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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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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8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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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4주일



7. 심용섭 신부 (나) / 13        8. 이한기 신부 (나) / 15

9. 김정진 신부 (나) / 16        10. 백명기 신부 (나) / 18

11. 최영철 신부 (나) / 20       12. 민병섭 신부 (나) / 22

13. 김성배 신부 (나) / 26       14. 결혼을 뛰어넘는 (나)/ 28

15. 강길웅 신부 (나) / 30       16. 이성우 신부 (나) / 31

17. 황철수 신부 (나) / 33       18. 교구주보 (나) / 34

19. 최인호 작가 (나 )/ 35       



7.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심용섭 신부



성모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평범하게 사시던 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하여 약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루가 1,27)

그런데 어느날 은총을 가득히 받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인사를 받게 되었다. 친구로부터 그런 인사를 받았다면 별말을 다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인사를 받고는 ꡒ뭘요ꡓ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ꡒ이제 팔자 고치겠구나ꡓ또는ꡒ운수 대통하겠구나ꡓ하고 기뻐 날뛸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천사의 말씀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분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가브리엘 천사가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그 천사가 나타났으니 성모님은 평정을 잃었다. 상식이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난 전혀 예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천사의 첫마디 인사에, 그때까지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새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사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계속 생각하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을 뵈올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떨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하도 끔찍하고도 엄청난 일을 많이 겪어서 떨릴 만큼 큰 충격을 받을 수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남이 겪는 공포의 사건조차 동감하기에는 우리 마음이 너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두려움을 공포와 동일시하고 피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스러움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유물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려워할 만큼 하느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으면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시는 분은 하느님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거두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덕성스런 두려움도 잃고 인간이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니까 혼란한 것이다.



사실 당황하는 마리아를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진정시켰다.

은총이 가득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인사에 왜 그렇게 당황하셨을까.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은총을 받으면 딴 사람이 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출애 3,12) 무력을 믿던 평범한 인간의 자세를 버려야 했다. 이런 변화는 기드온(판관 6,16)이나 사울(Ⅰ사무 10,7), 예레미야(예레 1,8)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은총을 복잡하게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곱게 보고 함께 계신 것을 말한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재력, 권력, 지력 등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은총을 인간적으로만 좋아할 수는 없다. 마리아도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예수라고 일컬어질 아기를 낳게 될 것과, 그 예수가 영원하다는 점에서 세상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또 한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벗는 탈바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이 부르시는 대로 회개해야 했던 셈이다.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새로운 양식의 탄생은 인간의 상식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여쭈어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여쭈어 보는 것은 새로운 탈바꿈의 과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스런 상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과 예수를 낳고 그 예수의 미래에 관한 말씀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성취되었던 백성의 지도자 역할은 모세, 예레미야, 사울, 다윗(2사무 7,9) 등을 통하여 익히 알던 바인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자연을 뛰어넘는 사건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적인 인과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루가 1,37)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친절하게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느님의 기운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는데(Ⅰ사무 11, 7 이하, 판관기 여러곳에 나옴)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에 여러번 언급되는 야훼의 종을 연상시키는 고백으로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끝맺는다.



대림절을 끝내고 예수의 탄생을 곧 맞이하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여쭙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불편 없이 오시게 된다. 그 대화는 그 분이 오시는 길을 평평하게 한다.





8.          대림제4주일(나) 루가 1,26-38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한기 신부



이 세상에서 방관자로서가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할 바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오늘 복음말씀 중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마디를 우리는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적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 반성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금도 우리의 노력을 더하지 않고서도 하느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구경하려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에 대한 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이 땅의 공기로써 호흡하고 있는 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는 떼어버릴래야 떼어버릴 수 없는 필연적인 연관성을 갖고서 살아야 합니다. 식량문제, 인구문제, 경제, 문화, 사회문제들은 우리의 생활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나 자신과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모두 연관된 문제들이지만 나 자신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도 머리만 땅속에 파묻고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꿩처럼 이런 모든 심각한 문제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애써 변명이나 구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말씀 중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마디가 눈에 뜨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모든 문제들은 저의 미약한 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나이다. 주여!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우리는 겸손과 신뢰를 주님 앞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겸손과 신뢰가 위선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만약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보고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호되게 질책하실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진정으로 나의 이 미약한 힘으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이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말입니다.



신자 여러분! 그러나 너무 좌절하거나 실망해서 자포자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과중한 짐을 지워주시는 그런 가혹한 분이 아니십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신앙의 귀로써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음뿐이고 종교적으로 잘 훈련된 유태인의 눈으로 볼 때는 걸림돌밖에는 되지 않는 이러한 역설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당치도 않은 방법을 택하셔서 우리를 감탄케 하고 놀라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사랑하라. 그리고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배고파 울고 있는데 내가 배를 두드리며 먹고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먹는 음식에 유해색소나 담배꽁초를 넣어서 먹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서 탈취해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세상의 온갖 악이 사랑하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웃이 병들고 배고프고 추위에 떨지라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부패와 부조리와 사회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대응하여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이제 무관심에서 사랑으로 바뀌어져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지금 당장 내 옆자리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렇게 쉽사리 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주간도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우선 먼저 우리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보속하는 의미에서 이제까지 자칫 소홀히 해왔던 이웃사랑을 더욱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진정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는 신자가 됩시다.









 9.            대림 제4주일(나) 루가 1,26-38  예수탄생의 임박

                                                김정진 신부



신자여러분! 기쁘고도 즐거운 예수님의 성탄절도 한 주일 안에 지내게 되므로 바야흐로 문 앞에 다가온 감이 듭니다. 벌써부터 우리의 마음은 설레이고 우리의 가슴은 희망과 기쁨에 마냥 부풀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기꺼이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깊이 반성도 해야 되겠습니다. 아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또한 예수님을 영접할 자리도 마련하지 않고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불경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임박함에 대비하여 겸손하고 순종하는 정신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은 겸손되이 천주성부의 뜻을 따름으로 일관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고 순종하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겸손과 순종으로 일관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역시 겸손과 순종의 정신으로 이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성모마리아의 말씀과 태도에서 우리는 겸손과 순종의 길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모마리아는 정녕 우리의 모범이며 거울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38)라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종으로 자처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종으로서 한평생을 겸손되이 지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며 언제나 예수님의 그늘 속에서 숨어서 살으셨습니다. 겸손의 정신은 대림절에 있어서 우리가 닦아야 할 덕행인가 봅니다. 지난 주일에도 겸손의 극치를 이루는 세례자 요한의 저 유명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들메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요한 1,27).



성모 마리아는 겸손하실 뿐더러 또한 기꺼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순종하였습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따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정말 하느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고 성요셉과 결혼하였으며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전능하신 하느님과 온 인류와 함께 하시며 바쳤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하느님의 딸이었고 하느님께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따랐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모 마리아가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실 성모 마리아에게 겸손과 순종의 정신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 겨레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필연코 겸손과 순종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로서 일치하여 성모 마리아와 하늘의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주님의 오심을 애타게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같이 겸손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신앙과 충성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려 믿게 하였듯이 우리는 미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행복과 평화를 누리도록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천사의 말씀을 귀여겨 들으시고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뜻을 따라 생활하기로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구세주께서 오실 날을 눈앞에 둔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반성해보며 대림절의 정신에 입각하여 생활하였는지 살펴봅시다. 참회와 속죄의 마음으로 회개하여 죄의 사함을 받았습니까.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사랑을 실천하였습니까. 자비와 사랑의 구세주, 희망과 생명의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희생과 보속과 사랑의 실천으로 당신을 맞이할 것을 바라신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라(마태 10,4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도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마음과 정신을 정결케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이웃 사람에게 사랑을, 말로나 혀로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써 실천하는 자에게만 성탄절은 정녕 축복과 자비와 은총의 축일이 되리라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10.                대림 제4주일(나)  루가 1,26-38 주님을 맞이할 준비

                                                 백명기 신부



오늘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는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하루해가 지면 즐겁고도 경사로운 성탄대축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데 대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를 세례자 요한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근방을 두루 다니면서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강론을 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너희는 주의 길을 닦으라”고 광야에서 소리지른 것을 이사야 예언자는 7백년 전에 벌써 말했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원수가 어느 지방을 예방한다면 그 지방 주민들은 그 원수를 맞이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해 놓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데 우리의 준비는 어떠해야 합니까?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마음의 준비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마음의 길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주의 지름길을 곧게 하라”(이사야 40,3)고 하였습니다. 넓고 평탄하여 다니기 쉬운 길이란 대로이고 좁고 불편하고 다니기 어려운 길이 곧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름길은 빠르고 가까운 길인 것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대로를 돌아 천천히 오시려하지 않으시고 지름길로 빨리 오시려는 것입니다. 이 길은 마음의 지름길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받아들일 준비만 다 됐으면 조금도 지체치 않으시고 우리 마음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지름길을 가로막아 좁게 하고 통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온갖 사욕편정입니다. 온갖 부정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천하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지 말고 정욕을 누르고 정결하게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이 곧 지름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곧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깨끗한 지름길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골짜기를 메우라”(이사야 40,4)고 하였습니다. 골짜기는 모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게으르고 늘어지고 굳세지 못해서 덕행과 본분 완수의 빈자리를 뜻하는 것이니 우리는 더 한층 분발하여 마음의 골짜기를 만들지 말고 우리의 본분을 착실히 해나가야겠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각자의 본분을 게을리 했다면 그것은 마음의 골짜기가 생긴 것이므로 신자된 본분을 다함으로써 그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산과 언덕은 낮아지라”고 하였습니다.



산과 언덕은 스스로 높이기를 좋아하고 자만자족하여 마음의 길을 막음으로써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려고 하시나 높아서 오실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교만심과 모든 욕심을 버리고 겸손되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만 구세주께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지극히 겸손한 구세주를 맞이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또 죄 중에서 최초로 남긴 죄가 곧 교만한 죄인 것입니다. 이 교만한 죄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무섭고 혹독한 벌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길의 산과 언덕, 즉 모든 교만과 자만자족을 없애야만 겸손하신 구세주를 진심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오솔길은 곧게 트이고 험한 길은 평탄하여지라”고 말했습니다. 곧게 트이라는 것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순진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온갖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위선의 가면을 뒤집어 쓴 비뚤어진 마음씨를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라는 것은 온순하고 인자하여 자기의 억세고 거칠은 성격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즉시 분노하고 싸우고 원수 갚을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께서는 디도에게 보내신 서간에 “누구를 헐뜯거나 싸움질을 하지 말고 온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언제나 온유하게 대하도록 가르치십시오”(디도 3,2)하고 말함으로써 억센 성질을 고치도록 교훈하였습니다. 양순하신 구세주를 맞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온순한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성탄대축일에는 보통으로 많은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합니다. 그러나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은총을 충만히 받는 이는 비교적 적으니 그 이유는 준비가 부족한 점에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모든 허물을 고쳐 영혼의 게으른 골짜기를 메우고 교만의 산과 언덕을 무너뜨리고 구부러지고 억센 성격을 고치기를 크게 결심하지 않은 탓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고쳐야 할 결점은 영신생활의 게으름의 골짜기와 교만의 산과 언덕과 굽고 거칠은 성격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살펴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로써 이 모든 결점을 고치도록 각별히 노력합시다. 이렇게 되면 “이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꼭 들어맞게 될 것입니다.











 11.          대림 제4주일  (나)    신앙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최영철 신부  



인격적 만남인 응답



오늘 주일의 분위기는 온통 메시아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느님의 역사하심의 메시지이다. 루가 복음사가는 메시아의 탄생과 예고를 부르심과 응답의 형식을 통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의 내용을 하느님의 부르심과 성모 마리아와 응답이라는 형식을 취해서 그런지, 다분히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와 메시지 전달 즉시 성모마리아의 거부, 그리고 나서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 그러는 사이에 성모 마리아의 경청, 그리고는 응답의 순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주 대화적히고 인격적 만남의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아 예고와 잉태, 성모 마리아의 현실적인 불가능성(남자를 모르는 처녀),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설명, 성모 마리아의 응답적인 순명, 이렇게 구성되어져 있다.

우리는 이 성서 말씀에서 그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신앙적 응답을 볼 수 있다. “나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소서"가 바로 그것이다. 신앙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본보기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성모 마리아의 신앙적 순명을 당연하고 아름다움으로 볼지는 몰라도, 그러한 신앙적 응답은 나하고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가 일쑤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신앙적 가치와 현실적 가치를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이 모인 공동체에서는 신앙인이고, 비신앙인의 공동체에서는 비신앙인이 되고마는 이중 구조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탄하고 단죄하고자 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이원론적 삶이 아니라는 데 그 초점을 맞추자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신앙 따로 현실 따로"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뜻이다. 그것은 신앙적인 영역과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영역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처녀이기 때문에 잉태할 수 없다는 현실은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인간의 기우일 뿐이다. 즉 현실적인 것도 인간의 능력과 판단 그리고 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성모 마리아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의 응답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단지 하느님을 믿기에 이룰 수 있는 하느님에게로의 투신인 것이다. 진정한 현실적 가치는 신앙적 가치에 의해서 도리어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앙 따로 현실 따로



어느 날 어떤 형제가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1시간 30분 동안 했다. 나는 1시간 30분 동안 한 마디도 안하고 듣기만 했다. 내용인즉 자기는 성서, 말씀대로 살고 싶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고 싶은데, 자기의 직장생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장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올바른 삶을 위해서는 부적합하고 힘들다는 것이다.



