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연중14-18주일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6
분 류 연중14-18주일
ㆍ추천: 0  ㆍ조회: 4150      
IP: 218.xxx.172
http://missa.or.kr/cafe/?logos.1146.17
“ 나해 연중 제 18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8주일

       12. 최창무 주교(나)/19

        13. 유진선 신부(나)/22                14. 김몽은 신부(나)/23

        15. 조순창 신부(나)/25                16. 김영옥 신부(나)/26

        17. 유재준 신부(나)/28                18. 김영남 신부(나)/29

        19. 강길웅 신부(나)/32                20. 김선태 신부(나)/34

        21. 하늘의 빵(나)/34                





12                연중 제18주일   (나) 가톨릭 윤리관

최창무 주교



윤리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어울림' 혹은 ‘인간구실'을 이해하고 실천하며 평가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 윤리는 하나이며, 동시에 삶의 영역만큼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윤리는 인간 이해 내지 인생관에 직결되며, 그 바탕 위에서 삶의 여러 영역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가톨릭의 윤리관'이란 결국 가톨릭 사상과 가톨릭 인생관에서 나타나는 윤리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윤리관을 말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해’ ‘그리스도교적 인간관' ‘가톨릭적 윤리관'의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



인간의 이해

인간을 흔히 소우주(小宇宙)라고 한다. 비록 인간이 우주 안에서는 하나의 먼지만도 못하고, 그 인생은 보잘 것 없지만,(이사야 40,15;시편 62,10 등 참조) 반면에 인간은 자신을 알고, 창조주를 알아 공경하며, 세상을 지배하고 보존하는 만물의 영장이며, 주인으로서 우주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양극의 일치와 조화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통해 드러난다.

  

첫째,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다. 인간은 우주, 지구의 한 부분으로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물리적 법칙과 힘에 예속되어 있다. 이 물질적 차원은 인간의 육체를 형성하는 요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 세상 안에 존재하며 주위와 깊은 관련을 갖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인간은 유기적 생명체이다. 인간의 육체는 한 생명체로 식물적이며, 동물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능력으로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리적 힘과 본능으로 힘을 발휘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행위를 하는 것은 정신적 능력에 달려 있다.인간의 지성과 의지, 감수성은 인간이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형이상학적이며 초월적 가치를 발견하고, 초월자 혹은 절대자를 알아모시며, 당위성을 깨달아 자신의 의무와 권리, 소명과 책임을 다하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사람은 이상의 세 가지면(物理․生理․倫理)을 자신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에 따라 각각 달리 설명하며, 그 이해와 설명에 따라 다양한 윤리관을 제시하게된다.



그리으도교적  인간관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세 가지 차원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 안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천명한다.

 

첫쩨는 창조 질서의 차원이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존재하고 완성되도록 마련되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을 대신하는 존재로, 세상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천리(天理)이고 천명 (天命)이므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順理)이다.

여기서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자연(自然)의 올바른 활용과 보호가 윤리적이란 확신을 얻게 된다.

  

둘째는 구원 질서의 차원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질서를 거역하였고, 이는 곧 인간에게 죽음이었다. 인간의 이와 같은 불순명(不順命)은 자신과 세상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하였다(로마 8,18-23; 창세기 3,1-24).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이 불행과 죽음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재생의 길을 열어 주셨다(로마 8,24-30/ 창세 3,15/ 갈라 4,4/ 요한 3,16-17 등).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다시 화해시켜 주셨다(1고린5,14-21/ 로마 7,14-25/ 에페 2,1-22 등). 이를 믿는 사람에게는 재생의 길이 트인다.

  

셋째는 종말 신앙의 차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목적이 현세에 있지 않음을 고백한다. 현세는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고 있고, 역사는 세상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다. 인간은 현세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 모든 좌절과 실망을 극복하는 영원한 삶의 희망을 지니고 산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되었음을 알고 믿는다. 현세 생활 안에는 영원이 담겨 있고, 영원한 삶은 현실 안에서 형성되고 결정됨을 그리스도인은 고백한다.



