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놀이
주일학교 자료모음
       
 
나해  
       
 dominusdaysc3
주일학교자료실
말씀과 놀이는 내용이 계속 수정 보완되고 있습니다.
또 본당 상황에 맞게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마음껏 사용하세요
   

Warning: Division by zero in /home2/missa/html/missabbs/skin_board/s_build_cafeblog/2_index.php on line 1233
  67
작성자 진복팔단
작성일 2012-11-14 (수) 17:04
분 류 나해
첨부#1 주일_복음나눔지50호-나해_위령의_날.hwp (80KB) (Down:259)
ㆍ추천: 0  ㆍ조회: 3537      
IP: 121.xxx.242
http://missa.or.kr/cafe/?dominusdaysc3.917.12
“ 나해 위령의 날, 참된 평화 ”

참된 행복

1. 말씀읽기: 마태오 5,1-12ㄱ

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행복이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있으며, 내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 안에 머물며,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분명 행복입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멸망해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돌아봅시다.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고 가르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무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있고 없고를 뛰어넘어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하느님께 무엇인가 하나를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루의 양식을 봉헌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음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 만을 생각하는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나눌 수 있고, 그런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② 슬퍼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고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고, 뉘우치는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위로해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남의 죄를 보고도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죄에서 돌아와 주님 안에서 살아 갈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줍니다. 힘들고 상처도 받겠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은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위로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은 근심 걱정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놓고 예수님께 위로를 청합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역경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희망을 바라보고, 인내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지는 상황들 속에서“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③ 온유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5,5)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들은 모두 검소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복수를 하거나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지도 않습니다.

행복한 이들은 “세상적인 것에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나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 눈에는 하느님만 보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오직 하느님께로만 향하는 이들은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옳은 일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시기에 그들은 흡족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손을 내밀고 도와줍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봉사를 하는 이들은 자신이 봉사할 수 있음을 기뻐합니다. 그의 작은 봉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쁨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고, 그 기쁨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봉사에 대해서 보상을 하려 하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봉사의 기쁨을 모르는 이들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뜻과 맞지 않으면 돌아서 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그 봉사를 통해서 결코 참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⑤ 자비로운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비는 예수님께서 늘 보여 주시던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기를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이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자비를 베풀 때 그도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하느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이들은 결코 자비를 입지 못하고,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내가 단죄한 것을 내가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 내가 하지 말라고 했고, 불쾌하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배려해야 합니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합니다. 나만 편한 것은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 때, 공동체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시는 주님께서도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깨끗함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을 하면 금방 깨끗해 지는데, 마음이 더러워지면 끔방 깨끗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아 깨끗해지지만 나약한 의지는 그 더러움을 반복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믿음과 사랑을 드릴 때, 더러움을 멀리할 수 있고, 정결을 지킬 수 있으며,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창이 깨끗해 질 때, 그는 하느님의 웃는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만 보이고, 하느님 눈에는 그렇게 마음이 깨끗한 이들만 보인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더욱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볼 때, 내 눈에는 하느님의 영광과 자비와 사랑만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보고자 할까요?

 

⑦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지만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최고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즉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있기를” 이었습니다.


평화는 갈등이 없어야 찾아오는 것이고, 서로 만족해야 찾아오는 것이며, 외부의 위협이 없어야 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갈등이 없어야 찾아오는 것이라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화해를 시키며, 오해를 풀어주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어 주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만족해야 찾아오는 것이라면 서로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정서욕구가 충족이 될 때 공동체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고,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욕구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욕구도 충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만족할 때 찾아오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은 각자의 영적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육적인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적인 욕구가 충족이 될 때, 주님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양보하여 조화를 이룹니다. 기도하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며 형제자매들과 평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환경 안에서 공동체가 평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주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존재입니까?


⑧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고 말씀을 하십니다. 의로운 이들은 성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고, 박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 이들입니다. 초대교회안에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에 박해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했고, 신앙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믿는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신앙인들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고통과 죽임을 당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셨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거나, 다른 이들의 강요에 의해서 내가 가진 신앙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접을 때, 하느님 나라도 내게서 멀리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 하며 진리 편에 설 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은 의로운 이를 박해합니다. 진리편에 서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하지만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에 아무리 시련이 주어져도 편을 바꾸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의로운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5,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박해는 그저 박해일 뿐입니다. 그 박해가 내 신앙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됩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박해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인들이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에 오는 것들입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은 중상 모략을 말합니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바로 중상 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비록 모욕을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주어지면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을 청하는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용기와 힘을 주시며, 모욕과 중상모략을 이겨내어 주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기뻐하는 삶, 그 삶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우리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내 앞에 하느님의 나라가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얻고 있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③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는 어떤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기