자기의 직장 상사의 부조리, 그것을 모른 척하자면 자기도 그 부조리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는 올바로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물었다. 어디서 당신의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느냐고 했다.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자기 친구에게, 자기 아내에게 했단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듯이 듣더냐 했더니 그런 사람은 없었단다.  나는 말했다. 내가 1시간 3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들었던 것은 당신에게 인간적 이기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놀라는 듯 했다.



        지금은 모르는 그분 뜻



나는 말했다. “당신의 한 가정의 가장인데, 당신의 처자식을 생각해 보았느냐? 당신의 현실을 보았느냐? 신앙이란 올바로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슬프고 부조리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인내와 의지 안에,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믿고, 도리어. 그런 현실에 투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뜻을 지금은 모를 뿐이다"라고 말이다.












12.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성모 영보

                                                                  민병섭 신부



  한 청년이 공원을 산책하던 중에 거지 노인을 만났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위엄이 서려 보이는 노인은 경건한 눈길로 청년을 보고 주저하는 듯 손을 내밀었습니다. 가난한 젊은이는 저도 모르게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노인 앞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었던 장미꽃 한 송이를 정성이 담긴 몸짓으로 노인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습니다. 노인은 감격한 나머지 떨리는 손으로 그 청년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미꽃을 들고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공원을 떠났습니다. 그 노인은 이제 더 구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31-32).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리는 징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징표'이다. 그러기에 요한 사도는 자신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 사랑의 징표이다. 아니 그분 자신이 사랑이셨고 그래서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7).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른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보여 주는 증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이 세상에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 있을 때만이 모든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이제 성탄의 축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니 우리가 주님 안에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2000년 전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던 참된 사랑이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 사랑으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계신다. 우리가 진정 사랑의 증인으로 태어날 때 이 세상은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루가 1,26-38



  루가는 주님 탄생의 예고에 관한 기사를 한 편의 예술 작품 형태로 그리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와 마리아는 세 번씩 말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세 번 듣게 되며, 동시에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도 세 차례에 걸쳐서 듣게 된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알릴 때는 거룩하고 외부와 차단되어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성전 성소에서 소식을 전하던 가브리엘 천사가, 이번에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한 동네의 한 처녀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갈릴래아는 한 사람의 예언자도 내지 못하였던 곳이다(요한 7,52). 그러하기에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조차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경멸하는 하찮은 것을 선택하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천사는 이러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처녀에게 나타나 역사가 바뀔 가장 중요한 말을 전하고 있다. 요한의 출생시에는 성전 성소에서 소식을 전하였으나, 주님 탄생 예고는 그 처녀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하느님은 성전 안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의 거처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된다. 천사의 인사말대로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던 사람이다.



  이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앞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옛 교부들은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즈가리야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정중한 인사말에 당황하면서 그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마리아의 일생과 그녀의 기도 생활은 성서적인 사상들로 흠뻑 배어 있었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러한 인사말에서 드러난 기묘한 사건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아채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즈가리야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해 받지만 그것은 자신의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 천사는 오직 마리아에게만 말을 건넨다. 마리아는 잉태하여 아기를 낳고 그 이름을 지어 줄 것이다. 여기에는 아버지나 남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 잉태되는 신비가 곧 드러나려 하고 있다. 그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되실 것이며 또한 그렇게 불리실 것이다. 이 칭호는 바로 예수님의 본성을 가리키는 칭호이며, 이 하느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감싸주실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리아의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나단 예언자를 시켜 다윗 왕에게 하신 예언이 이 아기에게서 이루어지게 된다(2사무 7,12-16).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준비한 전혀 새로운 것으로 이룩되고 있다. 곧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통하여 이 일은 이룩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라는 말로 천사는 자신의 메시지를 다 전한다. 이 천사의 말은 예전에 하느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이기도 하다(창세 18,13-14 참조).

    

  이제 마리아의 답변만이 남게 된다. 이곳에서 우리는 베르나르도 성인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다. "천사는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동정녀여,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도, 그의 비참한 후손들이 당신께 이것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 거하는 조상들, 바로 당신의 조상들도 이것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 발아래 엎드려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정녀여, 속히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소서. 인간의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Missus est에 대한 설교 IV, 8-9).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여종'으로서 그 뜻에 순명하셨다. 이러한 마리아의 동의에 천사는 사명을 다하고 이제 떠났다고 루가는 기록하고 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확고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봉헌하는 삶에서 이룩된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다시 육화의 신비를 이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제1독서/2사무 7,1-5.8ㄴ-12.14ㄱ-16



    오늘의 독서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의 예언은, 곧 다윗 왕조가 이스라엘 왕좌를 영원히 차지하게 되리라는 예언은 성서에서 자주 되풀이되고 있는 예언 중의 하나이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교차시키는 예언이기도 하다. 이 예언은 다윗의 직계 자손이라는 범주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개념들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는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내가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14절)라는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비록 솔로몬이 계약을 입증하는 첫 번째 고리 역할을 한다 할지라도 그 계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내다보고 계신다. 오직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만이 나단의 신비스런 예언을 온전히 이루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사야를 통하여(11,1) 그리고 시편의 작가들을 통하여(88.131편 등 참조) 계속되고 있으며,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루가 1,32-33 참조)에서는 이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세사의 사건은 주님의 편에서 쥐고 계심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주님의 궤가 모셔진 곳에 주님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제의와,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리라는 내용을 다윗에게 예고하는 예언자의 상반된 지시 사이의 대립을 통하여 드러난다. 주도권은 오로지 주님께 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굳건하게 유지할 '후손'도 주님의 권한에 속한다. 곧 그 후손이 중단될 수도 끊겨 버릴 수도 있는 생물학적 번식의 법칙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 주실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결국 그 약속이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서 실현될 때에도 비록 그것이 역사의 흐름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초월하는 힘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제2독서/로마 16,25-27



    오늘의 독서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로서 사도가 전한 복음의 요약이기도 한 찬양의 노래를 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25절)로 시작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찬양은 우리가 마리아의 태중에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더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



  이 신비는 비록 육화로만 사람들에게 계시되지만,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신비의 명백한 전조나 표징을 우리는 방금 바오로 사도가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히 드러났다."(26절)라고 하며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바와 같이 예언자들의 선포로 받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빛이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것으로, 또 무의미한 것으로 쏟아지는 일이 없이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실현될 하느님의 약속을 애정을 갖고 깨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3.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나) 선행은 감춰 돌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

                                                             김성배 신부



   선행은 감춰 돌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 반면에 드러내서 알리려고 하면 그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 선행이다. 자기 스스로 드러내서 알리는 선행은 선행의 가치를 잃게 된다.

 선을 행하는 것 못지 않게, 선을 행한 후에 그 선행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의 선행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선을 행한 다음에 즉시 그 선행을 잊어버려야 한다. 사람이 자기의 선행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해롭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선을 알게 되면, 그 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고,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선은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의 선을 보고 그 선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미해야지, 그 선이 자기의 것인 양 자기를 자랑해선 안된다. 자기의 선을 보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남에게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선행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채 있으면 기분이 상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알릴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의 선행이 알려져서   칭찬받고 존경받게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영예를 즐긴다. 이렇게 되면 선행은 선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고 오히려 교만을 키우는 수단이 된다.



  교만은 모든 선을 부패시키는 독이다. 교만으로 오염된 선은 부패해서 선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참으로 선하려면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선해야 한다.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아 선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악으로 추락하지 않고 선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완전한 길을 가르쳐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을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듯이 죽는다 (창세기 3,17)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아는 것도, 악을 아는 것도, 위험했기 때문에 선과 악을 모르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선했다. 선을 몰랐지만 생각하는 것이 모두 선했고, 원하고 행하는 것이 모두 선했다.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선했기에 참으로 선했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선을 행했기에 참된 성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알면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교만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을 부패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선을 알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이 악을 아는 것도 위험했다. 악한 행동은 사람의 감성과 감각에는 달콤한 쾌락을 주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을 모르면 악을 원하지 앓게 된다. 그러나 악을 알게 되면, 선보다는 악을 더 원하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악을 알지 말라고 금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모르는 동안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종으로 머무는 동안은, 사람이 일체의 욕망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와에게 유혹자 사탄이 다가온다. 사탄은 선과 악을 알도록 유혹한다. 먼저 선을 앎으로써 자기의 선에 대해 자만하게 만든다. 자만에 빠짐으로써 교만해진 사람은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된다. 동시에 사람이 감성과 감각에 쾌락을 주는 악을 알게 한다.



악을 알게된 사람은 억제할 수 없는 갈증으로 악을 원하고 맛보게된다. 이렇게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악을 맛본 사람은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종이 될 때는 일체의 욕망을 지배하는 왕이 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오리려 욕망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 성모님의 이 순종은 하와의 불순종을 무효화시켰고 구세주를 세상에 모셔 오게 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성모님만이 유일하게 「은층이 가득하신 분」이시다.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모든 선을 완전하게 받으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증언하는 대로 성모님은 당신이 그렇게 위대한 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신다.



  성모님은 선도 악도 전혀 모르면서 선하셨기에 완전히 선하셨다. 그러기에 절대적인 순결과 겸손과 가난을 지님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이시다. 성모님은 인간의 일체의 욕망과 감정을 완전히 지배하여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킨 하느님의 완전한 종이시다.

  완전히 겸손하고 순결하고 가난한 성모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완전한 거처가 되신다. 우리 모두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 드리도륵 하자.



14.     대림 제4주일 <루가 1, 26-38> (나)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양식의 탄생





 성모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평범하게 사시던 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하여 약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루가 1, 27)

  그런데 어느날 ‘은총을 가득히 받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인사를 받게 되었다. 친구로부터 그런 인사를 받았다면 별말을 다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인

사를 받고는 "뭘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팔자 고치는구나" 또는 “운수 대

통하겠구나"하고 기뻐 날뛸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천사의 말씀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분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가브릴엘 천사가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그 천사가 나타났으니 성모님은 평정을 잃었다. 상식이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난 전혀 예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천사의 첫마디 인사에, 그때까지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새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사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계속 생각하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을 뵈올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떨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하도 끔찍하고도 엄청난 일을 많이 겪어서 떨릴만큼 큰 충격을 받을 수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남이 겪는 공포의 사건조차 동감하기에는 우리 마음이 너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두려움을 공포와 동일시하고 피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스러움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유물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러워할 만큼 하느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으면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시는 분은, 하느님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거두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덕성스런 두려움도 잃고, 인간이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니까 혼란한 것이다.



  사실 당황하는 마리아를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진정시켰다. 은총이 가득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인사에 왜 그렇게 당황하셨을까?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은총을 받으면 딴 사람이 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출애 3,12) 무력을 믿던 평범한 인간의 자세을 버려야 했다. 이런 변화는 기드온(판관 6,16)이나 사울(1사무 10,7), 예레미야(예레 1,8)에게서도볼 수 있다.



  은총을 복잡하게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곱게 보고 함께 계신 것을 말한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재력, 권력, 지력 등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은총을 인간적으로만 좋아할 수는 없다. 마리아도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예수라고 일컬어질 아기를 낳게 될 것과, 그 예수가 영원하다는 점에서, 세상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또 한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벗는 탈바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이 부르시는 대로 회개해야 했던 셈이다.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새로운 양식의 탄생은, 인간의 상식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여쭈어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여쭈어 보는 것은 새로운 탈바꿈의 과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스런 상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과 예수를 낳고 그 예수의 미래에 대한 말씀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성취되었던 백성의 지도자 역할은 모세, 예리미야, 사울, 다윗(2사무 7,9) 등을 통하여 익히 알던 바인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자연을 뛰어넘는 사건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적인 인과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루가 1,37) '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친절하게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느님의 기운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는데(1사무 11,7 이하, 판관기 여러곳에 나옴)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에 여러번 언급되는 야훼의 종을 연상시키는 고백으로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끝맺는다.


   대림절을 끝내고 예수의 탄생을 곧 맞이하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여쭙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불편없이 오시게 된다. 그 대화는 그 분이 오시는 길을 평평하게 한다.



15.          대림 제4주일 (나해)   다윗 가문의 축복              

                                                   강길웅 신부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는 주위의 여러 세력들을 평정하여 나라를 최초로 통일시켰으며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높은 신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이후로 다윗에 버금가는 인물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무능하고 불충실한 왕들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점차로 '새 다윗'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이 등장하는 발단이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다윗이 하느님께 좋은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아름다운 정성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갸륵한 마음만을 받으시고 오히려 다윗의 가문에 큰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즉 다윗의 후손 하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아 국권을 튼튼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효성스런 마음 때문에 하느님은 오히려 그의 집(가문)을 위대하게 지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 '후손'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름다운 봉헌에는 위대한 축복이 따릅니다. 부모들은 어버이날 에 자녀들이 꽃 한 송이 달아 주는 것만으로도 큰 감격과 기쁨을 만 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작은 정성을 그처럼 크게 받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의 비결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청하는 것보다도 항상 넘치고 풍요롭게 채워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봉헌했을 때도 그랬고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먹을 빵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주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니, 실제로 살아가는 각자 우리 인생 의 여정에서도 그런 놀라운 은혜는 수시로 만나게 됩니다. 봉헌은 이처럼 늘 축복과 연결이 되며 삶의 소중한 가치를 바로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봉헌'과 '축복'이라는 개념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봉헌이라면 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시는 것이 축복입니다. 따라서 봉헌과 축복은 서로 상대에게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쉽게 배울 수 있는 진리인데도 신앙인들은 잘 모르고 있으며 또한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 봉헌하겠다는 그 갸륵한 정성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봉헌'이라는 인간의 신앙의 길을 통해서 당신 축복의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아들', 즉 메시아가 드디어 한 작은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오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어마어마한 축 복을 받습니다. 마리아는 본래 보잘것없는 처녀였습니다. 그녀도 일찍이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했던 소녀요 아가씨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여인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하게 내맡기셨습니다. 역시 봉헌과 연결되는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새 다윗'으로 오십니다. 물론 본래의 다윗보다 훨씬 더 크게 위대하신 분이지만 다윗을 통해서 내려 주셨던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면에서 예수님은 새 다윗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의 왕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은 다윗이 열어 주었으며 그의 갸륵한 정성과 충실한 신앙을 통해서 약속되어 졌던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주님께 충성심을 가지고 효도하고 좋은 것을 해 드리려는 갸륵한 신앙 안에서 그분은 언제나 새 축복을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다윗의 신앙을 배워야 하며 마리아의 봉헌을 실천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다윗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먼저 그들의 집이셨습니다.