가톨릭적 윤리관

가톨릭의 윤리관은 가톨릭의 교의와 예배, 생활을 통해서 나타난다. 가톨릭 교의는 사도신경에 포함된 내용으로,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존재인지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깨달아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가운데, 윤리적 삶을 지향한다. 따라서 가톨릭적 윤리 생활은 참 진리를 배우고 고백하는 생활이다.

  

참된 예배의 생활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바른 관계가 정립되고, 희망의 삶을 이룩하는 길이다. 참 된 예배를 위해 노력할 때 경외심 과 감사, 속죄와 청원이 바르게 이루어진다. 올바른 경신례(敬神禮)가 삶의 기초가 될 때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가 유지된다.

예배의 삶이란 7성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삶의 특성을 갖는다.

불변적 진리와 참된 예배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은 진실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이다.

그 유일한 모범은 인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이 그분을 배우고 닮을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사도 11,26). 이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라고 하며, 이는 미사 예배와 생활로 집약될 수 있다.

미사 예배에서는 윤리관의 기초가 되는 바른 교의, 참된 예배, 바른 생활이 발견된다. 이는 곧 섬김과 나눔, 진실과 봉사의 삶으로 드러나게 된다(사도 2,41-47; 4,31-37 참조).

 

결론적으로 가톨릭의 윤리관은 가장 현실적 윤리관이며, 동시에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윤리관이다. 정치 윤리, 경제 윤리, 산업윤리 등 현세적 가치와 사명에 충실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창조질서, 구원질서, 종말신앙의 조명을 받아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세적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겠으나, 성공과 실패의 평가는 최종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하느님의 평가에 달렸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1고린 4,1-5). 



끝으로 신자국회의원인 여러분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한다.

가톨릭 신자가 신앙교리, 즉 진리를 깨닫고, 참되고 적극적인 예배생활을 하며, 알고 믿는 바를 생활에 옮길 때에 역사 안에 가톨릭 윤리관도 나타나고,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국회에서 “뭔가 다르다"는 모습을 보일 때,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_

  

마치 공자님 말씀처럼 ‘제사하듯' 하느님을 받들고 이웃을 대하면, 국민들이 뭔가 다르다고 할 것이다. 물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의 윤리관은 이상적․ 초월적 윤리관이다. 이 윤리관을 현실 안에서 구체 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강생의 신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화합하고 일치되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능, 예언직․사제직․왕직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직은, 계시진리를 증언하는 것이며 창조질서를 대변하는 것이다.

사제직은 당신 자신이 제물이며 사제임을 말하는데, 인간도 이를 본받아 진리를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요한 17,14-19).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글자 그대로 신명(身命)을 다 바치는 것이다.

왕직은 구원의 경륜을 '사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정을 ‘살림 '하는 일이다. 이웃과의 공존에서, 교회 안에서 계시진리에 따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데 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것을 가르칠 때는 당(黨)을 초월해서 반드시 일치를 이뤄야 한다. 어떤 정책적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각 정당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또 그것이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상호존경과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다.



13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깊이 있는 신앙

                                                    유진선 신부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자”

한국의 교회는 수많은 순교 선열의 피로 가꾸어졌고 그 피가 영적 거름이 되어 오늘의 수많은 수확을 보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오늘의 한국 교회는 수로 보나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으로 보나 과거보다 확대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단계에 이른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신자들이 자칫하면 종교사에 나타나는 실수를 거듭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신자나 수도자나 성직자의 신심이 과거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의 신앙심보다 뒤떨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느낌이요, 냉담자의 수와 그 질적 내용을 고찰할 때 입교의 동기와 신앙생활 면에서 교회란 “먹을 것을 나눠주는 자선 사업 단체”인 양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교회란 한갓 액세서리로 여기는 자도 있으며, 또한 교회란 ‘수덕에 필요한 한 가지 도구’로 생각하여 ‘신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종교를 역이용하는 자가 있음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창설하신 의도는 인간의 구령입니다. 구령의 은혜를 입는 주체는 역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구령이란 궁극목적을 당성키 위해서는 교회와 교회 창립자이신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알고 믿어야 하며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세상이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만 가능한 것 같고 어려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숙소 하나 얻지 못해 세인의 눈에 띄지 않는, 무시당하는, 잊어버리고 지나칠 마구간을 자기의 탄생지로 선택하셨기에 진정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인 그리스도를 찾으려면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마구간에 들어가야 하고 거기에 들어가려면 겸손되이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사람을 믿습니다. 물건을 믿습니다. 금과 은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쉽게 믿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쉽게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질계인 현생활을 떠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인간이란 점점 자기 만족에 도취되고 더욱 겸손을 모르는 현대인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그를 대항해서 도전하는 이 외람스런 소행을 감행하는가 싶습니다.

