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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7:51
분 류 연중31-3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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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모음 ”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

2. 최기산 주교(가)/2

3. 강길웅 신부(가)/4                             4. 김현준 신부(가)/5

5. 서경윤 신부(가)/7                             6. 김몽은 신부(가)/9

7. 심판은 사랑의 기준(가)/11                   8.최후심판(가)/12



2        연중 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 31-40 (가) 그리스도 우리의 왕

최기산 주교



  가치혼돈의 시대



 요즘은 참 가치가 거짓 가치에 의해서 밀려나고 있다. 물질이라는 가치는 어느새 인간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하느님도 신앙인의 마음 속에서 제2의 가치로 밀려나고 있다. 이제는 사랑과 진실, 자비의 고귀함도 제2의 가치로 여겨지는 암울한 시대가 되였다.



  약 200여년전 조선의 유교 학자들이 불교의 절과 암자에 모여 천주교의 진리를 연구하고, 그 진리대로 살 것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예사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명망가요, 학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의 그들은 오늘날 우리네 식자들이 그리도 귀하게 여기며 탐구의 열을 높이고, 목청을 높이며 배워야 한다는 불교와 유교의 교리와 사상을, 참 진리인 하느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제2의 가치로 여겼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천주교 교리에 매료되었었다. 그래서 교리를 배우는 동안 교리대로 살았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세수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흠숭하는 예를 드렸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으며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류에게 오직 왕은 하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는 나의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선조들의 신앙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승방을 찾아가서  진리를 탐구하겠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선을 하기도 하고, 하안거, 동안거를 하고 돌아왔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거기 가서 피정을 한다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세월이 많이 변했다.



  또 그곳에 가면 마음이 안정된다느니, 피정다운 피정을 한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저승에 계신 우리 조상님들이 보시면 웃으실 일이다. 과거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우리보다 식견이 모자라서 천주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감사하며,․타인들에게 전했을까?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엔 구세주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였기에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우리의 주님, 나의 주님,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화, 토착화시대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신앙인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우리의 왕



  왕은 누구인가? 전권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전권을 가지신 분이고 나에게 전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말하신 분이시고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묵시 12, 5)이시다. 교회의달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은 그리스도 오직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함으로써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추슬러, 그리스도 좌에 무릎을 꿇는 날이다.



  아시아 주교회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메시아, 즉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다시 강조 발표하였다. 지난 10월22일에는 유럽주교회의에 참석한 시노드 교부들이 최종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유럽의 희망의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메시지에서 “오늘날 온갖 형태의 고통과 불안, 죽음으로 우리들의 희망이 약해지고 있다. 우리는 인류와 역사의 유일하고 참된 희망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선언했다.



  복음의 메시지



  그리스도,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시며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왕을 제쳐두고 다른 왕을 찾아 헤매는 것은 모반이다. 그분은 사랑의 왕이시다. 이 세상의 왕들은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지만, 그분은 사랑에 관한 심판만 하실 것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한 대로 심판 받을 것이다. 그분은 사랑의 자(尺)로 재실 터인데, 길이가 짧은 사람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하는 말씀이다.

인간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눈길을 한번 더 주고 잘해 주게 마련이다. 의인들은 연민의 눈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늘 생각하고 그들에게 잘해 주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잘해 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어떤 꿍꿍이속이 있었다면 모두 적어 놨을 것이다.



  사랑이란 자신의 이익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인간이기에,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에 무조건 베푸는 것이다.





3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 34 주일)   마태 25, 31-40(가) 누가 우리의 왕인가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34,11~12.15~17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 

제2독서 Ⅰ고린 15,20~26.28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 

복 음 마태 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아 그들을 서로 갈라놓으실 것이다)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실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오히려 봉사하는 왕,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왕으로서 가난하고도 비천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왕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요 세상 모두를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된 것은 기원 전 11세기경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에겐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왕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등장되는 왕들은 모두가 백성을 실망시키는 왕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다윗'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다윗'을 소망하는 백성들의 기대는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되며 언젠가는 다윗처럼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시켜 복된 나라로 이끌어 줄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런 왕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모진 박해 생활과 식민지 생활에서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등장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조국을 식민지에서 건지고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며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그분은 어쩌면 외면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성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분명히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왠지 속 시원히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병자들 치유요 그리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뭐 그런 소극적인 일뿐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으며 군중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는 아직도 안 왔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3차 중동 전쟁에서 다얀 국방상이 이스라엘을 6일 만에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얀을 일시 메시아로 보았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왕권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석 위에 자기 왕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가 주님보고 왕이 되어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천국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보통의 왕과는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왕이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으며 감옥에도 갇힌 병들고 비천한 인생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왕이며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만이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방향과 그 본질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왕'이라는 개념을 착각한다거나 어긋난 왕을 찾고 있다면 그는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언젠가 ‘꽃동네'에서 자신도 불구자이면서 다른 불구자를 도와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도움을 베풀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고 천국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그들 가운데 주님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왕궁'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교회 자체도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궁전'을 짓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바라보고 병든 자를 바라보십시오. 슬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죄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바로 그들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을 환영하여 당신 시민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4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31-46 (가) 지키고 사는 명령  

                                                         김현준 신부



11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교회 전례력으로도 일년의 마지막 주일인,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복음으로 듣는 주일이며, 내게도 '생활 속의 복음'을 쓰는 마지막 주일이기도한 오늘, 좋아하는 '옛날 먼 옛날에'라는 동화를 함께 듣고 싶다.

  

어느 날, 한 고관 나리가 어떤 곳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장한 병졸이 엄숙한 얼굴로 파수를 보고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처는 허허벌판일 뿐 중요하다고 생각될 만한 건물은커녕, 물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리는 파수병한테 물었다. “자네, 무엇을 지키고 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파수병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예, 저는 오로지 상관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고관나리는 상관을 찾아가 물었다. 그러나 그 상관 역시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했다. 나리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는 높은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오로지 빈 명령만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바뀌어 옛날 먼 옛날에 큰 성이 있었고, 그 성안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어 여러가지 화려한 꽃이 만발하였다. 어느 날 아침 꽃을 좋아하는 왕이 꽃밭 사이를 산책하다가 후미진 곳에 핀 아주 작은 낮선 꽃을 발견하였다. 왕은 이 가련한 꽃이 마음에 들어 혹시나 짓밟힐까 염려하여 파수병을 세워 이 꽃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다. 옛 성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꽃밭은 허허벌판이 되었다. 그런데 빈 명령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의 복음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의 총 결산인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의 ‘나'에게 지켜지는 가르침인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빈 명령'인가?

  

우리는 혹시 이 가르침을, 무엇을 지키는지 그 목적도 모르고 그냥 엄숙한 얼굴로서 있기만 하는 파수병처럼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의 실천적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신 “나에게서 떠나라, 그리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는 그리스도왕의 명령도 빈 명령일 수 없다,


그렇다. ‘사람의 아들'을 알아 뵙는 일과 '여기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이 있다. 즉 대신관계(對神關係)와 대인관계(對人關係)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과 상호작용이 있다. 인간의 근본은 하느님이며, 그 분과의 관계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은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최후의 심판 비유의 핵심은 바로 이 두 관계에서의 실천적인 행동이다. 세상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왕이 어떻게 사람들을 심판하실지, 그 심판의 척도는 실천적인 행동, 즉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행동이다. 우리 구원의 결정적 가치 기준이 어떻게 말했느냐,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했느냐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 역사를 들추어보면 수많은 왕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였고, 지금도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이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옷을 입은 양 착각하고, 보란듯이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를 행차하면서 ’자기를 섬기라'는 크고  작은 임금님들이 많다. 순진한 어린이의 눈, 진실의 눈으로 불 때는 “야!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왕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말․생각이 아닌 행동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그리스도왕은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유다인의 왕(INRI)'이라는 억지 죄목의 명패를 달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기를 섬기라'가 아닌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잘하라’는, 다른 왕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명령을 주셨다.

이 명령을 뒤집어 보면, 그리스도왕은 우리의 이웃 안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명령이 ‘옛날 먼 옛날에' 이야기에서처럼 빈 명령으로 되풀이되는 오늘의 현실이지만, 세월이 흘러 장면이 바뀌면, 바로 나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살아오면서 내가 상처 주고 소외시킨 사람들을 한사람씩 떠올리며, 또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마음으로 주의기도 한번씩 바치면 어떨까, 그럴 때 빈 명령이 아닌, 지키고 사는 명령이 되지 않을까.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왕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31-46 (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

                                                              서경윤 신부





「그래서 이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마태 25,46).

  겨울을 재촉하는 늦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이미 깊어버린 가을의 황량한 들판과 떨어져 비에 젖어 흐트러진 낙엽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허전하고 쓸쓸하게 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훌쩍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연히 틀어 놓은「섹스폰」곡 모음의 애절한 가락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구어 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교회의 전례주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지막 주일이지만 그 때마다 또한 반복해서 지난 1년을 후회하고 똑같은 결심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불경기라고들 합니다. 하기는 불경기란 어떤 분이든 언제든지 있어 왔고, 또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회사마다 무슨 기구 축소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TV는 30․40대 퇴직자들의 처절한 구직 현장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TV드라마도「가을 소나타」나「아내가 있는 풍경」등 40․50대의 명예 퇴직자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봉급 생활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도 언제 회사를 그만 두게 될 지 불안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꼭 불운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군인들이 계급 정년이나 연령 정년에 걸려서, 30대나 40대에 제대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군인들은 40․50대에 모두 예편을 합니다. 불안했던 마음이야 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대부분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약간은 느긋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지원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수험생들이 아직도 해방감에 젖어 들기는 이릅니다. 여전히 많은 학생들은 밤잠을 줄이고 독서실을 찾아야 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 불합격 판정을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심정은 누구나 경험해 봐서 다 잘 압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 현장은 환호와 좌절이 극명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학창생활의 전부도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마지막을 겪게 됩니다. 무엇이나 시작한 것은 마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역시 연중 마지막 주일도 지나고 나면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중에

도 이 생에서는 최후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다른 마지막은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이것만은 재도전의 기회가 없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의 시작을 믿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도 닥칠 마지막이건만 마치 나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양 살아갑니다. 직장을 떠나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회사원 같지도 않고, 대학에 지원해 놓은 학생들만큼 조마조마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분위기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면 약간 심란할 정도입니다.

