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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계약의 피
작성일 2012-06-13 (수) 07:52
분 류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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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출기 24,1-11;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다 ”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다

1. 말씀읽기: 탈출기 24,1-11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을 데리고 주님에게 올라와, 멀찍이 서서 경배하여라. 2 너 모세만 주님에게 가까이 오고 다른 이들은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 백성은 아예 산으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 3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 5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6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7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8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그들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었다. 그분의 발 밑에는 청옥으로 된 바닥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맑기가 꼭 하늘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령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말씀연구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는 것은 무엇을 바래서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지켜야 하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아쉬움이 있어서 인간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돌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예”하고 따라야 합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을 데리고 주님에게 올라와, 멀찍이 서서 경배하여라. 2 너 모세만 주님에게 가까이 오고 다른 이들은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 백성은 아예 산으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십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므로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원로들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와 계약을 맺으시는 것이지, 모세와 단 둘이 계약을 맺으시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모세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 외에는 “멀찍이 서서 경배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느님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가까이에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사제와 복사들만이 제단에 설 수 있습니다. 아무나 거리낌 없이 제단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성당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있음을 명심하면서 경건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3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는 주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주신 법규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자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주신 말씀이고 법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은 한 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하고 고백합니다.


4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을 맺으면 그 문서가 계약 당사자들 각자의 신전에 보관되었고, 주기적으로 읽어야 했습니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규정합니다. 이 백성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을 돌보시는 관계가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이 백성이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먼저 사랑을 베푸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섬김은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는 행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열두 지파를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우는데, 이 열두 기둥은 주님과 맺은 계약의 기념비입니다. 결국 이 계약을 통해서 열두 지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열두 지파 모두가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5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6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몇 젊은이들로 하여금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탈출기 19장 6절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19,6)고 말씀하셨는데, 사제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번제물을 올리고 친교 제물을 바치는 것을 통해서 사제직을 수행하는 민족이 될 것 이라는 약속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제단에 제물의 피를 바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제단과 접촉시킴을 통해 살아 계신 하느님과 죄를 지은 인간 사이에 생명의 통교가 복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7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8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모세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백성들에게 읽어주고,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라고 선포합니다. 피는 생명이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는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생명과 평화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계약을 맺는 것은 생명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평화를 위해 계약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섬기며, 받아먹고 마실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9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과 함께 올라갔다. 10 그들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었다. 그분의 발 밑에는 청옥으로 된 바닥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맑기가 꼭 하늘 같았다. 1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령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셨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은 하느님께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맞대고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는 것은 “놀라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보호하심에 의해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고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친교제는 제사에 참여한 이들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를 이루는 즐거운 식사로 끝을 맺습니다. 이사악과 이사악과 아비멜렉(창세26,26-31), 야곱과 라반 사이의 계약(창세31,54)도 똑같이 공동 식사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잔에 포도주의 형상에 당신 피를 담아 제자들에게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시며 나는 주님과 계약을 맺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이 노력을 통해 내가 얻고 있는 기쁨들은 무엇입니까?

 

② 하느님께서는 나의 자유를 구속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참된 평화를 주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하느님 안에서 얻게 된 생명과 평화에서 멀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4.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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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계명을 지키는 삶
작성일 2012-03-10 (토)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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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출기20,1-17 ; 십계명 ”
 

십계명

1. 말씀읽기: 탈출기20,1-17

1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말씀연구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인간에게 어떤 법도 공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고, 양심에 따른 삶을 살아가지 않는 이들이 발생하며, 공동체의 질서가 깨지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하였습니다.



십계명은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열 가지 계명으로 탈출기 20, 1-17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한 백성의 새로운 사회질서의 기준으로 삼도록 내려주신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지키며,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이들은 하느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구원을 주십니다.



