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독서   신약성경 거룩한 독서
       
 
전체글 보기  
       
 bibleold
구약성경묵상
편안하게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십계명 2
작성일 2012-03-10 (토) 21:30
분 류 탈출기
ㆍ추천: 0  ㆍ조회: 1300      
IP: 121.xxx.242
http://missa.or.kr/cafe/?bibleold.73.
“ Re..탈출기20,1-17 ; 십계명 ”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1)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은 쉬셨고, 그날을 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기에 안식일 다음날을 주님의 날로 고백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백성들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그날 쉬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해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 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셨다면 그 안식일은 없는 것이고, 쉴 수 있는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쉬면서 자신들이 쉴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종살이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종들과 집짐승들과 이방인들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쉴 수 있고, 종들이 쉬어야 집짐승들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쉬면서 그 쉼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날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 입니다. 한 주간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복을 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내가 주일을 지킬 때,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주일을 지키고, 내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때, 내 옆에 있는 이들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주일은 자녀들과 함께 밀린 일들을 하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그걸 가르치면 어느 순간 자녀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방법은 ①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하고, ② 함께 기도하며, ③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고, ④ 한 주간의 나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며, ⑤ 가족과 함께하며 가족에게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⑥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운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⑦ 다시 새롭게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지낼 때, 내 옆에 이는 이들은 “역시! 신앙인들의 삶은 다르구나!”를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결코 신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가 이제 늙었다고 해서 멸시하거나 생존권마저 박탈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부모의 재산 때문에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늙은 부모를 모시기 싫다고 기타 시설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내 자녀도 나를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산 때문에 부모를 외면하면, 내 자녀들도 재산 때문에 나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참된 부모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공경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장 아까운 이웃인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그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고, 나는 내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 형제자매들의 생명도 내가 좌지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생존권을 박탈하는 모든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들은 생존권이 없었습니다. 때리면 맞아야 하고, 지배자들이 칼을 휘두르면 피할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또한 강제노역을 시키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행위입니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삶의 자리를 빼앗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행위인 것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렇게 약한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더 나아가 죽음에까지 몰아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당연한 것 말고도 형제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22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당연한 것을 넘어서 신앙인들은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랍비들도 자기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에게 피를 본 것과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움은 상대방을 말없이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미워한다는 것은 피를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순절 첫 금요일에 요한은 유다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에 가서 미사도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도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말했습니다. “야! 네가 뭔데 성당 가자 말자 하냐? 내 마음이 움직여야 성당도 가는 것 아니겠어! 너나 잘해. 그리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신앙을 권면하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유다는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니 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요한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이루어진 금요 봉사자 교육에 참례해서 교육을 받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봉사자 교육도 받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에이~ 바보야! 집에서 따뜻한 아름 목에 누워서 TV를 보면 얼마나 좋니!”하면서 요한을 멸시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의 삶을 멸시한다면 그 신앙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그에게 준비된 것은 상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또 절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았더니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감사헌금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한에게 “이 멍청아! 그 돈 있으면 멋진 술집에 가서 거하게 술 한 잔 할 수도 있고, 제주도로 3박 4일 골프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니!”라고 요한의 마음을 매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모세는 이웃에 대한 외부적인 범죄, 곧 살인, 약탈, 상해, 구타 등을 금지했을 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등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자의 양심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점차로 마비되어 가고 실정법이 금지하지 않으면 범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의 계명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살인뿐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이들이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노예살이 하던 히브리 인들에게는 인권이 없었기에 젊은 히브리 여성들은 지배자들에게 성적 약탈2)을 흔하게 당했습니다. 지금도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재력을 가진 이들이 지금도 자신의 힘과 재물을 이용하여 성을 취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자유를 찾은 히브리백성들은 자신의 힘과 재력을 이용하여 여성들을 향락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되기에 하느님께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을 가진 이들이 불륜을 통하여 자신의 가정과 상대방의 가정을 파괴합니다. 가정의 파괴는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오고, 공동체의 파괴는 하느님 백성의 파멸을 가져오기에 간음은 공동체 안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간음해서는 안 된다.” 는 계명은 남자우대(간음죄를 여자에게만 적용시킴)사상이 짙었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독신자나 비유다인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도 여자는 귀중한 재산목록에 속해 있었습니다. 십계명에도 이런 영향이 미쳐 재산,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간음을 금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은 단순한 간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충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5,28)