이제 성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밤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이 인류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다윗처럼 위대하게 봉헌할 수 있는 자만이, 또는 마리아처럼 그분의 종으로서 온전히 내맡기는 자만이 바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당신의 방이요 거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안에 그분의 방을 마련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









16.                대림 제4주일   FIAT (이루어지소서)(나)

                                                     이성우 신부



ꡐ하루를 살면서 짜증내기보다는 길가에 뒹구는 종이 조각을 보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생활하여,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는 날 “너는 나를 닮았구나!”라는 말씀 듣게 하소서.ꡑ

지난 12일자 가톨릭 신문에 소개된 뇌성마비 장애시인 정재한씨의 시 한 구절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져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았으면서도, 사무친 그리움 때문에 부모를 찾아 화해하고 이제는 사랑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는 그.

대구 지하철 구내에서 신문을 팔면서 살아가지만, 신앙과 시쓰기로 모진 시련을 견디어내는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좌절하고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주시고, 보다듬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처녀 잉태라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ꡒ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ꡓ하며 응답합니다. ꡒ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ꡓ는 천사의 말에 완전한 신뢰의 순종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간적인 당황과 두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오롯한 믿음으로 극복한 이 결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엄청난 일이, 구세주 메시아의 내림이라는 크나큰 축복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의 역사는 이렇게 한 시골 처녀의 <FIAT>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ꡐ小貪大失ꡑ이란 말이 있습니다. ꡐ작은 것을 탐하다가 도리어 큰 것을 잃는다ꡑ는 뜻인데, 바둑판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네 인생살이에 더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들에 매달려 살다보면 드러나 있지 않은 보다 큰 것들을 놓치게 될 우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빙산은 뿌리가 훨씬 더 큰 법입니다. 그렇지만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부분보다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저 높은 곳에서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보다 훨씬 크게 보시고, 멀리 보시고, 앞서 보시는 그분의 훈수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삶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지혜일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에게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 것인지는 그 아이 자신보다 그를 돌보는 부모가 더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배려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대희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으니 이미 200번은 바뀔 만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세상에서 새날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지고 망가진 세상이 아니라 창조주의 전능으로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매순간마다 내 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에 (FIAT)하며 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17.        대림 제4주일 (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은총의 삶

                                                      황철수 신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맘때가 되면 흔히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올해의 10대 뉴스니 사건이니 하는 것도 다 그런 일의 일환이라고 여겨집니다.



외형적 사건으로서만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에서도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ꡐ한 해를 살면서 영이 충만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던가?ꡑ



오늘 성서의 표현을 빌리면ꡐ성령이 충만했던 순간들이 언제였던가ꡑ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단번에ꡐ성령 기도회의 감격스런 순간ꡑ을 상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삶의 현장에서의 성령의 순간들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주일 말씀에서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ꡐ올바로 인식하는 순간ꡑ을 성령이 충만한 순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성령이 충만한 순간은 다른 순간이 아니라ꡐ사람을 올바로 인식하는 때ꡑ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가득 찬다는 것을ꡐ신비한 정신 상태ꡑ로 돌입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예민한 지성과 마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올바로 분별하는 순간이야말로 ꡐ영에 충만한 순간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옳게 분별하지 못한 순간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서, 남의 입장에 서는 마음에서 ꡐ영ꡑ이 부재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반대로, 남을 배려해 주차해 놓은 분별 있는 마음에서, 지위를 떠나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우리는ꡐ영ꡑ의 건재함을 느낍니다.



종교적인 삶은 세상에 살면서 성령이 이끄시는 천상의 정신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천상의 정신이란 다른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그 정신입니다 :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부족하나마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하며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는 더욱 더 천상의 정신으로 열려져 낮은 자세로 임하신 예수님을 새로이 깨닫고 축복된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18.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1. 서문 (루가 1,26-27)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지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처녀가 결혼한 다음에도 일 년 남짓 친정에 살다가 일 년이 지나면 신랑이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갑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2. 메시아 탄생 예고 (루가 1,28-33)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다윗과 약속하십니다(2사무 7,1-17 참조).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1,28) 하고 인사합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에 몹시 당황하지만, 그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 그는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1,30-33) 하고 그 신비를 일깨워 줍니다.



             3.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 (루가 1,34-37)

마리아는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1,34) 하고 반문합니다. 처녀인 상태에서 잉태하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놀라 해명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인 성령에 힘입어 처녀의 몸으로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예로 들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마리아에게 설명합니다.



             4. 마리아의 동의와 우리의 이해 (루가 1,38)

  천사의 설명을 들은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1,38) 하고 메시아 잉태 사실을 받아들이자 천사는 떠나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의 평범한 여인 마리아를 통해서 다윗과 약속하신 메시아 탄생을 예고합니다. 이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탄생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의 평범한 여인이었고, 나자렛은 초라하고 하찮은 마을로 구약성서 지명목록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 동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구원의 역사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마리아와 같은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00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교회는 하느님의 섭리와 신비가 계속해서 실현되는 곳으로서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 기쁨과 위로를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무처 홍보실

19.           대림 제4주일 <루가 1,26-38> (나)     생각하는 갈대



근세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와 파스칼(1623-1662)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으며 또한 철학자였습니다. 실제로 파스칼은 데카르트를 만나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데카르트는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면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 끝에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근본명제를 확립했습니다.

파스칼은 이 근본명제를 발전시켜 그의 사상을 집약시킨「팡세」의 첫머리에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데카르트와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을 자기존재의 사유(思惟)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을 찾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마리아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28)고 인사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했던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천사가 나타났을 때 즈가리야가 “몹시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루가 1,12)있었던 것과는 달리 마리아는 비록 당황하기는 했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그 뜻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답변은 즉흥적이거나 감상적인 답변이 아니라 깊은 사유 끝에 선택한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성모님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란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 양치기 목자들은 하늘에 나타난 천사들을 보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어린 예수를 본 순간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합니다.’ 이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합니다”(루가 2,19). 그뿐인가요.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잃었던 예수를 성전에서 찾으신 후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고 꾸짖자 아들인 예수로부터 “나는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49)라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아들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했습니다”(루가 2,51).

이렇듯 마리아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원형이며 파스칼의 표현처럼 ‘상한 갈대’(마태 12,20)의 나약함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으나, 생각하는 데에 따라서는 하느님의 아들을 포용할 수 있는 위대성을 지닌 ‘생각하는 갈대’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신중하게 마음에 깊이 새기고 오래 간직하는 마음으로….

마리아, 우리 성모님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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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11월 27일 (목) 20:17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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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나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나해 대림 제 4주일-

1.말씀읽기: 루카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2. 말씀연구

천사 가브리엘은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것을  “성모 영보(領報)”라고 부릅니다. 성모님께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요, 세상 모든 이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응답하실 차례입니다. “예”하고......, 그리고 내가 응답해야 합니다. “예”하고......,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세례자 요한이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여섯 달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나자렛으로 보내십니다. 여섯째 달이라는 것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지게 된 것은 동정녀가 잉태하게 되는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멸시를 하는 동네인 나자렛에서 태어나게 되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는 거룩하고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성소에서 이루어진 반면,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거룩한 땅의 일부이지만 불경한 지역으로 여겨지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4)에 있는 한 동네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곳을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한 사람의 예언자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한 7,52). 구약성경에서는 한 번도 그 동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조차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빈정거렸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경멸하는 하찮은 것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나자렛은 나무의 새순, 봉오리의 뜻입니다. 이사야에서도(11,1) 메시아를 햇순이라고 불렀고, 즈카르야(3,8;6,12)도 메시아를 새싹(제마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종 ‘새싹’을 데려오려고 한다.”(즈카르야3,8) 그렇다면 나자렛은 이미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 동정녀의 아들이요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며 다윗왕가의 후손이 되도록 모든 것을 안배하셨습니다. 약혼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약혼자라는 말은 기혼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율법도 기혼자나 약혼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약혼녀가 남편의 집에 들어가는 예식이 결혼의 완성으로 보았습니다. 정결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처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시고,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오명을 쓰지 않도록 약혼자를 갖게 하시고, 요셉을 보호자(양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이름은 “아름답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아론의 누이의 이름이기도 했다(탈출 15,20). 마리아는 히브리말의 미르얌으로 “야훼께 사랑받는 이”란 뜻도 있고, 왕비란 뜻도 있다고 합니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는 것은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앞당겨 입으시고 은총에 충만한 분으로 지극히 높은 성덕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님께 은총이 충만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뻐하여라.”라는 것은 기쁨을 청하는 그리이스인의 인사입니다. 소아시아 사람은 살렘, 히브리말로는 샬롬이라고 하며 평화를 청했고, 라틴 사람은 건강을 묻는 인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말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속에 어떠한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완전히 깃드시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그 누구보다도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성모님은 당황하였습니다. 천사를 보고 당황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자기에게 해 준 인사말에 당황했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 천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모님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신비를 접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 속 깊이 품는 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다가오는 체험들 안에 머물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천사는 성모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천사는 먼저 성모님을 안심시킵니다. 성모님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라고 전해줍니다.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마리아가 하느님 마음에 드셨다는 것입니다. 총애는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즐겨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늘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청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예수”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하느님께 늘 기도드렸고, 그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구원 역사를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천사는 예수님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마리아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 큰 인물이 되시고, ②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며, ③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④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천사의 말은 예수님 안에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고 불리실 것이라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같으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그분으로 인정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처녀이신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인간적인 본성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적인 본성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언자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계자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나라, 이스라엘 국민에게만 군림할 다윗의 후계가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영적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야곱의 집안”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 위에 하느님의 자비와 다스림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가 다스릴 대상이 야곱의 피를 받은 자손 뿐 아니라, 히브리인, 이방인을 불문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맺어진 교회, 나아가 온 인류를 말하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까지도 듣게 됩니다. 처녀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천사에게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천사에게 반문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이지만 아직 요셉을 알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말씀 안에서 그녀가 동정녀로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옅볼 수 있습니다. 즉 자기가 아직 완전히 순결한 처녀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언제까지나 이러한 상태로 계속 살고 싶으며 따라서 어머니가 될 수 없고, 또 그것이 자기의 소원이라고 하는 결심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만일 마리아가 결혼의 권리를 사용할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아기가 태어나리란 말을 들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처녀로 한평생 살겠다는 결심과 함께, 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기도하고 있었으므로, 이 처녀와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를 겸손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요셉과 약혼을 했을까요? 그것은 부모의 의향을 따르려 했다든가, 관습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다던가, 요셉과 같은 사람과 맺어져 있으면 다른 사람의 청혼을 피할 수 있고, 안심하고 자기 결심을 지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 당시 유다인에게 있어서 처녀로 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평범한 결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에쎄네파 사람들은 동정을 지키고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 같았으면 어떻게 말씀드렸을까요?

“환장하것네. 시방 뭔 소리유! 천사님!전 아직 처녀란 말유! 글구 곧 시집도 가야 하는 몸이유. 그런디 그런 일 있으면 나보고 어쩌라구유......, 그냥 저 이렇게 평벙하게 살게 내버려 두세유^*^”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처녀로서 임신하게 될 일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내려오실 것이고 오직 하느님만이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천사는 엘리사벳의 경우를 들면서 확신을 시켜 줍니다. 아이 못 낳는 여인에게도(석녀 엘리사벳) 아기를 낳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못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것을 하느님께 투영하여 하느님도 불가능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마리아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이 종은 곧 노예란 뜻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고, 주인은 종을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는 동시에 마리아의 몸은 말씀이 강생하셨고,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믿음과 승낙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머니로 삼으시고, 그녀를 온 인류의 구속사업의 협력자로 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겸손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와의 불신과 반역행위를 지우셨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천사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는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믿음을 드린 적이 있는지 함께 나눠 봅시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그를 칭찬해 봅시다.

②가끔은 하느님께 불신의 마음을 드리는 적이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이것을 해 주실까? 하실 수 있으실까?”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 못하실 것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내 안에는 있는지 함께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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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11월 17일 (월) 23:16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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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나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4주일

하늘이여, 위로부터 이슬을 내리라

제1독서 : 2사무 7, 1 - 5, 8b -  12, 14a - 16

제2독서 : 로마 16, 26 - 27

복   음 : 루가 1, 2b - 3a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을 앞둔 오늘의 전례에서는 기다림의 자세가 더욱 강렬하게 열정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특히 입당송은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 “하늘은 위로부터 이슬을 내리고 구름은 비처럼 정의를 내리라. 땅은 열리어 구원을 싹트게 하라.”