  

창밖에는 계속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감나무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빠알간  감알만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비를 맞은 감은 더 진한 색깔을 드러내는 듯하고 땅에 떨어진 잎사귀는 우중충한 색깔이 되어 젖은 쓰레기처럼 되였습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면, 주인은 어지럽게 뒹구는 낙엽을 비로 쓸어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감알은 조심스레 따서 바구니에 담아 집안으로 들여갈 것입니다. 그 감은 먹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어 같은 생명을 누리며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세상을 함께 살고서도 악인과 의인이 갈라지듯이, 한 나무에 달렸던 감과 잎이 갈라지는 순간에 나는 감의 신분이 될지, 아니면 낙엽의 신세가 될지,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에는 침이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6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4, 15-35 (가) 최후심판

                                               - 김몽은 신부-



오늘은 교회력에서의 한 해를 닫는 마지막 주일로서, 그리스도 왕 축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세주인 동시에, 만민의 왕이시다. 그분은 이 세상 마칠 때에 왕으로 임하시어, 만민을 심판하실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의 심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을 들려준다.

이제까지 주님은 비유로써 말씀하셨지만, 오늘의 복음에서는 주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의 영원한 상벌을 명시적으로 전해준다. 주님이 재림하시어 만백성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시고 물론 죽은 자들도 부활하여 그 자리에 함께 모인다), 선인과 악인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양분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상을 받는 사람은, 불우한 형제에게 따뜻한 사랑의 정을 베푼 사람이다. 믿음은 중요한 것이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야고 2, 17)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하신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와 같은 선언을 받은 오른편에 선 착한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을 뵈옵고 주님께 그와 같이 해 드린 일을 기억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과분하신 칭찬에 몸둘 바를 몰라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그때에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말씀은 신비체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동시에, 전 인류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 안에 한 가족을 형성한다는 세계 인류 공동체를 명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 다음에는 왼쪽에 있는 악인들에게 주님의 심판이 내리신다. 그 심판은 선인들에 대한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은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매년 한국의 인구만큼이나 되는 약 사천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궁핍한 이웃을 외면할 때 주님의 궁핍함을 보고 외면하는 것이 된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이 항변은 너무나도 이기주의적이며 신비체로서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변명은 되지 못한다. 주님은 선언하신다.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현세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병든 사람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들에게 사랑을 나눌 것을 갈망하신다.

눈이 어두워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루가 24, 16) 주님은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데 우리의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앞을 향해 나아가려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다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고”(요한 9, 39)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지 못하는 크리스천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사랑과 믿음을 행동으로 잘 실천하는 크리스천은 자주 주님을 뵙고 주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자주 주님을 뵙고 대화할 수 있는 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7           연중 제34주일   마태오 25,31~46 (가) 심판의 기준은 사랑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결코 멈출 줄 모르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서 지나가고 사라진다.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있고 앞으로 살아 갈 날이 있다. 살아 온 날은 지나가서 사라진 시간이고, 살아 갈 날은 지나가서 사라질 시간이다. 살아 온 시간이든 살아 갈 시간이든, 지나가서 사라지는

것이 시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은, 돌아 올 수 없는 과거로 사라지면서 끝난다. 이렇게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과거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시간의 한계 안에서는 무의미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영원을 위해서 존재한다. 영원 안에서만 비로소 시간은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간의 끝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성찰하게 한다.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 그것도 두 번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인생을 산 결과가, 영원 속에서 얼마나 위대하고 심각한 결과로 끝없이 남게 되는 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묘사하시는 심판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는 우리 자신이 방관자가 아니라, 그 심판의 현장에서 심판 받는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하시는 분은「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심판받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창조 이래 최후의 심판 때까지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이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신 예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이 부활한 육체와 결합한 영혼을 가지고 모이게 된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의인들과 죄인들을 서로 갈라놓아, 각각 오른편과 왼편에 자리잡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정의가 원하는 데로 최후의 심판을 행하신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은,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서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간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죄인들은,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라는 준엄한 단죄를 받으며,「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지나가는 모든 시간은 끝나고 영원만이 끝없이 계속된다.











8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4, 15-35 (가) 최후심판





Ⅰ. 죽음과 심판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비록 환상적인 교리로 여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실감하지는 않는 듯이 여겨집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사도 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라고 외웁니다.



그러나 정말로 믿습니까? 특별히 젊은이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은 거리가 먼 것 또는 맨 나중에야 마지못해 생각하는 체 하는 것임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 어찌나 굳게 뿌리박고 있는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사실이 이와 정반대인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육신과 영혼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 끝없는 완전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 중에 영원히 살거나 또는 끝없는 고통과 증오 중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의 선택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도 제 멋대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리고 영원히 항상 책임을 지는 자들입니다.



Ⅱ. 지난해의 반성



우리는 작년 대림절 때 “주 예수여, 오소서”하고 부르짖으면서 새해를 맞이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탄 때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서 그 영광을 보았고 주님의 공현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성령 강림 때에 우리 영혼과 성 교회의 생명인 천주성신을 받았습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결과를 아름답게 간추리고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암흑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구원과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이 한 해를 사시면서 우리에게 사는 방법을 보여 주셨고, 미사와 성사에서 이 교훈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할 힘을 주셨습니다.



Ⅲ. 양심의 성찰



연말은 양심을 성찰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우리 각자는 작년 이 때보다 죽음과 심판이라는 우리의 재판을 맞이하는데 한 발자국 더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존재를 좀더 정확히 살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남이 보기에 좀더 그리스도답게 보이고 있습니까? 남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태도, 그리스도의 인내,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작년보다 전교 정신이 좀더 강력합니까?



신자 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생각의 모든 면에 그리스도께서 점차로 침투하시는 것 따라서 점차로 그리스도답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소유하고 또 주님께 소유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슨 자선 사업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것이 우리 심판을 판가름하는 표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이에게 행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나에게 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죽음과 심판이 어느 순간에라도 닥쳐올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신문기사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보고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있는 일이니 구태여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잃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주께서 심판하러 오실 것을 대비하기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다면, 두려워하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그리워하며 주님을 사랑하여 심판에 대비하기를 주께서는 원하십니다.

모든 교우들의 본질적 소명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원하며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원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갈망과 우리가 희구하는 행복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완성을 부르짖는 끝없는 심연과 같습니다.



이 심연이 채워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무한한 심연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그분은 이 심연을 만드신 분 곧 우리 하느님 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심연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하등 두려운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모든 이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게 하시어, 세속 욕망에서 벗어나, 우리의 소망을 천상에 오르게 하소서”(청원기도)



Ⅳ. “평화를 주려 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전(全)구원 행위는 주의 일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아울러 세상 마칠 때의 재림도 포함합니다. 미사는 우리를 위해 이 전 구원 행위를 재현합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고통스런 인간 조건의 구렁속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나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으오니,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봉헌송).



미사때 우리는 우리에게 재현되는 구원을 맞이하여 서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구원의 현재 속에로 융합됩니다. 과거는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정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미래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 넘친 희망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 하느님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오는 것입니다. “나는 재앙을 내리려 하지 않고 평화를 주려 하노라. 나를 부르라. 너희 기구를 들어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도처에서 불러들이리라”(입당송) 주 예수여, 오소서. 지체치 말고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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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11월 17일 (월) 22:46
분 류 연중31-3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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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모음 ”
 

그리스도왕 대축일

1. 말씀읽기: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2. 말씀연구

연중의 마지막 주일을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바로 세상의 왕 이심을, 나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들처럼 군림하거나, 강압을 행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통치방식은 바로 사랑이십니다. 내어주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바라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면 나는 예수님의 통치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자녀들과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자녀들을 판단하시는 방법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나의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소홀히 하고 있는 면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시는 이유는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상급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오시면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길을 걷고 있던 나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한 생을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내가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열심히 살았을 때의 일입니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재림) 진정한 의미의 상선벌악이 모든 이들에게 보여질 것입니다. 지금은 의롭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결코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날에는 예수님께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입니다. 양은 뽑힌 선인들을 의미하고 염소는 멸망할 악인들을 의미합니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염소는 양보다 성질이 거칠고 그 먹이도 다릅니다. 양은 목초를 뜯어먹지만 염소는 나뭇잎이나 잡초 따위를 즐겨 먹습니다. 물론 산에서는 좋은 것만 먹기도 합니다. 싸움도 잘하고 도망치기도 곧잘 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때때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그렇게 갈라놓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선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얼마나 깊은 일치를 이루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에서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이 성실히 노력하여 두 배로 늘렸고, 그들에게 내리신 축복의 말씀, 즉“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나라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해 주신 나라로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나라입니다. 바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나를 위해서 준비해 두신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가?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도와 준 사람들입니다. 굶주린 사람들과 목마른 사람들, 그리고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죄 없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사랑하셨고,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축복을 받을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어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이들은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필요하신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조건 없이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하지만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라고 의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사람들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내가 오늘 이런 선한 일을 했구나!”라고 떠벌리지 않는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덕 있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자비를 베풀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베푼 사랑의 실천을 당신에게 해 준 것과 꼭 같이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은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예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이들에게 이제 기회는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잡지 못했기에 그들은 벌을 받게 됩니다. 자기들만을 생각하고, 도움의 손길에는 냉정하게 거절했던 사람들의 말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내가 듣게 되면 어떨까요? 어떻게 변명할까요?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악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굶주린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외면했고, 목마르신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마실 것을 드리지 않았고,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헐벗으신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외면했고,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혀 계신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돌보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들추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실 때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더 나아가 외면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악인으로 판명 받은 사람들은 항변을 합니다. “주님! 언제 당신께서 저에게 도움을 청하셨습니까?”라고. 주님께서 도움을 청했다면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의 심판은 단호합니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의 심판은 번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로, 악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인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왕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십니까? 나는 왕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② 형제자매들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무엇을 해 주고 있습니까? 혹시 마음만 먹고 실천 못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해 주기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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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1:14
분 류 연중31-3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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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모음 ”
 

연중 제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제 1 독서 : 에제 34, 11-12. 15-17

제 2 독서 : 1고린 15, 20-26. 28

복     음 : 마태 25, 31-46



제 1 독서 : 에제키엘서 33-39장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후의 예언으로서 복구와 희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목자로 나서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표현법으로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임금과 지도자들을 뜻한다. 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살진 놈을 잡아먹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에제 34, 2-10)은 백성에 대한 봉사를 하는 대신에 잘못된 정치로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왕들과 지도자들의 실정을 암시한다.