육체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면 간음한 것이니, 몸과 마음을 조심하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간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



예수님의 의도는 신체 절단 보다는 악한 마음의 뿌리를 없애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6계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차라리 피를 흘리는 희생과 고통이 있더라도 죄의 기회를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재산, 건강, 친구, 친척까지도 만일 나에게 죄를 짓게 할 원인이 된다면 그들과의 그런 관계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원은 모든 재산, 온갖 사랑보다 윗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아내를 버리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혼인법과 이혼법을 살펴 보면 쿰란 종파만이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서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을 쉽사리 허락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혼이란 언제나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사이계 율사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는데 간음, 풍기문란, 음식을 태우는 것, 계명을 어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따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무서워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아래에 있는 아내에게 이혼장을 던졌다고도 합니다.3)



바리사이들의 이혼 관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시어 이혼 불가를 선언 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오19,8-9)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그와 간음하는 것입니다.4) 또한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이혼을 단죄한 말씀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습니다. 유다교인들이 모세의 이혼법을 내세워 소박을 정당화하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창세1,27;2,24)을 내세워 예수님의 말씀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55년경 에페소에서 코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1코린7,10-16)5)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이혼해서는 안 되지만 부득이 이혼한 경우 재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비신자 부부 가운데 한편만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에는 신자 편에서 이혼을 주장해서는 안 되지만 비신자편에서 이혼하려고 하면 갈라서도 무방하다.”



70년경 이방계 신도들은 남편이 아내를 내보낸 다음 재혼하면 간음하는 것처럼, 또한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여자에게도 이혼하고 재혼할 권리를 인정한 로마와 그리스 사회에서나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는 법을 제정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일대 회개를 부르짖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유로 아내를 버릴 수 있을까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둘이 한 몸이 되는 비결을 익힐 수 있을까 궁리하라는 외침인 것입니다.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민할 때 간음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재물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생명과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계명6)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로 만드는 일7)을 금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군사를 이끌고 다른 부족이나 나라를 침략하여 사람들을 약탈해 가서 노예로 팔아버린 일이 과거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때 끌려가 노예로 팔려갔고, 아시아나 유럽의  노예시장의 노예 값이 조선 사람들 때문에 폭락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끌려갔습니다. 도둑질 중에서 가장 나쁜 도둑질은 바로 사람 도둑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들의 자유를 억압하여 그가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은 큰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냥 해보는 것일 수 있지만,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고, 생명까지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것을 누군가가 훔쳐 갔을 때 기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것도 존중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없다하여 남의 것을 훔친다면 사회는 온통 혼란과 폭력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둑질은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더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일등을 하는 학생이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문제지를 훔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주가를 조작하고,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힘 있는 자들과 훔친 것을 나눕니다. 그러므로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정책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법을 만드는 것도 도둑질이요, 그러한 정책을 방관하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또한 그러한 곳으로부터 금품이나 향응을 받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고, 자기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인 것처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것들은 어느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이 날아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빼앗은 것들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빼앗길 날이 오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가끔은 진실이 왜곡되고, 정의가 거짓에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다가 감옥에까지 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했다가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하며 입을 닫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명을 어기는 삶입니다. 입을 닫음으로써 진실이 막히고,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힘이 있는 이들은 잘못을 해도 무죄나 보석으로 풀려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사면이 되어서 다시 그 짓을 저지르는 경우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할 때, 히브리 노예들은 이집트에서 정당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오직 가난한 노예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억울하게 징역을 살거나 사형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진실이 통하는 사회, 진실이 승리하고 약자들이 보호받는 사회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이 승리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들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채우고, 또 채우려고 합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가진 이가 한 마리 양을 가진 이의 양을 빼앗는 것처럼, 그렇게 탐욕은 탐욕을 부르고, 탐욕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계명을 발견합니다. 구계명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와 십계명인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입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아내는 남편의 가장 중요한 소유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남편은 아내의 가족에서 지참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니, 그 남편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여자들이 혼자 살아가는 것은 어려웠기에 특별히 여성들은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5세기경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를 별도로 독립시켜 제 9계명으로 만들어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남의 재물을 탐내게 되면 내 것에 대한 만족이 떨어지고, 불행이 시작됩니다. 언제나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하고, 끊임없이 재물에 대한 욕망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탐욕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탐욕은 모함과 거짓이 난무하게 만들고, 사람의 생명도 가볍게 여깁니다. 제 정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들을 탐욕에 눈이 멀면 그것을 행합니다. 그렇게 정글사회가 된다면 결코 어느 누구도 편안한 삶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명이 완벽하게 지켜진 다면 그 사회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 가난한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 약자들 착취한다면 그 사회는 아직도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곳이며, 그 옛날 히브리 인들이 고통을 당하던 이집트사회 입니다. 원래 “히브리”라는 말은 어느 부족을 뜻한다기보다는 노예살이하는 사람들을 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바로 “히브리”인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이 바로 파라오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잘 지켜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기에 사랑과 정의가 넘쳐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이들의 가정을 존중하며, 각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십계명을 정리해 보고, 내가 잘 지키고 있는 계명은 어떤 계명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삶이 필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봅시다.



