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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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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7
작성자 요한신부
작성일 2011년 1월 8일 (토) 16:56
분 류 행사강론
첨부#1 새_사제_첫미사_강론.hwp (48KB) (Down: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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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사제 첫미사 강론 ”
 

새 사제 첫미사 강론

1. 인사

☩ 오소서 성령님!

◎ 새로 나게 하소서.



2. 사제 서품 축하 인사

먼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고, 긴 기간동안 변함없는 마음으로 신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했으며, 어제 주교님께로부터 성품성사를 통하여 사제로 서품되신

(             ) 신부님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새 사제의 첫미사에 함께 하시어, 새 사제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형제자매님들께도 새 사제의 축복과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은총을 가득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새 사제의 첫 미사 강론은 추천신부(아버지 신부)가 하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고, 제가 새 사제(                    )신부님의 추천신부이기에 이렇게 첫 미사에서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사제란?

사제는 성품 성사를 통하여 사제의 품위를 받으며, 주교님으로부터 파견 받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주교님의 협력자로서 복음 전파를 위해 일생 동안 봉사합니다.



사제직(司祭職)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회복시키고(중개 역할), 인간에게 축복과 번영을 빌어 주며, 용서와 자비를 기원하는 일을 맡은 직분을 수행합니다.



① 사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

그러므로 사제는 하느님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라는 곳으로 가서, 주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 신부님!

이제 신부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이 거룩한 직무에 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이 거룩한 직무에 올랐고,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하겠다고 다짐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②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를 따르기 전에 자신이 부리던 소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사람들을 대접하고, 엘리야를 따라 나섰던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사제는 쟁기(직무)를 잡고 주님께서 말씀과 믿음의 씨를 뿌릴 세상을 성실하게 갈아 나가는 사람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쟁기질을 하는 사람이 사제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           ) 신부님

버리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버리십시오. 신부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들을

그리고 꼭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쟁기(직무)를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람들을.

그래서 꼭 붙잡아야 하는 것과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을 분별할 수 있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착한 사제, 거룩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③ 사제는 행복한 사람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사제는 행복한 사람” 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좋아서 “예”하고 응답하셨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와 함께 하시며, 하느님의 작은 도구가 될 수 있음에 행복해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을 보면 그 행복은 사라집니다. 말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들, 교만하고 모욕적인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 복음적이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기 시작하면, 그래서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일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제의 눈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시는 분들, 교회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키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들, 사제의 봉사를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분들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제의 마음은 늘 감실 안에서 모든 것을 내 놓고, 또 모든 것을 내 놓을 준비를 항상 하고 계신 주님의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볼 때, 사제의 마음은 주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사제의 눈은 하느님의 일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제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행복을 찾아 나설 때, 사제는 더욱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④ 달릴 길을 다 달리고 폐차장으로 간다해도 감사하는 사람

(           ) 신부님

사제는 버스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 버스의 기사는 예수님이시고, 연료는 기도입니다. 승객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완덕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입니다. 승객들이 버스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기사님이신 예수님께 감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달릴 길을 다 달려 이제는 더 이상 승객들을 싣고 달리지 못하여 폐차장으로 간다 할지라도, 그렇게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사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무일도와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시고, 정성 담아 미사를 봉헌하십시오. 그렇게 버스에 기름을 가득 채울 때, 주님께서 핸들을 잡으시고, 악셀레이터를 밟는대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형제자매들에 대한 부탁

이제 형제자매님들께 새 사제를 위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새 사제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를 먹고 사는 사람이 바로 사제이기에 사제를 사랑한다면 언제나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제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그 기도 지향에 오늘 첫 미사를 봉헌하는 (              )신부님도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서에 새신부님의 상본을 넣어 두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성인사제가 될 수 있도록 언제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5. 나가는 말: 새 사제의 서품 성구를 이야기 하며

(                 )신부님께서는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겠다는 의미로

“                                                             ”

말씀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오늘 이 첫미사를 드리는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미사를 드리며, 이것이 나의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당신 제단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 이 사제가 선택한 말씀



“                                                             ”



이 말씀이 이 사제의 한 생을 이끌 수 있도록 큰 은총 내려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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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축일강론
작성일 2008년 9월 20일 (토) 10:08
분 류 대축일 강론
ㆍ추천: 0  ㆍ조회: 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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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오늘 1독서의 지혜서 말씀은 하느님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이 결코 같지 않음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기에 아무도 우리와 맞설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순교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이 가하는 모진 고문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굳굳하게 지켰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박해 속에 신음하는 순교자들이 어리석게 보였을 것입니다. 지혜서의 말씀처럼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더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영원토록 머물고 싶어 지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험이나 칼입니까?”



순교자들은 이 모든 상황을 당당하게 이겨냈습니다.

 순교자 이 경언 바오로의 편지 중

“눈을 뜨니 다리가 온통 헤어지고 사방에서 피가 흐르거나 혹은 상처 위에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아! 나보다 신체가 더 튼튼하지도 못하셨을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높은 산 꼭대기까지 천걸음이나 더 되는 곳을 걸어 가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교우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대죄인에게는 이렇게 동정과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고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애들을 쓰는군요.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옳단 말입니까?”



순교자 박 보록 바오로에 관한 기록 중

“다시 진영으로 불려 나가서는 고문을 당하는 중에 첫번과 같은 항구심을 보여 주었다. 형일들은 그의 뺨을 치고 수염을 잡고 뽑고 천만가지 욕설을 퍼붓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박 보록 바오로는 ‘이 고통은 천주의 은혜이니 천주께 감사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렇게 몇번 더 그의 결심을 흔들어 보려고 하다가 소용이 없게 되니 영장은 그를 대구감사에게 보냈다.



순교자 원 베드로에 관한 기록 중

“관장은 그를 결박하여 물을 퍼부어 추운 밤중에 밖에 내 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원 베드로는 굵은 밧줄로 묶였고 온 몸에 물을 뒤집어 썼다. 이미 그의 온 몸에  얼음이 뒤덮였다. 이 형벌 가운데에서 그는 오직 주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런 다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다. 닭이 두 홰째 울 때에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 이 여삼 바오로에 관한 기록 중

“그는 아직 예비신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크게 십자를 긋고, 자기 자신에게 성세를 주노라고 하며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런 다음 눈이 동그래진 관원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때린 모양으로 때리면 아직도 죽을 길이 아득합니다. 제가 죽기를 원하시면, 여기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서 몸 옆구리의 어떤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데를 두번 치니, 그는 그만 숨을 거두었다. 그 때 그의 나이 43세 가량이었다.”



순교자 조 용삼 베드로에 관한 기록 중

“아버지와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서 길을 가는 동안 조 베드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나는 천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조용삼 베드로는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관장앞에 끌려갔는데, 첫번 신문에서부터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은 자만과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 데 대하여 벌을 받아 슬프게도 굴복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너도 배교하라고 말하니 조 베드로는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니 네 아비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  조 용삼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물어 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다른 말씀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나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였던지 하루나 이틀 후 2월 14일 옥중에서 성세를 받은 후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에 불과하였었다.

순교자 다블뤼 주교의 기록 중

“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주림이요, 그보다도 심한 것은 목마른 것이었다. 다른 형벌을 답으면서는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주림과 목마름에는 넘어가는 이들이 많았었다. 하루에 두 번식 주먹만한 조밥 한 공기밖에는 얻어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볏짚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 안에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순교자 최 해성 요한에 관한 기록 중

“관장은 화가 치밀어 매질을 한층 더 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다리뼈가 부서져 두 세치나 되는 뼈 조각 두개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등과 배가 빠끔히 구멍이 나서 창자가 밖으로 삐져 나왔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는 중에도 요한의 얼굴은 여전히 안온하였으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사랑은 사랑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고자 하는 것이었다.