이 구절은 이사 45,8의 내용인데 성지롤라모(Girolamo)는 이 구절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히브리어의 추상적 개념들을 구체적인 개념들로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 예를 들어 ‘정의’ 대신 ‘정의로운 이’, ‘구원’ 대신에 ‘구원자’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 원문보다 더 강하게 메시아적 능력을 강조한다. ‘하늘’과 ‘땅’을 향해 간절히 기원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자신들의 신비로운 힘을 결합하여 우리 가운데 ‘정의로운 이’가 임하시는 기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정의로운 그분은 ‘땅’의 아들이 될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오늘의 영성체 후 기도 역시도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감동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기다림의 원의가 우리의 영혼 안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해주는 성탄의 전례에 연결시키고 있다 ; “전능하신 천주여, 우리가 영원한 구원의 보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열심한 마음으로 신비로운 예수 성탄을 타당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느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두셨던 신비

이 주간의 독서는 분명히 신자들로 하여금 마리아의 태중에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다 깊이 묵상하도록 인도해주고 있다.

이 신비는 비록 ‘육화’를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제시되지만,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신비다.

성 바오로께서 로마서를 통해 마지막으로 주님께 드리는 찬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의지로써 우리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을 가장 풍부하게 표현한 신학적 사색이다 : “하느님께서는 내간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십니다. 그 진리는 이제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히 드러났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알려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시고 지혜로우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16,25-27).

그러므로 바울로에게 있어서의 성탄의 신비는 우리의 형제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대해 묵상하고자 하는 우리를 흥분과 놀라움 속에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길에서 방황하며 사랑과 형제애의 능력을 상실한(로마 1,31 참조) 인간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내어줄 것을 마음속에 품고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인간의 구원을 생각해 온 성부를 찾아 흠숭과 예배를 드리도록 강렬하게 우리를 충돌시키는 능동적인 신비이다.

‘하느님께서 오래 전부터 감추어 두셨던’(에페 3,9 참조) 이 신비의 명백한 전조나 표징을 우리는 방금 성바울로가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로마 16,26)고 하며 우리에게 상기시켜준 바와 같이 예언자들의 선포를 통해 받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빛이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것으로, 또 무의미한 것으로 쏟아지는 일이 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확고하게 실현될 하느님의 약속을 애정을 가지고 깨어 기다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다



제1독서에 인용되고 있는 예언은 자주 되풀이되는 예언 중의 하나이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교차시키는 예언이다.

그것은 다윗 왕조가 이스라엘 왕좌를 영원히 차지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한 나단의 유명한 예언이다. : “네가 살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2사무 7,12.14.16).

그 예언은 다윗의 직계자손이라는 범주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개념들로 형성되어 있다. 솔로몬에게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단이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14절)고 말할 때 그것은 솔로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 즉시 따라오는 것이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 “만일 그가 죄를 지으면 나는 사람이 제 자식을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듯 치리라”(14절).

더 나아가 예언은 먼 훗날을 파악한다. 즉 솔로몬이 비록 계약을 입증하는 첫 번째 고리역할을 한다 할지라도 그 계약을 완전히 성취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내다본다. 오직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만이 나단의 신비스러운 예언을 온전히 이루어줄 것이다. 사실 예언자들과 시편작가들을 통해 계속되는 사색은 이와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예언자들 중에서는 이사야를 기억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이사 11,1). 시편작가들 중에서는 바로 오늘 층계송에 사용되고 있는 긴 시편 중의 하나인 시편 88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에게 한 ‘약속’에 충실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드리는 비탄에 찬 기도이다 : “‘나는 네가 뽑은 자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서하기를, 내 길이 네 후손을 굳건히 하여, 대대로 네 왕좌를 튼튼히 하리라’…은총을 영원토록 그에게 내리리니, 그에게는 내 계약이 굳게 남아 있으리라”(시편 88,4-5.29). 보는 바와 같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충실한 분으로 머물러 계시고자 하신다면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이 되고 있다(시편 131,11-12 참조).

이 모든 것은 잠시 후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천사가 마리아께 알리는 내용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루가 1,32-33 참조)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발단을 다윗 선조와 굳게 연결시키고 있는 신약성서에서 반향 된다.

성바울로는 로마서를 통해 이러한 역사적 신앙적 자료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1,3-4).

역사적 자료의 신앙적 차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에서 - 바로 이 액속을 지킴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이 이루어진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대리자를 하느님 백성(이스라엘 왕들은 하느님 백성을 통칭하기도 한다)과의 관계에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사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야훼께서 너에게 한 왕조를 일으켜주리라

나단의 예언에는 좀더 풍부하게 신앙의 자료를 얻기 위해 고찰해야 할 또 다른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야훼의 궤가 모셔진 곳에 야훼를 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제의와,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마련해주시리라는 - 즉 그에게 기울어지지 않는 후손을 보장해주시리라 - 내용을 다윗에게 예고하는 예언자의 상반된 지시 사이의 대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짔겠다는 말이냐?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내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네 앞에서 쳐 없애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 않게 네 이름을 떨치게 해주리라…나 야훼가 한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리라”(2사무 7,5.8b-9.11).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계획을 전복시키신다. 그 주도권은 오로지 야훼께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굳건히 유지할 ‘후손’도 야훼의 권한에 속한다. 즉 그 후손을 중단될 수도 끊겨져 버릴 수도 있는 생물학적 번식의 법칙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주실 분은 야훼시다. 얼마나 많은 가문이, 굉장히 유명한 가문까지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멸되었던가! 그러므로 하느님의 ‘약속’이 나자렛 예수 안에서 실현될 때 그것은 비록 의당히 역사의 흐름 속에 포함되는 것이긴 하지만 역사를 초월하는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 구절은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천사가 알리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성루가의 매혹적인 복음구절 중의 하나인데,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그 내용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동정녀의 마음과 태중에서 실현되는 육화의 신비를 올바르게 거행하도록 우리의 정신을 도와 준비시켜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역사 비판학적인 많은 문제들은 제쳐놓기로 하자.

비록 마리아가 천상 메시지의 직접적인 수취인이라 할지라도 메시지나 동정녀의 동의의 핵심적 관점은 그녀로부터 몸과 피를 취해야 할 그리스도이시다 :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0-33).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은 다윗 왕국이 지속되리라는 나단의 예언(이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전에 주석한 바 있다)과 임마누엘에 대한 이사야 예언의 응답임이 분명하다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 하리라”(이사 7,14).

과거의 모든 역사와 그리고 구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의 역사는 모두가 나자렛의 알려지지 않은 한 소녀가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참으로 소박한 점, 은밀한 곳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계획에 동의하기에 필요한 그 짧은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 자신이 아들에게 예수(구세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사실은 바로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마리아께 대한 열정이 담겨 있는 기아라발레(Chiaravalle)라는 성베르나르도의 단편적인 글은 상당히 서정적이면서도 참으로 진실된 의미를 표현해주고 있다 : “천사는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우리들마저 그 자비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의 짧은 응답으로 인해 회복되고 생명에로 불림 받을 것입니다. 인자하신 동정녀여,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그의 비참한 후손들이 당신께 이것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 거하는 조상들, 바로 당신의 조상들도 이것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 발아래 엎드려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동정녀시여, 속히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소서. 인간의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Missus est"에 대한 설교 Ⅳ, 8-9).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 루카의 이 감미로운 이야기 가운데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또 다른 한 가지 내용은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에 대한 주장이다.

처음에 동정녀로서의 마리아에 대해 두 번 언급한다(27절 참조). 그리고 나서 천사에게 하는 그녀의 명백한 대답이 나온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말을 아무리 여러 각도에서 해석해 본다 하더라도 예수의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사실 천사의 응답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35.37절).

또한 마리아의 동정성은 예수와의 관련하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완전한 우리의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인간성을 갖춘 채 - 그 인간성이 마리아를 통해서 주어지지만 동정녀를 당신의 궁전으로 삼으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형성되고 잉태되는 한에 있어서 -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리아의 동정성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방금 인용한 성서구절은 처음에는 사막의 천막 안에서,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구름 형상으로 나타났던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현존(출애 40,34;1열왕 8,10 참조)을 상기시켜준다. 루가복음사가는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통해 예수의 존재적 기원이 하느님의 이니시어티브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단이 다윗에게 한 예언, 즉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을 것이다”(2사무 7,6.11 참조)라는 그 예언의 구체적인 표현 내용을 훨씬 더 풍부한 여러 개념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새로운 집’ ‘새로운 성전’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9개월 동안 성령의 엄위로운 궁전이 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점이다.

이밖에도 이미 성탄의 위대한 빛 속에 들어서고 있는 우리 모두 이를 위한 아주 실질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이 있다. 만일 마리아를 지극히 풍요롭게 한 ‘동정’의 자세,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활도 거룩함으로 풍요롭게 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이니시어티브와 사랑에 대한 완전한 개방의 자세가 우리 마음 안에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시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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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53
분 류 대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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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3주일

9. 주님 생각에 (나) / 18            10. 김성배 신부 (나) / 20

11. 광야에서   (나) / 22            12. 정주성 신부 (나) / 24

13. 광야에서   (나) / 26            14. 김영진 신부 (나) / 28

15. 경규봉 신부 (나) / 30          16. 함세웅 신부 (나) / 31

17. 강길웅 신부 (나) / 33          18. 심용섭 신부 (나) / 35

19. 민병섭 신부 (나) / 37          20. 교구주보 (나) / 42

21. 최인호 작가 (나) / 43          



9.            대림 제3주일 <요한 1,6-8. 19-28>(나) 주님 생각에 기쁜 내 마음





 “주님(야훼)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이사 61,10)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로 이어전다.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 아니므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환호 용약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물론, 신앙인에게까지도 이런 고백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도대체 기쁠 일이 훠 그리 있겠으며, 그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조차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때이기 때문이다.



  또 세속이 제공하는 기쁨(?)이 얼마나 많고도 다양한데,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겠느냐고 할만한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느님은 부담은 될지언정 기쁨의 원천이라고 여겨지기에는 거리가 멀기도 하려니와, 구체적이지도 않다. 소위 좀 생각한다는 사람 가운데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 하느님이란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인류가 얼마나 큰 갈등과 전쟁에 시달렸느냐고 하며, 하느님이 오히려 인류에게 고통의 원인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요구를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기쁠 일은 별로 없다. 순간의 조각에 불과한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모여 이루어 놓은 틀은 방향을 잃고 몰락을 향하여 간다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교회 안팎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구분과 상관없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는 경정으로 말미암은 인간 관계의 파괴, 인위적 제도가 자아내는 부패성외 근본원인에 대한 몰지각,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은 자연에 대한 자연적 접근의 산발성과 단편성 및 불균형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인위적 접근 실험의 연속, 그 접근 자체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진리라고 하는 주장 등이, 몰락의 시작이라는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기쁠 수 있는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러나 정말 기쁠 수 없는 까닭은 기쁨 자체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이 파괴될 때에는 여러 조치를 마련하느라 분주한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사랑, 평화, 정의, 자비, 봉사, 믿음, 희망, 일치, 화해, 깨달음 등-이 썩는 데에는 속수무책이다. 기껏 그런 것은 썩을 수 없고 썩었다고 하면 이미 그렇게 불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겪는 일상 생활은 썩은 웃음, 색은 기쁨을 보여 준다.



  보이지 않는 자연은, 체험될 때 일어나는 사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체험되는 것이다, 바른 인간관계 속에서만 썩지 않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참된 기쁨이 있어야 바른 인간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순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악순환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에서 기쁨이 부패할 수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교황께서도 이미 경고한 바 있는 세계화라는 틀은, 삶을 경제 체제의 측면 하나로 피라미드화하는 것이므로 끊임없는 경쟁관계와 숫자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삶의 틀로 삼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 전세계는 컴퓨터화하여 가므로 이 과정을 외면하기는커녕 더 증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어디 경쟁이나 숫자화의 체계로 계산되거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 파괴된 인간 관계에서 참된 기쁨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참된 인간 관계의 복원을 위하여 참된 기쁨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다른 “곳"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대림 제3주일의 이사야서 61장 10절의 말씀이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인간의 체제에서 비롯되는 기쁨이 아니다. 따스한 햇살, 살갗에 기대는 아기의 얼굴같이, 다가오는 바람같이 위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듯한 기쁨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관된 성실을 뜻하는 하느님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랑, 신부의 새 모습과 견줄 수 있고,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력과 같은 기쁨이다. (이사 61,17-11) .



  그런 순수한 기쁨을 누린 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한나가 아기를 얻고 본능적인 기쁨에 머물지 않고 “내 마음

은 주님 안에서 용약합니다"(1사무 2,1)라고 찬양하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같은 찬미와 고백(루가 1,46-47)을 엘리사벳에게 들려주고 있다.



  신자들에게는 주님이 참된 기쁨을 누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 기쁨을 누림이 바로 세

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인간 관계를 복원한다. 그 기쁨은 본적과 주소가 분명한 기쁨이고, 기쁨도 방향도 확실하여 썩지 않고 순수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기쁨이 하느님의 뜻에 기원을 두었음을 말하고, 기도와 감사가 따르는 것임을 밝힌다. (제2독서) 그러기에 자신있게 “늘 기뻐하십시오"라고 권고한다.

쓰리기 종량제도 중요하지만, 우선 썩은 웃음, 썩은 기쁨 좀 버리자. 하느님 안에서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릴만큼 기쁜지도 짚어 보아야겠다.





10.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 (나) 

                     사람이 자신을 알면 생명을 얻고 모르면 생명을 잃는다.