  ‘신앙’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마치 철없는 어린이가 자기 부모에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거센 폭풍에 호도깍지만한 기선이 나뭇잎처럼 파도에 뒤흔들립니다. 승객은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다만 한 어린아이만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놀고 있습니다. “아가야 무섭지 않니?” 하고 묻자 “아니요 아저씨는 무서워요? 우리 아버지가 이 배의 선장인데요”하고 태연합니다.

이같이 생명의 위기인 폭풍을 만나도 그 어느 누가 확고한 신앙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확신을 느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친히 키를 잡으시고 배를 지켜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이란 성서에 깊이 뿌리를 박은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다를 바로 알려고 하면, 바다의 흔들리는 물결만 보아서는 알지 못합니다. 바다의 흔들리는 부분은 몇 자에 불과하고 깊이 50자에서 100자를 들어가면 수면이 아무리 흔들려도 바다의 속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고요합니다. 작은 배는 물결 위에 있어 작은 파도에도 흔들리나 50자 100자를 내려 갈 수 있는 큰 배는 아무리 큰 풍랑을 맞아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은 작은 배와 같아 조그마한 시대사조에도 흔들립니다.

  

우리가 원하는 신앙은 수면의 작은 풍파에 흔들리는 거룻배와 같은 신앙이 아니고 깊은 진리의 바다 속에 깊이 뿌리를 박아서 어떠한 풍조와 유혹에도 튼튼히 설 수 있는 이런 신앙을 원합니다. 이같은 신앙은 성서에 깊이 뿌리를 박은 신앙입니다. 성바울로 사도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고린 4,18)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14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김몽은 신부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두시오. 당신들이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흡족하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시오.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당신들에게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만 눈이 어두운 현대인에게 오늘의 복음은 너무나도 적절하다. 5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군중들은 예수를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신적인 눈을 뜨게 하고, 정신적인 고양을 촉진시키려 하신다. 즉 그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위대한 권능을 목격하고, 그들 자신의 풍요로운 생활과 이스라엘의 독립(당시의 시급하고도 간절한 소망이었다), 국가의 부흥 등에 대한 가능성만을 보고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설교는 3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물질적인 양식(빵)과 생명의 양식(빵)과의 구별을 설명하시며, 물질적인 빵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생명의 빵은 영원한 것임을 깨우치신다. 다음엔 인간이 신앙으로써 동질화되어야 할 생명의 빵은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밝히셨다. 마지막으로 이는 우리가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함께 계시며 우리를 길러 주실 성체의 빵의 약속이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함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빵의 기적을 보았고 그밖의 많은 기적을 보았건만 다시 예수께 반문한다. <우리에게 무슨 기적을 보여서 믿게 하겠습니까?>

  

기가 막힌 말이다. 이것은 곧 현대인들의 반문과도 흡사하다.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해도 역시 그들의 마음을 채워 주지는 못할 것이다. 완강하고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기적도 회의와 불만일 뿐 거기에서 믿음을 끌어내지 못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미온적이며 불성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주님의 기적을 보면 믿겠는데……> 하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적을 행한다 해도 무엇인가 구실을 붙여 그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믿는다 해도 그 믿음은 피상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것, 영신적인 것 보다는 현세적인 것, 육체적인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쓸 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 우리의 충족이며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그에 대해 간곡히 들려주신다.

  

<내가 곧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만 깨달을 수 있는 하늘의 선물이다.





