순교자 장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에 관한 기록 중

“관장은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을 정도의 잔악성을 극도로 발휘하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두 자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또 실제로 아이들을 혹독히 고문시키기 시작하였다. 부모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전능한 은총이 그들을 구원하였으니 장 베드로는 부르짖었다. ‘자녀를 사랑함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 아이들의 괴로움은 내 자신의 괴로움보다 백 배나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천만 번 못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 우리가 받은 신앙은 피로써 물려받은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시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굳게 믿고 있던 그분들은 박해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가끔은 어려움에 처하면 “아닌 것처럼 ” 행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죽기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 원한다면 죽음도 그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환난이나 역경으로 다가오거나, 그 어떠한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던 간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로 향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 매일 한걸음씩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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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축일 강론 모음2
작성일 2008년 9월 20일 (토) 10:20
분 류 대축일 강론
ㆍ추천: 0  ㆍ조회: 8473      
IP: 218.xxx.160
http://missa.or.kr/cafe/?logos.1273.
“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 

  이성만 신부 

1984년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전 세계 교회에 신앙의 귀감이 될 한국의 순교자들 중 103위를 성인품에 올리신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그분들과 다른 많은 순교자들의 피흘린 신앙의 증거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께서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말씀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20여년이 지났지만 그분들의 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그분들의 생활은 “하느님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100여년의 박해중에 2만명 이상의 순교자들의 생활은 하느님 한분을 위해 생활뿐 아니라 생명까지를 봉헌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103위 성인들중에 어떤이는 학자였지만 어떤이는 일자 무식에 아침기도, 저녁기도도 못하고 교리도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던 김성임 마르타 성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하느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지극히 하느님 사랑에 열렬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대부나 다른 이들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하느님께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천명한 생활들이었습니다.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박 안나 성녀는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고 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순교자들은 진리를 배우고 깨우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스스로 모여 연구하고 배우는 정신은 세계 교회사의 유래없는 자생의 교회를 만들었고, 100여년간의 박해 기간중에 30여년 밖에 성직자를 모시지 못했지만 60여년간을 찾고 배끼고 쓰고, 외우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신앙을 전해왔습니다.



성교회의 도리를 더 알기 위해 한양에서 함경도 무산까지 조동섬을 찾아가는 정하상 성인의 노력은 실로 경탄스러운 것입니다. 순교자를 심문한 기록에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유식하냐?”하고 관장이 감탄합니다.



성인들의 문초기록에서 두드러진 것 하나는 어려움, 고통에 대한 인내심입니다. 모진 고문과 형벌, 그리고 병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정신은 우리들 생활에 많은 채찍이 됩니다. 고문하다가 화가 난 관장이 고문 중에 신음 소리만 내어도 배교를 간주하겠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신음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는 성인들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들의 고통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이 살으셨던 그곳에 우리도 살고 있어서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로 가겠다.”고 청해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참수 치명하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띠노 순교자의 하늘을 우리도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주님과 함께 

  박윤배 신부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들 뿐만 아니라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들과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축제의 날이지요. 흔히 순교자의 죽음은 죽었다고 표현되지 않고 하늘나라에서의 태어났다, 하늘나라에서의 생일이라고 표현됩니다.



여러분은 ‘순교’하면 무엇이 우선 떠오르나요? 하느님 때문에 피를 흘리는 일이 가능할까? 또는 어떤 강렬한 것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목숨까지도 걸고 지키려고 했을까? 과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등등의 물음들을 적어도 한번쯤은 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뿐인 생명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주신 신앙의 힘,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를 위해서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모든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받게 되는 박해를 용기 있게, 기쁘게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와 순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순교 성인들이 약 200년 전의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면 지금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박해를 받고 순교를 요청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박해를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작게는 식당에서 성호를 자신 있게 긋지 못하고 밥을 먹는 것,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딱 편을 갈라놓고선 동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느님 안에서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혹은 한탄으로, 때론 욕설로 받아드리는 것 등이 스스로에게 박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 점에서 다시 마음을 잡고 한 주간 살아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 앞에 닥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번 주간은 싫지만 꼭 해야 될 일, 싫지만 누군가가 해야 될 일, 싫지만 했을 때 분명 옳은 일, 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고 나면 분명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신앙 안에서 용기 있게 해 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편하고 좋은 것을 잠시 뒷전으로 두고... 매일 나에게 십자가로 다가오는 일들을 주저 없이 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자 혼자서가 아니고 바로 우리가 함께 그리고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산다는 것 

  임형락 신부 


“너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장수를 누릴 것인가? 너는 이 미사가 끝난 뒤에 오랫동안 은총 상태에 머무를 것인가? 너는 구원받을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 질문에서만 다른 대답이 있다. 너는 죽을 것인가? 그렇다. 틀림없이 그렇다.”



인간만이 자기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내 목숨을 내가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누구나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에 있어 자기중심을 주장하고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신앙인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사! 람들입니다. 따라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면 ‘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있습니다. 쓰레기도 버리고 양심도, 신의도, 가족도, 신앙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내 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버리는 것들 입니다. 정작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구는 분명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생기는 어려움과 희생, 아픔을 감! 수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동일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만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이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 분들이 바로 ‘순교자’들이십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우리 삶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 드립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순교 정신 

  김영춘 신부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세계 청년 대회(7월15일~20일)를 마치고 생드니 교구의 교구장이신 오영진(Olivier de Berranger) 주교님과 청년 120여 명이 프랑스로 귀국하는 길에 열흘 간의 일정(7월21일~31일)으로 한국에 들렀습니다. 1976년부터 17년간 서울 구로와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셨던 오영진 주교님은 청년들에게 한국 교회의 역동성을 보여 주고, 1800년대 조선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순교 정신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에서는 명동성당을 방문하는 날, 주교님과 두 명의 청년을 인터뷰하기로 했습니다.



방문단은 오전 덕수궁의 문화체험을 마치고 명동성당에 12시30분에 올 예정이었지만, 교통이 지체되어 오후 1시15분쯤 도착했습니다. 늦게 도착하신 주교님은 죄송하다며, 인터뷰와 방송 녹음을 하기 위해 길 건너편의 평화방송․평화신문 빌딩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습니다. 방송실에 가기 전에, 승강기 안에서 제가 주교님께 말을 건넸습니다. "점심 식사를 아직 못하셨으니, 우리가 준비한 샌드위치를 먼저 드시고 인터뷰를 하시죠." 주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와 청년들이 우리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정신을 체험하러 왔는데, 그분들이 겪었을 고생과 고통에 비하면 점심 조금 늦게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송 녹음부터 먼저 합시다."



순교 정신으로 점심의 허기를 이겨 내자는 주교님의 생활에서 살아 숨쉬는 순교 영성은 방송 녹음과 신문 인터뷰가 끝난 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함께 나눈 대화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호주에서 세계 청년 대회 마치신 후 바로 한국에 들어오셔서 또 다시 강행군을 하시는데, 무척 피곤하시겠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사제서품을 받고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이 곳 조선에서 신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것에 비하면, 우리들이 한국에서 열흘 간의 일정 동안 잠시 머무르면서 겪는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갈매못 순교성지 순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17년을 살았지만 갈매못 순교성지를 이번에 처음 가봤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용감하게 순교의 칼을 받은 다블뤼(Antoine Daveluy, 조선교구 5대 교구장) 주교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프랑스 청년들은 이번에 한국 천주교회 역사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를 생생하게 배우고 느꼈습니다". 방송국에 녹음을 하기 위해 함께 자리한 프랑스의 앳된 두 청년도 그 옛날 고국의 선교사가 동방의 이 먼 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자신들의 신앙 선조들을 본받아 어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이 이제 가톨릭 신앙의 종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체험한 순교 정신을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신앙의 제단에 바친 수많은 순교자를 신앙 선조로 모시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 정신이 삶의 현장에서 굳건히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詩)는 시(詩)가 아니다 

  김태영 신부 

제가 있는 성당에는 유치원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성모송을 노래하고 유치원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이유 없이 슬퍼질 때도 있습니다. 작은 아이들이 겪게 될 고통들이 눈앞에 보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이들도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까? 삶이 지니고 있는 고통들이 저 아이들을 지나쳐 가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다산(茶山) 정약용은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詩)는 시(詩)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시대가 겪고 있는 불의한 상황에 체념하거나 못 본 척 하지 말고 같이 아파하며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회의 구조적인 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와 녹아 없어질 위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시다가 외로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모순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던 민초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 속에서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두 눈으로 보고 들은 진리를 목숨을 바쳐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높기만 한 양반과 평민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정치적인 혼탁함 속에서 몸을 사리며,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 고통 받던 선조들은 정의로움에 목말라 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바쳐 진리와 정의를 외친 그리스도 예수를 책을 통해 보고 들었습니다. 선조들은 보고 들은 진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기도하고 서슴없이 진리를 증언하다 망나니의 칼 아래 죽어갔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시대에 영합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뒤쳐질까 두려워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밀어놓고 ‘우리 아이’만 좋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못 본 척하며,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경제적 구조 속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웰빙’의 주문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가 흘리고 있는 피눈물을 비웃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아니라 신자들의 사교 모임에 치중하며, 진리와 정의의 외침이 아닌 기교가 난무하는 듣기 좋은 소리로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시던 신앙의 선조들은 이 땅에 피와 눈물의 시(詩)를 새기셨습니다. 선조들이 쓰신 순교의 시(詩)에 우리의 눈물로 마침표를 찍지는 못할지언정 그분들을 팔아먹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불의한 사회를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으로 바꾸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우리의 아이들은 더 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바윗 덩어리 최경환 성인 

