았던 이 두 사람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지닌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약삭빠르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 짙은 이 두 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사실은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을 다른 제자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몹시 언짢아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분노 보다는 연민을 느끼시며 이들을 향해 「당신들은 스스로 청하는 것이 무엇이지도 모릅니다」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하느님의 의지와는 언제나 빗나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의지, 자신의 눈먼 이기심과 탐욕으로 어둠 속으로 헤매는 인간의 비극을 느끼게 하는 이 사건은 모든 세대를 통해 인간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잔과 세례」 즉 그분의 「수난과 죽음」 보다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남보다 먼저 자기만의 영광과 영화를 꿈꾸는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두 가까이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국가의 왕좌와 교회의 제단을 동일시하여 심자가 대신에 영광된 정복자의 깃발을 꽂고 다른 모든 민족들을 야만인, 미개인,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 교화를 문명화로 착작했던 선교 시대를 우리 교회는 살아왔다. 아울러 교회는 성직자를 교양인으로 평신도는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우둔한 무리로 치부하고 「기도하기, 순종하기, 헌금하기」 만을 권장하여 교회를 철저히 위계사회로 만들어 놓았던 시대를 교회는 살아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우둔하고 미련하 인간의 욕심 속에서도 또 다른 「인간을 통해」 끝없이 창조와 쇄신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시대에도 잘못된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을 통해 하느님의 신령하신 역사(役事)는 이루어 졌으니 신학자 「왓벗 뷜만」은 이를 가르켜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이러한 「섬김과 희생」을 위해서 만이 권위는 비로소 참된 의미가 있음을 복음 성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 그것이 비록 남을 좋게 변화시키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힘에 의해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 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우리 모두가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분 앞에 끊임없이 성찰 할 때 만이 우리는 그분의 「잔과 세례」를 함께 받아 마실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5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표준관 신부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나 아니가 들면 들수록 명예욕과 권세욕이 강하게 발동한다고 합니다. 즉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남보다 위에 서고 싶고 남을 부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남 앞에 으시대며 큰 소리 치기를 좋아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곧장 화를 내곤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나 보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조그마한 직책이라도, 아니면 최소한 하찮은 명예직이라도 하나 가져야만 흐뭇해하고, 남들 앞에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타나곤 합니다. 조그마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데 하물며 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도무지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짓밟고, 눈에 거슬리면 마구 죽여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죄한 사람들을 죽이고 하는 사람들이 허울 좋게 백성의 은인으로 자처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천상 천하 유아독존을 부르짖으면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도락만 일삼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힘으로 남을 억누르고, 남에서 봉사만 받는 사람들은 참으로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에서도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힘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을 싫어하며, 위대한 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이솝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소들이 수레를 끌고 가는 데, 소래 바퀴들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소들은 수레바퀴 쪽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그런 소리는 가만 멈췄으면 좋겠어! 무거운 짐은 내가 끌고 있는 데, 너희들이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알 수 없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애쓰고 고생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데 공연히 제가 피로하고 땀 흘리는 체하는 사람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우둔하고 말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의 공로를 가로채려는 사람을 비난하는 소리입니다. 한 마디로 혼자 잘난 체하며, 수고하지 않고 큰 소리만 치는 자는 높은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런 자들이 온갖 권모 술수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위대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남을 과대평가 하므로, 남에게 봉사 받기만 하므로  자신이 높아지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들의 생각은 비뚤어진 것이며, 역사의 심판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러면 참된 높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높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남을 섬겨야 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신 대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듯이 그분은 우리에게 섬기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즉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봉사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죽는 순간에도 자기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십자가 상에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불쌍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에게 붕사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예수님의 봉사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때입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우리에게 한 자리 주십시오” 하며 간청하기 전에 불쌍한 내 이웃 내 형제에게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죽기까지 봉사하신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영광의 자리에 앉히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높은 자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너희 중에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 44-4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 미사 중에 기억하면서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16        연중 제29 주일   마르 10,35-45 (나)   상처없이 영광없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3,10~11 (주님의 뜻을 따라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으니,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제2독서 히브 4,14~16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 갑시다) 

복 음 마르 10,35~45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슬픈 사람에게는 세상이 슬프게 보이고 기쁜 사람에게는 세상이 또 기쁘게 보입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그런 현상이 더 실감납니다. 탄광촌에서 사는 어린이들은 사람들을 모두 새까맣게 그립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린이들은 사람 옆에 으레 배와 바다를 그립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집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불렀던 노래는 슬프고 애절하며 한이 많은 곡들이었습니다. 문학도 예술도 다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해 줍니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에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고 약속의 땅에 정착한 뒤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열강의 세력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멸망한 뒤로는 유배생활에서 엄청난 고난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들이 바라봤던 하느님은 고난받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백성 자신이 고난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의 상도 역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종은 웬일인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반역죄로 몰려서 죄없이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도대체 뭐냐?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것은 실로 개죽음입니다. 그리고 그게 또 운명이라면 전생에 죄가 많았거나 팔자가 사나운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짓궂게도 사정없이 때리고 찌르는 아픔과 슬픔 으로 표현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애정이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의 세상으로 위협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봐도 그렇고 순교자들이나 성인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다 뜻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다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 뜻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창피한 현실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내고 난 뒤에 돌아보면 그때 하느님의 뜻이 비로소 보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 조금 늦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황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듯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때리고 찔러서 아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아픔은 또 감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둘째 자리와 셋째 자리를 염치좋게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별 수고도 없이 영광과 명예의 자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그 형제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잠을 적게 자고 또 적게 놀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 서 참다운 은혜를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처럼 밑으로 내려 가서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1학년 짜리가 자기만한 동생을 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딱해서 지나가던 사람이 "너보다 큰 아기를 업고 있으니 무겁겠다."하고 한마디 하자 그 1학년 짜리가 아주 의젓하게 대답하더랍니다. " 하나도 안 무거워요. 얘는 제 동생이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 십자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무겁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불평과 비난이 많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비난과 욕설이 나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속에 미움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사제 연수회에서 본당의 신자들을 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본당 신부가 밑으로 내려가서 좀 죽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얘깁니다. 위에서 소리만 크게 치고 있으면 신자들이 다 숨습니다. 제 자신이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니까 신자들은 할 일이 없었고 또 그들이 하고 싶어도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꼴찌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해도 크게 상하게 되는 아픔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 보통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고난과 또 우리의 고난을 통해 서 영광의 상을 주시려 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의 잔을 용기있게 마시도록 합시다. 그것이 은혜의 잔입니다.







17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김의철 신부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던 당시 팔레스티나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주눅들어 사는 신세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난세에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에 가득차 기댈 곳 없는 민중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고취시키며, 기쁜 소식을 전파해 나가셨다. 특히, 예수님은 유다이즘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선조들의 신앙을 진실하고도 절정의 형태로 구현시키고자 했으나, 유다 지도자들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충돌을 일삼았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잡고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민감한 세금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한다. 카이사르(=체사르, 시저)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시면 로마의 권위를 부정하는 셈이고, 세금을 내라하면 이스라엘을 배신하는 꼴이었다. 예수께서는 ꡒ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ꡓ고 답변하신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것은 국가 즉, 정치 권력을, 하느님의 것은 교회 혹은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구분하여 혼동을 피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되어 왔다. 불행히도 이 원칙은 오랜 역사 동안 시행착오를 일으켜 충돌해 왔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왔던 두 축 종교와 정치의 충돌은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려 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종교가 주도권을 쥐었을 때 정치측에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부르짖었고, 반대로 정치의 세력이 막강하여 전제적으로 치달을 때 종교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요구했다.



서로가 상대방을 종속시키려 할 때 파탄에 빠진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논쟁을 계기로 민주 정치 이론이 발달하게 되었다. 양자가 서로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인정하여 적극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정치가 그릇된 길을 갈 때 종교는 시정을 요구하고 현실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정치 권력도 종교의 도덕적 판단과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정치가 계속되어 민중이 고통을 당할 때, 교회는 이를 방관하기보다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18                     전교주일   마태 28,16-20 (나)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변희선 신부



  나의 아버님은 재작년 어린이날 작고하셨다. 5월4일 밤 아버님께 폐렴 증세가 있다는 형님의 연락을 받은 나는, 심상치 않은 예감도 있고 해서 일주일간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인천으로 달려갔다. 임종을 예감하신 아버님께서는 자꾸만 눈물을 보이셨다. 어머님의 묵주기도와 선종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어린이날을 밖에서 지내지 못하게 된 조카들도 할아버지 곁에서 그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아버님은 숨이 가쁘셔서 그런지 별 말씀은 없으셨고, 단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눈길을 보내시느라고 바쁘신 듯 했다. 아버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어머님과 우리 형제들은 이별의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듯 했지만, 나로서는 아버님의 영혼을 돌보고 장례 절차 등을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나올 겨를이 없었다.



  사제로서 가끔 임종하는 분들을 지켜본 적은 있었으나, 아버님의 임종순간은 나에게 생경한 느낌과 특별한 의미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아버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날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분은 편히 쉬시거나 맛있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드시거나, 당신 묘지의 비석을 어떻게 세우면 좋을지 등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아버님의 관심사는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가족들을 좀더 만나고 바라보는 일이었다. 즉 마지막 남은 정을 우리와 함께 조금이라도 더 나누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평소에는 주로 주무시던 분이 이 날만은 아침부터 오후 7시경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로 눈을 감지 않으려 하셨다. 아버님의 이러한 모습은 나에게 그분의 마지막 유언으로 들려왔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할까, 무엇이 나의 명예나 위신을 높여줄 수 있을까 등등의 관심은 적어도 아버님의 유언은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몸과 마음으로 나에게 남긴 무언의 유언은, 가족들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잠을 자는 일도 아니고, 먹는 일도 아니고, 명예나 체면도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유언을 우리 가족들에게 남기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일종의 유언을 남기신다. 유언은 마지막으로 남기는 가장 중요한 말씀을 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오늘의 유언 말씀은 여러 모로 중요하며 자주 묵상해야 할 구절이다.



  우선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관심은 전 인류의 복음화를 통한 구원에 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님은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의 뜻이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계속 이뤄져야 함을 당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며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신 젓,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모욕과 박해의 고초를 감내하신 것,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몸소 부활

하시고 성령을 약속하신 것 등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은 온 인류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복음화 사업이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나의 제자가 되어, 그들 또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여라. 너희가 복음을 전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유언은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에 새기고,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지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의 가

장 중요한 보편적 사명이다 .



  나의 아버님이 임종하시느라 그 바쁜 와중에서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강렬하고 소중한 유언을 남겨주신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시급한 말씀을 하신다. 「가서 무조건 복음을 전하여라.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









19            연중 제28주일  마태28,16-20 (나)초대받은 나의 모습? 

                                                      박기준 신부



계획되었던 잔치가 깨졌습니다. 초대받은 자들이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잔치 마당이 열립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참석합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구별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어 그는 잔치자리에서 쫓겨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임금님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찾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스스로 어두움 속에, 멸망에 빠져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ꡒ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ꡓ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의 처지는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 주일마다 최고의 잔치인 미사성제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런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피곤하다, 술 마신다, 돈번다, 약속이 있다,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거룩한 미사의 잔칫상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주님이 누리는 행복의 극치를 맛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치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 집에 간 사람은 초대를 거절한 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헌옷(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예복(새 인간)으로 갈아입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오만, 자만, 교만의 옷을 벗어버린 겸손의 예복을 입고, 인내의 옷을 입고, 사랑의 옷을 입고, 존경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도끼를 나무뿌리에 대시기 전에 회개하고 개심하여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예복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20               연중 제29주일 마르 10,35-45 (나) 말짜 신부

                                                      박제원․알베르또 신부



어느 신부는 66년에 세례를 받았고, 77년에 ꡐ하느님은 있음ꡑ을 확신하였고,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98년 ꡐ하느님은 나를 사랑하면서 있음ꡑ을 믿게 되었다. 하느님의 있음은 나를 위하면서, 사랑하면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면서, 봉사하면서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신부는 ꡐ하느님은 있음ꡑ을 확신한지 20년이 지나서야 ꡐ하느님은 나를 사랑하면서 있다ꡑ고 믿게 되었으니 신부치고는 말짜 신부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느님은 그 신부에게 ꡐ하느님은 나를 사랑하면서 있다ꡑ는 신앙을 주었고 그 신부는 그것을 인정하였다. 이 날은 그 신부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그 신부의 생애 최고의 날은 신품성사를 받은 날이 아니었다. 어떤 다른 신부도 그가 지은 기도문에서 ꡐ내 생애의 가장 귀중한 선물, 신앙의 은총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무엇을 전해야 할지 그 신부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하느님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면서 있다.



그 신부는 예비자에게 ꡐ당신은 알지 못해도 당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려고 당신에게 생명을 주셨고, 지금 이 시각까지 돌보아 주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결같이 돌보아 주실 사랑의 하느님ꡑ을 선포한다.

신앙이 나의 마음에 자리잡으면 나의 마음은 뜨거워져서 고마운 하느님을 선포하지 않고 배길 수 없게 된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지 않는 사람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에게 가정과 직장과 돈이 있다. 그래서 그는 ꡒ나는 복되다ꡓ고 말한다. 당신은 ꡐ복되다ꡑ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최고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까? ꡒ그렇지는 않습니다. 모자라는 행복입니다.ꡓ하고 그는 대답한다. 모자라기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안달하고, 괴로워하고, 쫓기고 짓눌리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믿는 사람은 현재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 믿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있고, 관대하고, 겸손하고, 용서하고, 항구하고, 자비롭다.



하느님은 나를 내리사랑하면서 있다. 나는 하느님께 내리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나도 이웃을 내리사랑 한다. 전교는 내리사랑의 가장 뛰어난 방법이다. 하느님은 그냥 있지 않다. 하느님은 나를 내리사랑하면서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에게 복음이다. 나는 복음을 전한다.









21      전교주일   마태28,16-20 (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인간의 한없는 갈망)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혼자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고독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이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고독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현혹시키는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이 때 사람은 고독 속에서 자신 안에 자기가 채워줄 수 없는 굶주림이 있고, 자기가 풀어줄 수 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결코 채울 수 없으면서도 채워지지 않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심연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허무의 심연에서 채워 주기를 요구하는 무한한 갈망이 솟아오른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한한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무한한 갈망을 가진 존재이다. 이 갈망이 만족되지 않는 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갈망을 만족시켜줄 대상을 찾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 있는 것들 즉, 돈 명예 권력 향락 등을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이 갈망을 채우려 한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로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유한하다.



  사람이 혼자서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소유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무한한 갈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오직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그 행복의 추구가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막연하게 느끼는 이 무한한 갈망의 정확한 이름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다. 홀로 한없이 완전하신 하느님, 자신 안에 행복을 주는 모든 것을 완전히 소유하고 계시기에 스스로 한없는 만족을 누리시는 하느님만이 사람의 이 무한한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서 나오는 순수한 호의로 하느님의 한없이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에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써만 무한한 갈망이 완전히 채워지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행복을 얻게 된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걸어 인생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께 도달해야 한다. 무한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한없이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하느님 없이 인간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간의 길을 비추시고 인도하신다.