15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

조순창 신부





  구약의 성조 야곱을 따라 이집트에 내려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점점 번성하게 되자, 이집트 사람들이 온갖 고된 일을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자유 잃은 설움과 남을 위한 고역에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하느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굽어살피시어 민족의 해방자 모세로 하여금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게 하셨으나, 홍해 바다에 이르러서 갈 길이 막힌 데다가, 뒤에서는 파라오 왕의 군사들이 추격하여 오자, 오도 가도 못하고 죽어야 할 곤경에 빠졌습니다. 별수 없이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느님 뜻대로 팔을 바다로 뻗쳐 바다를 갈라 갈 길을 열어 구원해 주심으로써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홍해 바다를 건너 수르 광야에 진을 옮겼으나, 사흘을 가면서도 물을 만나지 못하다가, 마라에 다다라서 물은 만났어도, 써서 마실 수가 없어서 갈증을 못이긴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무엇을 마시라는 말이냐?” 이 또한 모세의 중재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로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하느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도 감사는커녕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목마르고 굶주려 쓰러질 지경에 원망과 불평과 한탄이 가득한 것이 이스라엘의 생활이요, 빵을 배불리 먹고 또 예수님을 찾은 군중의 심리는 오늘의 우리 생활의 단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복음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시오, 내가 곧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로 오는 이는 하느님을 찾는 여러분입니다.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영원하심과 풍요로움으로 인해서, 결코 헛된 것에 매달려 헤매다 지쳐 배고프게 될 형상이 아니라, 만족과 기쁨과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완전한 신뢰의 생활을 말하며, 이럴 때에 결코 부족이 없고,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두려워하지 말라.”(믿음) “하느님 말씀 들어 순종하여 따르면 병들지 않으리라.”(믿음의 생활)는 교훈은,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무지와 제 완고한 고집과 무질서한 생활로 방탕 하는 그릇된 생활을 청산하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유한한 인생입니다. 시한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늘 명심해야겠습니다.

16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하느님과의 대화

                                                   김영옥 신부



 “비나이다. 하느님 날 구하소서. 야훼님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 날 구하고 돌보실 분 당신이시니, 야훼님 더디 오지 마시옵소서.” 오늘 입당노래입니다. 숨을 쉬고 있고 아직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빵을 먹어야 합니다. 이 빵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양식이지만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이것만으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온전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뉴스나 신문 라디오를 통해서 의식주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물질만으로 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당신의 얼을 넣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날 때부터 숭고한 정과 사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또 하느님께로 향하는 착한 마음씨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인간은 사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하느님을 알지 않고서는 본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먼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이시며 우리가 찾아야 할 진리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그리스도를 알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 사람은 자연히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기도는 가장 윗자리에 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누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님이 아니겠습니까? 기쁠 때에도 어머니를 찾고 슬플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항상 제일 먼저 입에 떠오르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왜 우리에게 이와 같이 친밀감을 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머니와 가장 깊은 정을 가지고 대화를 많이 나누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생명을 함께 하는 사랑의 대화는 이루어졌습니다. 무언의 대화로 그러나 순수한 정으로 어머니와 어린 아기는 이야기를 잘 합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는 가정에 있어 훌륭한 국어선생으로 말과 감정과 사랑을 자녀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평생 그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우리를 하느님답게 만들어줍니다.

  옛말에 “친구를 보아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로라는 사람이 사회 생활에 있어 가장 많이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는 친한 친구가 불량한 청년이라면 은연중에 바울로도 그 친구를 닮아가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선을 이루고 계신 분이십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근본을 이루고 계신 분께 말씀을 자주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그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 거룩하게 변모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력과 위로를 받고 갈증을 완전히 풀게 될 것입니다(요한 6,35). 현대인이 생활의 균형을 잃고 사회에는 범죄가 범람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느 학자는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귀여운 자녀들을 우리 스스로를 가정 전체를 기도의 길로 인도함으로써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우리를 자멸하게 하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녀 대데레사께서 기도를 정의하신 그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란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로 우리가 아는 그분과 단 둘이서 자주 있으면서 우정으로 대화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지어주셨습니다.