이 계명은 당신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옭아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려 주신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느님을 섬기며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이 생명을 얻기 위하여, 공동체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10가지 계명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이 계명을 지켜야 하고, 이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지켜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고, 계명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1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1)을 하셨다.2)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느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은 큰 산이나 바다, 바위나 나무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 그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외의 모든 것들은 헛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서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을 기억해 본다면, 나의 온 생애를 이끌고 계신 하느님만을 당연히 섬겨야 함을 알게 됩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이 그러했듯이, 하느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구원을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고, 우상숭배는 고통과 멸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신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후에는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주님의 모상을 만들어 주님께 경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상이 주님 자체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상들을 만들었다고 해서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성상들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성상들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그 성상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 성상만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우상은 재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재물은 힘이 있어서 사람을 죽이게까지 하고, 자기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 재물을 섬길 때,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이 계명을 지킨다며 십자가에 고상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상 없는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 십자가는 구원의 도구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상 없는 십자가를 걸어 놓는 것이 오히려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3)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하느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 아낌없이 복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율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삶은 구원에 이르는 삶이고, 그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이도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써 놓고, 읽을 때는 엘로힘, 또는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속죄의 날 대사제가 한 번, 하느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원래 고대 히브리어 글자는 자음만 있고, 모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구약성경도 본디 자음만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히브리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내용의 의미에 따라 모음을 붙여서 읽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느님의 이름 “야훼”가 네 개의 자음으로만 즉 요드,헤,와우,헤(로마자로 쓰면 YHWH,הוהי) 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에는 “네 글자”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한편 유다 사회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을 받았습니다(레위24,16). 그런데 “모독한다.”라는 히브리어에는 “분명하게 발음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 유배시대 이후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4세기부터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송구하고 불경스럽고 또한 계명에 어긋나므로 성경을 읽다가 “야훼(הוהי)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 또는 엘로힘(하느님)이라고 읽는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속죄의 날에, 일 년에 단 한번 그 이름을 감히 발설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히브리인들은 아도나이(주님)라는 이름을 사용하거나 “이름, 하늘, 영원하신 분” 같은 대명사를 애용하였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에서는 “야훼”4)라는 단어를 “주님”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부른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에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거짓 맹세,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저주와 모욕을 퍼 붓는 말들...,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고, 하느님께 불경을 저지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고,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신앙인은 다르군,”이라는 소리를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 다녀도 소용이 없군.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다 그래?”하면서 모욕을 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개인만이 모욕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게시물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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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십계명 2
작성일 2012-03-10 (토) 21:30
분 류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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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탈출기20,1-17 ; 십계명 ”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1)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은 쉬셨고, 그날을 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기에 안식일 다음날을 주님의 날로 고백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백성들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그날 쉬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해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 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셨다면 그 안식일은 없는 것이고, 쉴 수 있는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쉬면서 자신들이 쉴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종살이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종들과 집짐승들과 이방인들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쉴 수 있고, 종들이 쉬어야 집짐승들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쉬면서 그 쉼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날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 입니다. 한 주간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복을 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내가 주일을 지킬 때,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주일을 지키고, 내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때, 내 옆에 있는 이들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주일은 자녀들과 함께 밀린 일들을 하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그걸 가르치면 어느 순간 자녀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방법은 ①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하고, ② 함께 기도하며, ③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고, ④ 한 주간의 나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며, ⑤ 가족과 함께하며 가족에게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⑥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운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⑦ 다시 새롭게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지낼 때, 내 옆에 이는 이들은 “역시! 신앙인들의 삶은 다르구나!”를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결코 신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가 이제 늙었다고 해서 멸시하거나 생존권마저 박탈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부모의 재산 때문에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늙은 부모를 모시기 싫다고 기타 시설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내 자녀도 나를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산 때문에 부모를 외면하면, 내 자녀들도 재산 때문에 나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참된 부모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공경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장 아까운 이웃인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그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고, 나는 내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 형제자매들의 생명도 내가 좌지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생존권을 박탈하는 모든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인들은 생존권이 없었습니다. 때리면 맞아야 하고, 지배자들이 칼을 휘두르면 피할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또한 강제노역을 시키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행위입니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삶의 자리를 빼앗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행위인 것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렇게 약한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더 나아가 죽음에까지 몰아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당연한 것 말고도 형제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22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당연한 것을 넘어서 신앙인들은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랍비들도 자기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에게 피를 본 것과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움은 상대방을 말없이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미워한다는 것은 피를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순절 첫 금요일에 요한은 유다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에 가서 미사도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도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말했습니다. “야! 네가 뭔데 성당 가자 말자 하냐? 내 마음이 움직여야 성당도 가는 것 아니겠어! 너나 잘해. 그리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신앙을 권면하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유다는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니 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요한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이루어진 금요 봉사자 교육에 참례해서 교육을 받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봉사자 교육도 받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에이~ 바보야! 집에서 따뜻한 아름 목에 누워서 TV를 보면 얼마나 좋니!”하면서 요한을 멸시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의 삶을 멸시한다면 그 신앙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그에게 준비된 것은 상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또 절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았더니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감사헌금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한에게 “이 멍청아! 그 돈 있으면 멋진 술집에 가서 거하게 술 한 잔 할 수도 있고, 제주도로 3박 4일 골프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니!”라고 요한의 마음을 매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모세는 이웃에 대한 외부적인 범죄, 곧 살인, 약탈, 상해, 구타 등을 금지했을 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등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자의 양심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점차로 마비되어 가고 실정법이 금지하지 않으면 범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의 계명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살인뿐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이들이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노예살이 하던 히브리 인들에게는 인권이 없었기에 젊은 히브리 여성들은 지배자들에게 성적 약탈2)을 흔하게 당했습니다. 지금도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재력을 가진 이들이 지금도 자신의 힘과 재물을 이용하여 성을 취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자유를 찾은 히브리백성들은 자신의 힘과 재력을 이용하여 여성들을 향락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되기에 하느님께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을 가진 이들이 불륜을 통하여 자신의 가정과 상대방의 가정을 파괴합니다. 가정의 파괴는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오고, 공동체의 파괴는 하느님 백성의 파멸을 가져오기에 간음은 공동체 안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간음해서는 안 된다.” 는 계명은 남자우대(간음죄를 여자에게만 적용시킴)사상이 짙었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독신자나 비유다인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도 여자는 귀중한 재산목록에 속해 있었습니다. 십계명에도 이런 영향이 미쳐 재산,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간음을 금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은 단순한 간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충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5,28)