  사람이 하느님을 버리면 그 길은 갈 수 없는 길이 된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하느님을 버렸고 그래서 길을 잃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버리고 악의 길을 선택한 이래 사람들의 인생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었다. 이제 사람이 가는 인생의 길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사람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이 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피조물을 통해서 채우려 하게된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피조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리 이탈하고 타락하게 된다. 즉 명예에 집착하면 할수록 교만을 키우게 되고, 재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탐욕을 키우며,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자극적인 쾌락을 원하게 된다.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더 깊이 자신을 타락시키게 되고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허무와 절망의 심연이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성부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을 구원하라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성자께서는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한없이 당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을 가르치고 보여 주셨으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인간이 갈 수 없었던 길을 갈 수 있는 길로 만드셨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기쁜 소식이 인류에게 선포된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 소개되는 데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보다 더 큰 의무는 없고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들어야 할 권리보다 더 큰 권리가 없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6).









22                 전교주일   마태 28, 18-20 (나) 참 전교의 길



  어느 시골 마을에 가난한 한 가족이 도시에서 이사를 왔다. 도시에서 별별 일을 다해 보았으나 결국은 빈털터리로 밀리고 밀려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마침 구회관이 비어 있어서 그리로 들어왔는데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젊은 부부는 어린아이 둘을 집에 남겨 둔채 매일 날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근사한 차나 타고 나타나서 별장 짓고 돈을 물쓰듯하며, 술을 사고 밥을 사면 관심이 많았겠으나, 이 젊은 부부는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김씨네만은 달랐다. 그들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어려울 매면 도와주었다. 김씨네도 넉넉지는 않지만 별식이 있으면 오라고 하여 함께 먹고, 답답할 때 함께 해주며 하소연을 들어주고, 울면서 인생을 서글퍼할 때 위로해 주는 그런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젊은 부부는 너무도 고마워하였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타향에서 자신들을 사람 취급해 주는 유일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김씨네가 천주교 신자라면 그 젊은이들이 성당에 다니는 것은 시간문제다. 심씨네의 삶을 보고 그들은 김씨네가 믿는 하느님은 정말 좋은 신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전교는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주위에서 거리선교 새복음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인간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삶을 신자들이 살아갈 때 비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게될 것이다,



전교는 우리의 임무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세상을 하직하는 부모가 손을 붙잡고 유언을 하면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녀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하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다, 우리는 이 마지막 말씀을 지켜야 한다.



  선교교령 제2항에도 “나그네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선교의 사명을 확언하고 있다.

  교회의 탄생일은 언제인가? 우리는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강림 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선교하려고 떠났기 때문이다. 겁쟁이였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달라졌다, 굳셈의 은사로 충만해진 그들은 전교하려고 나섰다. 그러므로 전교의 역사는 교회가 생겨나면서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는 전교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는 것이다. 전교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그리스도와 친교를 갖게 해주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얻게 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루가 4,43)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겠다.



  전교의 방법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옳은 말이다, 여기에서 전교의 방법을 살펴보자.



1. 복음은 말로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점잔만 빼느라고 말로써 전교하는 데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무엇이건 다 해주고 싶다.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어찌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주님께 대한 믿음이 돈독해야한다. 잔은 차야 넘치는 법이다. 나도 주님을 믿고 행복하지 않은데, 확신이 없는데, 어쩌 남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2, 복음은 기도로 전할 수 있다. 소화 데레사는 수녀원 밖에서 전교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분은 전교의 주보가 되였다. 기도로 전교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 없이 주님을 전할 수 없다,



3, 경천애인해야 한다. 신자들이 굳은 믿음으로 무장하고 어려움 중에도 기뻐하고, 희망을 보일 때 비신자들은 감동한다. 신자들이 미지근한 믿음으로 비신자와 똑같은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비신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성당에 나올 마음이 없을 것이다. 열렬한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믿음,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그런 믿음에 감탄한다. 또 이웃

을 사랑하고, 특히 소외된 이들을 사랑할 때 이웃은 우리를 따라오고, 주님을 만나 행복해 할 것이다. 행동이 따라주는 전교가 아쉬운 때다,



  복음의 메시지

 아시아의 전교 현황은 아직도 인구의 2~3%정도로 부진한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는 8%정도라고는 하지만 많은 쉬는 신자가 있고, 아직도 우리가 전교해야 할 대상자가 부지기수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전교했는가? 영세한 뒤로 몇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가? 한 명도 없다면 나 자신의 신앙을 반성해야 한다. 내가 기쁘지 않기에, 남에게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전교주일   마태 28,16~20 (나) (연중 29주일) 준 신자를 붙잡자!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1926년 교황 비오 11세께서 10월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을「전교를 위한 기도와 활동의 날」로 정하셨으며, 1970년 한국 주교회의에서는 17월 한 달을「전교의 달」로 제정하여, 신자 여러분들에게 전교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비신자인 비누 만드는 사람이 선교사와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그때 비누 만드는 사람이「여보시오, 당신이 전파하는 그 복음이 아직까지 한 일이 무엇이오? 자, 세상을 보시오 .아직도 죄악이 많고 악한 자도 많소」라고 질문을 던졌다. 선교사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어 가다가 도랑에서 더러운 흙장난을 하며 노는 흙투성이 꼬마 아이를 발견했다. 이때다 싶어 그는「비누도 뭐 한 일이 별로 없군요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세상을 더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과 더러운 곳이 너무 많으니 하는 말이오」라고 말을 꺼냈다. 이 때 비누 만드는 사람은 「어허 참, 그러니까 비누는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선교사는「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도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한다.



  선교, 전교, 포교는 다 똑같은 뜻이다.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알려주신 복음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첫째로는, 미신자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이들이 끊임없는 쇄신을 통해,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될 수 있도록, 사상, 사고방식, 가치관, 문화 등 생활자체를 복음화하는 행동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복음화라할 수 있다.



  전교의 대상은 누구일까? 「누구나 다」이다. 보통 사람은 물론 교도소의 죄수, 군인, 환자, 가난한자, 권력자, 창녀 등 누구든지 다 대상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다행이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좋게 보고 있다. 이른바 「준신자(準信者)」들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를 믿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다행한 일이다. 또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좀더 후에 여러 가지로 형편이 나아지면 꼭 믿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의 해에는 전국적으로 16만5천명이나 영세했다. 외국 교회에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천주교를 좋게 보는 사람들을, 시각을 달리하기 전에 붙들어야 한다. 또 다른 대상은 바로 여러분의 가족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또는 아이들, 부모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을 예수님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예수님은 이 선물을 온 세상에 가서 나누어주라고 명령하셨다. 고로 우리는 모두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전교 해야 할까? 어떤 선교사가 낚시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웠다고 한다.

 첫째, 고기는 스스로 바구니에 뛰어들지 앓는다.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둘째, 고기는 미끼를 찾아온다. 셋째, 고기를 낚기에 적당한 때와 시기가 있다. 넷째, 어떤 장소에는 고기가 몰려온다. 다섯째, 고기는 협동심이 강하고 끈기가 있다. 여섯째, 고기는 잡아서 바구니에 담는다 등이다.



 1. 우선 우리 스스로 전교 하려는 열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 열의를 갖고 기도하고 권면한다면 결국엔 나오게 될 것이다. 대부분 새 영세자들의 말에 의하면 첫발을 내딛기가 힘들다고 한다. 따라서 예비자 교리 때나 주일미사에 몇 번만 인도하여 함께 있어 준다면, 그리하여 교회생활에 적응이 된다면, 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2. 우리도 교리를 확실히 알아야한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든지, 교리책을 다시 공부한다든지 해서 뭣좀 알아야 전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턱대고 「성당에 나가면 참 좋으니 나가 보라」고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신앙교육은「평생교육」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복음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워지며, 교리서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세 전 몇 달 동안 들었던 예비자 교리만이 유일한 교리지식의 근원이요, 그나마도 영세한지 오래 되어 모두 까맣게 잊고있는 실정이다.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3. 복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복음이 내게는 자랑거리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께서는「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맛서겠습니까?(로마 8:31)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31:23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힘을 내라. 용기를 가져라. 너는 내가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이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야 할 몸이다. 내가 정녕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사도 베드로께서는「이 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우리가 믿는 복음을 이웃에게도 전파하여 그들도 복음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고 다짐하자 .용기를 내자. 예비자 여러분! 여러분들도 끝까지 항구하시어 세례를 밖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4           전교주일   마태 28,16-20(나)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



  묵상 :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복음화' 그것은 교회의 근본 사명이다. 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다. 선교 열은 항 상 교회 활력의 척도다.



 선교는 교회의 유일한 사명



  교회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교회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을 하면서 성당을 지어 예비신자를 모아 교리를 가르치며 포교사업도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포교사업은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사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나그네의 길을 가고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선교교령, 2항)고 하였다. 말하자면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셨고, 이 목적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복음화'는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이 아니라, ’유일한 사명'이다. 이는 교회에는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외에 제2, 제3의 다른 사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인력과 힘은 복음화를 위해 있는 것이다.



  복음화란 무엇인가?

 ‘복음화(Evangelizatio)'란 무엇을 뜻하는가? 쉽게 말하자면, 복음화란 ’세상을 변화시켜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질서 지우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 복음의 빛을 스며들게 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화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첫째는,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고 성사와 신앙교육 등 사목촬동을 통해 한사람 한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적 가치와 맞지 않는 제도, 조직, 구조 등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사회사목이라고 한다. 사회사목은 사회운동(농민사목, 노동자사목, 도시빈민사목 등)과 사회사업(고아원, 양로원, 정신지체장애아 시설 등의 복지사업)으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사회사업은 항상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받아 왔으나, 사회운동은 깊은 이해를 받지 못한 때도 있었다. 어느 하나의 방법만으론 복음화를 이룩할 수 없다, 함께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증가의 황금기는 끝났는가? 물론 세례를 주는 것만이 복음화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각자의 변화의 확실한 방법임이 사실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크게 신자가 증가했던 시기가 세번 있었다,



첫번째는,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난 후,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됨으로써 신자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두번째는, 6․25동란이 끝난 후였다.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난 뒤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신앙을 찾은 것이 그 계기였다. 그리고 여기엔 외국의 구호물자도 교세확장에 기여하였다.

세번째는, 70-80년대 군사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벌인 인권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힘입어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신앙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도성소나 사제성소뿐 아니라, 신자증가율도 현저히 둔화되고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점에서 서울대교구에서 앞으로 10년 안에 본당 200개를 증설하고 복음화 비율 18%까지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혀, 교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것은 몇몇 본당의 사례를 보면 결코 황당한 계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천주교 신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리고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앞으로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종교를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신자 증가율은 예배당보다 못하다.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신자들이 열심히 전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전파에 무관심한 신자는 참 신자가 아니다, “교회 역사에서 선교 열은 언제나 교회 활력의 표지였으며, 반대로 선교 열의 감퇴는 신앙약화의 표지였다."(교회의 선교사명, 2항)



  교황은 금년 전교주일 담화에서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은 기도, 고통의 봉헌,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활동에 협력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것은 패배주의이고,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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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1:04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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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8주일

       10. 김창식 신부(나)/17

        11. 김명은 신부(나)/18                    12. 조광호 신부(나)/20

        13. 함세웅 신부(나)/23                    14. 강길웅 신부(나)/25

        15. 김영남 신부(나)/27                    16. 방윤석 신부(나)/29

        17. 박기준 신부(나)/없음                  18. 신요안 요한 신부(나)/31

        19. 신은근 신부(나)/32                    20. 작자미상(나)-낙타가 바늘귀로../33

        21. 교구주보 (나)/35                     22. 전옥주 작가(나)-즐거운 나의 집/36

        23. 작자미상(나)/37



10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김창석 신부



예수님이 태어난 고장에는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는데, 하도 커서 둘 다 바다라고 불린다. 북쪽에 있는 것이 갈릴레아호이고, 남쪽에 있는 것이 사해이다. 이 두 큰 호수는 요르단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북쪽의 갈릴레아호는 여러 갈래의 작은 강들로부터 물을 받아들여서 큰 요르단강으로 흘려 보낸다. 물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계속 흐르니까 많은 물고기와 해초가 서식하고 있다.

반면에 남쪽의 사해는 해변보다 약 4백미터나 낮아서, 요르단강뿐 아니라 다른 강들로부터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는 데가 없기 때문에 물이 죽어 있다.



그래서 사해에는 물고기나 해초 등 생물들이 서식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죽은 바다인 것이다. 물이 졸아들어 그런지 염분이 유난히 많아서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러한 사해를 욕심쟁이의 본보기라고 부른다. 사해는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이 없으니까 그 안에 아무 것도 살 수 없듯이, 욕심쟁이도 받는 것만 좋아하고 남에게 줄 줄 모르니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의 육체도 먹기만 하고 배설을 안하거나 운동을 안하면 에너지가 축적되어 뚱뚱해지고 각종 병이 생겨서 살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남에게 준 것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져갈 수 있지만, 주지 않은 것은 가져갈 수 없다고 했다. 남에게 주어야 천국에도 갈 수 있다는 말인데, 가만히 살펴보면 부자일수록 주는데 인색한 것 같다.



교회에 헌금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수입이 적을 때는 십일조 내기가 아깝지 않은데 수입이 많아질수록 아까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 19,24)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복음 성서에도 없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복음사가들이 기록하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루가복음 14장 3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다 한다”고 강조했다. 주지 않으면, 즉 나누지 않으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11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김명은 신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인생을 뜻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 살 나위도 없다. 그런데 성서는 인생을 헛사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무책임한 삶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고, 이웃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며,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소명을 전부 헛되게 하고 마는 경우를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겉으로는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삶을 말한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으며, 힘든 일은 하지도 않고, 하더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마태 23,4-5)



오늘 성서의 말씀은 부와 재산과 명예가 우상시되는 오늘의 시대 속에서 미지근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에 따르는 삶의 결단을 요구한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 청년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고 길을 떠나시는 예수를 부리나케 쫓아가 진지한 물을 던진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흔히들 모세 율법의 십계명을 자기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지만, 이 젊은이는 율법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껴왔던 것 같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지 십계명을, 그 중에서 실질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웃에 대한 계명만을 회상시킬 뿐이다. 예수님께서 굳이 설명하시지는 않지만,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서 드러낼 것을 은연중에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잘 지켜왔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종교적 열정을 대견해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젊은이에게 구원의 완전한 길을 가르치신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리고 나를 따르시오” 가볍게 던진 예수님의 말 한마디! 당신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우리네 사람들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희생적 요구는 젊은이에게나 오늘의 우리에게나 하나의 수수께끼와도 같다. “나는 이제까지 율법을 어김없이 지켜왔고, 재산도 열심히 일해서 정당하게 모았으며 간간이 자선까지 베풀어 왔는데.... 꼭 재산을 포기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가?”