                                                             김성배 신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낯선 존재이다. 자기의 참된 모습이 자기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알면 생명을 얻고 자신을 모르면 생명을 잃

는다. 그러기에 자신을 아는 지혜만큼 사람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지혜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지혜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얻기 어려운 지혜이기도 하다. 자신을 아는 지혜는 사람이 가장 애착하는 자기 만족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됩니다.”(요한 11,8)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속성자체가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숨는 데 있다. 죄는 사람의 생각이 접근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있다.



  그리고 이 죄를 식별하는 감각은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과 짝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죄를 식별하는 감각도 살아있게 된다.

  사람은 자기의 생각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두 신비의 영역을 대면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1디모 16,16) 하느님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짙은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 악의 영역이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야만 자기의 생각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 두 신비의 영역을 볼 수 있게된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에페 1,18) 하느님의 빛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어둠 속에 제 모습을 감추고 숨어있는 죄를 드러내어 밝힌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감지하는 감각이 예민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더 예

리한 감식력을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리한 빛으로 죄에 대해서 가장 예민한 감식력을 가졌던 분들이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분들이다. 마음의 눈이 하느님의 빛으로 밝혀질 때, 사람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빛 속에서 자신을 볼 때는 자기의 비천함을 보기 때문에, 교만과 자애심을 버리고 겸손과 자기 이탈의 정신을 얻게 된다. 동시에 하느님을 볼 때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기 때문에, 하느님을 더 완전히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된다. 바로 여기에 영성생활의 요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이탈하면 할수록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무뎌지게 된다. 마침내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되면 죄를 식별하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가장 절망적인 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죄 중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터무니없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화상을 만들어 낸다. 실제의 자기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비천한 죄인임에도, 이 자화상 속의 자기는 지혜롭고 유능하고 위대한 의인이 된다.



  이 거짓된 자화상은 자기의 교만과 자애심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사람은 그 속에서 흡족한 자기만족을 누리게 된다. 죄는 회개함으로써만 용서받는 길이 열린다. 회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은 자기의 죄를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회개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서 죄를 식별하는 감각이 죽으면 그 사람은 회개가 불가능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눈은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건강한 눈은 빛을 보는 것이 즐겁지만, 병든 눈을 빛을 보는 것이 괴롭다. 그래서 건강한 눈은 빛을 반기지만 병든 눈은 빛을 피한다.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죄다. 죄로 병든 마음의 눈에는 하느님의 빛이 괴로움을 준다. 모든 죄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자애심이다. 사람에게 자기의 죄를 보게 함으로써 자기의 비천함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빛은 교만과 자애심을 손상시키는 타격이 된다.



  그래서 죄를 버리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빛을 배척하고 거부한다. 죄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하느님의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다. 죄의 어둠 속에 잠겨 자기의 모습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볼 수 있는 빛을 주러 오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이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회개하여 생명을 얻고, 이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단죄를 받는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요한 3,19-20).













  

11.        대림 제3주일 (나)해 요한 1,6-8. 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서 계십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슴이 뜁니다. 올 성탄절에는 함박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어떤 이는 성탄 전야제 행사에 나갈 준비에 바쁩니다. 학생들은 밤샘 파티 계획에 분주한 마음이고, 꼬마친구들은 성탄 때 받을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동안 잊고 지낸 친척 은인 친구들에 보낼 성탄카드를 준비하는 이들도 눈에 뜨입니다.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는 듯 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성탄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통해)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서 계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의 대림을 무척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로 믿으려 했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아니오.” 그리고 마지막 답변은 구세주의 대림을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요, 도저히 받아드려질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는 이미 와 계신데, 너희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이러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성탄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탄 구유를 만들어 예수 아기를 구유 안에 모십니다. 매년 12월 24일 자정에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올해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2천년 전에 탄생하신 그 분과 매년 12월24일 자정에 탄생하는 예수님은 다른 분일까요? 2천년 전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우리가 매년 기다리는 예수님은 같은 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우리 모두가 한 번 즘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2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림절을 지내며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이 언제나 오실까 하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분은 이미 세상에 오셔서 지금 그리고 항상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이 안에 계십니다. 내가 매일 대하는 가족, 친구, 낯선 사람...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고 다가감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신 그 분을 알아보고 만나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강자와 약자, 믿는 사람 안믿는 사람, 모두 전부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볼 때, 얼마나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까? 체험하고 만날 수 있었습니까? 성교회는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어둠을 가르고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직접보고 만나게 해 줌으로써, 오로지 사랑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줍니다.

  

왕위에 오를 왕자가 백마를 타고 신부감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겨우 어느 빈민가에 아름다운 처녀를 발견한 왕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물론 왕의 권력과 금력으로 당장 데려올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은 마음과 조금도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자는 진정한 사랑으로 결합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충신의 조언으로 결국 왕자는 화려한 왕실을 떠나 비천한 목수가 되어 그 처녀의 가난한 마을에 가서 살기로 했습니다. 둘은 아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고 서로 진정한 인간 애정으로 깊어 갔습니다.

드디어 정혼하기에 이르렀을 때 왕자는 그의 신분을 밝히고 왕비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마침내 둘은 아주 훌륭한 왕과 왕비가 되어 자기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가난한 처녀와 결혼 한 왕자의 이상의 사랑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분을 잘 알지 못할 눈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말은 우리 마음에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일 년 열두달 중 성탄 밤에만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느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일년 열두달이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오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생활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왕자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한 처녀의 비천한 신분을 취한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신 그 결단을 우리도 내려야 합니다. 일년 열두달 성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우리도 우리의 신분을 우리의 모습을 낮추어, 보다 비천한 보다 보자 것 없는 보다 고통받는 이웃에게도 다가가야 합니다.

  

고깃국을 먹는 사람은 결코 수제비를 먹은 이웃을 사랑 할 수 없습니다. 회전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차디찬 마루 바닥에 누워있는 이들을 따스하게 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매만져 줄 수가 없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 진정 가슴 벅찬 기쁨으로 변화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와 계신 주님은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는 이요, 차디찬 마루 바닥에 누워있는 노인이요, 나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환자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부터 기쁜 성탄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온 성탄절에 남 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맙시다. 아무도 모르게 연탄 한 장이라도 좋으니 필요로 한 이웃이 있으면 찾아 나누어줍시다.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은 당신께 드리는 최대의 성탄 선물로 받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12.              대림 제3주일 (나)해 요한 1,6-8. 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정주성 신부



“당신은 누구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백성의 마음에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자기 마음속에 곰곰이 생각하기를 “요한이 혹 그리스도인가?”(루가 3,15)하고 요한의 신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재빨리 예루살렘에서 제관과 시종을 요한에게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에 대답하여 세례자 요한이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요? 엘리야요?” “아니요” “그렇다면 당신은 예언자요?” “아니요”라고 다시금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장치 올 엘리야, 예언자 이 세 가지는 당시 유대국민의 관심거리인 대표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아주 딱 잘라서 아니라고 부정하였습니다. 참된 겸손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세례자 요한은 겸손되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신 자기의 사명, 자기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즉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전하는 전령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과 같이 참다운 겸손을 배우며 자아반성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모실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관과 시종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하고 확실하게 물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인들도 자기를 살펴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보다는 남을 묻고 살펴 타인을 알려는 경향에 젖어 있습니다. 왜 사람은 자기를 살피기보다는 남을 살펴 알려는 호기심에 사로잡힙니까? 이것이 다 사람에게 고통스런 큰 결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숨을 데를 찾고 있을 때 하느님은 아담아,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하며 아담 자신의 존재를 캐어 물으셨습니다. 인류의 자아반성은 이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당신은 누구요?”하고 남에게 물어 남을 알려고 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사업과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반성하고 자아를 향상시키지 아니하고 착하고 거룩한 자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오라지 겨우 큰 허물만을 간신히 피해서 영원한 삶을 목적하든지 성인과 같이 완덕의 절정을 목적하든지 상관있느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본떠 자아반성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완전한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자기를 아는 좋은 방법은 저녁마다 하루 동안에 나의 모든 생각, 말, 행실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상인은 저녁에 가게문을 닫으면 즉시 주판알을 굴리며 하루의 손해와 이익을 계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교우들도 저녁기도(만과) 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하루의 자기 행동을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말했으며 행동하였는가? 내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궐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살핀 후 무슨 잘못된 점을 발견했으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다시금 아니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동시에 이 결심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빌 것입니다.



하루 동안에 내 영혼, 내게 맡겨진 가정의 영혼을 생각하고 손해와 영신상 이익을 성찰하고 점검해 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또한 이렇게 하루하루를 뜻있게 보내는 우리 가정은 참말로 복된 가정이며 이러한 집안은 단 하루를 살아도 영원한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나간다고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여러분! 유대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였던 질문을 우리도 우리에게 자주 해봄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반성하고 완전한 자 되기로 힘쓰십시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마태오 5,48).

13.       대림 제 3주일 (나)해 요한 1,6-8. 19-28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신뢰와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림



대림시기 시초부터 우리는 기다리면서 생활하였다. 안간 생활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기다림이 있다. 근심과 불안 가운데서 기다릴 수도 있고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기다리는 그것에 달려 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어떤 사건으로서 불의의 사고나 언쟁이나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또는 인간이 소망하는 희소식으로서 병의 쾌유라든가 아기의 탄생이라든가 성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살고 있다. 기다리다 지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대하던 것이 성취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다른 것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가 매년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것은 모든 신자로 하여금 가장 기쁜 소식을 회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내림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게 해준다. 신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믿고 있고, 이 기다림의 원천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불안에 떨고 있고 무관심한 사람들과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이 기쁜 소식을 나누어야 한다.



복음은 구세주 예수의 내림을 이미 수행한 하나의 커다란 사건인 것이다. 복음은 또한 앞으로 올 재림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아들의 영광 가운데 오시는 내림을 뜻한다.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 우리가 오늘 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먼저 요한 복음서를 들어보자. 교회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두 구절을 읽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청중들이 고대하던 사람처럼 드러나는 동시에 신자들이 고대했던 모델처럼 나타난다.

요한은 어떻게 군중들을 동요시켰는가? 그는 어떻게 오셔야 할 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외쳤는가? 그는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받을 것을 유대인들에게 외쳤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다. 지난 주일에는 마르코 복음사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들려준 바 있다. 오늘은 요한 복음사가가 하느님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베푸냐고 요한에게 묻는다. 그들은 요한의 설교에 무관심하였고, 모든 복음사가들은 그들이 요한의 사명도 믿지 않았으며 그의 세례도 원치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들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죄인들임을 자각하면서 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해야만 했으나, 사제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들로부터 아무런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메시아, 승리를 가져오는 메시아였다. 예수는 이러한 고대에 실망을 안겨 주었고, 그들의 교만함을 책망하셨다.

  

세례자 요한은 전혀 다른 분을 고대하였다. 그의 사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이었다. 자기보다 뒤에 오는 분을 증거하는 사명이었고, 사람들 가운데 이미 와 계시는 그분은 세상의 빛이었다. 이와 같은 사명을 받은 요한이었지만 뒤에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하여 겸손되이 봉사하였을 뿐이었다. 요한은 모든 신자가 지녀야 할 겸손의 모델이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겸손되이 기다려야 한다. 주님의 겸손을 닮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겠는가? 주님이 세상의 빛으로서 사람들에게 나타났을 때, 측근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분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진리를 설교하는 가운데서 주님은 언제나 마음이 겸손한 스승으로서,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셨고, 당신의 사랑을 자유롭게 믿는 사람들만을 제자로 삼으셨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도 이 세상의 위인들이 개선하는 것처럼 주님이 오시리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시작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기쁨을 겸손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실 그때, 당신의 내림은 영광스러운 내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광스런 내림은 우리가 축하할 성탄 축일의 사건으로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처럼 고요히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인 우리는 겸손한 증인으로서 세례자 요한처럼 참 빛이신 주님의 내림을 고대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굽힐 줄 모르는 희망을 드러내는 신뢰심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이사야서와 데살로니카서를 통하여 이사야와 바오로는 왜 우리가 신뢰심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이사야서에서는 이사야가 성령의 은혜를 받고 사명을 수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는 구원되어야 할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예수 자신도 이 예언자가 지적한 사명을 수행한다고 선언하셨다. 그 어느 예언자보다도 아사야 예언자는 성령을 받은 분으로서 그리스도로부터 온유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이 복음이 주님의 재림때 실현되리라고 예언한다. 구원이 필요하다고 겸손되이 자각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가난한 이들로서 마지막날에 구세주의 내림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바오로도 주님의 내림을 신뢰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신자들에게 외친다. 왜 신뢰심을 가져야 하는가?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성성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하심에 굳은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은 무기력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신뢰심은 계속적인 기도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를 빚어주고 성화 시켜 주시는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한 우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살아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다.

  

바오로는 신뢰심과 함께 기쁨을 가지라고 외친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주 예수께 희망을 건 사람이 어떻게 기뻐하지 않고 감사드리지 않으면서 주님의 내림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동정마리아가 바로 우리들의 모델이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마리아의 기쁨에 넘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는 마음이 설레이는 가운데 아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주님은 이미 탄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주님의 재림하실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구원을 고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까이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뻐해야 하며,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우리의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 성체야말로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표시이며, 재림 때 당신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일치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표지인 것이다.