이제 주 하느님께서는 그릇된 목자들을 물리치고 몸소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구실을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이미 바빌론 유배의 끝을 내다보고 있다(34, 13 참조). 또한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주님은 양과 염소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여기서 양은 주님의 백성을 뜻하고 염소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뜻한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마지막 날과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고린토 신자들의 물음에 대답한다. 아직도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각시키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모두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이유를 논증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이 온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생명과 부활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부활의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증명되었다.



복     음 : 인류의 마지막을 묘사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묵시 문학적 이미지를 활용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최후의 심판 비유를 말씀하시며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놓는 임금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심판의 기준은 애덕의 법이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한 사람들을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서 중에서 주님과 고통받는 사람이 완전히 동일시되는 유일한 대목은 이 비유뿐이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다(마태 8, 17). 그러나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행동의 목록을 이 비유에서 뽑아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육체에 필요한 선행만 꼽게 되는 것이다. 비유의 결론은 서로 대칭되는 두 구절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40절).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45절).

애덕은 믿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애덕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전례를 지냄으로써 전례 주년이 끝나게 되는 날입니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엄숙히 선포하는 축일인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분임을 길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라는 양떼를 먹여 기르는 대신 그들의 젖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를 신랄하게 비난한 뒤 하느님께서 당신 양떼를 그들 손에서 빼내시어 당신 친히 참 목자의 열정으로 되돌려 보내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양떼를 쉬게 하리라.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자기들의 양떼의 괴로움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줄 착한 목자야말로 참된 왕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이 메시아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즉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을 뜻합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해 군림하는 세상의 왕들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법이나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감싸는 분이 바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 착한 목자도 최후에는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에제키엘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리라.”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판 기준은 오늘의 마태오 복음을 통해 명백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착한 목자로서 상처입은 이들을 싸매주고 길 잃은 이들을 찾아주고 괴로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었기에 당신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즉 형제애를 얼마나 실천하였느냐가 삶을 저울질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그들은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낯선 외국인들,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병든 이들입니다. 이들 안에 계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알리키퍼라는 시골에 케니 이스터니라는 열 살짜리 소년이 살고 있습니다. 케니는 태어날 때 다리에 이상이 있어 부득이하게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상반신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케니는 결코 자신의 보기 흉한 몸을 비관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티없는 밝은 표정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신나게 거리를 누비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케니가 다니는 뉴호라이존이라는 학교에는 신체나 정신에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매일 스쿨버스로 통학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케니는 활기찬 모습으로 착실하게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 케니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고무 다리를 부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케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선생님들이 케니에게 억지로 고무 다리를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무 다리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벗었다가 다시 붙이는 일은 몹시 힘들기 때문입니다. 케니가 불편한 고무 다리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면 언제나 친구 폴이 뒤따라옵니다. 케니보다 훨씬 증세가 심한 폴은 목과 손이 심하게 흔들일 뿐 아니라 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언제나 화장실 밖에서 케니를 기다렸다가 ‘케니, 괜찮니?’ 하고 간신히 한마디 묻고는 뒤에서 매달리듯 휠체어를 밀어줍니다. ‘나에게는 다리가 있지만 케니에겐 다리가 없으니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돼!’ 폴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친구 케니를 돕는 것입니다. 케니 역시 자신이 휠체어를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도움을 거절한다면 폴이 실망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비틀거리며 휠체어를 밀어주는 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폴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천히 교실로 되돌아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장애인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진정한 사랑이요 형제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왕권은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아낌없는 사랑일 것이며 이 사랑의 베품, 즉 자비는 죽음과 권세의 악신을 물리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통해서 입증되기에 죽음을 넘어서서 만물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우리도 이런 권능 아래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의 다스림을 통해 드러나지만 마침내는 사랑의 척도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의 왕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들도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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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8
분 류 연중31-3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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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34 주일 : 그리스도 왕 대축일



그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 1 독서 : 에제 34,11-12. 15-17



제 2 독서 : 1고린 15,20-26.28



복 음 : 마태 25,31-46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전례로써 전례주년이 끝나게 되는 날이다.

  이 축일이 설정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 교황비오 11세는 1925년 성년을 마감하시면서 회칙 「콰스 프리마스」(Quas Primas)로 이 축일을 선포하였다(Acta Apost. Sedis, 17(1925), p. 503이하 참조). 하지만 이 축일의 근원은 훨씬 더 멀리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올라간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정말로 왕인지 어떤지를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요한 18,37). 그러나 이에 앞서 “내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36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 묵시룩에서는 흰 말을 타고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라는 칭호가 적혀 잇는”9묵시 19,16) 신비스러운 인물로 요한에게 나타나고 계시다.

교회가 이 축일을 전례주년의 마지막에 제시하고있는 이유는“그리스도의 왕권이 전례적으로 영성적으로 전례주년 전체를 종합하고 있고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으로 놀라운 총체적 묵상 자료를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리스도분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진정 복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데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인류와 교회의 생활 속에서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론은 곧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그 형언할 수 없이 깊고도 넓은 우주적 차원과 신학적 체계를 통하여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복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양함으로써 그분의 신성을 찬미하고 그분의 인간성을 통해 그분을 가까이 할수 있는 동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물론 그분의 주권과 권세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을 중심으로 거룩한 성령이 넘쳐흐르고 모든 인간의 운명이 그분을 향해 이끌려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머리요 스승이시며 구세주시고, 육화된 말씀, 하느님의 어린양, 사제 그리고 무한한 선성의 희생 제물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교황 바오로 6세, 1976년 11월 24일 일반알현 때 한 강론).

 보다시피 오늘은 우리의 신앙과 또한 우리의 ‘전부’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드려야 할, 우리의 생활 모두가 종합되고 있는 축일이다.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지극히 세심한 배려에 의해 선택된 오늘의 독서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의 ‘의미’를 상당히 완벽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순전히 인간ㄷ르과 사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지배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더 나아가 특히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각별한 배려에 대한 긍정이요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시키는’ 그분의 의지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왕권은 ‘참여적’ 왕권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이들 모두를 거기에 초대하신다.

  우리는 이같은 내용을 제 1 독서에서 본다 :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라는 양떼를 ‘먹여 기르는’ 대신 그들의 젖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에제 34,3) 유다의 왕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뒤 하느님께서 당신 양떼를 그들 손에서 빼내시어 당신 친히 참 ‘목자’의 열정으로 먹여 기르시고 귀양살이 땅에서 되돌려보내주시리라고 예언한다 :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오리라.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에제 34,11-12, 15-16).

 ‘목자’라는 개념은 고대 동방과 희랍의 문학 전승에 있어서 ‘왕의’ 품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여기서도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하지만 그분은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자기 양떼를 다스리지 않고 ‘섬기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길 잃은 양떼를 찾으러 가시고 약하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며 모든 양들을 보호해주신다. 따라서 그분의 왕권은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그런 왕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장(章) 끝부분에서 야훼는 당신께서 대리자로 삼으시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즉 다윗이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사람을 보내어 목자로 세워주시겠다고 한다. :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그가 내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리라…”(에제 34,23).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임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요한 19,11-18)로 제시하셨다(마태 18,12-14: 루가 15,4-7 참조).

  그러므로 전례상 잘못된 점이 없다. 즉 오늘 전례는 야훼께 대한 대목을 제시함ㄴ서도 그것을 넘어 멀리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 곧 자기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과 헌신을 통하여 ‘왕권’을 행사하신 그분의 모습을 내다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사랑을 통해 행사되는 왕권이라 해서 ‘심판’의 왕권마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우리는 마지막 구절에서 볼 수 있다 :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수양과 수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리라”(34, 17). 마태오에 의해 서술된 장엄한 최후의 심판 장면 전체가(25,31-46) 에제키엘서의 이 대목에서 준비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구원을 하지만 또한 단죄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군림하셔야 합니다”



  제 2 독서로 제시되고 있는 사도 바울로의 글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왕권은 긴장과 싸움을 통하여 확보된다 :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실 ‘왕국’은 “그분이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신 후에는”(1고린 15, 24) 마침내 성부께 바쳐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분명히 하느님의 나라에 적대적인 세력으로서 천상적 지상적 모든 세력을 말하고 있다(1고린 2,6; 에페 1,21; 골로 1,16;2, 15;1 베드 3,22 등 참조).

  오늘 제 2 독서가 취해지고 있는 문맥에서 사도 바울로는 죽은이들의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가 볼 때에 죽은이들의 부활은 확실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고린 15,16). 하지만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준엄한 죽음의 법 자체를 넘어서 있는 최고 왕권과 능력의 행위가 있음을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죽음’―여기서는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근본적 파괴와 파멸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한 세상에서 인간들에 대해 사탄이 행사하고 있는 절대지배권의 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을 쳐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 우두머리로 군림하신다 :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11).