사람들은 흔히들 재산이나 부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말들 하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헐뜯고 싸우고 심지어 소중한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끊이지 않는 재물에 대한 욕망은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재산의 노예일 수가 없다. 인간은 자유 속에서 인간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 젊은이 역시도 재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삶의 안식을 얻고자 했던 젊은이의 슬픔은 예수님의 요구자체가 아니라 그 큰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참 생명을 얻고자 하는 젊은이의 청에 진정한 자유를 주는 합당한 요구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그리고 모든 자연적인 청빈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금 전 알렐루야로 노래했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재음미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할 때 그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필요한 일꾼을 부르셨다. 오늘도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본받고 재현해야할 각각의 소명을 받고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로써 각자가 부여받은 소명에 눈을 뜨고 충실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탈레스에 관한 일화이다. 밀레토스 지방의 어느 젊은이가 어부에게 돈을 주면서 고기잡이를 부탁했다. 그런데 어부가 던진 그물 속에는 물고기 말고도 황금으로 된 물병이 하나 들어 있었다. 어부와 젊은이는 서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싸우다가 결국 법정에 가서 고소를 했는데 법정에서도 판결이 나질 않아 마침내 델포이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묻기로 했다.



신의 대답은 “물병은 가장 지혜 있는 자의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금물병은 철학자인 탈레스에게 보내어졌다. 그러나 탈레스는 자신이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현자에게 보냈다. 결국 피타코스, 비아스, 솔몬 등 ‘그리스 칠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보내어졌지만 돌고 돌아 탈레스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자 탈레스는 그



황금물병을 델포이 신전에 헌납해 버렸다고 한다.

오늘 독서가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끈이다.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교리시간이나 강론을 통해 듣고 배우는 것은 지식이 된다. 지혜는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내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결국 지혜가 없는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지혜이어야만 한다.



솔로몬은 바로 이런 지혜를 청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겸손에 탄복하여 부와 명예까지도 함께 주셨다. 그리스의 현자들이 서로의 지식을 내세웠다면 황금물병은 아마 일곱조각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쪼개어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지혜 있는 자를 세상의 빛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지혜를 간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식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 제2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촉구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한없이 연약하고 힘없이 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주시는 살아 있는 힘이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당신 말씀을 통해 당신 백성을 이끌어 왔으며,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생한 구원의 손길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운명을 과감히 던져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분명 심판날에 예리한 쌍칼날로서 우리의 삶을 진실과 거짓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것이다.


신앙은 삶의 결단이며 또한 투쟁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유에서 떠날 수 없었던 젊은이가 곧 나 자신이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자들의 구원의 의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특별한 보상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희생을 격려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부르심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부르심에 끊임없이 응답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시대를 달리해도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새롭게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12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조광호 신부



1990년대 서울의 강남은 한마디로 또 다른 하나의 「대한민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같이 지어진 거대한 식당들이 한 집 건너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흥청거리는 거리마다 세계의 온갖 유명품들이 찬란한 불빛 아래 행인의 눈길을 유혹하고 있다. 그곳에 위치한 유명 백화점들은 세계의 그 어느 유명 백화점과도 견줄 만큼 화려하고 호화로운 물건들로 가득 차 있고, 잘 차려 입은 여인들로 장내는 온통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 누가 이러한 백화점만을 보고 오늘의 한국을 얘기한다면 우리나라는 그 어느 선진국보다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나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비켜서면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은 판자집들의 응어리진 삶의 숨막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빈민촌의 시장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아낙네들의 삶의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 눈빛과는 달리 호화 백화점의 여인들의 눈빛은 인간의 정상적인 체온에 잘 순응된 품위있고 정숙하고 세련된 여유를 띄고 있음은 그 누가 보아도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가 선포하신 「행복선언」은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복되어라, 지금 굶주린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루가 6,20 이하 참조)라고 선포되고 있으니 그 누가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부자들이 오히려 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많이 지니고 있지 아니한가. 그들은 자선금을 듬뿍 낼 수도 있고, 온갖 피정과 기도모임, 세미나에 참석은 물론 원한다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도 가난한 이들보다 더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생계에 쪼들리는 가난한 이들은 주일미사는 물론 교회의 모임이나 봉사활동은 엄두도 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때때로는 어쩔 수 없이 교회의 가르침을 거슬러 살아야 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남보다 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교회 안에서 마저 소외되어 대접받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 하고 부자들은 구원받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하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마르 10,23-27 참조)



어떤 이는 예수가 말씀하신 부(富)를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더 역점을 두어 말하지만 이러한 설교는 때때로 부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느님과 돈’ 사이(마태 6,24) 즉 ‘압바와 맘몬’ 사이에는 결코 화합 할 수 없는 대립을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 부자 청년이 찾아 왔을 때 예수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즉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9,21 이하 참조)

외적으로 아무런 흠잡을 데 없이 성실하고 건실한 부자청년(마르 10,17 이하 참조)에게 우선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을 교정시키셨다. 예수는 우월감과 자기정당성의 확신에 차 있는 그 젊은이가 자기환상을 깨고 마음속에 초월적이고 지고한 선을 향해 마음의 눈을 뜰 것을 종용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29절)는 예수의 말씀은 이 부자청년에게는 틀림없이 가혹한 요구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과 재산에 얽매인, 끝없는 인간의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예수와 같은 운명을 나눌 것을 제자가 되는 첫째 조건으로 예수는 요구하고 있다. ‘맘몬’이란 확실히 ‘돈’ 이상의 존재임엔 틀림이 없다. 맘몬이란 인간의 내면에 무섭게 살아 있는 교활한 세력이요, 그것과 결탁한다면 세상의 온갖 행복, 즉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악의 신비’에 자리잡은 어둠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유혹기사에서 나타났던 돈과 명예, 그리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일체의 소유욕, 그것은 지식과 지위, 권력, 재능 그 모든 물질적 정신적 소유의 세계를 일컫는 것일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허상을 신봉케 하고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인간의 우상’을 맘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하늘나라를 향한 ‘새로운 인간상’으로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약함과 실패, 끝없는 자기비하의 길로 ‘야훼의 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임을 예수는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부(富)는 하느님의 축복이지만 많은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굶주릴 때 그들을 외면하고 끝없는 욕심으로 축적할 때 ‘피’가 된다. “만일 누가 가난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더 차지했거나, 물려받았기 때문이고, 더 가진 이 몫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전까지는 도둑질한 물건으로 남는다”고 교회의 교부들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많이 가졌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만큼 하느님과 이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그 책임이란 진정한 포기와 나눔으로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일 수밖에 없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의 그 ‘강요된 가난’이 인류의 죄라고 한다면 이러한 복음적인 ‘선택한 가난’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걸었던 길이 바로 이러한 가난이었음은 두 말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가난으로써만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한 우리 시대의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말은 그 핵심을 극명하게 드러낸 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행복과 ‘백배의 축복’(30절)이 이러한 가난에 있음은 그 포기와 나눔의 정도에 따라 인간이 맛 볼 수 있는 신적 기쁨과 평화의 정도가 다르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누가 이 길을 그리 쉽게 자기 힘으로 갈 수 있을까. 오직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절대 사랑에 신뢰하는 길. 하느님의 뜻만을 찾았던 그 ‘나자렛 예수의 길’만이 우리에게 그 은총의 힘을 내려 주시리라 믿는다.

근심하는 빛으로 예수를 등지고 떠났던 부자청년, 가진 것이 많아서 버리고 떠나기가 더 어려웠던 그 청년의 뒷모습에서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재화와 정신적 소유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축복과 성사’가 되는 날을 기다려 깊어 가는 가을 마른나무 가지에 앉은 새처럼 나는 오늘 이 저녁 언젠가 도래할 새 하늘, 새 땅을 그려본다.





13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22 (나) 무엇을 해 야 할까

                                                           함세웅 신부



우리 모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평생 동안 억만원을 꼭 모으겠다고 목표를 세워서, 구천 구백 구십 구만 구천 구백 구원을 모았다고 합시다. 이제 1원만 더 모으면 평생 필업인 억만 원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 돈을 어떻게 버나 궁리하며 길거리를 오가던 중에, 거지의 동냥통에 있는 1원짜리 서너 개를 보고서는 '아 ! 저 동전 중에 하나가 내 것이 된다면 나는 억만원을 채울 수 있을 텐데 !'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자는 그 많은 돈을 부정한 행동으로 번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강도 노릇을 해서 번 것도 아닙니다. 그도 노력을 해서 번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1원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것이며, 억만원이 채워지면 또 다른 억만원을 목표로 세워 또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기도도 착실히 잘하고,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미사 참례도 하고, 부모와 자녀, 친지들에게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지내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무난한 신앙인, 무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잘 지킨, 착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코 10, 17-22)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쏠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착한 부자 청년은 이 대답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무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한 착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뭐, 이 정도면 됐지 ! 나는 주일에 헌금을 내 나름대로 바치고, 교무금도 내고 또 악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데 ! "하며 자족감에 빠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족감에 빠져 있는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침울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부자는 천당에 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하신 예수님 말씀에 그만 기가 질려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합니다.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 하는 것은 물질이나 돈이 많다, 또는 적다하는 외적인 물량의 척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복8단, 즉 여덟 가지 행복된 사람의 조건 중, 첫번째 나오는 말씀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매우 가난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남의 것을 탐만 내고,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불평이나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난한 가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온갖 사리사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부자는 사랑이 없는, 자선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자를 두고 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이와 부자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① 마음으로 가난하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자기 위치에 기쁨을 느끼는 착한 사람, 착한 신앙인)

  ② 실제로는 부자이지만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남을 돕는 착한 자선 사업가)

  ③ 실제로 가난하지만 마음에는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들-(자신의 현재 위치에 불평불만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

  ④ 실제로 부자이고 마음의 부자(이기주의자)-(구두쇠형)

  

과연 우리는 이 네 가지 부류에서 어느 형에 속하는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굶어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풍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입니다. 다마 이러한 재물, 또는 환경, 지위에 너무 집착되어, 이런 것에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느님께 관한 내적 생활,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등한히 하는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우리 교우 모두는 다 착한 신앙인들이며, 또 열심인 분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도 모두 지켜왔습니다.

  “너, 꼭 하나가 부족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세 가지 반응이 난타납니다. “어휴, 그것은 못하겠군!"하며 떠나가는 무리와 “그것은 약간 곤란한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자 청년의 형과,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스도교의 사랑, 애덕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위해서 남을 더 도와줘야겠다는 애덕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의 보람과 애덕을 맛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는 기쁨, 애덕의 기쁨,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며, 성인 성녀의 기쁨입니다. 











14                   연중 제28주일  마르10, 17-22 (나)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7,7~11 (나는 지혜와 비교하면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제2독서 히브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복 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느님과 재물!



이것은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문제요 갈등입니다. 대단히 송구스럽게도 재물이 하느님보다 더 매력 있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이들도 하느님보다는 재물 앞에 머리를 숙이고 비굴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지혜'야말로 어떤 재물보다도 뛰어나게 위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보물은 지혜며 그 지혜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물이 있다고 저자는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지혜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자신입니다.



세상에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보배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이며 하느님을 잃으면 세상을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는 이들마저 땅의 재물에만 집착되어 있습니다. 열심한 사람들 중에도 상당수가 재물에 갇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거의 완벽하게 지켜 왔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아주 성실하게 살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놀랍게도 그것은 위선이었습니다. 실제는 율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했을 때 그는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라고 해도 안 갑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앙의 모순입니다. 자신은 십계명을 잘 지키고 봉사를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재물에 묶여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비굴한 처신을 합니다. 사람이 봉헌이 떳떳지 못하고 나눔이 온전치 못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돈이란 이상한 마력이 있어서 고상한 사람, 치사한 사람이 돈 앞에서 갈라지게 됩니다. 하다 못해 사람들이 화투 치는 모습을 봐도 돈 몇 푼에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도 돈 앞에 자기 신앙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서는 교무금을 얼마 내고 있는지 장부를 들춰보면 대충은 압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언젠가 성탄 면접을 할 때 제가 교무금에 대해서 상당히 심도있게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바라지 않지만 십일조의 반은 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 봤더니 그때 신자들의 양심을 한 순간에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은 신자들이 자신을 속였습니다. 있는 사람들이 더 감췄습니다.



십일조의 은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 은혜는 누가 뭐래도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마태23,23). 그러나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자칫 위선도 되고 바리사이파 신앙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반도 하느님 앞에 봉헌하지 않는 것 도 문제입니다. 그것도 역시 위선일 수 있으며 바리사이파 신앙 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성의껏 낸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성의'가 대단히 애매해서 어떤 사람들에겐 백분의 일, 이백분의 일도 안됩니다. 믿음이 자갈이면 자갈이 나오고 믿음이 모래면 모래가 나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서 믿음을 보배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녹이 슬거나 좀눠주고 베풀어 준 것이요 또한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송구스러워 하겠지만 그것만이 진정 '내 것'이 되어서 나를 영원히 채워 줄 것입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쌓고 높이 쌓았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봉헌을 더 떳떳하게 하도록 합시다. 봉헌은 진정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더 쌓도록 합시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마르10,23).



먹어서 아무리 많이 쌓아도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결국 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쌓은 것만이 내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하늘엔 관심이 없고 땅에만 관심이 큽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에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이름으로 부동산이 수만 평 등기되어 있고 내 비밀번호로 수백억이 예치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잠시 맡겨진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얻은 내 마누라도 내 것이 아니요 내가 낳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잠시 맡겨진 것이요 때가 되면 주님께 다 돌려 드려야 합니다.







15              연중 제 28주일   마르 10,17-30(나)

‘예수 추종’을 포기한 어느 부자.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그리고 ‘재물의 나눔’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우선 몇 개의 계명을 열거하신 다음 “이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시는데, 이 말씀에는 질문자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자 질문자는 즉시 “그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그 질문자를 ‘대견해 하시면서’도 그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루가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이해가 잘 된다.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 사람은 살인강도질이나 도둑질과 같은 큰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문간에 누워 병으로 괴로워하며 굶주리고 있던 라자로와 같은 사람들을 모르는 체했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그런 벌을 받아야 했다. 비슷하게 오늘 복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율법에서 하라고 명하는 것을 어기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포함하는 실행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실 율법서 자체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예컨대 신명기). 예수님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이런 정신을 잊어버리고, 율법서의 문자에만 매달리며 그 문자대로 지켰느니 안 지켰느니 하며 따지고 살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 주신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질문자가 위의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그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적으면서 그 이유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

질문자가 떠나간 뒤에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재물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나온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가장 큰 짐승인 낙타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를 연결시키신다.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부자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자들도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서로 수군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라는 격언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부자를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시켜 그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말씀은 참다운 신앙실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 하나를 오해할 여지없이 분명히 가르쳐 준다. 그 기준이란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나누고 사느냐 아니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부자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데’ 있어서는 탓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에게는 흠잡을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듯한 이 질문자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결국 ‘재물에 대한 애착’이라는 ‘걸림돌’에서 넘어지고, 예수 추종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의 ‘나’는,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소명의 길’에서 비틀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도 ‘진지하게’ ‘영생의 길’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하는 그의 태도와 그의 대답을 듣고 ‘대견해 하시는’ 예수님의 긍정적 반응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지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재물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큰 도구가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재물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남아, 결국에는 하느님도 이웃도 다 잊어버릴 정도로 교만과 허영의 도구가 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될 때, 본디 선물로 주어졌던 그 재물은 구원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만다. 성서는 많은 재물의 소유가 탐욕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자주 경고하고 있다. 성서에 의하면 탐욕은 온갖 죄악의 온상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신앙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단체적 차원(교회의 단체, 기관)에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관심사에서 ‘재물’이 결코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재물이 윗자리를 차지하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6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그 놈의 돈이 뭐길래

                                                      방윤석 신부



「만약에 잭팟(Jackpot)이 터져서 6백만불을 거머쥐게 된다면?」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들어갈 때면 으례히 서로 약속을 한다.