  여친천 신부 


지난 18일 배론성지에서 있었던 순교자 현양 대회에서 대성당에 김대건 신부님과 가톨릭 의대 응용해부 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한 최경환, 남종삼 성인의 유해를 모셨습니다. 대성당 왼쪽 최양업 신부님에 관한 그림이 있는 곳에 '최경환 성인의 무릎뼈'라고 표기된 유해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지난 3월 봉인된 유해를 열어보니, 무릎뼈가 아닌 오른쪽 넙다리뼈와 왼쪽 종아리 뼈 일부가 있었는데, 종아리뼈는 보존처리가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뼈를 보는 순간 고단한 삶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온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인은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순박하면서도 강인한 성품을 타고 났습니다. 오롯한 신앙생활을 위해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다니면서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하였습니다.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열변과 달변으로 교리를 강론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들으러 왔습니다. 집이나 밭에서 일을 할 때에, 또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 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장을 보러 갈 때에는 제일 나쁜 것이나 흠있는 것을 골라서 사왔습니다. 이러한 애덕은 자라나서 재난이 닥쳤을 때는 영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과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839년 7월 침통같이 더운 날 40명이 넘는 수리산 교우촌 신자들이 서울로 끌려갔습니다. 앞장 선 성인은 큰 목소리로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고 격려하였습니다. 법정에서,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40일 이상 갇혀 있으면서 고문을 받아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몸의 살이 한 치도 성한 데가 없이 뭉그러지고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은 채 감방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끝까지 항구심으로 견디어 낸 성인에게 고문자들이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해 9월 12일 감옥에서 38세의 나이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후손인 우리는 또 다른 바윗덩어리가 되어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였으면 합니다.



순교자, 하느님이 전부였던 이들! 

  표창연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자.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무언가 나에게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사실 사도들조차도 예수님 뒤에서 자리싸움을 했다. 수많은 군중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생각을 했다. 우리 또한 그런 생각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바라고 따른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외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결국 십자가의 길에선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땐 환호를 외치던 군중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는 돌변하여 야유를 외쳤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정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이들은 그 어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이다.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채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이다.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고, 박해의 고통이라는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죽음’도 피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이라고 자신이 소중하지 않았거나 고통과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단지 그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 성부 하느님이 전부였듯이 그들에게도 하느님이 전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도 말릴 수 없었던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순교=신념에 대한 투신(投身) 

황병석 신부 


오늘의 성서 말씀은 모두 현실을 뛰어 넘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서는 의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로마서간은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기에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복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과 영원한 삶에 있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는 순교 성인들은 바로 이러한 신념속에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신념과 진리를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혹은 현실적 이익과 욕망 때문에 신앙까지도 때로는 뒷전으로 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입으로 ‘순교자 믿음 본 받아 충성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게으름에도 흔들리며 세상에 대해 너무 쉽게 신앙이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매일 매일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내라고, 또한 일시적인 목숨을 부지할려고 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세상 재물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현재, 지금 신앙의 태도를 어정쩡한 상태로 살다가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살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잘 짊어지면서 주님을 따르자 

  정재성 신부 


불란서에서 유학하던 시절,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서는 한국교회의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던 저에게 미사집전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주었습니다. 저는 강론 때 기쁜 마음으로 한국교회에 대해서 소개하곤 했었는데, 미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제 말을 귀담아 듣곤 했었습니다. 특히 아시아 선교에 주력해온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9월 20일이 되면 한국교회의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식당에서 100인분 이상의 음식을 주문해서 아시아 여러 나라 신부들과 함께 한국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한국인이고, 또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들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 2가지입니다.



각자 저마다 갖고 있는 알량한 자존심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올바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모, 가족, 건강, 사업, 결혼생활 등 남들이 알든 모르든 십자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십자가가 하나도 없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분명 십자가는 있을 것입니다.



또 나이 든 노인이라고 해서 세상 모든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겠습니까?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누구나 십자가는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때때로 내 십자가보다는 남의 십자가가 더 가벼워 보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무게는 저마다 다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힘든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너무나 작고 가벼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크게 2가지로 구분해본다면 한 가지는 늘 불평불만하면서 짊어지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무슨 일에나 늘 감사하며 기쁘게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분명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고 따르려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죄 많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죄와 가장 무겁고 험난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고마우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주님을 위해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더욱 더 굳게 믿고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



주님을 따르는 길 

  이건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절)’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가는 세 가지 조건 안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번째, 자신을 버리는 것은 집단(가족, 마을)생활을 해왔던 우리 민족에게는 익숙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헌신, 부모에 대한 효(孝)….

두번째,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일상 안에서 우리에게 항상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데 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마지막 조건인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한국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순교자가 아닌 다른 성인들이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해 마십시오. 순교의 숭고함을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방향 문제입니다. 순교는 유행이 아닙니다. 옷, 액세서리 등은 유행 따라 갈 수 있지만 순교는 다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을 통해 전혀 다른 죽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모습에서, 일반 사람들은 그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본 것입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가끔 우리들의 삶에서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라는 모습을 봅니다. 반대로 영광 없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보게 됩니다. 합치면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우선순위인 하느님 때문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닐까요?



가정에 불화가 있어서, 힘든 일이 있어서, 오늘은 성당 갈 기분이 아니라서, 급한 일이 있어서, 가기 싫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특히 미사-을 소홀히 하는 경우를 봅니다. 우선순위는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한다면 선후가 바뀌어 있는 것이겠지요.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쓰고 나서 남는 시간, 재물, 열정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소중한 시간, 재물, 열정을 드리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기억합시다! 우선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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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9월 20일 (토) 10:11
분 류 대축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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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8.xxx.160
http://missa.or.kr/cafe/?logos.1272.
“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1. 말씀읽기: 루카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마태 16,24-28 ; 마르 8,34)



2. 말씀연구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수난과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가는 나를 버리고 예수님께로 향할 때, 나는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만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만 부활을 맛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잘 따르는 것이며,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두 가지. 하나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니. 둘 중의 하나라도 해보고 싶지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어찌할까? 내 처지를, 어찌할까? 내 마음을...,



신앙인은 죽어야 삽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안의 불의를 죽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게 하기 위해서는 악으로 기울어져가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고, 그래야 구원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전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 우리가 받은 신앙은 피로써 물려받은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시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굳게 믿고 있던 그분들은 박해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가끔은 어려움에 처하면 “아닌 것처럼 ” 행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죽기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죽기까지...



성인들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순교자들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열심한 신앙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나를 버리고, 유혹에 빠져드는 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만을 바라볼 수 있고, 잘 죽을 수 있습니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개인적인, 이 세상에 속한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만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생활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모든 시련을 참아 내며,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 세상에 얽매이는 마음을 죽인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은 망할 것이요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이 말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호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씀은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랑 저희랑 좀 다르지 않습니까? 좀 봐주시면 좋겠는데요.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할 말 하나도 없는 것 아시죠?

 어느 분이 이렇게 묵상을 하셨습니다. “ 절 죽여야 하겠지요? 어떻게 죽여야 할까요. 미운형제 떡 하나 더 주고,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상냥한 미소를 날려야 하겠지요. 만나기 싫은 사람 밥 한 끼 더 사주고, 두들겨 패고 싶은 사람 이해하고 예뻐해 줘야 합니다. 아이고~~넘  힘듭니다. 그런데 자존심 상하고 치사하지만 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을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다시 살고 싶으면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건 너무 고통스럽고 어렵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록 그 이익을 얻을지언정 하느님 나라에는 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자는 비록 세상에서는 목숨을 잃을지언정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해야 되는 것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래서 비록 세상에서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득이라는 것입니다.



 바쁘다고 성당 안 다니는 사람들. 시험이라고 성당 안 오는 학생들. 고3이라고 성당 멀리하는 학생들. 비록 그들이 세상 안에서 출세를 하고 부를 쌓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서까지 통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성당 다닌다고 해서 가난해 지는 것도 아니고, 시험 때 미사 나온다고 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고3 때 미사에 참례했다고 해서 대학 못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버린다면 심판 날 사람의 아들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 심판자로서 우리 앞에 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버리고 세속에 대해서는 죽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다른 이를 앞에서 당당하게 신앙인임을 고백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식사할 때 당당하게 성호경을 긋는 것.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지 않는 것. 핑계를 대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 좀더 잘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죽어야 산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②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버리고 세속에 대해서는 죽어야만 합니다. 내가 죽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다른 이를 앞에서 당당하게 신앙인임을 고백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식사할 때 당당하게 성호경을 긋는 것.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지 않는 것. 핑계를 대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어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만은 하기 싫다고 생각되는 것”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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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축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20일 (토) 10:10
분 류 대축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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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한국 순교자 대축일





       1. 김영진 신부/ 2                  2. 변희선 신부/ 4

       3. 도창환 신부/ 5                  4. 강영구 신부/ 8

       5. 성민호 신부/ 11                 6.    김진룡 신부/ 14

       7. 배갑진 신부/ 15                 8. 장동하 신부/ 16

       9. 교구주보/ 18                     10.           이규희 작가/ 19

       11. 최인호 작가/ 20                12. 신유박해 200주년/ 21

       13. 신교의 자유/ 24                14. 샬트르 조선진출/ 25

       15. 성당건물 잇따라/ 26

1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조상이 순교자라면 뭘해  

김영진 신부



한국 천주교회에서 기념하는 순교자의 달이 9월이다. 많은 순교성인들을 모시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로서는, 뜻 깊은 달이며 자랑스런 달이기도 하다.