  “살게 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미래형의 표현은 우리의 육체적 부활이 장차 실현되어야 할 실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부활이 불확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는 “첫 사람”(20-23절)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사실상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그렇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의 왕권의 승리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군림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입니다”(20.23-26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사실, 마지막 원수는 멸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죽음--―위에서 말한 넓은 의미에서의 죽음―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역사적 단계나 현실을 초월해 있는 어떤 ‘종말론적’인 본질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니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 자체는―사도 바울로에 의하면―보다 더 큰 실체 즉 그리스도를 포함한 전 우주적 실체에 대한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에 의해 어떤 의미에서 들어높여질 것이다 : “이리하여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28절).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표현은 번역자들이 그 풍부한 의미를 완전히 옮길 수 없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참으로 무한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로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물론 범신론적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경우와 유사한 모양으로 모든 구원된 자들의 영혼과 육신 안에 또한 모든 피조물들 안에 분명히 현존하실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아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예속되어 있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



  똑같은 내용이 예수의 ‘종말론적 담화’를 끝맺고 있는  오늘 복음의 놀라운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이 종말론적 담화에서 ‘왕’으로서 또한 동시에 ‘심판자’로서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그분은 당신 오른편에 있게 되는 행운을 차지할 사람들이니 와서 t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여기서 ‘나라’는 만일 ‘왕권’이 없다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이들에게 그들이 충실히 당신을 섬긴 데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베풀어주신다. 그것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돈을 잘 활용한 사람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큰일’과 유사한 개념이다 : ‘잘하였따.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종말론적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바로 만물에 대한 그분의 ’통치권‘이 고달프지만 항구한 역사적 준비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행위에 대해 내리실 최후 ‘심판’은 그들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안에 계신 그분의 ‘위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 매일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35-36. 40).

  이 극적인 최후 심판의 장면은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마태오의 전형적인 몇몇 요소들 즉 영광중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 목자에 대한 주제, 구별의 행위로서의 심판,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심판의 규범으로서의 선업, 그리스도의 형제들로서의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영원한 상급 등을 종합하고 있다. 어휘의 분석과 다른 자료들에 따르면 이 장면은 비록 실질적으로 마태오의 편집활동에 의해 구성되긴 했지만 마태오 이전 전승사료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태오는 32절의 앞부분을 21절과 결합시킴으로써 이 장면을 ‘파루시아’(parusia: 주님의 도래)에 관한 담화에 의도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L. Sabourin, It Vangelo di Matteo, vol. Ⅱ, Ed. Paoline, Roma 1977, p. 962).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었거나 또는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의 신원에 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곳에서 예수께서 “보잘것없는 이들”, “형제들”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계시는(마태 18장 참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들은 예수께서 최후심판 때에 “당신 앞에 불러모으시는”(25,32)

‘모든 민족들’로 표현될 수 있는 ‘이방인들’에 의해 적대시되었거나 혹은 환영을 받은 사람들이다. 또 다른 여러 가지 합리적인 근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생각으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상황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외국인들, 헐벗은 이들 등의 열거 방식은 성서에서 예시되고 있는 자비의 행위에 대한 전통적 목록을 되풀이하고 있다(이사 58,7; 토비 4,16 등 참조). 반면에 새로운 내용은 사랑의 행위에는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는 아주 엄하게 다루는 이유 즉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다”…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37.40.45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들―왜냐하면 가장 약하고 무시되고 사회을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에―을 거의 일치시키고 있는 이런 신비스러운 동일화의 내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운명의 동질성을 들 수 있다 :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가난하셨다. 아니 더 가난하셨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다른 모든 시대와 우리 시대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셨다. 둘째로, 불의와 불행 고통 배척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죄와 윤리적 타락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 그분은 분명히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셨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이런 까닭에 그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또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더 나아가 종교적 구조 등에 의해 불의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어째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박혀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인가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이 구원하러 오셨으며 ‘하느님의 자녀들’로 세워주신 모든 인간들의 ‘왕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궁핍과 깊은 원의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교황 오한 바오로 2세는 그의 교황직을 시작하는 날 다음과 같이 온 세상에 권고하셨다 :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권세를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오히려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국가의 장벽, 경제적 정치적 체제, 문화 문명 개발의 모든 영역을 그분의 구원적 능력에 열어놓으십시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아십니다. 오직 그 분만이 아십니다!”(1978년 10월 22일).

  교황은 얼마 후 교황청 “정의 평화 위원회”의 총회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도 아니요 우리의 경쟁자도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또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과학적 현실들에 있어서도 진실로 인간적인 것은 조금도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교회도 역시 이방인이나 경쟁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인간을 하느님께 개방시킴으로써 그가 자신을 어떤 사상체계에다 폐쇄시키는 것을 막아줍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게 함으로써 인류발전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도록 합니다”(1978년 11월 11일).

  즉 교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공동 왕권’을 자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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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0일 (화) 10:22
분 류 연중31-3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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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33주일 주일강론 모음 ”
 

연중 제33주일

1. 김정진 신부(가)2                               2. 정주성 신부(가)/3

3. 김몽은 신부(가)/6                             4. 조순창 신부(가)/7

5. 함세웅 신부(가)/8                             6. 서경윤 신부(가)/9

7. 최기산 신부(가)11                             8. 강길웅 신부(가)/13

9. 김성배 신부(가)/14                            10. 김현준 신부(가)/16

11. 이종환 신학생(가)/18                          12. 평신도 소명(가)/20

13. 달란트 비유(가)/22                           14.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24

15. 최인호 작가(가)/25                           16. 김형렬(가)/27



1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달란트라 함은 당시의 화폐의 한 단위이며 여기서는 인간의 재능이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각기의 능력에 따라 돈을 나누어주었다가 돌아와서는 그들에게 자본과 이자를 계산하는 통속적인 사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재능이나 개성이 각각 다름을 말해 주는 것이고 따라서 최후의 심판 때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돌려 드려야 하지만 적게 받은 사람은 적어도 그만큼은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인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인은 각자에게 똑같이 준 것이 아니라 주는데 차이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교훈은 최후의 심판 때 많은 상과 보수를 얻기 위해서는 재능이나 능력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받은 재능이나 은총을 얼마나 충실히, 그리고 부지런히 활용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에 다려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이나 건강, 행복, 시간생활 그리고 생명마저 일시적으로 잠시 하느님으로부터 위탁받고 있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그리스도 신자로서는 한시나마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I 고린 4,7)하며 신자들을 각성시켰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인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관리인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을 잠시 맡아보는 청지기입니다. 관리인이나 마름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 대한 충성이라(I 고린 4,2)고 바오로 사도는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관리자로서 충성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마태 25,23)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준수하며 주일을 경건히 지내야 하겠습니다. 주일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가장 큰 충성입니다. 양심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양심의 소리대로 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충성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많이, 다른 이에게는 적게 주시지만 그러나 누구든지 일을 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풍족히 주십니다. 우리의 존재, 지력과 마음의 능력, 세상의 온갖 사물을 주시며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맺은 열매가 삼십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백 배가 될 것을 기대하십니다. 허나 이와는 반대로 이 선물을 이기적으로 자기편으로 빼앗아 돌려 즐기고 그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과 목적을 생각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보다 더 어리석고 마련한 일을 또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많이 받은 이를 부러워하고 자기에게 적게 주어진 능력을 질투로 말미암아 이용하지 않고 묵혀 두는 것은 큰 잘못이며 인간을 파멸에 떨어뜨리는 것이 됩니다.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오는데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힐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루가 1,7)라는 하느님의 책망의 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에는 <이 게으르고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쫓아라>(마태 25,30)는 준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믿음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하느님의 은총을 그만큼 더 풍성히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죄를 피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에게는 훗날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을 반성하고 진단해 보십시다. 나의 신앙생활은 과연 성실한 편인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가. 규칙적으로 가톨릭 출판물을 읽고 있는가. 부도덕한 말이나 독서를 피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죽는 날까지 신앙의 세계에서 계속 걸어가고 발전하고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2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정주성 신부




제 2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백성의 지체라고 당연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신비를 옳게 알아들어야 신비체의 몸 역할을 하는 교회의 지체노름을 해야 되는 우리들 평신도의 각오와 의무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오 18,20).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40) “나는 포도나무이며 당신들은 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떠나지 않으면 내게 붙어 있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요한 15,5)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생명의 교류 및 잎치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라고할 때 평신도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로마 12,5). 사람의 육체는 각 지체가 여럿이지만 한 몸을 이루는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함에 있어 각 지체는 그 역할이 다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할 대에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I고린토 12,26).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상 아버지한테로 순례길을 가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생활 즉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곤궁과 박해 중에 이룩하셨듯이 교회도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어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진 신비로운 교회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이 신비로운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온 세계의 인류가 저마다의 특성을 지닌 채 머리이신 그리스도 밑에 모인 유일한 백성입니다. 교회의 이 보편성에서 각 지체(신도)는 서로 선을 나누며 일치의 유대를 강화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모였을 뿐 아니라 그 지체 사이의 서로 다른 임무를 가진 계급들이 있으니 형제들의 선익을 위해서 일하는 성직자들, 특수한 생활 양식으로 완덕을 지향하는 수도자들, 일반 평신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여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한 몸을 이루는 평신도들은 누구든지 산 지체로서 교회의 발전과 그 끊임없는 성화를 위하여 창조주의 선물이며 구세주의 은총으로 받은 스스로의 힘을 다해야 하도록 불린 것이다”(교회헌장 33). 따라서 평신도는 먼저 교회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종교단체가 아니요 하나의 백성이요 구체적 인간들이 실제로 일하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 구성원 각자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각잦 자기의 몫을 공통된 사명과 책임 아래 기여해야만 교회발전은 이룩됩니다. 평신도들이 그 백성(민족) 안에서 맡은 바 사명과 직책을 다할 대 그 교회가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봉사의 정신으로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가 반죽(사회) 안에 들어있는 누룩이 된다면 교회는 발전됩니다. 모든 신자는 어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누구나다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라는 신분을 기초로 한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은 굳은 신앙 속에 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 아닌 현세적 목적에서 일어난 평신도 운동이나 활동은 복음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성공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발전의 난점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1) 내 형제가 나의 도움 없이···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난점이 있습니다. 모든 이의 운명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이 세상에서 보내는 구체적인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내 생활 테두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게 대한 생활의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밖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뿌리없는 나무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심없이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남이 모르는 신자가 되는 현상이 현대 교회 발전의 난점입니다. 이는 자기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증거하고 남도 나를 잘 아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자됨이 “포장된 물건”처럼  속에 감추어 있어 남이 모르게 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 다른 사람이 우리가 굳건한 신자임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3) 바로 우리 평신도 자신이 교회발전의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며 사도인 모든 신자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직장과 결혼, 가정과 사회 어디서나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이 사도직을 성실히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유스런 선물입니다.



