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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5:57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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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나해 연중 제 16주일

       12. 김영남 신부(나)/23

        13. 강길웅 신부(나)/25                14. 빵과 물고기의 기적(나)/27

        15. 이상복 부제(나)/29                16. 한의수 신부(나)/31

        17. 조순창 신부(나)/32                18. 교구 주보(나)/34

        19. 윤 바실리아 수녀(나)/35          



12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나)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

                                                          김영남 신부



전국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까지 여름방학에 들어갔으니, 이제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곧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바다로 그리고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또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여행을 떠날 수 없어 마음 아파하기도 할 것이다. 



마침,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여러 곳에 흩어져 맡은 임무를 다 마치고 돌아 온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 말씀은 피곤하니 좀 쉬자라는 뜻으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음서 전체를 보면, 특히 열두 제자의 ‘파견’과 ‘귀환’이라는 틀 안에서 보면,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활동’과 ‘쉼’의 관계를 말해주는 의미 깊은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 이제 좀 더 깊이 살펴보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그 일행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거의 폭발적이었던 같다. 그러나 이런 민중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군중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제자들과만 “따로 한적하게” 계시려고 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그렇게 하는 것은 군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시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오늘 복음 말씀의 끝 구절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 몰려오는 군중의 상태는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데도 말이다. 불쌍한 처지의 군중들을 저버리신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끝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님의 ‘떠남’은 불쌍한 백성을 더 잘 돌보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사도들은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왔다.

사도들의 삶의 출발점이자 귀환점, 곧 그들 삶의 중심은 주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활동’이 그랬던 것처럼, ‘쉼’ 또한 ‘예수님과 함께 쉬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사도적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사도적 활동의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주님과의 친교에 있다.



그리고 마치 샘물이 고일 시간도 없이 계속 나누어 주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고갈되게 마련이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시원하고 맑은 영적 샘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라도 때때로 ‘침묵과 기도 속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목자없는 양떼 같은’ 백성에게 파견되기 전과 후에 사도들은 그런 백성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측은해 하시는 예수님께 돌아와 머물면서 그분의 ‘성심(聖心)’을 배워야 했다.



바쁜 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주일미사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주일이 되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한 주간의 복잡한 삶을 잠시 뒤로 미루고 주님께로 달려와 신앙의 형제자매들과 만난다.

함께 주님의 말씀을 고요히 들으면서, 우리의 삶이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삶의 방향감각을 되찾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을 모심으로서 세상을 살아 갈 영적 양식을 얻는다. 그렇게 될 때, 주일 미사 시간은 ‘의무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또 하나의 ‘짐’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 앞에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와 새로운 힘을 얻고 가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활동’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고요 속에 주님과 함께 쉴 줄 아는 태도’는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시로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와 관련해 7월 11일에 우리가 기념하는 베네딕또 성인은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가르침을 교회에 남겨 주셨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곰곰히 생각할수록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신앙인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또는 신앙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나, 기도가 동반되지 않는 활동은 순수성을 잃기 쉽다. 그리고 쉽게 지친다. 그러기에 교회적 활동은 늘 기도에서 출발하고, 기도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베네딕또 성인은 ‘일하라!’는 가르침도 잊지 않으셨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형식에 흐르기 쉬우며, 형식적인 기도는, 위선적인 종교생활로 이끌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한적한 곳으로 가 함께 좀 쉬자”는 말씀을 듣고,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분들이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가정 안에서도, 직장 생활하면서도 의지만 있다면 ‘주님과 함께 쉴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쉼’은 없다. 사실, ‘휴가’(여행) 자체가 홀가분하게 떠나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의무’가 되고, ‘고요 속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만 잔뜩 쌓이는 또 하나의 피곤한 ‘일’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무더운 여름이지만 집에 있든, 여행을 떠나든 모든 교우들이 ‘주님 안에서 고요히 쉬면서’ 자연의 소리도 듣고, 이웃의 소리도 들으며,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지기를 기원한다.









13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나) 이 시대의 희망이 성직자에게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23,1~6 (양떼를 모아 들여 그들을 위하여 참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제2독서 에페 2,13~18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야말로)

복 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성서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비유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등장합니다. 먼저 야훼 하느님은 목자요 이스라엘은 그 양떼로서 묘사됩니다. 모세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40년 동안이나 들에서 양치는 목자였고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백성의 목자였습니다.