 14.          대림 제3주일 <요한 1,6-8. 19-28>(나)     우리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

                                                                 김영진 신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한 치과병원에서 지난 9월18일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내려오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를 수없이 뇌까렸다,

내용인즉 경기도의 어떤 도시에서 32평 아파트에 사는 어머니들이, 24평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자기의 아이들과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도록 할 수 없으니, 반 편성을 따로따로 해달라면서,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나와 3일 동안 농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4평에 사는 아이들이 32평에 사는 아이들을 때리고, 그 아이들의 물건을 훔쳤을 뿐만 아니라, 24평에 사는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주는 가정 교육이 문제라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도 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어떤 아이들은 서로 싸운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싸웠지만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는 듯 말하기도 했다. 자라나는 아이들끼리 놀다보면 때로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싸움하는 것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엄마들이 나서서 자녀들이 공부할 수 없을 만큼 학교에서 농성하는 모습이란, 그것도 32평, 24평을 나누는 모습이란 깊이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1평짜리 집도 없는 나같은 사람이 볼 때도 32평이나 24평이나 도토리 키재기 같아 보이는데, 굳이 구분을 한다면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아니라, 가진 자와 조금 덜 가진 자의 구분이 있을 뿐일텐데, 그것이 그렇게도 큰 벽을 만드는 이유가 된다니 여간 슬픈 일이 아니다.         



        돈과 명예에 가리워진 하느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자신이 지닌 위치나 소유나 입장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되이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이들이 어디 학교에서 농성을 했다는 그 어머니들뿐이겠는가. 생각해보면 겸손을 말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내가 그래도 신부인데 그렇게 할 수 있나, 도대체 신부를 뭘로 알고 있나"하는 따위의 생각으로, 겸손이 자리해야 할 마음에 교만과 아집과 독선을 그 얼마나 품어왔던가.

겸손한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지만, 교만한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좌절과 증오심을 심어주며, 겸손한 말 한마디는 자신을 성숙시키고 타인을 일으켜 세우지만, 교만한 말 한마디는 자신을 멸시받게 하고 타인을 아프게 찢어 놓는다.

  

미국의 유명한 웅변가 무디 목사가 하루는 어떤 곳에서 15분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연설이 끝나자 청중 속에 있던 대학교수 한사람이 “무디 선생, 당신의 15분 연설 중에 16곳이 문벌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교수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얼마나 틀리고 있는가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무디는 “교수님, 저는 배운 것이 부족하여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저는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긴 해도 인류를 사랑하사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교수님은 그 많은 학식을 가지고 인류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지닌 학식과 위치와 입장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교만으로 채웠으며, 대장간 출산 무디의 마음을 아프게 찢었던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세자 요한은 요즘 말로 말하면 낭만이 넘치는 사나이요, 말 한마디로 가슴을 적셔주는, 마음이 아침 이슬 같은 시인이다. 그의 모습은 낙타 털옷에 가죽띠, 들꿀과 메뚜기를 잡아먹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여지고, 자신을 일컬어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든가, 주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라든가, 하는 표현은 얼마나 겸손한 시인의 표현인가.



이처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신을 우러러 보며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께 자라를 마련해 드리고자 하는 놀라운 겸손으로 대답하시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닐까?

세자 요한에게서는, 자신이 지닌 명예나 명성, 인기나 위치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교만이나 타인과의 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낮추며, 오직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드러내려 함으로써 “그분은 날로 커지셔야 하고 나는 날로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씀을 몸으로 사셨다,



        겸손․낭만이 넘치는 사나이 요한

옛날 한 시골 소년이 낚시를 하는데, 낚싯대 대신에 나뭇가지를, 낚싯바늘 대신에 구부러진 핀만을 가지고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도시에서 온 어떤 이는 최고의 낚시 도구을 가지고 오랫동안 낚시를 했어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마침 낚시를 끝내고 돌아가는 소년에게 도시의 낚시꾼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잡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소년이 말하기를 “성공의 비결은 저를 드러내지 않고, 제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세자 요한도 자신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빛이 아니요, 다만 빛을 증언하는 광야의 소리일 뿐이며, 뒤에 오시는 위대한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하면서, 자신을 숨기고 겸손되이 엎드렸다.

나는 누구인가! 조금 더 넓은 집에 산다는 것, 조금 더 머릿속에 지식이 있다는 것, 조금 더 높은 명예와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돈이 많아 하느님을 버리고, 장사가 잘 되어 주일을 못 지키며, 지식이 많아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이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언제나 나를 첫 자리에 두고 그리스도는 나보다 뒤에 두며 살아왔던 나의 삶. 이제 그 교만의 삶에서 벗어나 2천년 전 요한이 살았던 겸손의 삶,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신 삶이 나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5.        대림 제 3주일(자선주일) (나)  주님을 맞이하는 삶

                                                     경규봉 신부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고, 세리와 같은 죄인뿐만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도, 또한 군인이나 정치 지도자에게도 즉,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회개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 것을 가르쳤다. 요한의 삶과 가르침이 숭고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도 대단히 많았다.

때문에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던 많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곧 메시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도 그에게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응해 그리스도인 척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적어도 침묵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사람들로부터 추앙 받고자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도록 준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고,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ꡒ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ꡓ라고 물을 정도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자신은 오시는ꡐ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며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ꡑ고 말할 정도로 겸손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았다.



따라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삶의 자세는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원이 무엇이고, 자신의 임무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가정과 사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맡은 바 임무와 책임을 완수하고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나아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겸손해야 한다. 주어진 책임과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결코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제자가 되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에 넘치게 될 것이다.  











16.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 (나)    요한 세자의 아름다운 겸손

                                                           함세웅 신부



점점 싸늘해져 가는 날씨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대림환에 촛불이 한 개 더 켜졌습니다. 그만큼 빛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여, 주의 은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또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옵소서'하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아름다운 마음 자세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자세를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배웁니다.

  

오늘의 복음(요한 1,6-28)은 먼저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고 빛을 증거하기 위하여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로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그분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임무를 띄고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매혹되어, 그를 그의 위치보다 더 높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위치가 침해되는 지위를 세례자 요한에게 주었던 당시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 세자를 혹평하거나 그의 지위를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이지만, 결국 그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에 예속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이 기록될 당시, 몇몇 지방에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기를 원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는 의식적으로 요한이 아니고,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은 오늘날에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점을 말해 줍니다.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교하는 사람의 설교 또는 강론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행되고 있으나, 청중 중에 어떤 이는 그 설교를 하는 사람의 말솜씨라든가 설교자의 목소리가 어떻고, 제스처가 그럴싸하다든지 등의 관심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상의 내용보다는, 십자가상이 얼마나 값이 있는 것인지 그 외적인 본래의 의미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에 집착을 가지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 사람이 가진 묵주는 5천원짜리인데, 저 사람은 그 묵주를 얼마나 아끼는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만지면 몹시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성물로써의 묵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귀중품으로 간직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그 재산을 이용하여 인간 생활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고, 인간의 완성을 위해서 사용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나, 그 반대로 재산을 위해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리는 항상 느끼며 삽니다. 이런 주객이 전도된 의미를 모르는 소유나 삶은, 이번 대림절을 통하여 본 의미를 다시 찾아야겠습니다.



하여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본래 그의 위치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들려주는 말씀이며, 또한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무엇도 최고의 지위에서 그리스도를 밀어내서는 안된다는 점을 힘차게 들려주십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엘리아인가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모세가 약속한 위대한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26-30절에 보면, 유태인들이 요한 세자에게 와서 예수가 세례를 주고 사람들을 가르치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예수를 비난하리라고 기대했으나 요한 세자는 “그분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요한 세자는 예수님의 신 끈을 풀기에도 부당한 자라고 자기를 가리켜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노예가 되기도 부당하다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요한 세자의 아름다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아니고 단순히 전령자요, 전달자요, 예비하는 자로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위대한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무대에서 주역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임무 이외의 지위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를 모든 사람들이 가질 때, 온 세계는 좀더 아름답고,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 안에 진정 그리스도는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남은 대림절을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그리스도 오시기를 간구합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겸손한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실 것입니다. 













 17.          대림 제3주일 (나해)    '항상 기뻐하십시오'          

                                               강길웅 신부





오늘 성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해마다 교회는 사순절과 대림절이라는 전례시기 안에서 회개를 선포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요 또한 그 길만이 주님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체험하는 올바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가 통회 속에서 항상 울고만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순 제 4주일과 대림 제 3주일은 오히려 기쁨을 묵상하며 대축일을 준비하게 합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달픈 처지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생기고 기쁨이 솟구칩니다. 1독서에서 외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줄 메시아가 오시니 하느님께 감사와 기쁨의 찬미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고달픈 이들에게 주님보다 더 기쁨을 줄 자가 세상 천지에 누가 있겠습니까?



특히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누구보다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되며 혹 자기 죄로 인생이 크게 실패했다 해도 생명이 살아 있다면 그는 주님 안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느님 사랑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하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늘 우리 가운데 분명히 서 계십니다. 따뜻한 아버지로서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서 계시며, 강한 주님으로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서 계십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믿는 사람하고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은총의 차이가 다르게 됩니다.



같은 업종에서 서로 장사를 하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쪽은 식구도 많고 병자도 있으며 늙으신 부모도 모시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람 잘 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항상 싱글벙글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하고 물으면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좋지요." 저는 그 친구의 기쁨을 바라보면서 제 자신을 반성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식구도 적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짜증이요 불평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장사가 잘 되는데도 부부간에 화목하지가 않으며 술만 마셨다 하면 집안에 난리가 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냐?"하고 물으면 그 친구도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세상이 뜻대로 안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주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모르니 세상이 뜻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삭막하고 고달픕니다. 평생 슬프게 방황하게 됩니다.



오늘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뜻이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살지 못 하느냐?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불평 속에 서 사느냐?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는 인생은 사막에 오아시스가 없는 인생입니다. 하느님께 자기를 열고 대화하지 않는 인생은 뜨거운 여름에 겨울옷 입고 땀을 흘리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세상을 거꾸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특히 '자선주일'입니다.



참 사랑은 받는 것보다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에 남에게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받지 않아도 될 완전한 부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베푸는 사람은 늘 채워지게 되고 자기 것이라고 늘 움켜 만 쥐는 사람은 항상 부족하여 불안하게 됩니다. 나누지 못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재물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억만 금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묶여진 존재입니다.



참 기쁨은 베푸는 데 있습니다. 남을 기쁘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비로소 기쁠 것입니다.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보십시오. 참 기쁨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도를 해 보십시오. 하느님을 통해서 느끼는 기쁨과 그리고 무한한 감사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18.           대림 3주일 (자선주일)    <요한 1,6-8. 19-28>(나)

                   “주님(야훼)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ꡓ(이사 61, 10)

                                                         심용섭 신부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ꡒ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ꡓ로 이어진다.(원문에 충실한 직역이 아니므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ꡐ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환호 용약한다ꡑ고 이해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물론, 신앙인에게까지도 이런 고백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도대체 기쁠 일이 뭐 그리 있겠으며, 그 기쁨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조차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때이기 때문이다.



또 세속이 제공하는 기쁨(?)이 얼마나 많고도 다양한데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겠느냐고 할 만한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느님은 부담은 될지언정 기쁨의 원천이라고 여겨지기에는 거리가 멀기도 하려니와 구체적이지도 않다. 소위 좀 생각한다는 사람 가운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하느님이란 존재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인류가 얼마나 큰 갈등과 전쟁에 시달렸느냐고 하며 하느님이 오히려 인류에게 고통의 원인인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요구를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기쁠 일은 별로 없다. 순간의 조각에 불과한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모여 이루어 놓은 틀은 방향을 잃고 몰락을 향하여 간다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교회 안팎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구분과 상관없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는 경쟁으로 말미암은 인간 관계의 파괴, 인위적 제도가 자아내는 부패성의 근본 원인에 대한 몰지각,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은 자연에 대한 자연적 접근의 산발성과 단편성 및 불균형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인위적 접근 실험의 연속, 그 접근 자체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진리라고 하는 주장 등이 몰락의 시작이라는 견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기쁠 수 있는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러나 정말 기쁠 수 없는 까닭은 기쁨 자체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이 파괴될 때에는 여러 조치를 마련하느라 분주한데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자연―사랑, 평화, 정의, 자비, 봉사, 믿음, 희망, 일치, 화해, 깨달음 등―이 썩는 데에는 속수무책이다. 기껏 그런 것은 썩을 수 없고 썩었다고 하면 이미 그렇게 불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겪는 일상 생활은 썩은 웃음, 썩은 기쁨을 보여 준다.



보이지 않는 자연은, 체험될 때 일어나는 사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체험되는 것이다. 바른 인간 관계 속에서만 썩지 않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참된 기쁨이 있어야 바른 인간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순환 관계를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면 악순환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에서 기쁨이 부패할 수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교황께서도 이미 경고한 바 있는 세계화라는 틀은 삶을 경제 체제의 측면 하나로 피라미드화하는 것이므로 끊임없는 경쟁 관계와 숫자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삶의 틀로 삼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 전세계는 컴퓨터화하여 가므로 이 과정을 외면하기는커녕 더 증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어디 경쟁이나 숫자화의 체계로 계산되거나 환원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 파괴된 인간 관계에서 참된 기쁨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참된 인간 관계의 복원을 위하여 참된 기쁨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다른 ꡒ곳ꡓ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대림 제3주일의 이사야서 61장 10절의 말씀이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어야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인간의 체제에서 비롯되는 기쁨이 아니다. 따스한 햇살, 살갗에 기대는 아기의 얼굴같이, 다가오는 바람같이 위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듯한 기쁨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관된 성실을 뜻하는 하느님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랑, 신부의 새 모습과 견줄 수 있고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력과 같은 기쁨이다.(이사 61,10―11)



그런 순수한 기쁨을 누린 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한나가 아기를 얻고 본능적인 기쁨에 머물지 않고 ꡒ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용약합니다ꡓ(Ⅰ사무 2, 1)라고 찬양하고 성모 마리아께서도 같은 찬미와 고백(루가 1,46―47)을 엘리사벳에게 들려주고 있다.