육체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면 간음한 것이니, 몸과 마음을 조심하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간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



예수님의 의도는 신체 절단 보다는 악한 마음의 뿌리를 없애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6계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차라리 피를 흘리는 희생과 고통이 있더라도 죄의 기회를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재산, 건강, 친구, 친척까지도 만일 나에게 죄를 짓게 할 원인이 된다면 그들과의 그런 관계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원은 모든 재산, 온갖 사랑보다 윗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아내를 버리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혼인법과 이혼법을 살펴 보면 쿰란 종파만이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서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을 쉽사리 허락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혼이란 언제나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사이계 율사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는데 간음, 풍기문란, 음식을 태우는 것, 계명을 어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따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무서워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아래에 있는 아내에게 이혼장을 던졌다고도 합니다.3)



바리사이들의 이혼 관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시어 이혼 불가를 선언 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오19,8-9)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그와 간음하는 것입니다.4) 또한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이혼을 단죄한 말씀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습니다. 유다교인들이 모세의 이혼법을 내세워 소박을 정당화하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창세1,27;2,24)을 내세워 예수님의 말씀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55년경 에페소에서 코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1코린7,10-16)5)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이혼해서는 안 되지만 부득이 이혼한 경우 재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비신자 부부 가운데 한편만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에는 신자 편에서 이혼을 주장해서는 안 되지만 비신자편에서 이혼하려고 하면 갈라서도 무방하다.”



70년경 이방계 신도들은 남편이 아내를 내보낸 다음 재혼하면 간음하는 것처럼, 또한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여자에게도 이혼하고 재혼할 권리를 인정한 로마와 그리스 사회에서나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는 법을 제정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일대 회개를 부르짖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유로 아내를 버릴 수 있을까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둘이 한 몸이 되는 비결을 익힐 수 있을까 궁리하라는 외침인 것입니다.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민할 때 간음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재물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생명과 권리와 자유를 빼앗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계명6)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로 만드는 일7)을 금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군사를 이끌고 다른 부족이나 나라를 침략하여 사람들을 약탈해 가서 노예로 팔아버린 일이 과거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때 끌려가 노예로 팔려갔고, 아시아나 유럽의  노예시장의 노예 값이 조선 사람들 때문에 폭락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끌려갔습니다. 도둑질 중에서 가장 나쁜 도둑질은 바로 사람 도둑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들의 자유를 억압하여 그가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은 큰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냥 해보는 것일 수 있지만,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고, 생명까지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것을 누군가가 훔쳐 갔을 때 기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것도 존중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없다하여 남의 것을 훔친다면 사회는 온통 혼란과 폭력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둑질은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더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일등을 하는 학생이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문제지를 훔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주가를 조작하고,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힘 있는 자들과 훔친 것을 나눕니다. 그러므로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정책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법을 만드는 것도 도둑질이요, 그러한 정책을 방관하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또한 그러한 곳으로부터 금품이나 향응을 받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고, 자기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인 것처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것들은 어느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이 날아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빼앗은 것들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빼앗길 날이 오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가끔은 진실이 왜곡되고, 정의가 거짓에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다가 감옥에까지 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했다가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하며 입을 닫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명을 어기는 삶입니다. 입을 닫음으로써 진실이 막히고,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힘이 있는 이들은 잘못을 해도 무죄나 보석으로 풀려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사면이 되어서 다시 그 짓을 저지르는 경우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할 때, 히브리 노예들은 이집트에서 정당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오직 가난한 노예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억울하게 징역을 살거나 사형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진실이 통하는 사회, 진실이 승리하고 약자들이 보호받는 사회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이 승리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들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채우고, 또 채우려고 합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가진 이가 한 마리 양을 가진 이의 양을 빼앗는 것처럼, 그렇게 탐욕은 탐욕을 부르고, 탐욕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계명을 발견합니다. 구계명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와 십계명인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입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아내는 남편의 가장 중요한 소유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남편은 아내의 가족에서 지참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니, 그 남편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여자들이 혼자 살아가는 것은 어려웠기에 특별히 여성들은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5세기경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를 별도로 독립시켜 제 9계명으로 만들어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남의 재물을 탐내게 되면 내 것에 대한 만족이 떨어지고, 불행이 시작됩니다. 언제나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하고, 끊임없이 재물에 대한 욕망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탐욕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탐욕은 모함과 거짓이 난무하게 만들고, 사람의 생명도 가볍게 여깁니다. 제 정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들을 탐욕에 눈이 멀면 그것을 행합니다. 그렇게 정글사회가 된다면 결코 어느 누구도 편안한 삶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명이 완벽하게 지켜진 다면 그 사회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 가난한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 약자들 착취한다면 그 사회는 아직도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곳이며, 그 옛날 히브리 인들이 고통을 당하던 이집트사회 입니다. 원래 “히브리”라는 말은 어느 부족을 뜻한다기보다는 노예살이하는 사람들을 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바로 “히브리”인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이 바로 파라오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잘 지켜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기에 사랑과 정의가 넘쳐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이들의 가정을 존중하며, 각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십계명을 정리해 보고, 내가 잘 지키고 있는 계명은 어떤 계명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②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삶이 필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봅시다.