나라의 왕들과 지도자들도 성서는 또 목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본래는 예루살렘의 촌뜨기 목동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일약 나라의 왕이 되어 가장 위대한 목자로서 그 빛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부분의 왕들은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치 못해서 번번이 하느님의 눈에서 벗어나곤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마저 타락된 왕의 체제하에서 편하게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그들 모두를 질책하고 경고한 것은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악한 왕들과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순전히 목자들의 탓이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실망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제 다윗의 후손에게 정통 후손을 일으키시겠다는 언약을 하시면서 메시아를 예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의 모든 기대는 새로운 목자를 기다림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양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목자로서의 임무를 태만히 하고 제 이익과 편함만을 고집한다면 양들은 죽게 됩니다. 그리고 양들의 멸망은 곧 목자 자신의 사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진정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목자답게 살 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목자의 직책은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의미가 있습니다.



목자는 실제로 그 직책 자체가 고달픕니다. 제 때에 밥을 먹지도 못하며 밤잠을 설치는 것이 다반삽니다. 이리나 맹수들로부터의 공격을 경계해야 하며 길 잃은 양이 있으면 찾아 나서야 하고 아픈 양이 있으면 손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목자는 그래서 인정이 많은 자라야 합니다. 불쌍하면 연민의 정을 가지고 동정할 수 있는 자가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된 목자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실로 '참된 목자'로서 오신 분이며 구약에서 예고했던 다윗의 정통 왕손으로서 메시아로서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실로 여느 왕과는 달랐으며 또한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위에서 군림하며 자신만의 부귀 영화를 누리는 썩은 목자가 아니라 오히려 밑에 내려가서 불쌍한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는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종교인들은 먼저 가난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난하지 않고는 절대로 가난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종교인들은 또한 땀흘리고 수고하는 노력을 나날이 체험해야 합니다. 자신이 고생해 보지 않고 또한 자신이 땀 흘려 보지 않고는 절대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그런 진정한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골의 많은 신부님들이 농민과 어부들과의 삶을 진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가난한 본당과 공소를 돌아보기도 어려운데 도농간 직거래 운동으로 농산물을 차에 싣고 밤에 서울로 올라가서 새벽에 내려오기도 합니다. 식사를 제 때에 못하는 경우도 많으며 고생은 뼈 빠지게 해도 영육간의 소득은 또 극히 적어서 설움이 클 때도 있습니다.



도시에도 가난하게 살면서 고생하는 신부님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또 큰 도시에 의외로 많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신부님은 부자 본당에 계신데도 지극히 가난하십니다. 당신의 물질적인 것은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실제로 노동 현장, 빈민가에 뛰어들어 그들과의 삶을 진정으로 나누고 계십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은 그래도 여전히 밝고 환하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오늘의 희망은 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우리 가톨릭 성직자들의 거룩하고 밝은 삶에 그 미래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자매가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독신 사제들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라고. 사실 오늘의 이 시대야말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은 지금 영적인 생수를 애타게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 몫을 해결해 줘야 하는 임무가 바로 성직자들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서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힘도 성직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다면 의인이야말로 세상을 건지는 도구요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직자들을 위해 기도해 줘야 합니다. 그들도 실은 약합니다. 그들도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혼자 일어서고 혼자 걸어가기에는 힘이 벅찬 것이 사실입니다. 기도와 희생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14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나) 빵과 물고기의 기적



오늘 복음 성경의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사흘씩이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왔겠지만, 첫날에 다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함께 있는데 열중한 나머지 배가 고픈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주께서는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일을 하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주께서는 군중들 사이를 걸어다니시면서 그들의 개인 사정도 들으시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시며 위로의 말씀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 각자는 주님과 일대일로 이야기하였을 것이고 그들도 이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배고픔보다 더 심각한 굶주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굶주림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굶주림이요, 진리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모시고 있음으로 해서 육체적인 배고픔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함으로써 그들은 마음의 욕구를 완전히 만족시킨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영혼과 육신으로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께서는 이 사실을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군중이 사흘씩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먹을 것이 없으니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께서 이러한 자비심으로 사람이 되셨고 또 이 군중을, 빨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시어 배불리 먹이셨음을 들었습니다. 군중이 모여 있지 않고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주께서는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각 사람은 주께 귀여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육신과 영혼을 다 배불리 먹이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살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지금 여기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곁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침밥을 안먹어서 배고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 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신의 굶주림은 때로는 육신의 굶주림보다 훨씬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신의 굶주림이란 간단히 말해서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원합니다. 우리는 정신의 평화를 원합니다. 이것을 잃을 위협이 없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고통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의의도 없어 보이는 우리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목적이 있는 것임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를 원합니다. 해묵은 문제들, 인생의 신비를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여기 모이는 것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겠으나, 하여간 어떤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 까닭입니다.