나 역시 미국에 몇 년간 있으면서,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함께 사는 미국 신부들에게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자랑하곤 하였다.



어느 날도 아침 미사 후 식당에 둘러앉아 여러명의 신부들이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를 자랑하고 싶어서 “내가 알기로는 미국출신 성인은, 2명뿐이라고 들었는데, 한국 순교성인은 103명이나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미국인 본당신부 쉐이퍼가 웃으며 말하기를 “한국성인은 103명 뿐이지만 미국성인은 그 숫자가 많아서 얼마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미국 성인은 2명뿐인줄 알고 있는데"하고 내가 다시 묻자, 미국에서는 지금도 수없이 많은 곳에서 수많은 성인들이 한국 순교성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용기있게 증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김 신부, 옛날의 조상들이 열심하여 성인이 많이 되었으면 무엇하느냐, 지금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열심하여 성인이 되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항상 유머가 풍부하여 모든 이를 잘 웃기며 함께 사는 신부 7명 중, 동양에서 온 키 작은 노랑둥이, 나를 특별히 잘해주던 본당신부 쉐이퍼의 말이, 순교자의 성월이 되어 한국 순교성인들을 기억할라치면 언제나 내 귓전을 맴돈다.



나는 순교자의 삶을 살고있나 

그렇다, 우리의 조상들이 열심하였고 수없이 순교하였으면 무엇하랴, 오늘 지금신앙을 지키는 우리들이 계속하여 순교자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말이다, 순교는 용기 있는 이들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의 꽃다발이요, 기도로써 마음을 적시며 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월계관이다,

지금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용기 있게 신앙을 전하고 있으며, 얼마나 기도 안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분명 우리들 신앙의 척도여야 하거늘‥‥ 교우 숫자는 얼마이며, 헌금액수는 얼마인가, 그리고 성당은 얼마나 큰 평수이고, 얼마나 큰 도시에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따위로, 우리들 신앙을 무심코 말해오고 있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듯 용기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신앙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들에겐 성당문을 들락거리는 신발 숫자도 중요하겠지만, 목숨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살아있는 순교자가 더욱 소중하며, 헌금바구니를 채우는 엽전의 양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 얼마나 크나큰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느냐가 더 소중하지 않은가?

  

복음에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 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순교의 신비는 바로 목숨을 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한 자의 모습과 삶을 상상해 보라!

  

성인 중 한 분으로서 크리소스 토머이란 분이 있는데,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고 명했으나, 그는 세상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으되 예수 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답하며 맞대응하였다.

결국 로마황제는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되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고독한 개인 감방에 처넣으라고 했다. 그러자 신하 하나가 황제에게 “폐하, 그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했다. 제는 "크리스천이면 별다른 사람이냐? 빨리 집어넣어라"고 호통을 쪘다. 신하는 “폐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사람을 혼자 감옥에 가두어 놓으면, 하루종일 싱글벙글하며 기도를 하느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니 혼자감방에 넣으면 그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화가 난 황제는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 넣으라"고 명령을 했다. 신하는 다시 고개를 들어 황제에게 말하기를, “황제 폐하, 그것은 더더욱 안됩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전교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극악무도한 죄인도 변화를 시키며, 그리하여 죽이려고 하던 크리스천을 다시 살게 하도록 상을 내린 적도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렇다면 그 놈을 잡아다 당장 목을 쳐죽여라. 내가 감방에 넣어 고생을 시키다 죽이려고 했더니 안되겠구나, 지금 당장 그를 죽여라"고 명령하자, 엎드려 있던 신하는 다시 고개를 들며, “황제 폐하, 그토록 모르십니까? 크리스천들은 제일 좋은 상급을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목 베임을 당하러 나올 때, 우는 사람은커녕 오히려 얼굴에 광채를 띠고 기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그렇다면 저 크리스천놈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라며 탄식을 했다고 한다.

  

크리스천이란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할 수 있으되, 예수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는 자이며,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죽음을 향하여 담대하게 전진하는 자이다. 순교자의 달,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주님을 용기 있게 증거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2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변희선 신부                     



내가 아직 나의 미래를 확고히 결정하지 못하고 대입 재수생이던 시절, 성당에서 만난 어느 자매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분의 언니 주선으로 어린이 대공원에서 세시간 정도의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말을 많이 했는데 도무지 그 자매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목이 말라, 그 당시에 시판되던 써니텐이라는 음료수를 서너병 정도 마신 일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정신없이 집에 돌아와 숨을 돌려보니 그저 멍하기만 했고, 나에게 분명해진 것은 누군가를「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나고 좋은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 자매님을 만난 것에 대해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했고, 후회 없이 그 분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여러 해를 넘기면서까지 번민했다. 나의 고민거리는 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도무지 확신할 길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국 순교자 대축일의 복음 생각을 하면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께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고, 이제 사형장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분들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도무지 상상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문과 굶주림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포기함, 혹시나 당신 때문에 친구들이 피해를 당할까 염려하는 마음, 그리고 불신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 등도,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순교자들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던 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순교자들의 아픔과 고통이 심했던 그 이상으로 그 분들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 강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기계로 재어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인해 당하는 불이익이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에 따라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가 시험과 도전을 받는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도전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달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출발한 것이다.

순교는 현세적인 계산으로는 가장 귀하고 중요한 자신의 생명이 박해자에 의해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와 믿음의 행위이다. 그리고 순교자는 이 자유로운 선택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자유인이란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선택을 강요하는 위기상황에서도 참된 것을 선택하는 주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참된 것을 자유로이 선택하는 주체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서 선택을 당해주는 기회주의자인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눈앞에 보이는 잠시의 불이익 때문에 이웃과 공동체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된 사회는 한마디로 불신의 사회, 즉 죽은 공동체이다



순교자가, 순교의 정신이 있는 사회만이 신뢰와 믿음으로 건강한 생명이 움트는 공동체일 수 있다. 작금의 한국 사회가 총체적인 불신으로 치닫는 것은 우리 모두가 순교 선열들이 물려준 참 신앙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우리 모두가 애타게 기원하는 것은 참 사랑, 즉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마저도 내어주는 용기와 기백이 있는 참 자유인, 참 사랑이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9장24절).











3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참된 신앙인의 삶이란?  

도창환 신부



오늘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매년 9월20일로 정해, 거룩한 순교자들을 공경하며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인의 최대 영광은 순교에 있기에(묵시 2,10;14,13), 우리는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거룩히 지냄으로써, 순교자적인 삶이 바로 신앙인의 삶의 핵심이어야 함을 재확인하고 다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중성을 극복한 순교자

우리는 남으로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쉽게 남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목표를 세우고, 인격의 품위에 어긋난 행동과 말을 할 경우에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와 나'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나'만을 생각한 때 생기는, 인격의 부조화를 어느 정도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추구하는 성공적인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인격의 부조화의 모습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지닌 채로 살아가고 있기에, 이를 인간이 지닌 이중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나'를 인정하지 않고, ’되고자 하는 나'만을 생각할 때에, 그 사람은 분에 넘친 욕망을 갖게 되어, 마치 완벽한 도덕주의자처럼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소유하여 구속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아집과 애착 때문에, 다른 사람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자 온 힘을 다 기울이기에, 우리는 ‘분수에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나'를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되고자 하는 내'가 될 때까지 충실히 노력하면서 기다릴 때, 그 사람은 자아 완성의 길에로 들어선 사람, 즉 ‘분수에 맞는 사람'이 된다는 점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이중성은 인간의 내부에서, 신과 인간의 자기 중심적 의지와의 사이에 항상 긴장 관계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신앙인은 무한하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볼 때, 도덕적인 갈등과 내면적인 고통과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약 현실적인 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더욱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은 세속적이며 미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인인 우리가 하느님 앞에선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더욱더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겸허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더욱이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뽑힌 사람을 기다리고(지혜 3,9)" 있기에, 자기 비허를 체험한 겸허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듬뿍 받고, 하느님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바칠 정도로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가 오늘 정성껏 공경하는 거룩한 순교자들입니다.