자신이 교우임을 증거할 수 없는 환경이란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즉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사실을 깨닫고 실천에 옮긴다면 그리스도의 양우리에 많은 양을 모을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는 것,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 신자가 된 것은 보다 쉽게 구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받아 일하는 것이며 세계구원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인간에게 오늘의 것으로 나타나야만 되도록 하느님이 이 시대에 평신도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신앙심을 발휘하신 초창기 한국 평신도처럼 현대 평신도의 굳은 신앙심이 평신도  사도직 성공을 가늠할 것입니다.

순교복자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3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김몽은 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의 날”로 정한 날이다. 특히 현대와 같이 다양하고 분업화되어 있는 사회에 있어서 평신도들은 각기 자기가 처해 있는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고취시키고, 계속 그러한 증거 생활을 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날이다.



다시 말하자면 평신도 사도직이란, 각자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은사를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현사회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평신도가 들어가, 거기에 주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것이 평신도의 사도직이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이란, 성직자의 성무를 돕는 일만이 아니라, 평신도 고유의 일이 중점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오늘의 복음은 각자에게 맡겨진 은사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고도 준엄하게 들려준다. 복음에 나오는 “주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낟. 즉 주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다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다음,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보내 주시어,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이 주시는 각자 고유한 은사로 인하여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것을 당부하셨다.



다시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각자에게 맡긴 달란트(은사)의 사용 여부를 물으신다. 여기에 나오는 종들이란  바로 우리 크리스천을 뜻한다. 달란트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 초자연적 은사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I고린 12:4, 7-10) 여기에서 ”얼마나 벌었느냐“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은사를 사용하여 얼마만큼 주님을 증거하였느냐 하는 것을 뜻한다.



각자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의 분량대로 번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나,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는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죄이며, 나태한 죄, 자기의 의무를 소홀ㄹ히 한 죄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가진 바 재능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주님을 증거하는데 게을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평신도의 사도직이다. 그때 우리는 참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맛보게 된다.









4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조순창 신부





오늘은 연중 33주일이고, 다음주일이 연중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인생의 종말과 더불어, 하루하루 다가오는 세말을 앞에 두고, 한없는 태평성세로 현실만 아는 인생도 경고하면서, 아울러 두려움에 싸일 것도 아니라, 하느님 믿는 신자로서 주어진 은혜로 충실히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한 사람에게는 5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2탈렌트,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1탈렌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 재산 관리에 관하여 계산할 때에, 5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2탈렌트를 받은 이는 각각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5탈렌트와 2탈렌트의 ‘이익을 남겼다’고 내놓았을 때에, 주인이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직한 종이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하였고, 1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묻어 두었다가, 캐내어 1탈렌트를 내놓았을 때에, 주인이 “너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두운 데에 내쫓아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우리는 각기 나름으로 하느님께로부터 갖가지 재능을 받았습니다. 은총·지능·자유·감정·재능·생명·건강·용모 등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나는 왜 여자냐? 나는 왜 재주가 메주냐? 나는 왜 병주머니냐? 나는 왜 곰보냐? 나는 왜 불구냐? 나는 왜 공부를 못하냐? 나는 왜 가난하냐? 등 여러 가지로 비교하기보다도, 남보다 다른 능력이 있으니, 부지런히 개발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천재와 범인의 차이는 ‘자기 소질과 잠재 능력을 찾아서, 부지런히 남의 몇 배 노력으로 개발 활용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셈을 바칠 대에, 나는 불구이기 때문에, 나는 건강하지 못해서, 나는 공부한 것이 없어서, 나는 바보라서, 나는 재주가 없어서, 나는 예쁘지 못해서, 나는 남자라서, 나는 여자라서, 나는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나는 짧게 살아서, 나는 시간이 없어서 등으로, ‘하느님 뜻대로 좋은 일을 못 했노라’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악하고 불충하고 게으르면 불행이요, 엄벙덤벙 쉽게 사는 것보다 작은 일도 정성스럽게 하여야 가치가 있는 인생입니다. 부지런하고 착하고 충성스러우면 행복을 얻게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 “좋은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라.”(I 데살 5,5)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나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니, 나의 인생에 충실합시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나 오늘의 사회는 팔자나 운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악에 겨루어 이기는 것이 구원의 역사이니, 우리가 현세에 충실하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될 것이며, 현세에 충실하여, 이 사회에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할 때에 이 사회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5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재능과 노력

                                                         함세웅 신부



얼마 전에 일본 야구계를 주름잡는 우리 교포 장훈, 백인천 등의 선수들이 모국을 방문하여 서울운동장에서 그들의 재주를 선보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보였었습니다. 또 세계 프로 권투 미들급 챔피언인 유제두 선수는 그의 선수권을 방어했습니다. 본인에게는 물론 민족적인 자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난 12일에는 전국에서 27만 명의 학생들이 대학 예비고사에 응시했습니다. 예비고사에 통과된 학생들은 큰 기쁨을 맛보겠지요. 그러나 유명한 운동 선수들이나 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학생들의 이면에는,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음을 우리는 다 골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개발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여러 방면에 있어서 유명한 사람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들의 재능이 숨겨진 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최대한으로 발휘되지 않은 재능은, 인류 발전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고, 다만 아까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할 것들 말씀하십니다. 타고난 재능을 유익하게 활용하지 않은 경우, 최후의 날 하느님 앞에서 결산할 때 엄한 심판을 받게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한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는 크건 작건 각기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5만 원을 주인이 주었고, 어떤 종에게는 3만 원 또 어떤 종에게는 만원을 주었듯이, 우리들 각자의 재능은 어떤 사람의 다섯 배가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에 비하면 3분의 1밖에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력을, 어떤 사람은 지력을, 또는 건강을, 권력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재능을 다른 분량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하시면서 여러 가지 재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내 힘이 미약하여 별게 아니라고 포기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그 능력을 활용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

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충실히 할 때, 더 큰 능력을 주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며,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적다고 최선을 다하는 데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마저 잃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는 사람은 더욱 진급하여 큰 일을 맡게 되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통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받은 재능의 과소를 불문하고 모두 각자의 능력 안에서 충실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6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전체의 행복

                                                        서경윤 신부





 「너희는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으로 쫓아내라」 (마태 25,30).

  주인이 종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 능력에 따라 누구는 다섯, 누구는 셋, 그런데 나는 하나의 달란트 밖에 받지 못했다면, 나도 의기소침하여 의욕을 잃고, 혹시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다른 주인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달란트 하나밖에 받지 못한 종이 그래도 남아서 땅속에 숨겼던 달란트를 찾아 주인께 돌려 준 것만도 내 생각에는 기특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를 꾸짖고 한 개의 달란트 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나 가진 사람에게 주어 버리다니, 그럼 그 무능한 종은 죽어라는 말입니까? 주인의 재물이 종보다 더 귀중하다는 말입니까? 처음부터 주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종의 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은 주인의 처사가 불만스럽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주인이라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텐데, 주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달란트를 땅 속에 숨겼던 것이 사단(事端)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다시 여행을 떠나면서 이번에는 모든 종들에게 똑같이 구슬 열 개씩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구슬의 색깔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색깔의 구슬이 여러 개였으며, 따라서 못 가진 색깔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슬의 색깔에 따라 용도가 다 달랐습니다. 주인이 떠난 다음, 종들은 서로 가진 구슬들을 비교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받은 구슬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구슬에 원하는 색깔을 칠해 봤지만, 원색과 같은 구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색깔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 없었으므로 모두는 서로를 부러워하기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차츰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자신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갖지 않은 색깔이 필요할 때에는 다른 사림에게 부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주인의 외아들이 찾아와서 행복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진 구슬을 몽땅 내어놓고 합동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요할 때에 누구나 그 구슬을 사용하면 됩니다. 종들은 모두가 좋다고 찬동을 하고 각자의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종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아까워하며 다 내어놓지 않고 모두들 한두 개씩 감추었습니다. 전체 숫자가 모자라므로 누군가 감춘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무슨 색깔을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자기는 감추지 않은 양 다른 사람이 다 내어놓지 않았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사람마다 재능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연극을 잘합니다. 어떤 이는 수학을 잘하고, 어떤 이는 어학에 소질이 있습니다. 과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업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뭐든지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그렇지,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은 수의 구슬을 주었습니다. 무조건 자기는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고 남의 것만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색깔의 구슬을 가졌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구나 자기 구슬의 색깔을 따라 능력을 계발하고 길러서, 그 능력으로 돈도 벌고 삶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재능이 자기만을 위한 것을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을 공동의 것으로 사용할 때에, 비로소 전체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라고 감추어놓고 자기만을 위하여서만 사용하려고 한다면, 세상은 각박해지고 결국 자기도 남도 똑같이 행복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은 아직도 여행에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므로, 나만을 위해서 따로 감춰 둔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갑자기 돌아오신 주인이l 나를 향하여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으로 쫓아내라!」하시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7              연중 제 33주일   마태 25, 14―30 (가) "평신도의 소명"  

최기산 신부





사치스런 불만 지하도 계단에 앉아서 늘 구걸하던 젊은이가 있었다. 꾀죄죄한 그를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조소하면서 지나쳤지만 어느 한 노부부는 그 계단을 지나 성당에 갈 때마다 그를 가엾게 여겨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설령 자비심이 발동하여 동전 몇 푼을 줄 때에도 그들은 그를 외면한 채 동전만을 떨어뜨리고 갔다. 어느 날 노부부는 그 젊은이를 초대하였다. 그에게 목욕을 하게 하고 새옷을 입게 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를 병원에 입원까지 시켰다.