4. 실천사항

① 계명을 거룩하게 지키기.

②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86    
예레미야서
예레33,1-26-미래의 영광스러운 회복 정의의 싹, 메시아 2012-12-01 7475
  85    
열왕기1,2
2열왕 4,42-44;백 명을 먹인 기적 엘리사 예언자 2012-07-23 1096
  84    
예레미야서
예레 23,1-8;미래의 임금 메시아 주님은 우리의 정의 2012-07-20 1183
  83    
아모스,오바드야
아모7,10-17;아모스가 베텔에서 쫓겨나다, 거짓 예언자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 2012-07-10 1557
  82    
에제키엘서
에제2,1-10;에제키엘이 소명을 받다 부르심, 예언자의 자세 2012-07-09 1105
  81    
이사야서
이사야49,1-7;'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2012-07-06 1660
  80    
지혜서
지혜1,1-2,24;하느님을 찾고 악을 피하여라 생명과 죽음 2012-07-04 1199
  79    
에제키엘서
에제키엘17,1-24;불충한 임금을 비유한 노래 치드키야와 네브카드네자르 2012-06-16 1201
  78    
탈출기
탈출기 24,1-11;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다 계약의 피 2012-06-13 1619
  77    
신명기
신명4,32-40;주 하느님의 위대함과 선택받은 이스라엘 하느님의 사랑 2012-06-02 996
  76    
이사야서
이사야50,4-11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2012-03-31 1554
  75    
예레미야서
예레미야31,1-40 ;슬픔과 위로, 그리고 새 계약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2012-03-24 1100
  74    
예레미야서
   Re..예레미야31,1-40 ;슬픔과 위로, 그리고 새 계약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다. 2012-03-24 1397
  73    
역대기1,2
2역대기36,11-23 ; 치드키야의 유다 통치 안식일,희년,네브카드네자르 2012-03-14 1344
  72    
탈출기
탈출기20,1-17 ; 십계명 계명을 지키는 삶 2012-03-10 1470
  71    
탈출기
   Re..탈출기20,1-17 ; 십계명 십계명 2 2012-03-10 1300
123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