옛날에 팔레스티나에서 군중들이 들었던 주님의 말씀이 오늘 아침 우리 귀에 울려오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울려오고 있습니다. “이 군중이 사흘씩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먹을 것이 없으니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만일 이들을 빈속으로 집에 돌려보낸다면 도중에 지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이들 중에는 먼 데서 온 사람도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사람으로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십니다. 주님도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몹시 필요한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실지를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시니만큼 우리에게 대한 동정심과 자비심으로 불타고 계십니다.



주께서 자비심으로 육신을 취하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팔레스티나에서 주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복하시어 기적적으로 많게 하신 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주께서는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미사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는 먼저 독서와 복음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독서”는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한 실천적인 지침입니다.



예컨대 오늘 독서는 우리가 성교회의 회원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세 때 그리고 금년의 부활절을 전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살기 위해 죄에 영원히 죽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과 같은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즉 구원 사업하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수고와 걱정과 그리고 죽음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을 도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다음 빵과 포도주를 드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수고와 고통, 우리 존재 전체를 대신하는 우리의 선물입니다. 주께서는 이것을 축복하시어, 축성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 다음에 이것을 다시 우리에게 음식으로 돌려 주십니다. 우리 영혼과 우리 육신, 인간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위한 음식으로서 우리에게 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먹은 다음 우리를 돌려 보내십니다. 주님을 모신 자로서 일상 생활을 하도록 우리 가정과 직장과 사도적 사업에로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오 기름 발린 자에게 구원의 성이십니다. “주여, 당신 백성을 구하시고, 당신 유산에 강복하시며, 저들을 영원히 다스리소서. 주여, 당신께 부르짖으오니, 내 천주여, 못들은 체 마옵소서. 나에게 말씀이 없으시면 이 몸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 같으오리다.” 그리스도께서 간단없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 미사가 우리의 이 기도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십니다.



15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나) 예수님은 착한 목자 

                                                              이상복 부제



오늘 제 1독서에서 예레미아는 멸망으로 이끈 유대아 왕들을 책망하시면서, 양떼들을 모아 다시는 헤매이게 버려두지 않을 진실한 목자의 오심을 예고하십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원역사의 동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된 이 진실하고 참된 목자는 피를 흘리고 끝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서 멀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성교회는 마르코 6,30-34의 말씀을 봉독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의 서문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ㅁ인 군중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신 후 양쪽으로 앉히시고, 새로운 모세로서 그들을 먹이시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마르코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예레미아가 예언한 그 진실한 목자이시며,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해 주신 분입니다. 또한 2,000년 전에 유대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죄가 없으시면서도 무참하게 십자가형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아니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어 영생의 길을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우리에서 생명을 유지해 가는 양들입니다. 즉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분만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양들인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의 내용입니다. 말씀 내용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착한 목자로 모시는 우리 양들의 태도에 대해서 묵상해 보기로 합시다.

77년도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역 앞 구름다리를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다리 위 한길 모퉁이에 다 헤어진 옷을 걸친 거지 하나가 손을 내밀고 처량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올라가던 여고생이 동전 한 잎을 그 거지의 손에 놓으면서 “아저씨,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세요” 말하였습니다. 저는 가슴이 뭉클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거리에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은 외쳐지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그 거지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가시나도, 돈만 주고 갈 것이지 웬 놈의 예수야! 또 사랑은 뭐야! 지가 나를 사랑하겠다는 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외쳐야 할 저로서는 정말 치명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거지의 입에서 뇌까려진 목소리는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세이나 율법학자 권력가들 정치가들에게 뿐 아니라 이제는 거지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구나! 가난하고 없는 자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했던 그분은 그네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한 불쌍한 분이 되고 말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복잡한 서울역을 빠져 나왔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지에게 뿐 아니라, 1분 1초를 따져 가면서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버림을, 배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분의 양떼인 우리들에게까지도 버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세로 그분의 우리 안에서 살게 된 우리도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그분을 배척하고있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에 현혹되어 그분을 위해서 주일미사 30분도 할애하려고 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우리 안에서 생명을 유지해 가는 양들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분이 없으면 망망대해에 나부끼는 한 척의 종이배임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양들입니다. 그분의 생명을 먹고사는 피조물입니다. 그분을 떠나면 더욱더 자유로울 것 같지만, 물을 떠난 물고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형제가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떠나 그 보호에서 벗어날 때, 이리나 승냥이의 밥이 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도 그 분을 떠난다면 영원한 죽음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 우리 안으로 인도하신 이상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풀밭을 떠나지 않는 것이 양들이 취할 분명한 태도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풀밭에서 평화와 기쁨을 맛보면서 살아갑시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착한 목자이심을 확신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행복한 아들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분을 믿고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립시다. 아멘.