②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기

③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66
작성자 영원한 생명, 멸망
작성일 2012-09-27 (목) 19:05
분 류 나해
첨부#1 주일_복음나눔지47호-나해_한가위_추석명절.hwp (80KB) (Down:297)
ㆍ추천: 0  ㆍ조회: 3839      
IP: 121.xxx.242
http://missa.or.kr/cafe/?dominusdaysc3.915.12
“ 나해 한가위 추석명절;탐욕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탐욕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 말씀읽기: 루카12,15-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마음 안에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면 나는 유혹에 빠져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유혹에 빠져서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일에만 전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음에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즉 탐욕이 신앙을 눌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조심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으기에만 급급한 삶을 살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하느님 앞에 보물을 쌓는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2.1.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12,13)라고 청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재물에 대한 “도가 지나친 집착”은 재물만을 바라보게 만들고, 형제자매도 외면하게 만듭니다. 또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안전”과 “생명”을 유지하는 도구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12,15)고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탐욕으로는 연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해서 재물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세속적인 재물과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재물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물 때문에 멸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움켜잡은 물질들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베푼 것들, 내어 놓은 것들이 나를 의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알아야 합니다.

 

2.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① 많은 소출을 거둔 부자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오로지 풍요로운 현세의 삶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니 욕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에 만족하고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유혹은 그렇게 다가와 한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루카12,17). 이렇게 많은 재물 때문에 고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하는 고민과 행동은 지극히 당연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이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것을 활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내 구원을 위해서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 더 큰 곳간들을 지으려는 부자

부자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카12,18)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곳간들을 헐어 낼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많은 곡식과 재물들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다른 이들과 나눌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보관 방법만을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손도 그의 곡식 창고가 될 수 있었으나 그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도 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내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것을 내어 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도 보물창고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③ 재물만을 믿고 의지하는 부자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12,19). 이제부터 놀면서 마시고 먹고 즐기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내가 쌓아둔 재물을 먹고 마시지 않습니다. 영혼의 음식은 기도입니다. 영혼의 음식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없으면 영혼은 메말라 가고,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내 옆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내어 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고, 그 내어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나눔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이들은 결코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만을 챙기려 합니다. 분명히 충분히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삶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④ 하느님의 심판

많은 재산과 재물을 가지고도 어리석은 삶을 살아간 부자에게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하느님께서는 이 부자에게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죽으면 그 많은 재산들은 누구의 차지가 될까요? 그것을 저승에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이제 내 문제가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죽어서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재산에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에 집착할 것인가? 쓰고,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갈 것인가? 움켜잡고만 살아갈 것인가?” 이제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요?

 

2.3.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

탐욕을 조심하는 사람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12,21)은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버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인색하고, 형제자매들에게도 인색합니다. 착한 행실로 하느님 앞에 덕을 쌓으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재물의 노예가 되어 영원한 삶에서 멀어져 갑니다. 나에게 있는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의 수단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형제자매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나만 보게 만들며, 내 가족만 보게 만듭니다. 그러니 움켜잡게 되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은 푸르름이 시들고, 아름다움이 지게 될 때, 그때는 후회하게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야서 40,8)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혹시 내가 이런 어리석은 부자는 아닐까요? 나는 무엇을 신경 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③ 만일 이 어리석은 부자가 나였고, 하느님께서 1년의 시간을 더 주신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4. 실천사항

①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 보기

② 지금까지 재물에 대한 나의 생각을 돌아보고,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재물의 멋진 관리자가 되기

③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심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65
작성자 시메온의 노래
작성일 2012-01-19 (목) 20:53
분 류 나해
첨부#1 주일_복음나눔지11호-나해_주님_봉헌축일.hwp (69KB) (Down:286)
ㆍ추천: 0  ㆍ조회: 4366      
IP: 121.xxx.242
http://missa.or.kr/cafe/?dominusdaysc3.910.12
“ 나해 주님 봉헌 축일;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는 요셉과 마리아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1. 말씀읽기:루카2,22-32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봉헌축일을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로서, 이날 교회는 봉헌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합당하게 오롯이 주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그리고 이날 제단에서 사용할 초와 각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성하여 한 해 동안 제단과 가정의 “기도상”을 밝히게 됩니다. 초를 축성하여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하고, 그 초를 통하여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시메온의 삶이 내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레위기(12,2-8)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여자가 아기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3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아기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4 그리고 그 여자는 피로 더럽혀진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삼십삼 일 동안 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몸이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찰 때까지, 거룩한 것에 몸이 닿거나 성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6 몸이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차면, 아들이나 딸을 위하여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바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져와서 사제에게 주어야 한다. 7 사제는 그것을 주님 앞에 바쳐, 그 여자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그러면 피로 더럽혀진 그 여자의 몸이 정결하게 된다. 이것이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를 낳은 산모에 관한 법이다. 8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올려도 된다. 그리하여 사제가 그 여자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면, 그 여자는 정결하게 된다.’”