우리 주변엔 아직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린 희망의 세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육체적인 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정신적인 면에서 부족한 사람도 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우린 참으로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사치스런 불평불만 속에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 주위엔 장애인뿐만 아니라 불치의 병으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이 받은 자, 적게 받은 자 농아․맹아․정신지체장애인 등 장애를 입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적게 셈 바쳐도 되지만, 건강하고 많이 배우고 많은 재물을 받은 자, 권력을 쥔 자들은 그만큼 많이 셈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많이 받은 것에 대해서 너무 자만해서는 안된다. 잘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쳐야 한다. 기운이 센 사람도 약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쳐야 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가 종들에게 능력대로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먼 길을 떠나면서 ꡒ내가 다시 돌아올 때 많은 이익을 남겨 놓으라ꡓ고 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어떤 이들은 1만데나리온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1데나리온이 하루 날품팔이하는 사람의 품삯이니까, 일당을 3만원만 쳐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5달란트는 9억원쯤되는 돈이니 대단한 돈이다. 5달란트받은 사람과 2달란트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원금을 배로 불려 놓았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시 갖다 바쳤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몸을 사리느라고 꽁꽁 묶어서 땅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내놓았다.



복음의 메시지 평신도 주일이다.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교회창립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신앙을 받아들였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목숨 내놓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일까? 계단에서 구걸하던 청년을 사랑하고 자식처럼 돌보며 병원에 입원까지 시킨 노부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들 모두 그렇게 사랑의 첨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배로 이익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그 노부부야말로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유효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건강을 맡겨주신 주인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ꡐ달레 교회사ꡑ에 황일광이라는 백정 출신의 천민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처음 신자들의 모임에 나갔을 때 당대의 석학인 양반들이 자신의 소매를 끌며 어서 올라오라고 환영하였다. 천민은 감히 양반의 대들보 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기에 황일광은 너무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평신도들은 신분이 어떻든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그후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ꡒ천주교회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개 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국이다.ꡓ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받은 학식, 건강, 재물에 따라서 많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보다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을 실천해도 셈 바칠 것이 별로 없다. 오늘 복음에서 배로 이익을 남긴 사람들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익을 남길 수 없다. 오늘 우리나라는 은행도 망하는 판이다. 하물며 파이낸스, 종금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익이 많이 나는 곳에 투자하지 않으면 큰 수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1달란트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은 생각지 않았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였다. 모험 같은 것은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갖다 바쳤다. 그는 퇴출되었다. 자신의 안녕만을 도모하고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실 때 퇴출당한다. 주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수익을 올리고 싶어하신다.



200여년 전 우리의 평신도들은 믿음에서 오늘의 우리와는 좀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많은 평신도들은 영세 후에 기본적인 신앙생활조차 거부하고 있다. 주님의 용사들이 필요한 시대다.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을 때 훌륭한 성직자도 있게 마련이다.

8                연중 제 33 주일   마태 25, 14―30(가) ‘어진 아내'가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잠언 31,10~13.19~20.30~31 (어진 아내는 손을 놀리니 즐겁기만 하구나) 

제2독서 Ⅰ데살 5,1~6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 음 마태 25,14~30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바로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정하여 교회 안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면 평신도는 교회의 주인입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다 평신도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평신도가 제 몫을 잘 할 때 좋은 교회가 됩니다.



어느 본당에서고 지나치게 적극적인 ‘열성파'가 있는가 하면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주 소극적인 ‘무관심파'도 있습니다. 이들은 양쪽이 다 바람직한 평신도 상은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뜻대로' 사는 삶에서 ‘주님 뜻대로'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뜻을 꺾고 주님 뜻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최고의 믿음입니다.



모 신심 단체의 회원으로 교회에서 열심하게 봉사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레지오, 성가대는 물론 철야기도, 환자방문 등에서 그녀가 뛰지 않는 분야는 없었습니다. 그러자니 가정 일에 너무 등한히 하여 가정불화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가끔 가정 일에도 충실하라고 하면 그녀의 대답은 늘 단호했습니다. “주님 일은 하루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 뒤에 감춰진 자신의 이기심을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그렇게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정에 충실하면서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자기가 좋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열심하게 살겠다고 한다면 그는 주님 뜻보다는 자기 뜻대로 사는 어리석은 독선일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어진 아내'는 바로 착한 평신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진 아내가 남편의 자랑이요 기쁨이라면 착한 평신도는 교회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재산도 없고 그보다 더 소중한 보배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신부 (각시)라는 사명을 가지고 맡은 바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도 마찬가집니다. 이 말씀은 평신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직책과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업은 1차적으로 평신도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이에 능력껏 협조하여 교회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누구라도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거절한다면 그는 아마도 ‘가슴을 치는 날'을 스스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위대한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순교 신앙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도 훌륭한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랑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주교님은 당신의 교구 사제들에게 '평신도를 본받고 존경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 자신이 교포사목을 임시로 하면서 느끼는 것이 그것입니다. 마이아미 공동체만 해도 본당 신부가 공석이었는데도 평신도들 스스로가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만들어 꾸리아까지 조직했으며 또한 구역 모임을 만들어 기초 공동체를 착실하게 성장시켜 왔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 세계 각지에서 한인 교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틀림없이 자생적인 천주교회의 기초 공동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진 아내'는 그냥 아무렇게나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좋은 표양과 또한 가르침에 따른 순종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문의 전통과 분위기라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듯이 어진 아내가 어진 아내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계속 좋은 전통을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실로 ‘현숙한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맡은 바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교만이요 지나치게 나서는 것도 역시 교만입니다. 직책을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우리의 본분을 다하고 또한 사명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 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우리는 모두 주님의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9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의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랑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

                                                             김성배 신부



  사람은 세상에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늘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한편 우리의 일상생활은 매일 단조롭게 반복된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의무들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들은 나보다 남을 위한 일들이고,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러기에 지금 내 처지에서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된다. 우리가 의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랑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일상의 의무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들이고 따라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일들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동안은 평범한 일상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내 성실한 의무이행이 남에게 이익과 만족을 가져다 준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랑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일도 사랑으로 행하면 비범하고 위대한 일이 되고, 비범하고 위대한 일도 사랑없이 행하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인생의 가치는 일마다 오래 살고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들로 채워지는 일상이 매일 되풀이되다 보면 사랑이 식을 수 있다. 사랑이 식게 되면 의무를 이행하는 데 권태를 느끼게 되고 불성실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이기주의가 눈을 뜨면서 새로운 눈으로 자기와 세상을 보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인생이 초라해 보이고,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

이 억울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되면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의무이행은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수행해야 할 본연의 의무를 버리고 새로운 자리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 자기를 버리고 살아 왔던 길을 포기하고, 자기를 찾는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아를 버려야만 갈 수 있는 사랑의 길을 버리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길은 자기 스스로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길이다.



  이기주의에 따를 때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버리고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찾고, 해야 할 일을 버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찾으며, 가야할 길을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게 된다. '



  세상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을 버리고 이기적인 삶을 택하는 데 있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자신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자기 명예만을 추구하고 자기이익만을 돌보며 자기만족만을 구한다. 사랑은 모든 선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고, 이기주의는 모든 악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달란트의 비유는 사람이 인생을 통해 두 가지 인생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현세에서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내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그 하나는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버리고 이기주의를 선택하는 길이다.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와 자기의 감정을 뛰어 넘어서 상대방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길은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에게 받았던 돈을 배로 불려서 되돌려 줄줄 알았던 종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생을 산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이용해 이익을 만들어 내길 기대하신다.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이익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증가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증가될 수록 우리는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게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 리의 인생은 더 크고 더 많은 선을 생산해 냄으로써 풍요로워진다.

이렇게 현세에서 자기의 시간과 소유일체를 사랑을 키우는 데 활용함으로써 선을 생산해낼 줄 아는 사람들이 내세에 하늘에서 하느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기쁨을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된다.



  그러나 주인에게 받았던 돈으로 이익을 내지 못했던 종은, 하느님의 사랑을 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이기주의자를 가리킨다. 사랑으로 사는 인생은 선을 생산하고 이기주의로 사는 인생은 악을 생산한다. 사람의 행동은 완전한 사랑에서 나을수록 더 큰 선이 되고 냉혹한 이기주의에서 나올수록 더 큰 악이 된다. 이기주의자로서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된다.



  그의 모든 행동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렇게 현세에서 하느님께 받은 시간과 소유일체를 이기적인 자기만족만을 위해 허비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하늘나라의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된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사랑의 나라이다. 자기를 버리고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얻는다.