  

여러 말로 하느님께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을 담뿍 안은 순수한 말씀으로 찬미와 감사와 죄의식에서 나오는 뉘우침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가 깃들어 있는 뉘우침으로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성삼위를 우리 안에 모심으로 우리 안에 성삼위께서 생활하시도록 하여야겠습니다.

 

바울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간곡한 권고를 생각합시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합니다.(에페 4,17-18).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도 몸도 모두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분께서 주시는 진리와 생명을 받고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합시다.





















17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인격적 믿음

                                                      유재준 신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면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면 하느님의 호의를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유다인들은 개별적인 선행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선행 실천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단 한가지 인생의 기본 자세를 요구하셨습니다. 이러한 기본 자세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분이심을 믿음으로써 확립됩니다. 하느님의 일 곧 삶의 기본 자세 확립은 그 분이 파견하신 이를 여러분이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 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의 기본 자세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지 한 번쯤 생각해 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까? 어려운 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믿음의 안정과 기쁨을 간직합니까? 온갖 비참과 고독, 패배 가운데서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즐거움과 희망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이 올바르지 않다는 표시입니다. 무언가 우리의 믿음이 잘못 되었기에 믿지 않는 이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듯 합니다.

  

잘 아다시피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믿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 중에는 믿어서는 안 될, 믿을 수 없는 대상을 믿는 미신이 많습니다. 푸닥거리, 궁합, 사주팔자뿐만 아니라 국회위원 입후보자가 당락을 알고 싶어 점장이를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업가들은 운명 철학가들과 상의하여 사업문제를 처리하고, 현대인들은 은연중에 과학만능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의 가장 큰 미신의 대상은 돈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돈 앞에 무릎을 꿇고 쩔쩔매는 꼴을 오늘 솔직한 세상살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린애로부터 팔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 돈」하며 돈 때문에 양심을 팔고 애인을 죽이는 세상이니 어찌 이것이 인류의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이 허깨비 같은 돈을 위해서 귀한 삶을, 생명을 송두리째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믿음의 모든 대상은 절대적 인격을 갖추지 못했기에 우리의 궁극 염원을 성취시켜줄 수가 없습니다. 허무맹랑하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밝혀 주지 못하는 대상에게서 인간은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럼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참된 믿음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응답으로서, 하느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사랑의 관계를 알고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소리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교훈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파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다면 기도를 통해서 그분과 생생한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분의 교훈을 우리의 삶에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군중이 믿을 수 있게끔 예수께서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 말씀의 타당성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 믿음을 갖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사도 바울로처럼 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내 맡기고 그 분의 부르심, 그 분의 사랑에 응답, 보답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믿음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행복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기본자세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부족한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북돋아 주시길 미사 중에 간청합시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18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김영남 신부



[오늘 8월 6일은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이지만, 이 축일의 복음에 대한 묵상은 지난 사순 제2주일에 이미 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오늘은 순서에 따라 연중 제18주일의 복음말씀을 묵상한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결국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 같은 지상적 삶의 無常함과 죽음의 냉엄함을 의식하면서 들을 때 그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사순 제 1주일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빵, 음식에 대한 굶주림만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굶주림도 있다.

아무리 의식주가 보장되어 있고,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인생은 허망하게만 보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참 생명’에 대한 갈증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왜 사는가? 잘 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가? 과연 잘 먹고 잘 쓰고 잘 노는 것만이 우리의 인생을 의미있게 하는 것인가? 그런데 결국 인생은 죽어 썩는 것으로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데 세상에는 이 갈망을 채워줄 것 같은 많은 손짓들이 있다. 여기 저기에서 “나를 가지기만 하면 당신은 인생의 참 의미를 얻게되고 행복해 질 수 있다”라며 손짓하고 있다.

 ‘돈’, ‘권력’, ‘명예’, ‘성적 쾌락’ 등이 바로 그 대표적 예들이다.