이렇게 여자가 사내아기를 낳으면 7일간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고서도 그 후 33일간 축성된 것을 만질 수 없었고,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40일째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정결예식을 받아야 했는데 여자 아이인 경우는 부정 기간이 80일이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출산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맏아들을 속량할 때 부모나 아기가 성전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에 그러한 규정들을 의무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받아들였고, 지켰던 것 것입니다.



또한, 첫 아들은 주님에 의해 축성되고, 속세를 떠나서 사제로서 오로지 하느님을 섬겨야 했는데1),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제직을 레위인들에게 한정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첫아들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권리를 기억하도록 하려고 첫 아들은 성전에 봉헌하게 하셨고, 5세겔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속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레위기에 의하면(레위기12,6-8) 여인은 정결례의 제물로 일년 된 양 한 마리와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바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또는 집비둘기를 바치면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무척 가난한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정결례를 치룰 필요도 없었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새삼 하느님께 봉헌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가정은 율법대로 모든 것을 실천했습니다. 커다란 겸손과 순명을 나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또한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메온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메시아에 의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이사40,1,61,2). 또한 랍비들도 메시아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는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본당에서 나이가 든 형제자매님들은 하느님 구원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고, 그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치하고, 주변의 신앙인들을 주님 안으로 모아들이는 삶, 그 삶이 교회 안에서 원로의 삶이고, 그 삶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시메온의 모습은 봉헌생활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하느님을 위해서 한 생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봉헌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 안에서 살아가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봉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봉헌생활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신앙인들도 자신을 오롯하게 주님께 봉헌하며, 의롭고 독실한 자세로 직장 생활에 임하고, 가족을 돌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봉헌생활은 독신이 훨씬 수월하지만, 가정을 꾸리며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더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도 시메온의 삶처럼 그렇게 만들도록 노력해 봅시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많은 히브리인들은 그 당시 “위로”(구원)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이에 대하여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고서, 죽기 전에 메시아를 만나 뵈올 수 있는 위로를 받으리라고 약속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한 생을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살아가면서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뵙기 위해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성체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며, 가난한 이웃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알아 뵙기 위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자비를 베풀어 줍니다. 시메온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내가 주님을 알아 뵐 수 있도록 약속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주님을 뵙고, 주님께 영광 드릴 수 있도록 일상생활을 더욱 기도 안에서 살아갑시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시메온.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뵈올 수 있는 축복과 메시아를 만지고 품에 안을 수 있는 은총을..., 그리고 시메온은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눈으로 손으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금을 캐는 사람이 금맥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쁠까요?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헤맨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것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제 시메온의 찬양을 들어봅시다. 성무일도 끝기도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루를 마치면서 바치는 이 기도. 나의 매일 밤 기도가 된다면, 시메온의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하며 잠자리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뵙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시메온은 바랄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으니 “이제 평안히 죽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요, 가장 큰 은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기쁨이요 은총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갈까요? 혹시 엄청난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은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체성사로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의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사랑을 고백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요?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참으로 멋진 시메온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 또한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시메온은 이 고백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고, 주님의 다양한 모습을 두 눈으로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딘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너는 네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지 않느냐? 그러니 굳게 믿고, 감사드리거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2)입니다.”

시메온의 두 팔에 안겨 계신 메시아는 시메온 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메시아께서는 세상 모든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니,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을 비춰 주시는 계시의 빛이시며, 구원은 유다인들로부터라는 원칙을 지키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유다인으로 오신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누구신지가 드러났고, 우리에게는 계시의 빛이시며, 영광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제단에서, 나의 “기도상”에서 빛을 발하는 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헌생활을 하는 모든 이와, 봉헌생활을 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이렇게 주님을 본받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서 주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자신을 봉헌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을 존중하고, 본받으려 노력하며, 그 삶 안에서 주님의 구원을 내 눈으로 본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③ 주님봉헌축일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나를 참되게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시다.