첫째로 동전 한푼이라도 꿔주거나 받지 말 것. 왜냐하면 내가 꿔준 돈으로 횡재했으니 나와 반씩 나눠야 한다고 대들지 모르니까(실제로 그런 재판이 많다고 한다).

둘째는 내가 땄어도 너희들에겐 저녁 한끼 근사하게 낼테니까, 그 이후론 서로 안면몰수 할 것.

세째로 돈 땄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기자 인터뷰할 것을 생각해 둔다.

네째로 그 돈을 챙겨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한다. 돈 꿔달라는 사람이 많을 터이므로. 그리고 안갚을 것이 뻔하므로‥‥이젠 약속이 다되었다.



도시로 들어오니 후드드득! 후드드득! 돈 쏟아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부푼 가슴을 안고 덤벼본다. 그리고는? 웬걸, 몽땅 털리고 만다. 아까의 약속은 즐거운 헛소리일 뿐이다. 그놈의 돈이 뭐길래 그렇게도 못가져 안달일까? 하긴 나에게 누가 1억쯤 거저 준다면(그럴리야 없겠지만) 정신이 산란할 것이다. 분심이 들 것이다. 이 돈을 어찌 해야하나? 어디다 써야하나?

  

이 하늘 높은 시월에, 웬 느닷없는 돈타령이냐고? 그러나 요즘 세상 돈 때문에 신세망치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뜻에서, 아니 정당하게 벌고, 제대로 돈을 쓸 줄 알라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다. 돈 철학을 엉성하게나마 늘어놓으려 한다.



옛날 우리나라 동전은, 가운데 구멍은 사각형이고 겉은 동그랗다. 그 이유는 이전에는 하늘은 둥글고 「천원(天圓)」, 땅은 네모나다「지방(地方)」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동양의 사고에 근거해서 동전 겉은 하늘을 뜻해서 둥글고, 안은 땅을 생각해서 네모구멍을 뚫은 것이다. 이것은 곧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온 천지 온 누리에 돈이 통용되라는 뜻이다.



그리고「돈」이란 말도, 돌고 돈다 해서 생긴 것이니 돈은 자꾸 돌려야 한다. 돈을 감추어두면 안 된다는 뜻이다. 선거자금이니 ,비자금이니, 안정기금이니, 떡값이니, 음성적 수입이니, 뭐니하고 돈을 감추면 썩게 된다는 것이다. 돈이 썩으면 윤리도 양심도 썩게 된다. 옛날 돈은 가운데 구멍을 뚫었으므로 그 돈을 눈앞에 바짝 갖다가 대어도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 동전은 구멍이 없다. 그래서 막힌 동전을 눈앞에 바짝 갖다 대면 캄캄하다.



이렇듯 요즘 사람들은 돈을 눈앞에 두면 도덕이고, 윤리고, 철학이고 할것 없이 인격 전체가 캄캄해진다. 사람이 검어진다. 황금흑사심(黃金黑士心)이다. 그러므로 막힌 동전이라도 옛날 것처럼 뚫고 보는 지혜가 있어야 돈을 이기지, 돈에게 잡혀서는 검은 인생을 살게 된다. 감옥에 엮여 들어간 사람들의 인생이랄까.



옛날 동전은 그 이름이 상평통보(常平通寶)였다. 1633년 인조 11년 김육(金堉)이 건의하여 시작되었다. 상평(常平)이란 말을 풀이해 보자. 돈은 항상 잘 유통되어야 한다. 있을 때 저축하고 없을 때 활용해야 한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수확기에 많이 비축했다가 빈궁기에 풀어야 한다. 이래야 경제가 상시평준(常時平準)이 된다. 이 말을 줄여 상평(常平)이라 했다.

오늘 가난해도 내일 부자가 될 수 있고, 오늘 부자였다가 내일 가난해질 수도 있다. 정신차리고 대비해야 한다. 상시평준이 상평이고, 이런 유통이 되는 보물이 통보(通寶)라면 자연스럽게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나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바로 상평일 것이다. 특히 자선사업에 쓰는 돈은 어느 면에서 상평통보이다. 그러므로 내게 재산이 있다고 움켜쥐기만 하고 내놓지 아니하고 주지아니하는 사람은 유무상통(有無相通), 상하평준(上下平準)의 자세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돈을 잘 써보자. 잘 쓰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모든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을 당시에는 국민들에게 민주복지국가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사회복지를 위해 괄목할만하게 해놓은 게 무엇인가? 별로 없다. 노인문제를 해결했나, 장애인이 자긍심 갖고 살도록 해결했나? 가난한 자에게 혜택을 제대로 주었나, 수입이 많았으면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나, 도로 표지판이라도 제대로 해서 사고를 줄이려 했나, 도대체 상평(常平)위해 노력한 흔적이 안 보인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부(富)와 재물(財物)에 대해 훈계하신다. 어느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이 청년이 「그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청년은 부자였기 때문에 근심 중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이는 부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 구원의 방해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지혜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내걸고 결단을 내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18           연중 제28주일   마르10,17-30 (나)      한 줌의 재라도

                                             신요안․요한 신부



어떤 신부님이 한 모임에서 강의를 하던 중 질문을 던졌답니다.

ꡒ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낙타도 바늘귀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ꡓ

모두들 대답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어떤 형제가 손을 들더니 대답을 하더랍니다. ꡒ신부님, 낙타를 죽여서 한 줌의 재로 만들어 그 재를 바늘귀로 통과시키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말을 나눈 부자 청년은 일생동안 법을 잘 지켜왔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ꡒ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ꡓ라고 내놓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대견해 하셨고 그의 과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희생과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포기하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껏 아무 문제없이 착하게 법을 잘 지키고 살아온 청년에게 그런 과도한 요구를 해야만 하는가? 만일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ꡒ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ꡓ 제자들마저도 수군거립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렇게나마 법과 계명을 지키고 그래도 큰 죄는 안 짓고 살고 있는데 ꡐ이 정도면 된 것 아니냐?ꡑ 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나와 관련된 것만 잘 지키고 내 가족, 내 공동체만 잘 운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런 삶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생명을 버리려니 두렵고, 애착을 버리려니 두렵고 두려워 슬프게 떠난 부자청년의 모습이 왠지 마음 아프게 그려집니다. 그 분을 따를 때 주어지는 백 배의 애정과 백 배의 고통과 백 배의 사랑이 힘들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백 배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백 배의 고통이 따름을 알기에 그 고통이 싫어 부자청년처럼 슬프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분을 따를 때 무한한 열정과 희망과 버림을 가질 수 있기에, 한 줌의 재가 되어서라도 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19          연중 제 28주일 마르 10, 17-30 또는 10, 17-27 (나) 부자 청년 이야기

                                     신 은근 신부



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다. 살아가면서 하루라도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재물이다. 어떤 이에겐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하고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재물을 많이 가진 청년을 오늘 주님은 만나신다. 그리곤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다. 그러나 청년은 망설인다.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미적거리다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오라 하셨던 것이다. 그 말씀이 그를 낭패하게 만든다. 이유는 무엇일까. 재물이 아까워서 그랬을까. 나누어주는 것이 억울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이 청년을 붙잡은 것이 아니다. 청년을 붙잡은 것은 재물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물의 힘이 예수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재산을 나누어 준 뒤에 오라고 하셨다.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꿀 수가 없었다. 예수님과 함께 재물의 위력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만다.



청년이 떠나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비유로 말씀하신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신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이 부자이겠는가. 우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그런 사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재물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보다 재물의 위력에 굴복하여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이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부자들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함을 느낀다. 누구나 궁핍함을 경험한다. 만족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물이 많건 적건 이 표현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객관적 판단으로 저 사람은 부자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나는 부자가 아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나는 늘 부족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인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저 사람은 가난하다, 별 볼일 없다, 이렇게 판단하더라도 그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분명 부자인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도달한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맡기며 내 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물이 최고라고 말해선 안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끝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음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백배의 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든 내세에서 이루어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갈 뿐이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늘 세상으로 쏠리게 한다. 그리하여 물질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게 한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는 우리들은 깨끗한 부자들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도달한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맡기며 내 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물이 최고라고 말해선 안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끝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음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백배의 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든 내세에서 이루어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갈 뿐이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늘 세상으로 쏠리게 한다. 그리하여 물질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게 한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는 우리들은 깨끗한 부자들이다.(끝)











20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나) 낙타가 바늘귀로, 부자청년



우리 모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평생 동안 억만 원을 꼭 모으겠다고 목표를 세워서, 구천 구백 구십 구만 구천 구백 구십 구원을 모았다고 합시다. 이제 1원만 모으면 평생 필업인 억만 원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 돈을 어떻게 버나 궁리하며 길거리를 오가던 중에 거지의 동냥통에 있는 1원짜리 서너 개를 보고서는 ‘아! 저 동전 중에 하나가 내 것이 된다면 나는 억만 원을 채울 수 있을 텐데!’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자는 그 많은 돈을 부정한 행동으로 번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강도 노릇을 해서 번 것도 아닙니다. 그도 노력을 해서 번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1원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것이며, 억만 원이 채워지면 또 다른 억만 원을 목표로 세워 또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기도도 착실히 잘하고,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미사 참례도 하고, 부모와 자녀, 친지들에게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지내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무난한 신앙인, 무난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착한 부자 청년은 이 대답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무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한 착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뭐, 이 정도면 됐지! 나는 주일에 헌금을 내 나름대로 바치고, 교무금도 내고 또 악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데!”하며 자족감에 빠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족감에 빠져있는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침울해 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부자는 천당에 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만 기가 질려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합니다.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 하는 것은 물질이나 돈이 많다, 또는 적다하는 외적인 물량의 척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복팔단, 즉 여덟 가지 행복된 사람의 조건 중 첫 번째 나오는 말씀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매우 가난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남의 것을 탐만 내고,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불평이나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갖 사리사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부자는 사랑이 없는, 자선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자를 두고 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이와 부자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으로 가난하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위치에 기쁨을 느끼는 착한 사람, 착한 신앙인을 말합니다.

둘째, 실제로는 부자이지만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을 돕는 착한 자선 사업가 등을 일컫습니다.

셋째, 실제로 가난하지만 마음에는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들 즉, 자신의 현재 위치에 불평불만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넷째 부류의 사람들은 실제로 부자이고 마음의 부자 즉 구두쇠형의 이기주의자를 가리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네 가지 부류에서 어느 형에 속하는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굶어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풍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입니다. 다만 이러한 재물, 또는 환경, 지위에 너무 집착되어, 이런 것에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느님께 관한 내적 생활,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등한히 하는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 모두는 다 착한 신앙인들이며 또 열심인 분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도 모두 지켜왔습니다.

“너, 꼭 하나가 부족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휴, 그것은 못하겠군!”하며 떠나가는 무리와 “그것은 약간 곤란한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은 부자 청년의 형과 “우리는 모든 것은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스도교의 사랑, 애덕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위해서 남을 더 도와줘야겠다는 애덕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의 보람과 애덕을 맛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는 기쁨, 애덕의 기쁨,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며, 성인성녀의 기쁨입니다.











21            연중 제28주일   마르 10, 17-30 (나) 영원한 생명의 길

교구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자가 추종을 거부한 이야기(17-22절),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는 이야기(23-27절), 그리고 추종과 보상에 관한 이야기(28-31절)입니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따로 전해진 것을 마르코가 편집한 것입니다.



ㄱ. 부자가 추종을 거부하다(17-22절)

  어느날 부자가 예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십계명 후반부, 곧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의기양양하여 그런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근심하면서 물러갔습니다. 이 부자는 재산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추종과 재산 둘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불행히도 재산을 붙들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양자택일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것은 고스란히 챙기고, 자기 즐길 것은 다 즐기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들에게 주는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ㄴ.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23-27절)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아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들을 멀리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디 이 단락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인데 마르코가 ‘부자가 추종을 거부한 이야기’(17-22절) 다음에다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23절)와 ‘부자가’(25절)를 덧붙인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의 뜻은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읽는다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재물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과장법을 사용하여 황금만능주의를 경고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ㄷ. 추종과 보상(28-31절)

  이 단락은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고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종말에 백 배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현세에서는 어려움도 많이 겪겠지만 우리의 역사가 다하는 날 백 배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22             연중 제28주일   마르 10, 17-30 (나) 즐거운 나의 집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즐거운 나의 집(홈 스위트 홈)’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에 이르러서까지도 언제나 즐겨 부르게 되는 노래입니다. 