이런 손짓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기도 한다. 이런 손짓들을 배경으로 삼고 들으면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은 더욱 강하게 우리 마음에 다가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 이 말씀은 경고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력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결국에 가서는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추구요, ‘바람을 잡으려는 듯한’ 허망함에 대한 추구가 아닌지 반성하게 하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오늘 복음 말씀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 물질적 재물에 대한 염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 지상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런 것들은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예수께서 생각하셨다면 ‘빵을 많게 하여 군중을 배부르게 하는’ 기적같은 것은 행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물질적 재물에 대한 염려가 가족의 생계라든가 남을 돕기 위한 염려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랑의 실천’의 차원에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말씀은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만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경고의 말씀이다. 그들의 삶이 결국 “썩어 없어지고 말” 허망한 것에 대한 추구로 끝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말씀은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고 참 생명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며, 그분 자신이 “생명, 생명의 빛,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대한 믿음을 통해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면 참 생명을 갖게된다고 선포한다.



이 참 생명은 먼 훗날, 죽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이미 현재에 시작될 수 있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매우 강조한다. 참 생명이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살 때 이미 시작되며, 이렇게 시작된 생명은 죽음의 문을 넘어설 수 있고, 종말 때에 완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믿음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 매우 주목할 만한 말씀이 또 하나 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이런 하느님의 일은 건강하거나 젊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이나 늙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른 바 성공했다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마저 많은 사람들이 “나는 늙고 병들어서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하며 하소연하곤 한다.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늙고 병든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여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 준다.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외적인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분들의 그런 “일들”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처지에서라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어 자기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하느님을 더 의지하고 살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더 강해지고,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더 약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 세상의 삶을 다 마치고 하느님께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모두 “믿음” 속에 머무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19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16,2~4.12~15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주리라) 

제2독서 에페 4,17.20~24 (여러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복 음 요한 6,24~35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사람은 살기 위해 먹지만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인간은 죽습니다. 어쩌면 먹는 것만큼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썩어 없어질 빵은 우리도 역시 썩어 없어질 존재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감히 소망이 있고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했던 일도 따지고 보면 '생명의 빵'의 문제였으며 부자들이 다투어 먹는 보약도 역시 생명의 빵과 깊은 연관이 됩니다. 그러나 흙에서 온 빵은 결국 인간을 흙으로 인도 할 뿐입니다. 아무리 비싼 것을 먹고 아무리 귀한 음식을 먹는다 해도 그것은 잠시요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은 대단히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할 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 만나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만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있으나 그것이 비록 어떤 벌레의 배설물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하고 자랑하며 대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과연 무엇을 줄 수 있느냐면서 빈정거렸는데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의 빵은 만나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드디어 유사 이래로 인류가 찾았던 생명의 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하느님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으며 인간은 이제 그 음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몸 이 생명의 빵입니다. 사람이 어째서 빵이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먹느냐 하는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논란의 시비가 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생명의 빵이 그리스도의 성체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성체야말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생명의 빵이요 예수님 자신입니다. 인간은 이 빵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또 이 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빵이 되어 우리를 찾아 주시는 그 은혜에 깊이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 감사의 첫째 방법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밥이 되고 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먹히러 오셨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먹힐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체의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공직자 재산 공개를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이 먹어 왔나 하는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체험했습니다. 나라의 공복으로서 청렴 결백하게 살았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직권을 이용하여 대다수가 자기 이익만을 챙겼습니다.



어떤 자는 집을 수십 채나 숨기고 있으면서도 퇴직 후의 전세방을 걱정하는 능청을 떨었다니 그 인격과 직위가 참으로 아까웠습니다. 세상은 지금 무엇을 먹고 또 얼마나 많이 먹느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배만 채우려는 이기주의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망치고 있습니다. 불량식품 남발이나 공장 폐수 유출 사건 등에서 보듯 남이야 어떻든 자기만 배부르게 잘살겠다는 이기주의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이처럼 물질 이기주의도 병이지만 그러나 정신 이기주의도 똑같은 악입니다.



어떤 형제가 있는데 보기에 참으로 열심합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봉사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점은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늘 자기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기 때문이며 또 자기 판단만이 최고요 다른 사람들은 다 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 식대로만 살고 자기 식대로만 봉사하고 열심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빵'의 의미를 깨닫고 성체의 삶을 실천 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봉사를 잘하고 그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그가 정말 성체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위선이요 모순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빵으로 내주셨다면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함께 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실제로 남을 '잡아 먹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혼자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불행합니다.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잡아 먹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혼자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행복합니다. 주님이 바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생명의 빵이 되도록 합시다.