10            연중 제 33주일   마태 25,14-30 (가)  투자하라고 주신 탈란트  

                                                김현준 신부



가을의 끝맛과 겨울의 첫맛을 느낄 수 있는 11묄 요즘의 날씨는, 우리 몸을 으스스하게도 하지만, 맑은 정신을 갖도록 해준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마태오 복음 25장은 세상 종말에 관한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3개의 이야기가 올해를 마감하는 연중 마지막 3주간에 걸쳐 주일 복음으로 차례로 등장한다,

삶의 준비성과 슬기로움을 깨우쳐주는 ‘열 처녀의 비유'가 지난 주에, 충실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일깨워주는 ’달란트의 비유'가 이번 주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심판의 기준임을 알려주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다음 주일 복음 말씀이다.

  

연중 제33주일, 오늘의 복음은 달란트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 즉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떻게 셈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달란트'란 말은 원래 희랍에서, 중량의 단위나 화폐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1달란트는 은 25kg. 1만 데나리온에 해당) 그 후 돈이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체험하면서부터인지 후대에 오면서 달란트는 재능, 재주, 능력을 뜻하는 말로, 혹은 재능 있는 사람이나 예능인을 뜻하는 말로 쓰이다가, 요즘은 곧바로 TV 탤런트를 연상하게 한다. 원래 이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께서 닥쳐올 마지막 위기를 두고 당시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깨우치려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 후 교회는 이 비유 이야기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살아가는 생활들로 받아들였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겉으로 드러난 이 비유 이야기의 숨은 속뜻을 찾아 병립시켜 보면 이러하다. 주인공 역할을 하는 주인은, 그리스도 주인의 여행은 그리스도의 승천, 주인의 귀가는 그리스도의 재림, 달란트는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이나 능력,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사는 크리스천, 바깥 어둔 곳은 지옥이다,

  

이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충실한 두 종과 게으른 한 종의 행동이 대비되고 있으며, 강조점은 주인과 게으른 셋째 종과의 셈하는 데에 있다.

어느 날 주인은 먼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맡겼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잘 활용하여 더 벌어서 주인께 셈을 바쳤다. 주인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큰일을 맡기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반면,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안전하게 땅에 묻었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대로 다시 돌려주었다. 주인은 그의 게으름에 대한 질책과 함께 한 달란트마저 빼앗고 쓸모 없는 종으로 여겨 바깥 어둔 곳으로 내쫓아 통곡하게 하였다.



세상 증말에 대한 태도



주일이 이 세번째 종을 단죄하고 징벌한 더 큰 이유는,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을 알면서 ‘주인이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투자에 밝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성품인 줄을 알면서도, 안전만 생각하며, 누구나 할 수 있고 모두가 따라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땅에 묻어두는'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주인의 뜻을 배반 한 것이다. 어떤 창의성과 적극성도 발휘하지 않았기에 주인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은 셈이다.

   

이스라엘의 랍비 「부남」은 고령에 이르러 눈이 멀고 난 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선조 아브라함과 자리를 바꿀 마음이 없다. 아브라함이 눈먼 「부남」이 되고, 눈먼 「부남」이 아브라함이 된다면 하느님께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그런 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가 좀더 나 자신이 되도록 힘써 보겠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랍비 「수샤」는 임종하기 직전에 더 함축성 있게 말한 바 있다.

“내세에서 나보고 ‘너는 왜 모세가 아니었느냐’고 묻지는 않고 ‘너는 왜 「수샤」가 아니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신발 가게에 똑같은 크기, 똑같은 색깔, 똑같은 모양의 신발만 갖추어 놓았다면 장사가 잘 되겠는가?

  

하느님은 똑같은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귀중한 선물을 주심으로써 조화되게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다양한 선물을 주시며, 각 사람에게 바라는 바는 그 선물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관만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무릅쓰고 과감히 투자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 받은 능력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좀더 .나 자신아 되는 삶으로 하느님께 보탬이 되도록 함이 어떨까. 이것이 세상 종말에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와 맑은 크리스천정신이 아닐까,











11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탈란트의 비유

     G2 이종환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서의 말씀은 이미 많이 들어왔던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장사를 해 보라고’ 하면서, 금화 한 개씩을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 왔을 때 종들과 함께 그것을 셈합니다. 셈하는 동안은, 세 사람의 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종은, 한 개의 금화를 열 개로 늘려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 두 번째 종도 다섯 개로 늘려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세 번째 종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의 종은, 수건에 싸 두었던 금화를 그냥 그대로 주인 앞에 내 놓습니다. 그리고는, “주인님은 지독한 분이라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저는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전쟁이 많던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돈이나 보물을 땅 속에 묻어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재산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땅 속에 묻어두는 재산은 전쟁 중에도 안전하고, 시간이 지난 후 그대로 꺼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본다면, 세 번째 종이 택했던 수건에 싸 두는 방법은 땅 속에 묻어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그런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그 종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복음 말씀 속에서 그 종의 편을 들고 있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의 말을 들은 주인의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종에게 ‘몹쓸 종’이라고 꾸중하는 것도 그렇고, 가지고 있던 한 개의 금화 마저 빼앗아 열 개를 가진 이에게 주는 것도 그렇고, 조금은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종의 행동은 왜 그렇게 꾸중을 들어야 했겠습니까? 주인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는 없었겠습니까? 그 종은 주위의 ‘사람들이’ 이해해 줄만한, 나름대로의 안전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주인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고, 주인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그 종 자신의 기준대로 금화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분을 주님이라 부르며 기도를 드리면서도, 늘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을 두게 되는 유혹과 참으로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종이 그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게 된 ‘이유들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종들처럼 한 개의 금화를 가지고 여러 개로 만들기까지는 분명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시련과 고통도 겪어내야 할 일입니다. 세 번째 종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이 수건에 싸서 금화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주인의 무서움이 아니라, 자신이 부딪쳐야 할 어려움이나 자신이 겪어내야 할 아픔은 아니었겠습니까? 그가 갖고 있던 환경과 여건들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 더 나빠지지만 않도록 원했던 것은 아니겠습니까?



    혹은, 그 한 개의 금화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만 쓰여진다는 생각에,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 것은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그 종을 심하게 꾸짖었던 점은,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 늘 질책을 받았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그들 주변에 안전한 울타리처럼 쌓여져 있던 율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했고, 율법의 본래 의미가 어떻든, 자신들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하느님보다 그 자신들의 입장이 더 중요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비유에서의 ‘주인’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 번째 종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패가 두렵고 아픔이 두려워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족한 내 모습이 드러나고 싶지 않아서, 현재의 환경만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 방법들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에게 직접적인 소득이 없어 보일 때, 우리에게 주어진 금화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거나 그저 감추려고 하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금화들은 참으로 값진 것이고, 틀림없이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금화는 눈앞에 보이는 소득을 위해서나, 지금 현재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하게 지키고만 있을 금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편안한 방법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할 금화입니다.



  아픔이나 시련 속에서라도 주인의 뜻에 맞게 우리의 금화를 사용할 때, 우리는 더욱더 많아진 금화를 가지고, 다시 오실 주님을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12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평신도의 소명





  사치스런 불만



  지하도 계단에 앉아서 늘 구걸하던 젊은이가 있었다. 꾀죄죄한 그를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조소하면서 지나쳤지만, 어느 한 노부부는 그 계단을 지나 성당에 갈 때마다 그를 가엾게 여겨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설령 자비심이 발동하여 동전 몇 푼을 줄 때에도 그들은 그를 외면한 채 동전만을 떨어뜨리고 갔다, 어느 날 노부부는 그 젊은이를 초대하였다. 그에게 목욕을 하게 하고 새 옷을 입게 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를 병원에 입원까지 시켰다. 우리 주변엔 아직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린 희망의 세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육체적인 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정신적인 면에서 부족한 사람도 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우린 참으로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사치스런 불평불만 속에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 주위엔 장애인뿐만 아니라 불치의 병으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이 받은 자, 적게 받은 자



  농아 ․맹아 ․정신지체장애인 등 장애를 입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적게 셈 바쳐도 되지만, 건강하고 많이 배우고 많은 재물을 받은 자, 권력을 쥔 자들은 그만큼 많이 셈 바쳐야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많이 받은 것에 대해서 너무 자만해서는 안 된다. 잘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쳐야 한다. 기운이 센 사람도 약한 사랑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쳐야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가 종들에게 능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먼 길을 떠나면서 “내가 다시 돌아올 때 많은 이익을 남겨 놓으라”고 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어떤 이들은 1만 데나리온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어쨋든 1데나리온이 하루 날품팔이하는 사람의 품삯이니까, 일당을 3만원만 쳐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5달란트는 9억원쯤되는 돈이니 대단한 돈이다, 5달란트받은 사람과 2달란트 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원금을 배로 불려 놓았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시 갖다 바쳤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몸을 사리느라고 꽁꽁 묶어서 땅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내놓았다,



복음의 메시지



  평신도 주일이다.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교회 창립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신앙을 받아들였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목숨 내놓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일까? 계단에서 구걸하던 청년을 사랑하고 자식처험 돌보며 병원에 입원까지 시킨 노부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들 모두 그렇게 사랑의 첨병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배로 이익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그 노부부야말로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유효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건강을 맡겨주신 주인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달레 교회사'에 황일광이라는 백정 출신의 천민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처음 신자들의 모임에 나갔을 때 당대의 석학인 양반들이 자신의 소매를 끌며 어서 올라오라고 환영하였다.

천민은 감히 양반의 대들보 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기에 황일광은 너무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평신도들은 신분이 어쨌든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자신

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한다. 그렇

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개 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국이다."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쉽지 살다. 우리가 받은 학식, 건강, 재물에 따라서 많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보다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을 실천해도 셈 바칠 것이 별로 없다. 오늘 복음에서 배로 이익을 남긴 사람들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익을 남길 수 없다.



  오늘 우리나라는 은행도 망하는 판이다. 하물며 파이낸스, 종금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익이 많이 나는 곳에 투자하지 않으면 큰 수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은 생각지 않았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였다. 모험 같은 것은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갖다 바쳤다.