신자들에게는 주님이 참된 기쁨을 누리는ꡐ곳ꡑ이 되어야 한다. 그 기쁨을 누림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인간 관계를 복원한다. 그 기쁨은 본적과 주소가 분명한 기쁨이고 기원도 방향도 확실하여 썩지 않고 순수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기쁨이 하느님의 뜻에 기원을 두었음을 말하고 기도와 감사가 따르는 것임을 밝힌다.(제2독서) 그러기에 자신있게 ꡒ늘 기뻐하십시오ꡓ라고 권고한다.



쓰레기 종량제도 중요하지만 우선 썩은 웃음, 썩은 기쁨 좀 버리자. 하느님 안에서 그 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릴만큼 기쁜지도 짚어 보아야겠다.













19.              대림 제3주일 <요한1,6-28> (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민병섭 신부





    우리 나라 조선 시대 때 한 임금이 백성들을 보기 위해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밖 30리쯤 되는 동네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앓아서 병석에 누운 그의 어머니가 탄식하는 말이 “나라님의 백성이 되어서, 한 번도 상감님을 못 뵙고 죽는다는 것은 평생 유감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는 말을 아들이 들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들이 효성이 있어 어머니를 업고 임금님 성에 가서 높은 언덕에 올라가 기다렸습니다. 임금이 가마를 타고 오다가 우연히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니 나이가 서른쯤 되었을 더벅머리 총각이 늙은 여자를 업고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늙은 부인이 젊은 남자의 등에 업혀서 멀리 임금이 탄 가마를 바라보면서 자주 자주 오른손을 들어 눈물을 씻으면서 만수무강을 축수하는 모양이 보였습니다. 업은 총각도 업힌 노인에게 가마가 보일 수 있도록 자주 자주 치키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였습니다.



  옛날 좋은 임금들은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였기에, 그 임금도 타고 가는 가마를 멈추게 하고 그 늙은 부인과 젊은 청년을 앞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모자의 마음을 깨달은 임금은 돈 백 냥과 쌀 한 섬을 내리며 늙은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모자의 충성심과 또 젊은이의 효성에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근처의 다른 마을에 사는 청년이 이 광경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 임금이 다시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 어머니를 등에 업고 그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임금은 그 길을 지나다가 효자가 있던 언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며칠 전처럼 젊은 사람이 늙은 부인을 업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 청년은 임금 앞에 와서 자기는 50리 떨어진 조그만 동네에 사는 촌사람으로 임금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어머니를 등에 업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또 돈 백 냥과 쌀 한 섬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백성들이 그 청년을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항의하였습니다. 청년이 50리 밖에 산다는 것이나,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기를 원했다는 것이나, 청년이 효자라는 것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성문 바로 밖에 살고 있으며, 본래 망나니로 어머니에게 불효하고 어머니가 빨리 죽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구박하고 때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백성들의 항의를 듣고 임금에게 상을 주는 것을 취소하자고 여쭈었습니다. 임금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상을 취소하지 말고 오히려 더 잘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임금은 “그 청년이 본래 불효자라 하더라도 이번은 효자의 흉내를 낸 것이다. 효자의 흉내를 낸 것이야 나쁠 것이 어디 있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었던 것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청년을 불러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라고 가르치고 상을 주어 보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참으로 진짜 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림 제3주일인 오늘 전례의 핵심은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으며,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다.

한편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관심을 자기보다 뒤에 오시고 또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시지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명이며 여기서 그의 기쁨이 이루어지고 있다(요한 3,29-30 참조).

곧 비록 그 자신은 무대 뒤편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은 충만해진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 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주님의 삶을 본받는 삶에서 시작한다. 비록 완벽한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도 효자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그런 삶이 그리고 임금과 같이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이 우리 삶은 진실로 변화된 삶이 되고 주님께 합당한 삶이 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으로 질식되어 삶에 권태를 느끼는 이 세상에 대해 좀더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복음/요한 1,6-8.19-28(나)



   오늘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게 관계되는 세 구절(6-8절)을 요한 복음의 머리말에서 분리시켜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분께 대한 계속적인 증언과 연결시킴으로써 그의 증언이 구원의 역사 속에서 갖는 위대성과 사명을 전하여 주고 있다.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6절)으로 소개하여 그를 이미 오랜 동안 침묵에 파묻힌 예언 시대의 희망을 꽃피우는 예언적 사명을 가진 사람으로 밝히고 있다. 동시에 복음 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의 본질은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빛 곧 메시아가 아니라 바로 그 빛을 증언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요한 복음에서 증언은 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증언은 언제나 예수님의 인격을 직접 인식하고 체험하며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늘 상충과 대립과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곧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등을 여러 방법으로 가려내는 심판 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 과정의 관점이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신원을 묻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 자세는 올바르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심문하는 식의 논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진리 앞에서의 개별적이고도 인격적인 결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보고하고 그들의 결정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참된 '진리', 곧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또 알아뵙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이와 완전히 구분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추종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태도는 겸손하였으며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도 아니었다. 또한 옷 입는 모양과 생활 양식(2열왕 1,7-8 참조)으로 미루어 생각할 수 있었던 엘리야, 곧 말라기 예언서(3,1-3.23.25)의 내용에 따라 ‘주님의 날'을 준비해야 했던 그 엘리야도 아니었다.



  그리고 출애굽의 기적적인 일들을 새롭게 하고 또한 그러한 능력을 능가하면서 모세의 뒤를 이어야 했던 예언자도 아니었다(신명 18,15; 요한 3,14 등 참조). 그는 오직 '빛'을 증언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사야가 말한 대로 “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사 40,3)이다. 공관 복음에서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이 요한을 통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인용만 되고 있지만, 요한 복음 사가는 이 말을 바로 요한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요한 복음에서 역사적인 것보다는 신학적인 면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한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가 알리고자 하는 분의 위대성을 증언하고 사람들이 그분께 대한 갈망과 원의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행위에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하여 드리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진실하고도 성실하며 겸손한 자세가 있어야만 성탄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다.



       제1독서/이사 61,1-2.10-11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결혼식'이라는 상징적인 묘사로써(이사 61,10) ‘기쁨'의 경사스러운 초대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말한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런 인물의 도래와 사명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보호하고 돌보아 줄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 성서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심으로써 그분의 공생활이 시작되고 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이 말로써 그 예언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바로 그분이시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그분을 죽이려 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리 설정해 놓은 모습에 따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하기에 혁명가는 혁명가로서, 평화주의자는 평화주의자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나자렛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모든 사람 특히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서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찢긴 마음들을 싸매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특히 오늘의 제1독서의 두 번째 구절 "주님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안식년은 50년마다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그때에는 사람들을 모두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 재산을 되찾게 해 줌으로써 사람들과 재산, 모든 것의 해방을 선포하고 실시하였다(레위 25,8-17 참조).


  이러한 해방의 선포는 이미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성탄 때마다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게서 선포되고 있다. 참된 해방, 그것은 어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제2독서/1데살 5,16-24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권고가 연이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모두 한 뿌리에서, 곧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영에서 자라 나온 꽃들이기 때문이다. 그 성령은 끊임없이 모든 일에서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작용한다. 온갖 악이 자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늘 기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생활 환경은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허다하게 겪게 되는 불쾌한 체험과 모욕적인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감사의 정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속 생활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영적 생활은 깨끗한 희생 제물을 사르는 불과 같이 세속 생활을 변화시켜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의 인도로 사는 사람은 가장 어두운 현실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만약 태양을 향해 산다면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뒤에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뒤로 돌아선다면 모든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앞에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영으로 산다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어 바오로 사도는 19-20절에서 영적인 선물을 멸시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21-22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곧 모든 역경에서도 선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을 23-24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뵙게 되는 그 날에도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것을 말한다.











 20.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1.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요한 복음 1장 6-8절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말씀(로고스) 찬가(1,1-18)의 한 부분입니다. 복음서 작가는 말씀 찬가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두 번 언급합니다(1,6-8.15). 이 구절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증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씌어질 무렵 이스라엘에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신봉하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네 스승을 빛으로 신봉한 데 대하여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고, 다만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한 증인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합니다(6-8절).



         2.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



요한 복음 1장 19-28절은  세례자 요한의 신분․정체에 관한 질문과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에 관한 질문으로 짜여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제관들과 레위지파 사람들(19-28절),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29-34절), 그리고 자기 제자들(35-42절)을 상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 자신은 오직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23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파견된 바리사이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푸는 거요?’(25절 참조)라고 묻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베푼 세례는 메시아적 의미를 가지는 그런 세례가 아니고 다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마르 1,8)을 알려 주기 위해서 행한 ‘물의 세례’일 뿐이며(요한 1,31.33), 세례보다는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3. 우리의 이해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려주는 유일무이한 계시자이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달리 하느님을 알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임’(요한 17,3 참조)을 깨달아 모두에게 증언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은 얼마든지 자신을 ‘메시아’로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자신은 단지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너도나도 자신만을 앞세우고, 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 시대에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신선한 선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희년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세례자 요한처럼 내 자신이 아닌 내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처 홍보실











21.      대림 제3주일 <요한 1,6-28>(나)             보이지 않는 손



서양에서는 하느님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명한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입니다. 그의 명저인 「국부론(國富論)」에서 개인의 이기심에 입각한 경제행위가 결국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이바지하며 이러한 사적 이기심과 사회적 번영을 매개하는 것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경제뿐 아니라 사회․역사․문화․예술의 발전을 이끄는 힘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학설로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던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신학과는 정반대의 대표적 학설인 진화(進化) 속에도 ‘보이지 않는 손’의 끊임없는 창조가 깃들여 있으며, 이 끊임없는 창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이론을 ‘진화자로서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사상은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홍수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종교와 지역간의 갈등으로 인한 끊임없는 전쟁과 살상, 기아와 질병, 성의 타락으로 인한 정신적 빈곤과 끝간 데를 모르는 과학만능주의와 물질중독 등 얼핏 보면 한줄기 희망조차 없어 보입니다. 이 절망의 시대에 우리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 중심에 서서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샤르댕의 주장은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처음 말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질문을 받자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요한 1,26)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의 세례’(마태 3,11)로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실 예언자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 하고 인사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슬픔과 불행을 물리치는 ‘보이지 않는 손’이며 모든 두려움을 평화로 바꾸는 새로운 창조의 중심임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그들의 ‘한가운데’에 서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으며(마태 28,19)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써 하늘과 사람의 중개자가 되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물리친 승리자가 되시고 마침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슬픔을 ‘어쩔 줄 모르는 기쁨’(요한 20,20)으로 바꾸고 공포를 ‘평화’로 바꾸기 위해 우리 한가운데에 서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분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리석은 인간들인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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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2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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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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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아이콘 orjposdjc
2012-11-2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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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아이콘 xoyjrtnlzl
2013-03-0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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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아이콘 klfgsajjmg
2013-05-29 06:33
MAC Cosmetics,[url=http://maccosmetics-wholesale.blinkweb.com/#14007]mac cosmetics wholesale[/url]
Makeup Artist Cosmetics, [url=http://wholesale-mac-cosmeticsolj.wallinside.com/]wholesale mac cosmetics[/url]
was founded in Toronto, Ontario, Canada alongside Uninhibited Toskan and Unrestrained Angelo in 1984. The in the beginning U.S MAC hold opened in 1991, in Litter York.The new zealand's products were initially specifically designed recompense practised tone artists but are today sold to consumers worldwide.Long encourage of their group telling, MAC cosmetics founders directed their piece specialization assisting professionals in the knockout and fascination industry who had to rely on stultifying cosmetics, harden makeup and station makeup to sire the visual effects needed to vendetta superior lighting during photo shoots. Est??e Lauder Companies acquired controlling behalf of MAC in 1996, then completed their acquirement of the performers in 1998. Unrivalled go down Frank Angelo died in 1997 equitable to complications during surgery. Construction Shiftiness Cosmetics, more wisely known as M??A??C or MAC Cosmetics, is a industrialist of cosmetics headquartered in Latest York City. http://www.datingdutch.com/member/blog_post_view.php?postId=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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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모음2
작성일 2008년 12월 13일 (토) 10:25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3805      
IP: 211.xxx.62
http://missa.or.kr/cafe/?logos.1295.11
“ Re..나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
 

천명(天命)과 사명(使命) 

  박성칠 신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묻고 실천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당신의 온 존재를 아버지의 뜻(天命 천명)에 맞추어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길이 그분의 사명(使命)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명을 완수하며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둔 시간에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살아 당신의 사명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완수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갈 길은 멀고 책임은 막중했습니다(任重而道遠). 때로는 배가 고팠고 때로는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미움과 박해는 끝없이 따라다녔고 마침내 십자가 죽음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은 한 마디로 "목마른 길"이었습니다. 목마른 인생에 동참하는 목마른 길, 그것이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사는 길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 길이 어렵고 힘들어서 목말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목마르다!"(요한 19,30). 그러나 그 목마름은 이제 당신 사명의 완성으로 극복되고 있습니다. ������다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곧 그의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하느님의 일로만 남아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일이 될 때 천명(天命)은 그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의 내용을 복음은 빛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빛은 하늘에서 오는 것, 하늘을 증언하고 하늘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 요한의 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사명을 다할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하늘길로, 믿음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요한 1,7).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천명을 알아들으려는 노력을 통하여 그는 마침내 자기의 사명을 발견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스스럼없이 밝힙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물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천명을 물어 사명을 살아갑니다. 이 길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옵니다. 이 길을 걷고 또 걸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아! 하느님,

천명으로 우리들 사명을 알게 하시고

사명을 올바로 살아 바른길 걷게 하소서!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그분을 만나는 날 열흘 전 

  김학배 신부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이란, 한 신자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장소를 100미터 앞에 두고 상대에게 더 좋은 모습, 더 행복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를 하고, 또 마음은 잠을 설칠 정도로 들떠 있음을 고백하는 가사에 경쾌한 멜로디를 붙여, 많은 이들이 즐겁게 따라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하게 만드는가 보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 있다. 우리의 짝사랑이 아니라 그분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신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영광을 모두 버리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만나러, 우리와 함께하러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이 오시는 날이 이제 열흘 남았다. 기다리는 맘이 설레어 잠을 이룰 때도 웃음이 나오고, 미워했던 이웃들과도 기쁘게 화해 하고,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어려운 이들과 나누며 위로하고, 그분을 만날 준비로 성당엘 가고,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분,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그분이 곧 오신다.” 하고 외치고 싶다.