20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기적이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김선태 신부



많은 사람들은 먼저 기적을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거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혹은 소경이 갑자기 볼 수 있다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기적이 먼저이다. 믿음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이런 기적들을 먼저 체험한 다음에 사람들이 하느님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ꡐ부자와 라자로ꡑ의 비유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ꡒ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ꡓ(루가 16,31).



복음은 믿음이 먼저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 ꡐ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ꡑ을 보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ꡒ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ꡓ(마태 14,16) 하고 말씀하셨다.



믿음에 의한 행동을 먼저 요구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믿음이 우선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대로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부족한 능력과 재력 등을 과소평가하며 그렇게 행동하기를 주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ꡐ그 작은 것으로 시작하라. 하지만 믿으면서 행동하라. 그러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ꡑ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다.











21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나) 하늘의 빵





  오늘 복음의 말씀은, 결국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 같은 지상적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냉엄함을 의식하면서 들을 때, 그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사순 제1주일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빵, 음식에 대한 굶주림만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굻주림도 있다. 아무리 의식주가 보장되어 있고,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인생은 허망하게만 보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참 생명」에 대한 갈증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



  왜 사는가? 잘 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가? 과연 잘 먹고, 잘 쓰고, 잘 노는 것만이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인가? 그런데 결국 인생은 죽어 썩는 것으로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데 세상에는 이 갈망을 채워줄 것 같은 많은 손짓들이 있다. 여기저기에서 “나를 가지기만 하면, 당신은 인생의 참 의미를 얻게되고 행복해 질 수 있다”라며 손짓하고있다. “돈, 권력, 명예, 성적 쾌락” 등이 바로 그 대표적 예들이다. 이런 손짓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기도 한다.



  이런 손짓들을 배경으로 삼고 들으면,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은 더욱 강하게 우리 마음에 다가온다:「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 이 말씀은 경고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력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결국에 가서는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추구요, 바람을 잡으려는 듯한 허망함에 대한 추구가 아닌지 반성하게 하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오늘 복음 말씀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 물질적 재물에 대한 염려 그 차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 지상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런 것들은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예수께서 생각하셨다면「빵을 많게 하여 군중을 배부르게 하는」기적 같은 것은 행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물질적 재물에 대한 염려가 가족의 생계라든가 남을 돕기 위한 염려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근본 가르침인「사랑의 실천」의 차원에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말씀은,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만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경고의 말씀이다. 그들의 삶이 결국 썩어 없어지고 밑 허망한 것에 대한 추구로 끝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말씀은,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많을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 후 극복하고 참 생명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며, 그분 자신이「생명, 생명의 빛,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대한 믿음을 통해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면, 참 생명을 갖게된다고 선포한다. 이 참 생명은 먼 훗날, 죽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이미 현재에 시작될 수 있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매우 강조한다. 참 생명이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살 때 이미 시작되며, 이렇게 시작된 생명은 죽음의 문을 넘어설 수 있고, 종말 때에 완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믿음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 매우 주목할 만한 말씀이 또 하나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믿는 것이 하느님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이런 하느님의 일은 건강하거나 젊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이나 늙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른 바 성공했다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마저 많은 사람들이 “나는 늙고 병들어서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하며 하소연하곤 한다.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늙고 병든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여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 준다.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외적인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분들의 그런「일들」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처지에서라도「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어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하느님을 더 의지하고 살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하느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더 강해지고,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이 더 약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 세상의 삶을 다 마치고 하느님께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모두「믿음」속에 머무르려고 노력해야한다.



  0
3500
   
 N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6     나해 연중 제 1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7-17 4150
  5        나해 연중 제 18주간 평일 강론 모음 평일강론 모음 2009-07-29 3596
  4     나해 연중 제 1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7-17 4188
  3     나해 연중 제 1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7-17 4570
  2     나해 연중 제 1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7-04 4571
  1     나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9 359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