  비단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민족에게 애창되고 있는 이 ‘홈 스위트 홈’의 노랫말은 미국의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분은 일생동안 한 번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을 때,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사랑이 꽃피는 가정을 그리며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애절한 소망을 여기에 담은 것입니다. 그가 절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야릇한 얘기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노래하게 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1년 후, 그는 사는 집도 없이 길가에 쓰러지듯 초라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모습이건 간에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하며, 또 얼마나 많은 행복을 주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가치관의 혼돈 속에 방황하고 있으며, 가정의 소중함을 모르고 쉽게 가정을 파괴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쩌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를 눈을 뜨고도 앞을 못 가리는 청맹과니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가정이 주는 행복이란 그 어떤 환경과 빈부의 차이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호화스런 집과 별장을 가졌다 해도, 가족간의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 없는 헛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오히려 갖지 못해 아쉬워하고 갈망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단 협소하고 초라한 집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서로의 믿음과 사랑이 오갈 때 그 가정이 참다운 가정으로 행복을 누리는 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정에서 또는 직장, 그리고 객지에서는 더 많이 기쁨과 그리움을 담아 부르는 노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진정 세상이 제 아무리 넓고 아름답다 하여도 내 가족과 함께하는 집보다 더 편안하고 그윽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사랑의 주님께서 맺어주셨고 지켜주시기에 우리 모두는 이 ‘즐거운 나의 집’ 안에서 이렇듯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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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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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7주일

        10. 표중관 신부(나)/16

        11. 작가미상(나)/18-무심과..           12. 이계중 신부(나)/20

        13. 강길웅 신부(나)/22                   14. 김영남 신부(나)/23

        15. 김영남 신부(나)/25                   16. 방윤석 신부(나)/27

        17. 박인근 신부(나)-없음         18. 예정출 신부(나)/29

        19. 신은근 신부(나)/29                   20 교구주보 (나)/31

        21. 전옥주 작가(나)/32           



10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나)  한 평생을 서로 사랑하면서

                                                       표중관  신부



진정으로 서로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이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은 순간까지 항상 남고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이 특히 각기 개성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한 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듯이, 예수님 시대에만 보더라도 이혼이 매우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를 가장의 소유물이라 생각하여 마음대로 취급하였고, 유대인 법에는 여인들은 물건 취급을 받아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자가 음식을 버렸거나 길에서 지껄였거나 모르는 남자와 이야기를 했거나 시부모에게 불순하거나 말하는 소리가 옆집에 들리거나 남편이 그녀보다 아름다운 처녀를 보았으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까닭 없는 이혼이 많아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결혼하기를 매우 두려워하고 주저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즈음 세상에도 여자들이 결혼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그 당시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 당신엔 이혼이 남자들만의 특권이었는데 요즈음엔 여자들에게도 당당히 이혼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사람들의 골수에까지 밀려들어와 결혼의 진정한 뜻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만이 결혼의 척도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이 결혼의 척도가 되고 있으며, 좋으면 소유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식으로 마치 한 인간을 물건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한 평생을 동고동락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미워하면서 원수처럼 지낼 방에야 차라리 눈물을 머금고 속 시원히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성할 때나 병든 때나 일생 동안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면서 살자고 굳게 약속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지는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진정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이혼을 하지 말하고 하셨습니까? 잠깐 여기서 몇 해 전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어느 시골 학교에 한 부부교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교사의 가정은 단란했고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에게 갑자기 나병의 중세가 나타났습니다. 부인은 본래 자신이 미감아 출신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남편에게 모두 고백하였습니다.



남편은 괴로움을 참으며 부인을 위로하였고 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정성엔 아랑곳없이 부인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고, 어느 날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만 부디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달라는 눈물이 벤 종이 쪽지 하나만을 남겨 놓은 채 부인은 사라졌던 것입니다. 남편은 거의 실신한 상태로 불쌍한 부인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근 삼 년 간을 헤맸습니다. 이제 남편의 꼴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모 나환자 수용소에서 초라한 부인의 모습을 발견하였답니다. 그리고 뛰어가 부인을 얼싸안고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면서 두 사람은 한없이 울었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울었을 땐 하늘도 땅도 울었으리라 믿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축하면 이혼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와 기구한 운명이 있었으리라 봅니다만, 한 평생을 같이 살자고 약속했으면 싫든 좋든 서로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들딸까지 낳아 놓고 훌쩍 떠나버리면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구약의 법에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나병에 걸린 부인과 이혼한 남편이 있다고 해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순수한 사랑입니까?


남들이 뭐라 해도 이 두 사람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이렇듯 결혼이란 두 인격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슬퍼하면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묻기 전에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봅니다.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더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6-7). 즉 결혼이란 예수님이 말씀대로 두 육체의 결합인 동시에 두 정신의 결합, 두 생명의 결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노력한다면 험난한 인생의 가시밭길도 동고동락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할 때나 병든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아멘.















11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나) 無心과 어린이의 마음





하나 : 하늘도 땅도 싱그러운 물빛에 젖어 있는 가을아침, 강가에 서서 찬연한 햇살 속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물위에 한가로운 음악이 되어 흐르는 눈부신 고요. 저 끝없는 흐름으로써 오히려 부동의 침묵을 노래하고 있는 강과 같이 무상한 시공의 흐름 속에 던져진 「자기 실존」을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混)」이라고 불운한 시대를 살고 간 우리들의 시인은 이 지상에서의 「삶의 비밀」을 노래했다.


그 어느 곳에도 매인 곳 없이,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일체의 분별과 사념의 경지를 떠나 유유히 흐르면서도 충만한 기운과 가득찬 생명으로 일체의 것을 내어 맡긴채 흐르는 저 무위(無爲)의 흐름을 일컬어 「무심(無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로서 알고, 신비에 갇힌 「존재의 문」을 열고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불교의 선사(禪師)들의 그 무심(無心)의 경지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첫째 조건으로 제시된「어린이의 마음」(마르10,15 참조)과 동등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문 앞에서 필자는 아직도 흔미한 미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분명히 그 경계를 가릴 길이 없으나 「신(神)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품에 안기기는 어렵다. 깨닫는 것과 안기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무심(無心)을 넘어서 지향하는 예수의 말씀의 행방이 어딘지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둘 : 마르코 복음 10장 1절에서 16절에는 두 가지 짧은 이야기가 소개되고 잇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간교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혼 논쟁」과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물었다』(2절). 예수 시대 유대교에서 가능했던 이혼을 예수가 인정한다면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 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대 율법에 예수는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써 세례자 요한과 같이 죽을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를 진퇴양난의 올가미 속에 가두려는 책략이 깃든 사악하고 계획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모세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명했습니까?』하고 질문으로 대치된다.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가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모세는 여러분의 그 완악한 마음 때문에 그 계명을 남겼다』고 대답하셨다(6절). 예수는 그 규정이 인간이 만든 일시적 규정이고, 창조 때부터 하느님이 세우신 법은 결코 아내를  벌리 수 없으며 남녀는 혼인으로써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27:2,24참조).

이로써 예수는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천명하셨다. 아울러 남성 위주의 유대인의 사고방식, 연약한 여성을 지배하고 어린이들을 부모들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당시 유대사회의 결정적 모순을 질타하시며 어린이들을 축복하셨다(13~16참조).


셋 : 예수에게 악의 에 찬 질문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가두려고 획책한 사람들 소위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로 성서에 묘사되는 이들 율법전문가와 교사, 바리사이들은 독선적인 열정과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오만으로써 무식한 사람들과 하층계급이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이들은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아서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순순해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다(마태 18,1~5참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하나같이 먼저 깨닫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로 묘사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온갖 멸시를 받는 암․하아레츠(속세의 가난뱅이들)였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에 달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과의 차이이고 「앎」과 「깨닫음」의 차이 일 것이다.

 진리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보아 지적인 욕구충족과 정신적 소유욕에 사로잡혀 독선과 오만으로 「두꺼운 탈을 쓴 인간」과 순진 무구한 진실로써 진리의 품에 안기는 「믿음의 인간」이라는 엄청난 차이에서 오는 것임을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넷 :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 내 뜻대로가 아니라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이 지상에서의 최후의 삶을 마감하신 예수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으신 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느님아버지의 외아들로서 고난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놓으신 예수의 삶에서 보듯이 「어린이의 마음」이란 무념과 무상으로써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의탁도 아니고, 기력과 얼이 빠져나간 맹목적 순종은 더욱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청정한 원의로 충만된 에너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섯 : 「아! 하느님…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불타는 사랑의 고백으로 꽃다운 2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현대의 성녀 「소화(小花)데레사」. 그녀의 큰 깨달음으로 제시된 「작은 자의 길」은 「하느님 앞에 어린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어린이로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어린이가 그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듯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를 위해 그 어떤 것이든 재물을 모으지 않는 것입니다…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마침내 나는 사랑과 희생의 꽃을 꺾어 바쳐 드리는 것 밖에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어린이로 있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보아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주 넘어지기는 하나, 너무 작아서 그다지 큰 상처를 큰 상처를 입 않습니다』라고 성녀는 말했다.











12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 (나)  결혼 생활에 권태기가 오면

                                                            이계중 신부





 늦거나 빠르기거나 결혼 생활에는 소위 권태기라 불리우는 위험한 시기가 옵니다.

희망에 부푼 달콤한 밀월(蜜月)이 지나면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이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이 위험한 시기를 넘기기 위하여 먼저 대비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현대는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라 그런지 몰라도 조그마한 의견 충돌이나 싸움만 있어도 ‘우리 둘은 더 이해할 수가 없게 되었고 서로가 길을 잘못 들었으니 각기 길을 고쳐 걷는 것이 좋겠다.’하며 집을 나가 별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이혼도 합니다.

설령 거기까지는 안 간다 할지라도 전과 같은 좋은 기분을 가지지 못하고 먼저의 의견 충돌로 계속 말다툼이 잦고 날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져서 전과 같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로 지내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결혼이란 풀 수 없는 맺음이므로 이것을 끊거나 손상시키지 말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분노와 열등감에 눌리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면서도 상대의 과실과 결점을 캐냅니다. 남편이 상대가 다른 여자 같으면 쉽게 용서하여 줄 것을 아내이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는 일반적인 남성에 공통된 결점을 다른 남자 같으며 생각지도 않을 것을 남편이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경우 또한 흔합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이면 더욱 관용을 베풀고 이해하여야 할텐데……


여기서 결혼 생활이 점점 무거워지고 결혼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하게 되고 만일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고 또한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그려도 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돌은 가끔 열심한 젊은 부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의 정체를 바로 보아 이것을 과대 혹은 과소 평가하지 말고 또한 필요 이상으로 중대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피곤하거나 근심이 있거나 도는 호가 날 때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대드는 수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상상 이상으로 간단합니다. 가령 남편이 직장에서 이유 없이 윗사람에게 꾸중을 들었다든지 또는 물건을 속아서 샀다듣지 하여 기분을 상하여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 안에서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하루의 분풀이를 합니다. 물론 해명되는 일은 아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는 일입니다. 즉 분풀이를 당하는 사람에게 이해와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은 그 사람의 아내도 매일 힘들고 피곤한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집의 일, 아이들의 일, 그 외의 일로 역시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말을 잘 듣고 동정하고 위로하여 줄 기분에 놓여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충돌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에게 좀더 이해와 희생심이 요구되며 또한 매일 두 가지를 결심해 주었으면 합니다. 첫째로 자기의 불평을 너무 말하지 말고, 혹시 말하게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도로 줄일 것이며, 둘째로는 상대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일을 좀 성의 있게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침묵만을 지키려고 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예의를 지키고 상대의 존경을 손상시키지 않는 의견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결혼하는 날까지 각자의 습관의 사상 속에 살던 두 어른이 결혼하는 날부터 상대의 습관과 사상 속에 자기의 것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마음을 일치시키고 완전히 조화된 생활을 구축하기에는 그것을 다루는 운전이 필요하고 다루는 동안 조그마한 사고를 일키는 것은 당연하며 여기에 이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서로의 어려움이 없어질 때, 때로는 무엇이나 닥치는 데로 말하는 수가 있습니다. 집 안팎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불평, 불만을 모조리 털어놓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 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고들은 희극, 비극의 막이 집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고 막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몰이해, 소위 권태기는 이렇게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내는 남편의 하소연을 듣고, 휴식을 주고, 조언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고, 또 이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여성들에게 권리와 의무의 평등을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옳은 것이라 하겠으나 나중에는 모르는 사이에 남편을 격하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은 화를 내고 아내는 나도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하나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불화에 힘을 쏟게 됩니다. 만일 아내가 가만히 듣고 위로하여 주었다면 풍파가 지난 다음에 승리한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되기 위하여서는 매일 매일 침묵과 인내의 훈련을 조금씩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여성에게 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번은 부부 싸움이 잦았던 한 부인이 어떤 성인을 찾아가서 내 주인이 양순하게 되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성인이 대답하기를 당신 주인이 화내기 시작하거든 당신은 속히 물을 한 모금 마실 다음에 당신 주인의 호가 가라않을 때까지 삼키지도 뱉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유치한 일이라고 웃을지 모르지만 입에 물을 물고 말대답을 않아는 지혜는 그때 분에 못 이겨 그런 말을 했었구나 하는 후회를 하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여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주일 미사 이외에 온 가족이 바치는 짧은 기도 시간이라도 가지도 한 달에 한 번 고해 영성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주님의 은총이야말로 모든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에게 큰 잘못이 있겠지만 모든 책임이 한 사람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사랑으로 상대를 이끌어 줄 어떤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예외의 경우도 있을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만…

 부부된 자는 양심을 살피고 책임을 느끼는 데 소홀히 하지 맑으시기 바랍니다.

13                    연중 제 27 주일   마르10,2-16 (나) 혼인은 새로운 탄생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2,18~24 (둘은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제2독서 히브 2,9~1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복 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 



혼인은 각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탄생인 동시에 또한 두 인격이 하나의 인격으로 조화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아무렇게나 맞이해서는 안됩니다.

혼인 그 자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혼인은 동물의 짝짓기가 아닙니다. 아니, 동물의 짝짓기도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상대를 충분히 조율한 다음에 짝짓기를 하며 일단 부부가 되면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아주 성실히 이행합니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먼저 하나가 되기 전에 서로 인격을 다듬고 새로운 출발에로의 준비를 성실히 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보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둘이는 본래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선 그들을 점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혼인은 신성한 것이면서 장엄한 것입니다. 아무도 이 혼인의 약속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만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인은 취소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생물이든지 한번 태어나면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영원히 못 돌아갑니다. 병아리는 다시 달걀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나비가 다시 애벌레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한 번의 약속이면서 또한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평생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은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부가 갈라선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가르는 것이요 부모를 가르는 것이며 또한 자식들까지도 가르는 엄청난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경솔하게 서둘러서 하면 실패합니다.



서로 선을 본 지 한 달도 안 돼서 혼인을 하는 예를 가끔 보게 됩니다.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혼인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부가 한 두 달 살 것이 아니요 평생을 함께 사는 일인데 적어도 6개월 이상은 서로 교제를 하며 검토를 해 보고 판단을 한 다음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리고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혼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시장에 나갔더니 몇 주일째 성당에 나오지 않는 자매를 만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딸 시집보내는 준비 때문에 바빠서 못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딸도 신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뭐고 하느님은 또 뭡니까. 누가 도대체 그 딸의 행복을 줍니까. 그까짓 이불이나 냉장고가 행복을 줍니까? 그 혼인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복을 빌어 줘야 하는데 오히려 그 중대한 일에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그러면 그 혼인이 뭐가 되겠습니까?