정말 사랑하면 이래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분을 진정 사랑하는지 의심이 든다. 너무 무디어져 있다. 열흘이 남았는지, 대림초가 몇 개나 밝혀졌는지 그냥 멍하게 바라볼 뿐 아무 감흥도 없이 기계처럼 성당에 머물다 간다. 성사표가 나왔으니 성사를 봐야하는 의무감이 귀찮게 여겨지고, 오히려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성탄 특수에 눈길이 머문다. 우리, 정신을 차리고 오늘 복음 속 인물을 만나보자. 그의 이름은 세례자 요한이었다.



주님이 오신다는 걸 알고 너무 설레고 행복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거리로 박차고 나가 사람들에게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친다. 자격으로 따지면 그분의 신발 끈을 만질 정도도 안 된다고 고백하면서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준비하고 그분을 맞이하라고 외치는 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바람이었다.



이제 준비를 하자. 그분을 만나는 날 열흘 전,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자선을 베풀면서 잠자고 있는 이웃들을 깨워 함께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언제나 기뻐하는 것, 기도하는것, 감사하는 삶이라(1테살 5, 16.17참조)’하신다.



하느님의 부인 

  이준희 신부 

몹시 추운 12월 어느 날 뉴욕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 살 정도 된 작은 소년이 브로드웨이 가의 신발가게 앞에 서있었습니다.

맨발인 소년은 치아를 부딪칠 정도로 심하게 떨면서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측은하게 지켜보던 한 부인이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꼬마야! 진열장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유라도 있는 거니?”

“저는 지금 하느님에게 신발 한 켤레만 달라고 기도 하고 있는 중이에요.”

부인은 소년의 손목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인은 우선 여섯 켤레의 양말을 주문하고,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수건을 빌려 가게 뒤편으로 소년을 데리고 가서 앉히더니, 무릎을 꿇고 소년의 발을 씻긴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었습니다.

부인은 점원이 가지고 온 양말 중에서 한 켤레를 소년의 발에 신겨 주었습니다.

소년의 차가운 발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인은 신발 여섯 켤레도 사주었습니다.

남은 신발과 양말은 도망가지 않도록 끈으로 묶어 소년의 손에 꼭 쥐어 주면서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꼬마야, 하느님을 의심하지 말거라. 자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니?”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띠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부인도 살짝 소년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그녀가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소년이 부인의 손을 잡고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눈에 물기를 가득 머금고 물었습니다.



“아줌마가 하느님의 부인이에요?”



언젠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자선주일에 이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우리 모두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부인이나 남편이 됩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하정호 신부 


오늘은 대림 제 3 주일입니다. 대림 3 주일은 자선주일이며 교회는 오늘을 장미주일로 지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곧 오시리라는 희망에 찬 기쁜 마음을 지니며,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하는 마음으로, 추운 겨울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여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무엇하는 사람인가? 저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특히 신학생 시절 많이 받았고 또한 스스로 자문하여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왜 사제가 되려고 하나?



우리 신자 분들은 어떠십니까? 왜 신앙인이 됐나요? 형제자매님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가톨릭 교회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해 이미 초기 교회 때부터 그 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며 우리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의 존재 목적인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성실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라고 누가 물어봐도 그리고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해도 우리는 당당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며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몸소 그것을 실천합니다. 그의 사명은 빛으로 오실 구원자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존재했던 사람이었고 따라서 요르단 강 건너편 배타니아에서 세례를 주기 시작합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곧 회개를 의미하였고 회개는 곧 예수님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이제 확실히 알았다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오늘 대림 제 3 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다그치는 주간인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간을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자세로 지낼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림절, 달력 성탄이 아닌 진짜 성탄 준비 

  이우갑 신부 


대림 제 3 주일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고 2주간이 지났고 이제 다시 2주간이 지나면 성탄에 다다르게 됩니다. 날짜로 따지면 열흘 남짓입니다. 열흘만 지나면 성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편리합니다. 날짜면 세면 대림절이 지나고 날짜만 지나면 성탄절이 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 우리는 이처럼 '달력 성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이 삶의 변화로 채워지기 보다는 선물과 카드의 준비로 채워지고 마침내 다가오는 성탄은 새로운 삶의 출발이기보다는 밤새 즐겨 노는 하룻밤의 축제로 변한 이 시대의 기다림, 이 시대의 성탄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 미리 예수님의 탄생과 기다림의 자세, 그리고 기다림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대림절이 다만 날짜를 지워가며 성탄 행사를 준비하는 기간이 아니라 나도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돌아보며 준비를 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 1 독서인 이사야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풀이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잘 알 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첫 번째 공식 활동을 선언하시면서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택하여 읽으셨던 말씀입니다(루가4,18이하)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시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오심, 성탄의 의미입니다. 성탄이 하루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라 은혜의 해의 시작이며, 새 하늘 새 땅이 비롯되는 출발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제 2독서에서는 우리가 기다림을 무엇으로 채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간단하면서도 깊이 있게 우리들에게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말해줍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덧붙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나가라"는 권고를 합니다. 대림절을 이렇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복음은 기다림을 채워나가는 우리가 바로 기다림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요한 복음은 그렇게 우리도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 빛을 증언하는 사람,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 길을 닦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저 하루의 행사 '달력 성탄'만을 기다리며 '먹고 마시는 일'(루가21,34)로 들떠있을 때 우리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황용구 신부 


어떤 사람이 아들 셋을 데리고 사막으로 낙타사냥을 떠났습니다. 그가 큰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넌 오면서 무엇을 보았느냐?” 큰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엽총과 낙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흔들고 나서, 이번에는 둘째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형님, 동생, 엽총, 낙타, 그리고 광활한 사막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고,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막내는 선뜻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눈엔 낙타만 보이던 걸요.” 아버지가 비로소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다!”이처럼 목표와 방향 설정은 한 가지여야만 곁눈질하지 않고 온 정열을 그것에 집중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대림초의 세 번째 연보라색초가 켜졌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하느님 말씀 모두가 구세주 탄생이 임박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고, 제2독서에서도“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시선, 정신,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요. 당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실 것이요.’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줍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28). 바로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리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미리 알려주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걸어가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대림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대림시기를 통해 조금씩 맛보고 있는 이 기쁨을 우리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기쁨과 사랑을 나눌 때, 참다운 기쁨과 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나눔은 모든 것을 버리시 고,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나눔을 통해 우리 가운데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분을 기억하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뻐하는 것 -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춘우 신부 


성탄을 열흘 앞두고 있습니다. 요즘엔 신문도 티.브이(T.V.)도 보기 싫습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만 합니다. 전망이 어둡다느니, 세계 경제가 공황상태에 빠졌다느니 하니까 마음만 움츠려 듭니다. 자동차 생산을 줄인답니다.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들부터 정리가 될 것이고, 하청업체들 역시 고용 불안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예고입니다. 두 가지 일을 해도 생계유지가 힘겹다는 가장들의 한숨소리도 들립니다. 사회에서 기쁨이 사라집니다.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현실이 이럼에도 주님께서는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이 어둠을 몰아 낼 빛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어둠에도 불구하고 기쁨 가득 살아갈 희망이 있습니까? 세상의 어떤 아픔과 두려움도 빼앗아 가지 못할 확실한 희망이 있습니까? 이러한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 따라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서 희망을 보면 모든 노고가 오히려 기쁨이듯이 말입니다.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희망은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빛을 증언하러 온 자’라고 소개합니다. 자기가 빛이 아닙니다. 자기가 해답이 아닙니다. 자기가 희망이 아닙니다. 빛은 다른데 있습니다. 해답은 다른데 있습니다. 희망은 다른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빛이시고, 그분이 내 삶의 해답이시고 목적이시며 희망이신 겁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증언했던 이유로 도끼에 목이 잘리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해답이고 희망이었으니까요.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도 그것은 다 지나가는 조각구름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들었다 놨다 해도 그 파도 위를 걷게 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성탄의 신비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나의 해답이시고 희망이신 주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오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라는 말입니다. ‘먼저’는 시간상 앞선다는 의미 외에도, ‘불구하고’란 의미가 더 큽니다.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함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를 찾아주시고 나의 해답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증인입니다. 증인은 법정에서 ‘보탬도 뺌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선서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하며 행하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 ‘먼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진실된 모습일 것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이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고아인양 슬퍼하는 건 진실된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근심에 싸이고 슬픔에 잠겨 산다면 이는 무의식중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요 14,18)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진실입니다. 아멘!





요한 1, 6-8. 19-28. 

  서공석 신부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지만,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닙니다. 요한은 다만 이사야 예언서가 말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종의 자격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활동을 소개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언급합니다. 마르코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하지만, 루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그 사실 조차 말하지 않습니다. 네 복음서가 하나같이 긍정하는 것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이 요한에 대해 굳이 그런 언급들을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이 초기교회 신앙인들에게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무렵, 요한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은 빛이 아니고,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며,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세례는 베풀었지만, 예수님과는 비교되지 못할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가게 하겠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뜻이 담긴 언급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 시대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죄를 씻는 의례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선포하였고,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삶을 바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여 삶을 바꾸라는 요한의 세례 운동에 공감하고 가담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요한을 극찬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그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11,11) 초기 교회의 정황으로 보아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발설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들어서 복음서 안에 기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삶을 바꾸는 회개에만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체험은 요한의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요한은 사람을 엄하게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10; 루가 3,9). 요한은 이렇게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하실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을 아무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먼저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백 마리 중 한 마리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잃었던 한 마리를 기어이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며 기뻐하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루가 15,1-7). 그리고 이어서 은전 한 푼을 잃었다가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어서, 그것을 찾아 기뻐하는 여인의 이야기(8-10)가 있고,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났던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하며 아들을 맞아들이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11-32)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함께 계시고 싶어 하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이 호칭에는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기원일 뿐 아니라,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보살피며 키우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 주실 것입니다...그대들이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11,9. 13).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이신 성령을 주셔서 우리 안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 있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명을 주듯이, 하느님도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생명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5-36). 하느님의 생명, 곧 숨결 혹은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심판하고 벌주는 하느님을 가르친 요한의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무서운 하느님을 대면하게 하는 요한을 넘어서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비하신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살아계신 성령, 곧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자기 생명의 기원으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도록 노력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처하며 살던 사람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병자를 고쳐 주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사람을 살리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성숙한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의 손 

  배상희 신부 


오늘 강론의 주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기다림의 시기인 대림3주일은 성탄이 가까워졌음을 희망하고 기뻐하는 장미주일입니다. 동시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선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행위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행위로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폭격으로 파괴되어 버린 성전은 깨어진 벽돌 더미와 유리조각만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절망과 상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새로운 성전을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매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전공사를 시작하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벽돌과 유리 조각 더미 속에서 성전에 모셔져 있었던 큰 십자가가 발견된 것입니다. 두 손만 떨어져 나갔을 뿐 다른 곳은 상처 하나 없이 침묵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안배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신자들은 다시 복구된 성전 중앙에 두 손이 없는 십자가를 그대로 모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조각가 한 사람이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두 손이 없는 예수님께 새로운 손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손이 없는 그 십자가를 그대로 모셔두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손이 잘린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소년소녀 가장들, 독거노인들 등등. 실의에 빠져 있는 많은 이들에게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지만 지금 당장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손이 되어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오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예수님의 손이 되라고 자선 주일로 정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변찬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하며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려줍니다. 또한 오늘 복음의 초반부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빛은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빛은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림 3주일인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절약과 근신의 결과물을 이웃과 나누도록 촉구하며 대림 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냅니다. 왜 교회는 자선 주일을 지낼까요? 먼저 자선 慈善이란 말의 뜻은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말로 적선 積善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선기금, 자선냄비, 자선단체, 자선병원, 자선사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만, 적선기금, 적선냄비, 적선단체, 적선병원, 적선사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자선과 적선은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전을 보면 자선(慈善)의 ‘자 慈’는 ‘사랑’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또한 ‘어머니’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자기가 받는 즐거움을 다른 이들도 받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자선은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저 착한 일만 한다고 해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선은 흔히 생각하듯 물질적인 재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말을 들어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또 때로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자선입니다. 물론 물질적 여유가 있다면 그 재화를 어려운 이들, 필요한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 삶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전하며, 그 사랑을 드러내어 이웃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을 충실하게 삶으로 선포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자신의 영성생활에 충실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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