4. 실천사항

① 계명을 거룩하게 지키기.

② 계명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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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분
작성일 2011-11-18 (금) 23:21
분 류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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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121.xxx.242
http://missa.or.kr/cafe/?bibleold.53.2
“ 탈출기22,20-26 ;약자 보호법 ”
 

약자 보호법

 

1. 말씀읽기: 탈출기22,20-26

20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21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22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23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24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25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26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 말씀연구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때, 세상은 행복해지고, 밝아집니다. 하지만 그 배려가 사라지고 경쟁과 이기심이 고개를 들고 자리를 잡게 되면 “삭막한 세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세상은 남을 배려하는데서 옵니다. 그리고 그 배려는 내가 받은 배려와 사랑을 기억할 때 나 또한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그럽지 못한 이유는 내가 받은 사랑과 자비를 모두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비자비한 종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 행동을 돌아보고, 내 행동 때문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행동을 통하여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 또한 행복해 질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것을 기억하게 만드십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긴 종살이를 했습니다. 사내아이들은 죽어야 했고,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자비로 출애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을 당했으니 “당연히 너희도 당해야 한다.”라는 식의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억압당하고, 학대당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내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집살이를 해 본 사람이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오히려 자신이 당한 것 보다 더 심한 대접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상을 받고 싶어서이고,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선한 감정이나 너그러움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지는 시련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감정을 잊어 버렸기에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것들을 한 없이 주시고도 계산하지 않으시고, 더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받은 만큼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21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22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고아와 과부는 나약한자들의 상징입니다. 의지할 곳이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고, 착취하면 착취를 당해야 하고, 억압하면 억압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탈출2,23) 모세를 부르시어 출애굽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비를 베풀 수 있고, 그래야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23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이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대해줄 때,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 받게 되는 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는 자들(마태25장 참조)이 가는 곳에 가서 울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판단한 그 잣대로 내가 판단 받을 것이며, 내가 단 그 저울로 내가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휘두른 그 칼로 결국 나도 죽고 내 가족들까지 죽게 될 것입니다.



24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가난한 이들이 돈을 꾸는 이유는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쥐고, 좌지우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손에 달린 것이니 그가 하느님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자를 물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돈을 빌리고, 또 이자를 갚느라 또 돈을 빌리게 되면 그들은 결코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손으로 히브리인들을 절망에서 건져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멸망으로 밀어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당연하게 요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당신 손으로 이끄신 백서이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25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26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가난한 이가 겉옷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이유는 먹을 양식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식사는 해결을 했지만 잠자리를 해결 못합니다. 왜냐하면 덮을 이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는 덮을 이불이 없기 때문에 추운 밤을 떨면서 기도하게 될 것이고, 그 고통에 찬 절규를 하느님께서는 밤 새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결코 하느님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처지를 내가  만들었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나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 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보이는 이웃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3. 나눔 및 묵상

① 내 이웃의 어려움을 나는 어떻게 도와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의 어려움을 이웃은 어떻게 도와주었습니까?



②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어떻게 드러나야 할까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자비와 사랑을 베풀지 못할 때는 언제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4.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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