주님께 뽑힌 사람들을 기다리는 은총과 자비

특히 오늘, 우리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거룩히 지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참된 신앙인의 삶이란, 자기 비허의 순교자적 삶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3-24)"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나를 버리고, 매일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하느님의 힘보다는 인간의 힘을 더 믿는,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고(지혜3,2-3), 사람의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지혜 3,4),"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집착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는 주님께 뽑힌 사람이 되기가 매우 힘든 것 같습니다.

  

우선 나를 버려야만 매일 나의 십자가를 질 수 있고, 나의 목숨마저 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께로 회개하는 데 방해했던 상처 난 나를 떼어버리는 아픔을 견디어 내야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힘으로 새살이 돋는 치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나를 떼어버리는 아픔을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상처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상처난 나의 목숨마저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지혜3,5-6),” 우리는 상처난 나를 메어 버리는 아픔과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버리는 삶입니다. 자신의 육체적, 현세적인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의 참된 생명인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그와 함께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그 때문에 자신의 육체적인 생명을 잃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참된 생명을 건지게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버리고, 매일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의 목숨마저 잃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 그들은 빛을 내고, 짚단이 탈 때 튀기는 불꽃처럼 퍼질 것입니다(지혜 3,6)."

  

특히 200여 년 전, 주님의 섭리로 복음의 씨앗이이 땅에 뿌려진 후, 103위 순교 성인들과 무명 순교자들의 피 흘림의 순교의 불꽃이 밝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환난과 역경과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과 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살당하는 양처럼 끌려가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천대받았던 순교자들의 피홀림의 순교의 불꽃이 밝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어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삶에 고통과 아픔이 오면 쉽게 포기하고, 나의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면 쉽게 화를 내고, 신앙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쉽게 좌절하는 것 모두가,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학기술 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확인되고,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만을 믿는 현대인 앞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증거한다는 것이, 어쩌면 미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리라(마태 10,32)." 아멘.











4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순교자들의 삶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이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오로 정하상과 그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한국 103위 순교성인들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조상들을 모신 후손들입니다. 그뿐만 아니고, 우리는 세계에서도 네 번째로 많은 성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베트남 다음으로 많은 성인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훌륭한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는 것, 또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성인들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자랑거리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조상들을 모시고 있는 후손다운 삶이 우리에게 자랑거리여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훌륭한 조상들을 모시고 있는 가문이 있다고 합시다. 그 가문에는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 그 가문의 후손들이 조상 자랑만 했지, 현재 그들은 잘살지도 못하고, 다른 이웃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그들의 삶은 조상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위대한 우리의 조상인 순교 성인들을 자랑해야 하겠지만, 우리 스스로도 그 후손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 교회는 우리 한국 교회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불과 십여 년 만에 신자수가 배로 증가했습니다. 십여 년 전에는 신자수가 겨우 100만을 넘어서던 것이 지금은 270만의 거대한 공동체로 변모했습니다. 아마 단기간에 이토록 크게 성장한 교회는 한국 교회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곳곳에 본당이 새로 세워지고 수많은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준비 중에 있고, 수많은 개종자들이 교회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런 외적인 성장과 수적인 팽창이 우리의 자랑거리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인다운 삶, 자랑스럽고 위대한 순교 성인들을 조상으로 모신 후손다운 삶이 자랑거리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해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우리의 순친 성인들이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면 됩니다. 즉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하는 삶, 하느님의 말씀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면서 공경하는 우리 순교 성인들 곧 우리의 선조들은 복음 정신에 투철한 생활을 하셨고, 철저하게 하느님께 귀의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백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굳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또 최후의 순간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하는 생활과 복음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름 하나로 그분들이 순교자가 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우연히 순교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분들이라고 살고 싶은 욕망이나, 출세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도 관헌이나 포졸들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 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관헌과 포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서 옹기나 숯을 구우면서 살았고, 박해의 손길이 가까이 오면 이리저리 피신하는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나날의 삶은 복음에 충실한 삶이었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이었고, 기도로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이런 철저한 신앙 생활이 최악의 순

간에 목숨을 바쳐서 순교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분들의 삶이 투철한 신앙인다운 삶이 아니었더라면, 목숨을 바쳐야 할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거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한목숨 바쳐서 영원히 살기 원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정말 값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선조들은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복음에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복음에 충실한 생활을 하고, 동시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도 열심이었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국 천주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1794년 중국인 주문모(周文模) 신부가 이 땅에 몰래 입국하기까지 10년 동안 이 땅에는 성직자도 없었고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문모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왔을 때, 이 땅에는 이미 4천 명이나 되는 교우들이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 선조들의 힘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교회가 설립된 것도 세계 교회 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지만, 선교사도 없이 4천명이나 되는 교우가 이 땅에 자생(自生)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복음 선포에도 그만큼 충실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복음 선포란 입으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이 뒷받침되어야만 복음 선포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 때 당시는 유교사상(儒敎思想)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도 없는 가운데 4천 명이나 되는 교우들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신앙 생활이 그만큼 철저했다는 것을 뜻하고, 우리 선조들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폐쇄적인 당시 사회에서도 그만한 교우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도 우리 순교 선조들의 삶은 참으로 복음적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03위 순교 성인들은 당시 사회의 신분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에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연령으로는 13살 소년으로부터 79살의 할머니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계급과 신분의 사람들이, 빈부귀천(貧富貴賤), 남녀노소(男女老少)의 장벽을 넘어서, 서로 사랑하며 감싸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 자매로서 사랑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신앙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었기에, 그토록 수많은 교우들이 죽어 갔어도 교회는 뿌리가 뽑히지 않고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의 자랑스러운 순교 성인들의 덕분으로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로운 신앙이나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박해 중에 생명을 걸고 지킨 신앙이나 그 본질 곧 알맹이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난세(亂世)에 영웅(英雄)이 나듯이, 박해 시대에 성인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성실한 신앙 생활이 성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우리도 현대의 성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순교 성인들의 믿음과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복음에 충실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6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 곧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그 길을 가셨고,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가야할 차례입니다.

  

또 요한 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길, 우리가 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임을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와 분열과 싸움으로 어두운 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장벽을 허물어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길, 그리고 다 함께 어울려 더불어 살면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 길을 가셨고 이제 우리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旅程) 중의 나그네 살이를 하는 우리는 온갖 유혹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더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더 가깝게 닮게 될 것이고, 위로부터 오는 은총으로 더욱더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기도하는 삶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쓰셨듯이, 그 후손인 우리도 기도로써 이 악한 세태 속에서도 성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경축하면서 기념하는 103위 순교성인들의 후손다운 생활을 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대의 성인이 됩시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신앙을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물려주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5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성민호 신부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과연 주님의 기도대로 사도들은 진리를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다가 세상의 미움을 받고 마침내 주님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께 몸을 바쳤습니다. 한국의 초기교회도 사도시대와 같이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조들이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참으로 혹독한 고난 중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자라온 한국 천주교회는 마침내 1984년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순교선열들이 피를 흘린 이 땅에서 감격스러운 103위 시성식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바로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과 바오로 정하상 회장님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순교하신 103위 성인들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들의 얼을 기리며 마음껏 현양하는 대축일입니다. 이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먼저 이처럼 훌륭한 선조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한국교회 창립선조들을 비롯하여 이를 피로써 증거해 준 수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피눈물나는 고생을 하면서도 자손들에게 신앙을 물려준 조상들의 업적과 공로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가 드물 정도로 너무나 훌륭하였기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도 시성식 때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그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이조 오백 년의 암흑천지에 새벽을 밝혔고, 배달민족으로 하여금 오류의 잠에서 깨어나 진리의 새날을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어느 외국 선교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찾았으며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교리를 탐구하였고 터득한 진리를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가성직제도(暇聖職制度)를 만들어 신앙운동을 전개할 만큼 열성적으로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 결과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영세 입교하였으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복음이 전래된 이듬해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백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여러 차례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꺾이지 않고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동안 순교한 사람들이 103위 성인 외에도 1만여 명이 된다고 하니 그 당시의 박해가 얼마나 지독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강요해서 하느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현세적인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을 뿐더러 그분을 만유 위에 사랑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온갖 핍박과 고통, 고문과 멸시를 받아가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그분께 바쳤습니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성사를 받기 위해 평생 동안 사제를 기다렸으며 미사참례를 위해 수백 리 모험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교리책 한 권 제대로 없어 넉넉히 배우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을 배신하는 말과 행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어디서든지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변론하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쫓기는 형편에서 남의 눈을 피하여 숨어살아야 했기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간벽지에 교우촌을 만들어 신자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천주학쟁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끌려가 옥살이를 했고 사학죄인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심한 형벌과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적중시켰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는 주님의 약속처럼 지금은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위하여 몸을 바친 순교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핏줄과 역사를 같이하고 문화와 풍습을 함께하는 바로 우리 선조들이 이처럼 훌륭한 정신과 영웅적 행위와 빛나는 업적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교회역사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랑스런 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바로 그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명예스러운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우리 조상들이 엄청난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하더라도 후손들인 우리가 이를 이어받아 현대에 맞는 순교정신으로 신앙의 증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별로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우리가 9월 한 달을 순교자성월로 지내며 그들을 현양하기 위하여 각종 행사를 거행하고 성지를 순례하는 것도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훌륭한 조상들을 현양하고 세계만방에 자랑하기 위해서는 후손들인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부끄럽지 않은 후손답게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가 조상들처럼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땀이라도 흘려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진리와 정의를 거역하기보다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순교정신입니다. 신앙을 생명보다도 귀하게 여기며 신앙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무혈의 순교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진리를 따르기 위해 무엇 하나 아까운 것 없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간직하였고, 주님을 떠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백절불굴의 용기를 지녔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우리 교회가 200주년을 맞이하여 '이땅에 빛을' 밝히자는 기치 아래 교황님의 한국 방문, 103위 시성식, 전국 사목회의, 정신운동 기념사업 등, 여러 가지 뜻깊은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다시 300년대를 향하여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자고 다짐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조상들의 찬란한 업적을 이어받은 우리로서는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온 겨레에 복음을 전하고 화해와 일치, 나눔과 사랑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103위 성인들을 자랑스럽게 모시고 있는 우리 교회에 대한 전세계 교회의 여망이며 교황 성하의 기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다짐하면서 다시 한번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성인들의 후예답게 이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6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뛰어라               