16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나) 하느님의 자녀들

                                                    한의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승이 가르쳐 주신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목자없는 양과 같은 군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 기록한 바와 같이 “나의 목장의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자들에게 양화로다. 나는 그들 위에 목자를 세우겠노니 이들이 그들을 기르리라. 이에 그들이 다시는 무서워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으며 편안히 살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끌어주시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빛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제 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분이 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게 되어 하느님과도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여러분과 우리 유대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같은 성령을 받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소 2,13.18)



알렐루야에서는 요한 복음을 인용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 즉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도 그들을 알아보노니 그들은 나를 따르리라”는 말씀을 다시 들려줍니다. 그리고 마르코에 의한 오늘의 복음에서는 주께서 길 잃은 양과 같은 불쌍한 백성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음을 들려줍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서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치심을 잘 따라 유혹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진정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바른 길이요 힘을 돋구어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우리 마음에 굳은 신앙을 되새기며 우리에게 주신 일을 충실히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아 이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는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고아가 있습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사람도 있지만 부모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도 고아로 자라야하는 가엾고 딱한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 없는 측은한 양” 어느 누구 돌보아주는 사람 없어 병들면 죽어야 하고 사나운 짐승에 발견되면 잡혀 먹히며 가뭄이 오면 굶주리고 추위가 오면 땅 속을 찾아야 하는 측은한 양입니다.

‘행복한 가정’ 거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귀여운 자녀들이 재롱을 떨며 자라고 있습니다. 이 귀여운 자녀들과는 달리 눈초리나 엿보고 먹을 것이나 찾으며 부모의 사랑이란 받아보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고아’요 고독하며 생기없는 측은한 아이들입니다. 성세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서 주교나 신부 수도자들이 부모로서 자녀인 우리를 돌보아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외로운 고아가 아니라 생기있게 뛰놀며 자라나는 귀여운 자녀입니다. 외롭고 측은하며 힘없고 연약한 아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매일 늦잠 때문에 부모에게 매맞아 가며 일어나고 제 얼굴하나 씻을 줄 몰라 항상 어머니가 씻겨 주어야 하며 공부하나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부모에게 말썽을 부려 가정을 소란시키는 못난 자녀 측은한 양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되겠습니다.











17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나) 남이야 어떻든지, 나만 잘 살면 그만인가

조순창 신부



복음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그 동안에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아뢰었을 때에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나와 함께 좀 쉬도록 하자.”고 말씀하시고, 한편 예수님을 뵈오러 먼 길에 모여든 군중을 보시고는 마치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고달픈 인생살이에 힘겨운 짐을 잠시 벗어 놓고, 예수님과 함께 쉬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축복을 받으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오늘, 교우 여러분께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첫째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자기가 맡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내 양떼인 이스라엘 민족을 잘 돌보아야 할 텐데, 도리어 양을 흩어져 헤매게 했으니, 벌을 면치 못할 것이며, ‘장차 착한 목자를 세워,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살 길을 열어, 마음놓고 살게 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에제키엘 예언서 34장 2절 이하에서도 같은 경고를 하십니다.

“주 야훼가 말하노니, 너희는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 목자들아! 너희가 양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은 먹으면서 양은 돌볼 생각도 않으니,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 가운데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우어 주어야 하고, 아픈 양은 고쳐 주어야 하고, 상처입은 양은 싸매어 주어야 하며, 길 잃고 헤매는 양은 찾아서 데려와야 할 텐데, 그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양들만 못살게 굴었을 뿐만 아니라, 양들이 흩어져 야수에게 잡아먹히고, 높은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양을 돌보아야 할 처지에 제 몸만 돌보는 이는 누구입니까? 양은 돌보지 않으며 젖이나 짜 먹고, 털이나 깎아 따뜻하게 옷이나 해 입고, 살진 놈은 잡아먹는 이가 누구입니까?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에 사로잡힌 이가 바로 그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채우는 이가 바로 그요, 노력하지 않고 단 열매만 먹겠다는 게으름뱅이가 바로 그입니다.



위정자는 국민을, 교육자는 학생을, 사업가는 근로자를, 부모들은 자녀들을 목자답게 제 몸 위하듯 헌신적인 정신으로 살피고 있는지? 깊이 반성하고 회심해야 불행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는 나의 목자이시오,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심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기에, 암흑 속에 길 잃고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린양인데, 하느님 뜻을 배반함으로써 죄를 범하여, 상처입은 양이기도 하고,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와 선공이 부족하므로, 허약한 양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교훈과 양심을 따르자니, 이 사회 현실은 너무나 상극이어서, 고민하며 방황하는 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뜻있게 사는 길이시니, 그릇된 길을 가지 말아야 하고, 예수님은 진실하시고, 그분의 교훈이 모두 진리이니, 잠시의 이익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는 일이 없이 진실되게 살아갈 때에 오늘이 복되고 평화로우며,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야훼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항상 지켜 주시며, 주님 축복으로 영육간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느님 뜻 따라서 맡은 일을 충직한 종같이 다하기에 요긴한 능력을 주옵소서. 아멘.”