  그는 퇴출되었다. 자신의 안녕만을 도모하고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실 때 ‘퇴출당한다. 주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수익을 올리고 싶어하신다.



  200여년 전 우리의 평신도들은 믿음에서 오늘의 우리와는 좀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 아

 닐까? 오늘날의 많은 평신도들은 영세 후에 기적적인 신앙생활조차 거부하고 있다. 주님의

 용사들이 필요한 시대다.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을 때 훌륭한 성직자도 있게 마련이다.







13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Pax Romana 제 7호



우리는 가톨릭 지성인이다. 지성인이 지성인의 구실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성의 사명은 현 한국 사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지성의 기능은 생각하고 비판하고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으며 공평 무사하며 진실을 말하는데 있다.



지성의 특징은 <엘리트>(Elite)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엘리트>는 뽑힌 자라는 뜻이다. 엘리트는 비범한 능력자요 진 선 미의 인간이다. 엘리트는 사상에서 고매한 선비적 뜻이 꽃피고 올바른 행동에로 표현시키는 데 성공적 인간이다. 이것을 현대말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또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될 능력을 가진 인간이다. 이것은 인간의 최후 가치다. 따라서 가톨릭 지성의 이상은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느님 은총의 부름에 대한 대답보다 더 높은 인간적 가치는 없다. 참된 영웅 중에 최대의 영웅은 하느님의 성인들이다. 인간이 제 자신을 엘리트라 자칭해서 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자찬과 교만의 감옥에서 무위(無爲)하게 스스로 감탄하고 쳐다보고만 있다면 그들은 기만자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트는 개방적 인간이어야 하며 실로 인류에 대한 봉사에 철저하여 하느님께 향한 수직적 상승의 완결로 이르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그리스도의 달란트 비유’(마태 25,14-3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성은 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았음이 확실하다. 하느님이 주신 이 갸륵한 선물인 달란트를 썩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가톨릭 지성은 그리스도의 길에 만인을 인도해야 할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 비오 12세께서 1950년 8월 Amsterdam에서 Pax Romana 세계회의에 모인 대학생과 가톨릭 지성인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상기할 수 있다. 교황께서는 현대에 있어서 가톨릭 신학자들이 평신도에 의지하고 그의 조력을 얻어야 된다고 하시고 평신도가 연구가나 교사나 철학자 혹은 법률가나 사회학자나 의사로서 그들이 확립한 세속학문과 지식으로써 신학자들의 연구와 활동을 지지하고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격려하셨다. 교황의 메시지는 현대 가톨릭 지성의 사명을 명문화한 것이다.



가톨릭 지성의 사명은 두 가지로 대분해서 제시되고 있다.

1) 현대사상에 대한 가톨릭 지성의 참여다. 즉 개방적 태도와 각성과 진리 옹호의 정신적 두쟁(斗爭)으로써 교회에 대한 봉사다. 교회에 대한 이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지성은 <영성의 사람>이라야 한다. 각기 전문지식과 신앙을 조화시키고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의 빛으로써 전문지식의 방향을 보다 나은 세계로 질서 잡아 인류구원의 대열에 선봉이 되어야 한다.



2) 가톨릭 지성은 국가와 국민에 무관심하지 못하다. 이 무관심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나, 더욱 한국에서는 정치문제와 사회문제에 의식적 참여가 요구된다고 본다. 자기가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잊어서는 안되며 국민과의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 한다. 국민이 분리되어서는 이 세계를 하느님 품에 다시 이끌어 가지는 못할 것이다. 직업윤리를 통해서 이론이나 학설로써가 아니라 생활과 실천으로 국민의 고생을 덜어주고 그리스도교의 <복된 기쁜 소식>을 그들의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가톨릭 지성이 평신도 사도직의 일익을 직장에서 복음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우리 한국 사회에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모이신 교회에 대한 충성심 또한 자극해야한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주역들이 모두 다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 탐구와 기도생활로써 교회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이 나라 백성들의 우둔함을 깨고 목숨을 걸고 치명까지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 불타는 ‘사랑의 사람’으로서 신앙을 실천으로 옮겼으며 사랑과 겸손으로 국민에게 영생의 길을 가르쳤다. 복음의 씨를 뿌린 우리 조상들은 실학의 거성들이요 지성인들이었고 이조 500년의 때묻은 정치와 부패된 사회를 개혁코저 목표한 바 바로 현대의 가톨릭 지성의 과제다.



이 나라를 지상의 세력에 맡기느냐? 하느님 지배에로 이끄느냐? 하는 것은 가톨릭 지성의 책임이다. 이 땅에 평화의 사도로서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힘에 의해 유지되었던 음울한 일시적 평화, Pax Romana(로마 지배 하의 평화)가 아니고 비오 12세 교황이 외치셨던 참된 그리스도의 영원한 평화(Pax Romana)의 역군이 되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14                       연중 제33주일   마태 25, 14―30 (가)-평신도 주일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1. 대희년을 맞이하는 평신도의 자세



오늘은 제32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지난 1968년 평신도 주일이 제정된 이후 우리 평신도들은 이 날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로 지내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세주 탄생 2000년의 대희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희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저  놀라운 ‘은총의 해’(루가 4,19)를 상기시키면서 희년의 정신으로 거듭날 것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얼마 전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를 지낸 바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태어나려는 평신도들의 결의를 다시 확인한 자리로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삶을 교회 공동체와 민족 사회 앞에서 겸허하게 고백하고,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정신으로 거듭나 새 천년기에 새 복음화의 사도로 나설 것을 선언한 자리였습니다.



2.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

우리는 사귐과 섬김과 나눔이 교회 안에서 먼저 실현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 자매로 지내 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마음에 들거나 뜻이 맞는 사람과만 친교를 나누고 다른 사람 은 외면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봉사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대접을 받고자했고, 가진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기보다는 보답이나 대가를 목적으로 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교우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교회로부터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이런 행태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새날 새삶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5)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벗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는 것입니다. 사귐과 섬김과 나눔은 이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앞으로 41일 후면 우리는 그리스도 탄생 2000년의 대희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희년이 은총의 해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시 모아야 합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주님의 자비와 은총의 손길에 온전히 맡겨드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새날 새삶’을 열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연중 제33주일   마태 25, 14―30 (가) 평신도 주일 신앙의 조건

최인호 작가



임상옥(林商沃, 1779-1855)은 4대째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사를 하던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세 때부터 중국에 사신길로 따라 다니다 마침내 인삼의 교역으로 조선 최대의 거상이 되었던 무역왕입니다. 그는 평생토록 상업의 정도를 지켜 나간 위대한 거인입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세 명의 장사꾼이 돈을 빌려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임상옥은 각자 한 냥씩 꿔주고 닷새 후 장사를 해서 이문(利文)을 남겨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은 짚신을 다섯 켤레씩 팔아 이익을 다섯 푼 남겨 왔고, 한 사람은 대나무와 창호지를 사다가 종이 연을 만들어 팔았는데 마침 섣달 열흘이라 대목을 봐서 한 냥을 남겨 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그 종이에 의주 부윤(府尹)에게 절간에 들어가 글을 읽을 테니 비용을 대 달라는 소지(素志)를 써 올린 후 열 냥을 빌려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상옥은 짚신을 판 사람에게는 백 냥, 종이연을 판 사람에게는 이백 냥, 허황한 짓을 한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일천 냥을 빌려주고 일 년 후에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일 년 후 다른 사람들은 나타났지만 마지막 사람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6년이 지난 후, 그는 그 돈으로 인삼 씨앗을 사서 태백산 속에 들어가 씨를 뿌린 후 6년의 기다림 끝에 인삼 열 바리, 십만 냥의 거금을 벌어 돌아온 것입니다.

임상옥은 이 세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짚신을 만들어 판 사람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 장사꾼에 불과하다. 종이연을 만들어 판 사람은 때를 살필 줄 아는 작은 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씨앗을 뿌린 상인이야말로 기다릴줄 아는 인내심과 상업의 근본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반드시 거상이 될 것이다.”

임상옥의 일화는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의 비유와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돈을 맡긴 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던 사람에게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하시고, 한 달란트까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 즉 재능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는 신학(神學)을 연구하는 것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풍성하게 이웃과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임상옥이 인삼 씨앗을 사서 뿌린 후 6년 뒤에 거두어들인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상인이야말로 거부가 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씨앗을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정성된 마음으로 이웃에게 뿌리는 사람이야말로 주님과 더불어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6               연중 제33주일   마태 25, 14―30 (가) 대희년과 평신도의 자세

                                                 전주교구 평협회장/김형렬(바오로)



오늘은 제32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다시한번 다짐하는 날입니다. 앞으로 40일 후면 대희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희년이 우리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은총의 해가 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바쳐 준비합시다.



대희년을 통과의례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는「은총의 해」이고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해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희년의 정신인「원상회복」을 위한 우리의 실생활과 연관지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심없고 순수한 마음으로「사귐과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로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첫째 : 희년의 정신을 올바로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 평신도들이 안고 있는 문제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지식등에 대한 지적 빈곤입니다. 희년의 정신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소화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리하여 새천년기에 요청되는 새복음화의 사도로써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 참회의 예절에 적극 참여합시다. 희년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회개의 기쁨(제삼천년기 33항)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깊이 성찰하고 가정에서, 소공동체에서 나아가 본당공동체에서도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2천년 대희년을 뜻있게 맞이하기 위한 선결조건입니다.



셋째 : 대희년맞이 실천운동으로 제시된 「새날, 새삶운동」에 적극 동참합시다. 우리자신들이 복음정신으로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새날, 새삶운동」의 구체적인 실천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배우고 익힌 것을 가정과 사회에서 「빛과 소금」 이 되어 희생하고 봉사하는 평신도의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사회는 새로운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다가오는 이천년 은총의 대희년에 보여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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