김진룡 신부



셋, 둘, 하나, 뛰어!ꡓ

100m 달리기의 출발이 아닙니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외줄하나를 몸에 걸치고 뛰어내리는 이른바 번지점프의 출발의식입니다. 최근에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이 번지점프는 안전장치를 단단히 갖추어놓은 점프대만이 아니라 높은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감행(?)될 수 있는 모험 스포츠의 일종입니다.

뛰어내린다는 점에서 절벽다이빙과도 비슷하지만 번지점프는 절벽다이빙보다도 휠씬 높은 곳에서 또 물이 없는 곳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몸에 걸친 생명선이 물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뛰어내리는 이의 안전을 훨씬 더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점프대에 서는 사람의 대부분은 점프대 아래에서 자신만만하게 뛰지 못하는 사람을 비웃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뛰어내리지 못하겠다고 손을 흔들거나, 포기의 의사로 비춰지는 울음등은 차라리 솔직한 편입니다.ꡒ이거 장난이 아니네ꡓ, ꡒ우선 심호흡좀 하고ꡓ, ꡒ나 오늘은 일진이 안좋은데ꡓ등 조금전의 그 자신만만하던 으쓱임은 간데가 없어집니다. 보는이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까닭은 점프대 앞에선 사람 대부분이 체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본능적인 모습으로 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면에서 점프대의 높이를 가늠했던 것과는 달리,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땅위의 세상은 온통 나를 해칠 것같은 위험스런 도구들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잔잔하던 수면을 보며 시 한수라도 읊고 싶었었는데, 평소에는 우거진 나무와 넓직한 바위의 조화로움에 별장이라도 한 채 어떨까 생각했지만, 점프대위에서는 ꡐ살아야겠다ꡑ는 본능만이 뛰는이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주변의 상황은 2차적인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낄낄거리던 이가 위에서는 진지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하게 다칠 수도 혹은 죽을 수도 있는 이 일에 사람들은 점점 더 매력을 느끼는가 봅니다. 그 매력이란 어떤이는 ꡐ추락ꡑ에 있다하고 어떤이는 저점을 끝으로 ꡐ튕겨오르는 순간ꡑ에 있다고들 합니다. 개인에게 그 매력이 어떻든 죽음과도 같고 새로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동시에 그것도 짧은 순간에 맛볼 수 있는 것이 번지점프의 매력입니다. 그러기에 숙달된 조교가 ꡒ왜 뛰려하나ꡓ는 물음을 할 때, ꡒ병중에 계신 아버지에게 힘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ꡓ는 대답을 이해하게 됩니다. 긴 설명이 필요없는 마음과 몸으로 이해할 답입니다. 그러기에 뛰어내리는 자만이 이런 물음에 답할 자가 됩니다. 뛰는 자만이 ꡐ추락ꡑ의 깊이와 시간을 느낄 수 있고, 뛰어내리는 자만이 ꡐ튀어올라ꡑ 살았다는 순간이 가져다주는 영원함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위해서 뛰는 이는 알던 모르던 생명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와 의심속에서도 생명줄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그가 뛰어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 그것은 죽음과 삶을 경험하는 이 일에 반듯이 필요한 일입니다. ꡒ함께 뛰어보시지 않겠습니까?ꡓ











7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는 신앙생활

배갑진 베드로/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 위원장 신부



1. 순교자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순교자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순교’라는 말의 어원은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 ‘증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순교란 말이 생겨날 당시에 이 낱말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증언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증거하고 그 증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2. 순교의 역사

세계 교회의 역사에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증언하고 실천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가 시복․시성되어 오늘의 교우들에게 신앙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 우리도 순교자를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성인이나 증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박해시대를 통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 순교자 가운데 103명이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으로 선포되어 우리들에게 믿음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세계 교회에서도 이 땅에서 순교한 103명의 순교성인들을 기념하고 본받기를 다짐한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9월을 ‘순교자 성월’(聖月)로 정하여 유명․무명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3.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까닭은 그들의 모범을 본받고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특히 103명의 순교성인들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좋은 모범을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아직까지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순교자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한 노력은 오늘의 우리가 그들의 삶과 믿음을 본받기 위한 노력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현재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에서는 1801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분들의 시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미 8권의 자료집을 정리해 내었고, 앞으로 3권의 자료집과 여러 권의 연구논문집을 간행할 예정이다. 자료정리와 연구 없이 그분들의 시복과 시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바쳤다. 그와 같이 절박하고 강인한 심정으로 우리도 신앙을 고백하며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순교자의 모범에 따라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8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순교자 정신과 순교자 현양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 

장동하 신부



해방 후 현양의 길

한국교회는 탄압과 박해에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의 전통을 존중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순교자 현양운동은 한국적 신심운동으로 정착, 발전하고 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는 운동을 교회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순교정신의 근거가 되었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인 본연의 자세로 혼란시기의 신자들을 일치로 이끌었다. 이런 노력은 구체적으로 「한국순교자현양회」의 재건과 새남터 순교자기념탑 건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본받을 자세

오늘날 순교자들에게서 본받고자하는 자세는 무엇인가.

첫째, 하느님 신앙과 하느님에 대해 알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성서 읽기를 들 수 있다.

순교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알기 위해 성서 뿐 아니라 주요 교리서들을 한글로 번역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미 120여 종에 이르는 교회 책자 가운데 83종이 한글로 번역돼 읽혀졌다. 이 책들 가운데 특히 많이 읽혔던 것은 「성경직해」로 신약성서 사복음서의 약 30.68%를 차지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주일과 축일용 성서였다.

 

둘째, 하느님을 창조주이자 사랑으로 이해한데서 비롯한 자신과 이웃, 곧 인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이의 실천이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로 보았고, 하느님 외의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보았다. 이런 인식은,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돼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져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것으로 공유됐다.

  

셋째, 하느님을 앎을 통해, 세속 권력을 상대화시킴으로써 복음을 신분해방․인간해방이라는 사회적 복음으로 이해하고, 이 해방운동에 자신을 일치시켰다.

  

넷째, 복음이해를 기초로 박해에 당당하게 맞서면서, 사회정의를 부르짖었다. 이 대항은 곧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진리를 수호하여 평화를 이루고자하는 결의였다.

  

끝으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신․망․애 삼덕(三德)을 생활의 주요한 덕으로 추구하고자 했다. 순교의 길은 삼덕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 인간해방과 완성의 길이었고, 하느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다.

     

순교자들 삶 공유

순교는 죽음에 직면해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인간 자유를 선언하는 행위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신앙과 진리를 가장 극적으로 증거하는 행위이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인간이 다른 인격적 존재를 존경하는 행위는 항상 사랑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순교는 지극한 사랑의 행위다.