4. 공지사항

① 축성된 초를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하기

② 봉헌생활 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성화를 위해 미사 봉헌하기

③ 지금 주어진 내 삶 안에서 봉헌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해 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64
작성자 깨어 있어라
작성일 2012-01-19 (목) 19:16
분 류 나해
첨부#1 주일_복음나눔지9호-나해_설명절.hwp (48KB) (Down:329)
ㆍ추천: 0  ㆍ조회: 4133      
IP: 121.xxx.242
http://missa.or.kr/cafe/?dominusdaysc3.909.12
“ 나해 설 명절;루카12,35-40 ”
 

깨어 있어라

1. 말씀읽기: 루카12,35-40 깨어 있어라 (마태 24,42-44)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설”은 묵은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입니다. 우리 민족은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둔 새 옷(설빔)으로 갈아입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어제의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어른에게 세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함께 성당에 모여서 조상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주심에 감사하고, 지난 한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올 한해도 성실하게 깨어 신앙생활을 하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신앙인들은 “긴 기다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루카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멀지 않은 장래에 곧 오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교회의 시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 활동을 성취하신 때부터 영광 중에 오실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동시에 그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멀지 않은 장래에 오시리라고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기본자세는 또한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지금 나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깨어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 첫 번째 자세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라는 이야기는 소아시아의 옷을 만드는 법과 입는 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의 옷은 길었기 때문에 여행을 할 때나 활동을 할 때에 옷자락을 들어 허리에 띠를 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한 준비 혹은 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밝은 데서 잘 보며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항상 기다리고 있는 종들처럼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세상 사물에서 이탈해야 할 것이며, 모든 소망을 하늘나라에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치신 후, 지금은 착한 뜻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이십니다.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기다리는 사람의 두 번째 자세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인은 밤늦게 혼인잔치를 벌이는(마태25,1)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영접하기 위해 종들은 등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주인이 집을 비우고 있을지라도 돌아오는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해 모두 밤을 새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요,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깨어서 영접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도 그분이 언제 오실지는 알지 못합니다.

예전에 부모님이 장에 가시면 아이들은 부모님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장에서 맛있는 것을 사오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부모님들이 혼인집에 가시면 꼭 주머니에 사탕이며 떡 등을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님이 언제 오시나 졸면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생각나시죠? 어릴 때 나의 모습을(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 부모님께 전화 한번 드리세요.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먹을 것을 주섬주섬 싸오셨잖아요. 지금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안할 텐데 말입니다).



깨어 기다린 아이들이 사탕과 떡 등을 받아먹는 것처럼, 예수님을 깨어서 기다린 제자들도 주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축복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랑 전혀 다릅니다. 종이 주인을 맞이하고 대접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인이 종을 대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깨어 기다린 이들에게 당신 영광의 혼 몫을 부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을 영예롭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제 보상이 따릅니다. 깨어 기다리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받을 상이 더 할 나위 없이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인은 그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님이 그의 종처럼 처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어 있는 이들에게 당신 영광의 한 몫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환영하여 맞아들이는 이들을 위한 잔치에 비유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손님(깨어 기다렸던 자녀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처음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무뎌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되고, 누가 열심히 하려하면 비웃거나 방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찰과 통회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하고 언제나 처음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날에 큰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또한 은총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해야 될 몫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예전에 신문에 자신의 개를 위해서 막대한 수술비를 지출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좋은 애완용 개도 아니었지만 그가 퇴근을 해서 대문을 열면 항상 그 개가 반겨 줬다고 합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쪽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은 그 개처럼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공부하기에 바쁘고, 아내는 텔레비전이나 모임에 바쁘고, 그리고 더러는 피곤해서 먼저 잠자리에 누워 있고...., 그래서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맞아 주던 존재가 개였기에 그 개가 아팠을 때 막대한 돈을 들여서 그 개를 고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향했던 그 마음이 보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1)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2)

늦게까지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해주겠습니까? 나를 기다려준 것에 대한 기쁨을 어떻게든 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기다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상을 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림은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주님을 기다림 = 행복).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은 늘 깨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도둑은 기초 없이 맨땅에 세워진 집의 담 밑에 구멍을 파고 들어오려 할 때, 집주인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정확히 안다면 틀림없이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서 준비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내 옆에 있는 이들도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삶. 깨어 있는 삶. 그 삶은 다른 이들도 깨어 있게 만들어 줍니다.



설은 설래 이면서 맞이하는 명절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기쁨도 있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기쁨도 있으며, 작년에는 하지 못한 것을 올 해는 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을 맞이하여 더욱 깨어 있는 삶을 다짐하며,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내가 되어 보도록 노력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깨어있는 삶(늘 준비하고 있는 삶)은 어떤 삶이며, 내가 주님께 바라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③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내가 복을 빌어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이고, 나는 또 어떤 복을 청하고 있습니까?