결혼 예식을 주례하다 보면 가끔 결혼 예물의 반지로서 단돈 천 원짜리 묵주반지를 내놓는 부부도 있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다이아 반지나 황금 반지는 나중에 팔아먹을 때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누가 뭐래도 그 반지는 무덤에까지 끼고 가야 하는데 그 중요한 예물을 팔아먹을 것부터 가르칩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뭐가 되겠습니까?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혼수를 장만하고 그리고 아무리 좋은 신랑과 신부를 얻는다 해도 그 가정 안에, 그 부부 안에 하느님이 머물지 않으시면 그들은 불행합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산해진미를 먹는 혼인이라 해도 그들의 혼인에 하느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인생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혼인 그 자체를 존경해야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아름다운 터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가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 우리 모두도 그런 가정을 모델로 삼아 닮아야 합니다. 복은 예수님 만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바로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가정은 하나지만 거기에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결합체가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보배도 없으며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한 만남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 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이 됩니다.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혼인은 새로운 탄생입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이 소망하는 꿈의 보금자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혼인을 존경하고 가정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4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

                                                            김영남 신부



요즘은 '변화' 의 계절이다. 시내에서까지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높푸른 하늘과,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노랗게 또는 빨갛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과일들을 보면 가을인 것이 분명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와, 그토록 많은 피해를 주었던 태풍과 그 후의 어두운 날들도 어느덧 지나갔다. 이렇게 계절만이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전세계적인 경제적 불안 속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인간관계가 큰 아픔을 주며 깨어져 가고 있다. 경제 문제가 그 주요인이라고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오늘 주일의 복음말씀에서도 '인간관계'의 '깨어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게되는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긴밀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부의 관계'의 '깨어짐', 곧 '이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몇이 예수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라고 분명한 답을 주시지만, 그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질문자들에게 반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다"(참조: 신명 24, 1-4)고 본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 “이혼장을 써주라"는 조건은 본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이혼증서는 그 이혼증서를 갖고 있는 여성이 전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것을 전남편이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즉 위의 신명기의 말씀은 이혼증서도 없이 쓰던 물건을 버리듯이 자의적으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연결시키시면서 하느님의 본래의 뜻에 따르려면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며,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율법을 준 것은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그 당시 아내마저도 소유물처럼 생각하여, 이혼장을 써주기만 하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 듯이" 쉽게 생각하던 율법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해석과 관련하여 '굳어진 마음'(참조:시편 95,8; 에제 36,26; 히브 3,7-11; 마르 3,5)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통해서 본디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 제 효력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이혼'의 전거로 삼는 모세의 율법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율법을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 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예수님을 공박하려던 반대자들의 주장을 피해가신다.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혼인미사 때 가장 자주 듣는 복음이다. 교우 부부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자리에서 부모친지들 앞에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서약했던 것을 회상시킬 것이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또는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은 결코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즉 상대방이 건강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만,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아름다울 때에만 유효한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혼인미사 때에 신랑과 신부는 각각 자신의 약점은 물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의 미래는 물론 상대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모르면서 “일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러기에 이 서약은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약의 내용인 '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부는 하느님께 함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서 또한 당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지켜 나갈 힘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 2장이 깊은 차원에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변화 무쌍한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서 볼 수 있는 '부부'의 관계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에서처럼 이해관계를 떠나 조건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속적 인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정에서마저 그런 지속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많은 가정이 위기 속에 있다. 본디 가정은 인간이 인생의 첫 단계인 어린시절부터 사랑, 신뢰, 충실성 등과 같은 기본적 덕을 배우는 학교이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미움과 불신 그리고 경쟁을 먼저 배우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야 할 부모의 관계가 비극적으로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자매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위기에 처한 가정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곳에서는 '참 가정'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뜻한 가정적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15          연중 제27주일   마르10, 2-16 (나)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

김영남 신부



요즘은 ‘변화’의 계절이다. 시내에서까지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높푸른 하늘과,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노랗게 또는 빨갛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과일들을 보면 가을인 것이 분명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와, 그토록 많은 피해를 주었던 태풍과 그 후의 어두운 날들도 어느덧 지나갔다. 이렇게 계절만이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전세계적인 경제적 불안 속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인간관계가 큰 아픔을 주며 깨어져 가고 있다. 경제문제가 그 주요인이라고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오늘 주일의 복음말씀에서도 ‘인간관계’의 ‘깨어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게되는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긴밀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부의 관계’의 ‘깨어짐’, 곧 ‘이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몇이 예수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분명한 답을 주시지만, 그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질문자들에게 반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다”(참조: 신명 24,1-4)고 본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이혼장을 써주라”는 조건은 본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이혼증서는 그 이혼증서를 갖고 있는 여성이 전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것을 전남편이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즉 위의 신명기의 말씀은 이혼증서도 없이 쓰던 물건을 버리듯이 자의적으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연결시키시면서 하느님의 본래의 뜻에 따르려면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며,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율법을 준 것은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그 당시 아내마저도 소유물처럼 생각하여, 이혼장을 써 주기만 하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 듯이” 쉽게 생각하던 율법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해석과 관련하여 ‘굳어진 마음’(참조:시편 95,8; 에제 36,26; 히브 3,7-11; 마르 3,5)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통해서 본디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 제 효력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이혼’의 전거로 삼는 모세의 율법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율법을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예수님을 공박하려던 반대자들의 주장을 피해가신다.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혼인미사 때 가장 자주 듣는 복음이다. 교우 부부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자리에서 부모친지들 앞에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서약했던 것을 회상시킬 것이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또는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은 결코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즉 상대방이 건강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만,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아름다울 때에만 유효한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혼인미사 때에 신랑과 신부는 각각 자신의 약점은 물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의 미래는 물론 상대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모르면서 “일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러기에 이 서약은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약의 내용인 ‘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부는 하느님께 함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서 또한 당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지켜 나갈 힘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 2장이 깊은 차원에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변화 무쌍한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서 볼 수 있는 ‘부부’의 관계 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이해관계를 떠나 조건없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지속적 인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정에서마저 그런 지속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많은 가정이 위기 속에 있다. 본디 가정은 인간이 인생의 첫 단계인 어린시절부터 사랑, 신뢰, 충실성 등과 같은 기본적 덕을 배우는 학교이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미움과 불신 그리고 경쟁을 먼저 배우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야 할 부모의 관계가 비극적으로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자매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위기에 처한 가정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곳에서는 ‘참 가정’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뜻한 가정적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16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방윤석 신부



이건 얘기가 있다. 12년간이나 결혼생활을 해온 부부가 이혼하게 되어 재산을 이등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다른 재산을 나누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어린아이 셋을 나누는 것은 큰 문제였다. 고민 끝에 남편은.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자식을 반으로 나를 수 있겠는가를 상의하였다. 친구는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충고하였다.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가지고 두 명씩 나누는 것이 가장 공평하고 좋은 방법일 것 같네!」 그로부터 이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일년을 더 살았다. 예상대로 부부사이에는 넷째 아이가 태어났다. 어느 날 충고해 준 친구는 뜻밖에도 단란한 그 가정의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혼인」이다. 10월은 혼인의 계절이다. 혼인이란 무엇인가? 계약에 의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인격적, 육체적인 결합이다. 혼인은 종신토록 사랑을 주고받자고 계약하는 것이며, 서로 동거생활 하기고 계약하는 것이고, 서로 도와주고 협조하기고 계약하는 것이다. 일생동안 신의를 지키고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분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며, 자녀를 낳아서 이들을 기르고 보호하고. 교육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혼인 반지는 이런 계약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교환하는 물건이다. 언제나 몸에 지니기 쉽고 보이기 쉬운 것이 반지이므로 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빼 두거나 팔아 버리거나 바꾸어 껴서도 안 된다. 이런 계약을 쌍방이 동의한 후 한 몸으로 결합됨으로써 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또한 혼인은 하느님께서 정하신제도이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아담을 만드시고 그 짝으로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된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선 안된다」고 마르꼬 복음(10장6-9절)은 전하고 있다.

  

혼인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애정이다. 부부간의 애정은 그리스도와 성교회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랑의 성격은 어떠해야 할까?



첫째로, 「항구한 사랑」이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영원토록 사랑하신다.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부부들도 죽는 날까지 사랑이 변절하는 일없이 살아야 하겠다. 지금은 사랑하다가 나중에는 식어지는 일회용 사랑이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부부되는 분들에게 『항구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둘째로, 「충실한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교회에 충실하시고 전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특별한 사랑을 교회를 위해 남겨 놓으셔다. 부부들도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부부 서로에게는 특별한 사랑이 있다. 이것은 타인에게 분배하지 못할 사랑이다.



셋째로, 「몰아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항구하고 충실한 부부의 사랑은 노력 없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성적 충동만으로 애정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애정을 끊어지게 할 수 있는 요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성격 차이, 정신 능력이 다를 수 있고, 취미, 교양이 다르고, 경제, 건강 등등 부부의 애정을 끊어지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일들이 무수히 많다. 따라서 위험에 빠질 때마다 굳은 신앙으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무릇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를 부부 사랑에 적용시켜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천상에서 내려오셨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듯이 부부들도 이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충실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애정은「공손한 사귐」이어야 한다. 욕망은 변덕스럽고 성(性)은 쉽사리 식어질 것이다. 욕망보다, 성(性)보다 더 확고한 기초 위에 혼인이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두 마음의 일치이다. 부부들은 서로의 욕망을 채우고 만족하는 기계로써 남용하는 것보다는, 평등한 배우자로서 존경하고 대화하고, 양심을 살리고 서로의 온갖 행복을 조장하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 아담은 여자에게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라고 외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금하는 말씀을 하신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 따라서 여자는 원래 남자와 한 몸이다. 몸이 찢어진다는 것은 깊은 상처, 불구, 또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혼은 몸이 찢어지는 것과도 같다. 행여나 이혼한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기 바란다.

18               연중 제 27 주일   마르10,2-16 (나)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예정출 신부



오늘 복음은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의 원칙을 말해준다. 단일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는 혼인을, 불가해소성은 한 번 합당하게 혼인이 맺어지면 서로 갈라서지 못함을 의미한다. 부부의 결속은 이렇게 두 사람만의 관계 속에 평생 지속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혼인을 맺는 것을 단죄하신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가치관의 혼란과 윤리의식의 결여로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죄악이다.



요즘 부부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작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부부 세 쌍이 혼인할 때 한 쌍이 이혼하였다. 십년전 아홉 쌍이 혼인할 때 한 쌍이 이혼한 비율에 비겨 이혼율이 많이 높아졌다. 사회의 이러한 추세는 신자부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혼한 일부 신자들은 교회혼의 본질적 특성인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지키기 힘든 어려운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혼인이 그래서는 안된다. 혼인은 잘해주면 계속 살고 못해주면 헤어지는 조건부의 동거가 아니다.



물론 잘못된 만남으로 가슴에 상처를 안고 결별한 부부들도 있다. 타당한 사유로 인해 갈라선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혼인은 언제나 자신의 전 인생을 거는 약속이고 전 인격을 거는 서약이어야 한다. 혼인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에페5, 32). 교회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부부의 결합은 이러한 일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부부가 일치로 성화되고 구원의 도구가 되어 살아갈 때 혼인의 삶은 성사적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배우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 이해와 협조, 포용과 용서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우리 신자 부부들은 항상 이런 자세로 혼인과 가정에 대한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서로 위해주고 받아들이며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속되어진 그런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 직면하더라도 서로의 미소와 위로로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처음 혼인을 약속하던 그때의 마음으로 노후에 배우자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변치않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19                연중 제27주일 마르 10, 2-16 또는 10,2-12 (나) 행복한 가정

                                     신은근 신부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있다.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과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교훈이다. 상관없는 듯한 말씀이지만 두 가르침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과 연관된 말씀이라는 점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남성 위주였다. 자녀는 물론 아내도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심한 경우에는 물건처럼 매매가 이루어졌고 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대상을 질책하시며 혼인을 하느님의 법으로 다시 선포하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고 그것이 바로 창조질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는가. 교리적 해설을 하자면 우리에게 창조능력을 주시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 부부관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 창조하라고 하셨을까.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행복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었을까.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행복을 만들며 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이는 어른이 있어야 편안해진다. 어른도 어린이가 있어야 평화스럽다. 삶의 행복은 이렇듯 조화에 있다. 그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조화가 으뜸이다. 혼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이런 각도에서 다시 묵상해야 할 것이다.



복음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하신다. 어떤 것이 어린이의 마음인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하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겐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 그 때의 마음은 우리 영혼 안에 있지 어디로 달아난 것이 아니다. 그때의 그 마음을 되찾아 주님께도 보여드려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은총으로 받을 수 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 한 몸이라는 이 말씀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말씀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쉽지 않다. 두 몸이 한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운명과 그대의 운명이 같아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일인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니 하나된 운명을 바꾸려는 생각보다 좋게 하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쉽게 만나고 쉽게 떠나려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삶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다.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어찌 어렵지 않으랴. 예수님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룩하셨다. 나의 한 쪽이 고통을 주더라도 내가 올바로 걸어간다면 운명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복되는 매일의 삶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 한 주간을 보내자











20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둘이 아니라 한 몸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마르 10,2-16은 이혼 논쟁(2-12절)과 예수께서 어린이를 사랑하셨다는 이야기(13- 16절)로 구분되는데 여기서는 이혼 논쟁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다가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신명 24,1-4).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혼 불가를 선언하십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는 자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하는 것입니다.”(12절).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재혼은 말할 것도 없고 이혼조차도 절대 불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부부관계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성스러운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입법자로서 반 이혼법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즉, 법률의 차원에서 옛 법을 폐기하시고 새 법을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신명기의 소박법을 빙자하여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버리는 이스라엘 남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율법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여자들의 손에 이혼장만 쥐어 주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아내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소박법이라는 실정법의 한계를 넘어 이혼장으로 무마되는 남성들의 이기적인 욕심, 여자들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 자체가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유를 들이대어 아내를 버릴까 궁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둘이 한 몸이 되는”(8절) 부부일신의 삶을 살아갈까 궁리하라는 예언자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혼인법으로 인하여 성사(聖事) 생활을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부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결혼의 원초적인 성스러운 뜻을 되살려 둘이 한 몸이 되는 부부일신의 삶을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21              연중 제 27 주일   마르 10,2-16 (나)  어느 할머니의 동반자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아마도 매사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신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되기를 선언하였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함도 마땅히 우리가 지켜 나아가야 할 본분일 것입니다.



  수도 없이 되풀이 해 온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약속하고서 미사예절을 끝맺곤 하였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며 하느님께서 강복하신 것을 믿으며 감사하고, 복음전파에 동의를 하였지만 그 약속을 과연 몇 번이나 실행하였는지… 잠 못 이루는 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있다가 문득 이 약속이 떠오를 때면 어떤 가책으로 말미암아 방에 걸려 있는 고상을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인간사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주님과의 약속은 어찌 그리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지, 정말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도 하였습니다. 성서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혹은 바쁘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에서라면 그것은 옹색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지식으로 주님을 믿었고 증거하였으며, 또 인간의 지식이 대관절 얼마나 깊은 것이기에 주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고 예수님께선 의심이 많은 토마를 꾸짖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토마’처럼 예수님께서 창에 찔린 늑방과 못에 찔린 손바닥을 만져 보고서야 믿을 수 있는 의심 많고 미지근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닐런지요?