  

오늘날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박해를 받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일상 가운데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할 때에는, 많은 측면의 내적 장애물이 있다. 이 시대는 어느 면에서 회의주의, 허무주의가 지배적이고 근원적인 전제들이다. 개인과 가정, 인류의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할 중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틈새에 우리의 삶의 자리가 보인다. 하느님과인간을 사랑 그 자체로 이해했던 순교자들의 신앙의 전통이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해체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돋보이는 것이 사랑이다.

  

순교자 현양의 길은 사랑의 완성에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현양을 위해서는 이 사랑의 길을, 먼저 살다간 순교자들의 삶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삶을 공유하고자하는 길은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길밖에 없다.











9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성인의 삶을 따라가는 교회

교구주보



1. 복음이야기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에서 백성들과 제자들을 상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상대로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패한 셈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상대로 한 가르침은 그런대로 성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 9,20)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자세 네 가지를 언급하십니다.



  첫째, 자기 부정과 십자가 수락입니다(23절).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 아집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수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24절).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이고, 반대로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재물보다는 영원한 삶을 더 중시 여기라는 것입니다(25절). 이 세상에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신앙을 잃어버린 어리석음을 탓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넷째,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26절). 그리스도인이 지금 예수님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 그대로 종말에 예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겠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는 지극히 중요한 때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현재를 환히 들추어 낼 뿐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순교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며 살아간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는 일에 투신하다가 모함도 받고 박해도 받고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분들이 순교 성인들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의 덧없는 명예와 부귀영화와 쾌락을 포기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얻고 누리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내 놓은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순교 성인들은 복음의 증인들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참다운 성인 공경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10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기 도

이규희 지따/ 작가



얼마 전, 형제 중 한 사람이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처음 그 운명적인 병마를 얻었다고 할 때, 형제들은 모두 놀라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제일 젊은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힘을 내라고, 꼭 회복이 될 거라고, 용기를 돋궈 주려 애를 썼습니다. 비통한 마음을 감추면서. 수술과 재발, 그리고 마지막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독백처럼 뇌었습니다. “이제 학교도 그만두어야 하겠지요.”

문학박사인 그는 학문의 전당에서 내려선다는 사실이 사실상 생을 마감하듯 안타까운 모양이었습니다. 부엌의 개수대 앞에 나란히 서 있었건만 저는 그의 모습을 차마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병원에서 치료 하나도 안 해줘요.”

비교적 냉철하면서 이성적이었던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만 그의 눈동자는 아마도 슬픔과 분노로 동요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위로도 무기력할 뿐인 그런 순간엔 저 자신마저도 그를 슬픔과 분노에 빠뜨리는 세력과 한패가 되는 것 같아 눈앞이 답답하였습니다.

왜 그다지 그를 위로할 말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는 걸까요. 어쩌면 그런 때에 환자의 마음을 다독여줄 최상의 언어는 엄밀히 이 지상에 아예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후, 더 많이 쇠약해진 그가 뜸을 잔뜩 들여 찾아간 저에게 인사 삼아 분명한 발음을 건네 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힘드는데, 가기도 힘이 드네요.”

그는 미소짓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의 야윈 손을 잡을 뿐, 또 다시 할 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지상의 그 숱한 말들 중에 설마 그런 순간을 위한 적절한 용어가 그렇게도 없겠습니까만 문제는 저의 그릇이 나뭇잎만도 못하게 연약한 탓이겠지요.

그 절대절명의 시간을 헤아리고 있는 사람의 심중을 미리 짚고 그만 얼어 버리는 저의 모양새는 더 이상 비겁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수난이 세 번에 걸쳐 예고될 때, 생각보다 무심하게 느껴지는 제자들의 반응이(마태 16,21-19,19) 새삼 인간적으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병상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고독한 사람입니다. 오직 혼자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그 힘겨운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동안 사람은 다 성화(聖化) 되어질 거라는 짐작까지 저는 일찍이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 저의 짐작대로라면, 그가 차츰 성화되어 갈 즈음, 여태 시원스런 답변 하나 건네지 못한 저는 그를 위해 이제 진정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바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고심 끝에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저는 그에게 줄 마지막 선물로 골랐습니다. 서툴게 곡조까지 살리어 14처의 기도가 다 끝났을 때 그는 고즈넉하게 입술을 열었습니다. “감사해요.”

저희 영혼이 메말랐사와 주께서 은혜의 기름을 부어주시나이다. 아멘.











11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자, 일어나 가자

최인호 베드로/ 작가



간디(Gandhi, 1869-1948)는 인도의 민족지도자이자 사상가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인물로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 즉 ‘위대한 영혼’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19세 때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웠고, 변호사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건너가서 차별받는 인도 사람들을 보고 아힘사, 즉 비폭력 간디주의를 형성하여 투쟁을 벌리게 됩니다. 이 투쟁으로 세계에 알려진 그는 귀국하여 인도를 식민지 통치하는 영국과 계속 투쟁을 해나갑니다.

61세의 간디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서해안 바닷가로 ‘소금의 대행진’을 주도했던 것은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극치였습니다.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분할 독립되자 그는 78세의 고령인데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융화를 위해 애쓰다가 반이슬람 극우파 청년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생전에 국가가 망하는 7가지의 조건을 “이럴 때 국가는 희망이 없으며,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첫째 원칙 없는 정치, 둘째 도덕 없는 상업, 셋째 노동 없는 부(富), 넷째 인격 없는 교육, 다섯째 인간성 없는 과학, 여섯째 양심 없는 쾌락, 일곱째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간디의 이 말은 21세기를 맞는 우리들의 마음에 비수와 같은 충격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원칙 없는 정치에 흔들리고 돈만을 좇는 더러운 부정부패의 상업주의에 오염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성 부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교육은 학생들의 인격을 무시한 지 오래됐으며, 과학은 인간을 복제하는 데까지, 쾌락을 위해서는 중학생 어린 딸까지 유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말한 마지막 조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야 할 조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의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그리스도로 완성될 수 있었듯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는 대부분 십자가가 없는 그리스도 이전의 예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성인들입니다. 그런 순교자들을 조상으로 모신 우리지만 우리의 신앙 속에는 십자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버리는 매일의 십자가’야말로 ‘희생’인 것입니다. ‘희생’은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들 신앙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제 십자가를 지고 일어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자, 희생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앞장서 외치고 계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라갑시다. “자, 일어나 가자”(요한 14,31).              











12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 지상중계 



◎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성찰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2001년)을 앞두고 매달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4일 여덟번째로 열린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성찰'에 관한 김진소(호남교회사 연구소장) 신부의 특강을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한국교회는 박해를 겪으며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 그 중 신유박해 순교자 가운데는 한국교회의 기초를 닦고 신심의 뿌리를 깊게 내려줄 뿐 아니라 지식과 행동이 일치한 훌륭한 인격과 덕망 높은 인물들이 많다.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삶이 성스러운 것은 깨달음을 실천한 굳은 의지력과 강한 용기에 있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삶을 읽으며 우리가 자각할 것은 무엇인가? 선조들의 신앙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진단에서 시작되고 유지된 점이다. 조상들의 신앙은 인간의 목숨이 깨지기 쉬운 유리병보다 허망하다는 자각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천주교로부터 인간의 몸에는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영혼을 자각하며 영원히 사는 길을 알게 되었다.



영혼의 자각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빈부의 차이나 신분과 남녀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순교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함을 부인하는 기성사회의 틀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이었다.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인간 몸의 존귀함과 신성함은 신앙 안에서 더욱 확실했다. 인간 몸과 그리스도의 몸의 완전한 일치의 표징인 성체성사는 영혼과 육신의 통일체인 인간 몸에 대한 존엄함과 거룩함을 한층 확실하게 하였다. 신도들은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가 사람의 살과 뼈와 세포에 살아있게 되므로 자신의 몸을 신신(神身)으로 인식했다.



몸이야말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기호였다. 신유박해 순교자들 중에는 거룩한 몸을 보존하기 위해 동정생활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 동정생활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남을 자기 몸처럼 받들고, 사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조상들에게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치러야 할 통과의례로 보았다. 순교자 박취득(라우렌시오)은 '인생은 초로와 같고, 나그네 길과 같다'고 했고, 이순이(루갈다)는 '죽음은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죽음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유교에는 천주교의 순교와 비슷한 교리가 있었다. 맹자는 ꡒ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오, 의(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만약 이 둘을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살기를 포기하고 의를 택하겠다ꡓ고 했다. 유교적 교양을 갖춘 정약종과 같은 지식인 신도들은 ꡒ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어찌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의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합니다ꡓ라고 했다. 순교는 진리에 대한 의리이며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효성과 충성의 표현이었다.



조상들은 하느님을 과학 지식으로 찾지 않았다. 조선의 유교사회가 가족제도를 기본구조로 하였듯이 하느님을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 이해했다. 하느님은 인류라는 자식을 낳은 부모이며 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운영하며 수고하는 부모로 인식했다.