18         연중 제16주일   마르 6, 30-34 (나) 가서 좀 쉬도록 하시오

교구 주보



1. 복음이야기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신 후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마르 6,7-13). 이제 제자들이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그들이 행하고 가르친 것을 모두 예수님께 보고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도록 하시오”라고 권하십니다. 제자들은 몰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먹을 겨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물러갔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이 이를 알아채고 달려오는 바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또다시 군중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군중들은 예수님과 제자들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많은 군중을 보고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군중들이 목자 없는 양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백성들을 마치 목자 없는 양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어진 목자로 오셔서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많은 군중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끼시면서 온 정을 쏟으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또다시 그들을 여러모로 가르치고 주린 배를 채워주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시면서도 틈을 내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피정). 예수께서는 전도여행에 지친 제자들에게도 조용한 곳으로 피해서 좀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일하는 것 못지않게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 하루 동안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일(마르 1,21-39)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밤에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시는 나날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떼 같은 군중들에게 어진 목자로 다가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들은 어진 목자로서 백성들을 찾아 위로하고 상처 입은 이를 감싸주고 길 잃은 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보다는 백성들을 지배하고 억누르곤 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백성들에게 어진 목자로 다가가셔서 그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직자들 역시 교우들을 지도하는 관리자의 모습보다는 소리없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목자의 모습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교우들과 어울리는 사목활동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한적한 곳에서 하느님과 만나 기도로써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9           연중 제16주일   마르 6, 30-34 (나) 七日夢 이야기

윤 바실리아 수녀



지난 부활대축일이었습니다. 아흔이 넘은 선배수녀님께로부터 수박색 매듭묵주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  연세에도 쉬지 않고 일일이 장미 모양으로 손수 엮어 만드신 그 묵주는 보기에도 기도의 염(染)이 가득 배어있었습니다. 저는 그 귀한 묵주를 자리묵주(잠자기 전에 기도하는 묵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묵주를 선물 받으면 먼저 그 묵주를 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그 날 밤, 그 선배수녀님을 생각하며 묵주를 들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글쎄, 그 묵주에서 장미향기가 그윽하게 퍼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서 묵주를 코에 가까이 대보았지만 장미향기가 틀림없었습니다. 순간 성호를 긋고 방바닥에 엎드려 떨리는 가슴을 억제시키느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평소에 묵주기도를 게을리했더니 이렇게 징표를 보여 주시는 걸까?” “아냐, 워낙 열심한 수녀님께서 만드신 묵주라 장미향기까지 나는 걸까?” “아냐, 은총은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나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일까?”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도 묵주알은 계속 굴리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저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날이 가도 장미향기는 여전했습니다. 저는 밤마다 황홀경에 빠져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습니다. 특급비밀이라 함부로 이야기 할 수도 없고 혼자 고민을 하던 중, 일주일이 되던 날, 친구수녀님을 은밀히 불러 조용조용 이야기 했습니다. “수녀님, 나 이상한 게 하나 있어. 자리묵주에서 장미향기가 나” “어머 그래?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조심스럽게 제 귀한 묵주를 만져 본 친구수녀님 왈! “에이, 이거 피죤 냄새잖아”

  묵주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실을 피죤에 담갔다가 만든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저는 비로소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야말로 칠일몽(七日夢)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 코엔, 제 가슴엔 장미향기가 여전히 남아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미움도, 불의도, 고통도, 어둠도, 가난도 없는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주님께서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현실적인 모습으로 찾아와 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설마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닥칠까?” “착하게 잘 살려고 노력했는데 하필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렇게 내가 만든 그릇에 그분을 담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 그분께서 시원하게 말씀이라도 해 주시던가요? 아니면 무슨 뚜렷한 표징이라도 보여 주시던가요? 저의 주님은 언제나 침묵으로 계십니다. 때론 보고 싶다고, 때론 느끼고 싶다고, 때론 듣고 싶다고 투정을 해도 대답은 늘 한결같습니다. 이제 장미향기의 환상에서 깨어나, 십자가의 그 깊은 침묵을 통해 참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오늘 따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라는 제2독서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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