  저는 오래 전에 한 노파의 신심 어린 이야기를 듣고, 그 할머니의 믿음에 감복하고 참으로 부러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육신이 쇠잔하여 허리는 꾸부정하게 휜 그 할머니의 손에는 항상 묵주가 쥐어 있었습니다. 비록 보기엔 초췌하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언제 보아도 미소를 짓고 평화로워 보였는데, 특이한 것은 할머니가 버스를 탈 때 언제나 두 사람 몫의 요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운전기사가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할머니! 왜 돈을 더 내는 겁니까?”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주름진 눈가에 미소를 가득 담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저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요금을 같이 내는 거지요” 그 할머니의 소박한 믿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제게 전해져 지금도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마음이 소박하고 반짝이듯 아름다운 사람은 신과 자연을 믿게 마련이다”라는 말이 생각날 때면, 믿음으로 해서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22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나) 행복한 가정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있다.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과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교훈이다. 상관없는 듯한 말씀이지만 두 가르침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과 연관된 말씀이라는 점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남성 위주였다. 자녀는 물론 아내도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심한 경우에는 물건처럼 매매가 이루어졌고 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이러 시대상을 질책하시며 혼인을 하느님의 법으로 다시 선포하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고 그것이 바로 창조질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의 대등한 결합을 원하셨는가. 교리적 해설을 하자면 우리에게 창조능력을 주시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 부부관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 창조하라고 하셨을까.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행복을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었을까?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행복을 만들며 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이는 어른이 있어야 편안해진다. 어른도 어린이가 있어야 평화스럽다. 삶의 행복은 이렇듯 조화에 있다. 그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조화가 으뜸이다. 혼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이런 각도에서 다시 묵상해야할 것이다.

복음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며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하신다.

어떤 것이 어린이의 마음인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하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이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겐 모두 어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 그때의 마음은 우리 영혼 안에 있지 어디로 달아난 것이 아니다. 그때의 그 마음을 되찾아 주님께도 보여드려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만들 수있는 힘을 은총으로 받을 수 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 한 몸이라는

이 말씀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말씀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쉽지 않다. 두 몸이 한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운명과 그대의 운명이 같아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일인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니 하나된 운명을 바꾸려는 생각보다 좋게 하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쉽게 만나고 쉽게 떠나려 한다. 인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삶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다.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의 운명으로 바뀌었으니 어찌 어렵지 않으랴? 예수님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룩하셨다. 나의 한 쪽이 고통을 주더라도 내가 올바로 걸어간다면 운명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복되는 매일의 삶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이 한 주간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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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55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5016      
IP: 218.xxx.165
http://missa.or.kr/cafe/?logos.1235.19
“ 나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6 주일

        7. 김영진 신부(나)/ 12         8. 강길웅 신부(나)/ 14

        9. 조광호 신부(나)/ 16         10. 최재용 신부(나)/ 18

        11. 이승구 신부(나)/ 20        12. 방윤석 신부(나)/ 22

        13. 신은근 신부(나)/ 24        14. 정천봉 신부(나)/ 25



7.     연중 제26주일   마르 9,38-43. 45.47-48 (나) 껍데기는 가라

                                                        김영진 신부



18년 전 보좌신부 시절 첫번째로 고니꼴이라는 공소를 갔다. 자전거를 타고 토끼 길처럼 나있는 산길을 가는데는, 본당에서 2시간30분이나 걸렸다. 찻길이 없는 곳인데도 공소 건물을 세를 수 있었던 것은 6․25때 헬리콥터로 재료를 날라다 준 미군 군종신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산비탈을 깎아서 밭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고니꼴 사람들은 거의 다 천주교인이었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절 하나둘씩 산 속으로 숨어들다 교우들이 마을을 이룬 것이다. 교우들이라야 어린아이까지 합쳐서 40여명,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신부가 오는 날은 동네의 경사가 있는 날처럼 깨끗한 옷들을 꺼내 입고, 함께 먹을 술과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교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날, 나는 고해성사를 주고 나서 미사를 시작하려다 말고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본당수녀가 미사짐을 챙겨주었는데 영대(제의 속에 걸치는 것)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신학교 전례시간 때 배우기를, 영대가 꼭 있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것이 없으니 미사를 어떻게 하나! 안하자니 교우들이 실망할 것 길고, 하자니 미사를 불경하게 봉헌하는 꼴이 될 것 같고 하여 망설이다가, 결국 말씀의 전례만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갓 신부가 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선배 신부께 말씀드리니 “이 사람아, 신부가 미사드리는 것이지 제의가 미사드리나? 벌거벗고 미사드리면 미사가 안되나?"하면서 꾸중하였다. 훗날 군종신부 훈련 중, 어떤 신부의 영명축일 날 한밤중에 일어나 훈련받는 신부들끼리 팬티만 걸친 채 미사를 드리면서, 나는 “제의가 미사드리나, 신부가 미사드리지"라고 말한 선배 신부의 말씀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벌거벗고 미사드리면 ‥‥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면, 법과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는 사람들을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모세가 선택한 70인 지도자중에서 조직과 형식과 제도를 일탈한 두사람, 즉 엘닷과 메닷이 있었는데, 이 두사람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여호수아를, 모세는 형식과 제도보다 내용과 은총을 앞세우며 꾸짖는다,

또 요한이 예수께 사도들 중에 속하지 않는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좇아내고 있어서 못하게 막았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조직과 제도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형식과 제도에 얽매인 요한을 꾸짖으신다.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지난날의 조직과 형식, 법과 제도 등에 치우쳤던 점을 반성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제도와 조직보다는 말씀과 은총이 더 중요함을 천명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대 하나 때문에 미사를 못드렸던 나처럼, 조직과 형식, 벌과 제도의 무거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오늘날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벌과 제도인가, 말씀과 은총인가? 교회와 그 조직원들이 제도와 형식의 이름으로 은총과 내용에 제동을 걸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식인종 출신의 아프리카인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아프리카 어느 추장의 아들로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0년후 백인 동창생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그를 만났다. 영국에서 유학까지 마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추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동족들과는 달리 추장은 양복을 입고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동창생인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시간에 보니 추장은 다른 식인종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여행객은 놀라서 “아니 영국에서 명문대학까지 나온 분이 어떻게 사람 고기를 먹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추장은 한 손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포크로 먹고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다른 이들은 손으로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차이지요"라고 말했다 한다. 이 추장은 공부를 하였는데 본질은 접하지 못하고 껍질만 보고 왔던 모양이다.



마음이 변하고 내용이 변화되어야 하거늘, 풀로 만든 옷이 양복으로 변하고, 손가락으로 먹던 음식을 포크로 먹듯이, 껍데기와 형식만 바꾼 것은 변화라 할 수 없다.       



법과 제도에 얽매인 교회



인간을 영육의 존재라 말하고, 우주의 원리에도 음양의 양면성이 있듯, 구원의 원리에도 신과 인간, 은총과 자연, 말씀과 형식, 성령과 제도 등의 양면성이 있다. 이 양면성은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너무 감정적인 것에 흘러 오류를 범하는 것이 개신교라면, 아프리카 추장이 손가락으로 먹던 음식을 포크로 먹듯, 껍데기와 형식만 변화된 것이 천주교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여호수아와 요한처럼 교계제도와 정통신학과 교리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모세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제도와 형식을 넘어선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 되도록, 말씀과 은총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할 것이다.











8.     연중 제26주일   마르 9,38-43. 45.47-48 (나) 법보다 크신 하느님의 사랑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민수 11,25~29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제2독서 야고 5,1~6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복 음 마르 9,38~43.45.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신앙을 보호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제도나 법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그것에 묶여서는 안됩니다. 그와 같은 모순이 신앙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보다 넓게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바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에집트를 탈출했을 때는 그 백성의 수가 장정만도 60만 명이었습니다. 아마 딸린 식구를 합치면 백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큰 백성을 이끌고 이동한다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서로 싸우는 시비가 생겨서 각종 소송 사건이 많아지게 됩니다. 모세 혼자서 소송 사건을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장인의 충고에 따라 장로들을 뽑아 그 문제를 분담시키는데 이때 뽑힌 장로가 70명이었고 이들을 성막으로 불러 하느님의 영을 부어 주는데 웬일인지 두 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도 자기 집에서 영을 받아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선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나오라는데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앞에 나서서 어떤 벌이나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달래면서 그러지 말고 오히려 그런 형태로라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리길 바라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축소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사도 요한의 보고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요 또 그들과 어울리는 자도 아니기 때문에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말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오늘 성서의 대목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넓게 열려져 있습니다. 불교 신자나 개신교 신자, 심지어는 무당 할머니들에게까지도 하느님의 사랑은 존재합니다. 좀 억설 같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지옥에 빠졌다 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나 슈바이처 박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해서 그들이 구원을 못 받는다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정상적인 길은 물론 천주교이지만 그러나 우리 교회 밖에서도 구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아무 교나 믿으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자신의 종교가 최고의 구원의 길이라 판단하여 양심을 바르게 갖고 선을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았다 했을 때 그를 보고 당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구원을 못 받는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착하게 살기를 아주 간절하게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고 상을 받지만, 대신에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큰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 버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성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옛날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법에 아주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법을 온전하게 지킨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많은 죄를 안겨 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은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아직도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이 보다 넓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모르며 또한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백성이면서도 원으로의 길은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어떤 법이나 제도에 묶여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초월합니다. 그렇다고 법이나 제도가 가치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나 제도는 분명히 하느님의 은혜를 보다 효과적으로 나누고 보존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성실히 지키고 제도를 존경하되 그러나 먼저는 바른 양심 안에서 착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믿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9.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무형의 걸림돌

                                                   조광호 신부



 ■하나 : 모짜르트의 고향 오르트리아 「살쯔부르그」는 모짜르트의 명성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도시이다. 거대한 알프스산맥의 웅대한 기운이 잠시 숨을 죽인 살짝 강변의 도시 「살쯔부르그」는 천재 모차르트의 번뜩이는 예지와 예리한 감성이 음악의 전통성과 서로 어울려 감미로운 고전음악의 극치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인간문명이 조화를 이룬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구라파 중세도시 형태가 모두 그렇듯이 이곳 역시 절대군주시대의 화려했던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나란히 베네딕도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하려하고 웅장한 위용으로 지나간 시대 교회의 그 엄청난 권위와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도 로마시대의 유적의 발굴이 계속되고 잇는 그곳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나는 하해 여름을 지낸 적이 있다.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수도원은 수 백년 묵은 문서고와 도서실, 각종 미술품으로 그야말로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곳 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에서의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더 없이 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보람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둘 : 그러나 그 수도원에 가던 첫날부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성무일도를 드리는 지하경당 중앙 통로 바닥에 바닥 돌로 놓인 어느 주교의 조상을 모든 수도자들이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위엄에 찬 주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주교의 얼굴, 너무도 뚜렷한 그 상을 밟고 지나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석상을 피하여 한 발자국 돌아갔지만 태연히 그 얼굴을 밟고 지나는 그곳 수도자들의 태도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마침내 그 해 여름이 다 지나는 어느 주일 오후, 나는 우연히 그 경당에서 만난 노(老) 원장에게 나의 의문을 털어놓았다.


아흔이 가까운 백발의 노신부님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경당 바닥을 응시하며 『저분은 마르틴 루터가 한 때 몸담았던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원장 이였답니다. 저분은 세상에서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를 대신 밟아 줌으로써 그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기치 못했던 그의 대답은 나에게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신부님의 빛나는 눈빛에 너무나 무거운 여운이 깔려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마르틴 루터의 원장이었던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연유로 하여 그 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나는 그 내력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곳을 떠나 왔다. 어쩌면 그 원장신부님의 말씀은 나의 호기심을 송두리째 앗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자로서 한 생애를 투신했던 삶, 그리나 지금은 저 차디찬 돌 바닥에 걸맞지 않은 관을 쓰고 누워있는 낯선 사람, 영원한 침묵으로 그는 살아있는 수도자들에게 삶의 모든 비밀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셋 : 이 지상의 교회는 「자애로우신 어머니」로 표상 되고 있다. 넘치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꾸짖고 타이를 뿐 아니라 끝없는 용서로서 그 품에 맞아들이는 어머니와 같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머니들이 때때로 그 자녀들을 자기의 욕망과 허영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듯이 교회의 지도자들도 성서에 표현되는 「작은 이들」의 어깨 위에 놓인 멍에를 풀어 해방을 선포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죄의 올가미를 씌우고 마치 하느님의 은총을 스스로 분배하고 관리하는 약삭빠른 청지기처럼 그들을 불모로 잡고 세상의 권력과 영화를 누렸던 「타락한 교회」가 세계 도처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罪性)을 간파하신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의 지배욕과 독점욕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나무라셨다(마르코 9,38-41 참조). 성민 의식에 사로잡혀 공동체 밖에 있는 일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제도화되고 경직된 종교적 독선을 예수는 「작은 이들」의 걸림돌(스캔들)이 되는 행위로 간주하셨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조직 속에서의 「소속」과 「무소속」, 제도교회의 「인준」「비인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착한 행위에 있다고 말씀하셨다(40절 참조).


예수에 의해 시작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은 사회적 지위나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과 완벽한 조직력을 갖춘 강자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공동체」특히「작은 이들」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공동체 일 때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의 공동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넷 : 그러므로 예수는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표상하는 「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무섭게 저주하고 있다(42절 참조).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남을 모질게 대하고 증오와 원한을 맺게 하여 하느님과 인간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거스르는 「악마적 걸림돌을 놓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부정과 사기로 이웃에 대한 불신의 폭을 증폭시키고, 원망과 원한의 악순환의 질곡으로 하느님의 「작은 이들」을 몰아 넣는 이들의 행위와 행동(손과 발), 그 부정한 의지(눈)를 끊어 버릴 때 이들 스스로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고 것을 「손과 발, 눈이 없는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42-48절 참조)고 성서는 우리에게 히브리적 비유로써 표현하고 있다.


■다섯 : 「한국 갤럽 조사연구소」가 최근 펴낸 「한국과 세계 청소년의 의식」조사 보고서에는 우리사회는 너무나 「가문과 배경만을 중시한다」는 청소년이 무려 74%를 차지하고 「빈부의 격차, 근면한 사람이 푸대접받는 사회」로 우리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경찰청의 「90년도 범죄백서」에는 우리나라 자살자가 한해에 무려 7천5백 여명에 이르고 그중 생활비관자가 3천 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삶의 맛을 일찍부터 잃어버린 우리들의 청소년들과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무형의 걸림돌」을 놓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징검돌」대신에 이들 앞에 놓은 「이 시대의 걸림돌」은 과연 무엇일까. 그 「걸림돌」을 우리가 단호히 거절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오늘의 교회는 이 사회에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둠에 묻히는 가을저녁, 창가에 앉아서 나는 그 언젠가 살쯔부르그 수도원 지하경당의 석상을 조용히 밟고 제단에 오르는 그곳 수도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 침묵의 행렬이 무거운 어둠을 뚫고 지나는 투명한 바람같이 나의 내면을 흔들며 지나는 것을 오늘 이 저녁, 다시 눈여겨본다.