4. 실천사항

① 부모님께 세배 배 드리고,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② 자녀들의 세배를 기쁘게 받아주고, 자녀들에게 복을 빌어 주기.

③ 새로운 한 해에 감사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 몇 가지 결심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63
작성자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작성일 2009-11-13 (금) 23:09
분 류 나해
첨부#1 주일_복음나눔지55호-나해_연중_제_34주일_그리스도왕_대축일.hwp (75KB) (Down:270)
ㆍ추천: 0  ㆍ조회: 4120      
IP: 121.xxx.178
http://missa.or.kr/cafe/?dominusdaysc3.749.12
“ 나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 그리스도왕 대축일 -

1. 말씀읽기: 요한18,33-37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참된 임금님으로 섬기겠노라고 다짐하는 축일입니다. 전례력 안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며,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왔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어 빌라도와 대화 하십니다. 빌라도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낮추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님의 백성인 나도 주님을 따라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1. 빌라도의 심문: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본시오 빌라도! 그는 유다의 총독으로서 그리고 로마제국의 고위급 관리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판결을 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명예스럽게 “사도신경”에도 등장하게 됩니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명예롭게 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로마의 기사계급 출신으로서 티베리우스 12년에 유다의 총독으로 파견되었으며, 유다의 제5대 총독으로서 10년간 통치하였습니다(서기26-36). 그는 본성적으로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잔인하고 또한 뇌물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며 도둑질과 폭행을 일삼고 재판 없이 사형을 시키고 극도의 잔인성을 끊임없이 발휘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당신의 유다인의 임금이오?”(요한18,33)라고 묻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예수님을 정치적 반란죄, 곧 메시아를 사칭한 죄로 빌라도에게 고소를 했습니다. “유다인들의 왕”이라는 칭호는 비유다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 박해와 정치적 압박 등으로 말미암아 메시아에 대한 희망은 점점 고조되었고, 이 희망은 자유와 해방과 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고, 그 모델은 다윗왕조였습니다.

 

2.2. 예수님의 반문: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빌라도는 “유다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정치적인 힘으로 구원할 메시아냐?”라고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요한18,34)고 되물으셨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와 “아니다”로 대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도 유다인들처럼 그렇게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생각도 없었고,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기에,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도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히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유다인들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서 한 지역을 다스린다는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고, 하느님을 섬기고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2.3. 빌라도의 질문: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빌라도는 유다인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을 고발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가 이런 심판을 진행시킬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호칭만으로 단죄를 하기에는 충분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요한18,3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위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고, 의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용서하셨으며, 율법을 완성하셨고,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들의 잘못과 위선이 드러나니까 정치적인 안정을 핑계 삼아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함하였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모욕과 음모로 값아 드렸습니다.

 

2.4.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권능으로 세상을 정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힘으로 세상을 뒤엎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희생재물이 되시어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의 재물이 되시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제사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셨습니다. 그래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18,36)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국은 세상의 권력에 의해서는 결코 건설되지 않으며 사랑과 자비로 통치하시는 나라이며, 믿음을 통해서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방식과 다릅니다. 정치적인 힘은 인간을 구속하고, 그 힘을 지속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통제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왕국은 참된 자유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통치야 말로 인간에게 참된 자유와 신뢰를 줍니다.

 

그런데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우리의 물리적인 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두려워했으며 말과 정신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사상과 언어의 자유를 훨씬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정신의 힘은 빈껍데기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통치방식에 온전히 순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참된 임금님으로 섬긴다면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기쁘게 헌신하고 순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당신 사랑을 펼치실 것입니다.

 

2.5.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요한18,37)하고 묻습니다. 빌라도의 이 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요한18,37)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요한18,37).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참되게 기도하며 하느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나를 이끄시어 예수님을 참된 임금님으로 섬기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진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증인이며,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진리에 속한 사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왕국 편에 선 사람은 누구일까요?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빌라도가 진리 편에 선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 것과 같이 진리 편에 선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차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진리 편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나는 진리 편에 선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내가 참으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인지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빌라도가 진리 편에 선 사람이었다면 결코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진리편에 선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할 것이며,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된 나의 왕으로 모시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으로, 진리 편에 선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깁시다. 그래서 주님의 통치방식인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 온전히 따르는 내가 되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빌라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점은 무엇일까요? 만일 내가 빌라도였다면 예수님께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요? 그리고 감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빌라도처럼 무엄하게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③ 진리 편에 선 사람은 어떤 사람들 입니까? 내가 진리편에 서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4. 알림

① 주님의 통치방식인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살아가기

② 진리 편에 설 수 있도록 굳은 의지를 가지기

③ “예”와 “아니오”를 정확하게 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123456789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