평소 선조들이 인간의 존엄성, 성체를 받아모신 신도들은 곧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깊은 이해가 없었거나, 하느님이 계시다는 큰 바위 같은 믿음이 없었거나, 하느님을 가슴과 체온으로 느끼는 정서가 없었다면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신유박해가 끝나자 풍비박산 되었던 신도들은 다시 모여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신앙공동체를 재건했다. 신유박해 순교자의 영성은 구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영성이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 외형적 팽창주의․성장주의․물량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정리=박주병 기자】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 조상제사문제와 신해박해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소장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2001년)을 앞두고 매달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을 마련하고 있다. 7일 세 번째로 열리는 '조상제사문제와 신해박해'에 관한 김진소(호남교회사연구소장) 신부의 특강을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조선왕조는 송나라의 주자가 집대성한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선택한 유교국가다. 그래서 가정의례준칙인 주자가례를 사대부들에게 강요하고 일반인에게까지 생활관습으로 확립하고자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주자학이 토착화됐고, 17세기에 와서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방법으로 주자가례의 실천을 강요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폐쇄적, 독선적, 배타적인 주자학 하나만을 신봉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천주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상이며 종교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도들은 천주교가 유교식 조상제례를 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상제사가 국가공권력으로 강제로 지내게 되어있고 또 오랜 인습으로 내려오고 있어 버리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조상제사 문제로 고민한 나머지 윤유일을 1790년 북경교회에 파견하면서 신주를 보존하고 조상제사를 계속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한국신도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항검의 이종사촌인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 권상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1791년 어머니 상을 당한 윤지충은 장례의식대로 예를 갖추었으나 신주는 모시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에 권상연도 동조해 신주를 소각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천주교도들을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반란세력으로 규정하던 노론의 홍낙안이 성토를 시작했고,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쳐 윤지충과 권상연은 갖은 고초와 심문을 당한 뒤 참형을 당했다.



그러면 윤지충, 권상연이 폐제분주한 것은 단순히 교황청의 결정에 따른 행위였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들이 사리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진 유교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면 당시 제사를 폐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폐제분주는 유교에서 천주교로 완전히 개종한 천주교도의 행동이었다. 초대교회 때부터 신도들은 조상제사를 종교행위로 인식했고, 천주교로 개종한 이상 교회의 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둘째, 근본정신을 잃지 않는 제사의식의 형식은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윤지충은 주자가례가 지배체제를 강화하면서 국민의례로 정착하게 된 과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신주는 볼 수 없는 사자(死者)를 표상하는 신상과 사자의 신령이 거처하는 의빙처(依憑處)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윤지충은 신상의 의미로 해석해 신주를 폐기한 것이다. 넷째, 윤지충은 천주교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깨달았기에 신분제도를 옹호하기 위한 수단인 유교식 조상제례를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식 조상제례를 폐지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근본적 이유는 신앙 때문이다.



유교식 조상제례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신해박해를 이 시대의 상식으로 반성하면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독선주의가 근본 원인이었다. 사실 신해박해는 그 근원을 따져보면 유교와 천주교간의 우월감이 빚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상제사를 하나의 유교적 관습 또는 종교적 성격이 없는 국민적 관습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조상제사의례는 종교화 내지는 신앙화되었기 때문에 유교적 관행이나 국민관습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은 제사를 종교적인 문제로 인식하였고, 그들은 천주교로 개종한 까닭에 천주교 의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정리=박주병 기자】










13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신교의 자유’ 전면 허용 : 프랑스와 수호통상 조약 / 공개적인 사목   1886년



1886년 6월4일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 조선에서의 ‘신교(信敎)의 자유'가 전면 허용됐다.

한성부 관윤 김만식과 프랑스 외무부 섭외과 시랑인 코고르탕(Cogordan) 전권대사는, 이날 서울에서  ‘천주교 전교' 문제로 4년 간을 끌어오던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조인, 양국 간에 통상 및 종교의 자유론 인정했다. 이로써 1784년 조선교회의 창립을 알리는 ‘수표교 공동체'가 탄생된지 103년, 조선대목구 설정 56년 만에 통상이 허용된 지역 내에서의 선교가 가능해졌다.

  

이날 체결된 한불수호통상조약은 서울과 인천, 원산, 부산 등 허용된 지역 내에서 프랑스인들의 입국을 전면 허용하고, 호조(護照․여권)를 발급, 프랑스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교회(敎鞶)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선교․신앙의 자유에 관한 법적 근거를 확보, ‘지하의 은신처와 상복(喪服)’에서 벗 어나, 공개적인 사목과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번 한불조약 체결은 또 교섭통 상사무독판이던 김윤식이, 청국인 원세개의 조종에 따라 조약 체결에 반대하던 중 광주 부유수로 좌천되고, 일찍부터 천주교를 배워왔던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대부인(1896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과 민비 일족이, 사실상 조약 체결의 전권을 장악한 데 힘입은 바도 크다.

이에 따라 조선천주교회는 침묵의 교회에서 ‘선포하는 교회'로, 지하교회에서 ‘지상의 교회'로, 박해받는 교회에서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로 완전히 거듭나게 됐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공개적인 전교활동이 가능해짐으로써, 외국인 선교사와 관민들과의 충돌 등 갖가지 형태의 ‘교안(敎案)'이 빈번하게 발생될 것으로 우려돼, 조선정부와의 교민조약 체결이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14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샬트르 성바오로회 조선 진출 : 수녀회로는 처음. 고아원, 양로원 운영



18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1888년 7월 22일 수녀회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진출했다.

  이번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조선 진출은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1885년 서을 곤당골(현 을지로1가)에 영해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한 블랑 주교는, 운영에 어려움이 많자, 가난한들의 교육과 환자 방문 등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이 수녀회에 운영을 맡기기로 결심, 프랑스 본부에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했었다.

  

이날 제물포에 도착한 수녀는 프랑스에서 출발한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텔 수녀, 그리고 베트남에서 합류한 중국인 수녀 2명을 포함해 모두 4명이다.

한달 전부터 조선 땅에 서양 수녀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백 명의 교우들은, 마포까지 마중나와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15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가 9,23-26

성당 건물 잇따라 세워져

1893년 조선 최초의 고딕식 약현 성당(현: 중림동) 건립

평양. 되재. 공세리. 청계성당 등 10여개 완공


1893년 조선 최초의 고딕식 성당인 약현성당이 세워진 이후, 각 지역에 신앙생활의 중심이 될 성당이 잇따라 세워져, 1899년말 현재 10여개의 성당이 완공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성당들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뉜다. 하나는 한양을 비롯한 큰 고을에 건립된 뾰족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시골 교우촌을 중심으로 지어진 한옥성당이다.

 

약현성당은 1891년 종현성당(명동)에서 약현본당이 분리 신설되면서, 2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지어진 서양식 벽돌성당이다. 종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맡았다. 이보다 먼저 기초공사를 시작한 종현성당은 엄청난 크기와 규모를 자랑하지만, 조선정부의 강한 반대와 재정 부족, 기술 미숙 등으로 7년의 세월이 걸려서 축성식을 가졌다.

서양식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폭 29m, 길이 68m에 종탑 높이가 무려 46.7m에 이르러, 한양 전체를 압도하는 조선의 명물로 등장했다.

  

지방에서도 1895년, 전북 완주군에 세워진 되재성당을 시작으로 많은 성당이 세워졌다. 프랑스 선교사 비에모 신부가 건립한 되재성당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한옥성당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 비에모 신부는 프랑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동학란으로 인해 공사가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895년 사제관과 함께 준공됐다.

  

2년 전인 1897년에 완공된 충청도 아산의 공세리성당은 80칸짜리 조세 창고건물 자리에 지어졌다. 성당은 사제관과 연묑된 ‘ㅁ'자형 평면의 기와 한옥, 대칭부분을 이용했다.

남녀가 구별한지라 가운데에는 장막을 쳐서 남자와 여자가 앉는 자리를 구분했다.

  

황해도 신천군의 교우촌에 설립된 청계성당 역시, 한옥성당이다. 땅을 상징하는 방형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을 결합한 특이한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경상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로베르 신부는 2년 전 대구로 들어가 성당 부지를 마련한 후, 최근 전통 한식 목조성당을 완공했다. 이번 예수성탄 첨례날에 축성식을 가질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평양성당(1895년), 강원도 이천성당(1895년 ), 황해도 매화동성당(1899년), 제주성당(1899년), 제물포성당(1899)도 모두 최근에 완공됐다. 또 현재 여러 곳에 성당을 짓고 있어 20세기가 되면,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선교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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