10.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최재용 신부



 근세에 있어서의 세계 최대의 발견은 텔레비전이나 인공위성이나 컴퓨터가 아니라 실로 어린이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어린이들이 우리들에게 준 바의 깊은 지식은 현대 교육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천 여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시고 그의 주변에 모여온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에게서 이상적인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을 찾아내어 어린이의 정신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자의 첫째 배울 바이며 이 어린이의 순수한 뜻을 거역하지 말도록 일깨워주십니다. 이러한 명백한 가르치심을 예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교회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없이 오히려 악한 표양을 보여 줌으로써 작은 악마를 만들어 놓는다면 크나큼 교회의 잘못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우리 어른들 안에 받아들이도록 일깨워주고 계시는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순진한 마음입니다. 선입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편견이 너무도 많습니다. 눈 뭉치로 만든 눈사람처럼 굴러가면 굴러가는 데로 따라서 그 주위에 있는 흙이라든가 지저분한 모든 것을 묻혀 가면서 커집니다. 갖가지 미신, 각양의 편견을 보십시오. 유치원 아이들에게서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들은 어떤 누구이든 함께 즐거이 놀고 함께 유쾌하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장해 감에 따라 백인 혹인 종족을 가리고 씨족을, 집안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발견하여 이렇게 말하고 생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편견을 갖고 있는 어른들에게서 머리 안에 깊이 주입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는 무당도 굿도 없으려니와 잡다한 불신의 미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주일학교에서 어린이의 벗이 되고 종교교육의 귀한 사명에 충성하려는 자들은 먼저 이 점에 있어서 어린이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순진한 어린이를 인도하려면, 마땅히 스스로 순순한 자가 아니어서는 안됩니다.


그 둘째는 신뢰심이 강한 것입니다. 어린이만큼 부모 형제 자매를 신뢰하고 선생을 믿는 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자기의 무력(武力)을 알아 자기보다 나이에 있어서 지력에 있어서 앞선 자를 잘 신뢰합니다. 어른은 사람을 의심하고 더욱 현대에선 우선사람을 보면 자기를 이용하려는 자로 더 심하게는 도둑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곧잘 표어로 삼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에 의뢰를 하려 들지만 하느님께는 신뢰를 두지 않으며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도리를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이 어른입니다.


그 셋째는 직관하는 것입니다. 어른은 이유와 까닭을 앞세우고 핑계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종교상의 일, 하느님의 일은 이치만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종교적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주어짐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유와 까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린아이가 되어 땅에 엎디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는 순수한 정신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아이들의 이 인격을 존중하시고 어른들인 우리에게 그 인격을 배울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택하심을 입고 귀한 종교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입은 자는 돌이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맹진하기 바랍니다. 그릇된 편견이나 우월감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춤으로써 어린이의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와 복종과 감사와 보은에 더욱 더 정진하면서 어린이의 덕을 본 받기로 합시다.


“아, 아름답도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자기 탓으로 어린이에게 악한 표양을 준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악의 씨를 넣어주는 것이고 그들에 의해 우리는 심판대 위에서 변호자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11.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삶

                                                          이승구 신부



 지난 주일은 우리의 고유명절인 추석이었다. 우리 본당에서는 주임 신부님의 배려로 제대 앞에 제수를 차려놓고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난 다음에는 모든 신자들이 가족 단위로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드렸다. 나도 미사를 마치고 제사를 지내면서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헤아려 보았다.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자들의 기쁨



어른들은 자주 “자식 낳아 길러 보기 전에는 부모 속(마음)을 모른다”고 하신다. 그러니 신부인 나는 결국 영원히 어버이의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알 길조차 없고 깨닫지 못할 것 같다. 살아 생전에 보여주신 사랑과 따뜻한 배려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부모님 세상을 떠나시고도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그 자리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넣어주시고, 생각할 줄 아는 자유로운 존재로 낳아주셨으니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굴어서 더 고생하시고, 세상의 틀이나 권력에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느라 사람으로 오셔서 고통받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여전히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사랑해주시겠지만 잘 느끼지 못하고, 다 알듯하면서도 차마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나의 모습인지라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 제1독서에 모세는 나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모세는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을 알아보는 현명한 사람, 깨어 있는 사람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다. 여호수아는 행동을 함께 하지 않은 두 장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만을 터뜨리지만, 모세는 그런 장로조차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니 온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본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마음을 열도록 분명히 말한다. “차라리 모든 사람이 나보다 더 하느님의 사랑을 못 보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이 사람들을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 참으로 모세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고대하는 겸손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 안에서조차 ‘일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어떤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오랫동안 아프리카 하면 시커먼 사람들이 옷도 잘 갖춰 입지 않고 거의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장면을 상상해 왔다. 그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한 사제가 신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 진지하고 활기에 넘쳤다. 모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한 사람씩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는 순서였는데, 이상하게도 일어선 사람이 죄를 다 고백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노래를 불렀다.

이 사제도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데 다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때 비로소 이 사제는 모인 사람들이 ‘죄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죄의 내용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의 노래를 힘껏 불러대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죄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죄를 고백하도록 용기를 주고 회개의 마음을 주신 하느님과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와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죄의 내용으로 사람을 저울질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토록 사랑이 흘러 넘치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이 모임은 얼마나 멋지고 성령으로 가득한 모임인가! 이들이 바로 모세처럼 하느님의 깊은 뜻과 활동하심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가!



 오늘날의 우상인 안락과 물질


그러기에 오늘 복음 말씀은 닫히고 얼어붙은 내 마음을 열고 힘없고 약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마구간에서 부모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었던 당신의 연약한 모습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신다. 오늘도 무분별한 철거로 내쫓기는 가난한 사람들,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경쟁에 뒤진 거리의 아이들, 에이즈로, 공해로, 온갖 장애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은 여전히 현존하고 계심을 알아보도록 내 닫힌 마음을 열라고 독촉하신다.


내가 비록 가톨릭 교회의 사제이지만 나보다 앞서 더 깊고 넓은 마음으로 일하는 비고리스도인들을 위험스런 눈초리로 경계하지 말고, 그들 안에서 더 힘차게 눈초리로 경계하지 말고, 그들 안에서 더 힘차게 활동하실는지도 모르는 하느님의 영을 발견하라고,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지지자요, 주님의 지지자임을 알아보라고 촉구하신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하신 주님께서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라”, “손을 찍어 버려라”, “눈을 빼 버려라”, “발을 찍어 버려라”하시니, 자주 죄를 빠지는 내가 이 말씀대로 실행한다면 이 몸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눈과 손과 발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체의 중요한 부분들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이 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불필요해한 것들이요,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되고, 오히려 남을 해치고 남에게 죄짓도록 한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리라.



눈과 손과 발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모든 것과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목적이 눈이나 손과 발등의 육체가 편안하도록 하기 위해서 재산을 모으고, 안락한 장치를 늘려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우상숭배가 아닐까 한다.



사랑의 모험으로 기적을 일으킬 때



그러므로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부자들에게 경고한다. 여기서 부자란 꼭 돈이 많아서만 부자가 아니요, 눈과 손과 발등을 편하게 하고자 온갖 안전장치를 끌어 모으는 데 급급한 사람들 모두를 뜻함일 것이다. 나의 몸뚱이를 편안하게 하고 싶고 고통에서 무조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바로 부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못 살겠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재산만 긁어모으고, 땅이 죽어가고 생명이 죽어가더라도 “나는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태도들이 바로 부자의 태도요 이런 태도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경고를 한다.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를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모험을 시작하라”,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안에서 얼마나 힘차게 활동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지 눈뜨고 보라”는 외침인 것이다.

 이제 나도 마음을 열고 보이지 않게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발견하는 모험에 뛰어들고 싶다. 살아 생전에 차마 헤아리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간간이 느끼듯,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늘 깨닫고 싶다.











12.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순교자적인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방윤석 신부



오늘 제2독서의 내용은, 부자들에 대해 질책하는 사도 야고보의 말씀이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다.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버렸다. 금과 은이 녹슬었다』고 말한다. 금과 은이 녹슬리 없지만, 썩은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 『일꾼들 품삯을 가로챘다. 사치와 쾌락으로 지냈고,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 채웠다. 죄 없는 사람들을 단죄하고 죽였다』고 말한다.

  

신문을 읽어보면 부정부패가 정치면의 단골 메뉴이다. 국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담합인상, 폭리, 개인 이기주의, 동네 이기주의 등 온갖 못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의리, 성실, 정의, 도덕, 교양, 윤리 등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자가용 천 만대 시대다. 기존의 윤리 도덕 외에 교통 도덕이 하나 더 첨가되었다. 그러나 정착이 안되어 형편없다. 앞으로 얼마나 많이 죽어야 정신차릴까? 온 천지에 정의의 물결은 사라지고, 불의만 홍수처럼 가득 차 있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인데, 요새는「물가는 하늘같이 높고, 교통이 마비된다」고 해석한다.

  

이조 말기 우리 순교자들의 시대는 어떠했을까? 역시 부정부패, 매관매직, 각종 불의가 만연했었다. 당시는 끝없는 당쟁과 처절한 복수의 시대였다. 임금에게 아부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면 정적을 가차없이 유배시키거나, 사약을 내리게 했으며 삼족을 멸했다. 이 때 요행히 살아남은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피로써 갚는 것이 효도였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시대였다.



그 당시는 또한 사상적인 공백시대였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의 윤리는 약육강식의 윤리로 전락했다. 유교 윤리는 잘 되어 있는 데, 권력자들이 사악한 마음으로 자기들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그것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상놈이 말타고 갈 때, 양반이 지나가면 말에서 내려야하며, 만약 안 내리면 때려서라도 내려 걸어가게 했다. 그래도 상놈은 아무 말 못했다.



칠거지악, 삼강오륜, 삼종지의 등의 도덕률은 강자(强者)만을 위한 도덕률이었다. 따라서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순 있는, 즉 평화공존, 민족번영,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철학 또는 사상이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섰던 분들이 계셨으니, 바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선각자들이었다. 권력자들이 만든 불합리한 인간의 정의를 하느님의 정의로 바꾸어 놓는 수고를 하신 분들이 순교자들이다.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 신앙으로 무장하고 망국을 부추기는 여러 악습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섰던 것이다. 민중 봉기나, 가두 시위로써가 아니라 천주교 신앙에 입각한 새 철학, 새 사상, 새 학문의 전파로써 말이다. 그리하여 양반상놈 계급의 타파를 부르짖었으며, 여자 및 어린이들에게도 인권의 귀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한글로 쉽게 교리서를 만들어 한글 보급에도 앞장섰으며, 신학문 체계를 정립하고 가르치기에 힘썼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한 눈 팔지 않았으며, 그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가르친 길로만 가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면 눈을 뽑고 손을 찍어 버린다는 각오로 그 길을 걸어갔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대로, 외골수로 그 한 길만을 갔다. 이 길만이 너와 내가 사는 길이며, 우리가 사는 길이며,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부하지도, 뇌물주지도 않았고, 사기쳐 먹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부정부패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던 것이다. 그 가르침대로 사랑으로 다스리며, 끝까지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였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우리도 시대의 징표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도 이조 말기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정치는 민주 개혁으로 가는가 했더니 다시 보수고 복귀해 버렸다.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사악해져 간다. 공해로 우리의 터전인 땅도 쓰레기장이 됐고, 사상도 쓰레기고 가득찼으며, 마음도 쓰레기장화(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누가 이런 상황을 정화할 수 있을까?



우리 천주교가 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순교자들처럼 우리 신앙에 대해 흔들림 없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밀고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도 순교자들이 가졌던 확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순교자 분들의 유훈인 신앙의 확신과 실천적 용기를 되새겨 보자. 그리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이 땅에 세워지고,  그 바탕 위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자.











13.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어린이처럼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다. 다 큰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가 된단 말인가. 어른인 우리는 어린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처럼 어린이와 같이는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선 어린이의 특성을 보자.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하다. 갓난아이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육체적 성장뿐 아니라 정신적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어린이처럼 우리도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엄마와 함께 있는 어린이가 항상 편안해지듯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과 감정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어린이가 엄마를 바라보며 살 듯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이 주님 말씀에 담긴 메시지다. 어린이처럼 되라고 해서 툭하면 토라지고 응석부리는 그런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처럼 사는 삶이 될 수 있을까.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의 삶은 너무 바쁘고 복잡하다. 이전에는 단순했던 것들조차 복잡한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잘 사는 것과 바쁘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쁜 사람이 꼭 잘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너무 쉽게 착각하고 있다.



오늘 기억하는 성녀 소화 데레사는 단순한 삶을 성덕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는 순간의 생각까지도 누군가를 위한 희생으로 바친 분이다. 그 누군가는 선교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와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성녀께서는 일상사의 단순한 삶을 정성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포교사업의 수호자가 되었다. 선교활동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온 몸으로 그들을 위해 살았기에 풍부한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허락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극기와 노력없이는 불가능하다. 명강의를 하는 선생은 핵심 부분을 쉽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실력을 갖추고 있다. 절제와 훈련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단순한 삶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핵심을 꿰뚫는 훈련과 복잡한 삶을 쉽게 만드는 절제를 갖추어야 주어진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셨다. 그들이 엄마를 의지하듯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라고 하셨다. 이것이 어른인 우리가 어린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일생동안 실천하며 살았던 데레사 성녀를 기억하며 우리도 단순한 삶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자.











14.   연중 제26주일   마르 9, 37-47(나) "신앙은 하느님께 향한 효도"

                                                        정천봉 신부



몇해 전 통계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존속살인이 평균 9일에 1건, 폭행은 1일에 3,2건씩 일어나고 있단다. 요즘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효자, 효녀 이야기는 먼 옛날 있었던 일처럼 생각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엇그제가 추석명절이었다. 이런 절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살아계시건 돌아가셨건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효도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향한 것이기에 그러고 보면 신앙 역시 효도임이 분명하다. 신앙도 결국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향한 효도인것이다.

그런데 아주 못되게 흐르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이나 하느님께 드리는 효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느님께는 훨씬 높아야 할 효도의 수치는 우리에게 신앙의 효도를 새삼스럽게 되돌아 보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 가운데 누가 효자인가? 첫째인가? 아니라면 효자는 있는가? 첫째가 좀 낫지만 진짜 효자는 못된다. 바로 진정한 효자의 성공사례를 오늘 미사의 2독서에서 소개하고 있다.



ꡒ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서ꡓ라는 표현으로 효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ꡒ나는 길이다ꡓ하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효도의 길을 새삼 생각해 본다. 신앙은 생활이다. 그저 대답만 잘하는, 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생활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효도의 모범은 첫째 아들도, 물론 둘째 아들도 아닌 두 단계를 뛰어넘는 좋은 욕심(?)을 내라고, 그래서 진짜 효자, 효녀가 되라고 나를 깨우쳐 준다.



신앙인치고 불효자는 없다. 사실 아버지 하느님께 향한 효도는 당연히 부모님께도 이어지는 것이기에 두 효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부모님께 불효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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